스튜어트 왕조(1603 ~1714) : 스코틀랜드 출신 왕위 계승
♣ 스튜어트 왕조(1603 ∼ 1714)
(1) 제임스 1세(1603 ∼ 1625)
(2) 찰스 1세(1625 ∼ 1649) - (청교도 혁명<1649>. 공화정 시대<1649 ∼1660> ) - (왕정복고<1660>)
(3) 찰스 2세(1660 ∼ 1685)
(4) 제임스 2세(1685 ∼ 1688)
(5) 메리 여왕(1688 ∼ 1694)와 윌리엄 3세(1688 ∼ 1702)의 공동 통치
(6) 앤 여왕(1702 ∼ 1714)
1603년 영국의 Elizabeth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절대주의는 엘리자베스시대를 정점으로 하여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여왕은 독신으로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사후에는 스코틀랜드왕 제임스가 혈연에 따라 잉글랜드왕을 겸하여 제임스 1세가 되고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는 1605년의 가이 포크스 등 카톨릭 교도의 화약음모사건을 계기로 카톨릭을 탄압하였으며, 엘리자베스시대부터 세력을 키워온 칼뱅파(派) 청교도도 박해하였다.
청교도가 많은 의회와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의 제임스의 대립은 뒤를 이은 찰스 1세 시대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1628년 의회가 공채(公債)나 조세(租稅)는 의회의 찬성을 요한다는 것, 함부로 백성을 체포 ·투옥하지 못한다는 것 등을 주요내용으로 한 권리청원을 통과시키자 왕은 의회를 해산시켰다. 왕은 재원조달을 위해 1640년에 의회를 소집하였으나 선출된 청교도가 이를 반대하자 곧 해산해 버렸다. 이것이 단기의회이다. 같은 해에 소집된 장기의회에서는 왕과 의회의 반목이 더욱 격화되었으며, 1642년부터는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의 국내전쟁이 일어났다. 이 내전은 1647년에 이르러 의회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나, 청교도는 온건주의 장로파와 급진주의 독립파 및 평등파로 분열하였다.
왕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파와 결속하고 각지의 왕당파의 지지를 얻어 다시 국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제2차 내전은 독립파와 평등파의 승리로 끝나 1649년(조선시대 효종1년) 찰스는 처형되고 올리버 크롬웰을 지도자로 하는 공화정부가 성립하였다.(크롬웰의 청교도 혁명
이 청교도 혁명으로 상원은 폐지되고, 장로파와 토지배분을 요구하는 빈농·군인·직인 등 평등파도 탄압되었다. 크롬웰의 정부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원정, 해운법에 의한 네덜란드의 제해권에 대한 도전, 에스파냐 함대의 타파 등 대외정책에서는 성공하였으나, 대내적으로는 엄격한 종교정책과 군사독재로 국민의 불만이 커졌다.
그가 죽자 1660년 의회는 신교의 자유, 마그나 카르타와 권리청원의 존중을 브레다 선언에서 맹세한 선왕의 아들 찰스를 망명처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이고 왕정을 부활시켰다.
새 의회는 소수의 장로파와 다수의 왕당파로 이루어졌으며, 다수파는 국교도만이 국왕이 될 수 있다는 심사율(審査律)의 제정을 비롯하여 국교주의의 재건에 주력하였으나,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은 찰스 2세와의 대립이 표면화하였다.
이윽고 의회는 카톨릭 교도인 왕제(王弟) 제임스의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휘그와 토리의 두 파로 분열·항쟁하였는데, 찰스가 죽자 신왕 제임스 2세는 카톨릭주의와 절대주의 정치의 부활을 꾀하여 휘그뿐만 아니라 토리와도 적대하였다.
두 파는 협정하여 1688년 제임스의 딸 메리와 그 남편 윌리엄을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여 여왕과 왕으로 만들었다(메리 여왕과 윌리엄 3세). 제임스는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이에 이른바 의회 내 국왕을 원칙으로 하는 명예혁명이 성립하였다. 왕은 의회의 승인 없이 법의 정지 또는 면제, 금전의 징수, 상비군의 유지 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한 권리장전(權利章典)이 이듬해 1689년(조선시대 숙종)에 의회를 통과하였으며, 그때부터 이는 마그나 카르타, 권리청원과 함께 영국헌법의 근간을 이루었다.
영국의 정치혁명의 시대는 끝나고, 윌리엄 3세는 제임스가 프랑스의 지원으로 복위(復位)를 꾀하자 1690년 네덜란드·독일·에스파냐와 협력하여 1697년의 강화 때까지 프랑스와 싸웠다. 전비조달 방법으로 1692년에는 국채제도가 시작되었으며, 1694년에는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되었다. 또 전비재원·화폐개주(貨幣改鑄)·무역차액·법정이자율 등의 문제를 두고 중상주의 논객들 사이에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윌리엄 치세의 말기인 1702년부터 의매(義妹) 앤의 치세인 1714년까지의 에스파냐 계승전쟁의 결과 영국은 에스파냐와 프랑스로부터 뉴펀들랜드·노바스코샤·허드슨만(灣) 지방·지브롤터·미노르카 등을 획득하였으며, 절대왕정 이래의 식민지체제를 확대하여 국내 상공업자의 이익을 증진하였다.
1714년 Ann 여왕의 죽음으로 Stuart 왕조는 끝나고 하노버 왕조로 바뀌었다
또 그 동안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었던 스코틀랜드와 합동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1) James 1세(1603 ~1625)
Mary Stuart의 아들로 스코틀랜드왕 James 6세가 되었으나, 1603년 Elizabeth 여왕이 죽자 영국 왕위를 겸하며, Stuart가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전제정치를 행하였고, 왕권은 신이 준 것이라 하여 번번히 의회의 결정을 어겼다.
제임스 1세는 덴마크 공주 앤과 결혼하여 찰스 1세를 낳았다.
그는 복잡한 종교를 해결하고 영국의 국익을 위하여 성공회를 영국국교로 하였다. 자신의 어머니가 카톨릭이고 영국 평민들 사이에도 많은 신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의 메리’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신앙의 자유는 허락하였으며, 교황 대신에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명령하였다.
청교도는 국회를 장악하고 있었고 또한 자신이 지배하는 스코틀랜드가 신교임을 감안하여 신앙의 자유를 주는 대신 예배는 국교인 성공회식을 다를 것을 명령하였으나 이것이 오히려 청교도와 카톨릭을 반발하게 한다. 결국 청교도는 성공회 예배방식을 거절하여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향하게 된다.
또 카톨릭은 그를 암살하려다 적발되어 심한 탄압을 받게 된다.
왕권신수설을 강조하고 절대왕정을 강화하려 하여 1622년 의회와 대립한 그는 처음부터 위대한 여왕의 뒤를 이었다는 부담감과 이를 현명하게 극복하지 못한 채 자기 멋대로의 정책을 꾀하다 생을 마치게 된다.
2) Charles 1세(1625 ~ 1649)
아버지의 왕권신수설을 신봉하여, 하원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청교도들을 탄압하여 국민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의회는 탄압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하여 법적으로 ‘국왕을 상대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라는 권리청원을 하여 1628년 왕을 굴복시키고 승인을 받아냈다.
그러나 1629년에 권리청원을 폐지하였고 이는 청교도 혁명의 원인이 되었다.
찰스 1세는 프랑스의 루이 13세의 누이 앙리에타 마리아와 결혼하였다. 카톨릭 신자인 왕비가 의회에서 탄핵될 것을 두려워한 그는 먼저 의회 의원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의회 의원의 체포는 실패로 돌아갔고 청교도 전쟁이 시작되었다.
청교도 전쟁은 의회파와 왕당파로 나뉘어 싸웠으며, 초반에는 왕당파가 승리하였으나 나중에는 크롬웰의 새로운 군대에 의해 패배한다. 이것을 청교도 혁명(1642 -51)이라고 한다.
크롬웰에 의해 포로가 된 찰스 1세는 결국 영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법정에서 왕은 신에게만 심판받을 의무가 있고, 인간에 의하여 심판받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으나 살인, 반역, 폭정, 사회에 해를 끼친 죄로 1649년 사형 당하였다.
3) Cromwell의 공화정 시대
그는 탁월한 재능과 강인한 성품, 그리고 경건한 칼뱅주의 신앙으로 사치를 금하였고 엄격한 정치를 펼쳤다.그러나 이는 국민의 불만을 가져오게 된다.
그는 Elizabeth 1세가 죽은 후에 쇠퇴의 길을 가던 영국을 잘 훈련된 군대와 엄격한 청교도식의 독재 정치로 부흥시켰으며 영국과 북아메리카 등에 청교도적 사고방식을 확대하여 유지하는데 기여하였다. 그의 청교도적 사고방식은 최근까지도 정치사회생활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는 네덜란드와 전쟁을 하려고 항해조례를 만들었다.
또 1653년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다스리는 호국경에 취임하였으나 1658년에 죽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1661년 Charles 2세가 송장을 복고하면서 아버지의 복수로 그의 시신을 꺼내어 죄수들의 처형장소 타이변에 내걸었다가 교수대 밑에 매장하였고, 해골은 웨스트민스터 사원 꼭대기에 그의 집권 말기까지 걸어두었다고 한다.
4) Charles 2세(1660~1685)
찰스 1세의 장남으로 아버지를 구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으나 1649년에 아버지가 처형되자 저항하는 스코틀랜드인들에 의하여 찰스 2세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프랑스로의 망명생활이 시작되었다.
크롬웰의 엄격한 청교도식 정치에 지쳐있던 민심은 다시 왕정복고를 부르게 되어 찰스 2세는 영국으로 돌아와 왕정을 복구하였다.
훤칠한 키에 재치가 있어 모든 것을 즐겼는데, 그 중에 왕을 위하여 의사 콘돔 대령이 콘돔을 만들었다고 한다.
왕은 침착하지 못하고 의회를 무시하였고 청교도들을 억압하였다.
이때 의회는 1673년 ‘심사율’이란 법을 통과시켰다.
또 1679년에는 ‘인신보호율’이란 것을 만들어 왕은 이유없이 국민을 체포하는 것을 제한하여 국민들의 자유를 지켰다.
이때 왕위 계승자인 제임스가 카톨릭신자이며 독재 스타일이라 의회에서는 법을 고쳐서 왕위 계승을 막아야 한다는 쪽과 전통과 법은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쪽이 맞서게 되어 정당이라는 것이 생기는 원인이 되었다.
제임스 편을 드는 왕당파(귀족, 목사, 지주)를 자유파들이 아일랜드의 해적같은 무리라는 뜻으로 토리즈(Tories)라고 불러 ‘토리당’이 되었으나 후에 보수당으로 바꾸었다.
제임스를 반대한 자유파(부호 상인, 청교도)를 왕당파들이 스코틀랜드의 청교도 무리라는 뜻으로 휘거모어즈(Whigamores)라고 불러 이것을 줄여 ‘휘그당’이 되었으나 후에 자유당으로 바꾸었다. 자유당은 1차 대전 후에는 인기를 잃어 없어지고 노동당이 대체하여 2대 정당이 되었다.
그가 영국 정부에 물려준 값진 유산 중 하나는 행정 통제의 굳건한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James 2세(1685 ~1688)
1664년 그가 보낸 함대가 미국의 ‘뉴 암스테르담’을 점령하여 그의 이름을 따라 암스테르담을 빼고 ‘뉴(New) 요크(York)'라고 바꾸었다.
그는 1673년 이른바 심사율에 의하여 위반하는 카톨릭 서약을 거부하며 모든 직책을 사임하여 자신의 입장을 공공연하게 밝혔다.
카톨릭신자인 그는 1660년 백작의 딸 앤과 결혼하였다.
국민과 지배자의 종교가 다른 모순은 항상 영국의 문제가 되었다.
그는 1688년에 신앙자유령을 재공포하였다.
이에 성공회의 켄터베리 대주교와 주교 6명이 신앙자유형의 철회에 대한 탄원서를 보내고 공개하였으나 왕은 이들을 선동죄로 고발하여 구속하였다.풀려난 7명은 왕위 계승권을 가진 메리의 남편 빌헴 공에게 군대를 이끌고 오라고 서한을 보냈다.
당시 네덜란드의 빌헴 공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견제세력으로 있을 만큼 강하였다.
1688년 그의 군대가 영국에 상륙하였고, 영국의 개신교 장교들과 딸 메리도 빌헴의 편이 되었다.
제임스는 전쟁을 할 의욕을 잃었고 이듬해에 아일랜드로 가서 항거하였으나, 1690년 아일랜드와 프랑스의 연합군이 패하여 복위의 꿈은 사라졌다.
1689년 명예혁명으로 네덜란드의 빌헴 공은 영국국왕(월리엄 3세)이 되었다.
그는 의회가 제출한 권리장전에 승인하였고 이에 의회는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과 같은 영국 의회를 만들었으며 명예혁명으로 의회와 국왕의 마찰은 끝났다.
6) Mary 2세(1689-94)와 William 3세(1689-1702)
제임스 2세의 딸 메리는 아버지와 종교에서, 종교 쪽을 택하여 남편이 영국을 침공하는 것을 허락하여 아버지를 쫓아냈다.
왕위에 오를 때에 혼자 오르기를 거절하여 남편과 함께 오르게 되어 영국 최초로 두 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영국 내에서 결정은 메리가 하였고 조언은 남편 네덜란드의 빌헴 공이 하였다.
임신이 불가능한 그녀는 남편의 외도에도 사이좋은 부부였다. 아버지 문제로 고민하였으며, 국민에게는 인기있는 여왕으로 32세에 천연두로 죽었다.
7) Ann 여왕(1705 ~1714)
언니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가 후계자가 없어 앤이 스튜어트 왕조 마지막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는 큰아버지의 권유로 프로테스탄트 교육을 받았다.
앤은 덴마크의 게오르공과 결혼하여 18번의 임신에도 5명만 태어났고 모두 어려서 죽어 후계자가 없었다.그녀는 온건주의자 플벗에게 후계자를 위임하고 죽었다.
플벗의 권장 하에 하노버 가문의 게오르크 루드비히(조지 1세)가 평화롭게 즉위하게 된다.
재위 동안 에스파냐 계승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1707년에는 스코틀랜드를 병합하여 대 브리튼 왕국을 성립하였다.그러나 전통과 역사가 완전히 합쳐지지 못하고 지금까지도 자기의 조국을 분리하여 말하기도 한다.
지금의 국기인 Union Jack은 잉글랜드의 국기인 직사각형 안에 바른 십자가(+)와 스코틀랜드 국기인 직사각형 안에 성 안드레 십자가(X)가 합쳐진 것이다.
그 처세는 영국 사상 빛나는 시대였으며 여왕은 평화주의자, 공공복지의 증진자로서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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