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사의 굴욕
카노사의 굴욕(Road to Canossa, Walk to Canossa, Humiliation of Canossa)은 1077년 1월 28일,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으로 가서 용서를 구한 사건을 말한다. 교회의 성직자 임명권인 서임권을 둘러싸고 독일왕과 교황이 서로 대립하던 중에 발생하였다. 교황권력이 황제권력보다 우위에 서게 되는 전환기에 벌어진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하인리히 4세는 굴욕을 맛보았으나 독일에서의 권력 장악에 성공한 후 1084년 로마를 탈환하여 교황을 폐위하며 복수를 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로마를 떠나 이듬해 망명지에서 쓸쓸히 객사하였다. 카노사 굴욕을 세속 군주가 굴욕을 맛본 대표적인 사건이라 한다면 14세기 초에 있었던 '아나니 사건'은 교황이 겪은 치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303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교황별궁이 있는 아나니에서 생포된 후 로마 귀족가문 출신 '시아라 콜로나'에게 빰을 맞았고 그 충격으로 인해 한 달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배경
개혁적인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재임 초기부터 강력한 교회 개혁과 쇄신운동을 펼쳤는데 당시 세속의 군주가 관습적으로 가지고 있던 성직자 임명권, 즉 서임권을 다시 교회로 가져오려고 시도하였다. 독일왕 하인리히 4세는 이에 반발하자 교황은 그를 파문하고 독일왕 하인리히 4세를 도와주는 귀족이나 사제도 파문하겠다고 경고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계속 대적하고자 했으나 이미 많은 독일 귀족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고 새로운 황제를 추대할 움직임이 있었다.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하인리히 4세는 어쩔 수 없이 교황에게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의미
이 사건으로 세속의 권력에 대해 교황권력이 항구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카노사 라는 이름은 세속적 권력의 기독교에 대한 굴복을 상징적으로 의미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 독일에서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독일 내 로마 가톨릭교회 세력에 대항해 이른바 ‘문화투쟁(Kulturkampf)’을 벌일 때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 않는다.”라고 연설했는데 이 말은 바로 이 카노사의 굴욕 사건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즉, 독일은 로마 교황청등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문화적·종교적으로 독자적인 길을 갈 것이라는 천명이었다.
한편 일부 이탈리아 역사가들은 카노사의 굴욕 사건을 북이탈리아에 대한 독일의 영향력이 쇠퇴하기 시작한 첫 번째 사건으로 간주한다. 교황으로 대표되는 이탈리아가 독일을 몰아내기 시작한 단초로 보는 것이다. 오늘날, 카노사라는 말은 일종의 굴복, 복종, 항복을 나타낸다. ‘카노사로 가다’라는 표현("go to Canossar"; 독일어: "nach Canossar gehen"; 스웨덴어: "Canossarvandring"; 이탈리아어: "andare a Canossar")은 하기는 싫지만 억지로 굴복해야 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말로 자주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