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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십자군의 실패, 제6차 십자군, 제8차 십자군, 교황권의 몰락, 아비뇽 유수

Jobs9 2021. 5. 22.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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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십자군의 실패

제5차 십자군

 

AD 1218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요청으로 프랑스와 독일 귀족을 중심으로 제5차 십자군이 구성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후신인 아크레 왕국의 장 드 브리엔느를 중심으로 이슬람교의 본거지가 된 이집트를 공략하여 AD 1219년에는 나일 강 근처의 다미에타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수를 만나 카이로로 진격하지는 못하고 말았고 결국 8년간의 휴전에 합의한 채 아무런 성과없이 철군하고 말았다. 제5차 십자군은 교황이 조직한 마지막 십자군이 되었다.

 

한편 당시 유럽에는 동방의 사제왕 요한의 전설이 퍼지기 시작했는데, 사제왕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시 방문한 세 명의 동방 박사 중 한 명의 후손으로 부유한 그리스도교 왕국의 군주로 덕을 갖춘 사람이었다고 전해졌다. 사제왕 요한 전설의 핵심은 궁극적으로 대군을 이끌고 십자군을 도와 이슬람 세력을 협공할 것이라는 것이었으나 실제로 대군을 이끌고 이슬람 세계를 붕괴시킨 것은 몽골 제국의 군대가 된다.

 

 

제6차 십자군

 

제6차 십자군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조직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십자군 원정을 조건으로 황제의 대관을 받았으나 이를 계속해서 이행하지 않아 파문당한 상태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AD 1228년에야 겨우 파문당한 채로 십자군을 일으켰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전투를 벌이기 보다는 외교적인 수완으로 예루살렘 탈환에 성공했다. 당시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이 그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일족과 알레포 및 다마스커스의 총독의 반란으로 위기에 빠져 예루살렘 방위에 여력이 없는 점을 이용하여 아무런 전투없이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의 지배권을 이양받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알 카밀 사후 그 아들인 살리흐가 예루살렘을 공격하면서 협약은 깨지고 만다.

 

 

제7차 십자군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이 죽은 후에 아들 살리흐가 AD 1244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키자 프랑스의 루이 9세에 의해 제7차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성왕이라는 호칭이 붙을 정도로 유능한 왕이자 독실한 그리스도교도인이었던 루이 9세는AD 1248년에 출정하여 이집트의 다미에타를 정복하였다. 이어서 카이로로 진격하던 중에 대홍수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었으나 AD 1250년까지 알만수라 성을 집요하게 공략하였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전염병마저 돌면서 퇴각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퇴각 도중에 추격하는 이슬람군에게 루이 9세가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나서야 겨우 석방된 루이 9세는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고 AD 1254년까지 이집트에 머물며 동쪽에서 이슬람 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하던 몽골군과 협력하기 위한 외교적인 노력과 함께 시리아의 그리스도교 도시들을 요새화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본국에서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어쩔 수 없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다. 

 

 

제8차 십자군

 

루이 9세는 AD 1269년에 다시 제8차 십자군을 일으켰다. 당시 이집트는 아이유브 왕조가 맘루크 왕조로 교체된 상태였다. 이번의 루이 9세의 전략은 튀니지를 중심으로 이슬람 세계를 양단시키는 것으로 AD 1270년 7월초에 튀니스 부근에 상륙하여 카르타고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전염병이 돌면서 큰 타격을 받았고 루이 9세 자신도 병에 걸려 같은 해 8월에 숨을 거뒀다. 루이 9세의 동생 샤를이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와 함께 아크레에 머물면서 십자군 원정을 계속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진 못하였다.

 

또 다른 십자군

십자군은 기본적으로 교황의 호소에 의해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감행된 동방원정군을 가리킨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직접적으로 성지탈환과는 상관없이 영지주의 이단을 토벌한 알비 십자군이나 발트해 연안의 원정을 감행한 북방 십자군까지 포함되기도 한다. 그리고 북방 십자군 중에서는 튜턴 기사단이 가장 유명하다.

 

알비 십자군

알비 십자군은 프랑스 알비를 중심으로 퍼진 '카타리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를 토벌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카타리파는 물질을 악의 근원으로 보아 신과 대립시키는 이원론과 개인적인 깨달음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영지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종파로서 AD 1176년에 프랑스 알비에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려져 '알비파'라고도 불렸으며 AD 11세기에 주로 랑그도크지역에 전파되었다.

 

로마 카톨릭으로서는 카타리파의 교의가 육체를 갖춘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부정하는 것이었기에 이를 이단으로 규정하였고 여러 차례 개종하도록 설득하였으나 효과가 없자 AD 1181년부터 AD 1229년까지 3차례의 십자군을 파견하여 토벌하였다. 하지만 알비 십자군은 이단에 대한 토벌 이외에도 프랑스 왕위 쟁탈전과 아라곤 왕국의 정치상황에 영향을 받는 등 정치적으로 이용당했고 토벌과정에서 최소 2십만명에서 최대 1백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잔혹하게 죽은 것으로 추산되기 때문에 후세에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카타리파는 AD 1254년 마지막 요새인 퀘리부가 함락되면서 완전히 붕괴되었다.

 

북방 십자군

북방 십자군은 덴마크와 스웨덴,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 독일의 튜턴 기사단에 의해 발트 해 연안을 점령하고 그 지역을 그리스도교화하기 위해 벌어진 일련의 군사활동을 지칭한다. 북방 십자군은 주로 발트해 연안을 공격하였기에 발트 십자군으로 불리기도 한다. 북방 십자군은 제2차 십자군 결성 당시 일부 독일 제후들이 제2차 십자군에 참여하는 대신에 북방 슬라브인을 정복하고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 것을 십자군 활동으로 인정받으면서 시작되었다. 공식적인 북방 십자군은 교황 첼레스티노 3세의 요청으로 AD 1193년에 시작되었다.

 

  

북방 십자군에 의해 핀란드는 AD 12세기에 스웨덴에 점령되었고 지금의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AD 13세기 초에 덴마크와 독일 십자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 중에서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의 잔혹함은 악명이 높았는데 지나친 잔혹행위로 많은 저항에 부딪친 끝에 세력이 약화되었다가 독일의 튜턴 기사단에 흡수당했다. 북방 십자군에 의해 발트 해 부근의 리보니아인, 라트갈레인, 에스토니아인, 핀족, 발트 프러시아인 등이 무력으로 굴복하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튜턴 기사단

 

튜턴 기사단은 성 요한 기사단, 성전 기사단과 함께 중세 3대 종교기사단으로 유명하며, 독일인으로 구성되었다고 하여 독일 기사단으로도 불렸다. 튜턴 기사단은 본래 십자군의 중요한 항구 거점인 아크레의 방위를 맡았으나 십자군 국가가 몰락하면서 AD 1211년 트란실바니아로 거점을 옮겼다. 이후 튜턴 기사단은 북쪽으로 이주해오는 그리스도교인들을 규합하여 AD 1233년부터 약 50년간 프로이센 지방의 정복에 나서 그 지역의 원주민을 거의 몰살시켰다. 그리고 독일 중부지방에서 농민을 이주시키고 폴란드와 독일의 귀족들을 끌어들여 강력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AD 1237년에는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을 흡수하여 프로이센에서 에스토니아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했다. 

 

한편 튜턴 기사단은 러시아 정교회 지역을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시키려고 시도하여 러시아 방면으로 침공하기도 하였으나 AD 1242년 노브고르드 공작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에게 패배하면서 이것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AD 1291년부터 시작된 리투아니아에 대한 처절한 원정 끝에 상당지역을 복속에는 성공하면서 튜튼 기사단이 지배하는 영토가 발트 해 연안의 쿠를란트, 리보니아, 에스토니아와 폴란드 단치히 지역, 동포메른 지방 및 독일의 중남부지역, 리투아니아의 사모기티아 등을 아우르며 북유럽의 최강의 세력이 되었다. 

 

이렇게 북유럽에서 성쇠를 구가하던 튜턴 기사단이었으나 AD 1525년 폴란드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프로이센과 리보니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영토를 잃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몰락하였다. 이후에도 일부 기사단령이 명맥을 유지하기는 하였으나 AD 180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에게 정복당하면서 결국 튜턴 기사단은 해체되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인 AD 1834년에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 기사단이 부활되었지만 옛 영광을 되찾지는 못했다. 그 후로도 명맥을 유지하던 튜턴 기사단은 AD 1929년에 명예 카톨릭 단체로 변신하면서 명예직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다. 

 

 

 

맘루크 왕조의 등장과 십자군 국가의 멸망

 

AD 1250년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리흐이 죽자 그의 아내 샤자즈 알 두르가 살리흐의 아들이었던 알 무잠 투란 샤와 불화가 발생하여 그를 살해하고 이집트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샤자즈 알 두르는 여성 통치자로서 부족했던 지지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노예출신 군사집단인 맘루크를 끌어들였고 결국 맘루크 총사령관인 아이바크와 재혼하여 맘루크 왕조를 창건하게 되었다.

 

이렇게 성립된 맘루크 왕조는 십자군 국가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AD 1268년 안티오키아 공국이 무너졌고, AD 1289년에는 트리폴리 백국이 멸망하였으며, AD 1291년 예루살렘을 잃고 아크레로 옮겨갔던 아크레 왕국마저 함락당하면서 팔레스타인 지방에 건국되었던 십자군 국가는 모두 멸망하고 말았다.

 

 

 

교황권의 몰락

 

아비뇽 유수

 

200여년에 걸쳐 신의 이름으로 진행된 십자군 원정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면서 교황의 권위는 크게 손상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프랑스의 필리프 4세(재위 AD 1268년 ~ AD 1314년)는 잉글랜드의 영토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군비를 마련하고자 교황의 동의도 받지않고 성직자들에게도 조세를 부담시켰다. 이를 교황권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여긴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성직자 재산에 대한 과세에 대해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하는 일련의 교령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필리프 4세도 AD 1303년 귀족, 중산층, 성직자의 모임인 삼부회를 최초로 소집하여 프랑스의 추기경단의 지지를 바탕으로 교황청과 이루어지는 모든 교역을 중단시키며 교황을 압박하였다.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필리프 4세에 대한 파문 칙서를 아나니에서 발표하려고 계획하였으나 필리프 4세의 명령을 받은 기욤 드 노가레의 급습을 받으면서 무산되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로마로 무사히 피신하였으나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 해 죽고 말았고 그 뒤를 이은 베네딕토 11세마저 재위 1년만에 갑자기 사망하면서 교황 자리를 둘러싸고 큰 혼란이 발생하였다.

 

이를 기회로 필리프 4세는 교황 선출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AD 1305년 클레멘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시켰다. 필리프 4세는 교황에 대한 자신의 우위권을 과시하기 위해 교황의 대관식을 로마가 아닌 프랑스 리옹에서 거행하도록 하였고 교황의 거처도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에 마련시켰다. 이렇게 하여 교황청이 로마가 아닌 아비뇽으로 옮겨진 시대가 AD 1309년부터 1377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것을 고대 유대인의 바빌론 유수에 빗대어 교황의 아비뇽 유수라고 부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아비뇽 유수 시기를 교황권의 몰락기로 간주한다.

 

 

유럽교회의 분열

 

AD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귀환하면서 아비뇽 유수기가 종료되었지만 교황의 권위에 더 큰 타격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AD 1378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죽자 그 후임을 두고 로마와 프랑스의 추기경단이 대립하여 동시에 2명의 교황을 선출시키는 이른바 '유럽교회의 분열'이 발생한 것이었다. 로마의 추기경들은 교황으로 이탈리아인이었던 우르바노 6세를 선출하였고 프랑스 추기경들이 아비뇽에서 자신들의 지도자인 클레멘스 7세를 대립교황으로 내세웠다. 여기에 프랑스와 오랫동안 대립해온 잉글랜드가 우르바노 6세에 대한 지지를 표방하면서 서유럽 교회 전체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클레멘스 7세 지지파와 이탈리아 및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한 우르바노 6세 지지파로 분열되었다. 2명의 교황과 그 후계자들이 서로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상대를 비난하였기에 일반 신도 사이에서도 엄청난 혼란을 발생하였다.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AD 1409년에 피사 종교회의가 열려 로마계와 아비뇽계 양측 교황 모두를 퇴위시키고 제3의 교황인 알렉산데르 5세를 선출하기로 결의하였으나 양측 교황 모두가 이를 거절하면서 로마계와 아비뇽계에 이어 공의회계 교황까지 동시에 3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더 큰 혼란만 발생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AD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가 열려 공의회가 교황의 권위를 앞선다는 '공의회 수위설'을 내세우며 수습에 나섰다. 공의회는 아비뇽계 베네딕토 13세를 폐위시켰고 로마계 그레고리오 12세를 자진사임시켰으며 그 후임으로 AD 1417년 마르티투스 5세를 선출하여 마침내 유럽교회의 분열을 종식시켰다. 하지만 오랜 대립으로 인하여 교황의 귄위에 심각한 손상을 초래하여 중세시대를 지배하던 교황권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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