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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의 시작, 흑태자 에드워드, 브레티니-칼레 조약

Jobs9 2021. 5. 24.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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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의 발발 원인

카페왕조 직계혈통의 단절

 

AD 12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프랑스내 잉글랜드 영토를 둘러싼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와 프랑스 카페 왕가의 대결은 프랑스 존엄왕 필리프 2세가 잉글랜드의 실지왕 존으로부터 프랑스 남서부의 기옌과 가스코뉴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를 탈환하면서 카페 왕가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필리프 4세(AD 1268년 ~ AD 1314년)는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고 과감한 정책을 펴면서 왕권이 크게 신장시켜 나갔다. 그러나 필리프 4세 사후 세 아들(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이 모두 단명했기 때문에 갑자기 카페 왕가의 직계혈통이 단절되었다. AD 1328년 카페 왕가의 마지막 왕인 샤를 4세가 3명의 딸을 남기고 죽었으나 프랑스의 오랜 법전인 프랑크족의 살리카 법전에는 딸이 아버지의 토지를 상속할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페왕가의 직계혈통이 단절됨에 따라 이제 누가 왕위를 계승해야 하는 지를 두고 프랑스 귀족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고 가장 강력한 후보로 필리프 4세의 동생 샤를의 아들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와 필리프 4세의 배다른 동생 루이의 아들인 에브뢰 백작 펠리페가 거론되었다. 이 둘은 모두 샤를 4세와 사촌지간이기도 했다. 결국 발루아의 필리프가 혈통상 샤를 4세와 좀더 가까웠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프랑스 왕위에 올라 필리프 6세가 되었고 그의 가문인 발루아 백작가에서 유래한 "발루아 왕조"가 시작되었다. 한편 필리프 4세 이후로 프랑스 왕이 왕위를 겸직하였던 나바라 왕국에서는 여성승계가 허용되었기 때문에 루이 10세의 딸인 잔느가 나바라 왕위를 계승하여 후아나 2세가 되었고 프랑스 왕위에서 밀려난 에브뢰 백작 펠리페가 후아나 2세와 결혼하여 공동왕인 펠리페 3세가 되었다.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3세의 왕위계승 요구

 

필리프 6세의 즉위로 프랑스 왕위에 대한 논쟁이 일단락되는 듯 했지만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분쟁이 발생했다. 비록 살라카 법전에서 딸의 상속을 금지했지만 그 딸이 낳은 아들에게는 상속권을 부여하고 있었는데 에드워드 3세는 이를 근거로 샤를 4세의 누나 이사벨의 아들인 자신에게도 프랑스 왕위 계승권이 있다는 논리를 내세운 것이었다. 프랑스 귀족들의 반발이 심했기 때문에 결국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기엔의 영주로서 필리프 6세의 즉위를 인정했지만 AD 1333년 에드워드 3세와 대립하던 스코틀랜드왕 데이비드 2세의 망명을 필리프 6세가 대대적으로 환영하면서 양국의 외교적 마찰이 일어나자 에드워드 3세는 다시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에드워드 3세는 유럽 최대 모직물 생산지인 플랑드르에 대하여 잉글랜드의 양모수출을 금지시켜 프랑스 경제에 타격을 주고자 하였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 왕가에서 보유한 기엔과 가스코뉴 지방의 영지에 대해 몰수를 선언하였다. 결국 AD 1337년 에드워드 3세가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후 백년간 벌어지게 되는 백년전쟁이 시작되었다.

 

백년전쟁의 시작

 

슬로이스 해전

 

에드워드 3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와 동맹을 맺고 신성로마제국의 영주인 에노 백작으로부터 군대를 고용하여 북프랑스 침입을 시도하였으나 필리프 6세가 전투를 회피하면서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전략을 바꿔 때마침 플랑드르에서 영주인 백작을 추방하고 자치정부를 세운 플랑드르 도시연합과 동맹을 체결하고 자금과 병사를 모으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도 잉글랜드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노르망디와 제노바 용병으로 구성된 해군을 모았고 양군은 AD 1340년 플랑드르 근처의 슬로이스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당시 해전은 선박을 서로 근접시켜 상대의 배로 뛰어들어간 뒤에 선상전투를 벌이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지상전과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향후 백년전쟁 중반까지 프랑스 기사단을 무력화시키게 되는 장궁병을 대거 포진시켰다. 전투가 개시되자 잉글랜드 함대는 바람을 받고 태양을 등지는 좋은 위치를 차지하였고 에드워드 3세는 친히 장궁병을 지휘하였다. 이에 반해 프랑스는 배의 닻을 내려 항구를 봉쇄하는 거대한 선상 요새를 구축하였고 통상적인 방법대로 병사들을 칼과 창으로 무장시키고 상대 함대로 뛰어들 준비를 시켰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어 저녁까지 치뤄졌으나 잉글랜드 장궁병의 원거리 공격이 큰 위력을 발휘하면서 결국 잉글랜드 함대의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 함대는 거의 모두 파괴되거나 나포되었고 잉글랜드 함대가 재해권을 장악하면서 프랑스 본토로 대대적인 상륙이 가능하게 되었다.

  

 

크레시 전투

 

AD 1340년 슬로이스 해전에서 잉글랜드가 승리했지만 재정문제로 전쟁은 잠시 휴전에 들어갔다. AD 1345년이 되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전쟁을 재개하였는데 아키텐에 군대를 보내어 필리프 6세의 군대를 붙잡아 놓은 후 다음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노르망디로 상륙하여 카엔과 블랑셰타크에서 프랑스 군대를 물리치고 파리까지 육박하였다. 그러나 필리프 6세가 남쪽의 아키텐에 투입한 병력을 회군시키자 어쩔 수 없이 에드워드 3세는 북쪽의 플랑드르로 철수하기 위해 프랑스군의 공격을 뿌리치고 솜므 강을 건넜다. 그러나 플랑드르에 도착하기 전에 프랑스 군을 뿌리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한 에드워드 3세는 칼레 남쪽의 크레시를 전장으로 선택하여 병력을 정비하고 프랑스군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예상대로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크레시에 도착하면서 양군은 격돌하게 되었다.

 

잉글랜드 군은 기사 4천명과 장창병 5천명으로 구성되었고 특별하게 웨일스에서 선발된 장궁병 7천명이 함께 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와의 전투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장궁병의 전술적 우수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들을 전투에 적극 활용하고자 크레시 근교의 언덕 위에서 포진시켰다. 그리고 기사들을 모두 말에서 내리게 하여 장창병과 함께 3개의 부대로 나뉘어 배치하였는데 그 중 한 부대는 당시 16살인 맏아들 동명의 에드워드에게 지휘를 맡겼다. 에드워드는 훗날 흑태자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해지게 된다. 보병대의 양쪽 옆에도 장궁병을 위치시켰고 근접전에 약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장애물들을 전방에 깔아 놓았다.

 

반면에 프랑스 군은 대부분이 중기병 기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기록에 따라 4만명에서 8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기사들을 보조하기 위해 6천명의 제노바 석궁병이 함께 하여 그들이 진형 앞부분에 위치하였고 프랑스 기사단은 뒷부분에 포진하였다. 본래 프랑스는 강행군을 해왔기 때문에 휴식이 필요한 상태였으나 프랑스 기사들이 자신의 힘을 과신하고 통제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의 통제에 어려움을 느낀 필리프 6세가 바로 전투를 개시하였다.

 

전투의 시작은 잉글랜드 장궁병과 제노바 석궁병의 사격으로 시작되었다. 비록 석궁이 장궁에 비해 사거리가 더 멀고 위력이 더 강했으나 제노바 석궁병이 1분당 3~5발 정도만 쏠 수 있었는 데 반해 숙련된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1분당 10~20발의 화살을 날릴 수가 있었다. 더욱이 잉글랜드 장궁병이 언덕 위에 포진하고 있어 장궁의 위력이 더 강해졌다. 결국 제노바 석궁병은 잉글랜드 장궁병이 쏘아대는 화살에 많은 사상자만 낸 채 퇴각하고 말았다.

 

이에 필리프 6세는 퇴각하는 석궁병의 처형을 지시하는 한편 프랑스 기사단의 돌격을 명령했다. 프랑스 기사단은 호기롭게 진형을 갖추고 돌진하였지만 크레시 주변이 경사와 진흙탕으로 진격이 원활하지 않은 데다가 미리 잉글랜드 군이 설치한 장애물 때문에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도 잉글랜드 장궁병은 쉴새없이 화살을 쏘았는데 비록 프랑스 기사들은 중무장 갑옷 때문에 어느정도 화살에 대한 대응이 가능하긴 했지만 너무 많은 화살공격을 받자 갑옷으로 보호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부상을 입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갑옷의 보호를 받지 못한 말들이 쓰러지면서 낙마한 기사들은 무거운 갑옷으로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기사단은 포기하지 않고 무려 16번이나 돌진하였지만 결국 잉글랜드 군의 진형을 무너뜨리지 못했고 밤이 되자 필리프 6세는 총퇴각을 명령하였다. 

 

프랑스 군이 퇴각하자 잉글랜드 군은 프랑스 군이 버리고 간 부상자들을 살펴보면서 몸값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살해했다. 크레시 전투 승리이후 잉글랜드는 항구도시 칼레를 포위하여 11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함락시켜 중요한 거점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페스트가 만연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에드워드 3세는 일시 휴전협정을 맺고 잉글랜드로 귀환했다.

 

 

흑태자 에드워드의 활약

푸아티에 전투

 

AD 1355년부터 잉글랜드 군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이번에는 잉글랜드 군을 에드워드 3세의 맏아들 에드워드가 지휘했다. 에드워드는 우드스톡 궁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드스톡의 에드워드라고도 불렸으나 흑태자라는 별명이 가장 유명하였다. 에드워드가 흑태자로 불린 이유는 그가 항상 검은색 갑옷을 착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프랑스에서 에드워드가 저지른 잔혹한 행위를 비꼬아 프랑스어로 '검은'을 뜻하는 'noir'에서 유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살아 생전에 흑태자로 불린 적은 없었으며 AD 1568년에 쓰여진 리처드 그래프턴의 영국 연대기(Chronicle of England)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아 후대의 창작으로 생각된다. 에드워드는 백년전쟁이 벌어지기 이전인 AD 1333년과 AD 1337년에 각각 체스터 백작과 콘월 공작 작위를 받았다. 백년전쟁이 벌어진 이후인 AD 1343년에는 웨일스 공이 되었는데, 이 때부터 잉글랜드에서는 왕위계승자를 웨일스 공(Prince of Wales)으로 임명하는 관례가 만들어졌다.

 

흑태자 에드워드는 백년전쟁 초기에 부왕인 에드워드 3세와 함께 전투에 참여하여 AD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는 불과 16살의 나이로 보병대의 한 부대를 지휘하는 군사적인 재능을 보여주었다. 이 활약으로 에드워드는 정식 기사작위를 받고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는데, 이때 에드워드 자신과 후대의 웨일스 들이 모두 좌우명으로 삼게 되는 "나는 용기를 섬긴다"라는 말을 만들었다. AD 1355년부터는 독자적인 군사지휘권을 부여받고 보르도로 진군하였고 아키텐을 중심으로 점차 남프랑스 대부분을 점령해 나갔다. 

 

이때의 프랑스는 AD 1350년에 필리프 6세가 죽고 그의 아들인 장 2세가 즉위한 상태였다. 장 2세는 흑태자 에드워드 군을 막기 위해 왕세자였던 장남 샤를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장 2세는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2만명 정도의 보병을 해산해 버렸지만 여전히 17,000명의 보병과 500명의 기사, 3천명의 석궁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에드워드의 군대는 6천명의 보병과 1천명의 장궁병에 불과했다. 장 2세의 프랑스 군이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에드워드는 남쪽으로 후퇴하였으나 푸아티에 근처에서 따라 잡혔다. 이에 에드워드는 전투를 결심하였고 10년 전 크레시 전투에서 그 우수성이 증명되었던 전술을 다시 이용하기로 하였다.

 

에드워드는 크레시 전투와 마찬가지로 말에서 내리게 한 기사들을 보병과 같이 3개의 대열로 편성하였고 장궁병을 양측면에 배치하였다. 짐수레를 방벽으로 삼았으며 소수의 기사들은 숲속에 매복시켰다. 이를 상대하는 장 2세의 프랑스 군은 300명의 정예기사와 독일용병 장창보병으로 구성된 부대를 클레르몽 장군 지휘하에 선봉대로 내세웠다. 프랑스 측에서는 크레시 전투의 패배원인이 잉글랜드 기사들은 말에서 내려 싸운 반면에 자신들은 말위에서 싸웠던 데에 있다고 결론내린 것 같다. 이 때문에 본대의 프랑스 기사들도 말에서 내리게 하여 세 개의 보병부대로 재편성하였고 각 부대를 장 2세와 황태자 샤를,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가 각각 지휘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프랑스 군의 선봉대가 잉글랜드 장궁병 진형을 무너뜨리기 위해 돌진하였고 이에 맞서 잉글랜드 장궁병이 일제히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장궁은 정면으로 맞출 경우 당시 기사들이 착용한 갑옷인 플레이트 아머를 관통할 정도로 위력이 강한 데다가 잉글랜드 장궁병이 측면으로 돌면서 말을 집중적으로 노렸기 때문에 프랑스 선봉대는 얼마지나지 않아 진형이 붕괴되었다. 선봉대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프랑스 황태자 샤를이 이끄는 보병부대가 진격하였으나 프랑스 기사들은 말에서 내려 싸우는 전술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거운 갑옷을 입고 진군하느라 지쳐버렸다. 쏟아지는 화살비 속에 부상과 탈진으로 잉글랜드 군까지 제대로 다가가지도 못한 채 도망치기 시작했고 그 뒤를 따르던 오를레앙 공작의 부대도 도망치는 샤를 군으로 인해 혼란에 빠져 함께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 때에는 잉글랜드 장궁병의 화살도 다 떨어진 상태였지만 이미 프랑스 측은 본진 2개의 부대가 퇴각하면서 혼란에 빠진 상태였기에 최후방에 머물던 장 2세의 부대가 제때에 진격하지 못했다. 그 틈에 잉글랜드 군은 다시 진형을 정비했고 마침내 퇴각하는 아군을 헤치고 앞으로 나온 2세의 부대와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양 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으나 미리 에드워드가 숲속에 매복시켰던 기사들이 숲을 빠져나와 프랑스 군의 측후방을 기습공격하면서 전세가 잉글랜드 측으로 기울어 버렸다. 양쪽에서 공격을 당하게 된 프랑스 군은 결국 버티지 못했고 장 2세와 많은 측근들도 포로로 붙잡혔다. 잉글랜드는 크레시 전투에 이어 푸아티에 전투에서도 장궁병을 앞세워 다시한번 승리를 거둠으로써 잉글랜드 장궁병이 프랑스 기사단보다 더 우수함을 증명하였다.

잉글리쉬 롱보우의 위력


백년전쟁 초기 잉글랜드는 불리한 병력수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프랑스 기사단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웠다. 이 배경에는 잉글리쉬 롱보우라고 불린 거대한 활이 있었다. 잉글리쉬 롱보우는 본래 웨일스의 사냥꾼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잉글랜드 왕실에서 그 위력에 관심을 갖고 집중적으로 훈련시켜 백년전쟁에 동원한 것이었다. 잉글리쉬 롱보우는 크기가 5~6피트로 사람의 키보다 컸고 사거리는 약 270m로 매우 길었다. 특히 위력에 비해 연사속도가 매우 느렸던 석궁에 비해서 잉글리쉬 롱보우는 충분한 훈련만 뒷받침되면 1분당 10~20발이라는 경이적인 연사속도를 자랑하였고 그 위력도 정면이라면 기사의 중장갑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


크레시 전투와 푸아티에 전투 모두 프랑스 군은 중무장 기사들을 일제히 돌격시키는 전형적인 중세전투의 전술을 시도하였으나 경사와 진흙탕, 잉글랜드 군이 설치한 장애물 때문에 제대로 돌진하기가 어려워 특유의 충격력을 상실해버렸다. 잉글랜드는 2번의 승리를 통해 이때까지 팽배하였던 "궁병은 중무장 기사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없다"라는 통념을 완전히 깨뜨려 버렸다.


프랑스 기사들은 잉글랜드 장궁병이 쏘아대는 화살비 속에 많은 말을 잃어버린채 무거운 갑옷을 입고 도보로 진군해야 했고 계속된 화살공격으로 갑옷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부위의 상처가 누적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프랑스 기사들은 얼마 걷지도 못하고 완전히 탈진하고 말았고 일부 기사들이 잉글랜드 진영에 접근했지만 충분히 쉬면서 기다린 보병과 잉글랜드 기사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프랑스 기사들은 진흙탕 한가운데에서 무거운 철갑을 입고 두 발로 서 있기도 버거워하며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다.

이미 스위스 독립전쟁을 통해서 오스트리아 기사단이 스위스 장창병에게 무너진 적이 있었던 시기에 잉글랜드 장궁병마저 프랑스 기사단을 무력화시키면서 기사단을 통해서 권력을 유지하던 중세기사 계급이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전술 측면에서도 이제는 단순히 중기병 기사단을 돌격시키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승리를 거둘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장궁병이 충분한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장궁병을 보호할 수 있는 진지와 장애물이 미리 구축되어 있어야 했다. 이점을 깨달은 프랑스 군은 백년전쟁 말기에 이르면 잉글랜드 군의 진지가 구축되기 전에 선공을 펼쳐 장궁병을 몰살시키는 모습을 자주 보이기도 한다.

 

 

브레티니-칼레 조약 체결

 

푸아티에 전투 종료후 에드워드는 포로로 붙잡힌 장 2세에게 융숭한 대접을 해주면서 프랑스와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장 2세를 대신하여 황태자 샤를이 섭정을 맡고 있었으나 계속된 전쟁으로 국토가 피폐해졌고 AD 1358년 대규모 농민반란인 자크리의 난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결국 프랑스 황태자 샤를은 AD 1360년 6월에 샤르트르 근교인 브레티니에서 잉글랜드 측과 만나 예비적인 휴전협정을 맺었고 그 해 10월에 칼레에서 본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을 통해 장 2세의 석방보상금으로 300만 크라운이 책정되었으나 이는 프랑스 전체 1년 수익의 2배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었으므로 장 2세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기 위해 석방을 거절하고 런던으로 돌아갔다. 장 2세는 런던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다가 AD 1364년에 사망하였고 프랑스 황태자 샤를이 정식으로 즉위하여 샤를 5세가 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이미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지 않는 대신에 아키텐 지방 전부와 칼레를 얻어내는 성과를 달성한 상태였다. 애초부터 잉글랜드로서는 프랑스 왕위보다 영토에 대한 욕심이 더 컸던 것이었다.

 

 

 

흑태자 에드워드의 몰락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키텐 통치 실패

 

AD 1362년 에드워드는 브르타뉴 조약에 의해 프랑스로부터 넘겨받은 아키텐의 공작으로 임명되어 프랑스 남서부의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게 되었다. 비록 에드워드는 전투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지만 통치자로서는 부족한 면이 많아 호화로운 궁정생활을 즐기고 연회와 마상시합을 개최하면서 국고를 탕진하기 시작했다.

 

AD 1367년 이베리아 반도의 카스티야 왕국에서 내전이 벌어져 카스티야의 왕 페드로가 배다른 형제인 엔리케 2세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페드로를 국외로 추방하자 페드로는 아키텐으로 망명하여 에드워드에게 카스티야의 영지분할을 조건으로 군사원조를 요청하였다. 페드로의 요청을 수락한 에드워드는 카스티야 왕국으로 진격하여 나헤라 전투에서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프랑스 군을 대파하고 엔리케 2세를 프랑스로 내쫓았다. 그러나 왕위에 복귀한 페드로가 생각을 바꿔 당초의 약속을 파기하고 영지분할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아무런 소득없이 군사를 이끌고 아키텐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에드워드의 철수 이후 카스티야의 페드로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다시 침공해 온 엔리케 2세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그리고 에드워드는 카스티야 원정 이후부터 원인모를 병에 시달리기 시작했는데 일설에는 페스트라고도 한다.

 

에드워드의 아키텐은 계속된 전쟁과 호화로운 궁정생활로 심각한 재정위기에 직면하였다. 에드워드는 재정상태 개선을 위해 비용을 줄이기 보다는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는 방법을 택했고 이 때문에 아키텐 주민과 귀족들의 불만이 매우 높아졌다. 급기야는 AD 1368년 아키텐 귀족과 성직자들이 프랑스 샤를 5세가 관리하던 고등법원에 제소하였고 AD 1369년 샤를 5세는 프랑스 국왕의 권한으로 에드워드에 대한 법원출두를 명령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가 "6만명의 병사를 이끌고 출두하겠다"는 답신으로 이를 조롱하였고 이에 분노한 샤를 5세는 아키텐 공작령의 몰수를 선언하였다. 이로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백년전쟁의 다시 시작되었다.

 

 

샤를 5세의 반격과 아키텐 영지 상실

 

프랑스의 샤를 5세는 부왕 장 2세가 AD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포로로 잡힌 이후로 AD 1364년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의 섭정으로 대리통치하였다. 샤를 5세는 프랑스 왕세자를 지칭하는 도팽의 칭호를 최초로 부여받은 왕세자이기도 하다. 샤를 5세는 섭정 기간 동안 샤를 5세는 에티엔 마르셀에 의한 파리시민 반란과 농민반란인 자크리의 난을 잇달아 겪으며 어려움에 처했고 포로가 된 부왕 장 2세를 구하기 위해 막대한 보상금과 아키텐 영지를 잉글랜드에게 지급하는 브레티니 조약 승인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샤를 5세는 신중하고 현실적인 정책을 펼치며 세제를 개혁하여 정기적인 징세를 실시하여 국고를 확충하고 상비군과 관료제를 확립하기 시작했다. 슬로이스 해전 이후로 잃어버렸던 재해권을 되찾아오기 위해서 함선을 건조하고 해군 제독에게 육군 대원수와 동등한 특권을 부여하였다.

 

AD 1364년 장 2세가 런던에서 사망하자 샤를 5세는 정식으로 프랑스 왕위에 즉위하였으며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노리던 나바르의 샤를을 코쉬레르 전투에서 격파하고 그가 보유하였던 노르망디 영지를 빼앗았다. 또한 브레티니 조약으로 전쟁이 중지된 이후 싸울 곳을 잃은 채 떠돌아 다니며 사회불안을 야기하던 용병대 문제도 카스티야 왕국으로 지원보내며 해결하였다. 이렇게 체제를 정비하고 프랑스 국력을 회복시킨 샤를 5세는 잃어버린 아키텐 영지 탈환을 위해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AD 1368년 아키텐의 귀족과 성직자들이 흑태자 에드워드의 가혹한 과세에 반발하여 에드워드를 프랑스 고등법원에 고발하자 샤를 5세는 아키텐 영지 몰수를 선언하고 전쟁을 재개하였다.

 

전쟁의 양상은 백년전쟁 초기와 달리 프랑스 샤를 5세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흑태자 에드워드는 병 때문에 전장을 지휘할 수 없는 처지였고 전쟁의 발단이 된 가혹한 세금부과 때문에 대부분의 아키텐 주민과 귀족들이 에드워드에게 등을 돌린 상태였으며 재정압박으로 용병들을 고용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장의 에드워드는 강했다. 에드워드는 병든 몸을 이끌고 리모주 전투에 나서 기어코 성을 함락하는 데는 성공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성 점령후 프랑스에 항복한 것에 대한 응징으로 여자와 아이까지 포함한 주민 3천명을 학살하여 잉글랜드 지배에 대한 반감만 더 키우는 실책을 저질렀다.

 

AD 1369년 에드워드의 아우이자 랭커스터 공작인 곤트의 존이 이끄는 잉글랜드 군이 프랑스 본토로 침입하였으나 패배하였고 바다에서도 카스티야 해군과 동맹을 맺은 프랑스 해군에게 잇달아 패배하면서 재해권도 상실하였다. 원군없이 아키텐 영지를 지켜내기가 어려워진 에드워드는 AD 1371년 재정압박과 자신의 병든 몸을 이유로 형식상 영지를 부왕인 에드워드 3세에게 양도하고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AD 1375년에 부르지에서 휴전협정을 체결하여 브레티니 조약 이전 상태로 돌아가기로 합의하고 만다. 이로서 프랑스는 백년전쟁 초기의 열세를 뒤집는 데 성공하였고 샤를 5세의 이 뛰어난 업적을 기리기 위해 현명왕이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에드워드는 병든 아버지를 대신하여 국정을 대리통치하기 시작했으나 AD 1376년 47살의 이른 나이에 병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버지 에드워드 3세도 다음해에 사망하면서 잉글랜드 왕위는 흑태자 에드워드의 어린 아들인 리처드가 10살의 나이에 이어받아 리처드 2세가 되었다. 몇년 지나지 않아 프랑스에서도 샤를 5세가 AD 1380년에 사망하면서 12살의 어린 아들 샤를 6세가 뒤를 있게 되었다. 양국의 국왕이 모두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양국의 전쟁은 오랫동안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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