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아의 교회개혁운동
유럽교회의 분열와 존 위클리프의 교회개혁운동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한창 중이던 AD 1378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후임을 두고 로마 추기경단과 프랑스 추기경단이 대립하여 각자 교황을 옹립하는 '유럽교회의 대분열'이 일어난다. 잉글랜드가 로마계열 교황과 그 후임을 지지하면서 프랑스와 대립하였기에 유럽세계 전체가 둘로 나뉘어졌고 이로 인하여 교회의 분열은 단순히 종교상 문제가 아니라 국가 간의 문제로 발전하였다. AD 1409년 피사에서 종교회의가 열려 로마계열 교황 그레고리우스 12세와 아비뇽계열 교황 베네딕토 13세 양측 모두를 파면하고 새롭게 통일교황으로 밀라노주교인 알렉산더 5세를 선출하였으나 두 교황 모두 이를 거부하면서 교황이 동시에 3명의 존재하는 더 큰 혼란만 발생하였다. 이러한 대혼란 속에서 교회는 성직매매와 같은 부패가 만연해졌고 교황도 면죄부를 판매하면서 자금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진실된 신앙과 교리에 대한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분열과 혼란을 거듭하고 있을 무렵 잉글랜드의 종교학자이자 국왕 에드워드 3세의 궁정사제인 존 위클리프가 교회개혁운동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존 위클리프는 라틴어로 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여 일반인들도 잃기 쉽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성경이 교황이나 교회보다 더 귄위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주장하는 화체설, 면죄부, 성자 숭배, 고해성사와 같은 교리가 성경에 나와있지 않다고 하여 부정하였고 고개숙임, 분향, 입맞춤, 성찬, 우상숭배, 장소숭배의 행위 역시 폐지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당시로서는 존 위클리프의 주장이 너무 파격적이었고 AD 1381년에 일어난 와트 타일러의 난이 존 위클리프의 설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때문에 대학과 귀족들의 지지를 잃었다.
얀 후스의 교회개혁운동
존 위클리프의 개혁운동은 비록 잉글랜드에서는 실패하였지만 멀리 보헤미아로 전파되어 얀 후스의 교회개혁운동으로 발전하였다. AD 15세기 초에 프라하대학 교수이자 카톨릭 교회 사제로 활동 중이었던 얀 후스는 유럽교회의 대분열 속에서 교회개혁을 고민하던 중 존 위클리프의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다. 얀 후스도 처음에는 존 위클리프의 주장이 지나치게 과격하여 거부감을 느꼈지만 점차 그의 주장에 공감하고 존 위클리프의 사상 중 일부를 받아들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다. 얀 후스도 존 위클리프와 마찬가지로 성서만을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였고 성직자들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여 교황과 성직자들의 부패를 공격하였으며 성서를 체코어로 번역하였다.
독일과 보헤미아의 왕 벤첼(보헤미아 왕으로는 바츨라프 4세)이 3명의 교황 중에서 공의회계열의 알렉산더 5세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보헤미아에서는 알렉산더 5세가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받았다. 얀 후스와 그의 지지자들도 알렉산더 5세의 권위를 인정하였으나 알렉산더 5세는 얀 후스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명령하였다. 얀 후스가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서 양측이 대립하던 중 AD 1411년 새롭게 공의회 계열의 교황으로 선출된 요하네스 23세가 얀 후스를 파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얀 후스를 보헤미아의 왕인 벤첼이 지지하였기 때문에 중재위원회가 열려 얀 후스의 파문이 철회되었다. 하지만 요하네스 23세의 면죄부 판매를 얀 후스가 비난하면서 사태가 변하였다. 요하네스 23세가 대립교황 그레고리우스 12세를 지지하는 나폴리왕에 대한 십자군을 일으키고자 자금마련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였는데 이미 벤첼이 면죄부 수익금의 일부를 나뉘어 받고 있었기 때문에 벤첼은 면죄부 판매에 대한 반대운동을 금지시키고 얀 후스에 대한 지지도 철회하였다. 결국 얀 후스에 대한 재판이 재개되었고 재판출두를 거부한 얀 후스에게 다시 파문이 내려졌다. 프라하를 비롯한 도시에서의 강연이 금지당한 얀 후스는 AD 1412년 프라하를 떠나 은거하면서 저술활동에만 매진하였다.
AD 1415년에 유럽교회의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콘스탄츠 공의회가 열려 마르티노 5세를 새로운 통일교황으로 선출했다. 이와 함께 급진적인 존 위클리프의 사상을 이단으로 정죄하였고 이미 사망한 존 위클리프의 유해를 저서와 함께 불태워버렸다. 얀 후스도 존 위클리프파로 몰려 공의회 출두가 명령받았는데 처음에는 이를 거절하였으나 헝가리와 독일의 왕이자 훗날 신성로마황제가 되는 지기스문트가 그의 신변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에 결국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하지만 공의회에서는 잉글랜드의 존 위클리프파를 이단으로 단죄하면서 얀 후스의 저서내용도 일부를 왜곡하여 같이 이단으로 지목하였고 결국 얀 후스를 화형시켰다. 얀 후스의 처형은 재판과정의 불공정함으로 인하여 보헤미아 사람들의 공분을 샀고 결국 보헤미아 지방에서 로마 카톨릭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고 계속해서 후스의 주장을 지지하는 개혁운동이 진행되었다. 이것이 약 15년간 진행되는 보헤미아의 종교전쟁인 후스전쟁의 시작이었다.
후스전쟁
보헤미아의 역사
오늘날의 체코 서부지역에 해당하는 보헤미아 지방에는 AD 6세기경부터 슬라브계인 체코인들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했다. 전설에 의하면 AD 9세기초에 체코인의 부족장이었던 공주 리부셰와 결혼한 농부 프르셰미슬의 가문에서 보헤미아 지방을 다스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보헤미아는 AD 10세기 경에 그리스도교화되었고 AD 11세기 초에 프르셰미슬가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발생한 혼란으로 인하여 점차 서쪽의 신성로마제국에게 종속되어 갔다. 그러나 AD 1198년에 신성로마제국 내의 세습왕국 지위는 얻어냈다.
AD 1306년 바츨라프 3세가 사망하면서 프르셰미슬 가문은 단절되었고 보헤미아 왕위는 룩셈부르크 가문의 백작 얀의 차지가 되면서 보헤미아 왕위를 룩셈부르크 가문이 세습하기 시작했다. 얀의 아들인 카를 4세가 신성로마황제로 등극하자 보헤미아 왕위는 신성로마제국 제위에 귀속되었고 보헤미아의 프라하가 신성로마제국 통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카를 4세의 아들 벤첼은 비록 신성로마황제의 대관은 받지 못했지만 독일과 보헤미아의 왕으로서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벤첼은 재임기간 내내 강력한 귀족세력과 이복동생이자 헝가리의 왕인 지기스문트에게 왕위를 위협받아 폐위와 복위를 반복하였기 때문에 혼란이 계속 발생하였다. AD 1419년 벤첼이 사망하자 보헤미아 왕위는 이미 AD 1411년 독일의 왕위까지 차지한 헝가리의 지기스문트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지기스문트가 후스파를 탄압하려 하였기 때문에 보헤미아에서도 지기스문트를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후스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후스전쟁의 시작
AD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불공정하게 진행한 얀 후스의 화형은 보헤미아 사람들에게 교회 타락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많은 귀족들과 기사들이 후스의 화형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하였고 그동안 후스의 주장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던 프라하 대학마저 후스의 교회개혁 주장에 공감을 표시하게 만들었다. 얀 후스를 계승하여 프라하 베들레헴 예배당의 설교자가 된 스티리브로의 야코베크를 중심으로 주로 대학교수, 귀족, 상류시민들로 구성된 후스파가 형성되었고 이들은 로마교황에게 보헤미아 교회의 독립을 요구했다. 특히 평신도에게도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빵과 포도주를 함께 사용하는 성찬식을 허용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에 우트라퀴스트(양형영성체파)로 불리게 되는데 같은 후스파이면서 훗날 퇴역군인 얀 지슈카이 결성하는 급진적 성향의 타보르파와 구분되어진다.
AD 1419년 7월 30일 후스파 사제인 얀 젤리브스키가 군중을 이끌고 프라하 광장을 진군하며 후스파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후스파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창문에서 돌을 던지면서 프라하에 대혼란이 발생하였다. 결국 얀 지슈카가 시장과 시의원들을 창문밖으로 던져버리는 제1차 프라하 창문투척 사건을 일으켰고 후스파가 프라하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척안의 명장 얀 지슈카의 등장
얀 지슈카의 본명은 얀 지슈카 트로크노바 칼리차로 AD 1360년 보헤미아의 트로크노브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싸움으로 한쪽 눈을 잃었다. 지슈카라는 별명은 척안(애꾸눈)을 의미한다는 설도 있지만 본래 이름이라고도 한다. 얀 지슈카는 주로 폴란드 지방의 용병으로 활동하였고 AD 1410년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 연합군과 튜턴 기사단이 격돌한 그룬발트 전투(혹은 제1차 탄넨베르크 전투)에 참전하여 튜턴 기사단과 싸우기도 하였다.
이후 얀 지슈카는 퇴역하여 고향인 보헤미아 지방으로 돌아왔으나 AD 1419년 7월 30일 제1차 프라하 창문투척 사건을 일으켜 후스파가 프라하를 장악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AD 1419년 8월 16일 보헤미아의 왕 벤첼이 죽고 같은 해 11월 13일 그 왕위를 요구하던 벤첼의 이복동생이자 독일과 헝가리의 왕인 지기스문트와 우트라퀴스트 사이에 임시휴전이 맺어지자 이에 실망한 얀 지슈카는 프라하를 떠났고 우트라퀴스트보다 급진적인 타보르파를 결성하였다. 타보르파는 주로 농민과 하층시민들로 구성되었고 단순히 종교적인 독립에서 벗어나 보헤미아 자체를 독일의 지배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군사공동체가 되었다. 타보르파의 이름은 그들이 근거리로 삼은 타보르 지명에서 유래하였다.
타보르파는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얀 지슈카는 이들을 무리하게 검과 같은 무기사용법을 익히게 하기보다는 농기구로 익숙한 농업용 도리깨를 무기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로인해 도리깨(프레일)는 체코 지방의 가장 일반적인 무기가 된다. 또한 얀 지슈카는 초기형태의 총과 대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중무장 기사들을 상대하고자 하였고 취약한 방어를 보강하기 위해 이동시 끌고다니는 농업용 마차벽에 총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을 내었으며 마차바퀴를 서로 연결하여 거대한 방어벽으로 삼는 수레진(Wagenburg) 전술도 개발하였다.
지기스문트의 제1차 침공 격파
AD 1420년 3월 1일 로마 교황 마르티누스 5세가 후스파를 토벌하기 위해 지기스문트와 동유럽의 제후들에게 십자군 결성을 촉구하는 칙서를 내렸고 이에 지기스문트는 중무장 기사들을 중심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보헤미아로 침공하였다. 보헤미아 곳곳에서 독일군과 타보르 군대의 공방이 계속되던 중 같은 해 6월 12일부터 독일군(약 10만~20만 추정)이 프라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위기에 빠진 프라하가 인근 도시와 타보르파에게 원군을 요청하면서 후스파 동맹군이 결성되었다.
프라하 공격을 위한 중요한 거점은 인근의 비트코프 언덕요새였다. 독일군으로서는 비트코프 언덕을 장악하지 않는 한 보급로가 계속해서 위협받기 때문에 이 곳을 먼저 점령해야만 했다. 독일군은 병력수와 장비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경계없이 비트코프 언덕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나 갑자기 얀 지슈카의 구원군이 등장하면서 혼란에 빠졌다. 얀 지슈카는 비트코프 언덕 아래의 포도밭을 통해 부대를 은밀하게 이동시킨 후에 독일군을 급습하여 절벽 방향으로 몰아붙였다. 급작스런 공격에 놀란 독일군은 퇴각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300명의 기사들이 언덕에서 떨어져 죽었다. 비트코프 언덕에서의 승리로 프라하는 지켜졌고 비트코프 언덕은 얀 지슈카를 기려 지스코프로 개명되었다. 지금도 지즈코프 언덕에는 거대한 얀 지슈카의 기마상이 있다.
한편, 프라하를 성공적으로 구원한 얀 지슈카는 타보르로 돌아갔고 곳곳에서 보헤미아를 침공한 독일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프라하 시민군은 아직 독일군이 지배하고 있는 프라하 내부의 비셰흐라드와 흐라드차니 탈환을 위해 진격하여 11월 1일 지기스문트의 구원군을 격파하고 비셰흐라드와 흐라드카니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렇게 하여 보헤미아 지방 대부분은 후스파의 차지가 되었다.
지기스문트의 제2차 침공 격파
후스파는 보헤미아를 장악한 이후 향후 통치를 위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새로운 보헤미아의 왕으로 리투아니아의 비타우타스 대공을 선출하자는 의견도 제안되었으나 무산되었고 결국 AD 1421년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의회는 20명의 지도자로 구성된 잠정정부 구성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얀 지슈카는 두 명의 타보르파 대표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AD 1421년말에 지기스문트가 다시 침공하여 쿠트나호라의 중요한 마을들을 빼앗았다. 비록 얀 지슈카가 대포를 이용하여 독일군 기사단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었지만 쿠트라호라의 독일계 주민들이 후스파를 척살하고 성문을 걸어잠그었기 때문에 성 밖에 주둔했던 얀 지슈카는 위기에 빠졌다. 이에 얀 지슈카는 마차를 종대로 배치하고 대포와 총을 쏘면서 독일군 진형을 돌파하였다. 전사상 최초의 전차기동전이라고 불릴만큼 참신한 전략이었다. 적의 포위망을 돌파한 얀 지슈카는 콜린으로 성공적으로 퇴각하였고 얼마뒤 증원군을 이끌고 반격을 개시하여 이듬해 1월에 네보비디에서 지기스문트의 독일군을 격파하였다. 지기스문트가 네메츠키 브로트(현재의 하블리치쿠프 브로트)에서 다시 병력을 집결시켰으나 곧 얀 지슈카 군에게 다시 격파당했다.
얀 지슈카는 빈약한 무장의 농민군을 이끌고 독일의 정예 중무장 기사들을 물리치면서 평생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불패의 명장이었다. 후스전쟁 초기 얀 지슈카가 이끌 수 있는 군사들은 군사훈련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한 농민들이었다. 극도의 실용주의자였던 얀 지슈카는 무리하게 농민군을 칼과 갑옷으로 무장시키고 훈련시키기보다는 사용법에 익숙한 농업용 도리깨를 그대로 무기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얀 지슈카의 전술적인 천재성은 초기형태의 총과 대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당시에는 총과 대포가 등장하기는 했지만 한번 발사하면 장전시간이 너무 길었기때문에 공백시간 동안 중무장 기사들의 돌격을 허용하는 단점이 있었다. 더욱이 대포는 너무 무겁기 때문에 이동시키기가 어려워 고정된 적군을 격파하는 공성전에서나 사용되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얀 지슈카는 여러 대의 농업용 마차를 이용하여 원형 방어벽을 구성하는 수레진(Wagenburg) 전술을 개발하여 이를 보완하였다. 얀 지슈카는 마차 방어벽 뒤에 창과 도리깨로 무장한 보병과 석궁병, 그리고 소총수를 배치하여 장전시간 동안 기사단의 돌격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얀 지슈카의 수레진 전술은 2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전투 초기에 마차 방어벽 뒤에 숨은 채 대포와 총, 석궁 등을 이용하여 상대를 공격하였고 이를 참지 못한 적 기사단이 돌진하면 마차 방어벽에 의지하여 돌격을 막아내었다. 이 때 얀 지슈카는 의도적으로 상대의 말을 공격하도록 하여 기사들을 낙마시켰는데 이는 기사들로부터 말을 이용한 돌진력을 빼앗아버리는 효과와 함께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낙마만으로도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기사단의 돌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한 후에는 마차 방어벽을 열고 반격을 개시하여 전투를 마무리하였다.
이외에도 얀 지슈카는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데 능해서 전투시에는 언제나 언덕이나 늪지대를 이용하여 기마의 돌격을 방해하였다. 또한 무거운 대포를 기동성이 좋은 마차에 싣고 마차를 장갑으로 두르게 하여 500년 후에나 등장할 탱크를 앞당겨 선보이기도 하였다.
얀 지슈카의 수레진 전술은 살아생전에 단 한번도 격파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놀라운 군사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술은 200년 가까이 다른 유럽국가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이는 봉건제후의 힘이 여전히 막강하여 그들의 중무장 기사단만이 전장의 주역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얀 지슈카에 의해 시도된 보병, 기병, 포병의 3병협동전술은 AD 17세기 30년전쟁 중에 스웨덴왕 구스타프 2세가 야전포병대를 본격적으로 도입하면서 비로소 보편적인 전술로 활용되기 시작한다.
후스파 내전과 얀 지슈카의 죽음
2번에 걸쳐 지기스문트의 독일군 공격을 물리친 보헤미아 지방이 잠시동안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AD 1422년초부터 후스파 내부에서 불화가 발생하였다. 종교 해석상의 차이로 인해 시작된 분쟁은 일부 사람들의 선동에 의해 후스파의 종교적 지도자에 활동하던 사제 얀 젤리브스키가 처형당하는 사태까지 이르렀고, 우트라퀴스트와 일부 급진적인 타보르파가 얀 지슈카의 군사적 권위에도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에 얀 지슈카는 타보르 군을 이끌고 AD 1423년 4월 호리스에서 우트라퀴스트 군을 격파하여 불순분자들을 진압하였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교황에 의해 새로운 십자군 모집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에 얀 지슈카는 우트라퀴스트와 휴전을 맺어야 했다. 그렇지만 십자군으로 참여요청을 받은 리투아니아 공국과 폴란드가 같은 슬라브족인 보헤미아의 침공을 꺼려하고 독일도 내부분쟁으로 십자군을 보낼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십자군 결성은 난항을 겪었다. 결국 대군을 이끌고 왔던 덴마크 군마저 회군하면서 십자군은 해산되었다.
외부위협이 사라지자 후스파는 다시 내전에 돌입했다. 우트라퀴스트의 지배를 받던 흐라덱코라로브가 타보르파 지지를 선언하면서 우트라퀴스트와 타보르파 사이에 전투가 발생하였다. 얀 지슈카는 흐라덱코라로브로 구원군을 이끌고 진격하여 D 1423년 8월에 우트라퀴스트 군을 격파하였고 이듬해인 AD 1424년에 다시 스칼리스(1월)와 말레소브(6월)에서도 우트라퀴스트 군을 잇달아 격파하고 9월에 프라하로 입성하였다. 그러나 얀 지슈카는 프라하의 대주교인 얀 로키카나의 설득으로 휴전에 합의하였다.
후스파 사이의 내전이 끝난 이후 아직 지기스문트에 대한 지지자들이 많은 모라비아(현재 체코의 동부지역) 지방에 대한 공격계획이 수립되었고 얀 지슈카는 이 원정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얀 지슈카는 원정도중 전염병으로 AD 1424년 10월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비록 얀 지슈카는 죽었지만 그 뒤를 이은 프로코프는 우트라퀴스트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타보르파를 포용하고 함께 독일군과 싸워 AD 1426년과 AD 1427년, AD 1431년에 성공적으로 보헤미아를 방어해내었다.
바젤 공의회와 후스전쟁의 종식
무력으로 후스파를 진압하는 것이 어렵게 되자 로마 카톨릭 교회내부에서는 후스파와의 화의가 논의되기 시작했고 AD 1433년에 열린 바젤 공의회를 통해 정식으로 화의가 제안되었다. 이에 후스파는 사절단을 보내 프라하 4개조항(포교의 자유, 평신도의 빵과 포도주 성찬허용, 교회재산의 공유화, 죄를 범한 성직자의 처벌)에 대한 승인을 요구하였고 공의회는 2종류의 성찬식을 허용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이 조건으로 우트라퀴스트는 로마 교황청과 화해하고자 하였지만 타보르파가 이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내전이 다시 발생하였다. 로마 교황청과 화해한 우트라퀴스트는 AD 1434년 로마 카톨릭 군의 지원을 받아 리파니 전투에서 승리하고 타보르파 세력을 소멸시켰다.
우트라퀴스트만 남게 된 후스파는 다시 평화협상을 시작하여 보헤미아는 2종류의 성찬식을 허용받았고 교회 토지를 사회에 환원하도록 하였으며 보헤미아 교회의 독립성도 보장받았다. 보헤미아 대주교 얀 로키카나가 AD 1436년에 프라하 협정에 최종적으로 서명하면서 후스파와 로마 카톨릭 교회 사이의 평화협정이 맺어졌고 공식적으로 후스전쟁은 종결되었다. 이렇게 하여 보헤미아는 당초부터 요구하였던 평신도에 대한 빵과 포도주 모두를 사용하는 성체배령을 인정받음으로써 종교적인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비록 후스교회가 정식으로 인정받았다고는 하지만 이는 로마 교황이 아닌 공의회 결정사항이었기 때문에 AD 1462년 교황 피우스 2세가 이를 파기하였고 후임인 교황 바오로 2세가 AD 1467년 다시 보헤미아로 십자군 원정을 선언하면서 후스파에 대한 탄압을 재개하였지만 후스파는 여전히 강력한 군사력로 교황군을 패퇴시켰다. 이 때문에 후스파는 교황권으로도 제제를 가하지 못한 최초의 독립교회로서 훗날 일어나는 종교개혁의 이상적인 모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