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와 프랑스 양국의 내분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의 단절과 랭커스터 왕가의 시작
AD 14세기 후반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위에 오른 리처드 2세와 샤를 6세 모두 미성년이었기에 왕족과 귀족들이 후견을 맡았다. 잉글랜드 경우는 숙부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을 중심으로 한 귀족들이 통치권을 장악하였으나 곧 리처드 2세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통치역량을 발휘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AD 1381년에는 와트타일러의 주도하에 농민반난이 발생하여 한 때 런던까지 점령당했으나 침착하게 와트 타일러와 협상을 벌여 시간을 번 후 반란을 토벌한 일이었다. 이에 AD 1386년 잉글랜드 의회는 11인 위원회를 만들어 리처드 2세의 활동을 감시하기 시작했으나 AD 1389년 성년이 되자 즉시 랭커스터 공작으로부터 통치권을 되찾아 왔고 조세를 경감시켜 잉글랜드 국민들의 신망을 얻은 뒤에 AD 1389년 랭커스터 공작의 아들 헨리를 추방하고 랭커스터 영지를 몰수하며 반대파를 일소하였다.
리처드 2세가 랭커스터 일파를 물치치고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아직 반대세력이 모두 소탕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처드 2세는 같은해 아일랜드 방문을 강행했고 그사이 추방당했던 헨리가 런던으로 돌아와 의회세력을 규합하고 왕위를 찬탈하여 헨리 4세가 되었다. 리처드 2세는 급히 귀국하였으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생포되어 폰티프랙트 성에 유폐되었다. 4개월 뒤에 리처드 2세가 사망하였는데 암살당했다는 설과 스스로 굶어 죽었다는 설이 있다. 리처드 2세가 사망하면서 잉글랜드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지배가 막을 내리게 되었고 새롭게 헨리 4세의 가문인 랭커스터 왕가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프랑스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의 대립
프랑스는 샤를 6세가 즉위 당시 12살의 나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샤를 5세의 유언에 의해 샤를 5세의 동생인 앙주 공작 루이, 베리 공작 장,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와 샤를 6세의 외삼촌인 부르봉 공작 루이 2세가 대신하여 프랑스를 통치하게 되었다. 앙주 공작 루이가 샤를 6세의 섭정을 맡았고 샤를 6세의 보호와 함께 파리 및 노르망디 관리는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와 부르봉 공작 루이 2세가 맡았으며 베리 공장 장은 랑그도크와 기옌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AD 1382년 앙주 공작 루이는 양어머니인 나폴리 여왕 조안나 1세가 살해당하자 나폴리왕국 왕위계승을 위해 떠나갔다.
샤를 6세가 AD 1388년에 20살이 되면서 친정을 선언하였으나 AD 1392년 잉글랜드와의 아미앵회담 도중에 정신병 발작증세를 보임에 따라 모든 정무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제 샤를 6세를 대신하여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가 대리통치를 시작하였지만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가 이에 반발하였기 때문에 프랑스는 부르고뉴파와 오를레앙파의 두 세력으로 나뉘게 되었다.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는 샤를 5세의 동생으로 부르고뉴와 함께 플랑드르, 아르투아, 샤롤레이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지를 통치하고 있었으며 프랑스 궁정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는 샤를 6세의 동생으로 전통대로 제2 왕위계승자에게 부여되는 오를레앙 공작 작위를 받았기 때문에 만일 샤를 6세가 아들을 얻지 못할 경우 자기가 차기 프랑스왕이 될 수도 있었다.
부르고뉴파와 오를레앙파의 대립은 필리프 2세 사후에도 이어져 새로운 부르고뉴 공작이 된 장 1세가 AD 1407년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를 파리의 거리에서 살해하기에 이른다. 위기에 처한 오를레앙파는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루이 1세의 후계자 샤를을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의 딸과 결혼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반 부르고뉴 연합의 중심세력이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가 되었으며 명칭도 아르마냐크파로 바뀌었다. AD 1413년부터 베르나르 7세가 왕실의 대신, 군 총사령관 및 모든 재정일의 감독관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아르마냐크파가 다시 부르고뉴파를 밀어내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잉글랜드 헨리 5세의 등장
잉글랜드 헨리 5세는 AD 1387년 랭커스터 공작가에서 동명의 헨리(훗날 헨리 4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헨리 5세의 할아버지인 곤트의 존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의 넷째 아들로서 결혼을 통하여 처가로부터 랭커스터 영지를 상속받았었다. 에드워드 3세 사후 리처드 2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곤트의 존이 섭정으로 잉글랜드를 대리통치하였으나 리처드 2세와 사이가 좋지 않아 AD 1389년 성년이 된 리처드 2세가 곤트의 존의 아들인 헨리를 추방하고 랭커스터 영지를 몰수해버렸다. 이렇게 하여 헨리 5세는 12살의 나이에 아버지와 떨어져 살게 되었으나 리처드 2세가 헨리 5세를 잘 보살펴 주어 불편함은 없었다. AD 1399년 헨리 5세는 리처드 2세와 같이 아일랜드를 방문하였으나 그 틈이 타 아버지 헨리가 귀국하여 의회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헨리 4세가 되었기 때문에 급히 귀국하여 잉글랜드 왕세자를 의미하는 웨일스공(Prince of Wales)으로 임명되었고 체스터 백작, 콘월 공작, 아키텐 공작, 랭커스터 공작으로 잇달아 겸하게 되었다. 그리고 AD 1401년부터 웨일스에서 일어난 오웨인 글린드와의 반란을 진압하는 부대의 일부를 지휘하며 점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향상시키기 시작했다.
AD 1413년 헨리 4세가 죽자 헨리 5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정식으로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헨리 5세는 부왕 시절의 왕위찬탈 때문에 일어난 대립을 해소하고자 리처드 2세를 다시 정중하게 매장하고 리처드 2세의 상속인 모티머를 마치 백작으로 임명하는 등 유화책을 펼쳤다. 그러나 AD 1414년 롤라드파의 봉기를 단호히 진압하였고 AD 1415년 케임브리지 백작인 요크의 리처드와 매셤의 스크로프 경 헨리가 모티머 왕위옹립 음모를 사전에 분쇄하여 군주로서의 위엄을 세웠다.
내부를 안정시킨 헨리 5세는 시선을 프랑스로 돌렸다. 당시 프랑스는 정신병에 걸린 샤를 6세를 대신하여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던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는 서로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원하고 있었다. 헨리 5세는 이러한 사정을 이용하여 프랑스에게 브레티니 조약에서 약속받았으나 미지급된 프랑스 선왕 장 2세에 대한 몸값 160만 크라운의 지급과 함께 샤를 6세의 어린 딸인 카트린 공주와 결혼하는 대신에 지참금으로 2백만 크라운을 요구하였다. 또한 프랑스 왕위 계승권 포기에 대한 대가로 브루지 조약으로 상실한 아키텐 뿐만 아니라 옛 플랜태저넷 왕가의 영지였던 노르망디와 앙주는 물론 새로운 영지인 플랑드르와 브르타뉴까지 요구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카트린 공주의 지참금으로 60만 크라운을 지급하고 아키텐 영지를 내어주는 수정안을 제시하였으나 결국 AD 1415년 협상이 결렬되고 말았다. 하지만 헨리 5세는 처음부터 협상이 아닌 무력으로 영지를 확보할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미 AD 1414년 겨울에 프랑스와의 전쟁을 목적으로 과세를 2배로 올리는 것에 대해 의회의 동의를 얻은 상태였다. 협상이 결렬되자 헨리 5세는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약 1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쟁쿠르 전투
양군의 배치상황
AD 1415년 8월 13에 센 강 어귀를 통해 프랑스를 침입한 헨리 5세는 아르플뢰르 항구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나 공성전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9월 22일이 되어서야 함락시킬 수 있었다. 그 사이 잉글랜드 군 내부에서 전염병이 돌면서 병력수가 많이 줄어들고 있었고 겨울철을 지낼 만한 월동장비가 부족한 형편이었다. 이에 헨리 5세는 부대를 이끌고 노르망디 동부와 폰티외, 피카르디 서부지방을 거쳐 잉글랜드의 프랑스 북부 거점인 칼레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프랑스도 각 영지에서 병력을 차출시켜 루앙 근교에서 방어군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명목상 수장은 샤를 6세였지만 사실상 군대지휘가 불가능하였기에 드뢰 백작 샤를 1세 달브레가 총사령관이 되었다. 양군은 솜 강 근교에서 만났으나 헨리 5세는 2주일 동안 260마일을 강행군해왔고 군량 또한 부족하여 프랑스 군과 전투를 벌일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프랑스 군도 아직 병력이 충분히 모이질 않다고 판단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잉글랜드 군은 무사히 솜 강을 건넜다. 그러나 잉글랜드로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프랑스군이 집결할 것을 우려했고 프랑스로서도 잉글랜드 군이 그대로 칼레에 들어가도록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전투를 벌이기로 하였다. 그리고 전장은 프랑스 북부의 작은 마을인 아쟁쿠르로 선택되었다.
양 측의 병력수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들이 엇갈려 프랑스 군이 잉글랜드 군에 비해 최대 10배에 달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프랑스 군이 2만~3만 명 정도였고 잉글랜드 군은 6천명 정도로 추산하여 대략 프랑스 군이 잉글랜드 군에 비해 3배 정도 많았던 것으로 생각한다. 크레시 전투나 푸아티에 전투와 마찬가지로 잉글랜드 군은 대부분이 장궁병과 일부 말에서 내린 기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면에 프랑스 군은 여전히 기사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으나 대부분 말에서 내려 보병들과 섞여 있었으며 석궁병이 일부 함께 종군하였다. 전장으로 선택된 아쟁쿠르는 숲 사이에 좁은 길로 연결된 곳으로 그 길도 때마침 내린 비로 진흙밭이 되어있었다. 헨리 5세는 크레시 전투와 푸아티에 전투와 마찬가지로 중앙에 기사들을 배치하고 양측에 장궁병을 위치시켰으며 장궁병을 보호하기 위해 목책을 건설하였다. 이에 맞선 프랑스 군은 크레시 전투와 푸아티에 전투에서 잇달아 잉글랜드 장궁병에게 패배했음에도 많은 병력 수에 자신감이 넘쳤으며 어서 빨리 앞선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석궁병을 전진배치 시키지 않고 후미로 물렸으며 말에서 내린 기사들을 중심으로 한 중무장 보병을 밀집대형으로 배치시켰다. 다만 부대의 통제를 위해 일부 기사들만이 말에 타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대승
프랑스 군은 잉글랜드 군이 설치한 함정을 우려하였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지원군이 도착하고 있었기에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 기다리던 잉글랜드의 헨리 5세는 결단을 내려 병력을 장궁 사거리까지 전진시켰는데, 이 때 목책도 함께 이동시켰기 때문에 잠시동안 방어가 약해졌으나 이미 프랑스 측에서 석궁병을 뒤로 물린 상태였기 때문에 별다른 피해를 받지 않고 부대를 다시 배치할 수 있었다. 부대를 재배치한 헨리 5세는 화살공격을 명령했고 이에 프랑스의 말에 탄 기사들이 먼저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마로는 잉글랜드의 목책을 돌파할 수 없었고 계속해서 화살공격을 받아야 했기에 곧바로 후퇴하였으며 중무장 보병의 제1열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아쟁쿠르는 협소한 지형 때문에 프랑스 군은 한꺼번에 대군을 보낼 수가 없었고 대부분의 병력이 무거운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었기에 진흙밭으로 변한 땅을 걷기도 힘들었다. 더욱이 잉글랜드 궁병이 날리는 화살 때문에 투구의 얼굴가리개까지 내려 시야가 좁아지고 산소가 부족해졌으며 좁은 길로 인하여 대형이 너무 밀집되었다. 프랑스 중무장 보병들은 화살비를 뚫고 잉글랜드 진형까지 접근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이미 탈진상태에 빠져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프랑스 중무장 보병이 접근해 오자 활을 내리고 도끼와 칼을 들고 싸우기 시작했는데, 본래 빈약한 무장으로 접근전에서 고전해야 했으나 진창 속에서는 오히려 가벼운 무장 때문에 빠르게 움직이며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프랑스 군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군의 제1열이 무너졌을 때 후속병력이 계속 도착했으나 그들의 처지도 앞선 동료들과 다를 바가 없었고, 헨리 5세는 철저하게 병력을 통제하여 진창을 걸어오는 동안 지쳐버린 프랑스 군만 상대하도록 하였다. 결국 프랑스 군의 진형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전투는 잉글랜드의 대승으로 끝났고 총사령관 드뢰 백작 샤를 1세 달브레를 비롯하여 수많은 프랑스 귀족 지휘관들이 전사했으며 몇 천명에 달하는 프랑스 병사들과 귀족들이 포로로 붙잡혔다.
중세의 전투는 포로로 붙잡은 귀족들을 몸값을 받고 석방하여 소모한 재정을 확보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헨리 5세는 포로의 숫자가 너무 많아 통제하기가 어려웠고 잉글랜드 군이 모두 지친 상태에서 후방의 프랑스군이 계속해서 출몰하고 있었기에 신속하게 이동하고자 대부분의 포로를 처형하였다. 이 때문에 프랑스의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패배는 단순히 병력을 잃어버린 것 이상으로 수많은 귀족 지휘관이 죽었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패배로 작용하게 된다.
트루아 조약의 체결과 도팽 샤를의 저항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승리로 헨리 5세의 입지는 매우 탄탄해졌다. AD 1416년 신성로마제국의 지기스문트 황제가 직접 잉글랜드로 예방하여 동맹조약을 맺었고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프랑스와 제노바 사이에 체결된 해군동맹을 깨뜨렸다. 그 후 헨리 5세는 노르망디 지방을 조금씩 점령하기 시작하여 AD 1419년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방의 주도인 루앙을 점령하였다.
프랑스 내부에서는 아쟁쿠르 전투에 대한 지원군 도착을 의도적으로 늦춘 부르고뉴 공작 장 1세가 잉글랜드에 접근하였으나 끝내 동맹에는 실패했다. AD 1418년 부르고뉴파는 샤를 6세의 왕후인 바이에른의 이자벨과 동맹을 맺고 파리로 입성하여 베르나르와 그의 추종자들을 많이 죽였다. 아르마냐크파의 잔당들은 샤를 6세의 아들로 도팽(왕세자)이 된 샤를(훗날 샤를 7세)과 함께 부르주로 달아났다. 도팽 샤를은 잉글랜드 헨리 5세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부르고뉴파와의 화해를 주선하였으나 오히려 아르마냐크파가 AD 1419년 회담 도중에 장 1세를 살해하였기 때문에 양측의 불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장 1세의 아들 필리프 3세가 새로운 부르고뉴 공작이 되자 필리프 3세는 도팽 샤를에게 아버지 암살의 책임을 물으며 프랑스 왕후 이자벨과 함께 잉글랜드 편으로 돌아섰다. AD 1420년 부르고뉴파는 이자벨을 움직여 잉글랜드 헨리 5세와 트루아에서 휴전협정을 맺었다. 트루아 조약에 따라 헨리 5세는 카트린과 결혼하고 프랑스 섭정 겸 새로운 왕위계승자로 인정받았으며 헨리 5세와 카트린의 아들이 차기 왕으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도팽 샤를의 프랑스 왕위계승권은 박탈당했고 정신병에 시달리는 샤를 6세는 왕후 이자벨의 설득에 의해 트루아 조약을 승인했다.
트루아 협정으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휴전이 성립되어야 했으나 도팽 샤를이 아르마냐크파와 더불어 협정의 무효를 주장하며 저항하였기 때문에 전쟁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헨리 5세의 우위는 변경되지 않았다. AD 1420년 여름에 헨리 5세는 몽트로를 함락시켰고 11월에는 믈룅을 점령한 후에 본국으로 잠시 귀환하였으나 AD 1421년 다시 프랑스로 출항하여 드뢰를 점령하고 모를 함락시켰다.
이렇게 하여 프랑스 북부 대부분과 수도인 파리를 점령한 헨리 5세의 위세가 최고조에 올랐으나 갑자기 병에 걸리고 말았다. 본래 헨리 5세는 병약한 샤를 6세보다 자신이 오래 살것으로 자신하였기 때문에 샤를 6세 다음의 프랑스왕이 되기로 한 트루아 조약을 수용한 것이었으나 오히려 AD 1422년 8월에 샤를 6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샤를 6세도 같은 해 10월에 사망하면서 백년전쟁은 이제 아직은 아기에 불과한 헨리 5세의 아들인 헨리 6세와 부모에게 버림받은 도팽 샤를의 대결로 이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