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조선과 일본의 차이점
일본은 분명한 명분, 방향성(화혼양재, 급진 개혁), 추진력을 지니고 개혁을 시도한 반면, 조선은 꽉 막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뒤늦게 크게 당하고서야 불리한 조건으로 개항을 시도한 것이 두 나라의 운명을 갈랐다고 보는 인식이 적지 않다.
물론,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단순히 개방 시기의 차이만으로 분석하려는 것은 무리이고, 다수의 요인들이 수백 년간 누적된 결과의 영향도 컸다. 조선보다 남서방향으로 돌출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서구 세력과의 접촉이 조선보다 훨씬 빨랐으며, 따라서 서구 문물에 대한 이해도도 당대의 조선과 비교하면 월등하게 높은 상태였다. 당시 막부의 사실상 수도였던 에도는 막부의 정책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인구가 100만에 육박하는 당시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 중 하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발전한 자기 생산 및 은광 개발 등 상공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경제적으로 획기적으로 번영하고 있었고 현재의 도쿄도인 간토 평야를 개간 하면서 인구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물론 19세기까지는 공식적으로 나라의 문을 닫아왔었으나, 어쨌든 네덜란드와 교류을 이어왔고(나가사키에 인공섬 데지마 설치해서 사실상 무역특구 조성) 그것도 단순히 몇몇 사치품을 들여오는 수준이 아니라 정밀한 인체골격도를 일본어로 번역하고 가라쿠리 로봇을 만들었으며 서양의학을 가르치는 학교(난숙)를 설립했으며 도자기나 우키요에같은 일본의 문화예술이 유럽으로 건너가 자포네스크를 유행시키는 수준이었다.
조선은 그에 비하면 서양과의 직접적 교류는 아예 전무했으며 조정은 외척에 의해 시달려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사회적으론 빈곤과 삼정의 문란에 의한 반란, 신분계층의 동요가 지속되어 비교적 안정되었던 일본의 사회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단적으로 일본은 이미 서구와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외교 경험을 쌓아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급동하는 제국주의 시대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도 일찍 문을 열었으면..."하고 아쉬워 하지만, 물론 분명 매우 늦은 근대화의 시기 또한 실패의 요인 중 하나인 것은 맞다. 그러나 수많은 실패 요인들과 악조건들 중 '하나'일 뿐이며, 그냥 문 연다고 해서 근대화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문을 여는 순간 되돌아갈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대격변을 견뎌낼 수 있는 내공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서구 열강이 각종 문물을 공짜로 베푸는 것도 전혀 아니다. 당장 일본만 해도 19세기 당시 인구가 조선의 2배에 달하고 상공업의 발달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격차가 벌어져 있었음에도 에조 공화국과 내전을 치르고 러일전쟁으로 파산 위기에 처했다가 제 1차 세계대전으로 구사일생하고 연이어 벌어지는 칼부림과 암살 등 내/외부적인 위기가 엄청나게 많았고, 결국 계속되는 위기 끝에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한계에 도달해 몰락한 것이다. 조선보다 자체 여건이 훨씬 우수했던 일본도 근대화 과정에서 몇 번이나 고꾸라질 뻔하다 겨우 성공했는데, 조선이 과연 문을 일찍 열었다고 해서 근대화에 성공했을지 의문이다. 즉 개항을 얼마나 빨리 하냐가 아니라, 얼마나 개항을 위해 적극적으로 준비했냐가 관건인 것이다.
한국인의 '일본은 빨리 개혁개방 했다'라는 인식 자체가 잘못된 것이, 일본은 원래 조선처럼 쇄국을 했고 흑선개항, 즉, 무력을 통해 미국에게 강제로 개항당한 것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이 조선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쳐도 그것이 한민족의 열등함과 야마토 민족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며, 일제 강점기와 그 외 일본의 모든 전쟁범죄들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이 한국의 국력을 능가하는 데 있어서 일본인들이 노력한 요인도 있지만 지정학적인 유리함, 자원의 풍부함, 서구열강의 지원 등 환경적, 외부적인 요인이 적지 않게 있었다. 이는 현 미국이 일본보다 국력이 강한 것이 지정학적인 위치와 풍부한 자원 등의 요인이 크며, 그 때문에 미국이 일본보다 우위에 있음에도 미국이 일본을 침략하거나 지배할 명분이 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