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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현대사(中國近現代史)

Jobs9 2022. 1. 23.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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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현대사(中國近現代史) 

 

 

◐ 가.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성립

중국은 청·일 전쟁과 의화단 운동으로 열강에게 굴욕을 당한데다 변법 자강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청조 타도와 민주공화정을 실현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혁명운동은 처음에는 통일성이 없었으나, 손문이 홍중회 등 여러 혁명 단체를 규합하여 중국혁명 동맹회(1905)를 결성하였다.

 

중국 혁명 동맹회는

① 오랑캐를 구축하여 중화를 회복한다(민족주의),

② 민국을 창립한다(민권주의),

③ 토지 소유권을 균등히 한다(민생주의)라는 이른바 삼민주의를 강령으로 하면서 혁명운동을 조직적인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그러자 청조는 입헌정치의 실시를 선언하였고(1906)입헌파의 국회개설 제원운동에 책임내각을 조직하여 대응했다.(1911년)

 

그러나 이 책임내각은 황족 내각이었기 때문에 입헌파의 반감은 컸다. 게다가 민영철도를 국유화하여 이를 담보로 외국의 차관을 얻으려하자 그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하였다. 사천성에서의 폭동을 필두로 각지에서 폭동과 투쟁이 일어났다.

1911년 10월 10일에는 무창에서 혁명파의 신군이 봉기해 성공하였고, 각지의 혁명파가 호응하여 독립을 선언하여 불과 2개월 만에 전국의 대부분이 혁명파에 가담하였다. 1912년 1월1일 손문을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하고 난징에서 중화민국의 건국을 선언하였다. 이것이 신해혁명이다.

 

이로써 2천년이상 유지되던 황제 지배체제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공화정체제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혁명파의 중화민국은 민중의 기반이 약하여 중국전체를 통치할 수 없었다.

 

혁명 정부의 역량 부족으로 수상의 자격으로 청조의 실권을 장악한 위안스카이와 타협하고, 공화제에 찬성, 임시약법을 준수한다는 조건으로 임시 대총통을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하였다.

 

강대한 무력을 가진 위안 스카이에게 위협을 받아, 2월 쉬안퉁제 (청초 최후의 황제)가 퇴위함으로서 청조는 멸망했다. 1912년 3월 위안 스카이는 베이징에서 임시 대총통에 취임했다.

 

혁명파 송교인은 국민당을 결성하고 의회 투쟁으로 위안 스카이를 견제하려 했으나 위안스카이에게 암살되고, 위안스카이의 혁명파 배제, 탄압이 격화되는 가운데 손문 등은 남부의 각 성(省)을 이끌고 위안 스카이(袁世凱)에 대항하였다. 이것이 '2차혁명'이다.

제 2혁명도 실패로 돌아가, 혁명의 과실은 군벌과 관료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신해혁명은 부르주아적 관념적 지향을 가졌던 지식인 엘리트 계층에 의하여 주도된 혁명이며, 거기에다 청조의 무능과 사회적 제반 정세가 합치된 것으로서 청조의 전제왕조 체제의 몰락과 그에 따른 관념적 해방을 가져 온 정치적 변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신해혁명은 부르주아의 허약성 때문에 실패하고 공화제만 유지한 채 군벌세력이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군벌세력의 등장은 1916년 원세개의 사망이후이다. 사망이다. 원세개가 사망하자 중국은 공화제만 유지한 상태에서 북양군벌시대로 들어갔다. 하나는 단기서를 우두머리로 하는 안휘파로서 일본의 지원을 받고 있고, 하나는 풍국장이 장악한 직예파로 영국과 미국을 후원자로 삼고 있었다.

 

이 두 파가 암투를 벌이면서 이 후의 북경 정부를 움직여갔다. 그러나 원세개라는 강력한 중심을 잃은 후 의양파는 어느 편도 전국을 지배할 정도의 힘을 지니지 못하고, 각 지에 중소 군벌이 할거하여 각각 열강과 연결하여 서로 대립항쟁을 계속하였다. 북경정부는 명목만의 중앙정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민중은 이들 군벌의 야만적인 지배하에 여전히 무권리 상태로 전란의 재난과 전비조달을 위한 가혹한 착취에 시달리고 있었다. 민국의 탄생은 청조의 황제지배를 끝나게 하였으나, 이제는 군벌이라는 이름의 작은 황제의 봉건지배가 이를 대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군벌 할거의 상황은 1928년의 국민정부 수립까지 이어지게 된다.  

 

◐ 나. 공산당혁명

1) 5·4운동

새로운 체제하의 정부가 들어선 1912년 이후 약 10여년간은 정치 분야에서 뿐 아니라 경제와 사회, 사상 부분에서도 갈등과 더불어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창조의 시기였다. 먼저 사회경제 부분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 동안 지속적으로 산업과 교육에 투자한 결과가 토착공업의 발전과 새로운 계층의 출현으로 나타난 것이다. 전통 수공업의 발달은 개항장의 공장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차 세계대전도 중국의 공업의 발전에 좋은 조건을 제공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중국의 경제에 신경 쓸 틈이 없었는데다 수입품도 줄었기 때문에 생산량을 늘릴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사회 계급의 출현도 있었다. 신식 교육 제도가 확대되었고, 유학도 일본을 벗어나 구미 쪽으로 다양화되었다. 여성 교육도 공식 교육의 일부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교육의 양이나 질이 전통 시대와 비교할 때 양적으로 질적으로 풍부하고 다양해졌다.

 

또 민족 공업의 발달과 개항장의 경제적 부흥은 상공인과 전문가 집단을 부흥케 했고, 산업 노동자도 증가하였다. 전통적인 신사의 영향력은 서서히 쇠퇴해 갔으며, 반면 신흥계급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커졌다.

신해혁명 이후 일어난 지적 변화 중의 하나는 구미사상의 수용일 것이다. 특히 프랑스의 유학생들이 정치 문제에 더 민감했는데 이들은 중국의 전통 질서였던 학인과 노동자와의 벽을 허무는데 기여하였다.

 

1910년대의 중국에는 무정부주의의 영향이 광범위하게 작용하였지만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중국의 대동주의 같은 이상들도 서로 혼재되어 새로운 지식인들을 사로잡으면서, 미래의 활력을 제공하였다.

지식인에 의한 문화혁명이라 불리는 5·4운동은 이상과 같은 토대 위에서 가능하였다. 5·4운동은 군벌정치와 제국주의의 중국 지배라는 상황 속에서 진전되었는데, 그 핵심은 신문화 운동에서 시작하여 민족운동으로 연결되었으며, 결국 새로운 사회 체제의 건설로 나아가는 중국 현대사의 서장이었다.

 

신문화 운동은 진독수(陳獨秀)가 잡지 신청년(新靑年)을 발행하면서 시작된다.(1915) 이 운동은 중국의 전제 지배와 원세개의 통치 이념을 비판하였으며, 민주주의 과학을 표어로 하는 계몽 운동을 일으켰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호적(胡適)은 구어체를 사용하는 백화(白話) 운동을 전개하여 문화 혁명을 일으키고 지식의 대중화에 노력하였다.

한편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중국은 일본의 21개조 요구의 취소와 산둥 반도에서의 독일 이권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열강은 이에 승인하지 않았다. 이에 1919년 5월 4일 북경 대학의 학생들은 곧바로 집회를 열면서 파리 강화 조약 거부, 매국노 처벌, 반군벌, 반제국주의, 일화 배척 등을 주장하면서 대규모 시위에 들어갔다.

 

이는 곧 전국의 대도시에 확산되고 마침내 6월초에 이르러 상해의 노동자와 상인이 동조함으로서 목표를 달성하였으며, 일 인해 5.4운동은 대규모의 민중·민족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5·4운동 이후 이 운동의 영향은 여러 부분으로 확산되었다. 그 중 중국공산당의 창당과 중국국민당의 결성은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현실적인 안목에서 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특히 제국주의의 속성이 파리 강화 회의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 일어난 5·4운동 이후, 중국의 민족주의자들은 특히 소련이 중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과 이권을 포기한다는 카라한 선언(1919.7.25)을 발표한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군벌과 제국주의 지배하에 있는 중국을 구할 수 있는 현실 가능한 이념이었음이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당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중국 공산당 당기를 상징하는 낫과 망치.

낫과 망치(☭)는 공산주의와 공산당, 공산주의 국가를 상징하는 기호이다. 이 기호에서 낫은 노동자를, 망치는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를 상징한다. 이 기호는 붉은 별과 함께 소비에트 연방의 기에 사용되었으며 다른 공산주의 국가의 기에도 많이 사용되었다. 구 소련 국기, 루마니아 국기에도 이 기호가 사용되었다.



2) 중국 공산당의 성립과 성장

5·4운동 이후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신문화운동 당시에 형성되었던 문화전선과 사상전선에서의 통일전선이 깨지면서 이데올로기적인 분화와 분열을 경험하였다. 따라서 모택동과 같은 젊은 지식인들은 일종의 사상적 혼돈과 모색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모택동이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에게 술회한 바와 같이, 이 당시의 대부분의 젊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모택동도 자유주의, 민족적개혁주의 그리고 공상적 사회주의 등에 대하여 막연한 열정을 품고 있었다. 아직 마르크스주의야말로 중국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하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문제와 주의의 논쟁, 사회주의와의 논쟁, 그리고 무정부주의와의 논쟁등 3차례의 논쟁을 통하여 맑스주의자들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을 확립하였고 1921년에는 마침내 중국공산당을 창당하였다.

1900년대 초부터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널리 퍼진 무정부주의에 대한 관심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1917년 이후 소비에트 혁명이 중국에 레닌주의를 전파할 때까지 주요한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무정부주의자였다.

 

무정부주의자들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 의존하기를 원했으며, 머나먼 과거의 평등주의적 공동체를 피흘리는 일없이 다시 창조해낼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중국의 무정부주의 문헌에 대한 분석을 보면 그들이 단 한번의 도약을 유교적 질곡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이룰 수 있으리라는 유토피아적 희망에 빠져 있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중국공산당의 창당은 주로 진독수와 코민테른에 힘입은 바가 큰 것처럼 보인다. 신문화운동과 5·4운동을 지도한 진독수는 그 때문에 1919년 여름에 3개월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다. 1920년 가을, 중국공산당의 핵심이 실제적으로 조직되는 데에는 코민테른의 대표인 보이틴스키의 역할이 컸다.

 

1921년 7월 중국 공산당 창당모임에서 중국의 공산주의는 곧바로 "행동이데올로기"로 그 조직의 의식을 확립시켰다. 중국공산당은 무정부주의자나 길드 사회주의자와 결별하고, 계급투쟁의 우선성을 강조했으며, 비밀스럽고, 배타적이며, 권력을 추구하는 중앙집중적인 볼셰비키(즉 레닌주의적인) 정당이 되었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의 창당은 1917년의 볼셰비키혁명과 1919년의 5·4운동을 계기로 급진화된 맑스주의 지식인들의 대두, 1차대전을 전후로 급격히 성장한 근대산업의 발전과 노동자계급의 등장 그리고 소련과 코민테른의 적극적인 동방정책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중국의 진보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반동적인 군벌정치와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세력의 중국침략에 대한 강렬한 저항의식이 팽배하면서 맑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였다.

 

따라서 볼셰비키혁명과 5·4운동을 경험하면서 중국에서 러시아에서와 같이 혁명적 변혁을 실현하여 신중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혁명적 엘리트들이 형성되었으며, 여기에 1차대전을 계기로 비약적으로 성장한 근대산업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점차 활성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국 공산당의 국내적 배경이다.

1919년과 1920년경에 레닌을 비롯하여 신생 볼셰비키정권의 지도자들은 서구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기대가 좌절되면서, 세계혁명과정에서 식민지와 반식민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족해방운동과 노동운동의 역할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당시 이들이 제창했던 "북경을 경위하여 런던으로"라고 하는 슬러건이 시사하듯이 이들은 제3세계에서의 민족해방운동과 노동운동이 서구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인식에서 이들은 식민지와 반식민지 생태에 있는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코민테른 대표단의 권유와 지원에 힘입어 진독수는 1920년 5월부터 주변의 진보적인 청년, 지식인들을 규합, 1920년 8월에 상해에서 중국 최초의 공산주의소조를 결성하였다.

 

상해소조가 발족한 직후, 신문화운동과 5·4운동과정에서 적극 활동을 했던 청년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1920년 9월부터 1921년 1월 사이에 북경, 광동, 장사, 무한 제남에서 잇달아 공산주의소조가 결성 되었고, 이와 동시에 프랑스와 일본등 해외에서도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소조가 결성되었다.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1921년 7월에 소수의 급진적인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창건되었다. 창당대회 당시 총당원은 57명이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5·4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청년지식인들이었다.

 

창당대회 이후 중국공산당의 성격이 좀더 뚜렷하게 정리되면서 창당대회에 참여했던 당원들 중에서 일부는 탈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처럼 소수의 급진적인 지식인정당으로 출발한 중국공산당이 20여년 후에 거대한 대중 정당으로 변모하여 천하통일을 달성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3) 1차 국공합작

중국혁명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한 국공합작은 1차대전 이후 중국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형성, 성장한 상인, 부르주아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계급들 사이에 반군벌 반제운동이 확산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당이나 신생공산당의 독자적인 힘만으로는 국민혁명을 실천할 수 없다고 인식하고 역사적인 계급연합을 모색함으로써 실현되었다.

 

그러나 신생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이 이 같은 계급연합의 원칙을 수용하고, 마침내 국공합작에 합의하기까지 소련과 코민테른의 역할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떤 점에서는 국공합작이 소련과 코민테른의 집요하고도 끈질긴 정치 공작의 소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소련과 코민테른은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를 오가며 계급연합과 국공합작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구체적인 합작형식에 대해서도 깊이 간여하였기 때문이다.

1925년 3월 손문이 갑자기 사망한 이후 그의 추종자들은 1926년에서 1927년 사이 광주에서 양자강 주류 지역으로 진출한 북벌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새로 훈련을 받은 국민혁명의 선전가들은 소련의 무기와 고문들의 도움을 받은 장개석의 군대를 선도해나갔다.

 

북벌에 나선 6개군은 중국 남부의 약 34개 군벌세력을 패배시키거나 흡수했다. 1927년 봄의 바로 이 시점에서 혁명의 좌파와 우파 사이에 잠재되어 있던 균열이 마침내 완전히 표면화되었다.

 

2년 동안 운동 내부의 좌파와 우파는 전반적으로 협력해왔다. 물론 장개석은 1926년 3월 자신을 납치하려는 음모를 저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광주의 좌파들을 체포한 적이 있었는데 이 중산함사건은 중국공산당원인 이지룡이 지휘하는 중산함이 광동서 황포로 회항한 것으로부터 발단되었다.

 

장개석은 중산함의 회항을 자신에 대한 공산당의 반란음모라고 규정하고 광주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동시에, 이지룡 체포명령과 보르딘을 비롯한 소련 고문단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는 1923년의 3개월 동안의 소련 시찰을 통해서 소련의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의 목표를 의심하고 있었다.

1927년 3월 26일, 장개석은 공산당이 주도하는 노동자들의 무장봉기로 이미 해방된 상해에 무혈 입성한 후 약3주일 동안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아마 장개석은 이미 이때 일본과 미국등 제국주의열강들과 교섭을 하면서 상해 반공쿠테타를 구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927년 4월 12일, 드디어 장개석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백승희부대와 상해의 비밀결사인 청방, 홍방을 동원하여 노동자들과 중국공산당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 처형하는 대탄압을 자행하였다.

 

중국공산당에 의하면 4월12일부터 15일간에 걸친 장개석군의 백색테러로 상해에서만 약3,000여명의 노동자가 피살되었고, 500여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반공테러는 상해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장개석의 상해 쿠데타를 계기로 반공적인 국민당 우파와 국민당 세력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공개 탄압이 자행되었다.

 

이와 같이 국공합작의 기조를 뿌리째 파괴한 장개석의 상해쿠테타는 당연히 무한정부(북벌군이 상해를 제외한 양자강 이남지역의 주요도시를 점령한 시점인 1926년 11월말에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은 광주에서 정부의 각기관을 광주에서 무한으로 이전할 것을 결정했다.

 

따라서 국민당좌파와 공산당의 각급 지도자들이 무한에 집결하여 1927년 1월1일에 정식으로 무한정부의 성립을 선포하였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무한정부는 4월 17일 장개석의 당적 박탈과 체포령을 내렸다. 그러나 장개석은 이에 대항하여 1927년 4월 18일 자신이 주도하는 남경 국민당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로써 국민혁명을 추진해왔던 국민당정부는 무한정부와 남경정부라는 두 개의 정권으로 분해되었고, 그 동안 국민혁명을 이끌어온 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사이의 국공합작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받게 되었다.

4) 홍군의 창설

1927년 7월, 무한정부가 반공노선을 선언하고 남경정부에 합류함으로써 국민당은 장개석을 중심으로 통일되었고, 이같은 통일된 국민당을 바탕으로 제2차북벌을 단행하여 1928년 8월에 북경에서 장개석을 수반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수립됨으로써 국민혁명은 국민당의 주도로 완성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군벌세력은 여전히 잔존하여 끊임없이 국민당과 장개석의 지배권에 도전을 하였고,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위협은 날이 갈수록 증대하여 국민당정부의 국가건설을 방해하였다.

국공합작이 붕괴된 이후 장개석과 국민당이 중심이 되어 통일정부의 수립과 민족국가의 건설 추구하고 있는 동안, 중국 공산당은 생존을 위한 길고 고난에 가득 찬 투쟁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무한정부와의 결별이 선언되면서 시도했던 무장봉기의 참담한 실패, 산간벽지에서부터 시작한 농촌혁명과 소비에트정권의 구축시도, 그리고 국민당정권의 집요한 공격으로 혁명근거지를 포기하고 장정이란 이름으로 진행되었던 도피행로등으로 이어지는 이 시기의 중국 공산당 역사는 그야말로 시련과 좌절로 가득찬 파란만장한 역사였다.

 

그러나 국공합작이 붕괴된 이후부터 항일통일전선의 형성과 연안시대가 개막되기 이전까지의 시기는 중국공산당이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강인한 혁명정신과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을 할 수 있게 한 시기이며, 동시에 도시혁명전략으로부터, 농촌혁명전략으로, 그리고 신민주주의 혁명전략으로 전환해감으로써 마침내 중국혁명의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시기였다.

 

국민혁명과정에서 혁명의 좌절이란 위기에 봉착한 중국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즉각적인 반응은 노동자와 농민을 조직하여 무장봉기를 감행함으로써, 중국혁명을 심화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은 1927년 8월1일 남창봉기를 비롯하여, 9월의 추수폭동, 12월의 광주폭동 등을 잇달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무장봉기는 하나같이 실패하였다. 후일 당사는 이 시기의 당의 노선을 좌경 모험주의노선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이시기에 중국혁명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홍군이 창설되었다는 점에서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농촌을 근거지로 하는 공산혁명은 1927년 말부터 강서성과 호남성의 경계지대에 있는 정강산에서 시작되었다. 일련의 봉기가 실패 한 이후 이곳에 숨어든 모택동과 주덕 등은 농민과 군사력의 결합을 통해 근거지를 성립함으로서 영토와 주민, 군대 등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1931년 강서성의 서금에 중화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는 단계로까지 발전되었다.

 

이곳에서는 정부조직, 법령, 토지제도, 군대 편성과 전술등이 형성되었고, 토지도 과감하게 분배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 강서 소비에트는 공산 정부에 필요한 요소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모택동 등은 서서히 권력을 장악하였다. 소비에트 정부는, 그러나 국민당군의 5차에 걸친 대공격으로 붕괴되어, 결국 남서부 지방을 지나 서북 지방에 위치한 연안에 이르는 대장정(국민당 권력의 주변부에 새로운 근거지를 발견하는 일. 하루에 17마일씩을 걸으며 이동. 출발 당시 군사인원은 86,000명이었으나 1년후 섬서성에 도착했을 때는 그 수가 겨우 수 천명에 지나지 않았음.)을 할 수밖에 없었고, 최후로는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5) 남경정부

1928년 남경에서 성립한 국민정부로서 1912년 이후의 정부 가운데 가장 장래성 있는 것으로 보였던 정부이다. 그 관료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외국에서 교육을 받은 애국자로서 근대적인 민족국가를 운영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시민사회가 건설되는 듯 했다. 그러나 남경의 국민당 독재에 내재되어 있던 약점은 전쟁을 대비하고,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더욱 악화되었다.

손문의 3단계 혁명이론(군사적 통일, 정치적 지도, 입헌민주제를 나타내는 軍政, 訓政, 憲政의 세 단계)에 따라서 1929년은 국민당의 독재 아래 훈정의 시기가 시작되는 첫해라고 선포되었다.

 

1924년 1월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어 소련식 조직을 채택한 이래로 중앙집행위원회가 주된 정치적 권위의 원천이 되었다. 정부의 고관은 중앙집행위원회에 의해서 선발되었으며, 보통은 이 위원회 출신이었다. 당조직등을 담당하는 부서들은 중앙행정부의 일환으로 기능을 하게 되었지만 아직 형식적으로는 정부가 아니라 국민당에 속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해서 국민당은 관료주의의 소굴이 되어버렸고, 그 혁명적인 임무를 상실했다. 대중조직들은 국민혁명을 위한 대중의 지지를 얻게 해주었지만, 이제 남경의 권력 소유자들은 대중집회에 대해 반대하였다. 이런 모든 행동들은 1920년대 중반의 군벌을 때려부수기에는 유용한 도구였지만, 통제를 위해서 사용될 권력이 지금은 자신들의 것인 만큼 이제는 더 이상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부르주아적인 지향을 보이기는 커녕 국민당은 상해 상인들의 반(半)자치를 파괴해버렸다. 유괴와 납치라는 갱단의 수단을 사용하면서 국민당은 상인들로 하여금 군대에 거액을 기부하도록 위협했다. 새로운 사회국(社會局)이 이제 전문조직들을 감독하고, 마찰을 조정하고, 통계를 수집하고, 자선사업을 추진하고, 위생과 안전시설을 유지하고, 도시계획을 조직했다. 관리들은 모든 것을 상인들로부터 넘겨받았다.

남경정부 치하에서 개선된 점에는 1931년의 임금 폐지와 관세자주권 회복이 포함되어 있었다. 1933년 3월에는 근대적인 은원(銀元)제도가 도입되고 전통적인 은냥(銀兩)제도가 폐지되었다. 외국의 원조자금을 취급하기 위하여 전국경제위원회(全國經濟委員會)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35년의 폐제개혁(幣制改革)을 통해서 4대 주요 은행이 중앙은행으로 정해졌으며, 지폐인 법폐(法幣)가 인플레이션의 영향을 받는 관리통화로 정해졌다. 정부는 은행분야의 2/3 이상을 장악했으며, 상공업에 더욱 많은 세금을 부과했고, 화물(貨物)에 대해서 통세(統稅)를 부과하고, 관세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정부가 생산적인 기업에 투자하여 경제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인 기업을 이용하여 그 권위를 강화하고 있는 동안 고위관리들은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다. 토지세(田賦) 수입을 포기하여 성정부에 넘겨주었으므로 남경정권은 기생적으로 갖가지 교역에 대한 세금수입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남경정권이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보호했어야 할 공업분야에 오히려 장애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결과 남경정부는 자기유지적인 재투자와 공업화라는 진정한 과정으로 비약해나가기는커녕, 건전하고 융통성 있는 재정제도 조차 확립시킬 수 없었다.

1926년의 북벌 이전에 광주의 국민당은 손문 세대의 중국동맹회의 생존자들과 국민당과 중공의 당적을 함께 지니는 일이 많았던 젊고 이상주의적인 행동주의자들을 포용하고 있었다. 보로딘으로 대표되는 소련의 영향은 장개석의 군사적인 지도력의 확대와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력적이었던 장개석은 5년도 되지 않아서 국민당의 운동의 성격을 바꿔 놓았다.

 

그 배경은 간단히 말해서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국민당은 그 성격이 바뀌었던 것이다. 결국 국민당은 공산주의자에 대해서 상해 지하세계의 청방을 이용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했다. 처음에는 많은 중국인들이 남경정부를 지지했으나, 낡은 관료제의 폐해는 그들을 곧바로 실망하게 만들었다.

 

국민당의 경찰은 공산당을 파괴하기 위한 백색테러뿐만 아니라 다른 정당이나 직업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을 공격하고, 탄압하고, 때로는 처형했다. 언론은 존속되었지만 아주 심한 검열을 받았다. 출판업자들은 시달림을 받거나 때로는 암살당했다.

 

전문학교와 대학들은 통제되었고, 삼민주의를 가르치도록 강요되었으며, 비정통적인 경향에 대해서 끊임없이 감시를 받았다. 대중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친공산주의자로 몰렸다. 이러한 엄격하고 헌신적인 조국의 통일자가 되기를 바랐던 장개석에게 무거운 짐을 지어주었다.

 

1932년이 되면서 그는 강력한 지도력을 약속해주지 못하는 서양식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자신의 당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남의사(藍衣社)로 널리 알려진 파시스트 집단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남의사는 무솔리니나 히틀러처럼 비밀리에 장개석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옹립하고 봉사하는 데 헌신할 수천명의 열광적인 군장교들을 조심스럽게 선발하여 조직되었다. 1934년 낡은 도덕은 주입과 개인행동의 개선을 위한 신생활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그 대부분은 배후에서 남의사가 추진하고 있었다.

오원제(五院制)국민당 정부의 모든 기능은 장개석이 이끈 군사위원회가 거의 도맡고 있었다. 군사위원회는 남경정부 세입의 대부분을 사용했으며, 사실상 그 자체가 하나의 군사정권이었다.

 

자연스럽게 소련의 고사고문들을 제거한 다음 장개석은 곧 이 군사고문을 독일인들로 대체하기 시작했으며, 국민당정 부와는 아예 분리된 군사적인 편제를 확립시켰다. 그는 또한 오원제 국민정부의 주석(主席)직도 맡고 있었다. 독일인 군사고문단은 거대한 군사조직을 훈련시키기 시작했으며, 그것을 위해서 독일의 산업적인 지원을 받는 것을 계획하기도 했다.

 

이렇게 1937년 일본의 공격이 있기까지 국민당 정부는 나치 독일과 장래성 있는 관계를 꾸며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치 독일과 일본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평행적으로 발전했고, 1939년 8월 나치 독일이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자 중국은 독일 대신 여전히 최소한의 분량에 지나지 않는 미국의 원조에 의존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6) 제2차 국공합작

국민당 장개석 군대의 장시[江西:강서] 소비에트에 대한 포위를 벗어나 장정(長征)의 길에 오른 중국공산당은 1935년 8·1선언을 통하여, 만주사변 후 극심해진 일본의 중국침략에 대한 항일민족 통일전선을 제창하였다.

 

1936년 시안[西安:서안]사건, 즉 북방의 군벌 張學良이 공산당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독려하기 위하여 찾아온 장제스를 감금하였다가 극적으로 석방한 사건을 계기로 내전반대·일치항일(一致抗日)이라는 국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국민당 역시 협력관계를 모색하게 되었으며,

 

1937년 7월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항일통일전선이 형성되었다.

 

공산당군은 팔로군(八路軍)·신사군(新四軍)으로 개칭되어 전선에 배치되었으나, 국민당은 합작에 두려움을 느껴 1938년경부터 적전내전(敵前內戰)이 시작되어 분열을 거듭하던 중 1945년 일본의 패망을 맞이하였다.

 

그 후 전면적인 내전에 돌입, 공산당의 인민해방군이 승리함으로써 1949년 10월 중화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국민당의 지도부는 타이완[臺灣:대만]으로 패주하였다.

7) 항일전쟁

항일전쟁시기에 중국인민들은 크나큰 희생을 치르게 되어, 경제는 파탄되고, 현대적 산업과 국민총생산의 면에서도 발전은 커녕 오히려 엄청난 후퇴를 하게 된다. 중국의 근대화를 향한 흐름이 또 한번 단절된 것이다.

 

부단히 핍박해 오는 일본을 바라보면서, 1935년 봄에 장개석은 내정과 외교. 군사. 재무에 대한 각 분야의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일제가 동북지역으로부터 남하하여 내려오는데 대비하여 국제적 지원, 특히 소련으로부터의 지원을 적극적으로 얻어내는 동시에, 화폐를 개혁하고 자원의 절약과 개발로 전쟁물자를 준비하였다.

 

3년간의 국방계획을 세워 육군을 새로이 편제하고 병역법을 실행하여 신병을 모집하며 군사공업을 일으키는 동시에 군비를 강화하고 전략상의 요충지에 국방공사를 벌였다.

 

장개석은 일본과의 싸움이 장기화될 경우 광대한 중국영토 중에서도 서남과 서북지방이 최후의 결전지가 될 것으로 예견하고, 서남지방의 개발을 강화하여, 서북지역의 국경선 밖으로 통하는 철로와 국도를 건설하였다. 또 '신생활운동'을 통하여 국민정신을 진흥하고 문화재를 보호하여 서남지역으로 옮겼으며, 대학들을 이전하는 등등의 일을 추진하였다.

중국국민당이 위와 같은 활동을 하던 시기에 중국공산당은 '9.17사변'부터 시작하여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여 활동하며 '7.7사변'때에는 중공이 이끄는 동북 항일연합군이 이미 4만5천명에 이르렀고, 일본군과 중국영토 내에서 일본군으로 편성된 괴뢰 일본군 14만을 섬멸하기도 하였다.

 

1935년 중공이 발표한 [항일구국을 위해 전체동포에게 고하는 글]에서는 전체 동포는 총동원하여 일제히 일본과 싸우자고 호소한다.

 

중공의 홍군(紅軍)은 계속하여 선언을 발표하고, 전민족이 항일 통일전선을 구축할 것을 호소하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중국내부에서는 내전을 끝장내고 연합으로 항일하자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마침 국. 공합작이 구체적인 단계로 진입할 즈음 일본군이 '노구교사건" (1937년 7월7일 북경으로부터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노구교에서 벌어진 사소한 총격사건을 구실로 군사적 압력을 가중한 사건)을 일으키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7.7사변'이라고 칭한다.

 

중국군의 수비대가 용감히 저항하는 가운데 항일전쟁은 더욱 확대되어 중국민족의 존망이 위급했던 그 해 가을 국·공의 제2차에 걸친 항일민족통일전선은 드디어 정식으로 성립 되었다.

 

항전 초기에 국민당 군대를 주체로 한 정면의 전쟁터는 1년 3개월동안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는데, 1938년 10월 중국영토의 반이 이미 점령되는 등 중화민족의 생존위기는 절정에 달하게 되었고, 중국영토 중 식민지로 전락한 지역과 인구는 최고조에 달한다.

일본 제국주의는 그들이 닿는 곳마다 직접적인 전쟁과 기타의 폭력 등 강제수단으로써 중국을 정복하는 것 이외에도 날조된 정권을 배양하려 하였다. 일본군의 이름으로 된 괴뢰군과 그들의 앞잡이들은 식민통치의 도구가 되었다.

 

1941년 일본이 계속적인 남진을 결정하고 소위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건립하는 한편, 미국의 태평양 해군기지 진주만을 기습하고, 영국의 전략요충지인 싱가포르에까지 진군하자 전쟁은 이른바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연합군측 진영도 그 세력이 더욱 확대되었고, 1942년에는 중·미·소·영 등의 26개국이 독일·일본·이탈리아 등의 파시스트 연합을 멸하기 위한 연합전선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1943년 세계 반파시스트 연합국은 동·서양에서 동시에 반격작전에 돌입하였다. 1945년 8월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 1개씩을 투하했고, 소련의 100만 대군이 중국 동북부와 조선을 공격했으며, 중국군도 전국적으로 반격해 돌입하였다.

 

그 결과 8월 15일 일본정부는 정식으로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로써 8년간 이어진 중국의 전민족 대일항전은 끝이 나고 중국의 군과 민은 함께 괴뢰 일본군 171만 4천명을 섬멸하였으며, 중국은 갑오 청일전쟁 이래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던 타이완을 포함한 전영토를 돌려받았는 데, 이는 아편전쟁 이래 근·현대사상에서 국내와 국제 두 통일전선의 공동작용 아래에서의 첫번째이자 맨 마지막으로 얻은 민족해방 전쟁의 승리이다.

이 8년의 전쟁기간에 일본은 전쟁의 계속적인 확대기지로 중국을 활용했으며, "전쟁으로 전쟁을 키워" 나갔다. 그들은 중국 동북지방에서 전쟁경제 체제를 활용하여 식민지 근대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두 가지의 산업 5개년계획을 세워 이 동북의 자원과 인력을 광적으로 약탈했는데, 전체 산업중에서 군사공업과 유관한 분야는 현저한 발달을 이룩했지만, 일본자본이 절대적으로 농단을 하는 상황이었다.

 

일본의 동북에서의 자본은 14억 5천만 달러에서 57억 4천만 달러로 근 3배가 늘었는데, 일본의 관내자본까지 합하면 모두 68억 달러가 된다. 이것은 전쟁기간에 추진한 전형적인 식민지 근대화계획이었다.

8) 국공 내전(1945~49년)

장개석과 국민당이 내전에서 패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인데, 패한 데에는 전장에서의 어리석음과 전선 후방에서의 무능력 두 가지 모두가 작용했다. 장개석은 중국을 통제하는 방법에 대해서 시대착오적인 가정을 했는데, 화북지역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확립하지 않았고 미군이 훈련시킨 정예부대를 직접 동북으로 이동시킴으로써 군사적인 재난을 불러들였다.

 

국민당의 전장에서의 무능력은 후방에서의 실정과 맞물려 있었다. 그것은 경제에서 먼저 시작되었는데, 지폐가 늘어남에 따라 인플레이션의 폭등세를 보인 것이다.

 

농촌지역에서는 여전히 기근과 고리대가 지속되고 있었지만, 일본으로 부터 해방된 지역에 국민당군이 돌아온 것은 세금과 징발의 부담만 늘어나는 것을 의미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잘못된 경제운영 외에도 국민당 정부는 도시민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으며 그 결과 중국 민중의 주요한 구성요소인 이들로부터 소외당하게 되었다.

 

또한 학생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에도 실패했다. 정부는 투기꾼과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는 관리들에게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은 채 일반인에게만 세금을 거두는 일을 계속했다. 국민당측의 또 다른 정책의 실패는 대중적 평화운동에 대한 묵살과 탄압이었다. 바보스러운 경제정책이 도시의 중산층이나 산업 자본가들을 소외시킨 것처럼 학생들을 국민당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했다.

 

이런 식으로 국민당 정부는 민중의 지지를 잃었고, 중공보다 더 내전을 선동하는 것으로 보이게 하였다. 국민당 정부는 너무 군사화되어 있어 대중에게 봉사하는 정부로서의 기능은 무시한 채 오로지 내전에 의한 군사적인 해결만을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국민당 정권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자유주의자들은 국민당이 중공을 더욱 인기 있는 정권으로 성장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1946년 이후 중공의 권력 강화는 우선 화북 농촌의 농민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중공 정권의 계획은 토지개혁으로의 복귀였다. 토지개혁은 지주나 다른 토호들의 경제적, 사회적인 영향력의 박탈과 중립화 또는 파괴를 의미했으나, 반면에 중공의 지도 아래 농촌을 지배하게 된 빈농 출신 행동가들의 영향력은 크게 확장되었다.

 

이 결과 화북 전역의 농촌은 홍군을 계속지지하게 되었다. 국민당군은 과거 일본이 중국에 가한 것과 상당히 유사한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공의 군대는 단순히 물러서기만 할 뿐 맞서서 싸우는 것을 포기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압도적인 힘의 우세를 누릴 수 있는 소규모 국민당군하고만 싸울 뿐이었다.

 

동북으로 침투한 화북의 간부들이 열정적인 노력으로 지방에서의 생산의 조직화, 농촌에 대한 사상교육, 토지개혁, 새로운 간부의 양성, 애국적인 전쟁에서 단결하기 위한 대중과 군대의 충원작업 등을 수행했다. 이것은 강력한 계획 아래 숙련된 사회적 공작의 기술을 적용하여 이루어낸 광범위한 성취였다. 그것은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

국민당도 여전히 이런 과정을 도와주었다. 남쪽에서 왔기 때문에 그들은 동북의 지도층을 불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민당은 동북에 세우려는 정권에 임용하기 위해서 자기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반면 중공은 지방 지도층에 영합하여 그들을 남쪽에서 온 침입자에게 대항하도록 동원했다.

 

국민당의 오만, 욕망과 부패가 재난을 낳았다. 즉, 그들은 공산당에 기울어진 대중으로부터 지방의 정보를 얻어내지 못했으며, 무거운장비 때문에 꼼짝 못 하게 되었고, 행군속도가 너무 늦어 매복이나 간헐적인 측면공격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전은 필연적으로 농촌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서는 대중동원이라는 면에서 중공이 정보와 병참의 우월성을 누리고 있었다. 중공은 결국 투항한 장개석의 군대로부터 노획한 미제 무기와 동북에서 소련의 용인 아래 확보한 일본군의 무기를 이용하여 전쟁에서 승리했다. 1949년에는 모택동이 지도하는 중공이 중국을 떳떳하게 정복했다.

 

중국의 실적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는 중국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이들의 지원을 얻기 위해서 국민당의 모든 부패와 인권침해를 신속하게 비난하는 행동을 취한 공산당 선전가들이 내놓은 광범위한 비판을 토대로 이루어져왔다.

 

사실 국민당은 근대화, 반동 이 두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따라서 국민당의 악행은 부분적으로 독립적인 언론이나 때로는 검열을 받지 않은 외국 언론인에 의해서 공개될 수 있었다.

1945년 이후에 국민당이 대만을 장악한 것은 제 1급의 재난으로 판명되었다. "해방이 되는"대신 대만의 중국인들은 적에게 협력한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개인적인 약탈을 추구하는 국민당군과 정치인들에 의해서 물자가 몰수되었고 경제는 엉망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사살되었다.

 

중국적인 정치질서의 기본적인 법칙, 즉 정치적인 반대파는 불충한 자들이므로 죽여버려야 한다는 무절제한 독재정치적인 전제에 바탕을 두고 있는 중국의 후진성의 승리였다.

1949년 장개석이 이 섬으로 피난했을 때 그는 밑바닥의 상황에서 출발하여 그 다음 40년 동안에 중화민국의 성공담을 펼친다. 성공의 원인 가운데 첫 번째의 요소는 중국적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국민당과 정부를 되살리고 깨끗하게 만들려고 노력한 장개석은 이들을 환영했다. 냉전시기의 미국에서는 중화민국(대만)을 지원하는 것이 주요한 문제가 되었다.

 

미국의 원조와 보호는 대만의 발전을 도왔다. 본토로부터 쫓겨났지만 대만 국민당의 중화민국은 1971년까지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상임이사국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대부분의 유엔 회원국으로부터 "중국"으로 인정을 받았다.

 

미국의 원조계획은 1968년까지 지속되었고 군사원조는 그 이후에도 이어졌다. 1971년 대만이 유엔에서 축출되고, 미국이 197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대만의 관계는 일본과 대만의 관계처럼 비공식적인 외교관계로 유지되었다.

대만의 번영은 정치적인 발전을 피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비록 일시적으로는 대만성, 그리고 복건성의 몇 군데 섬에 한정되어 있지만 국민당 독재정권은 여전히 전중국의 합법정부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남경에서 쫓겨나온 장개석 정부는 대북에 자리를 잡고 대중에 있는 대만성의 정부보다 우월한 중앙정부의 지위에서 통치했다. 1975년에 장개석이 죽은 다음 그의 아들인 장경국이 당과 정부의 통수권을 이어받았다.

 

1988년에 죽기 전에 장경국은 계엄령(약 44년간 실행)을 폐지하고 본토로의 여행을 허용하고 국내정치를 민주화했다. 그의 계승자들은 일본과 미국에서 교육받은 대만인이었다. 다원주의가 어느 정도 성취된 것이다.

◐ 다.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1) 대약진(大躍進)운동

사회주의 개조가 완성단계에 들어가고 제1차 5개년 계획도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한해 앞서서 그 목표를 달성할 기미가 보이자 모택동은 1955년 12월 6일에 반우파에 관한 담화가운데 모든 공작은 우쾌(又快), 우호(又好), 경다(更多), 경쾌(更快)하게 사회주의로 진입하자고 하였다.

 

따라서 1956년초에 들어와 무조건 앞으로 돌진하자는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대약진이란 구호는 1956년 신년호의 [인민일보]에서 <5년 계획을 보다 빨리, 그리고 초과 달성하기 위하여 분투하자>란 사론에서 사회주의 건설방침을 제출하였다.

 

그리하여 당내에는 보다 빠르게 약진식으로 발전하는 방침과 종합적으로 평형을 이루면서 안정되게 발전하자는 방침을 주장하는 두가지 경제 건설 지도 방침이 나타나게 되었다.

 

노동자와 무산계급을 상징하는 공산당기의 기호를 배경으로한 포스타



1957년 9월, 8기 3중전회 후 각 성·시·자치구에서 당의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3중전회의 정신을 전달하고 이를 관철시키도록 하였다. 즉 우경 보수사상을 반대하고 빠르게 좋게 많이 경제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생산 건설을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대약진의 야심은 주은래의 말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공업 생산량이 매년 20%정도 혹은 그 이상이면 소약진이고, 25%정도 혹은 그 이상이면 대약진이며 30%이상이면 대대약진"이라 하였다. 대약진이란 말은 <인민일보>의 1957년 11월 13일자 사론인 <전민을 발동하여 40조 강요를 토론하고 농업생산의 새로운 고조를 일으키자>에서 비롯되었다.

 

중공 중앙과 모택동이 제출한 <농업발전강요 40조>에 따르면 '15년안에 영국을 따라 잡는다'와 '고전 3년만 하면 면모를 바꿀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같은 구호아래 전국의 농.공업 전선에서는 선진 기술을 배워 선진을 따라잡자는 노동시합을 전개하였다.

 

왜냐하면 이미 긴축된 경제를 계속 발전시킬 수 있는 관건은 중국의 잉여 노동력이고, 또 하나는 노동자들의 각성과 창조력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그 밖의 중국사정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또한 경제 발전의 규율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다.

이 운동은 8전 대회 2차 대회이후 급속도로 형성되어갔다. 그리하여 내부적으로 7년에 영국을, 8년 혹은 10년안에 미국을 따라 잡는다는 전제아래 우선공업 생산의 지표를 높였다.

 

중앙이 제출한 1958년의 지표는 철강이 원래 620만 톤이었는데 이를 800만 톤에서 850만 톤으로 늘려놓았다. 6월에는 각 대구(大區)에서 철강계획회의를 소집하여 1958년의 생산 목표를 1957년의 배이상인 1,070만 톤으로 늘려잡았다. 이처럼 철강을 중심으로 전면 약진하자는 방침아래 그밖의 다른 공업 생산지표도 올려 놓았다.

그러나 3년 동안의 대약진 운동은 중국을 발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중국 경제를 어렵게 만들었다. 우선 농업 생산량에 있어 1960년의 식량 생산은 겨우 14,350만 톤으로 1차 5개년 계획의 마지막 해인 1957년보다 5, 155만 톤이 감소되었고, 심지어 1952년 수준보다 밑돌았다.

 

그러나 정부에서 거두어들인 양은 계속 늘어나서 1960년에 1,021억근으로 1959년보다 60억 근이나 증가하였다. 따라서 생산량은 감소되고 정부에서 거두어들인 양은 늘어나 농민들에게 식량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식량 부족은 가축의 사육 수를 크게 감소시켜 돼지의 경우 1960년에 8,227만 두로 1957년의 14,590만 두와 비교하여 약 반에 가까운 감소율을 보였다. 노동력을 제공하는 소의 경우 1957년의 5,368만 두에서 1960년에는 3,818만 두 밖에 되지 않았다. 한편 경제 작물도 생산량이 크게 감소되었다.

경공업부분은 1958년을 기준으로 1960년에 9.8%, 1961년에 21.6%가 하락되었으며, 그 결과 생활 필수품도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반하여 중공업 부문은 크게 증가하여 연평균 49.4%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농업과 경공업이 발전하면서 중공업이 발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공업의 발전은 기형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기형적인 발전 때문에 도시의 인구는 증가하고 노동자 수도 급격히 늘어났다. 반면에 농업과 경공업의 퇴보로 이들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됨에 따라 필수품의 공급 부족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전반적인 인민생활 수준이 낮아졌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1인당 식량소비는 406근에서 327근으로 19.4%가 감소되었는데, 이 가운데 도시는 1.7%, 농촌은 23.7%가 감소되었다. 북경. 천진. 상해. 요녕 등지의 식량창고는 거의 비어있는 위험 상태였다.

 

그리고 임금의 경우도 1961년 전민소유제 단위의 평균 임금은 537원으로 1957년의 637원과 비교하여 15.5%가 감소되었다. 따라서 무가상승과 상품의 부족 현상으로 공직자와 근로자의 생활수준도 평균 30%가 낮아졌다.

2) 문화대혁명

1966년 5월에는 이른바 "역사상에 유래가 없는 무산계급의 문화대혁명"이라는 것이 발동되었다. 1966년 5월 7일, 모택동은 임표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써주었다.

 

5.7지시라고 부르는 그 편지를 보면, 그가 발동한 문화대혁명의 뜻은 친히 하나의 공산주의 방식 혹은 무산계급 전제정치의 방식을 창출하여 농업, 공업, 문(文), 무(武)를 막론하고 어떤 업종에서든지 혁명으로 매진하기를 바랐던 것으로, 말하자면 중국 전체를 모택동 사상의 큰 학교이자 공산주의의 큰 학교로 만들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또 자본주의에 진입하기 이전단계로서 하나의 저생산력 수준의 간략화된 군사공산주의가 대체적인 그 모델이었다. 이것을 건설하는 일꾼으로 모택동은 돈에서 나는 구리냄새와 자본주의시대에 창조된 더러운 문화에 '오염'된 적이 없는 오로지 순수하고 질박한 농,공업의 일꾼을 지목하였다.

 

즉 이들을 주축으로 한 '무산계급의 문화대혁명'을 통하여 자산계급과 일체의 수탈계급 및 그 사상, 문화의 잔재들을 청소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곧 '天下大亂'을 통해 천하제일의 정치인 '天下大治'에 도달한다는 것이었다.

문혁이 개시되자마자 중앙문혁 소조는 여기저기에 불을 붙이기 시작하는데, 베이징대학교 등에서는 베이징대학교와 베이징시위원회의 문제들에 대해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하였고, 6월 1일 [인민일보]에 문혁소조가 심의, 결정한 '온갖 악당들을 청소하자'는 사설을 싣게 되면서 이른바 '5.16통지'의 주요내용과 그 정신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들은 '인민일보'와 '해방보' 등 두 신문과 '홍기'라는 잡지에 사설과 글을 발표하여 철저히 '비밀결사, 비밀조직, 비밀기율'을 소멸할 것을 호소하는 동시에 중앙문혁 소조구성원 및 그 연락을 담당한 '좌파'인물들은 한 패거리가 되어 호풍환우(바람과 비를 부르는 요술)처럼 가는 곳마다 소란의 기치를 펼치면서 '온갖 악당들'을 때려잡자는 군중적인 운동의 선풍을 일으켰다.

기존의 당·정의 지도자들은 '반당, 반사회주의, 반모택동사상의 비밀연락 조직'이라고 매도되었고, 학교 안의 당조직도 그대로 반신불수가 되어 버렸으며, 많은 전문학자들의 학문도 반동적 학술로 간주되어 비판의 화살을 받게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대학과 중등학교도 "학업을 중지하고 혁명을 하러" 나서면서 중국 전체는 곧 무정부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 해부터 전국의 대학은 계획에 의한 학생의 선발을 6년이나 중단하여 중국의 대학교육은 단절되어 버렸는데, 나중에 중국의 현대화를 위한 인재의 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이것은 엄청난 손실을 불러온 것이다.

모택동을 지켜드리고 붉은 정권을 보위하는 군대란 의미로서의 '홍위병'은 "네 가지 낡은 것(四舊)-낡은 사상, 문화, 풍속, 습관-을 깨버리자" 하면서, 몽둥이로 때리고 부수고 약탈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체포하면서 전국을 휩쓸기 시작한다.

 

베이징에서만 8,9월 이달간에 1천여 명이 몽둥이에 맞아죽었으며, 베이징의 통현(通懸)에서는 이른바 '4류분자(지주, 부자, 반력명분자, 악질)' 22호가 몰살되었는데, 80세의 노파로부터 태어난지 38일밖에 안된 영아에 이르기까지도 '4류분자'였으므로 처참한 죽음을 면하지는 못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은 '온갖 악당들'로 불리며 몽둥이를 맞고 모자를 쓴 채 목에는 패를 걸고 자아비판 투쟁을 하면서 시기를 행진하고 그 집안은 약탈당했다. 그 결과 약 40만의 '온갖 악당들'이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추방되었다.

 

더구나 학술계, 교육계, 언론계, 문예계, 출판계(이른바 5계)는 맨 꼭대기부터 공격을 받아 지식인들은 모두 사라지고 마치 짐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능욕을 당했다.

 

각종 도서, 문물, 골동품들도 유래 없는 재난을 당하여, 통계에 의하면 6,843개소의 문물이 파괴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기초 위에 모택동은 또 "자산계급의 반동노선을 철처히 비판하라" 며 '좌'위에 또 '좌'를 더욱 강화했다.

 

더욱 고무된 소란파(홍위병과 각 지역에서 이때를 틈타 권력을 장악한 이른바 '혁명'세력)들은 가는 곳마다 "불질러 버리고", "관리를 끌어내리는" 짓을 계속하였다.

 

1967년 신년이 시작되자, 중앙문혁 소조의 사주를 받은 '상하이시 노동자 혁명사령부' 두목 왕홍원(王洪文)이 이끄는 한 부류의 '문혁'조직이 무력으로 상대조직을 짓밟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상하이시 위원회의 권한을 탈취하여 '상하이공사(上海公司)'를 설립했는데, 그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사람들은 궁금해 하였다.

 

그런데 이 상하이공사는 모택동의 지시에 의해 곧바로 '상하이시 혁명위원회'로 개칭되었다. 이제야 왕홍원(王洪文)의 배후를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모택동은 시기를 놓칠세라 전국적으로 이를 본받도록 호소하여, "무산계급 혁명파의 대연합으로 주자파 집권자의 권한을 빼앗아오자"고 하면서, 이것이야말로 "국제공산주의 운동중에서도 극히 위대한 쾌거이자 인류역사상 미증유의 대사건이며, 세계의 미래와 인류의 운명을 위한 위대한 사건"이라고 추켜세웠다.

 

이에 따라 각 지역에서는 이러한 부류의 '무산계급 혁명파'가 속속 권력을 탈취하여 혁명위원회를 성립시키고, '혁명간부 대표'와 '군인대표', '혁명민중대표'라는 '3자결합'의 혁명그룹이 형성되었다.

 

탈권과정에서 각 파는 모두 자신들만이 진정한 '무산계급 혁명파'라고 하여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충돌이 일어났고, 각 파의 군중 특히 홍위병 소년용사들 그룹 내부에서의 파벌투쟁은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무정부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악명높은 것은 중앙문혁이 직접 손을 댄 후베이성의 '7.20'사건인데, 쌍방에서 수백만 명이 말려들었으며 이 사건으로 부상을 입거나 장애자가 되고, 사망한 인원은 18만 4천명이나 되었다. 이것은 1차 세계대전의 인명피해와 맞먹는 인명피해이다.

갖가지 갈등이 겹치고 적과 아의 구분도 어려워지게 되자, 이 시기에 모택동은 친히 '5.16'분자(문화대혁명을 처음 발동한 인사들을 지칭)들을 찾아내어 "계급의 대열을 깨끗이 정리하라"는 운동을 일으키게 하여, 극좌와 극우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5.16'분자는 대부분 출신성분이 좋고 반란에 적극 가담한 청년과 간부들이므로, 색출하여 제거할 대상이라면 '역사적인 문제'가 있는 중.노년 간부와 군중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들 모두가 핍박을 받고 자백을 강요당하며, 증거를 제시하라고 들볶이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계속 확대되면서 허다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수백만 명은 '문혁'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

1968년 7월부터 모택동은 청화대학교 '모택동사상 노동자 선전대'를 파견하여 무력투쟁을 억제하고 학생연합을 돕도록 한다.

 

그 후 '공선대'와 "모택동사상 군인선전대"라는 것이 학교와 "오래되고, 규모가 크고, 상황이 복잡한" 일부 조직단위마다 파견되었다. 그러자 학교에서의 소란과 세력들끼리의 파벌싸움 및 극도의 혼란상태, 그리고 그치지 않던 무력투쟁이 비로소 조용해지기 시작한다.

1969년 4월, 중공 제9차 전국대표대회와 제9계 1중전회가 베이징에서 열렸는데, 대회에서는 새로운 당헌을 통과시키고 임표를 "모택동의 동지의 친밀한 전우이며 후계자"라고 결정했다. 선출된 새로운 중앙위원회 위원중 제8계 중앙위원과 후보중앙위원은 '문혁'기간에 모두 사라지고 29%만 남아 있었다.

 

모택동은 이 회의에서 새로이 "당을 정돈하고 걸립하자"고 제시하면서 "싸움터에 나가려면, 단결할수록 좋다"고 했다. 9차 전국대표대회 이후에 각지에서는 한 무리의 '석방'과 '해방'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중앙문혁 소조'라는 끔찍한 이름은 별로 노출되지 않았다.

9차대회 이후 임표는 더욱 특수한 위치가 되었고, 오래 되지 않아서 국가주석의 자리를 설치하느냐는 문제로 모택동과 분규가 생긴다.

 

임표는 모택동이 하려 한다는 표면상의 이유를 내세워 사실은 자신이 해보겠다는 계획이었던지 천재의 어록을 읽는다는 핑계를 대고 국가주석직의 설치를 제기하도록 하였다. 모택동은 이름을 지명하지는 않았지만 임표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겉으로는 나를 주석으로 세우려 한다지만 누구를 주석으로 세우려는 것인지는 이미 그 자신이 말한 것이나 같다"고 말했다.

 

1970년 8.9월 제9계 2중전회에서 [나의 작은 의견]을 발표하는 속에 임표에 대해서는 아직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잠시 안심을 시킨다. 그러나 회의가 끝나자마자 비판에 들어간다.

 

임표는 임박해 오는 자신에 대한 위험을 감지하여 비밀리에 무장정변을 획책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이 때를 기다리고 있던 모택동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문화대혁명 이래 가장 등골을 서늘하게 했던 한토막의 소름끼치고 숨막히는 연극이 끝나게 된다.

1973년 봄, 주은래는 지병인 암으로 대량의 수혈을 받으며 수술을 받아 가료중이었는데, 모택동의 의견에 따라 중공 중앙은 등소평을 당 내 조직생활을 회복하고 국무원 부총리로 임명하는데 관한결정을 제기했다. 1974년 10월 모택동은 등소평을 국무원 제1부총리로 임명하자고 제의하여 실제적으로 등소평이 국무원의 업무를 주재하도록 한다.

1975년 1월 중공 제10계 2중전회에서는 등소평이 중공 중앙부 주석과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서 인민대표대회 제4계 1차회의에서 주은래를 총리로 등소평등 12인을 부총리로 선출하여 주은래와 등소평을 핵심으로한 국무원의 지도체제가 확립되었다.

 

주은래는 정부의 업무보고 가운데 '4개부문 현대화'의 임무를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그의 병세가 나날이 악화되어 국무원과 중앙당의 일상업무를 등소평이 대리하게 되었다.

등소평은 즉시 각 방면에 걸쳐 '문화대혁명'으로 파괴된 것들을 정돈하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교통과 운수, 공업생산과 전체 경제적 사정이 신속하게 호전되는 가운데 당의 간부들은 대폭 '해방'되고 문화, 교육, 지식인들에 대한 정책도 조정되었다.

 

그러자, 이 해의 농·공업 총생산은 그 전해에 비해 11.9%가 신장되었다. 흐려진 사상과 이론들도 점차 맑게 정돈되어 갔다. '등소평이 진행하는 정책의 최종목표는 국민경제를 향상시키는 것으로서, 이를 위해서는 문화대혁명같은 좌경적 이론과 방법은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모택동으로 말하면, 그 자신의 일생에서 두 가지의 위대한 일이 있다면, 이미 이룩된 것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와 장개석을 몰아낸 것이요, 아직 진행중인 것으로는 '문혁'이라고 생각했으므로, 그가 문혁을 옹호하고 긍정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여기에서부터 의견이 나누어지게 된다.

 

이 때문에 모택동은 스스로 추천한 등소평이 추진하는 노선과 '문혁파'의 사이에서 갈등을 겪다가 문혁파를 지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1975년 겨울부터 이른바 "우경번안풍(우경으로 뒤집으려는 기풍)에 대한 반격"이라는 이름으로 모택동은 생전에 경제정책을 수정할 수 있었던 즉, 모택동 자신의 손으로 개혁, 개방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를 말살했던 것이다.

◐ 라. 등소평의 등장과 개방정책

1) 등소평의 등장

1970년대 초 문혁의 후유증에서 벗어난 중국은 경제 활성화가 당면 과제로 떠오르게 됐다. 이에 실각한 등소평을 비롯한 많은 실무파들이 속속 복권되게 되고 이것은 기존의 권력을 잡고 있던 4인방과의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4인방은 1976년 1월 총리 주은래(周恩來) 추모로 일어난 군중시위 사건인 천안문사건(4·5운동)의 배후 조종자로 등소평을 지목해 1967년에 이어 그를 다시 실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모택동이 1976년 9월 9일 사망하게 됨에 따라 주은래를 뒤를 이어 제2인자로 있던 화국봉(華國鋒)이 4인방을 숙청하고 권력을 잡게 된다.

 

화국봉은 4개 현대화계획이라는 대형 프로젝트 건설을 추진하여 중국경제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야심을 가졌지만 중공업에 치중한 경제정책은 상대적으로 경공업과 농업을 도외시 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해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한편 경제중심의 실용주의 노선 표방으로 등소평을 비롯한 실무파들이 다시 대거 복권하게 되고, 이는 화국봉(華國鋒)을 위시한 온건 혁명세력과 주은래노선을 계승한 등소평(鄧小平) 등 실무세력사이에 대립을 가져왔다.

양측은 서로 열띤 논쟁을 통해 상대방의 주장과 이념을 비방하기 시작했고 여기에서 모택동의 단결혁명론(繼續革命論)을 옹호한 화국봉보다는 사상을 해방하고 사실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고 앞을 보자 - 해방사상(解放思想), 실사구시(實事求是), 단결일치(團結一致), 향간전(向看前) 이 라는 등소평의 개혁·개방노선이 전당공작(全黨工作)의 지도방침으로 채택됨에 따라 화국봉은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고 등소평을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이 권력을 쥐게 된다.

 

등소평은 당주석제를 폐지하고 총서기제를 부활하여 자기의 심복인 호요방(胡耀邦)을 총서기로, 조자양(趙紫陽)을 총리로 각각 임명했다. 등소평체제의 확립과 함께 중국은 경제의 대외개방과 농촌경제계획에 들어가 중국적인 사회주의 건설노선을 견지하게 된다.

2) 천안문사태

경제적으로 대외개방을 천명하게 됨에 따라 경제발전에 따른 정치발전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과격한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보수파들은 이를 빌미로 개혁파를 맹공하게 되고 마침내 호요방(胡耀邦) 총서기가 물러나게 되면서 조자양(趙紫陽)이 총서기로 부각된다.

 

1989년 4월 15일 호요방(胡耀邦) 전(前)총서기가 사망하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호요방에 대한 명예회복 및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운동이 발생하게 되고, 시민, 노동자, 지식인까지 이 시위에 참가하게 된다.

 

4, 5월에 걸쳐 민주화요구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고 천안문에는 지식인, 노동자, 일반시민, 학생 등 약 100만명이 연달아 대대적인 집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에 따라 온건파 조자양 총서기와 강경파인 양상곤(楊尙昆) 국가주석, 이붕(李鵬) 총리측이 대립하게 되고 여기에서 강경파의 우세로 1989년 6월 4일 새벽 계엄군이 천안문광장에서 무기한 농성을 벌이던 학생, 시민들에 대한 무력진압을 전개한다.

 

시내 각처에서 시민과 계엄군의 충돌로 학생 36명을 포함한 319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부상자가 3,000명, 계엄군측 부상자 6,000명(당국발표)을 발생시킨 최악의 유혈사태가 발행했다.

3) 개혁개방정책의 가속화

천안문사태 이후 1990년 6월 제 13기 4중전회(中全會)서 조자양 총서기는 민주화시위를 지지, 당을 분열시켰다는 이유로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제1부주석 등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고 강택민(江澤民) 상해시 당서기 겸 정치국위원이 총서기로 선출된다.

 

11월 6~9일의 5중전회(中 全會)에서 등소평은 당중앙군사위 주석직을, 1990년에는 자신의 마지막 직책이던 국가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사임하고 후임으로 강택민 총서기가 두 직책을 승계했다. 1990년 1월 11일, 북경시의 계엄령이 해제되고 천안문사태는 역사의 뒷안길로 사라졌다.

천안문 사태와 소련의 붕괴로 보수파의 목소리가 커지자 개혁·개방체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1993년 3월 제 8기 전인대에서 개정된 헌법에 명시함으로써 개혁과 개방의 가속화를 촉구했다.

 

현재 중국은 등소평을 비롯한 개혁파가 추진하는 개방과 조정의 정책하에서 현대화·'민주화·문명화·사회의 강국을 목표로 진군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서방 자본주의에 대해 과감하게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개혁과 개방의 물결은 중국 사회 전반에 적지않은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산물들이 점차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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