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타작[打麥行]
新芻獨酒如潼白 새로 거른 막걸리 젖빛처럼 뿌옇고
大碗麥飯高一尺 큰 사발에 보리밥, 높기가 한 자로세.
飯罷取枷登場立 밥 먹자 도리깨 잡고 마당에 나서니
雙肩漆澤飜日赤 검게 탄 두 어깨 햇볕 받아 번쩍이네.
呼邢作聲擧趾齊 응헤야 소리 내며 발 맞추어 두드리니
須臾麥穗都狼藉 삽시간에 보리 낟알 온 마당에 가득하네.
雜歌互答聲轉高 주고받는 노랫가락 점점 높아지는데
但見屋角紛飛麥 보이느니 지붕 위에 보리티끌뿐이로다.
觀其氣色樂莫樂 그 기색 살펴보니 즐겁기 짝이 없어
了不以心爲形役 마음이 몸의 노예 되지 않았네.
樂園樂郊不遠有 낙원이 먼 곳에 있는 게 아닌데
何苦去作風塵客 무엇하러 벼슬길에 헤매고 있으리요.
[정리]
- 갈래 : 행(行 - 한시의 일종). 서정시. 리얼리즘 시
- 연대 : 1801년
- 구성 : 기, 승, 전, 결의 4단 구성. 선경후정(先景後情)의 시상 전개
기(1-4행) - 노동하는 농민의 건강한 삶의 모습
승(5-8행) - 보리 타작하는 마당의 정경
전(9-10행) - 정신과 육체가 합일된 노동의 기쁨
결(11-12행) - 관직에 몸담은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
- 성격 : 사실적. 반성적
- 배경 사상 : 실사구시의 실학사상
- 주제 : 농민의 보리 타작 노동과 거기에서 얻는 삶의 즐거운 모습
- 의의 : 사실성과 현장성이 평민적인 시어의 구사와 함께 잘 어울리는 조선 후기 한시의 전형이다. 다산(茶山)의 중농(重農) 사상과 현실주의 시 정신을 잘 나타내는 작품이다.
- 출전 : <여유당 전서(與猶堂全書)>
[작품 해설]
다산(茶山)의 한시 작품은 실학 사상을 배경으로 사회 제도의 모순, 관리나 토호들의 횡포, 백성들의 고뇌, 농어촌의 가난 등이 그 주제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대부분이 현실적인 면을 사실적으로 그렸으며, 시어(詩語)도 평민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보리 타작"도 가난을 딛고 건실하게 일하는 농민의 건설적인 모습을 보이는 바, 악부(樂府)시체에서 전화한 한시의 한 체인 '행(行)'을 그 형식으로 하고 있다.
이 시에서 서정적 자아는 결구에서 보듯이 관직에 있었던 경험을 지닌 사대부이다. 곧 작자인 정약용 자신이라 해도 무방하다. 실학자인 작자는 현명한 목민관은 권농(勸農)을 으뜸 가는 임무로 삼아야 함을 주장하고, 전정(田政)과 군정(軍政)에 치중하여 병농일치(兵農一致)를 근간으로 하는 중농 정책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농사 짓기를 중시하는 작자의 눈에 비친 당대 농민의 삶은 건강한 것이고 가치 있는 것이었다. 특히 이 작품은 농민의 건강한 노동의 모습을 잘 보여 주는 보리 타작하는 모습을 소재로 이러한 작자의 생각을 잘 나타내고 있다.
1-4행에서는 막걸리와 보리밥 한 사발을 너끈히 먹자마자 웃통을 벗고 마당에 가서 보리 타작하는 농민의 모습을 통해 건강한 삶의 표상을 제시한다. 그리고 5-8행에서는 공동 작업으로 진행되는 보리 타작이라는 노동에 농민들이 몰두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노동하는 삶이야말로 기쁜 삶이라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9-10행에서는 육체와 정신이 통일되어 있는 농민의 모습에서 마음이 몸의 노예가 되지 않은 주체적 인간상을 느끼고, 11-12행에서는 농민의 삶을 보고는 벼슬길을 헤매며 보잘것없는 물욕(物慾)에 시달리는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기도 한다.
이 시에서 우리는 성장하는 조선 후기 민중들의 모습을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느낄 수 있으며, 새롭고 가치 있는 삶을 민중들의 일상 생활에서 찾고자 하는 당대 진보적 지식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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