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 (Ottoman Empire, 1299 ~ 1922)은 오스만 가문을 왕가로 하여, 현재 터키 최대의 도시인 이스탄불에 도읍하여 서쪽의 모로코부터 동쪽의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러 북쪽의 우크라이나에서 남쪽의 예멘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던 제국이다. 터키 제국, 오스만 튀르크 또는 단순히 터키라고도 불렸다.
아나톨리아 (소아시아)의 한구석에서 나온 소 베이국으로부터 발전한 이슬람 왕조인 오스만국은 이윽고 동로마 제국 등 남동유럽의 기독교 제국, 맘루크 왕조를 포함한 서아시아 ·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제국을 동시에 정복하면서 지중해 세계의 과반을 차지한 세계 제국인 오스만 제국으로 발전하였으나, 18세기 이후 쇠퇴하여 20세기 초반에 마침내 마지막에 남은 영토 아나톨리아로부터 새롭게 건국되어 나온 국민 국가인 터키 공화국으로 교체되었다.
서양에서는 오스만 제국을 오스만 투르크 내지는 투르크 제국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을 영어식으로 Ottoman Turks, Turkish Empire라고 표기하게 되었고 한국에서는 이 표현을 그대로 따와 오스만 투르크, 투르크 제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 많이 불렀지만, 현재는 오스만 제국 또는 오스만 왕조라는 표기가 일반적이고 오스만 투르크라는 어휘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오스만 제국의 군주 (파디샤, 술탄)의 출신은 튀르크 계열로 궁정의 언어도 오스만 터키어로 불리는 페르시아어와 아랍어의 어휘를 많이 차용한 터키어였지만, 지배 계층은 민족·종교에 관련 없이 다양한 지역 출신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쉽게 튀르크 민족의 국가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오스만 국가를 가리키는 정식 국호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명칭은 ‘잘 보호되는 나라’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왕조적 성격을 지칭할 때는 ‘오스만 국가/제국’이라고 불렀다. 종교적 측면을 강조할때는 ‘이슬람의 나라’ 또는 ‘이슬람의 왕국’이라 했다. 오스만 국가의 전반기에 널리 쓰인 또다른 표현은 ‘로마 왕국’ 또는 ‘로마 나라’이었다.
제국의 실태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오스만 튀르크라는 호칭은 부적절하고, 오스만 제국을 터키라고 부른 것은 외부로부터의 통칭에 지나지 않는다.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무슬림들에게는 술탄을 지향하고, 기독교인들에게는 동로마 황제를 지향함으로써 세계 군주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덧붙여 오스만 제국의 뒤를 잇는 국가인 터키 공화국은 정식 국호에 처음으로 ‘터키 (터키어: 튀르키에)’를 채용했지만, 오스만 제국을 가리킬 때는 오스만 제국이라는 뜻의 Osmanlı İmparatorluğu (오스만르 임파라토를루)나 오스만 국가라는 뜻의 Osmanlı Devleti (오스만르 데블레티)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역사
오스만 제국은 후세의 역사 전승에 대해 시조 오스만 1세가 아나톨리아(소아시아) 서북부에 세력을 확립해 신정권의 왕위에 올랐다고 여겨지는 1299년을 건국 연도로 하는 것이 통례이며, 술탄제가 폐지되어 메흐메트 6세가 폐위된 1922년이 해체 연도로 여겨진다.
무엇보다 오스만 왕조 초기에 대해서는 동시대의 사료가 부족하고, 사실과 전설이 혼연하고 있으므로 정확한 건국 연도를 특정하는 것은 어렵다.
.건국과 확장
13세기 말에 동로마 제국과 룸 술탄국의 국경 지대인 아나톨리아 서북부에 등장한 유목 부족장 오스만 1세가 인솔한 군사 집단이 오스만 제국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오스만 가문의 시조는 쉴레이만 샤로 원래 이란 서부와 중앙아시아쪽에 있던 투르크멘인 유목민의 부족장이었다고 한다. 룸 술탄국의 보호를 받다가 후에 다시 돌아가려 했으나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다 익사해버렸고 그 후 그의 아들인 에르투으룰 가지는 그대로 정착하여 룸 술탄국편에서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수행해 공을 인정받아 오늘날의 앙카라 인근에 봉토를 받고 베이가 되었다.
그의 아들이 바로 오스만 제국의 창업주인 오스만 1세이며 그는 룸 술탄국의 붕괴를 틈타 독립하여 당대에 아나톨리아의 동로마 제국 잔존 세력을 격파하고 2대 술탄 오르한 가지는 남동유럽에 교두보까지 구축하여 오스만 제국의 위엄을 떨쳤다. 그들 오스만 집단은 주변의 기독교 세력이나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영주 및 군사 집단과 싸우기도 하고 손을 잡기도 하면서 점차 영토를 확대해나가, 나중에 오스만 제국으로 발전하게 되는 오스만 베이국 (Osmanlı Beyliği)을 건국하였다.
1326년경 오스만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오르한 1세는 즉위하고 나서 곧바로 동로마 제국의 지방도시 부르사 점령을 시작으로, 마르마라 해를 넘어 유럽 대륙에 다다를 때까지 영토를 확대하였다. 부르사는 곧 오스만 베이국의 행정 중심지가 되어 최초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하게 된다.
1346년, 오르한 1세는 동로마 황제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누스와의 동맹을 계기로 다르다넬스 해협을 넘어 발칸 반도의 트라키아에 진출, 유럽에서의 영토 확장을 개시했다. 오르한 1세의 아들 무라트 1세는 즉위하자마자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도나우 강 유역을 잇는 중요 거점인 아드리아노폴리스 (오늘날의 에디르네)를 점령, 이곳을 제2의 수도로 삼은 것과 동시에 상비포병군 예니체리를 창설하는 등 국가제도를 정돈하였으며 1389년에는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 왕국을 필두로 한 발칸 제후국들의 연합군을 물리쳤다.
무라트 1세의 아들 바예지드 1세는 1396년에 불가리아 북부에서 니코폴리스 전투를 벌여, 이 전투에서 헝가리 왕국을 필두로 한 십자군을 격파, 오히려 영토를 더 크게 넓혔다. 그러나 1402년의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은 티무르 왕조에게 패배하였으며, 국내에는 왕자들 간에 후계 싸움이 일어나 제국의 확대는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바예지드 1세의 아들 메흐메트 1세는 1421년에 제국 재통합을 성공으로 이끌면서 국력을 회복하였다. 그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그 아들 무라트 2세는 다시 자국을 침공한 십자군을 물리치면서 안정된 통치를 펼쳤다. 이렇게 국력이 다시 상승하자 1453년, 무라트의 아들 메흐메트 2세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여 마침내 동로마 제국을 점령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로 다시 태어났다. 하기아 소피아도 첨탑 네 개가 첨가되면서 모스크로 개축되었다.
이리하여 오스만 제국은 15세기 말까지 지상에서는 발칸과 아나톨리아의 거의 모든 땅을 평정하고, 바다에서는 흑해 북해안과 에게 해의 섬들까지 세력을 뻗쳐 흑해와 에게 해를 오스만의 내해로 만들기에 이른다. 이러한 제국을 1512년에 계승한 셀림 1세는 동로마 제국에 이어서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까지 멸망시켜 이집트, 이라크 지역까지 지배 영역을 확대하였으며, 맘루크 왕조가 소유하고 있던 이슬람교의 2대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의 보호권마저 장악하여 이슬람 세계의 맹주로 군림하게 된다. 게다가 그동안 맘루크 왕조의 비호 아래 있던 아바스 왕조의 후예로부터 칼리파의 칭호를 양보 받아 칼리파를 겸하게 되면서 술탄-칼리파제를 창설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19세기 초반에 위조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이슬람 세계 내에서의 오스만 제국이 그 중심이 된 것만은 확실하다.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
쉘레이만1세
제10대 군주인 쉴레이만 1세 (재위 1520년 – 1566년) 때에 이르면 오스만 제국의 국력은 더할 나위 없이 막강해져 능히 다른 나라를 압도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영역은 중앙유럽과 북아프리카에까지 확장되었다.
쉴레이만 1세는 즉위하면서 우선 베오그라드 정복으로 헝가리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로도스 섬에서 무슬림에 대한 해적 행위를 벌이고 있던 성 요한 기사단을 쫓아내면서 동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1526년에는 모하치 전투를 통해 헝가리군을 격파, 헝가리의 땅 거의 대부분을 점령한다. 한편, 동쪽으로는 사파비 왕조를 공격하여 바그다드까지 손에 넣었으며, 남쪽으로는 예멘에 출병하여 아덴을 정복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과 대립하고 있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동맹을 맺은 쉴레이만 1세는 1529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 빈을 1개월 이상에 걸쳐 포위하였다. 비록 이 작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오스만군이 서유럽 내 깊숙이까지 들어와 위협한 이 사건은 당시 서구 국가들에겐 큰 충격이었다. 게다가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는 스페인과 베네치아 공화국 등을 위시한 기독교 세계의 연합 함대를 대파시켜, 지중해 해상권의 거의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했다.
쉴레이만의 치세는 이처럼 훌륭한 군사적 성공 외에도 건국 이래 오스만 제국이 형성해 온 국가제도가 완성단계에 이르러, 제도상의 파탄이 없었던 훌륭한 이상의 시대이자 황금기로 기록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쉴레이만의 치세는 국가 제도의 전환기가 시작된 때이기도 하였다. 쉴레이만 사후로는 전쟁터에서 군주가 앞장서서 출정하는 일도 없어졌으며, 정치조차도 거의 재상이 처리하게 된다.
또, 군사구조를 전환하면서 대포로 무장한 포병인 예니체리를 핵심으로 한 상비군의 중요성이 대두하면서, 그 인원이 폭발적으로 증대하여 유지비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그에 따라 기병인 시파히층은 몰락해 갔다. 종래 이러한 변화는 쉴레이만이 죽고 난 후, 제국의 쇠퇴로 인식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오히려 제국의 정치, 경제, 사회의 구조가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크게 전환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고 지중해 무역이 쇠퇴하고 대서양이 크게 번성하자 오스만제국의 무역이득이 줄어들어 내정이 어려워지게 되고 스페인이 강대국이 됨으로써 오스만제국의 지위가 낮아지게 됐다.
.국내 정치의 혼란과 쇠퇴
쉴레이만이 죽은 지 5년 후인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함대는 기독교 세계의 연합 함대에게 패하여 지중해의 패권을 상실했다. 그렇다고 해서 오스만 제국이 유럽 제국보다 열세로 돌아선 것은 아니며, 그 국력은 여전히 강대하였으며 또 지중해의 해상권이 순식간에 오스만 제국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었다. 제국 함대는 패전한 지 반년 만에 동규모의 함대를 재건하여, 1573년에 키프로스를, 다음해에는 튀니스를 획득하였다. 1683년까지 슬로베니아와 아드리아 해 연안을 제외한 모든 발칸 반도 지역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18세기부터 힘이 약해졌다. 1699년 헝가리를 잃고, 다음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절대군주로부터의 민주혁명과 각 민족별 독립을 추구하는 세계적인 흐름 선상에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땅을 되찾는 한편, 아랍인을 비롯한 피지배 민족들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1830년에는 그리스가 왕국으로 독립하고,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침략을 받는다.
오스만 제국은 이러한 제국 내외로부터의 도전에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고, 결국 유럽 측으로부터 빈사상태인 환자라고 불리는 모욕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해 오스만 제국이 마냥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808년에 즉위한 마흐무트 2세는 군대의 서구화를 위해 예니체리를 폐지하고 외무성과 내무성, 재무성을 신설하여 중앙정부의 권력 강화를 추진하였다. 그리고 유럽에 유학생을 대거 파견해 인재 육성에도 힘을 쏟았다. 1839년, 압뒬메지트 1세는 개혁칙령을 공포한 이후 전면적인 개혁정치를 실행에 옮겼다. 행정에서부터 군사, 문화에 이르기까지 서구적인 체제로의 전향을 도모하는 탄지마트(Tanzimat)가 그것이다. 탄지마트 정책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중앙집권적인 관료기구와 근대적인 군대를 확립함으로써, 서구형 국가로의 전환을 진행시켜 나갔다.
1853년에 러시아 제국과의 사이에 크림 전쟁이 일어났지만, 영국 등의 가담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당시, 영국 등의 지지를 획득할 필요성을 느낀 오스만 제국은 1856년에 개혁칙령을 발포하여 비무슬림의 권리를 인정하겠노라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제2단계에 들어간 탄지마트는 종교법 (샤리아)와 서양 근대법의 절충을 목표로 새로운 법전 제정, 근대 교육학교 개설, 근대적 토지사유제도를 인정하는 토지법 시행 등 개혁을 착착 진행시켜 나갔다.
그러나 개혁과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서구 열강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필요했다. 그래서 결국 서구인들의 국내 무역을 더욱 확대하였으며, 제국은 차츰 경제면에서 서구 나라들의 반식민지 유사하게 되어갔다. 그 결과, 유럽 경제와 농산품 수확량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 제국 재정은 1875년, 서구 금융 공황과 농산물의 흉작으로 말미암아 파산하고 만다.
탄지마트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좌절로 끝나자 제국에는 새로운 개혁이 요구되었다. 1876년, 대재상 미드하트 파샤의 지도 아래 ‘아시아 최초의 성문헌법’인 제국헌법(통칭 미드하트 헌법)을 공포했다. 헌법은 오스만 제국이 서구식의 법치국가이며, 제국 의회 설치와 오스만의 신민으로서 무슬림과 비무슬림은 완전한 평등을 누린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헌법을 발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78년에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완패하여 실패로 끝났다. 오스만 정부는 러시아군이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서쪽의 산스테파노까지 진군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린다. 전제체제의 부활을 바랐던 압뒬하미트 2세는 러시아와 산스테파노 조약을 맺어 강화하는 한편(이후 산스테파노 조약은 영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등의 유럽 열강이 개입하여 베를린 조약으로 대체된다.),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미드하트 헌법을 폐지하였다. 이날 이후, 좌파는 국외 추방 또는 사형을 각오해야 했고, 압뒬하미트 2세는 ‘피의 황제’로 불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재정 파산 이후 제국 경제를 장악한 유럽의 여러 나라에 의한 자본 투하가 진행되어, 유럽의 문화가 빠르게 침투해갔다. 또한 서구의 공업제품과 경합하지 않은 섬유공업 등의 분야에서는 차츰 민족자본이 자라기 시작하고, 전제정치에 저촉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신문이나 잡지의 간행이 확대됨으로써, 훗날의 헌정 부활 이후 민주주의 및 민족주의의 등장을 준비했다.
1908년에 압뒬하미트 2세는 청년 투르크 당에 의해 폐위되고 1918년 어느 날 외롭게 죽음을 맞이한다. 청년 투르크 당은 메흐메트 5세를 황제로 모시고 마드하트 헌법을 부활하고 개정하였으며, 군비 경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모든 민족의 평등’이 ‘터키인으로 한정한 평등’으로 바뀌고 아랍인들을 비롯한 피지배 민족의 독립 열망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것이 제1차 발칸전쟁의 원인이다. 이 결과 알바니아가 터키로부터 독립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동맹국으로 참전하였다. 동맹국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왕국, 오스만 제국을 일컫는다. 제1차 세계 대전에 패전국이 되어 전범 국가로 지목됨으로써 세브르 조약의 결과, 1914년 이전의 영토를 거의 대부분 상실하고 소아시아와 유럽의 일부만을 지니게 되었다. 그 이후, 그리스한테 침공을 받아 심각하게 위협을 받게되는데, 한때는 국가의 존망이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2년경부터 케말 파샤(장군)의 지휘 아래 그리스군을 앙카라에서 격파하고, 이에서 도주하는 그리스군을 이스탄불에서 또 대파함으로써 그리스 영토 일부까지 실지를 회복하는 등 그 영토가 로잔 조약으로 현재의 터키 공화국의 영토로 고정되었다.
.멸망
메흐메트 6세 (재위 1918-1922)가 폐위됨으로써 600년 장수 제국은 해체되었다.
압뒬메지트 2세도 1924년, 칼리프제가 폐지됨에 따라 프랑스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죽었다.
– 정치
중앙의 경우, 정치적 권력은 군주를 정점으로 하고 있었으며, 대재상 (사드라잠) 이하 재상 (와즈르)들이 군주를 보좌하였으며, 국가 정치의 중추인 궁정에서는 대재상 이하 재상들과 군정장관, 재무대신, 시종장, 서기관장 등으로 구성되는 최고회의 (디완)가 최고 정책 결정 기관으로서 기능하였다. 17세기에 군주가 정치 무대에서 물러나면서, 대재상이 군주의 대행자로서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정치권력이 궁정 내 최고회의장에서 대재상이 거처하는 공저로 옮겨갔다.
중앙정부의 관료 기구는 군인 관료(카프쿨루)와 법관 관료(울라마), 서기 관료(캐티프) 세 그룹으로 이루어져있다. 군인관료 가운데 능력이 특출한 자는 궁정에서 술탄의 시중을 드는 시종이나 경비병을 거쳐 예니체리 군단장이나 현지사 내지는 주지사에 채용되어 종반에는 중앙정부의 재상이나 대재상이 되었다. 법관관료에게는 군 행정을 맡아 재판을 하는 카드 외에도 메드레세 (종교학교)의 교수 등의 공직을 맡고 있었다.
그 밖에도 환관도 중용하여 환관 출신의 주지사나 재상의 수가 적지 않다는 점도 오스만의 인적 다양함을 나타내는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세기부터는 개혁 정책에 따라 서구의 제도를 모방한 기구로 바뀌어갔다. 예를 들자면, 서기관장은 외무대신으로 개편되었고 최고회의는 내각회의로 바뀌었으며 대재상은 사실상 내각을 책임지는 수상 (총리)이 되었다.
그러나 서구법이 대거 도입되어 세곡 법정이 개설되었음에도, 이슬람 국가로서의 전통적인 제도나 풍습 등은 후반기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에게 있어 이슬람은 나라의 근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슬람 국가적인 제도는 제국이 멸망한 후 터키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추진된 급속한 세속화 개혁에 따라 소멸되었다.
– 행정
제국의 영토는 직할지, 자치구, 속국으로 구성된다. 속국의 경우 군주 임명권을 제국 정부가 장악하고 있었을 뿐, 그외 다른 것에 대해선 원칙적으로 자율에 맡기고 있었다. 크리미아, 왈라키아, 몰다비아, 트란실바니아, 헤자즈 등이 이에 해당한다. 자치구는 중앙 정부로부터 총독이 파견되는 것 이외는 현지의 유력자에게 정치를 맡겼으며 잉여금을 중앙 정부에 상납하였다. 이집트 등이 이에 해당한다. 직할지는 주 (대도시), 현 (변경 중소 도시), 군 (마을)으로 나뉘었다. 각 군마다 군사-행정 재판관인 카드의 관할 아래에 있었으며, 현과 주에는 각각 산자크베이 (현지사), 베이레르베이 (주지사)가 배속되어 관할 구역 내의 군사에 대한 통괄권을 행사했다.
– 군대 체제
군대 조직은 크게 지방의 티마르 (군사봉토)를 받아 그곳에 거주하며 징세권을 행사하던 지방 상비군인 시파히와 중앙 상비군인 카프쿨루로 분류되었다. 카프쿨루의 인원은 주로 데브쉬르메 제도에 따라 제국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 자제들을 징집하는 것으로 충당하였다. 카프쿨루 군단은 수행임무에 따라 7대 단위 부대(아제미, 예니체리, 제베지, 톱추, 토파라바즈, 훔바라즈, 라음즈)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최정예인 예니체리는 화기가 등장하던 16세기에 그 중요성이 부각되어 거대한 군사집단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편, 이 시기 유럽은 상비군을 갖고 있는 나라가 거의 없었다.
– 제도
사중관을 쓴 쉴레이만 1세. 이 사중관은 쉴레이만이 이탈리아의 금세공 직공에게 의뢰해 만든 것으로, 교황의 삼중관을 의식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오스만 제국의 국가 형태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유럽의 역사학자들이 전형적인 동방의 전제 제국으로 간주하는 반면, 오스만 제국의 역사가들은 이슬람 전통에 근거하는 세계 제국으로 칭송해왔다. 또 19세기 말 이후에는 민족주의적인 입장이 강조되면서 오스만 제국의 기원은 터키계의 유목민 국가에 있다는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20세기 전반에는 유럽에서 동로마 제국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면서, 자연스럽게 오스만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비교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룸 (로마 제국의 황제)을 자칭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임명권을 통해서 동방 정교회를 지배했었다는 것이 동로마의 황제교황주의의 연속상으로 보는 시각이 생겨나면서 오스만 제국을 동로마 제국의 계승자로 보는 설도 나타났다.
오스만 제국의 국가체제가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무라트 1세의 무렵부터로 추정되고 있다. 제국이 확대함에 따라 정비되어 온 체제는 쉴레이만 1세 시대에 이르러 거의 완성되면서, 군주를 정점으로 중앙집권제를 실현하였다. 이것을 ‘근세 오스만 체제’라고 부른다.
– 사회
오스만 제국은 아바스 왕조와 셀주크 왕조의 전통을 이었으나, 몽골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도 받아 이슬람적이면서도 동시에 튀르크적인 국가를 건설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거느림에 따라 여러 민족들과 여러 종교들, 종파가 서로 공존하여 비이슬람적인 문화에 대해서도 너그러웠으며, 통치에 있어서도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아 중심부를 제외하고는 총독이나 그 지방 세력자의 자치에 맡겼다.
오스만 제국이 비이슬람 문화에 대해서도 너그러웠다는 사례를 하나들자면, 쉴레이만 대제 때를 들 수 있다. 이 시기에 이스탄불에서 무슬림에 의한 반유대교도 폭동이 일어났던 적이 있었는데, 이때 상비군을 파견하여 진압하기도 하였다. 이는 이교도와의 상호공존을 위해 같은 무슬림을 진압한 것이다. 이는 중세 후반부터 근세 초기에 서구의 여러 도시에서 일어난 민중의 반유대 폭동을 진압하지 못한 것과 극히 대조를 이룬다.
오스만 제국은 다언어 사회였던 것이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공식적으로는 튀르크 언어가 사용되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각각의 지방 집단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주로 사용했다. 공문서에는 튀르크어가 사용되었으나 튀르크족이 아닌 민중에게 전달될 때에는 그들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달되는 일들이 흔했다. 때로는 칙령이나 칙어도 그리스어 등으로 쓰이기도 했었다.
제국 내의 아라비아 지역에서는 아랍어가 공용어나 사실상 마찬가지로 쓰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 이외에 제2, 제3의 언어를 배워 사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흔했다. 오스만 제국의 다언어사회에 대한 사례를 한 가지 들자면,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킨 메흐메트 2세는 투르크어 이외에 아랍어, 페르시아어, 그리스어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 문화
오스만 제국에서는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창적인 이슬람적인 투르크 문화로 발전시켜 나아갔다. 미술에서는 비잔티움 양식을 도입한 이슬람 사원이 건축되었고, 문학에서는 페르시아의 전통을 잇는 궁정 문학이 발달했었다. 그 외에도 천문학, 수학, 지리학 등 실용적인 학문도 발달했었다.
– 오스만의 군주들
오스만 투르크의 역대 군주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기 전까지는 서양의 Prince에 해당하는 술탄으로 지칭되었고, 메흐메트 2세 이후로는 황제라는 의미의 Padishah, Shahanshah, Sultan-es-selatin(Sultan of Sultans), 및 로마 황제 등의 칭호를 사용했다. 메흐메트 2세 이후 제정 (帝政)이 된 후에 기존의 술탄, 여술탄의 칭호는 황자, 황녀를 지칭하는 칭호로 사용되었으므로, 오스만 제국의 역대 군주를 가리켜 술탄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관용적으로 용납되고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옳은 명칭이 아니다.
– 1922년 11월 1일, 터키 독립 전쟁: 터키에서 술탄제 폐지 선언해 오스만 제국 멸망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동맹국으로 참전하였다. 동맹국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왕국, 오스만 제국을 일컫는다. 제1차 세계 대전에 패전국이 되어 전범 국가로 지목됨으로써 세브르 조약의 결과, 1914년 이전의 영토를 거의 대부분 상실하고 소아시아와 유럽의 일부만을 지니게 되었다. 그 이후, 그리스한테 침공을 받아 심각하게 위협을 받게되는데, 한때는 국가의 존망이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케말 파샤
그러나 1922년경부터 무스타파 케말 (Mustafa Kemal) 파샤 장군의 지휘 아래 그리스군을 앙카라에서 격파하고, 이에서 도주하는 그리스군을 이스탄불에서 또 대파함으로써 그리스 영토 일부까지 실지를 회복하는 등 그 영토가 로잔 조약으로 현재의 터키 공화국의 영토로 고정되었다.
1922년 11월 1일에는 무스타파 케말 (Mustafa Kemal) 파샤에 의해 터키에서 대국민의회가 술탄제 폐지를 선언하여 메흐메트 6세 (재위 1918 ~ 1922)가 폐위됨으로써 600년 장수 제국은 해체되었다. 압뒬메지트 2세도 1924년, 칼리프제가 폐지됨에 따라 프랑스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죽었다.
오스만 제국의 발전
1. 튀르크계의 오스만 족이 건국(13세기)
2. 발전
- 메메트 2세: 비잔티움 제국 정복,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수도로 삼음
- 술레이만 대제: 헝가리 정복, 오스트리아의 빈 포위, 지중해 장악 → 전성기 이룩
3. 정치·사회
- 술탄·칼리프제 확립, 예니체리 양성(술탄의 호위 부대)
- 관용 정책: 인두세를 납부하면 종교 자유 인정, 다양한 종교 공동체 보호
4. 문화
- 동서 문화 융합: 이슬람 문화를 바탕으로 비잔티움·페르시아·튀르크 문화 융합
- 모스크와 장식 미술 발달, 궁정 문학 유행 및 실용 문화 발달, 주변 지역으로 문화 전파
5. 쇠퇴
- 유럽 인의 신항로 개척으로 무역 감소, 서양 세력 침입으로 쇠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