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지정학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이스탄불을 둘러싼 주변 지역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 지역에 거주하던 투르크인들은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왔다.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이 육교 같은 지역에 정착했다. 이 지역은 흑해와 에게해로 흐르는 마르마라해를 잇는 육교 역할을 한다. 투르크인들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을 점령하면서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투르크인들은 이 육교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보스포러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은 물론,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당시 터키의 중심은, 지금의 터키인 아나톨리아의 광대한 지역이 아닌, 이 육교 지역이었다.
투르크인들은 주변의 바다와 평야를 손안에 두면서, 지역의 무역과 경제 성장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거친 아나톨리아 반도를 점령해 방패막이로 삼았다.
아나톨리아 반도는 산악 지역이 많기 때문에 침입이 어렵다. 동시에 이러한 특성 때문에, 지역별로 산재한 민족과 종교를 정복하고, 통제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투르크인들은 이 유리한 고치를 통제하면서, 외부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터키는 아나톨리아 반도와 더불어 다르다넬스 해협과 보스포러스 해협의 통제권을 손에 넣음으로써 난공불락의 국가가 되었다. 이제껏 터키를 지배해온 모든 세력에는 최소한 이들 지역의 통제가 최우선이었다.
터키의 역사는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오스만 제국이다. 오스만 제국은 1299년을 시작으로 1922년에 끝을 맺었다. 1600년대 후반 이 제국은 방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스만이 성공적으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비교적 온건한 방식으로 지역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적어도 인류 역사상에서) 대체로 상당 수준의 지방 자치권을 부여했고, 다양한 종교와 민족들을 놀랍도록 관대하게 대했다.
권력의 절정을 달리던 시절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의 절반 이상에 힘이 미쳤고, 현대의 이란 지역을 비롯해 중동 지역 대부분을 통제했으며, 유럽 깊숙이까지 침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즈음, 오스만 제국의 지배 지역은 아나톨리아 반도, 보스포러스 해협 동부 지역, 레반트해, 홍해의 동안 및 페르시아만의 서안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도 지역마다 지배력이 달랐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은 무너졌고,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터키 공화국을 세웠다. 이때가 터키의 두 번째 단계인 근대 터키였다. 전쟁이 끝난 후, 유럽 강대국은 보스포러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비롯한 터키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려고 시도했다.
동맹국들은 그리스, 쿠르드, 아르메니아 등 다양한 지역에 자치권 부여를 통해 오스만 제국의 귀환을 막으려 애썼다. 하지만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터키군은 점령군을 물리치고, 괴뢰 정권을 전복시켰으며, 시간이 지난 후 터키 공화국을 세웠다.
근대 터키는 아타튀르크가 만든 체제를 통해 통치되었다. 케말리즘이라고 불리는 이 정치 체제는 두 가지 주요 개념, (군주제에 반대되는) 공화주의와 세속주의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케말리즘의 목표는 오스만의 이슬람 뿌리에서 벗어나 유럽의 정치와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새로운 터키는 이스탄불과 다르다넬스 해협 및 보스포러스 해협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투르크인이 아닌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아나톨리아 반도는 케말리스트 투르크인들의 다소 강격한 통제하에 두었다. 위에선 언급한 것처럼, 온건한 지배 정책을 펼쳤던 오스만과는 대조적이었다.
케말리스트들은 점차 아나톨리아 반도의 통제를 확대해 나가면서, 투르크어 이외의 언어를 억압하고, 국가와 종교를 강력하게 분리했다. 마르마라해 지역 출신의 군인들과 산업가 계급이 터키를 지배했다.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터키인들은 권력 집중을 꾀했고, 2차 세계 대전에서도 중립을 지켰다.
냉전 기간 동안 터키는 고립 상태에 있었다. 유럽에 참여하려는 터키의 노력은 번번이 그리스의 반대에 부딪혔다. 공산주의가 발칸반도와 중앙아시아를 위협하고 있었고 소련은 시리아 및 이라크와 우호적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더욱이 페르시아만의 수니 왕국은 공격적인 세속주의로 터키와 긴장 관계를 형성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터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움직였다. 터키의 지정학적 위치가 미국의 소중한 동맹국이 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다르다넬스 해협과 보스포러스 해협을 해협을 통한 소련 해군의 운항을 감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은 터키와의 동맹을 통해 소련에 가까운 곳에 미군을 주둔시킬 수 있었다. U-2 정찰기가 처음 터키에서 날아올랐으며, 한때 핵미사일이 배치되기도 했다. 터키는 1952년에 공식적으로 나토에 가입했으며, 1949년 결성된 이후 처음으로 신규 회원국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케말리스트 체제의 터키는 이스라엘을 지지했으며, 유대인 국가를 인정하는 최초의 국가 중 하나였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과 미국의 관계가 개선됨에 따라, 터키와 이스라엘 또한 더 긴밀한 동맹국이 되었다. 터키는 이스라엘 공군이 비행 훈련을 위해 터키 공역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이스라엘 군수물자 또한 적극 구매했다.
터키 군부는 주기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표면적으로는 케말리스트 체제를 유지시킨다는 이유였다. 쿠데타는 1960년, 1971년과 1980년에 일어났다. 1997년에도 조용하게 쿠데타가 벌어졌다. 외부에서는 군부가 특정 정책 또는 결정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해당 정책 또는 결정이 효과적으로 이행되게 만들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터키를 현 단계로 몬 사건은 소련의 몰락과 냉전의 종식이었다. 냉전 기간 동안 터키는 소련을 억제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미국과 나토에게 아주 귀중한 존재였다. 냉전이 종식되자, 이런 터키의 가치가 줄어들었다. 터키는 1차 걸프전 당시 쿠웨이트에서 사담 후세인을 내쫓는 작전에서 미국과 동맹국을 지원했다.
한편, 중동에서는 이슬람주의 정서가 고조되고 있었다. 이슬람 극단 주의자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을 퇴각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로 인해 소련의 힘은 확실히 약화됐고, 연방 해체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들은 1차 걸프전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드 국왕이 서방 군대를 왕국에 주둔시킨 일을 불편해했다. 중동의 "데탕트"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이 알 카에다와 다른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들의 발흥을 지원했다.
터키라고 이러한 압력에서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케말리스트 체제의 터키 하에서 세속주의 정부는 터키에 의해 억압받던 소수 민족들과 이슬람주의자들과 긴장을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1970년대 들어 이슬람 정당이 조직되기 시작했으나, 모두 해체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이 되자, 이들의 세력이 강해지고 있었다. 케말리스트들은 이들이 세력을 형성하는 일을 막기 위해 열심을 다했다. 하지만 2002년 정의개발당(AKP)의 출현해 선거를 휩쓸면서, 터키 정치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이 당을 이끌던 레제프 에르도안은 1994년 "이슬람주의"이가 담겼다고 판결 받은 시를 대중 앞에서 낭독했다는 이유로 수상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2003년에 금지령이 철회되고서야, 에르도안은 수상 자리에 올랐다.
AKP는 귈렌 운동을 통한 "동조자"가 되자는 선거 운동으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이 운동은 펫훌라흐 귈렌(Fethullah Gulen)이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이맘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귈렌은 현재 (터키에서 체포를 피해)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거주하면서, 보수적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온건한 수니 이슬람주의 운동을 창시했다.
귈렌 운동은 교육을 중심으로 한다. 초중등 교육에 중점을 둔 귈렌 학교는 과학 교과목을 중심적으로 가르친다. 오직 이슬람 세계에 대한 종교 교육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사우디의 마드라사(Madrassas)와는 아주 다르다.
귈렌주의자들의 목표는 학생들을 전문성을 갖춘 주류 계층에 들어가도록 교육하는 한편, 이들의 이슬람 신앙을 고소득층에 전파하는 것이다. 터키의 세속주의 정부는 종교 학교 출신 학생들이 터키 내 주요 대학에 입학할 수 없도록 규정함으로써, 이들이 전문직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규정은 AKP가 집권하면서 사라졌다.
귈렌 운동이 터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115개 국에 걸쳐 1,000개의 학교를 갖춘 세계적인 운동이다. 가톨릭-기독교 엘리트 양성에 초점을 맞춘 예수회와 아주 흡사하게, 귈렌주의자들도 엘리트 전문가와 기술을 갖춘 사회경제적 계층을 양성해, 보수적이지만 원리주의에 치우치지 않은 새로운 이슬람 교리를 전파하는 것이 목적이다.
냉전 종식 이후 터키의 캐말리스트 체제는 꾸준히 세력이 약해졌다. 에르도안의 입장은 보다 종교적이며, 친서방적이 않았다. 즉, 아나톨리아가 마르마라해를 둘러싸고 있는 터키의 핵심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변화는 서방 및 이웃 국가들과 터키의 관계를 꾸준히 변화시켜 왔다.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무조건 지원하던 터키는 점차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 미국과 동맹국들이 사담 후세인을 전복시켰던 2차 걸프전에도 반대했다. 때문에 미국은 전쟁 당시 터키의 공군 기지를 사용할 수 없었다. 터키가 이 전쟁에 반대한 이유는 이 지역에 불안정을 가져올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AKP 정부는 수년간 이스라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터키는 2008-09년 이스라엘-가자 분쟁을 비난했고, 이탈리아, 터키 및 미국 군대가 포함된 아나톨리아 이글 군사 훈련에서 이스라엘을 배제했다. 마찬가지로, 2010년 이스라엘 해군의 가자 소함대 급습으로 양국 관계는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이 사건에서, 이스라엘 해군은 구호물품을 싣고 가자로 향하던 소함대에 올라타려고 했고, 그 와중에 터키인 8명이 사망했다.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의 사과를 받아내고 양국 관계가 정상화되기까지 3년이 걸렸다. 이스라엘과 터키 간의 관계는 케말리스트 체제하에서만큼 긴밀해질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터키 정치 발전의 세 번째 단계는 아마도 오스만 제국의 뿌리와 아타튀르크의 비전을 합쳐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정치적 이슬람의 부상으로 세속주의 국가는 약해졌고, 케말리스트 체제는 경제는 성장시킬 수 없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다르다넬스 해협과 보스포러스 해협 주변의 터키 핵심 지역 밖에 있는 다른 종교 및 민족 집단을 감싸 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르도안은 이슬람교도들을 아나톨리아의 "내륙" 지역에 포함시키려 했지만, 쿠르드인들과 불균등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때로는 이들에게 구애의 손실을 내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억압했다.
지금까지 AKP가 지배해온 세 번째 단계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국가" 이슬람교도들과 다르다넬스와 보스포러스 지역의 지배적인 투르크인들과 통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통합을 위해서는 강력한 경제가 필요하다.
오스만 제국의 발전
1. 튀르크계의 오스만 족이 건국(13세기)
2. 발전
- 메메트 2세: 비잔티움 제국 정복,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수도로 삼음
- 술레이만 대제: 헝가리 정복, 오스트리아의 빈 포위, 지중해 장악 → 전성기 이룩
3. 정치·사회
- 술탄·칼리프제 확립, 예니체리 양성(술탄의 호위 부대)
- 관용 정책: 인두세를 납부하면 종교 자유 인정, 다양한 종교 공동체 보호
4. 문화
- 동서 문화 융합: 이슬람 문화를 바탕으로 비잔티움·페르시아·튀르크 문화 융합
- 모스크와 장식 미술 발달, 궁정 문학 유행 및 실용 문화 발달, 주변 지역으로 문화 전파
5. 쇠퇴
- 유럽 인의 신항로 개척으로 무역 감소, 서양 세력 침입으로 쇠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