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법緣起法, 일체유심조
일체유심조는 법이 아니다. 그리고 당연히 계율도 아니다.
모든 것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중심엔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진실을 표현하는 말이 일체유심조이며,
그러한 진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자각’이다.
불교에 동업중생同業衆生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같은 시대 같은 공간 안에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시간이 맞지 않으면 시대가 달라지고, 공간이 맞지 않으면 세계가 달라지며, 의식이 맞지 않으면 차원이 달라지는 법이니,
시대도 맞고 공간도 맞으며 의식도 맞는 우리야말로 진정한 동업중생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법이란, 모든 존재는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있게 된다는 인과因果의 법칙,
모든 존재는 혼자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 연에 의해 그리고 인과 연이 서로 화합하여야 한다는 인연화합因緣和合의 법칙,
세상의 모든 존재는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지하고 서로 관계되어 있다는 상의상관相依相關의 법칙,
그리고 이러한 연기의 법칙이나 진리들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본래 이 우주 법계에 존재한다는 법주법계法住法界의 법칙 등을 나타내는 불교의 교리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이고 너무나 뻔한 내용이다.
하지만 전통과 경전에 남다른 애정이 있는 너희를 위해 쉽게 요약하자면, 내가 불편하면 남도 불편해지니 내가 편안해야 남도 편안해지고,
내가 불행하면 남도 불행해지니 내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해지고, 내가 잘못되면 남도 잘못되는 것이니 내가 잘되어야 남도 잘되는 것이고,
나의 실패는 남의 실패이기도 하니 나의 성공은 곧 남의 성공이기도 하다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시대, 한 공간에 같이 사는 동업중생이자 인연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지금부터 연기법에 관한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부처님께서는 아함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신의 뜻도 아니고 운명적인 것도 아니며 우연도 아니다. 오로지 연기緣起일 뿐이다.”
연기란 무엇일까? 연기라는 말은 법이라고 거창하게 이름 붙일 것도 없는, 그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현상을 두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연기법에 대해 설한 이유는, 물질계의 현상에 대한 오묘하고 심오한 법칙을 밝혀 주려는 의도라기보다는,
물질계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물질적으로 연계된 일반 범부중생들의 삶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다.
이런 부처님은 관점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꿈속의 물거품과 같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는 금강경의 구절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이런 부처님은 극단적인 비현실주의자이고 몽상가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한순간에 수백 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고 한순간에 단 한 명의 살인마에 의해 수십 명의 생명이 초개와 같이 사라지는
작금의 현실만 보더라도 이런 부처님의 관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냉엄한 현실은 말한다. 인생은 결코 장황하지도 하고 영구하지도 않고 심오하지도 않은 무상한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두고 운명이니 숙명이니 열거하며 주역, 사주팔자, 풍수지리, 관상 등 수많은 설정과 의미를 두어,
마치 인생에 거대한 청사진이 담겨 있는 줄 착각하고 있지만, 부처님의 지적대로 나의 현실은 한순간 빛을 발하다 사라지는 불꽃의 신세와 같다.
인생은 연기緣起이다. 말 그대로 잠시 피어오르다가 사라지는 연기煙氣와 같다.
부처님뿐만 아니라 지상을 거쳐 간 수많은 성자는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인간의 삶은 신기루와 같고 꿈과 같고 환영과 같다고.
그러면 이들이 이렇게 말하게 된 정신적인 배경은 무엇일까?
바로 이 점이 공부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나는 누구이며 나의 진정한 삶은 어떠한 것일까? 하는 대명제 말이다.
물질 세상이 꿈처럼 느껴지고, 물질 세상이 환영에 불과하며, 육체적인 내가 착각에 불과한 것이라고 모든 성자가 느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그렇게 느꼈던 이유는, 그들에겐 ‘신적인 나’에 대한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순간에 스러져가는 육체적인 삶에 귀속된 존재가 아니며, 나의 삶은 한순간 반짝하는 하루살이의 삶이 아니다.
나는 그 어느 곳에도 귀속됨 없이 그 어떤 것에도 생명을 불어넣어 그것을 존재케 하는 대자유의지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다.”
그들은 이러한 신적인 나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에서 구속을 보았고, 그들은 무한에서 유한을 보았으며, 그들은 영원에서 순간을 보았고, 그들은 진실에서 꿈을 보았다.
그들에게는 이런 나의 진정한 법신에 대한 자각이 있었고, 그런 법신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았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과학의 총아라 일컫는 양자역학에서는 양자역학의 개념을 언어로 설명할 때,
기존의 언어체계로는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의상대사는 법성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 그리고 무엇이라 말할 수도 없다.
오직 깨달은 지혜로만 알 수 있을 뿐 어떤 말과 생각의 경계가 아니다.(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指非如境)”
석가모니 부처님이 제자들과의 관계에 있어 가장 불편함을 느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깨달음에 관한 의사소통의 문제였다.
그는 인간적으로 매우 탐구심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무엇이든 관찰하고 분석하고 고찰해보는 것이 습관화된 특이한 유형의 인물이었다.
결국, 그의 끝없는 탐구심이 종국에 가서는 탐구심을 내는 자신을 탐구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부처님은 내가 만들어 낸 생각에 대한 이해가 아닌, 생각을 만들어 내는 나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되었고,
드러난 표면적인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넘어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양자역학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양자역학은 물리학이 단순히 물질의 표면적인 차원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본질로,
그리고 더 나아가 존재의 본질적 차원까지 과학의 영역으로 다룰 수 있음을 보여준 놀라운 과학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자역학이 존재의 본질을 규명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존재의 본질을 새로운 차원, 새로운 관점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아인슈타인은 말년에 이르러 자신과 더불어 인간의 사고체계의 한계를 보았다. 그는 말년에 이런 명언을 남겼다.
“우리는 자기가 경험하고 관측한 세계에 의해 만들어진 각기 다른 관점에서 서로 논쟁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우리 인간은 서로 다투고 논쟁하고, 온갖 개념과 사상과 주의를 만들어 전쟁까지 일으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가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이란, 우리가 느껴서 알 수 있는 한계 내에서의 자연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감관感官에 의해 체험된 사실은 우리의 감관의 한계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상대성원리 또한 우주의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법칙이라기보다는,
나의 오감五感과 육식六識을 통해 내가 경험하는 우주의 법칙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즉, 관찰자인 자신이 고정불변하고 확정적인 존재의 상태에 있다고는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말년의 아인슈타인의 이런 폭탄발언은 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후 현대의 과학사에 한 획을 그은 또 한 사람의 혜성과 같은 과학자가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한 하이젠베르크이다.
하이젠베르크의 원리는 사실 매우 간단하다.
말 그대로 불완전한 인간의 사고체계에서 나오는 논리들은 마찬가지로 모두 다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한 과학적 근거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에
동시에 두 가지를 모두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또한 그들이 새롭게 발견한 과학적 개념을 기존의 언어체계를 통해 표현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불확정성’이라는 말 또한 의도하는 정확한 의미를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
단어가 주는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물질의 기본이 되는 입자가 뭔가 불안하거나 결정되지 않아
안정성이 없는 불확정한 상태에 있다는 것으로만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불확정성은 단순히 미지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하이젠베르크가 말하고자 했던 불확정성은 언제든 적극적인 상태, 확정적인 상태로 전환될 수 있다는 뜻이다.
원자는 평온한 상태가 유지되는 한 모든 선택의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다.
원자는 언제든지 자연이 부과한 모든 속성 중 어느 한 속성을 띨 수 있다.
즉, 원자는 자신이 지닌 모든 가능성의 총합이다.
예를 들어, 원자가 한 가지 가능성을 결정하면, 그 가능성은 바로 현실이 된다.
다시 말해 원자가 어떤 존재형태로 나타나고 결정지을지는 원자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결국, 하이젠베르크의 인식은, 우리 역시 자기 자신이 지닌 모든 가능성의 총합이며
모든 것이 나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일체유심조의 근본적인 통찰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연기법을 알아야 하고, 연기법을 알아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교의 핵심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말과 개념의 허황한 뜻만 좇기에 그런 것이지.
여기 낫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와 ‘ㄱ’자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물었던 사람이, “어떻게 낫을 들고 있으면서 ‘ㄱ’자를 모를 수 있느냐.” 하면서 그를 다그쳤다.
그러나 낫을 들고 있던 사람은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대체 이 사람이 왜 이러는 것일까?”
낫을 들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 낫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실존적으로 낫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왜 ‘ㄱ’자를 알아야 하나?
낫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 ‘ㄱ’자를 아느냐고 묻는 사람은 누구인가?
낫에 대해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생각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손에 낫이 쥐어져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ㄱ’자는 알지만, 낫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인과법, 인연법, 연기법 등 소위 온갖 법을 알아야 하고 법을 깨우쳐야 한다고 역설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이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 모든 법의 주체가 누구인가? 나이다. 누구에 의해 법이 존재하며 누구에 의해 비롯된 법인가? 당연히 나이다.
그러니 인과법의 주체가 나이고 인연법의 주체도 나이며 연기법의 주체도 바로 나이다.
나는 낫을 들고 있고 낫을 사용하는 자이다. 단지 낫의 개념에 불과한 ‘ㄱ’자를 굳이 알 필요가 없다.
식자들이 말하는 세상의 이치, 만물의 법칙, 물질의 현상은 모두 이 ‘ㄱ’자에 불과하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이미 낫을 들고 있고 사용하고 있는 나의 존재 자체가 바로 이치이고 법칙이고 현상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연기법을 설한 진정한 의도는 무엇일까?
바로 연기법의 주체가 나이며 불확정성의 주체가 바로 나의 마음임을 깨우쳐 주고 싶었던 것이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결코 미지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경계, 무제한, 구속 없음의 상태이다.
그렇기에 역동적이고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된 상태가 바로 이 불확정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원자의 상태가 그러하고, 분자의 상태가 그러하며, 전자의 상태가 그러하고, 소립자의 상태가 그러하며, 양자의 상태가 그러하고, 광자의 상태가 그러하다.
이 모든 것들에 의식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마음이 그러하다.
세상 만물이 나의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고 나의 마음에 달려 있으니,
세상 만물이 생성되고 유지되고 소멸되는 것 또한 불확정적이며 연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나의 마음이 불확정적이고 연기적이니 우주가 불확정적이고 연기적으로 펼쳐지는 것이고,
나의 마음이 불규칙적이고 불연속적이니 우주가 불규칙적이고 불연속적인 모습을 띠는 것이며,
나의 마음이 불가측하고 불예측하니 우주를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우주를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이 나의 마음에 의한 것이며 나의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고로 나는 불확정성 원리의 진실이자 연기법의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