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 제국의 변화
로마 제국의 전제정과 동서 분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정치
전제군주정 개혁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세기 내내 지속된 로마 제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개혁작업에 나섰다. 우선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이루기 위해 그 때까지도 남아있던 공화정 시대의 잔재들을 일소하고 '프린켑스(제1시민)'라는 애매한 위치에 놓여있던 로마 황제 자리를 오리엔트식 전제군주와 비슷한 형태로 바꾸었다. 명칭부터 '도미누스(Dominus; 지배자)'라고 변경하고 페르시아식 궁중예법을 도입하여 황제의 권위를 높였다. 이제 로마 제국은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어낸 '원수정(프린키파투스)'이 아닌 본격적인 '전제군주정(Dominatus; 도미나투스)'이 시작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형식상 남아있던 로마 원로원의 권한을 모두 박탈하였는데 이미 3세기의 위기를 거치면서 로마 원로원은 황제의 칙령을 법령으로 공포하기 위한 형식적인 의결기구로 전락했고 군무에서도 배제되었기 때문에 명예직에 불과했지만 그나마 남아있던 로마 원로원의 입법 기능을 모두 배제해버렸다. 민회의 권한도 박탈되어 이제 황제의 칙령은 민회의 승인도 받지 않아도 곧바로 법률적인 효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보좌하기 위한 관료 조직도 더 세분화되고 더 늘어나는 대신에 집정관을 비롯한 모든 관료를 민회의 승인 없이도 황제가 임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 하나의 로마 원로원의 권한인 원로원령 속주 총독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도 박탈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시절 로마 속주는 황제가 직접 총독을 임명하는 '황제령 속주'와 로마 원로원이 총독을 임명하는 '원로원령 속주'로 나뉘었는데 황제령 속주 총독은 '황제 대리인(Legatus Augusti pro praetore)'라고 부르고 원로원령 속주 총독은 공화정 시절 그대로 '전직 집정관(Proconsul)'이라고 부르며 구분하였다. 그러나 이제 원로원령 속주까지 황제가 직접 총독을 임명하도록 변경하였고 속주 총독이 너무 막강한 권한을 지녀 반란의 온상이 되어버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속주를 좀더 세분화하여 그 권한을 축소시켰다. 또한 민정(문민 행정)과 군정을 구분하여 민정은 전문 관료에게 맡기고 대신에 몇 개의 속주를 묶어서 '관구(Diocese)'를 신설하고 이를 담당할 '비카리우스(vicarius; 대리인)'이라는 민정 지방관을 만들어냈다.
군사조직도 개편하여 속주 총독의 군정 기능을 배제시켰기 때문에 본래 몇 개의 군단을 지휘하는 군사령관의 호칭이었던 '둑스(dux)'를 하향조정하여 각 속주별 군단을 지휘하는 군단장의 호칭으로 변경하였다. 다만 둑스를 총괄하는 '코메스 둑스(comes dux)'를 두었는데 이는 직책이라기 보다는 최선임 둑스에 대한 호칭으로 보는 것이 옳다. 또한 로마 군단이 대부분 국경에 배치되어 예비병력은 황제의 근위대 이외에는 별달리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 군단을 중앙 기동예비대인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와 국경 주둔병인 리미타네이(limitanei)로 구분하여 충분한 예비 병력도 확보하였다. 또한 황제의 근위대장(praefectus praetorio; 프라이펙투스 프라토리오)은 비카리우스와 코메스 둑스의 상위 지위로 민정과 군정을 총괄하면서 오늘날의 총리와 같이 그 성격이 변화하게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으로 관료와 군사령관의 숫자가 증가하고 군대도 증강되었기 때문에 막대한 재정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세제 개편도 단행하여 크게 농경지에 부과하는 '토지세(jugum)'와 사람에게 부과하는 '인두세(capitatio)'로 구분하고 과세를 위한 평가는 5년 단위로 이루어지도록 했다. 모든 세금은 실질적인 소득과 무관하게 부과하였고 중앙 정부가 총괄하여 징수하기로 하였다. 일견 가혹해보이는 세제 개편이었지만 3세기의 위기 시절에 마구잡이로 부과하던 모두 특별세를 폐지하였고 그동안 면세 혜택을 누리던 이탈리아에도 과세하는 등 나름대로 합리적인 면이 있었다. 또한 국가 재정수입을 일정하게 만들면서 재정지출의 안정화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스도교 박해
그리스도교는 초기부터 로마 제국의 체제를 위협한다고 하여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네로(재위 AD 42년 ~ AD 54년)는 로마 대화재로 흉흉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그리스도교도에게 방화범 혐의를 뒤집어 씌어 학살하였고 도미티아누스(재위 AD 81년 ~ AD 96년)는 자신을 스스로 신격화하면서 그리스도교를 국가 전복죄로 취급했다. 또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재위 AD 193년 ~ AD 211년)는 그리스도교의 확산을 막는 엄격한 법을 제정하여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에서 격렬한 박해를 실시하였다. 군인황제시대에도 데키우스(재위 AD 249년 ~ AD 251년)와 발레리아누스(재위 AD 253년 ~ AD 260년)가 각각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이어졌지만 재위기간이 짧아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리스도교의 최후이자 최대의 큰 박해는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AD 284년 ~ AD 305년) 시절 일어났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전제 군주정을 도입하면서 페르시아식 궁정 예법을 도입하였고 전통적인 로마의 다신교 숭배 사상을 부활시키며 스스로를 신격화하였다. 그러나 로마 제국 내에 퍼지고 있던 그리스도교는 우상 숭배를 금지하고 있었고 당연히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신으로 섬길 수는 없었기 때문에 거부하였고 이것이 디오클레티아누스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AD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공식적인 칙령을 발표하여 그리스도교의 포교를 금지시켰고 교회와 성물, 성전을 파괴하고 어떠한 형태로든 그리스도교의 모임을 불허하였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교가 만연해 있던 동방 속주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대를 보내 철저하게 진압하였다. 그리고 AD 304년에는 고발이 없어도 그리스도교인을 체포하고 고문할 수 있도록 하여 철저하게 그리스도교를 탄압하였다.
로마 최초의 분할통치 사두정치
디아클레티아누스가 전제군주정과 함께 도입한 또 하나의 개혁은 '사두정치(Tetrarchia; 테트라키아)'이다. 디아클레아누스는 점점 늘어가는 외적의 침입 때문에 로마 제국의 국경이 곳곳에서 뚫리는 상황 속에서 로마 황제 혼자서 방대한 로마 제국 전체를 지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디오클레티아누스 자신이 '정제(Augustus)'로서 로마 제국 동방의 통치를 담당하는 대신에 유능한 장군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막시미아누스)를 '부제(caesar)'로 임명하여 로마 제국 서방의 통치를 일임하였다. 비록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렐리아누스가 모두 자신의 아들을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국경을 나누어 방어한 적이 있었지만 이는 후계자를 미리 지명하여 유사시를 대비한 임시체제였던 반면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를 아예 상설 제도로 만든 것이었다.
이러한 분할 통치가 어느 정도 효율성이 증명되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AD 286년 아예 막시미아누스를 '정제(Augustus)'로 승격시킨 후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갈레리우스)와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각각의 '부제(Caesar)'로 임명하여 동서로 나뉜 제국의 방위를 다시 4분할하는 '사두정치(Tetrarchia; 테트라키아)'를 성립시켰다. 다만 사두정치는 어디까지나 효과적인 국경선 방위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 제국까지 분할한 생각이 없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스스로를 '세니오르 아우구스투스(Senior Augustus)'로 부르게 하고 막시미아누스를 '유니오르 아우구스투스(junior Augustus)'로 부르게 하며 그 우위를 분명히 구분한 채 로마 제국 전체에 대한 중요한 결정은 직접하였다.
이제 로마 제국은 정제 및 부제 4명이 통치하는 '관할구역(Praetorian prefecture)'으로 나뉘었고 세부현황은 다음과 같다.
① 디오클레티아누스(동방 정제)
- 주둔지 : 아나톨리아의 니코메디아
- 통치지역 : 오리엔스 관할구역(트라키아 관구, 아시아 관구, 폰투스 관구), 이집트 황제 직할령
② 갈레리우스(동방 부제)
- 주둔지 : 도나우 강의 시르미움
- 통치지역 : 일리리아 관할구역(판노니아 관구, 모이시아 관구, 트라키아 관구)
③ 막시미아누스(서방 정제)
- 주둔지 : 이탈리아의 메디올라눔
- 통치지역 : 이탈리아 관할구역(이탈리아 관구, 아프리카 관구, 히스파니아 관구)
④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서방 부제)
- 주둔지 : 갈리아의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
- 통치지역 : 갈리아 관할구역(갈리아 관구, 비에넨시스 관구, 브리타니아 관구)
제2차 사두정치
사두정치가 등장하면서 이제 로마는 1명의 황제에게 의존하면서 발생하는 느린 의사결정의 문제를 해결하고 신속한 국경방어와 내란 토벌이 가능해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의도대로 사두정치가 실행된 이후 로마 제국의 국경선이 안정화되었기 때문에 그 효율성은 인정받았으나 4명의 군통수권자가 존재하여 내분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단점이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생존하는 동안은 그의 권위가 다른 3명보다 높았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없이 유지되었으나 그가 죽은 이후에는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를 잘 아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AD 305년 5월 돌연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은퇴를 선언하였다. 부제였던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나란히 정제로 승격시킴으로써 1명의 정제 자리를 두고 벌어질 내전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부제는 각각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갈레리우스 막시미누스 다이아(막시미누스 다이아)와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세베루스)가 선정되었다. 이로서 제2차 사두정치가 시작되었다.
제2차 사두정치 체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제2차 사두정치 체제의 한계는 무엇보다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센티우스(막센티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아들인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콘스탄티누스(콘스탄티누스)가 권력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분쟁의 씨앗을 남겼다는 점이었다. 결국 AD 306년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브리타니아 원정 도중에 병사하자 원정군 병사들은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를 정제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정제가 죽은 경우에는 부제가 정제로 승격하는 원칙을 어겼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의 정제 승계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동방의 정제 갈레리우스가 중재를 나서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의 영토를 승계하는 대신에 서방의 정제로 세베루스를 인정하게 하고 콘스탄티누스는 서방의 부제가 되도록 하였다.
이렇게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 영토를 승계하자 이번에는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가 불만을 터트렸고 이를 기회로 그동안 소외되었던 로마 원로원이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고자 하는 목적에 AD 306년 10월 막센티우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서방의 정제 세베루스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반역이었기 때문에 AD 307년 2월 군사행동을 개시하였으나 은퇴하였던 막센티우스의 아버지인 막시미아누스가 아들을 위해서 정계에 복귀하여 세베루스의 군대를 격퇴하고 세베루스를 살해하였다. 결국 상황 정리를 위해서 전임 황제 신분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그리고 현재의 동방 정제인 갈레리우스가 모여 회합을 가졌으나 막센티우스의 기대와 달리 서방의 정제로 플라비우스 리키니아누스 리키니우스(리키니우스)가 선임되었다. 그러자 막센티우스가 아버지 막시미아누스마저 내쫓고 무력으로 황제 자리를 차지하였고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에게 몸을 의탁하는 처지가 되었다. 막시미아누스는 AD 310년 콘스탄티누스가 원정을 떠난 사이에 쿠데타를 계획하였다가 예상보다 빨리 되돌아 온 콘스탄티누스에게 축출되어 마실리아(현재의 마르세유)에서 사망하였다.
한편 서방의 정제로 임명되었으나 막센티누스에 의해 밀려나고 말았던 리키니우스는 갈레니우스에 의해 일리리쿰, 트라키아, 판노니아 속주의 지배를 맡게 되었다가 AD 311년 갈레리우스가 죽자 동방의 정제가 되어 그의 속주를 모두 이어받았다. 그러나 동방의 부제인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동방 속주에서 사실상 정제와 같이 행동하였기 때문에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막센티우스, 리키니우스,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모두 정제로 자칭하며 4분할되었다. 그 세부적인 세력 현황은 다음과 같다.
① 콘스탄티누스
- 주둔지 : 갈리아의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
- 통치지역 : 갈리아 관구, 히스파니아 관구, 브리타니아 관구
② 막센티우스
- 주둔지 : 이탈리아의 로마
- 통치지역 : 이탈리아 관구, 아프리카 관구
③ 리키니우스
- 주둔지 : 도나우강의 시르미움
- 통치지역 : 판노니아 관구, 모이시아 관구, 트라키아 관구
④ 막시미누스 다이아
- 주둔지 : 아나톨리아 반도의 안티오키아
- 통치지역 : 오리엔스 관구, 아시아 관구, 폰투스 관구, 이집트 관구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누스 1세의 서방 황제 등극
로마 제국의 서방은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의 세력으로 분할된 상태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의 아버지인 막시미아누스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적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 중에서 먼저 행동을 개시한 것은 콘스탄티누스였다. 콘스탄티누스는 AD 311년 동방의 정제인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어 막센티우스의 반란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얻은 후 AD 312년 4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하였다. 막센티우스의 병력 총 10만명에 비해 병력 숫자는 적었지만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로마 제국의 최전선 중 하나인 라인강을 지키던 정예병으로 실전 경험이 풍부하였다. 또한 이탈리아 북부의 요충지인 토리노와 베로나를 점령한 뒤 살인과 약탈, 방화 등을 금지시키면서 민심까지 얻었다. 결국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의 도시들이 별다른 전투없이 항복하기 시작했고 이에 막센티우스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서면서 10월 28일 로마 북부의 밀비우스 다리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밀비우스 다리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콘스탄티누스의 꿈 속에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그리스 문자인 '라바룸'('카이'(Χ)와 '로'(Ρ)를 겹친 모양(☧))이 나타났고 "이 표시로 이기리라"라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 전설의 사실여부를 떠나서 전투가 시작되자 막센티우스는 테베레 강변에 배수진을 펼쳤지만 전투경험이 풍부한 콘스탄티누스군의 공격에 밀리기 시작했다. 결국 막센티우스는 로마로 후퇴하여 농성전을 펼치기로 결심하였으나 밀비우스 다리는 대병력이 한꺼번에 퇴각하기에는 너무 좁았다. 수많은 말과 병사들이 다리에서 떨어졌고 막센티우스도 강물에 떨어져 익사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강물에서 막센티우스를 건져낸 뒤 그의 목을 잘라 장대에 걸고 로마로 입성하였다. 본래 로마시민과 원로원은 막센티우스를 지지했었지만 이제는 서둘러 콘스탄티누스를 정제로 추대하였고 로마인끼리의 내전에서는 축조된 적이 없는 개선문을 세우기로 결의까지 하였다. 이로서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되어 로마 제국 서방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로마 제국의 재통합
콘스탄티누스 1세는 동방의 정제인 리키니우스를 밀라노에서 만나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을 시키고 여러 가지 현안을 논의한 후 로마 제국에 만연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는 내용이 포함된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통치를 좌우하기 시작하자 초조해진 동방의 부제인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AD 313년 3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리키니우스가 통치하는 속주를 침범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리키니우스의 반격에 패배하고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사망하였다.
이렇게 하여 리키니우스 역시 로마 제국 동방 지역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 두 명에 의해 양분되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의 동맹도 얼마가지 못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리키니우스와의 사소한 분쟁이 발생하자 2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처들어가면서 AD 314년 10월 8일 카발라에 전투가 벌어졌다. 리키리우스의 병력이 3만5천명으로 숫자면에서는 콘스탄티누스 1세보다 많았으나 전투는 하루종일 접전으로 흘러갔고 결국 콘스탄티누스 1세가 직접 이끈 기병대의 돌격이 결정타가 되어 콘스탄티누스 1세의 승리로 끝났다. 리키니우스는 2만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퇴각하였고 본거지인 시르미움을 버리고 발칸 반도의 트라키아 속주로 도망쳤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리키니우스를 뒤쫓아 발칸 반도에 들어가면서 마르디아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카발라에 전투보다 더 접전이 되었으나 이번에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승리하면서 리키니우스는 아시아 속주로 도망쳤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일단 리키니우스와 휴전을 맺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맏아들 크리스푸스와 함께 라인강과 도나우강 건너편의 게르만족과 전투에 전념하며 7년을 보냈다. 그 사이 리키니우스는 군대를 재건하는 데 시간을 보냈고 AD 324년 7월 3일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다시한번 맞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이번에도 콘스탄티누스 1세의 병력(130,000명)이 리키니우스의 병력(165,000명)보다 열세였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의 승리로 끝났다. 바다에서도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크리스푸스가 리키니우스의 해군에게 승리를 거뒀다.
패배한 리키니우스가 또다시 아시아 속주로 도망쳤지만 이번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아시아 속주까지 뒤쫓아 가면서 9월 18일 소아시아의 칼케돈 근처에서 크리소폴리스 전투를 벌여 다시 한번 승리를 거뒀다. 리키니우스는 니코메디아로 도망쳤으나 더이상 버티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항복하였으나 테살로니카에 감금된 후 이듬해 반란 혐의로 처형되었다. 이렇게 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가 유일한 황제가 되어 로마 제국이 다시 하나로 통합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발칸 반도의 비잔티움을 대대적으로 개조하고 '새로운 로마(Nova Roma)'라고 명명하면서 이후 1,000년 동안 동로마 제국의 중심이 되는 도시를 건설하였다.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에 그의 이름을 붙여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로 개명된다.
체제 개혁
로마 제국을 재통일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을 마무리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우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에서는 속주의 민정과 군정을 구분하여 총독을 군정 업무에서 배제시켰으나 속주에 따라서는 여전히 총독이 군대를 지휘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를 더욱 철저하게 구분하였다. 이는 황제 근위대장(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도 예외는 아니어서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근위대의 군정 기능을 박탈하고 오로지 민정에만 치중하도록 그 기능을 변경하였다. 이제 로마 제국의 민정은 '《속주 총독》-《관구 대리인(비카리우스)》-《근위대장》-《정제/부제》'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조직 체계가 구축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군사개혁에도 착수하여 근위대장의 군정 기능을 배제시키면서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오랜 전통의 황제 근위대를 폐지하였다. 또한 로마군을 국경을 수비하는 하급 부대인 리미타네이(Limitanei)와 관구(Diocese)에 기반을 둔 상급부대인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로 구분하여 리미타네이가 국경을 수비하는 동안 코미타텐세스가 요격하는 종심방어전술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근위대장의 군정 기능을 대신할 새로운 직책인 '마기스테르(magister; 군사령관)'를 신설하였다. 이제 군사 조직에 있어서도 "《둑스(군단장)》-《코메스 둑스》-《마기스테르(군사령관)》-《정제/부제》"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지휘체계가 완성되었다. 다만 마기스테르는 보병과 기병으로 나뉘어 각각 '마기스테르 페디툼(magister peditum; 보병대장)'과 '마기스테르 에퀴툼(magister equitum; 기병장관)'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교 공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 정책은 AD 309년까지 이어졌지만 그리스도교의 확산은 피할 수 없었고 AD 305년 로마 동방의 정제가 된 갈레리우스가 AD 311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그리스도교 박해 칙령을 완화시키는 새로운 칙령을 발표하면서 사실상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로마 서방의 정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동방 정제 리키니우스와 협의하여 AD 313년 그리스도교를 사실상 장려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였다. 비록 밀라노 칙령은 그리스도교의 포교를 장려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여 그리스도교도 다른 모든 종교와 평등한 입장에서 포교할 수 있는 권리만 부여한 것이었으나 그동안 박해만 받아 온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특혜를 얻은 것과 동일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내전을 통해 로마를 재통일한 후인 AD 325년에 최초의 공의회인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정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삼위일체설을 정통교리로 인정하면서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를 성립시켰다. 최종적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는 AD 337년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으면서 최초의 그리스도교인 로마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인들로부터 '대제'의 칭호를 부여받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죽음과 로마 재분할
AD 326년 갑자기 콘스탄티누스 1세는 리키니우스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던 맏아들 크리스푸스를 자신의 후처이자 크리스푸스의 계모인 파우스타와 간통했다는 혐의로 고문 끝에 처형하였고 파우스타 역시 목욕하다가 죽은 것으로 위장하여 살해당했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파우스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를 지명했다. AD 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자 후계자 중 첫째인 콘스탄티누스 2세는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를 담당하게 되었고 둘째인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아시아와 이집트를 맡게 되었으며, 막내인 콘스탄스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재통합된 로마 제국은 그의 사후 다시 셋으로 분열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 3형제가 공동황제가 되어 로마 제국을 삼분할하였으나 AD 340년 콘스탄티누스 2세가 콘스탄스의 영토를 노리고 처들어갔다가 전사하였고 AD 350년에는 콘스탄스가 내부의 마그넨티우스 반란에 살해당하면서 콘스탄티우스 2세가 로마 제국의 단독황제가 되었다. 이에 콘스탄티우스 2세는 또다른 동생인 갈루스를 부제로 삼아 제국 동방을 맡긴 뒤 병력을 이끌고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어 콘스탄티우스 2세는 갈루스를 반역죄 혐의로 처형하였으나 제국 동방에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공격 기미가 감지되자 마지막 남은 동생인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삼아 로마 제국의 서방을 맡겼다. AD 360년 율리아누스가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면서 내전의 위기가 다시 찾아왔으나 콘스탄티우스 2세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율리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율리아누스 역시 AD 363년 사산 왕조 페르시아 원정 도중 전사하였고 병사들에 의해 요비아누스가 새로운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이듬해 사망하였다. 이렇게 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가 창건한 콘스탄티누스 왕조도 79년만에 단절되고 새로운 발렌티니아누스 왕조가 들어서게 된다.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시작과 고트족의 침략
AD 363년 율리아누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도중에 전사하고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요비아누스마저 AD 364년 급사하자 새로운 황제로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즉위하게 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일개 병사로 시작해 군사령관의 지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요비아누스가 죽자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계속된 서쪽의 게르만족 침입과 동쪽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동생인 발렌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제국의 동부를 맡기는 대신에 자신은 서부에 전념하기로 했다. 이후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주로 갈리아의 루테시아에 머물며 알레마니족을 격파하였고 브리타니아에 침공한 픽트족과 스코트족을 상대하기 위해 유능한 장군인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를 파견했다.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는 자신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는데 그는 바로 나중에 로마 황제가 되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버지였다.
AD 367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아들 그라티아누스의 제위계승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9살의 나이에 공동황제로 임명했다. 그리고 AD 375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사망하자 그라티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했으나 판노니아의 로마 군단은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또 다른 아들인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4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황제로 추대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자신의 공동황제로 인정하고 어머니 유스티나의 후견하에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일리리쿰을 통치하도록 한 후 자신은 라인강을 넘어오는 게르만족을 상대하기 위해 주로 갈리아에 머물며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등 나머지 서방 영토를 맡기로 했다. 그리고 제국의 동부 지역은 숙부인 발렌스가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은 다시 3분할 되었다. 하지만 발렌스는 고트족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면서 로마 제국을 위기로 몰아넣게 된다.
최종 분할 통치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선출에 황제가 간섭할 순 있었지만 다른 나라의 총대주교 선출과 달리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선출은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황제는 평신도인 반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도 어디까지나 황제의 신하라는 묘한 관계였고, 그러다 보니 황제와 교회 사이의 충돌도 상당히 잦았다. 이것은 결국 사실상 분열되어 있었던 동서 교회가 완벽히 분리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은 후대에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제국 서부와 제국 동부는 서로를 각기 다른 국가로 인식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는 갈라진 바 없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죽음 이후에도 이러한 인식이 결정적으로 자리잡힌 바 없으며, 모든 포고령은 항시 동서 로마 황제의 이름으로 공표되었고 또 동서 로마 양대 궁정은 선임 황제인 쪽이 반대편에게 강력한 내정 간섭을 할 권리가 있었다. 게다가 사실 테오도시우스 1세 이전에는 오히려 선임 황제를 배출하는 쪽이 주로 서로마 쪽이었다. 다만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의 두 황제가 주체적인 의사로 정책을 결정하는 제대로 된 황제가 아니어서 국정을 무시했거나 집중할 수 없었고, 동서 양쪽의 실력자들이 스틸리코 외에는 모두 제국보다는 자기 세력과 기득권 유지에만 골몰했던 경우가 많아서 동서 로마 양쪽의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던 것이다.
서로마 제국
기원후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두 아들중 한명이 로마 제국을 분할하여 서쪽의 땅을 통치하면서 최종적으로 서쪽 제국 즉, 서로마 제국이라는 단어로 굳어져 오늘 날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동로마 제국과 별개의 국가가 아닌 그저 편의상으로 로마 제국 내에 서쪽을 다스리는 황제의 구역을 서로마 제국, 동쪽을 다스리는 황제의 구역을 동로마 제국으로 나누어 부르게 된 것에 기초한다.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로마 제국의 서쪽은 395년부터 476년까지 80여년 동안 존속했다. 서쪽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동방으로 수도 천도로 인해 수도권이 동방으로 날아가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었고 내전으로 인해 피폐해진 군대를 가지고 동쪽 제국보다 더 넓은 국경을 방위해야만 했다. 지도자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두 제국이 다 같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의 수도 천도로 인해 국력이 건실했던 동쪽 제국은 지도자가 무능해도 버틸 수 있었으나 서쪽은 버티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476년 서쪽 제국이 게르만족에 의해 점령당하여 고대는 막을 내리고 동쪽 제국이 멸망한 1453년까지 1,000년 동안 중세가 지속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서쪽 제국이 점령당한 뒤 그 자리에는 여러 게르만 국가들이 세워져 군웅할거 시대가 지속된다.
대부분 로마 제국이라는 용어는 476년 게르만족의 서쪽 제국 점령 이전까지의 역사를 가리키지만 로마의 멸망을 5세기로 보는 것은 15세기까지 존속한 동쪽 제국을 배제한 것이고 고대 로마만을 로마 제국이라고 할 수 없다. 애초에 동서로마는 서로 구분될 수 없는 실체이며 동서로마가 서로 별개의 국가였던 것도 아니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죽음으로 동서로마가 최종적으로 분할되었다고 하지만, 동서로마의 존재는 로마 특유의 다중황제체제 그 이상으로 보기 힘드며 실제로도 동서로마식의 분할통치가 이뤄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로마 제국의 분할통치체제를 현대 정치의 개념에 비유해본다면 지방자치가 아주 강조되어 동격의 지방정부 중 어느 한쪽이 그때그때 황제의 지위에 따라 상위 정부 노릇을 하지만, 실제로는 각자 중앙정부의 권한을 분할해 가지고 있는 체제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르게 보면, 이원집정부제와 같이 각 정부기구가 서로의 영역을 분할하여 견제-협력만 할 뿐 직접적으로 통제하지는 않는데, 이 영역의 분할이 입법, 사법, 행정과 같은 업무 영역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통치 지역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별개의 나라라 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지방정부는 분명히 같은 나라에 속하는 지방정부였다는 것. 여기서 '상위 중앙정부'노릇은 물론 선임 황제가 있는 정부 쪽이 했다.
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또는 비잔틴 제국이라고도 한다.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를 시작으로 볼 때도 있고, 서로마 제국과 같이 395년 동서 분할을 시작으로 볼 때도 있다. 시작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준이 없는데,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와 시대 구분이 편의상 임의로 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술한 바와 같이 330년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 395년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 서로마가 멸망한 476년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 등 다양한 시각이 공존한다. 또 이런 동로마의 성립 시점에 관한 논쟁과는 별개로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난 후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전성기를 맞아 남·서유럽의 옛 서로마 제국의 영토까지 수복하였다. 하지만 사산 왕조와의 기나긴 전쟁과 이슬람의 도래 등으로 쇠퇴하고 만다. 이후 여러 현제들의 노력으로 두번이나 제국에 닥친 위기를 극복해내지만,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서유럽인들에게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정복당했으며, 1261년 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후 1453년 오스만 제국과 벌인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으로 멸망했다. 곧바로 휘청거린 서로마 제국과는 달리, 최종 분할 이후 무려 1,058년간 존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