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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란드, 북극항로, 북동항로, 북서항로, 트럼프

Jobs 9 2025. 1. 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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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빙하 녹는 그린란드' 노리는 이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임기 시작 전부터 그린란드에 대한 지배 욕구를 드러내면서 이 땅의 전략적 가치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부분이 영구 동토인 그린란드는 최근 온난화로 빙하가 빠르게 녹으며 세계 패권 경쟁을 위한 중요 자산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우선 그린란드에는 석유·가스뿐 아니라 네오디뮴과 디스프로슘 등 반도체·전기차 등 제조에 필수적인 희토류와 광물이 풍부하게 매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얼음이 녹으면 지하자원 시추가 훨씬 용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입장에선 그린란드를 차지할 수만 있다면, 전 세계 희토류 공급량의 90% 이상을 중국이 장악한 판도를 바꿀 수 있다.  


북극 일대의 빙하가 녹으면서 생겨나는 새로운 항로도 트럼프가 이 지역에 주목하는 이유다. 중동 지역의 전쟁으로 지중해와 인도양을 잇는 홍해 항로의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지면서, 아시아와 북미, 유럽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북극 항로가 ‘얼음 위의 실크로드’로 주목받는 상황이다. 뉴욕타임스는 “서유럽에서 동아시아로 가는 해상 운송의 경우, 북극해를 통과하면 홍해의 수에즈 운하로 갈 때보다 경로가 약 40% 단축된다”고 보도했다. 북극이사회(북극 정책을 논의하는 국가 간 협의체)에 따르면 새로운 항로가 다수 개척되면서 북극의 선박 통행량은 2013~2023년 사이 약 37% 늘었다. 중국과 러시아 역시 북극을 통과하는 새 항로에 상당한 관심을 보여 왔다. 지난해 11월에는 두 나라가 북극 항로 개발을 위해 협력한다는 합의에 이르기도 했다. 

그린란드는 역사적으로 미국의 안보에 핵심적인 지역으로 간주됐다. 특히 냉전 시대 미국을 주축으로 한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는 그린란드·아이슬란드·영국을 잇는 해상의 길목에서 러시아의 대서양 진출을 차단·감시했다. 북극해와 대서양 사이의 병목에 해당하는 이 해역을 러시아를 막는 핵심 저지선으로 설정한 것이다. 1867년 당시 앤드루 존슨 미 대통령은 알래스카와 함께 그린란드 매입까지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덴마크에 그린란드 매입 대가로 1억달러를 제안했다는 내용이 덴마크 언론 보도로 알려지기도 했다. 

덴마크의 자치령인 그린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이다. 면적이 한반도의 9배 이상인 216만6000㎢에 달한다. 인구는 약 5만7000명이다. 18세기 중반부터 1979년까지 덴마크의 지배를 받았고, 2009년 독립을 선언할 권리가 부여됐지만 여전히 국방 및 외교 정책 등은 덴마크에 맡기고 덴마크령으로 남았다.

 

 

 

 

 

트럼프 “그린란드 사고 싶다, 안보위해 필요” 북극 패권 눈독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최근 ‘파나마 운하’의 반환을 주장한 데 이어 덴마크 자치령인 그린란드도 사들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통상이나 안보 전략상 상대국을 압박하기 위한 협상 전략으로 읽힐 수도 있으나, 타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발언으로 미국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덴마크와 파나마 역시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22일 켄 하워리 페이팔 공동창업자를 주덴마크 미국대사로 지명하며 “국가 안보와 세계 자유를 위해 미국의 그린란드 소유 및 지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국인 덴마크를 상대로 방위비 인상을 압박하고, 북극권의 전략적 요충지인 그린란드를 선점해 중국 및 러시아와의 패권 경쟁에서 앞서 나가겠다는 의도가 담겼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린란드는 ‘북극 패권’ 요충지

뉴욕타임스(NYT)는 23일 “파나마 운하 반환 요구에 이어 그린란드까지 눈독을 들이는 트럼프 당선인의 최근 발언이 심상치 않다”며 “다른 국가의 주권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보지 않는 부동산 개발업자 특유의 인식 구조를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당선인은 지난달 캐나다에 25% 고율관세 부과를 예고하며 “캐나다를 미국 51번째 주(州)로 편입하겠다”, “쥐스탱 트뤼도 총리는 주지사가 될 것”이라고도 밝힌 바 있다.

그린란드는 북극권의 전략적 요충지로 꼽힌다. 최근 기후변화로 빙하가 빠르게 녹으며 그린란드를 지나는 북극 항로 개척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또 리튬 등 전기차에 들어가는 상당량의 희토류가 매장돼 있다.

실제로 미국은 ‘북극 패권’을 두고 중국, 러시아를 상대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은 2018년 북극 군기지 건립 계획을 발표했다. 또 7월 중-러는 북극해 상공에서 합동 순찰을 진행했다. 미국 역시 1951년부터 그린란드 서부에 ‘피투피크 우주군 기지’를 운영해 왔다.

그린란드는 면적이 217만 ㎢인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이다. 한반도의 10배에 가까운 크기다. 섬의 약 80%가 눈과 얼음에 덮여 있고 나머지 지역에 주민 5만6000여 명이 거주한다. 덴마크가 18세기 초부터 지배했으나, 2009년 그린란드 자치정부가 출범했다. 현재 덴마크는 그린란드의 국방 및 외교·안보를 담당하고 자치정부 재정의 절반을 지원한다.

그린란드는 2009년 자치정부 출범과 함께 독립을 선언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다. 하지만 덴마크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아 실제 독립을 추구한 적은 없다. 다만 가난한 국가는 아니다. 미 중앙정보국(CIA)에 따르면 1인당 국민소득은 6만8100달러(2021년 기준)로 세계 19위다.

NYT는 “트럼프식 ‘미국 우선주의’는 고립주의가 아니라는 점이 명확해지고 있다. 팽창주의라고도 볼 수 있다”며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필리핀을 병합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식민주의와도 닮았다”고 평가했다.

“현지에선 빈말 아니라고 여겨”

트럼프 당선인의 발언 뒤 무테 에게데 그린란드 총리는 “그린란드는 우리의 것이고 매물이 아니다”라며 “앞으로도 매물이 될 수 없고, 우리는 자유를 위한 오랜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즉각 반발했다. 덴마크 총리실도 “그린란드는 매물이 아니나, 미국과의 협력에는 언제든 열려 있다”고 밝혔다.

일각에선 그린란드 여론이 트럼프 당선인 쪽으로 기울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미국 투자를 유치해 대규모의 희토류와 관광산업 개발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 야콥센 왕립덴마크방위대 교수는 “덴마크와 그린란드에선 트럼프의 발언을 빈말이라고 웃어넘기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전했다. 다만 덴마크에서 독립한 뒤 미국에 병합되는 시나리오는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트럼프 당선인은 2019년 1기 행정부 때 ‘그린란드 병합’을 추진했다. 하지만 덴마크와 그린란드 자치정부 측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강하게 반발하며 일단락됐다. 

 

 

 

 

 

 

 

 

 

북극해항로(北極海航路, Northern sea route), 북동항로(Northeast passage)

 

하늘길과 구별하여 북극해항로(北極海航路, Northern sea route), 북동항로(Northeast passage)라고도 한다. 라페루즈 해협 및 베링 해협을 지나 북극해 중 러시아 인근을 지나는 항로를 말하며, 캐나다 인근의 항로는 북서항로로 구별된다. 빙산과 유빙으로 인해 오랫동안 항로로 쓰이지 못하다가 20세기 증기선과 라디오의 도입 이후 개척되었다.
 
현재는 국제법상 공해이기는 하나 유빙과 빙산 때문에 러시아의 에스코트를 받아야 통행이 가능하며 그 이용료를 지불하고서라도 이용하는 선박이 늘고 있다. 지구 온난화가 진행될수록 이용 시기도 길어지고 쇄빙선의 에스코트가 필요 없어질 수도 있어서 유망한 분야다. 다만 INMARSAT 이용에 제한이 따르다보니 바닷가에서 100해리 이상 떨어져서 운항하기 어렵다는 것이 단점.

통신 기술이나 우주 기술에 관심이 있다면 스타링크가 혹시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스타링크는 어디까지나 범용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지향하기 때문에 위성 배치 계획을 보면 극지방은 비어 있다.

부산항에서 출발해 말라카 해협과 수에즈 운하를 거쳐서 유럽까지 가는 것보다 크게 거리 단축이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해적이 없다는 것 또한 장점이다. 남방항로나 홍해는 여러 국가가 위치해 있어 해적 제압이 어려운데다 소말리아나 예멘과 같은 파탄국가도 몇 개씩 있어서 해적이 이런 나라의 부패한 관료와 결탁하거나 숨어버리면 통제가 어렵다. 

북극항로의 경우 군사강국인 러시아의 단독 영해인데다가, 해안선 끄트머리의 얼음이 녹아서 좁은 해로가 생기는지라 해군으로 통제하기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바다 얼음이 녹고 있다고 해도 북극권이라 매우 춥고 인구가 희박하기에 소말리아처럼 쪽배와 소총만 믿고 쪼리에 맨몸으로 활동하는 해적은 있을 수 없다. 

북극해에서의 해적이라면 러시아인일텐데 러시아가 경제위기니 뭐니 해도 소말리아처럼 해적질로 목숨 걸고 돈 벌어야 할만큼 못 살거나 정부에서 통제하지 못하는 막장국가는 아니다. 오히려 이런 오지에서 사는 사람들은 현지 원주민이거나 자원 및 군사 관련한 업무 때문에 온 사람들로, 러시아 내에선 꽤 사는 사람들이다. 

지리적으로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동아시아의 한중일이 특히 북극항로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중이다. 다만 미국은 이를 마뜩잖아 하는데, 러시아 해군의 태평양/북방 함대 간의 연계성이 크게 높아지기 때문이다. 가까운 미래에 열릴 이 북극항로로 인해 미국의 해양전략은 상당한 수정이 불가피하다. 

역사적으로도 북동항로/북서항로는 경제적 가치 때문에 수많은 도전과 탐험의 대상이 돼 왔다. 지금은 러시아와 캐나다 등지에 지명으로 이름을 남긴 비투스 베링(1681~1741), 윌리엄 배핀(~1622), 헨리 허드슨(1550~1611), 드미트리 랍테프(1701~1771), 빌럼 바렌츠(1550~1597), 존 프랭클린(1786.4.16~1847.6.11) 등의 탐험가들이 항로 개척에 나섰지만, 당시의 기술로는 북극해를 안전하게 항해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탐험가들이 귀환하지 못하고 탐험지에 뼈를 묻었다. 결국 실패했기 때문인지 동시기의 서인도제도나 인도 항로 개척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편. 세계 최초로 북동항로를 완주한 사람은 핀란드에서 태어난 스웨덴 탐험가 닐스 아돌프 에릭 노르덴시욀드(Nils Adolf Erik Nordenskiöld)#인데, 1878년에 증기선 베가 호를 타고 스톡홀름에서 출발해, 베링 해협을 건너 1880년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참고로 북서항로는 그 유명한 로알 아문센이 1906년에 처음 완주했다. 

하지만 실제로 북극항로가 유라시아 물류혁명을 선도하는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난관이 적지 않다. 우선 거리에 비해 과다한 항행비용이 문제로, 현재 단계에서는 쇄빙선 운항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데 현재 러시아가 보유한 쇄빙선이 6대이고 그중에서 북극항로에 투입되는 쇄빙선은 3척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금도 북극항로 쇄빙선 이용 비용은 상당한 골칫거리로 러시아 쇄빙선 업체들은 수에즈 운하와의 경쟁력을 저울질하며 가격 책정에 부심하고 있다. 거리는 수에즈 항로의 절반 수준이면서 가격 경쟁력을 고민해야 할 수준이니 그 비용이 얼마나 높은지 짐작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북극항로를 이용해보려 했으나 쇄빙선 가격 문제로 포기한 사례가 있다. 

부빙해 천지인 북극항로가 온난화로 개척된다 해도 유빙해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기는 어려우니 여전히 내빙선 등의 특수 선박이 필요해진다. 또한 온난화가 진행된다 해도 연간 항행 가능 기간은 8개월 이상이 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연간 4개월은 북극항로 돌파를 위해 쇄빙선, 내빙선 등의 각종 장비와 북극항로 인근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어 건설한 항만, 도시 등의 인프라들이 놀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북위 66도 이북 지역은 전파가 잘 잡히지 않고 있으며, 온난화로 인해 기존의 북극지역 항구 도시들이 해수면에서 멀어지는 등 북극항로를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기존 수에즈 항로에 비해 투자 소요가 엄청나다. 그리고 이 투자가 요구되는 구간이 수에즈 운하와는 비교도 안 되게 광범위하다는 것이 큰 고민거리. 이런 상황이라 업계에 따라서는 북극항로의 가능성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고 보기도 한다. 

지구온난화의 가속으로 2030년 즈음에는 연중 운행이 가능할 것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북극항로의 상시개통을 통해 부산항이 환적항으로서 우뚝 서고, 쇄빙선 수주로 조선업이 부흥하는 장밋빛 전망이 실현될지 지켜보아야 한다. 

알렉세이 체쿤코프 극동·북극개발부 장관은 2030년 해당 항로의 물동량이 1억톤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2035년까지 북극해 항로 구간에 액화천연가스 및 가스 응축수 터미널과 석유 선적 터미널, 석탄 터미널 등을 건설한다.# #

2021년 10월 7일 북극항로와 북극해안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새로운 북극함대가 창설될 수 있다고 러시아 해군 관계자가 타스 통신을 통해 언급하였다.

2018년 8월 28일, 세계에서 처음으로 북극항로를 통과하는 컨테이너 선 벤타 머스크호가 부산항을 출발했다. 8월 22일 블라디보스톡항을 출항하여, 보스토치니항과 부산항을 거쳐 9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항에 입항했다. 

 

 
 

 

 

2년 동안 59% 늘어난 물동량



노르웨이의 국립대학인 노드대에서 북극물류센터(CHNL) 매니징 디렉터를 맡고 있는 비외른 군나르손 박사는 “북극항로를 이용하면 러시아 무르만스크에서 부산까지 오는 데 19일을 단축할 수 있다”며 북극항로의 경제적 가치를 설명했다. 노드대 북극물류센터는 영산대 북극물류연구소와 함께 2015∼2016년 북극항로 운항 여건 등을 분석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지난해 지구 온도가 관측 이래 가장 높이 오르면서 북극 프런티어 회의 내내 북극항로는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다. 기후 변화로 북극해의 얼음이 녹으면서 2020년이면 연간 6개월, 2030년이면 1년 내내 선박 운항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스툴라 헨리크센 노르웨이 선주협회 회장(61)은 “북극항로를 이용하는 데 드는 비용이 줄어들면서 물동량이 갈수록 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북극항로를 이용한 물동량은 633만4000t으로 2년 전보다 59% 늘었다. 그는 “앞으로 얼마나 증가할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점은 북극 얼음이 녹는 속도가 인프라가 갖춰지는 속도보다 더 빠르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이 지역에 투자할 가치가 크다는 뜻이다. 

“러시아와의 협력도 중요”

다만 북극항로가 수에즈 운하를 완벽히 대체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1만 TEU(1TEU는 약 6m 길이의 컨테이너 1개분)가 넘는 컨테이너를 운반해야 하는 경우에는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는 게 아직은 더 경제적이라는 게 센터 측의 설명이다. 얼음이 녹더라도 북극항로를 이용하려면 중간에 쇄빙선으로 얼음을 깨거나 선박 자체도 더 튼튼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군나르손 박사는 “북극항로를 주 항로로 이용하기보다는 원유, 액화천연가스(LNG) 등 특정 상품을 운반하는 데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러시아는 이미 북극항로를 개발하기 위한 통합 계획을 세워 인프라 건설에 적극 나서고 있다. 150개 프로젝트로 이뤄진 이 계획에는 2030년까지 총 5조 루블(약 97조 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군나르손 박사와 함께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세르게이 발마소프 씨(41)는 “북극항로는 러시아에 전략적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러시아와 한국이 긴밀하게 협력할 부분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라페루즈 해협


일본 홋카이도 북부의 소야곶과 러시아 사할린의 크릴론곶 사이의 해협이다. 중국, 일본에서는 소야 해협(宗谷海峡)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너비 약 40km에 수심은 평균 5m~120m이다.


라페루즈 해협이라는 명칭은 1787년에 이곳을 거쳐 세계일주를 시도한 프랑스의 탐험가 장프랑수아 드 갈로 라페루즈 백작(Jean-François de Galaup, comte de Lapérouse)의 이름에서 따왔다. 더 나아가 라페루즈는 이 해협의 북쪽 크릴론 곶의 이름도 명명했다.

라페루즈는 루이 16세의 명을 받고 1785년에 태평양 탐험에 나섰다. 대서양을 건너 칠레 해협을 돌아서 하와이, 알래스카, 필리핀을 거쳐 1787년 5월에 제주도와 울릉도 근방을 지나갔다. 그 후 사할린과 아시아 본토 사이의 타타르 해협을 지나가려다가 실패하고 대신 남쪽 해협을 지나갔는데 그 해협이 바로 이 라페루즈 해협이다. 이 해협을 통과한 후 9월에 페트로파블로프스크에서 잠시 쉬었다가 오세아니아로 향했는데 오스트레일리아 북쪽 섬을 지나가다가 좌초되어 행방불명되었다. 배의 잔해는 1826년이 되어서야 발견되었다.

일본 측에서 사용하는 소야 해협이라는 이름은 해협 남쪽의 곶인 소야곶에서 온 말이다. 유래는 이쪽이 좀 더 현지인과 관련되어 있는데, 왓카나이시 문서에서 다루듯 본래 '소야'라는 이름은 소야곶 서쪽의 암초를 가리키던 아이누어에서 온 것으로 아이누어로 "해안", "암초"를 의미한다고 한다.


여름에는 쓰시마 난류의 일부가 통과하기 때문에 안개가 자주 발생하며 겨울에는 결빙된다. 이외에 동해와 오호츠크해를 잇는 주요 항로로 꽤 중요한 곳이다. 또한 북극항로가 개통된다면 지금과는 비교가 불가능할정도로 중요한 항로가 된다.

남쪽 홋카이도 왓카나이시 쪽 소야곶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왓카나이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이다. 날씨가 좋으면 해협 너머의 사할린을 조망할 수 있다.

남쪽 홋카이도에는 왓카나이시가 해협에 비교적 가까이 면해있으며 소야곶에도 어느 정도 마을이 형성되어있지만 북쪽 사할린 크릴론곶에는 마을이라고 할 만한 민가를 찾기 어렵다. 러시아 측에서 해협에 가장 가까운 대도시 코르사코프는 해협 동쪽의 아니바 만(Залив Анива, Aniva Bay) 안쪽으로 100km 정도 들어가야 나온다.

 

 

교통 연결 가능성
만약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해저터널 또는 다리가 생긴다면 이곳에 생길 것이다. 2016년에 러시아가 일본에 이곳을 통해 철도를 연결하자는 제안을 내놨다. 사할린-홋카이도 해저터널도 이곳을 지날 것이다.

이미 해저터널이 놓인 쓰가루해협(58km)보다 라페루즈 해협(40km)의 폭이 좁아 기술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궤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궤를 달릴 수 있는 열차가 한국에서 개발된 사례가 있으므로# 기술적으로 극복 가능하다.

만약 이곳이 이어지게 된다면 사할린과 러시아 본토 사이의 해협 상단의 네벨스코이 해협은 불과 7km이기 때문에 유라시아 대륙과도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막대한 건설비용이 드는 사업이고 러시아에 비해 일본측의 반응은 소극적이라서 현재로서는 연결될 가능성이 없다. 2022년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일관계도 매우 냉각되었기 때문에 더욱 요원해졌다. 2019년까지 하절기 한정으로 운영되던 왓카나이-코르사코프 페리조차 코로나19로 중단된 이래 2020년대 중반에 이르도록 재개되지 않을 지경이니 다리나 해저터널을 놓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Clockwise from top left (sizes not to scale): maps of Greenland, the Faroe Islands, Denmark

 

 

그린란드(Greenland, Grønland)

 

북극해에 위치하는 덴마크령의 섬

수도 및 최대 도시는 누크(Nuuk). 인문지리적으로는 북아메리카에, 정치·역사적으로는 유럽(북유럽)에 속한다.

 

그린란드는 캐나다 북방에 위치해 아메리카 대륙에 속해 있지만, 오랫동안 유럽인의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왔다. 원주민인 이누이트인이 전체의 88%를 차지하고, 덴마크인이 12%에 불과하다. 

그린란드는 1262년 바이킹족에 의해 발견되어 노르웨이의 지배하다가 1721년 노르웨이 왕국과 덴마크 왕국이 합병되면서 통합왕국의 식민지로 전환되었다. 두 왕국이 분리된후 1814년 킬 조약(Treaty of Kiel)에 의해 덴마크에 귀속되었다. 수도는 누크(Nuuk)다. 

덴마크는 스코틀랜드 북쪽에 있는 페로제도(Faroe Islands)도 영유하고 있는데, 그 섬도 자치정부를 두고 있다.

덴마크는 한때 그린란드를 덴마크화하려다 실패했다. 1953년 덴마크는 그린란드를 직할주로 승격시켜, 그린란드 주민들에게 덴마크의 시민권을 주었다. 동시에 그린란드 주민들의 자녀들을 덴마크에 의무적으로 공부하게 하고, 공식문서를 덴마크어를 사용하게 해 덴마크 문화를 이입시키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린란드 주민들의 주인 의식이 강화되면서 강력한 자치권을 요구했고, 1979년 5월 1일부로 자치권을 획득했다. 국가원수는 덴마크 국왕으로 하고, 외교권과 국방도 덴마크가 맡고 있다. 

2차 대전 때 덴마크가 독일에 점령되자, 미국은 1941년 그린란드를 점령해 통치했다. 독일이 패망한후 1945년에 미국은 그린란드를 덴마크에 돌려주었다. 

그후 1946년에 미국은 정식으로 덴마크에 그린란드를 1억 달러에 구입하겠다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다. 그후 미국은 그린란드에 공군기지 건설을 제안해 툴레공군기지(Thule Air Base)가 건설되었다. 

 

 

 



그린란드의 주민은 미국·캐나다의 아메리카 원주민과 같은 민족적 뿌리를 둔 민족인 이누이트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의 식민지 개척 이후 오늘날까지 그린란드의 주권은 덴마크에 있지만, 현재 그린란드 주민들은 법령에 따라 독립국에 준하는 고도의 자치권을 보장받고 있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는 정치 세력도 존재한다. 

그린란드는 지구상에서 남극과 함께 육지가 수천 미터 두께의 빙하로 덮인 둘뿐인 지역이다. 당연히 매우 추워서 내륙에선 연평균 기온이 -30℃로 한여름에도 0℃ 이상이 되지 않는 빙설 기후가 나타난다. 그린란드 내륙과 북부, 동부 지역은 인간이 살기 힘든 척박한 지역이지만, 타실라크(Tasiilaq)나 이토코르토르미트(Ittoqqortoormiit) 등 적게나마 마을이 있다. 본래는 북동부(현재의 북동 그린란드 국립공원) 위치에도 거주자가 있었지만,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뒤 관측, 연구 시설 등을 제외하고 민간인은 빠져나갔다.   

면적은 약 216만 6,086 km²로 남한 면적의 21.6배, 한반도 전체의 9.68배, 제주도의 1,158배, 뉴기니 섬의 2.75배 정도로, 사우디아라비아(약 215만 ㎢)보다 조금 더 넓다. 만약 그린란드가 완전하게 독립국이 된다면 세계에서 12번째로 큰 나라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섬나라가 될 것이다. 

허나 이런 광활한 육지와 대조적으로 춥고 척박한 환경 때문에 인구는 56,000명 정도로 굉장히 적어서, 인구 밀도가 0.026명/km²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누크를 비롯한 몇 개 도시에 집중적으로 인구가 분포하지만, 숫자로만 따지면 근방 50 ㎢ 내에 사람이 한명 있을까말까한 정도


그린란드라는 이름은 중세 시대 이곳에 정착한 바이킹이 지은 이름이다. 첫 바이킹 이주 집단은 그린란드에서 정착 가능한 땅을 발견해 정착했었는데 이들은 '초록색의 땅'이라는 의미로 Grœnland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것이 국제적인 명칭으로 널리 퍼졌다.   

그러나 그린란드는 얼음이 많아 초록색의 땅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왜 얼음뿐인 땅을 '초록색의 땅'이라 이름붙였는지는 불명이지만, 바이킹 그린란드 정착 이야기를 다룬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Eiríks saga rauða)에서는 초기 정착자 에이리크가 다른 이주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마치 풍요로운 땅인 것처럼 보이려고 이 이름을 붙였다고 하였다. 처음 바이킹이 그린란드에 도착했을 때 초원이 약간 있는 해안가를 먼저 발견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린란드어 이름인 '칼라흘리트 누나트(Kalaallit Nunaat)'은 '칼라흘리트국(國)'이라는 의미이다. 칼라흘리트(kalaallit)는 서부 그린란드 토착 이누이트인이 자신들을 일컫는 자칭인 칼랄레크(kalaaleq)의 복수형 표현이며, 누나트(Nunaat)는 (사람이 사는) 땅 내지는 국가(國家)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가령 본국인 덴마크는 '카흘루나트 누나트(Qallunaat Nunaat)'라고, 인접 국가인 아이슬란드는 '카흘루나치아트 누나트(Qallunaatsiaat Nunaat)'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각각 직역하면 '데인족의 국가', '(예전에 그린란드에 왔던) 노르드인의 국가'라는 뜻이 된다.  

 



그린란드 자연


지리

면적 216만 6086 km², 해안선은 4만 4087 km에 달하지만 전 국토의 84%가 얼음으로 덮였고, 그 외엔 그냥 돌뿐인 황무지가 대부분이다. 초원은 인간이 거주하는 해안가 끄트머리에 있고 국토의 1% 정도이며, 최남단 지역에 숲이 딱 한 곳(Qinngua Valley) 있다. 마을과 도시가 있는 지역들은 그래도 여름에는 초원이 드리워진다. 아무튼 이런 극단적으로 황폐한 환경 때문에 인구가 매우 적고 무거주지의 비율이 월등히 높다. 그린란드 전체에 사람 사는 마을이 100곳도 되지 않고, 인구가 2만 명을 넘는 마을은 한 곳도 없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로 인해 이제는 대륙 빙하가 다시 얼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100만 년 전까지만 해도 정말로 '그린란드'란 이름답게 빙하가 전혀 없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 110만 년 전 그란란드 중부는 녹색 툰드라 지대라는 연구결과도 내놓았다.

41만 6천 년 전 그린란드 빙하의 일부가 완전히 녹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

극단적으로 낮은 인구 밀도는 바로 옆 배핀 섬을 비롯한 캐나다 북극 제도에서도 나타난다. 그린란드 옆의 캐나다 북극 지역은 누나부트 준주 관할인데, 누나부트 준주의 면적이 203만 8722 km²로 그린란드보다 약간 작고, 사우디와 비등하지만 인구는 고작 3만 8천 명이다. 이 넓은 땅의 주도이자 가장 큰 도시인 이칼루이트의 인구가 고작 7500명일 정도. 이정도면 일개 동보다 인구가 적은 수준이다.

일부 지역은 목초지가 있다. 최남단 쪽. 인구의 대부분이 이곳에 몰려 살고, 행정·경제적 중심도 당연히 이곳에 위치한다. 물론 겨울이 오면 여전히 춥다. 이 목초지가 있는 지역의 위도는 인구 100만 명이 사는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와 동일한 북위 61도. 참고로 그린란드의 최남단은 북위 59도이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과 제일 가까운 땅이다. 유럽인 아이슬란드와 300 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린란드 기후


그린란드의 해안가 지역은 대부분 툰드라 기후(ET)를, 최남단 지역 일부는 냉대 습윤 기후(Dfc)에 속한다.

물론 북위 59~83°인 북극권에 위치하여 대부분의 지역이 한대기후이지만, 의외로 북극권 이남(북위 66° 33′ 이남) 지역은 난류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도 많이 춥지 않고 1년 내내 눈도 많이 내린다. 그린란드 최남단에 위치한 북위 60° 08′의 나노르탈리크(Nanortalik)의 경우 1월 평균 기온이 -4.7℃로 대한민국의 중부 지방보다 약간 추운 정도에 불과하며 강원도 산지보다 오히려 약간 따뜻할 정도. 북위 64° 10′의 누크도 최한월인 1월과 2월 평균 기온이 -7.5℃로, 대한민국의 강원도 산지와 비슷한 겨울 기온을 보인다. 또한 국제공항이 있는 캉에흘루수아크처럼 북극권 이북임에도 한대기후에 해당하지 않는 곳도 있다. 다만 겨울이 그리 춥지 않은 대신 북극 지역답게 여름이 매우 시원한데, 나노르탈리크의 경우 가장 더운 7월의 평균 기온이 8.6℃로 대한민국의 11월 평균 기온과 비슷하다. 누크 역시 가장 더운 7월의 평균 기온이 8.0℃로 대한민국의 11월 평균 기온과 비슷한 수준이다. 즉 이 지역들은 여름이 대한민국의 늦가을 날씨와 비슷할 정도로 매우 시원하다.  

그러나 해안 지대지만 위도가 높은 카나크 같은 북부 지방은 상당히 춥다. 최북단 마을인 카나크의 경우 가장 추운 2월의 평균 기온이 -24.6℃로 한반도 최한지인 개마고원보다 추우며, 이곳에서는 최저 기온이 -58.0℃까지 내려간 적도 있다.

내륙 지방은 여름 평균 기온조차 영하로 떨어지는 영구 빙설 지대로, 남극과 거의 동일한 혹독한 조건이다. 그린란드 정중앙의 아이스미테(Eismitte) 기지에서는 2월 평균 기온 -47.2℃, 7월 평균 기온 -12.2℃에 최저 기온 -64.9℃까지 기록되기도 하였다. 2017년 7월 4일에는 북반구 7월 사상 최저 기온 -33.0℃가 그린란드 'Summit Station'에서 관측되었다. 지금까지 그린란드에서 관측된 역대 최저 기온은 -69.6℃로, 1991년 12월 22일에 기록되었으며 현재까지 깨지지 않는 북반구 역대 공식 최저 기온이다. 다만 그린란드는 남극과는 달리 엄연히 덴마크 정부의 국유지라서 기온 분포와 같은 상세한 데이터가 대외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남극과 비교해 연구 활동이 활발하지 않아 기상 관측 자료가 부족하여 기록이 많이 존재하지 않을 뿐, 공식 기록보다도 훨씬 추운 날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린란드의 최북단인 북동 그린란드 국립공원에는 피어리 랜드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지구에서 사실상 가장 북쪽에 위치한 대륙이며, 북극점(북위 90°)에서 불과 709.39 km 남쪽에 있다. 특이하게도 이곳의 대부분 지역은 얼음에 덮여 있지 않은데, 날씨가 따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건조해서 그런 것이다. 이곳의 연 강수량은 극도로 적어서 25 mm에 불과하며, 아주 옛날 지구가 지금보다 따뜻했을 때에는 이 지역에도 식물이 자라고 사람이 살았으나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즉 이곳은 날씨만 춥지 사막기후의 정의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곳이다. 

2021년 8월에 기상 관측 최초로 그린란드에서 비가 내리는 일이 발생했다.

 


그린란드 크기
그린란드는 국제적으로 대륙으로 불릴 수 있는 육지 면적의 기준이다. 그린란드보다 큰 육지는 대륙으로, 더 작은 육지는 섬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그린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이 된다.

커다란 섬임은 분명하지만, 한때 가정용으로 많이 보급된 메르카토르 도법 세계지도에서는 그린란드가 아프리카와 비슷하거나 더 크게 나오는데 메르카토르 도법은 원통 투영법이기 때문에 위도 간의 면적이 동일하게 나타나 극지방에 위치한 그린란드의 면적이 실제보다 훨씬 크게 보이는 현상이 나타난다. 실제로는 아프리카 대륙의 알제리보다 작으며, 남아메리카 아르헨티나의 4분의 3 정도 면적으로 아르헨티나보다도 작다.  

최근의 세계지도들은 옛날의 메르카토르 도법보다는 왜곡이 덜 심하도록 조정되어 나오지만, 그래도 보통의 네모난 세계지도에서는 그린란드가 여전히 원래 면적보다 훨씬 커 보인다. 정적도법인 등지구도법으로 세계지도를 보면 객관적이고 정확한 그린란드 면적을 체감할 수 있다. 사실 타 대륙과의 면적 비교를 위해 제일 좋은 건 지구본을 보는 것이다.

 


그린란드 역사

 

근대 이전
아주 오래 전 이주해 온 사람들은 이누이트로 그린란드 남부에 사카크(Saqqaq) 문화를 이루었고 북부에선 인디펜던스 문화가 존재했다. 이후 이들이 사라지고 그린란드 서해안의 도싯 문화와 북부의 인디펜던스-2 문화가 나타났으며, 훗날에는 바이킹이 이 섬에 들어왔다.

그린란드 땅의 99%는 얼음으로 뒤덮였지만 1%는 양과 소를 기를 수 있을 만큼 풍요롭고 한적한 풀밭이었고, 에이리크 힌 라우디가 처음 도착했다고 알려진 브라타홀리드는 풍경이 꽤 전원풍이다. 실제로 당시의 그린란드는 온난화에 의해 최근에 비하면 꽤 따뜻하고 그럭저럭 소와 양을 키우며 살 수 있을 정도의 풀밭도 있었다. 이런 바이킹의 팽창은 이러한 북방의 온화한 날씨와도 연관이 있었다. 거꾸로 바이킹의 몰락은 돌아온 소빙하기 때문이었다. 

여하간, '풍부한 숲과 풀'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린란드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필요한 목재를 구하기 위해서 종종 북아메리카 본토까지 찾아가야 했고, 그 과정에서 빈란드라는 식민지를 건설했다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충돌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바이킹들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5백 년 먼저 북아메리카에 도달했다는 것은 문헌 기록뿐 아니라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 오늘날 분명한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지리학적으로 그린란드 자체가 북아메리카의 일부라는 것을 생각하면, 유럽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북아메리카(캐나다의 일부)를 잘 알았던 셈이다.   

실제로 그린란드의 바이킹들은 뉴펀들랜드에서 북아메리카 본토의 래브라도 반도까지 항해했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무력 충돌에 의해 정착하진 못하고, 가끔 부족한 목재를 보충하러 갔다고 한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교역도 했는데, 원주민들에게 우유와 옷감을 주고 모피를 받아갔다고 한다. 나중에는 래브라도 해안까지 가서 나무를 캤는데, 여기서 노르웨이의 구리나 철 조각, 심지어는 노르웨이 왕 올라프 3세의 치세(1067~1093)에 주조된 은화가 발견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주 일대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의 하플로그룹 분석에서 바이킹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서 인류학자들의 의문을 자아냈는데, 당시 이 지역의 주민들이 외부인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이었고, 때문에 전쟁 포로로 잡힌 바이킹들을 학살하거나 잡아먹어버림으로써 양자간의 인적 교류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그린란드의 바이킹은 몇백 년 동안 계속 거주했고, 한때는 바다코끼리의 어금니(사치품인 상아의 대용품) 수출로 번영하여 가톨릭 주교구가 설정될 정도로 성장했으나, 14세기에 접어들면서 기후변화 등으로 인해 바다코끼리 사냥이 점점 힘들어지고 가축을 키우기도 어려워지면서 차차 인구가 줄어들었으며, 15세기가 되면 기후변화가 더욱 심해지고 유럽과의 교류마저 중단되는 등으로 인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고고학적 및 유전학적 조사 결과 이들이 이 섬에서 몰락했다기보다는 아이슬란드로 질서정연하게 이주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 근거로 오늘날 아이슬란드인 중 소수가 그린란드의 이누이트와 일치하는 모계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학계에선 이 주장을 정설로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하고 있다. 이들의 거주지의 몰락 과정은 미국의 생물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저서 《문명의 붕괴》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는데, 그 내용 중 특기할 만한 점은 그린란드 바이킹들이 몰락 직전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린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린란드 유적지에서는 생선뼈와 각종 낚시도구들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생선을 잘 먹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데 실제로 바이킹들의 유골을 동위원소 분석 방법으로 분석해보면 그린란드 바이킹의 식사 가운데 해산물의 비율이 당초 50% 쯤에서 14세기에는 80%로 높아졌다고 한하고, 또 이 결과가 크고 부유한 농장에서 발굴된 뼈를 가지고 분석해 나온 것인데, 동시대의 작고 가난한 농장에서 발굴된 뼈를 이와 비교해보면 해산물의 비중이 더 높게 나와서 실제 비중은 그 수치보다 더 높을 수 있다고까지 밝히고 있다. 《문명의 붕괴》에서는 그린란드 바이킹의 해산물 주식은 사냥한 바다표범 고기인 것으로 보인다고 나타나므로, 식량난에 처하자 생선이라도 찾아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명목상으로는 적어도 13세기까지 그린란드가 노르웨이령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이 무렵에 서쪽 북아메리카를 통해 새로 들어온 이누이트들은 툴레 문화를 만들었으며, 이들은 다시 북쪽에서부터 내려와 16세기 경이면 그린란드 전역을 차지하였다. 1501년에 가스파르 코흐트-헤알이 그린란드에 다시 도착했으나 유럽인이 이주하진 않았다. 1721년에 노르웨이의 선교사 한스 에게데(Hans Egede)가 그린란드의 옛 북유럽인 정착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선교활동을 위해 그린란드를 찾아가 지금의 누크인 고드호프를 세웠으며, 그린란드를 노르웨이의 식민지로 삼게 되었다. 당시엔 노르웨이가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이라는 덴마크 왕과의 동군연합이었기 때문에 덴마크 왕 프레데리크 4세가 곧 노르웨이 왕이었고 이때부터 사실상 덴마크령이 되었다. 

 

덴마크 식민지 그린란드
그린란드가 노르웨이에서 덴마크로 공식적으로 할양된 킬 조약 체결 당시(1814년)에는 그린란드의 상당수는 미발견지였고 그린란드의 각지에 미국, (영국령) 캐나다, 노르웨이 등이 최초 발견한 지역들이 존재하였으며, 이 지역들을 영토로 주장할 명분이 존재하였으므로 그린란드 전체에 대한 덴마크의 주권은 인정받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덴마크는 미국과의 1917년 덴마크령 버진아일랜드 판매 조약, 1921년 영국과의 상호조약 등에서 덴마크의 그린란드 주권 인정을 받았고, 1921년이 되어서야 덴마크의 그린란드 전역에 대한 주권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물론 이조차도 간간히 도전을 받아 1930년대에 노르웨이가 그린란드 동북부의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하기도 하였다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퇴짜를 맞고서야 덴마크의 그린란드에 대한 영토 주장이 공고히 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에 덴마크 본토가 나치 독일에 의해 강제점령당하면서 안보 상의 이유로 미국이 점령하기도 했으며, 그 후로 미국 정부는 이 섬에 관심을 가져서 알래스카 조약 때처럼 1억 달러로 덴마크한테 사겠다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이전에도 구매에 대한 주장들은 있었다. 2019년에도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그린란드를 구매하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또다시 덴마크와 그린란드 자치령 정부에 의해 거부당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덴마크 정부와의 합의로 이곳에 툴레 공군기지를 비롯한 군사기지들을 유지하긴 했다.  

1950년 북위 68도를 기준으로 나뉘어진 남그린란드와 북그린란드가 통합해 그린란드 식민지가 되었고, 1953년 그린란드 주가 되어 본토로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1979년 그린란드는 자치권을 획득했으며 2009년 국방과 외교를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덴마크와 분리되어 거의 준독립국이 되었다. 

 

덴마크 자치령 그린란드
덴마크의 유럽 공동체(EC) 가입으로 같이 가입되었지만, 이에 관련된 혜택이 없어서 결국 1982년 주민 투표를 통해 탈퇴하기로 하고, 1984년에 맺은 그린란드 조약을 통해 1985년 1월 1일에 공식 탈퇴 처리되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넘은 2019년 8월, 트럼프 미 대통령이 다시 매입을 추진한다고 알려졌고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사실이라고 시인했으나, 덴마크 및 그린란드 측은 그린란드가 파는 것이 아니라며 거부했다. # 이에 트럼프는 발끈하며 예정돼 있던 덴마크 방문과 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그 속에는 희토류와 안보에 관하여 중국과 러시아를 겨낭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특히, 중국도 이 섬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2020년 중에 그린란드에 영사관을 개설할 예정이라고 포린폴리시가 보도했다. 덴마크 정부도 영사관 설치를 승인하였다. 


군사

카나크에 위치한 미 우주군의 피투픽 우주기지(Pituffik Space Base)


국방이나 외교는 덴마크 정부의 영역이므로 그린란드와는 상관이 없었으나, 2009년 자치 정부가 세워지자 상황이 바뀌고 있다. 독립 움직임과 함께 국방, 외교 분야에 대한 권리도 요구하고 있기 때문. 

지금도 국방과 외교는 덴마크 정부의 영역이며 덴마크 해군에서 14명으로 구성된 개썰매 부대 Slædepatruljen Sirius를 운용한다. 주요 임무는 빙하 등과 관련된 정보 수집이다. 그 외에 그린란드 도서 방위 사령부(Island Command Greenland)가 1946년부터 운용되고 있다. 규모는 군무원 포함 150명으로 작긴 하지만 항공기나 선박 구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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