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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발해에 보낸 외교 문서,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

Jobs9 2021. 12. 19.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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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발해에 보낸 외교 문서

(보구(寶龜) 3년(문왕 36, 772) 2월) 기묘(己卯)일에 발해 왕에게 칙서를 내려 말하기를, “천황(天皇)은 삼가 고려국왕(高麗國王)에게 문안한다. 짐이 선대(先代)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천하를 다스림에 은혜가 다른 사람에게 두루 미치기를 생각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으니, 온 천하가 화합하여 한자리에 모이고 온 천하가 은혜로워 특별한 이웃으로 격의가 없게 되었다.  옛날 고구려의 전성기 때에 그 왕 고무(高武)는 조상 대대로 바다 밖에 있으면서 형제와 같이 친하고 군신(君臣)과 같이 의로워,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 조공(朝貢)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말기가 되어 고씨(高氏)가 망한 이래로 소식이 끊어졌다. 그러다가 신구(神龜) 4년(무왕 9, 727)에 이르러 왕의 선고(先考)인 좌금오위대장군발해군왕(左金吾衛大將軍渤海郡王)이 사신을 보내어 내조(來朝)하여 비로소 조공을 닦았다. 선조께서는 그 참된 마음을 가상히 여겨 총애하여 대우함이 더욱 두터웠다. 왕은 유풍(遺風)을 계승하고 전왕(前王)의 유업(遺業)을 이어 정성스럽게 직공(職貢)을 닦아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보내 온 글을 살펴보니 갑자기 부친이 행하던 법식을 고쳐, 날짜 아래에 관품(官品)과 성명을 쓰지 않고 글의 말미에 거짓되어 천손(天孫)임을 참칭하는 칭호를 써 놓았다. 멀리 왕의 뜻을 헤아려 보면 어찌 이럴 수 있을까 싶으며, 가깝게는 일의 형편을 생각건대 착오일 듯 의심된다. 그러므로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손님에 대한 예우를 멈추도록 하였다. 다만 사신 만복(萬福) 등은 전의 허물을 깊이 뉘우치고 왕을 대신하여 사죄하므로 짐이 멀리서 온 것을 불쌍히 여겨 그 뉘우치고 고침을 들어 주었다. 왕은 이 뜻을 모두 알아서 길이 좋은 계획을 생각하라. 고씨의 때에는 병란이 그치지 않아 (우리) 조정의 위엄을 빌리기 위하여 그쪽에서 형제를 칭하였다. 바야흐로 이제 대씨(大氏)는 일찍이 아무 일 없이 편안한 연고로 함부로 외숙과 생질이라 칭하는데, (그것은) 예(禮)를 잃은 것이다. 뒷날의 사신은 다시는 그래서는 안 된다. 만약 지난날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워진다면 진실로 우호를 이음이 끝이 없을 것이다. 봄날의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고 있다. 왕은 즐겁게 지내기를 바란다. 이제 돌아가는 사신 편에 이러한 마음을 표하고, 아울러 별도와 같이 물건을 보낸다”라고 하였다. 

『속일본기』권32, 보구 3년 2월(기묘)


이 사료는 일본 왕이 772년 발해의 제3대 문왕(文王, 재위 737~793)에게 보낸 외교문서. 그 내용은 8세기 후반 발해와 일본 사이에 일어났던 외교 분쟁을 보여 주는데, 당시 동북아의 국제 정세를 여실히 보여 준다.

제2대 무왕(武王, 재위 719~737) 때인 727년(무왕 9년) 일본과 첫 교섭을 시작한 발해가 이후 일본에 두 번째로 사신을 파견한 것은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문왕 3년(739)의 일이었다. 제3대 문왕은 그의 시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대 무왕과는 달리 문치(文治)를 통해 발해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문왕은 5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재위하면서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제도를 정비해 나갔으며, 대외적으로도 유화 정책을 써서 당나라 및 일본 등과 관계를 개선해 나갔다.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일본이 758년(문왕 22년) 먼저 발해에 사신을 파견했고, 발해 역시 이에 대한 답방의 형식으로 제4차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후 일본의 신라 공격 계획이 있던 758년부터 764년(문왕 28년) 사이 발해와 일본 간의 사신 왕래는 매우 활발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때 이루어진 양국 간의 사신 왕래는 주로 발해를 신라 정벌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과 발해의 신라 협공 계획은 발해의 중도 하차와 당나라를 중심으로 한 국제정세의 확립, 그리고 일본 내부의 사정 등으로 인하여 무산되었다. 이후 양국 간의 사신 왕래는 한동안 또다시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이 사료에 보이는 771년(문왕 35년) 문왕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다시 열리게 되었다. 발해는 대사 일만복(壹萬福)을 비롯한 325명을 일본에 파견하였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이루어진 대일본 외교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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