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족
게르만족의 일파로 일찍이 로마 제국과 접촉하여 2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는 도나우 강 국경에서 로마와 충돌한 적이 있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반달족은 실링기 반달족과 하스딩기 반달족으로 나뉘며 연구에 따르면 하스딩기 반달족은 콘스탄티누스 1세 때 고트족과 경쟁관계에 있었고 그가 죽자 판노니아로 밀려와서 도나우 강 안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기원은 분명치 않으나 고트족처럼 스칸디나비아에서 남하한 것으로 추정된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대 전까지는 프랑크족, 고트족, 알레만니족 등에 비해서 확연히 세가 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대의 사가 요르다네스(Jordanes)에 의하면, 330~335년 사이 즉 로마로 따지면 콘스탄티누스 1세 말기 때 고트족 족장이 영토확장을 위해 만만한 반달족 영역으로 쳐들어가서 반달족 족장이 죽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5세기 초에 가이세리크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며 게르만 제종족 중에서도 1군급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역사
게르만 대침입기의 반달족
5세기 초에 훈족의 침입에 밀려 대이동에 나서 서쪽으로 진군하여 로마의 국경으로 밀려들어 왔으며 반달족의 대부분은 아리우스파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406년에는 도나우 강을 건너 판노니아로 밀려들어가 갈리아 북부에서 로마에게 동화되고 있던 프랑크족의 저항을 받아 2만 명이 사망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으나 그해 겨울에 라인 강이 얼자 라인 강을 넘어 갈리아를 남하하면서 황폐화시키고 아키텐까지 몰려갔다고 한다.
5세기 초에 계속 남하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지금의 스페인인 히스파니아로 들어갔다. 이때 단독으로 로마에 대항할만한 세력은 못됐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훈족을 피해 달아난 수에비족, 알란족 등과 연합한 상태였다. 초기엔 알란족이 연합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듯하다. 이들은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서로마 제국을 터는 동안 스페인을 접수했지만 알라리크가 죽고 아타울프의 협력을 얻는 데 성공한 서로마가 고트족과 함께 반격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결국 이 공격으로 인해 실링 반달족이 몰락, 하스딩기의 일원으로 흡수되고 알란족도 명맥을 잇기 힘들 정도로 타격을 입고 반달족에 흡수되었으며, 주도권은 반달족으로 넘어오게 된다.
반달 왕국 시대
존속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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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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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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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알제리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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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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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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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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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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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누마디아인, 반달족, 베르베르인, 알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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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우스파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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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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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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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 왕국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사르데냐, 코르시카에 위치해 있던 반달족과 알란족의 연합왕국이었다. (429 / 442 ~ 534년)
정식 명칭은 Regnum Vandalorum et Alanorum (Kingdom of the Vandals and Alans)으로 반달-알란왕국이다.
역사
북아프리카 정복
반달족의 족장인 군데리크는 알란족의 왕위를 얻은 후 북아프리카에 진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반달족이 자리잡았던 히스파니아(스페인) 일대가 의외로 로마의 공격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428년에 군데리크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인 가이세리크가 왕위를 이었다. 가이세리크는 비록 노예 출신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났을 뿐 아니라 낙마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한쪽 다리를 저는 불구자가 되었으나 용감하고 잔혹하면서도 지략이 뛰어난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형의 유지를 받들어 북아프리카의 로마 영토인 카르타고를 점령하는 동시에 지중해 연안의 영토를 침공하여 정복하였다.
반달족은 429년에 지브롤터를 건넜고, 435년까지 마우레타니아와 누미디아를 석권한 후, 439년에 카르타고를 함락하였다. 442년, 가이세리크는 곡물 수출을 서로마 본국(이탈리아)에 계속해주는 대가로 사실상 독립을 인정받았다. 여기에는 아프리카 백작(Comes) 보니파티우스(보니파키우스라고도 불린다)가 서로마의 중앙정치에 휘말려 432년 임지인 아프리카에서 멀리 떨어진 라벤나 근처의 이탈리아 아리미눔(現 리미니)에서 어이없게도 아에티우스와 일기토를 벌이다가(...)중상을 입었고 머지 않아 죽어서 통치의 공백이 생겼던 점이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서로마는 훈족의 침입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아틸라가 사망하자 반달족에 대한 대책으로 정략결혼을 추진했지만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죽이고 황제가 되자 교섭은 결렬되고 455년에 로마에 침공하기까지 이른다.
로마 약탈
455년 6월 가이세리크 휘하 북아프리카 반달 왕국 군대에 의한 로마 약탈. 약탈은 2주에 걸쳐 자행됐으며, 서로마 제국은 410년 서고트족의 침탈에 이어서 두 번이나 로마가 이민족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이에 대한 반격으로 461년 마요리아누스가 아프리카 원정에 착수하고자 이베리아 반도의 카르타헤나에 함대를 집결시켰지만 사전에 로마 내부의 배신자들로부터 정보를 입수한 가이세리크의 기습으로 실패했고, 468년 바실리스쿠스가 이끄는 동서 로마 연합 함대가 카르타고에서 40km 떨어진 본 곶에 집결하였으나 반달 왕국 해군에게 괴멸당하고 말았다.(본 곶 해전, 468) 이것은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 간의 마지막 합동 작전이었다. 이후 동로마의 황제 제노는 474/476년의 협정에서 가이세리크와 반달족의 북아프리카 지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쇠퇴의 시작
477년, 반달 왕국을 창시하고 그 전성기를 이끌었던 가이세리크는 88세의 고령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장자였던 후네리크가 반달 왕국의 2대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동로마 제국의 눈치를 보며 니케아-칼케돈 종파를 용인하였으나 이후에는 그에 개의치 않고 482년부터는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제외한 나머지 종파의 신도들을 탄압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적도 다수 숙청하였으나, 숙청이 너무 과해 오히려 국력 약화를 초래했다. 이후 그의 치세에 잔존 로마 군단들과 로마화된 베르베르인이 세운 무어-로마 왕국에 의해 서쪽 지역을 빼앗기고, 남쪽 지역에서도 베르베르인들의 토착 왕국에 또 땅을 배앗기는등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후로도 여러 베르베르족들이 독립해 내륙 지역 영토를 잠식하고 약탈을 오기 시작하는 등의 행위가 이어졌다. 그가 484년에 죽은 후에는 군타문드가 즉위하여 니케아-칼케돈 정통파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였으나 이미 왕국은 이탈리아 반도를 접수한 테오도리크의 동고트 왕국에게 시칠리아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베르베르인들에게 북아프리카 해안 도시들이 약탈당하는 등 쇠퇴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496년, 군타문드의 사후 즉위한 트라사문드는 독실한 아리우스파 기독교도로서 니케아-칼케돈 정통파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나 후네리크 때와는 달리 유혈 박해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트라사문드는 28년간 통치한 후 523년에 죽었고 겐세릭의 손자인 힐데리크가 즉위하였다.
칼게돈파로 개종한 힐데리크
힐데리크는 가이세리크의 장남이자 반달 왕국의 2대 왕인 후네리크의 아들이었는데, 어머니는 바로 서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 에우도키아였다. 그녀의 영향으로 힐데리크는 반달 왕국의 군주 중에서 삼위일체파 정통론자들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고, 그 스스로도 니케아-칼케돈 파로 개종하였다. 이후 힐데리크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여 한 세기 만에 카르타고 주교구가 회복되었으며, 잠깐이나마 카르타고 시민들은 반달 왕국에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힐데리크는 전쟁을 기피하여, 해안 도시들에 대한 약탈을 지속하던 베르베르인들에 대한 전쟁을 사촌인 호아메르에게 일임하였는데, 이는 반달족 귀족들에게 나약한 왕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어 반감을 샀다. 530년에 베르베르인에게 반달 군이 패배하자, 반달족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켜 피지배층에게 지나치게 관용적인 왕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를 처형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침공
462년까지 북아프리카 전역과 지중해 연안의 섬들을 장악하여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하였지만 정치, 종교, 인종적으로 피지배인들을 너무나 억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점차 쇠퇴하였으며 결국엔 동로마 제국의 장군인 벨리사리우스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마지막 왕인 겔리메르는 항복 후 소아시아 내륙의 갈라티아에 영지를 하사받았으며 파트리키우스(최고 귀족) 제의를 받았던 등 융숭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단 파트리키우스 제의는 제국의 공식 관제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로마 국교도(니케아-칼케돈파)였어야 되었는데 겔리메르 본인이 아리우스파에서의 개종을 거부하여 무산되었다고 한다.
역대 군주
위시마르(4세기)
고디기셀(359년 ~ 406년)
군데리크(407년 ~ 428년)
가이세리크(428년 ~ 477년)
후네리크(477년 ~ 484년)
군타문드(484년 ~ 496년)
트라사문드(496년 ~ 523년)
힐데리크(523년 ~ 530년)
겔리메르(530년 ~ 534년)
멸망 이후
동로마 제국의 카르타고 재정복 이후 이들의 민족 정체성은 빠르게 상실되었다. 최정예 병력은 기병연대로 편제되어 對 페르시아 전선에 배치되었고 일부는 벨리사리우스의 정규 부대는 아닌 사병적인 성격이 일부 있었던 부대(Bucellarii)의 일원이 되었다. 그 외에도 아프리카 현지에 그대로 남아 현지인에 동화되었거나, 동로마의 각지로 분산 이주되었다고 한다. 9세기 초의 슬라브인 토마스의 반란 때, 반달족이 여러 민족들과 더불어 토마스를 지지했다고 나온다. 동로마인들이 유목민들은 스키타이, 투르크인들은 페르시아인으로 부르는 등, 예전에 부르던 명칭을 고집하거나 잘못된 명칭으로 부르는 사례가 있던 것을 감안해야 겠지만, 반달족들이 꽤 오랫동안 동로마 제국에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제국이 반달족의 흔적을 빡세게 뿌리뽑고자 노력했기 때문인 것도 있다. 가이세리크 때 제국에 여러 굴욕을 안겨주었고, 정통파(니케아-칼케돈) 교인을 제법 박해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복조치로 보인다. J. B. 버리라는 아일랜드 학자에 따르면 아예 반달 왕국이라는 게 없었던 것처럼(as if it had never been)이라는 대목도 나온다. 실제로 탈환 후, 모든 재산권과 토지 소유관계를 반달 점령 이전으로 돌려놓으라는 지시를 제국 측에서 내렸는데, 그게 무려 거의 100년 전이다.(...) 반달족은 공직취임은 물론 재산소유도 금지되었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노예가 되었고 여자들은 로마군이 데려갔다고 하며, 칼케돈 정통파 교회가 원위치로 복원되었고 아리우스파 교회는 압수당하고 박해받았다고 한다.
언어
6세기까지 반달어를 사용했다.
반달리즘
이탈리아 도시들은 5세기 초와 6세기에 서방의 다른 도시들만큼 심각한 타격을 입지 않았다. 410년에 알라릭이 로마를 약탈한 사건은 심리적으로는 중대한 충격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심각한 파괴를 초래하지는 않았다. 455년 반달족의 공격조차 그렇게 심각한 참화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가 재정복 전쟁을 벌이는 동안 심지어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대도시들 대부분은 초토화되고 인구가 격감했다.
-"하이켈하임 로마사"(김덕수 번역) 981쪽
게르만족의 대이동 때 로마 시에 침입하여 수많은 약탈과 문명 파괴행위를 저질렀다고 하여 이들에 유래한 반달리즘, 반달이라는 말이 생겼지만, 사실은 이민족이 로마 시를 침공했다는 자체에서 로마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기 때문에 생긴 말로 반달족은 문화 파괴행위보다는 조직적으로 로마 시의 재물을 배로 실어 북아프리카로 옮겼다고 한다.
반달리즘이란 단어는, 프랑스 혁명 때 자코뱅파의 파괴행위를 반달족에 빗대면서 처음 등장한 단어인데, 학계의 중론은 반달족은 파괴행위를 일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들은 로마 시의 문화재를 약탈하는 데 주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문화재가 훼손되었을 뿐 의도적으로 문화재를 박살내지는 않았다.
5세기의 반달족은 그 스스로도 이미 로마 문화를 받아들여 로마 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하던 상태였으며, 455년 반달족이 테베레 강을 건너 로마 시를 점령하자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레오 1세는 가이세리크를 만나 도시 파괴를 자제할 것을 당부하였고, 반달족은 순응하며 돌아갔다. 그들은 오히려 북아프리카에서는 자기 언어를 포기하고 라틴어, 막판에는 가톨릭을 채택했는가 하면 문학·신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533년 동로마제국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휘하의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북아프리카에 상륙해 두 주일 만에 수도 카르타고를 함락했고, 1년이 못 되어 반달족의 흔적을 깡그리 없애버렸다. 그러니까 오히려 이들이 로마에게 반달리즘을 당해 자취가 남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반달스러운 현상(Vandalism)이 아니라 로마스러운 현상(Romanticism)이라고 불러야 한다
대표적인 반달족 인물
가이세리크
겔리메르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 의외지만 사실이다. 부친이 반달인으로 반달족 혼혈이다. 아마 반달족 중 일부는 로마에 우호적이었거나 로마에 투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달족과 카르타고는 역사적으로 상호 작용 및 갈등 관계에 있었습니다. 특히 반달족은 로마 제국이 쇠퇴하는 과정에서 카르타고를 침략하여 북아프리카 지역에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상세 설명:
카르타고의 멸망:
카르타고는 로마와 지속적인 전쟁 (포에니 전쟁)을 치른 후 로마의 영향력 아래 놓였고, 결국 멸망했습니다.
반달 왕국의 등장:
반달족은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북아프리카로 이동하여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반달 왕국을 세웠습니다.
카르타고의 영향:
반달족이 북아프리카에 정착하면서 카르타고의 지리적 위치와 문화적 영향력은 반달 왕국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반달 왕국은 카르타고를 수도로 삼기도 했습니다.
갈등과 충돌:
반달족과 카르타고는 초기에는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갈등과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반달 왕국이 힘을 키우면서 카르타고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반달 왕국이 로마 제국과도 갈등을 겪었습니다.
반달 왕국의 멸망:
결국 반달 왕국은 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카르타고는 다시 로마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