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Humanities/서양사 Western History

동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 가장 오래 존속 국가, 유럽과 그리스도교 문명의 방파제,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380년 기독교 국교화,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1453년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Jobs 9 2025. 3. 29.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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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치세의 최대강역

 

 

동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 비잔티움 제국

 

위치

남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수도

니코미디아 (286~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 (330~1204년)

니케아 (임시, 1204~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1261~1453년)

제국 서방

서로마 제국 (395~476년)

정치 체제

공화적 전제군주제(데스포티스)

국가원수

(로마인의) 황제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또는 바실레프스)

언어

그리스어 (공용어)

라틴어 (공용어, 7세기 초까지)

기타 지방 언어

 

종교

칼케돈파 기독교-정교회

 

주요 사건

 

286년 최초의 동서 로마 분할
293년 사두정치의 시작
313년 밀라노 칙령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제국 재통일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380년 기독교 국교화
395년 최종 분할
476년 서방 영토 상실
532년 니카의 반란
552년 이탈리아 재정복
626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627년 니네베 전투
636년 야르무크 전투
674년 우마이야 왕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
698년 카르타고 상실
717년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726년 성상파괴령
751년 라벤나 총독부 상실
843년 성상파괴령 철회
969년 안티오키아 수복
1018년 불가리아 정복
1054년 동서 교회의 상호 파문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1081년 알렉시오스 1세 즉위
1096년 1차 십자군 원정
1122년 베로이아 전투
1180년 마누일 1세 붕어
1185년 안드로니코스 1세 폐위
1204년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1261년 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1341년 제2차 시민전쟁
1453년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1460년 모레아 전제군주국 멸망
1461년 트레비존드 제국 멸망
1479년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멸망



동로마 제국(Eastern Roman Empire) 또는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 비잔틴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한 395년 최종적으로 동서로 분할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비잔티움)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을 일컫는 명칭으로, 395년부터 1453년까지의 기간 동안 존속한 로마 제국 동방 관할 행정 기구와 동방 황제 휘하 정부를 가리키는 관습적 별칭이다. 혹은 로마 제국의 중세시대를 뜻하기도 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된 시기는 이보다 65년 정도 이른 330년 5월 11일이며, 제국의 분할 이후 서로마 측에서는 밀라노가 사실상의 수도 기능을 하다가 다시 로마를 거쳐 라벤나로 최종 이전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국가 중 하나다. 한국사 기준으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기 시대까지 동로마 제국이 존재했다. 분할된 로마 제국의 동부는 476년 서부가 멸망하고 유럽에 게르만 왕조가 수립된 이후에도 700년 넘게 존속하다가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에 의해 일시적으로 멸망하고 라틴 제국으로 대체되었다. 1261년 로마 제국의 부흥운동 세력 중 하나인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으며 로마 제국을 부활시켰으나, 이후 쇠락을 거듭하여 1453년 5월 29일 오스만에 의한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완전히 멸망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중세 중기(제4차 십자군 전쟁)까지 유럽 기독교 문명의 가장 강력한 강대국이었으며 동유럽 세계에 그리스-로마 문명을 전파하였다. 4차 십자군 전쟁 이전까지 유럽세계의 기축통화국으로서 경제패권을 쥐어 이끌어갔다.

 

이슬람 제국의 풍파로부터 유럽 기독교 문명을 지켜내기도 했던 로마 제국 동부의 문화적 유산은 오늘날 그리스를 비롯한 정교회권 국가들과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의 후예 튀르키예에 뿌리 깊게 남아있다.

 

 

 

국호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대 동로마 제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통상적으로 '로마니아(Romania)', 공식적으로 '임페리움 로마눔(Imperium Romanum)'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당대부터 이미 이 나라는 '비잔티움(비잔틴)', '동로마'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는데 어떤 방식으로든 고대에 멸망한 서로마와 동로마를 구별해야할 실용적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이 4세기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제국의 중심지가 라틴 문명권에서 그리스 문명권으로 이전되었고, 중심지 변화에 따른 시대 구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관습적 구별법은 한국사에서 475년 한성 함락 이전의 한성백제와 이후의 웅진백제 및 사비백제를 구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중국사의 북송과 남송(카이펑→항저우) 및 서진과 동진(장안→건강), 유럽사의 서독과 독일(본→베를린), 러시아사의 루스 차르국과 러시아 제국(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도 이와 유사한 경우이다.

 

로마 제국의 동서 분열은 엄밀히 말하면 제국의 분열이 아니라 통치권Imperium의 분할로 봐야 정확하다. 통상 제국(帝國)이라는 한자어로 번역되는 Imperium은 1차적으로는 '공간적 의미의 나라'가 아니라 '통치권, 지배, 권세' 등을 의미한다. 곧 로마市가 서부의 통치권을 거머쥐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동부의 통치권을 거머쥐어도 '제국'이 두 개 있는 게 아니라 '통치권'이 두 개 있는 것일 뿐이다.

 

오늘날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구분과 관련해 자꾸 오해가 생기는 이유가 현대의 국가 관념이나 동아시아의 종묘사직 개념을 로마에 적용해서 생각하려니까 그런 것이다. 유럽 문명은 도시Polis 중심의 문명이고, 여기서 도시 로마가 다른 도시들을 자기 영역으로 만든 것이 '로마의 통치권'Imperium Romanum이다. 그렇기에 로마시의 이 통치권을 둘로 쪼개더라도 똑같은 '로마의 통치권'인 것이다.

 

따라서 당대 로마인들에게 동서로마의 분할은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 둘로 나누어 복수의 황제가 다스린 개념이었고, 그들에게 분할은 서기 3세기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부자의 협동황제 개념을 발전시킨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의 연장선이었다. 쉽게 말하면, 서기 4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 때 로마법과 국제상 물리적으로 드넓은 제국을 복수의 황제가 각자 임페리움을 통해 협치 개념으로 복수의 정부로 통치하는 통치방법이었다. 따라서 395년 동서로마 분할로 알려진 시기 이후의 속주관할권 재편 역시 별개의 국가가 이를 놓고 협상을 벌인 국제적 외교가 아니었고, 로마 제국은 15세기까지 존속했다.

 

이런 이유로 정확히 어떤 시기에 '비잔티움 제국'이 성립되었는지 말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로마 제국과 같은 국가를 학문상 개념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짐작되듯, 학설과 관점에 따라 동로마 제국이라는 정부가 언제 생겼다고 말하기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애당초 기원전 753년 건국된 로마 제국이 동쪽에서 수도만 바뀐 채 살아있는 상황에서 '멸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건국됨' 같은 정석적인 루트가 아니다. 그럼에도 학문상 비잔티움 제국, 동로마 제국으로 구분해 설명할 경우, 대체적으로는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년 ~ 337년)가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인정하고 33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창건하고 수도로 삼은 이후의 제국을 다수설, 통설적 개념으로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특정 시점을 잡아 특정하게 확대 해석하여 동일 여부를 따진다면 굳이 아르카디우스를 시작으로 하는 '동로마'만 부각할 이유가 없다. 있다면 그건 그저 편의적인 역사 해석을 위함을 다시 유념해야 하겠다. 어차피 모든 고중세 국가들은 종교를 국가 이념의 일부로 중시할 수밖에 없으며 그건 로마든 동로마든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중심 이념이 다신교나 폰티펙스 막시무스 지위에서 기독교와 기독교 주교들을 보다 중시하는 걸로 이행하는 현상은 그저 어떤 나라가 역사를 이어나가면서 겪은 변화지, 그걸로 동일 여부까지 가릴 수는 없다. 굳이 나눠서 분리하자면 물론 기원전 753년~아르카디우스 이전 로마와 아르카디우스 이후~1453년 로마가 같은 실체로 볼 수는 없으나 그런 정도 구분과 분리라면 이런저런 계기들을 모아서 얼마든지 다르게 볼 수 있는 것이다. 테오도시우스 이래로 다신교 이념이 국가 중심에서 밀려났다지만 이는 그전부터 계속 진행되던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융합 및 상호 영향에서 비롯된 경향에서 비롯된 것이지 테오도시우스 혼자서 바꾼 게 아니며, 이 이후에도 대놓고 다신교 이념의 추종자임을 표방하던 학자들이 적어도 7세기까지는 여럿 있었고 별 탄압 없이 학문활동을 계속 했으며, 민간에서도 다신교 신앙 특유의 미신적 관념이나 신앙 습속들은 무려 11세기까지도 여전히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한편 별칭으로 그리스 제국이란 일종의 비하어도 주로 서방쪽에서 타자화해서 비하할 때 몇 번 쓰이긴 했다. 동서분열 이후에는 어쨌든 제국 내에서 그리스인의 비중이 가장 컸기 때문. 소련보고 러시아라고 많이 불렀던 것과 비슷한 셈이었다. 다만 이건 동서 분할 이전에 로마인들이 서로를 가끔은 일종의 지역감정으로 타자화하던 추세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해야 한다. 이미 벌써 오현제 시기에도 이탈리아 본토인들이 자기네가 제국 동방보다는 진짜 로마인에 가깝다는 인식을 몇 번 내비쳤고, 한편 역으로 안티오키아 같은 제국 동방 대도시 시민들은 페르시아나 게르만 변경 지대에 사는 사람들보다는 자기네가 더 로마인이라고 자부했었다. 혹은 선조가 몇십 년 혹은 백여 년 전 제국 서부에서 이주해온 바 있는 주민들도 주변 토박이들에게 그러했던 사례가 있었다. 따라서 이미 로마 제국의 쇠퇴 이전에 있었던 지역감정이 제국의 강역 변화와 함께 일종의 나라 간 감정으로도 비화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국호 표기법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로마 제국)이라는 호칭을 고전 그리스어로 발음하면 '바실레이아 톤 로마이온' 정도 되지만, 중세 시절의 그리스어는 이미 상당한 복모음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현대 그리스어와 거의 같게 발음된다. 사실 고전 그리스어가 쓰이던 시절과 동로마 제국은 이미 1000년 가까이 갭이 난다. 라틴어만 해도 원수정 당시 라틴어와 동서로마 분열기의 라틴어가 상당히 많이 달라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특히 'Β' 가 'v' 자음으로 바뀌게 된 것도 기원 후의 일이다. 중세 그리스어식 발음은 바실리아 톤 로메온.

 

현재 한국에서 통용되는 동로마 시대 인물들의 호칭에는 이와 같은 그리스어의 변화 양상이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고, 라틴어식 표기와 혼재되기 때문에 (특히 한국외대 그리스-발칸어학과 교수들을 중심으로) 수정이 필요하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당시의 발음을 살리려면 코이네 그리스어 '헤라클레이오스'는 중세 그리스어 '이라클리오스'가 된다. 그리고 로마의 마지막 황제는 라틴어식인 '콘스탄티누스 11세 (드라가세스)'보다는 '콘스탄티노스 11세 (드라가시스) 팔레올로고스'가 될 것이다. 물론 당시 동로마 제국인들 역시 (이라클리오스 황제 이후에도) 서방 국가들을 상대로는 황제의 명칭을 여전히 라틴어로 기록했으니 어느 쪽 독법을 따르는지는 상관 없다. 다만 코이네만 괴이하게 고집했던 한때의 풍토는 문제가 있었다. 예전의 서구에도 이런 풍조가 있어서 워랜 트레드골드 교수가 자신의 저서에서 일부러 한 단원을 할애해서 집중적으로 까댔을 정도.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꼽자면, 아무래도 서구인이 그리스어 문헌을 접하는 주된 수단이 고전기와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 학자들의 작품과 성경이고, 따라서 그리스어에 대한 흥미 역시도 압도적으로 고전어와 코이네에 몰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익숙하고 편한 표기와 발음으로 읽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애당초 옛말을 배우는 건 회화용이 아니라 거의가 독해 용도이기에, 대학 전공 수준으로 배우더라도 '해석'이 목표이지 '발음'은 목표가 아니다. 그렇기에 경제성과 효율성의 측면에서 고전이나 코이네 발음이 통용되는 건 충분히 납득 가능한 일이다.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는 마치 한국사에서 신라와 통일신라를 676년 기준으로 구분하듯이, 연속성 있는 한 나라를 편하게 구분하기 위해 관습화된 것이다. 이 나라 사람들이 자국을 부르던 이름은 로마니아(로마국)였다.

 

비잔티움(비잔티온)이라는 국호는 당대인들에게 쓰이지 않았다는 오해가 많으나, 이미 7세기의 황제 칙령에서도 국호의 용례로 쓰인 것이 확인된다.# 곧, 비잔티움이라는 명칭 그 자체는 빈도에서는 로마니아에 밀릴 수 있어도, 분명히 당대인들이 공적으로 사용한 명칭이다.

 

 

전성기

 

제국의 전성기는 세 번 꼽을 수 있다. 첫 번째 전성기는 게르만족에 의해 잠식당한 제국의 서방영토를 이탈리아 반도와 이베리아 반도 남부, 북아프리카까지 회복한 최대 전성기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 두 번째 전성기는 당대 제국의 최대 위협이였던 불가리아 제국을 멸망시켜 발칸반도와 아르메니아를 정복하면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후 최대 영토를 확보한 바실리오스 2세 시기, 마지막 전성기는 콤니노스 왕조 치하 아래 다시 한번 경제 패권국이 된 제국이 아나톨리아 서부와 연안을 수복하고 서유럽과 이슬람 세력에 대해 마지막으로 패권을 휘두를 수 있었던, 알렉시오스 1세, 요안니스 2세, 마누일 1세 시기로 구분된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당시의 제국은 외적으로는 과거 최전성기에 거의 버금가는 모습을 보이는데, 갈리아와 브리튼, 이베리아의 일부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로마 제국의 과거 영토의 상당 부분을 되찾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흑사병이 대유행하고 만다. 더군다나 당시 제국은 도시화가 사산조 페르시아 등 다른 국가보다 높아서 피해는 더욱 컸다. 게다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재정복으로 넓어진 영토는 이후의 동로마 제국에게 부담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시대까지는 간신히 관리하고 지켜낼 만한 역량이 있지만, 동로마 제국의 국력 한계상 이후 시대에는 이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첫 번째 전성기 이후 동로마 제국은 빠르게 영토를 상실하며 몰락했다 특히 7세기초 사산조 페르시아와 죽자 살자 싸우는 틈을 타 급성장한 이슬람에 의해 7세기 초중반 아르메니아, 레반트, 이집트, 북아프리카 등, 동방 영토를 대거 상실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위세는 크게 줄어들었다.

 

 

 

바실리오스 2세 시기

 

그러다가 바실리오스 1세(재위: 867년 ~ 886년)가 창건한 마케도니아 왕조 시기가 도래한다. 약 200년 간에 걸쳐 전개된 이 시기에는 바실리오스 1세, 현제 레온 6세(재위: 886년 ~ 912년), 로마노스 1세 레카피노스(재위: 920년 ~ 944년), 콘스탄티노스 7세(재위: 913년 ~ 959년), 니키포로스 2세(재위: 963년 ~ 969년),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재위: 969년 ~ 976년) 등의 위대한 황제들이 배출되었던 시기이며 이들은 제국 내부를 구조조정하여 재정건전성으로 세입을 늘리고 그만큼 군사력을 키워 바실리오스 2세 불가록토노스 황제 시기 불가리아 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제국이 강대국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전성기가 되었다.

 

이 시기의 영토는 395년의 제국 최종분할 당시의 동로마 제국의 약 60 ~ 70% 수준에 달하며 (물론 그 이후로 시대가 흘러 기술이 발전한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인구와 세입금은 75%, 군사력은 110% 수준으로까지 도달했다. 세입에 비해 군사력은 다소 많긴 했는데 그건 동로마 제국은 전통적 문제인 양면전선으로 어마어마한 군사력이 소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둔전병 특성이 강한 테마 제도로 군사비를 아껴서 저게 가능했으나 그래도 상당한 부담이긴 했다. 일단 이 수치는 워랜 트레드골드가 추정한 수치인데, 일반적으로는 오히려 워랜이 인구와 세입금을 너무 보수적으로 잡았다고 보기 때문에 대강 거의 동서 최종분할 당시의 동로마 제국 국력을 먼 길 돌아서 회복했다고 보고 있다.

 

여기서 시간이 흘러 인구가 증가하고 기술이 발전했는데 동서 최종분할 당시의 동로마 제국 국력을 회복까지'밖에' 못했다고 보면 안 된다. 본래 동로마 영토 중에서 부유한 인구밀집 지역이던 이집트와 시리아(레반트) 지역을 상실했음에도 남아있는 핵심 영토 경영의 효율화로 영토가 훨씬 넓던 시기와 맞먹는 국력을 키운게 더 대단한 것이며, 애초에 본디는 동로마 관할이 아니었던 일리리아 일부, 남이탈리아, 아르메니아 등 꽤 넓은 영토가 추가된 것도 감안해야 한다. 그 상태에서도 군사력은 오히려 395년 당시 동로마보다도 강했던 건 상당한 성취가 맞다.

 

그러나 이 전성기는 11세기의 연이은 전쟁과 혼란으로 끝난다. 동쪽으로는 셀주크 투르크인들이 밀려들어왔고 북쪽에서는 쿠만족, 페체네그족 등의 침략이 이어졌고 서쪽에서는 노르만의 공세가 줄을 이었다. 결국 만치케르트 전투가 결정타가 되어 기존의 테마였던 아나톨리아 반도 대부분이 셀주크 제국과 이후 룸 셀주크의 치하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동로마의 기존의 테마 체계가 와해되어 제국의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셀주크 제국에 지속적으로 안보가 노출되는 상황으로 인해 알렉시오스 1세 황제가 이를 타개하기 위한 묘수로 셀주크 제국에 대한 서방의 지원군을 교황에게 요청하였는데, 이는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십자군 전쟁을 선포하는 도화선이 되어 마침내 십자군 전쟁이 시작이 되었다. 이로 인해 제국의 안보 부담은 단기적으로는 한층 덜어지는 듯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제국에 맞먹거나 어떤 부문에서는 오히려 제국을 능가하게 될 정도로 부쩍 성장한 카톨릭 서구권과의 충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동로마 제국의 대표적인 혼란기였던 11세기는 서유럽이 정치적 안정과 농지의 확대 등으로 상당한 체급의 성장을 이룬 세기기도 했다. 바로 이전 세기가 동로마의 전성기이자 서유럽의 상대적 혼란기였던 것과 대비된다.

 

 

 

콤니노스 왕조 시기

 

콤니노스 왕조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테마 체계에 대한 문제가 수습되었고, 서방의 십자군 원정을 적절히 활용하여 제국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11세기 말 ~ 12세기 말의 알렉시오스 1세, 요안니스 2세, 마누일 1세로 이어지는 시기에 제국은 중흥기를 맞았다.

 

영토가 아닌 재정적인 지표를 기준으로 했을 때는 12세기 무렵 콤니노스 왕조 치하의 시기에 역사상 가장 융성하였다. 당대 기록에서 이미 고대를 넘었다고 자부할 정도였다. 이 시기 제국의 군사력은 중앙 야전군을 4만 혹은 5만 명선까지 팽창시켜 주전력으로 삼았다. 재정 부문에서는 농상공업이 모두 골고루 발전하여 역대 최고의 영화를 누렸다. 12세기 중반에는 이미 조세액만으로 11세기 초에 맞먹게 되었고 그 세기 후반에 들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루 관세만 금화 2만 개에 달했다는 보고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발전상이 정부기관과는 구분되는 민간에서 주로 이루어진 점을 감안한다면 앞에서 말한 발전상조차도 이 시기 번영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수 있다. 그만큼 제국은 유럽 초강대국의 지위를 가졌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구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이러한 제국의 융성은 안드로니코스 1세를 마지막으로 콤니노스 왕조가 혼란 속에서 붕괴하며 끝을 맺었고, 뒤이은 앙겔로스 왕조가 연이은 실정과 지방 세력의 이탈을 겪으면서 종국에는 4차 십자군으로 인해 제국이 공중분해되는 사태로 귀결되었다. 1261년에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가까스로 수도를 복원하며 중흥을 노렸으나, 이후 제국은 다시는 전성기를 누리지 못했다.

 

 

 

주요 역사적 사건

 

테오도시우스 대제 즉위: 379년

제국 최종 분할: 395년.

제국 서방의 소멸: 476년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성립: 518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치세: 527년~565년

이슬람이 제국의 절반 이상을 휩쓴 시기: 7세기

20년간의 혼란: 695년 ~ 717년

이슬람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 실패: 717년

성상 파괴 운동: 8 ~ 9세기

마케도니아 왕조의 성립: 867년

안티오키아 수복: 969년

바실리오스 2세의 치세: 976년부터 1025년까지.

불가리아 정복: 1018년

동서 교회 대분열: 1054년

콤니노스 왕조 성립: 1057년

이탈리아 반도의 영토 완전 상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아나톨리아 상실: 1071년

알렉시오스 1세 즉위: 1081년

마누일 1세 사망: 1180년

콤니노스 왕조 몰락: 1185년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13세기, 1204년.

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13세기, 1261년.

제국 동방의 소멸, 로마 제국 멸망: 15세기, 1453년.

 

 

 

정치

 

동로마 제국의 정치는 당연히 고대 로마 제국 시절의 정치 체제가 그대로 이어지되 시대가 지나면서 조금씩 수정되고 보완된 것이었다.

 

고대 말기 로마의 정치 개혁으로 황제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관료 체계가 잡혀서 한때는 동방식 전제군주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도 원로원이 만들어졌으며, 현대에 들어 동로마 제국의 공화적 면모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면서 원로원이 실권이 없었다는 과거 인식과 사뭇 다른 평가가 나오는 중이다.

 

불가리아 제1제국의 시메온 1세와 세르비아 제국의 스테판 우로슈 4세가 자기네 직함에다가 '로마인의 황제'라는 타이틀을 붙였던 것도 동로마 영토에 대한 군사적 정복을 단행한 데서 기인했으며, 오스만국의 메흐메트 2세의 '로마 황제' 자칭도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대업을 이룬 데서 비롯된 것이다. 가톨릭 세력이라고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 라틴 제국의 황제들이 자기네 인장(seal)에다가 '로마인의 황제(IMP(e)R'(ator) ROM(anorum))임롬'라고 떡하니 박아놓은 것도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차지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앞서 열거한 세력들이 '로마 황제'를 자칭하며 스스로를 '제국'으로 선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른 국가도 아닌 바로 '(동)로마 제국'의 영토에 대한 군사적 정복이었다. 당대 유럽 세계에서 '제국'이나 '황제'라는 개념은 어떤 형태로든 (자칭이거나 동로마 제국의 인정을 받았거나) 동로마 제국과 연결 고리가 있었던 것들이다.

 

애당초 카롤루스 대제의 서로마 황제 즉위도 여성의 제위 승계를 인정하지 않는 살리카법상 당시 동로마를 다스렸던 이리니를 황제로 취급하지 않은 채 로마 황제가 공석 상태임을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적어도 이리니의 선황제, 다시 말해서 콘스탄티노스 6세까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가 정통 로마인의 황제'임을 서유럽인들 역시 인정했다. 그러나 살리카법이라는 것이 프랑크 왕국의 국내법에 불과했기 때문에, 카롤루스 대제는 이리니와의 혼인을 통해 당대 유럽 세계에서 진정한 로마 황제로 경외되어 온 동로마 황제 자리마저 노림으로써 자기가 가진 로마 황제 직함의 '국제적인' 정통성에 쐐기를 박고자 했다. 사실 카롤루스의 로마 황제 즉위의 진정한 수혜자는 카롤루스 본인이 아닌 로마 교황이었는데, 카롤루스에게 '로마인의 황제'라는 권위를 부여한 주체가 교황이었으니 이를 거두는 것 역시 교황이 결정할 일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교황은 황제의 정통성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정치적인 힘을 갖추게 되었다. 자기에게 주어진 '로마인의 황제'라는 직함이 오히려 교황이 채워 놓은 족쇄로 작용할 수 있음을 안 카롤루스로서는 굳이 교황에게 설설 기지 않아도 큰소리를 칠 수 있을 만큼의 독보적인 정통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으며, '정통 로마인의 황제'인 동로마 황제로의 즉위는 이러한 자신의 의도를 충족시키기에 너무나도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이리니와의 혼담 논의는 동로마 황제 등극이라는 최종 목표의 중간 과정이었던 것이다. 훗날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동로마 황족과의 혼인을 이유로 로마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한 사례로 미루어 봤을 때 카롤루스의 구상이 아주 허황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고부터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총 88명(라틴 제국 출신의 황제 제외)의 황제들이 제위에 올랐고, 동로마 제국은 멸망할 때까지 제위 계승법이 확립되지 않아, 오랫동안 권력 다툼이 극심했다. 아우구스투스 이래 황제의 본질적 책무는 군사령관이었고, 동로마 시대에도 그것은 바뀌지 않아 군부의 지지가 있으면 누구나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의 지지가 없으면 실패하기도 했다. 반면 혈통이나 가문은 동로마가 멸망하던 무렵까지도 제위 계승의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고 여겨졌다. 좋게 말하면 능력주의지만, 군부의 지지를 통해 황제가 옹립될 수 있다는 관념은 동로마 제국이 그 역사 동안 내내 쿠데타에 시달리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고, 국력을 낭비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보위의 안정적인 계승을 위해 그나마 자주 사용되던 방법은 사두정치 시절 확립된 공동황제 제도, 부황제 제도를 활용한 것이었다. 정황제(Augustus)가 부황제(Caesar)를 임명하는 것으로 사실상의 후계자를 지명하면서 동시에 역할을 분담했다. 이것도 혼란기 때에는 각지의 군부가 정제와 부제의 계승 순위, 지명권을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정제나 부제를 옹립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신체적으로 정상이 아닌 자는 황제의 자격이 없었지만, 유스티니아노스 2세(재위 1차 685년 ~ 695년, 2차 705년 ~ 711년)는 코를 잘린 후에도 자신을 쫓아낸 자들에게 복수하고 제위에 등극하였다. 제위에서 밀려난 패배자들은 대개 눈이 뽑히거나 코가 잘리고 수도원에 연금되었다. 코를 자른 이유는 신체에 손상이 있는 사람은 제위에 부적합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인데, 각각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 대신 눈을 뽑아 연금하는 것과 그 자식들이 다시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코가 잘리고 폐위를 당했지만 멀쩡히 복위에 성공하고, 금으로 만든 가짜 코를 붙이고 다녔다. 그리고 다시 필리피코스에게 폐위되자 처형당했다.

 

그래서인지 후기에 들어서는 이러한 관행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신체 절단형을 끔찍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로마인들의 입장에서는 죽이는 것보다 세련되고 문명적인 정적 제거법이었다. 콘스탄티노스 6세는 폐위될 때 눈이 뽑히고 죽었는데, 죽은 시기가 차이가 있어서 모후 이리니가 특별히 죽을 수 있는 방법으로 눈을 뽑았다고 보기도 한다. 동로마 제국 시기에는 일반적인 유럽 국가와는 다르게 환관이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고위직에 올라가기까지 했다. 이것도 신체절단형과 관련이 있는데 애초에 거세당한 사람들이 황족이나 높은 귀족이다 보니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현대에는 기괴하게 느껴지지만 당시 로마에서는 고귀한 신분의 인물을 잡아죽이는 것보다는 불구로 만들어서 제위나 권력 투쟁에 결격 사유를 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명확한 적장자 상속제가 없고, 군부의 추대를 받으면 황제가 될 수 있는 체제를 본 서유럽인들은 동로마에는 음모가 많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많은 실권이 황제에게 옮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의 인사들은 사회 유망 인사인 동시에 유력 관료층이었기 때문에, 원로원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니카의 반란의 배후이기도 했고, 황통 단절 시에 섭정을 행하기도 했으며 후기에는 원로원 출신이 황제로 등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은 지방민의 의사와 군부의 의사를 잘 반영하지 못했고, 군부는 황제를 통해서 원로원과 대립하였다.

 

 

 

경제

 

동로마 제국에서는 서유럽보다 고대 이래 화폐 경제 제도가 발달했다고 여겨진다. 제국 정부에서 발행한 금화인 노미스마는 13세기 후반까지 높은 순도를 유지하여 1282년에 등장하여 빠르게 보급된 베네치아 두캇 금화에 의해 대체되기 전까지 높은 신용도를 가지고 있었다. 노미스마화는 후세에 ‘중세의 달러’ 라고 불릴 정도로 국제적 화폐로 유통되었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업종마다 길드를 통한 국가에 의한 보호와 통제가 두루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들여온 비단 기술로 국영 공장에서 독점 제조된 견직물들을 비롯해서 귀금속 공예품·유리 공예품·도자기 제품들이 거래되면서 다른 국가와의 무역이 제국에 많은 부를 가져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세계의 부의 3분의 2가 모이는 곳’ 이라고 불릴 만큼 크게 번영하였다. 여기서 만든 유리잔, 유리구슬이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에 있는 신라의 무덤에서 출토될 정도였다.(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 경주 황남동 상감 유리구슬 등)

 

동로마 제국으로 6세기 비단 직조법이 동양에서 전파된 이후 비단(견직물)은 동로마 제국 정부의 철저한 통제를 받는 전매품으로 다뤄졌고, 반면 중세 전기~중기 동방세계에 비해 경제=산업적, 문화적, 학문-기술적 수준이 뒤떨어졌던 서유럽에는 비단 직조법이 전파되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이 천을 자주색(보라색)으로 물들이는 염료인 "티리언 퍼플"의 생산법 역시 동로마 제국 정부가 절대 외부로 유출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때문에 당시 티리언 퍼플로 물들인 최상급의 자줏빛 비단은 생산지에서도 같은 무게의 금값에 맞먹는다고 할 정도로 엄청났지만, 서유럽과 북유럽에서 이러한 비단으로 만든 옷은 단순히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아주 특별하고 귀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또한 북유럽은 춥고 습해서 뽕나무가 없고 누에를 치지 못하니 그냥 비단도 황금 이상의 사치품이었는데 자주색으로 물들인 비단이었다면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국은 황제와 정부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선물로 이 귀한 자줏빛 비단을 애용했다.

 

그러나 국가에 의한 경제 통제나 사치품에 대한 전매는 11세기 중반까지로 한정되며 8~9세기 이래로 경제 전반은 점점 민간에서 역량을 강화하면서 자유로운 무역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12세기에 접어들어 투델라의 벤자민(Benjamin of Tudela)의 연대기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만 하루 금 2만 개를 거둔다는 진술이 나올 정도로 무역의 규모가 역대 최대 규모로 성장했다. 그러나 12세기 말 제국은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 베네치아 공화국 상인들에 대한 동로마 지식인들의 적개심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1204년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은 제국의 몰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주요 산업 가운데 하나인 농업은 고대부터 중세 초기까지는 서유럽에 비해 고도의 농업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의 농업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9 ~ 13세기에 서유럽과 중동에서 농업 기술력과 생산성이 발전하면서, 제국의 농업 기술은 상대적인 우위를 잃었다. 기술의 발전은 이중괭이와 가벼운 쟁기에서 멈추었지만, 이것은 굳이 깊게 땅을 팔 이유가 없는 동지중해의 자연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Angeliki 교수) 자연 환경에 농민들이 적응한 결과라고 볼 수 있었다.(Oikonomides 교수)

 

반대로 프랑스 북부와 영국의 고지대, 독일을 위시한 여러 지역들은 충적토가 많아 고대부터 사용하던 '가벼운' 경형 쟁기로는 경작이 어려웠다. 그래서 이 지역들에서는 새로이 개발된 중형 쟁기를 써서 단단하고 끈적끈적한 토양을 경작해 그 토양의 풍부한 양분을 온전히 활용하여 생산량을 늘릴 수 있었다. 반면 지중해 일대와 프랑스 남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값이 비싸고 유지 비용이 높은 중형 쟁기를 쓸 필요가 없었고 깊이 갈이를 하면 수분이 지면으로 빠지거나 모래만 나오는지라 쓰지 않는 게 더 나았다. 그래서 농업과 관련해 다양한 지식을 갖추고 있던 북유럽인이나 동유럽인들이 대규모로 제국으로 이주해 왔음에도 중형 쟁기를 위시한 농기구들이 제국 내부에서 확산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환경적인 요인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동로마의 노동 생산성은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했는데 이는 단순한 기술적 발전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토지 소유 형태와 경작 방식에서 노동 집약적인 경작 방식의 도입 등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사회적으로 거대하게 관개를 진행한 아랍과 달리 동로마 제국에서는 농민들과 지역 유지들이 자체적으로 터널을 파 관개 수로를 설치하고 물레방아를 설치했다. 그러나 그동안에 서유럽의 생산성은 배로 늘어났고 아랍-이슬람 세계도 관개 공사를 해 수확을 두 배로 늘리고 동양의 작물을 도입하였다. 따라서 동로마의 농업 기술은 초기에는 앞서 있었으나 점차 규모의 측면에서 압도적인 서유럽에 뒤쳐지는 모습을 보였다. 시리아와 북아프리카, 아나톨리아 같은 곡창지대를 잃은 후에는 인구부양 능력이 점점 떨어졌다.

 

8세기에 아바스 왕조와의 탈라스 전투에서 패한 두환이라는 당나라 포로가 지중해 국가들의 풍습 등을 기록했는데 동로마에 대해 기록한 것에 따르면 아랍제국의 상업은 굉장히 활발하다고 명기했던 반면, 동로마인들은 금전거래나 장사는 하지 않는다고 기록했다. 아마도 아랍제국의 공습을 받아 쇠퇴기에 든 동로마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닌 자급자족하는 변경의 테마들을 본 것일 가능성도 있다.

 

 

 

군사

 

페르시아전 이전

 

동로마 군대는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군제 개혁을 통해 새로이 변모한 로마군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군대는 스콜라이 팔라티니와 팔라티니 코미타텐세스를 비롯한 근위대, 야전군인 코미타텐세스, 국경방위대인 리미타네이, 그리고 용병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제국 내 자치령의 소집병으로도 볼 수 있는 포이데라티, 그리고 주로 기병으로 구성된 귀족들의 사병 부대 부셀라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가가 그럭저럭 유지되던 동로마 방면 군대는 상당히 건실했으며 외국 용병인 포데라티도 로마 국내의 군사력으로 충분히 억제 가능한 수준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당시 동로마 제국군은 최대 300,000~350,000명에 이르렀다. 코미타텐세스와 리미타네이로 혼성 편제된 각 야전군은 15,000~25,000명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다.

 

적어도 동로마 방면에 주둔하고 있던 야전군들의 편제는 거의 그대로 헤라클리우스 시대까지 유지되었다. 벨리사리우스의 원정대에 용병이 편제되는 등 용병의 활용도가 높았기는 했지만 용병 활용은 고대 로마의 아욱실리아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벨리사리우스의 원정은 주적이 사산조 페르시아를 상대하는 상황에서 용병 비중이 높았던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이라고 보이는 어렵다. 벨리사리우스의 원정대에서 주력이 된 보병 10,000명에 기병 3,000기는 기존의 야전군인 코미타텐세스와 용병대 포이데라티가 혼성 편제된 군대였다.

 

 

페르시아전 이후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부유한 이집트와 시리아를 상실하자 다수의 상비병과 용병으로 군대를 유지하기는 어려워진다.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이를 해결하고자 본래 편제된 정규군인 타그마와 함께 둔전 제도의 일종인 테마 제도를 도입했다. 테마 제도는 비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해결책이었지만 이슬람의 흥기 이후 이집트와 시리아, 카르타고를 완전히 상실하고 거대한 이슬람 세계의 공세에 노출되자 다수의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상설화된다.

 

중앙군인 타그마(το τάγμα)는 상설화, 혹은 거의 상설화 된 군대로 점차 확대되어가다 후대에 총 4개의 기병 연대로 확립되었다. 이들의 수는 24,000명으로 테마의 군대보다 훨씬 중무장했고 기병 비율이 높은 부대 구성으로 야전군의 역할을 맡았다.

 

테마 제도는 둔전병들에게 토지와 면세 효과를 부여하고(뒤로 가면서 유명무실해지긴 한다.) 대신 그 지역에 정착하여 외부의 군대가 습격해올 때 이를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이슬람 세계에 대해 많은 군사력 열세에 처했던 8세기의 동로마 제국의 방어 전술은 테마의 둔전병이 고지대나 요새에서 적을 방어하는 한편 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게릴라 전술을 펼치고, 이 사이 인근 테마의 지원군이나 중앙군이 집결하여 적을 격퇴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에 지역 기반적인 군사 제도 덕분에, 일시적으로 그 지역이 적의 약탈에 유린되어도 주민들이 그곳을 떠나지 않고 금세 군사력을 복구할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다만 지역분산적인 군사제도는 언제든지 이들이 중앙의 황권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테마 제도가 시행되는 초기와 성상 파괴로 인한 대립이 있었을 때는 이러한 일이 잦았지만, 이후 제국은 테마를 소형화해서 여러 갈래로 갈라놓으면서 이들이 연대하여 중앙에 반발하는 일을 어렵게 해 놓았다.

 

하지만 테마 제도는 기본적으로 둔전병이 그 지역을 지킨다는 상당히 수세적이고 지역 기반적인 전략이었기 때문에 제국이 이슬람 세계에 공세로 돌아서는 10세기에는 테마 제도의 구성원은 상당히 줄어들고, 대신 타그마나 용병의 비중이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호족 가문의 세력 확대로 둔전병이 토지를 잃는 상황이 이어지며 붕괴를 가속했다. 이 영향으로 제국의 수세적 역량은 약화 되어가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군사력의 중핵이었던 아나톨리아 지방과 바실리오스 2세 치하에 확장 되었던 '새로운 테마' 의 영역을 상실하면서 결정타를 맞고 붕괴한다.

 

 

 

프로니아 제도

 

이렇게 중기 제국 군사 제도가 붕괴하고 콤니노스 왕조 치하에서는 군사력의 봉건화가 진행된다. 농민 위주로 편성되었던 테마 제도와는 달리 중소 귀족에게 토지를 하사하고 병력을 제공받거나 수세권을 부여하는 대신, 직업 군인을 고용하는 프로니아 제도(Πρόνοια)가 나타났다. 프로니아 제도는 원칙적으로는 토지의 상속이 불가능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세습되었다. 황제들은 프로니아의 반란이나 이탈을 막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콤니노스 가문이 지배하던 시기와 앙겔로스 가문까지는 봉건화가 절정으로 치달은 시기로 여겨진다.

 

4차 십자군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이런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이후에는 당시 니케아 제국의 역량으로 제국 전 영역을 커버할 군사력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지자 용병의 중요성이 더욱 늘어났다. 과도한 군사력 지출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군사 제도가 붕괴되기 시작했고 결국 멸망을 맞게 된다.

 

다만 직업 군인은 자신의 토지가 복잡하게 여러 군데 떨어져 있었기에 국가 행정 조직의 도움을 받아야 자신의 토지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특별히 공을 세우거나 아들이 아비의 직업을 물려받는 조건으로 토지를 세습하는 것이지 일반적인 경우 세습은 쉽지 않았다. 프로니아 제도가 제국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고 보기도 했지만 지금은 프로니아 제도는 제국의 몰락을 최대한 막았으며, 프로니아 제도로조차 버티기 힘들 정도의 위기가 제국을 몰락시켰다고 보고 있다. 오스만이 제국 대부분을 잠식하여 제국 영토가 고립되고 흩어진 상태에서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오스만과 협상하려하는데 황자 하나는 테살로니키에서 오스만군을 막고 있고 황자 하나는 모레아에서 4차 십자군의 잔당들과 마찰을 빚는 상황이 와버린 것이다.

 

 

 

 

문화와 학문

 

고대 로마 시절과 비교하자면 굉장히 기독교적으로 변했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사이의 교류에서 동로마 제국으로 일컫기 시작하는 시기는 아주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제국이 갈수록 기독교화 되어가다 보니 문화적 면에서 기독교가 우세해졌고 이것은 미술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런 기독교화로 고대 그리스 철학의 본산인 아카데미가 이교 사상 취급을 받고 해체되기도 했다. 7세기 이후로는 전염병과 사산조 페르시아, 아랍인과의 전쟁 등으로 라틴어를 할 줄 아는 지식인의 수가 급감했다. 하지만 여전히 고전 문학은 지식인에게 필수였고, 법학 또한 상당히 중시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의 로마법 대전이 있다.

 

동로마 건축은 동남부 유럽 전역에 뿌리내렸으며, 이탈리아 라벤나에도 산 비탈레 성당이 남아있다. 동로마의 건축 양식은 후대 러시아로 전해져 네오비잔틴 양식으로 계승되었다. 물론 오스만 제국도 이 양식을 받아들여 오늘날 터키를 대표하는 건축양식이 되었다.

 

동로마 문화가 가지는 의의는 정교회를 기반으로 한 동유럽 문화의 기틀을 다졌다는 것에 있다. 제국의 선교사들이 만든 키릴 문자는 불가리아 제국을 거쳐 키예프 루스로 전해져 오늘날에도 널리 쓰이고 있으며, 정교회 문화를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직접 전수받은 키예프 루스는 몽골의 침략 이전까지도 높은 문화 수준을 누렸다.

 

동로마 정교 문화는 카프카스 지역의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아르메니아는 원래 언어적, 민족적으로는 페르시아와 더 가까웠지만 동로마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중동보다는 동유럽과 더 유사한 문화를 유지, 발전시킬 수 있었다. 동로마의 정교 문화는 사실상 동유럽 문화의 원조였다.

 

 

 

다민족 국가이면서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로마인이라고 불렀다. 그 영토 안에는 그리스인 외에 라틴인, 불가르인, 튀르크인, 이탈리아인, 슬라브인, 아르메니아인, 아랍인, 페르시아인, 유대인, 흑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제국이 축소됨과 동시에 이 "로마인"이라는 명칭은 "그리스인" 한정으로 부르게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된 사민정책과 주변국들과의 교류로 인해 인종 간의 혼합이 적극적으로 진행되어, 인종적으로 '순수한 그리스인', '순수한 슬라브인' 등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 지경이었다. 예를 들어 합동으로 코르푸를 공략하고 있던 동로마군과 베네치아군은 사이가 서로 화목하지 못해 자주 신경전을 벌였는데, 마침 그때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가 전선을 시찰하러 오자 베네치아군은 황제복을 입힌 흑인 노예를 배 위에 세워두는 식으로 황제를 조롱했다. 이것은 마누일 1세의 아버지 요안니스 2세를 겨냥한 행동이었는데, 어두운 색의 피부에 곱슬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던 콤니노스 왕조의 황제들 중에서도 특히 요안니스 2세는 당대인들 사이에서 '흑인 황제'라는 놀림까지 받았을 정도로 그 특징이 유독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제국이 특유의 보편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시기는 아무리 올려잡아도 콤니노스 왕조 후기부터지만 그 시기에도 그런 경향성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강렬한 그리스 민족 의식과 반서유럽 의식이 본격적으로 대두한 것은 니케아 제국 등의 지방 세력들을 중심으로 제국이 재건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의 일이었다.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인해 중앙정부가 붕괴되고 정체가 단절된 뒤로는 소위 '저항적 민족주의' 비슷한 것이 나타났다. '로마 정부는 1204년에 파괴되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워렌 트레드골드) 제국 말기에는 대내외적으로 '그리스인의 황제'로 칭해지기도 했다. 물론 고대 로마의 황제 역시 그리스인을 신민으로 삼고 있기는 했다. 동로마 황제는 멸망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로마 황제'라는 직함을 스스로 포기한 적이 없고 같은 시기의 서유럽인들 역시 동로마 황제를 '로마인들의 황제'로 지칭하기도 했다.

 

제국 내의 그리스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제국으로 편입된 것이 아닌, 고대 시절부터 이미 '제국의 신민'으로서 1600년 넘는 기간을 살아 왔다. 대부분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이 시대의 로마인들은 그리스어를 주된 언어로 쓰고 그리스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했지만, '그리스인(ελληνές, 엘리네스)'라는 단어는 근세까지도 그리스 로마 신화인 '고대 이교의 신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부정적인 어휘로 쓰였다. 12세기까지만 해도 오늘날과 같은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은 깊이 숨어 있었다. 심지어는 근대에 남동유럽의 각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도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은 오늘날처럼 혈통적·종족적으로 확실한 개념은 아니었고, '룸 밀레트'(정교회 신앙 공동체)로 대충 뭉뚱그려져 있었다.

 

보편 제국으로 발돋움할 때부터 로마는 이미 다민족 국가로 변모되어 갔고, 라틴어를 쓰는 라틴인만의 국가가 결코 아니었다. 당대 '로마인'이라는 개념은 '민족'이 아닌 '국가적인' 관점에서 나온 말이었다. 제국의 영토에 거주하고 제국 황제의 통치를 받는 것에 순응하면서 스스로 '제국의 신민'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 출신이 라틴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슬라브인이든 아랍인이든 튀르크인이든 상관없었다. 실제로도 동로마의 사회는 귀족, 사제, 관료, 군사령관, 서민 등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리스, 라틴, 슬라브,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랍, 튀르크 등 다양한 출신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로마의 명장으로 유명한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도 각각 고트계 집안과 아르메니아계 집안 출신이었고, 요안니스 2세의 총신이자 명장으로서 12세기 초 제국을 중흥시키는 데 크게 일조한 요안니스 악수스도 정교회를 믿는 튀르크인이었다.

 

13세기 말 라틴 제국의 부활을 목적으로 거세게 공격해 온 베네치아와 시칠리아에 맞서 동로마의 해군을 이끌었던 명장 리카리오(Licario)도 이름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탈리아 사람이었다. 심지어 제국의 최정점에 위치한 황제마저 그 선조가 아랍인이었다고 전해지거나(니키포로스 1세) 아르메니아 혈통의 가문들이(이라클리오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조) 차지하기도 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도 일리리쿰 속주의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일리리아인이었다. 황제를 포함한 제국 사회 전체의 이러한 다민족적 특징은 고대 로마 때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기독교도 저술가 락탄티우스(Lactantius)에 따르면 사두정치 때의 황제 갈레리우스는 본인을 '로마인'이 아닌 '다키아인'으로 여겼고, 스스로가 로마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드러내어 로마 원로원과 시민, 다시 말해서 SPQR이 경악했다고 한다. 200년 전 트라야누스가 다키아 전쟁을 통해 다키아를 속주로 삼은 일을 너희들도 느껴보라는 것처럼 로마 시민들을 가혹하게 취급한 것도 모자라, 제국의 이름마저 '로마 제국'에서 '다키아 제국'으로 바꾸는 게 어떠냐는 제안까지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갈레리우스 항목에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이는 이미 반박된 모함에 불과하다. 실제 역사속의 갈레리우스는 로마의 위기극복과 번영을 위해 충성을 다한 부제였다. 어쨌든 다민족적 보편성을 '고대 로마와는 구별되는 중세 로마만의 특징'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근대의 평가

 

동로마에 대한 폄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근대의 일인데 중세의 모든 것을 나쁘게 보았으니 중세 제국인 동로마 제국 역시 그랬을 것이다. 18세기 영국인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자신의 저서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로마 제국의 후계인 제국을 평가절하했으며, 이는 저작 내에서도 암시되듯이 냉담자 성향이 있던 기번에게 "기독교로 개종하고 서기 1~2세기의 원수정을 포기한 로마"는 그저 로마의 이름만 빌린 짝퉁이라는 관점으로 이어졌다. 애초에 로마 제국 쇠망사라는 책은 제목에서 보듯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 오현제 시대와 그 이후 시대를 비교서술하는 관점이고 이런 관점 하에서는 동로마 제국의 중흥기 역시 평가절하될 수 밖에 없다. 이런 태도는 계몽시대에 전반적인 제국 평가에 영향을 주어 동로마 제국이란 그저 "궁정의 음모와 환관이 판치던 저질국가"라는 인식이 강했다. 모 근대 저자는 "저열 제국(The Lower Empire)" 이라고도 서술했다. 그에 비하면 차라리 기번은 양반이다. 물론 당시 모든 역사가가 그렇게 여긴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그러나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서구 역사학계가 계몽사관 - 근대사관의 그늘을 벗어나, 비서유럽 문명사를 보다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서 동로마 제국의 평가도 달라졌다.

 

예를 들어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군대에는 고유의 하자가 있었으며, 그들의 승리는 우연의 결과에 불과하다(군사적 역량 자체에 본질적인 한계가 있어서 가끔 운 좋게 이겼을 뿐 대부분의 싸움에서 패배했다)고 평가했지만 20세기 초에 활동한 역사학자 찰스 오만은 기번의 이런 평가는 잘못되었다고 반박하며 오히려 패배가 우연의 결과이고 승리가 일반적인 상황이었다(특별히 불리한 조건이나 상황, 불운 등이 겹쳤을 때 가끔 패배했을 뿐, 대부분의 싸움에서는 승리를 거두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분석한 바 있다. 즉 당대까지(근세~근대)의 역사가들이 동로마 군대가 외적의 공격으로부터 무력했던 것처럼 설명하고 있는 것은 불공정하고 잘못된 평가인데, 이에 반론하기 위한 글이 많이 쓰여지고 있지만 만연한 편견을 반론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개탄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오해는 일단 기번 본인의 신념과 사조(계몽시대를 거치며 형성된 기독교 -특히 구교-에 대한 반감과 고대 로마에 대한 흠모)에 의한 폄하의 영향도 상당하다. 동로마 제국의 군사 제도를 예로 들어보자면, 동로마 제국은 단위부대당 최강의 파괴력으로 전략적 타개책이 될 수 있는 중기병이나 전문 기술이 필요한 공성전력 등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군(타그마병)와 무장 수준과 정예도는 낮지만 수가 많고 주둔 지역에 익숙한 지방군(테마병)을 동시에 운용하여 테마병을 일차적 거점 방위의 핵심으로 삼고 타그마병을 활용하여 역습-분쇄하며 대규모 전력 동원 시에는 타그마병을 핵심전력, 테마병을 보조 전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군사 제도를 운용하고 있었으며 궁기병 등 자국 내에서 수급하기 어려운 특수한 병종을 확보하면서 병력 유지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대규모의 용병을 고용하고, 건설 및 유지비용이 막대한 해군까지 운용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 동로마의 적이었던 다른 세력들의 군사제도, 즉 '중장기병 확보에는 유리하지만 총 병력 동원수에 한계가 있고 해군이나 특수한 병종의 확보에는 크게 불리한' 봉건제나(사회생산력을 소수 기병에게 쫙 몰아준다) '대부분의 성인 남성을 전력으로 확보 가능하지만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심각한 사회적 제약이 따르는' 유목정, '용병을 활용하여 군사력의 주축을 맡기다보니 어느새 용병들이 정치의 주축까지 장악하고 나라를 차지해버린' 이슬람 제국의 맘루크등과 비교해 보면 군사력 확충과 정국 안정을 상당수준까지 동시에 확보한 고도화되고 효율적인 군사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한 것. 하지만 '역사를 통해 현대 사회에 교훈을 주고자 하는' 역사작가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실증적인 차원보다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적당히 재해석된 이야기가 훨신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동로마 제국은 대체로 용병을 상당히 잘 활용하여 군사적 위기를 여러 번 극복하면서도 용병에 대한 통제력은 비교적 잘 유지할 수 있었던 편이었지만... 국민개병제가 대세가 되기 시작한 시기를 살았던 기번이나 대세가 된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나라는 스스로 지켜야지, 저 로마를 봐라. 용병에 군사력을 의존하기 시작하면서 쇠퇴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더 알기 쉽고 매력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번 당대의 학술적, 기술적 한계로 인해 발생한 오해의 영향 역시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동로마 제국의 군사력을 예로 들어 보자면, 중세 중기 이후 동로마 제국은 서방의 가톨릭 세력, 북방의 유목민 세력, 중동의 이슬람 세력이 3면에서 가해오는 공세를 버텨내면서도 수백년 이상 번영했고, 상식적으로 상당한 군사적 역량이 없었다면 이러한 3면 전쟁에서 버텨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국경이 전선인 상황에 처해있던 동로마 제국으로써는 자국의 모든 군사적 역량을 방어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고 정복을 통해 영토를 다시 확장할 여력까지는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즉, 동로마 군대가 방어전에서 승리하면 그 승리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제국의 유지일 뿐이니 역사에 그리 크게 기록되지 않는다. 반면 야르무크 전투나 만지케르트 전투처럼 지휘관의 무능이나 불운 등이 겹쳐 패배하게 되면, 이는 곧 영토의 상실과 국가적 위기로 돌아오니 역사에 중요하게 기록된다. 결국 동로마의 역사를 읽다 보면 비잔티움 군대가 중요한 전투가 있을 때마다 대부분 패배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동로마가 승리하면 제국은 별 일 없이 유지되니 중요한 전투가 아닌 것이 되고, 패배해야 중요한 전투(제국을 위기에 몰아넣은 패배)가 되는 것이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실증적인 관점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사료를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해야 하는데 기번은 이런 과학적 역사관이 형성되기 이전, 사료의 수집과 해석 역시 현대보다 극히 부족하던 시대 인물이라는 점은 참작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동로마 제국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어휘 차원에서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Byzantine'이라는 영어 단어에는 '권모술수를 쓴; 복잡한, 미로처럼 뒤얽힌, 헝클어진'이라는 형용사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속이 복잡하게 배배 꼬여 있는, 음험한 능구렁이 같은 놈들로 본 것이다. 아무튼 오랫동안 가해진 동로마 폄훼로 인해 서유럽인들은 물론이고 비유럽 세계 주민들조차 1123년이나 유지된 동로마 제국을 부정적으로 취급했으며, 동로마 제국은 오랫동안 허약하면서 배배 꼬이고, 반역이 빈발하는 이미지로서 인식되게 되었다. 현대 컴퓨터공학 논문인 비잔티움 장군 문제만 봐도 여전히 '비잔틴'이 서구 대중들에게 어떤 이미지인지는 알 수 있으니...

 

다만 이것은 동로마 제국의 대외정책이 자초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동로마 제국의 대외정책의 골자는 주위 '야만인'들을 이간질시키는 이이제이였다. 정부기구 중에는 아예 야만인 국(局)도 있었다. 이것이 동로마 입장에서는 야만인들을 무력을 쓰지 않고 사전에 제압하는 '세련된 외교'일지 몰라도 반대편 입장에서 동로마는 권모술수적이고 음험한 존재인 게 맞았다.

 

 

 

현대의 평가

 

현재 역사학계 주류는 동로마 제국을 고대 로마 전통과 새로 도입한 기독교를 잘 조화했고,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폄하할 이유가 전혀 없는 당대의 주요 국가로 본다.

 

특히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유럽과 그리스도교 문명의 강고한 방파제 노릇을 수행한 것은 동로마 제국이 역사에 남긴 큰 의의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슬람 세력에 넘어간 중동의 여러 지역들에서 기독교가 모조리 사그라들고 대부분 이슬람화된 것을 볼 때, 동로마 제국은 유럽 기독교 문명의 보호자 노릇을 한 것이다. 만일 동로마 제국이 없었다면, 할리드 이븐 왈 알리드와 같은 명장들이 이끌던 정통 칼리프 시대의 이슬람군은 아나톨리아와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어 동유럽 지역, 그리고 나아가 서유럽에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스페인 지역을 약 300년 동안 통치했던 서고트 왕국도 이슬람 제국 군대의 약탈전조차 제대로 막지 못하고 그야말로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동로마가 서유럽에 전달해준 것은 많다. 대표적으로 수도생활, 미술 양식 등이 있다. 물론 동방이 일방적으로 서방에 선물만 준 것은 아니다. 가령 반달리즘이라는 말의 유래가 된 반달족보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정복 전쟁이 이탈리아에 훨씬 파괴적이었다.

이탈리아 도시들은 5세기 초와 6세기에 서방의 다른 도시들만큼 심각한 타격을 입지 않았다. 410년에 알라릭이 로마를 약탈한 사건은 심리적으로는 중대한 충격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심각한 파괴를 초래하지는 않았다. 455년 반달족의 공격조차 그렇게 심각한 참화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가 재정복 전쟁을 벌이는 동안 심지어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대도시들 대부분은 초토화되고 인구가 격감했다.

-『하이켈하임 로마사』(김덕수 번역) 981쪽

 

또한, 동로마 제국은 동방 정교회의 총본산으로서 동유럽 문화권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장 러시아의 성 바실리 대성당만 해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유행하던 교회 건축 양식을 따랐으며,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이후 모스크바의 대공은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 칭할 만큼 동로마와 역사・종교・문화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서유럽 역시 각 지역의 수도원과 교회가 문명의 등불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고전 문화 보전 및 발전에 힘썼다. 애당초부터 발전했던 이탈리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머지 서유럽 지역도 카롤링거 르네상스 등을 거치며 문명이 발전하였다.

 

중세 이슬람 역시 동로마 문명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는데, 아랍인들은 원래는 동로마와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야만인, 즉 오랑캐라 멸시당하던 유목민들 이었으나 6~7세기의 폭발적인 확장 이후 적극적으로 동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문화를 수용하여 이 둘을 적절히 조합해 찬란한 중세 이슬람 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다.

 

베네치아부터가 동로마 제국령 도시에서 독립한 것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베네치아의 초기 건축물은 동로마 양식에서 가져온 것이 확연히 보일 정도다. 대표적인 건물이 산 마르코 대성당인데, 이쪽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하기아 소피아 다음가는 교회인 성 사도 성당을 모방해서 건축하고 동로마 양식의 황금빛 모자이크로 도배했으며 몇몇 유물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약탈해와 장식하기까지 했다.

 

 

 

역사적 의의

 

동로마 제국은 천년에 가까운 존속 기간 동안 동방에서는 아랍, 튀르크, 페르시아, 북쪽으로는 불가리아, 세르비아, 루스와 항시 대치하는 도중 때때로 동맹 아닌 동맹의 얼굴로 옆구리를 찔러 온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십자군 같은 프랑크-라틴계 세력 같은 수 많은 적들을 상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적대한 모든 세력들에게 뿌리 깊은 영향력과 유산을 남겼다.

 

동로마 제국의 북방 국경을 수백 년에 걸쳐 유린하고 간혹 콘스탄티노폴리스 대문을 두들기기도 했던 루스족과 불가리아 제국, 세르비아 같은 슬라브계 공국들과 현대 루마니아의 중세적 모태인 블라흐족, 캅카스 산맥 오지에서도 헬레니즘의 영향을 깊게 받은 조지아는 동로마를 괴롭히면서도 그 문화력과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뿌리까지 깊게 감화되어 정교회를 받아들이고, 차츰 교회 자치권을 인정받은 불가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조지아의 정교회들은 그 민족들이 400년이 넘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으면서도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하게 된 원동력이자 민족적 자의식의 근간이 되었다. 또한 이 나라들은 동로마 제국에서 파견한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성인들이 고안한 키릴 문자를 문자로 삼았으며, 동로마 제국이 쇠락해 가고 결국 멸망하자 그 직접적인 후계자를 자처하며 끝끝내 제정 러시아 시절까지 가서는 러시아 제국의 차르는 정교회의 세속적 수호자라는 동로마 제국의 이데올로기까지 그대로 답습하여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망하는 날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을 국가적 사명으로 천명했다.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도 제국을 공격할 때는 공격하더라도 이들의 문화적 광휘, 황제적 권위, 제도의 세련됨에 깊게 감화받아 로마 황제의 계승을 천명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와 아토스 산의 수도회 조직 또한 유지하며 건축, 통치 기관, 국가적 이데올로기 등 많은 면에서 동로마 제국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수용, 발전시켰고, 셀리미예 모스크,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등이 상징하는 오스만 제국 특유의 건축 양식을 남겼다.

 

동로마 제국의 쇠망에 치명적인 기여를 한 베네치아 공화국도 그 기원은 상술했다시피 동로마 제국의 속주였고, 통수를 칠 때는 치더라도 공화국 내부적으로도 산 마르코 대성당의 모습이 보여주듯 동로마 제국의 문화적, 예술적 찬란함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 밖에 12세기 동로마 제국과 아치 에너미였던 시칠리아 왕국 역시 세련된 비잔틴 양식의 성당과 모자이크들을 남기는 등, 문화적으로는 완연히 동로마 영향권인 모습을 보였다.

 

동유럽, 이슬람 세계의 관점에서 이들이 더 오래 보았고,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 문명사적 관점에서 받아먹은 빚이 많은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서로마보다 천 년을 더 오래 간 이 동로마라고 할 수도 있다. 특히 정교회에서 동로마의 유산은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역사적 구심점이자 문명과 종교의 어머니였고, 이후로도 수백 년에 걸쳐 정교회권 지도자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을 천명하게 만든 거대한 역사적 지향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의 인식

 

과거 한국에서는 로마 제국 쇠망사나 로마인 이야기 같은 편향적이고 사료로서는 가치가 없는 서적들을 통해서 동로마 제국을 접하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역사에 대해서 좀 공부한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은 동로마 제국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로 원문 번역이 쉬워지고 다양한 자료를 접할 수 있게 된 요즘 들어선 동로마에 대한 여러 가지 긍정적 평가와 이슬람의 유럽 침공 저지, 마지막 황제였던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장렬한 최후 등이 재조명되고 다양해진 자료들을 통해 로마 제국 쇠망사나 로마인 이야기가 사료로서 가치가 없다는 사실이 조명되면서 동로마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이나마 바뀌고 있다.

 

특히 역덕들 사이에서는 초메이저 나라로 통하는데 당장 한국과 교류가 없는, 15세기에 멸망한 나라이면서도, 비슷한 급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문서량이 많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만큼 동로마 제국에 단순한 역사적 접근을 넘어 '애정'을 가진 역덕들이 적지 않다.

 

 

 

 

 

근현대 그리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고 로마 제국은 멸망하였으나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로마의 백성들은 여전히 그곳에 살았다. 메흐메트 2세는 전쟁으로 피난 간 그리스인의 복귀를 장려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20세기 초까지도 그리스인 인구가 도시 전체의 절반에 달하는 명실상부한 국제도시로 자리잡았다.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전해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함락 당시 성 소피아 성당에는 점령군이 물러나길 바라는 여성들과 성직자들이 성찬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튀르크 군대가 성당 안에 들어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성직자들과 성찬예배에 참례하던 신자들이 모두 벽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전사' 했다고는 하지만 정작 시체는 확실히 발견되지 않은 콘스탄티노스 11세처럼 그들도 죽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다시 그리스도인의 도시가 되면 이들이 모두 돌아와서 성찬예배를 마저 끝내리라는 전설이 남아있다. 그리스인, 즉 동로마인들이 정통 로마 치하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회복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잘 드러내 주는 전설이다. 그리스인들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집착은 생각 이상으로 강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아나톨리아 지방에 거주하던 그리스계 주민들의 대부분은 신생 독립국인 그리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무슬림의 지배를 받을지언정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계속 남기를 원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그리스인들이 터키를 침공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9세기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한 그리스 왕국은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정통 후계자라고 생각했고, "발칸 반도 남쪽 끝부분의 영토로 만족하지 말고 '그리스인' 이 살고 있는 지방 모두를 우리 영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 이를 '대그리스주의', 또는 당시 그리스인이 붙인 이름을 따라 '위대한 이상(메갈리 이데아, Μεγάλη Ιδέα)'이라고 한다. 문제는 '그리스인'이냐 아니냐의 기준을 '역사적, 인종적으로 그리스와 관련된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로 잡은 것이다. 이에 따르자면 오늘날 그리스는 물론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이 존재하는 소아시아 해안은 물론이며 그리스인이 숨어살던 카파도키아 고원과 그리스계 폰투스인이 사는 폰투스까지 모조리 정복해야 한다. 즉 발칸 반도 남단 전역과 아나톨리아 반도 전역을 정복해야 하는 셈이다. 바로 아래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터키 대국민회의와 전쟁을 벌여 아나톨리아를 탈취하려 했던 것도, 욕심이라면 욕심이었지만 그 이전에 이러한 민족주의적 사상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터키로서는 지극히 곤란한 것이었는데, 대그리스주의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물론 멀리는 트레비존드와 안티오키아까지 점령해야 하는 것으로 이는 튀르크인의 거주지역과 완전히 겹치는 일이었다.

 

메갈리 이데아를 국시로 삼고 그리스 왕국은 1832년 독립 이후 이오니아 제도, 테살리아, 남부 마케도니아, 크레타, 동부 에게해 제도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조금씩 빼앗았다. 다만 그리스 왕국이 홀로 차지한 게 아니라 이오니아 제도의 경우에는 오스만으로부터 뺏어온 것이 아닌 1861년 왕실끼리 사돈 관계였던 영국이 선물한 영토이다. 그리고 차지한 땅들도 그리스 홀로 이긴 게 아니라 강대국들과 연합하여 빼앗아 온걸 차지한 거였다. 그리스 독립도 거저해준게 아니라 그리스에 영국과 여러 강대국이 주둔하고 여러 항만시설 이용권을 거저로 내주고 온갖 무역 특혜에서 여러 모로 내정간섭을 받았던 터였다. 그리스 홀로 오스만에게 덤비다가 하필이면 크림전쟁으로 인하여 오스만과 동맹을 맺던 영국과 프랑스가 분노해 실컷 두들겨 맞고 오히려 이들에게 가진 땅을 내놓으며 온갖 배상금을 뜯긴 적도 있었다. 반대로 그리스 홀로 쳐들어가다가 오스만에게 두들겨 맞았던 적도 많았다. 1차 발칸 전쟁 때는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등등과 손잡고 오스만을 뭉개면서 비로소 크레타와 남부 마케도니아 등등을 차지할 수 있었다. 거꾸로 2차 발칸 전쟁 때는 오스만과 그리스가 손잡고 같이 불가리아를 작살내면서 불가리아가 1차 발칸 전쟁에서 차지했던 땅을 서로 빼앗아갔다.

 

하지만 2년도 안가 그리스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동맹국에 가담한 오스만 제국에 맞서 연합군에 가담했고 아드리아노폴리스(에디르네)를 위시로 한 유럽 터키 전역과 이즈미르를 비롯한 일부 아나톨리아의 서부 지역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리스 홀로 소아시아 해안을 넘어가다 못해 아나톨리아 내륙까지 점령하려다가, 신생 터키 공화국의 지도자 케말 아타튀르크가 오스만군의 잔해를 급히 긁어 모아 구성한 병력에 격파당하고 말았다.(그리스-터키 전쟁) 그리하여 그리스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둘러싼 동부 트라키아는 그리스가 점령했지만, 정작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연합군(주로 영국군)이 주둔해서 그리스군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여 회복하지도 못한 상황이었기에, 그리스의 꿈이라는 건 목표치도 채우지 못한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그리스-터키 전쟁 이후 1923년에, 터키 땅에 살고 있는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땅으로, 그리스 땅에 살고 있는 터키인들은 터키 땅으로 이주한다는 협약(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이 이루어졌기에 오늘날에는 사태가 완전히 해결된 상태다. 인구 교환 이후에도 이스탄불 근교에 위치한 섬들에는 여전히 터키 국적을 가진 그리스인들이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면서 살고 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애틋한 감정은 타소스 불메티스 감독의 <터치 오브 스파이스> - 그리스어 타이틀은 'Πολιτίκη κουζίνα'(도시의 요리) - 에도 잘 나타나있다. 그들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교도들에게 점령되었더라도 여전히 로마였으며 '회복해야 할' 땅이었다.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는 새해를 맞아 캐롤을 부르는 사람들의 노래 가사가 나오는데 내용이 인상적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성 바실리오의 도움으로 아홉 아들과 아홉 딸을 낳으시길. 딸들은 저마다 실을 잣고 천을 짜는 살림꾼이 되게 하시고, 아들들은 저마다 훌륭한 병사가 되어 제왕들의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게 하소서."

 

현대 그리스에서는 'Βυζαντινή Αυτοκρατορία(비잔디니 아프토크라토리아; 비잔티움 제국)' 나 'Ανατολική Ρωμαϊκή Αυτοκρατορία(아나톨리키 로마이키 아프토크라토리아; 동로마 제국)' 같은 표현이 쓰인다. 그러나 로마와 연관이 되는 동로마 제국조차도 잘 안 쓰이고, 그냥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해놓은 걸 볼 수 있다. 위의 '바실리아 톤 로메온'이라는 말은 그냥 '로마 제국' 정도의 뜻이라서 현대 그리스 입장에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비잔티움 제국을 그냥 '로마 제국'으로 칭해 버리면 그리스인들은 헬레니즘 시대 이후 로마에 합병되었다가, 오스만 제국에서 벗어나기 이전까지 무려 2천 년 가까이 자기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는 민족이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인 것이다. 현대 그리스의 공식 입장은 대체로 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 계승성을 강조한다. 역사적으로도 기원전 146년부터 1830년까지 2천년 가까이 동안 현대 그리스에 해당하는 권역의 지배 세력은 로마-비잔티움, 남슬라브계 세력, 4차 십자군으로 들어온 서유럽계 세력 및 그 후신, 오스만 이렇게가 끝이다. 또한 그리스 독립운동시기 정체성으로 부르짖은 헬라스의 의미가 중세 시대에서는 이교도, 정확히는 고대 그리스-로마 다신교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스 입장에선 그냥 답이 없다.

 

동로마 제국과 근현대 그리스의 관계는 밀접하다. 공화정기나 제정 초기까지의 그리스 본토나, 넓게 보아 소아시아 서부와 마케도니아 등을 포함하는 에게 해 연안의 확실한 그리스권은 로마 본국 이탈리아의 라틴인이라는 외세 내지는 외래종족의 통치를 받았던 점이 확실하지만, 가장 많이 땡겨잡으면 카라칼라의 212년 시민권 확산 이후, 내지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280년대 사두정치 및 '수도와 궁정을 로마 시와 이탈리아 밖에도 둘 수 있다는 개념'의 첫 도입 이후, 혹은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완성 이후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동로마 중후기에는 (비단 4차 십자군에 의한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다종족적 제국이라기보다는 점점 민족국가에 가까워졌던 점도 고려해야 한다. 10세기부터는 기록에 '로마인'이 마치 '아르메니아인'처럼 종족개념으로 나오기 시작하며, 11세기 후반의 저작물 중 하나에는 영어로 번역하면 'a Roman by birth', 즉 '출생에 의한 로마인'이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근현대적 의미의 국적 개념이 없던 중세 시절, 저 구절은 종족적인 의미의 로마인, 즉 '로마족'(Roman ethnicity)이라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

 

이러다가 그리스인들이 로마라는 이름에서 탈피한 것의 효시는 그리스 독립전쟁이라고 한다. 그리스가 독립한 과정이 처음에는 자력으로 독립하려다가 오스만으로부터 반독립 상태였던 이집트의 메흐메드 알리가 보낸 군대에게 거의 진압되었다가 결국 서유럽의 힘을 빌려서 독립한 것이기 때문에 그 대가로 서유럽계 왕족을 왕으로 세워야 했다. 그리고 당시에 이미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다지만 로마라는 국호로 독립하기에는 서유럽과 가톨릭 교회를 자극할 우려가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여전히 오스만의 수도였고 로마 시절부터 면면히 이어오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도 오스만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차마 로마라는 국호를 쓰기 어려웠다. 영어 위키백과 Roman people(로마인)에도 로마인(Romioi)이라는 말은 적극적으로 독립을 위해 싸우는 이들보다는 여전히 오스만 치하에 있는 이들을 더 연상케 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오스만 치하에서 게으른 노예로 있던 로마인과 대비되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용감한 자유의 투사인 그리스인(Hellene) 상이 형성되었다는 대목이 있다. 물론 그리스인들이 자국(민)에 대해서 로마(인)이라고 부르는 용례는, 한국인들이 서울을 한양, 한국을 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돌려부르거나 혹은 문학적인 용도로 쓰이는 옛 이름으로는 여전히 간혹 쓰인다고 한다.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서적으로는 'The Byzantine Hellene', 'Romanland', 'Being Byzantine', 'Hellenism in Byzantium', 'Byzantium and the Modern Greek Identity' 등이 있다.

 

 

 

러시아

 

훗날 제국이 멸망한 뒤 러시아에서 유일한 정교회 국가임을 근거로 제3의 로마를 주장했고, 이는 오스만이나 폴란드-리투아니아 등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긴 하나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만 치하 총대주교좌를 비롯해서 당대 외교적으로 인정받기는 했다.

 

시간이 흘러 국력이 강성해져 이반 4세 때 차르를 칭했고 표트르 1세 때부터 임페라토르 칭호를 사용하면서 완전한 황제국으로 대접받게 되었고 황제국이 된 러시아는 부동항을 확보하고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하여 지중해로 진출하며 동시에 이교도 튀르크인의 지배 하에 신음하는 정교회 신자들을 구원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해방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수십 차례의 전쟁을 벌였다.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해방하여 진정한 로마가 되고자 한 생각은 예카테리나 2세의 일명 '그리스 계획'에서 잘 나타나는데 새로이 정복한 옛 크림 칸국 영토에 도시를 건설하며 그 도시들에 그리스식 이름을 붙인 것이 대표적이다. 오데사, 헤르손, 세바스토폴, 심페로폴, 스타브로폴 등이 바로 그 예시다.

 

러시아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 했을 때, 서방연합국 (프랑스, 영국)과 함께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이스탄불을 러시아가 갖는다"는 밀약을 맺었다. 이는 동방 정교회의 맹주를 자처하던 러시아 제국에게 동로마 제국을 승계한다는 명분을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참패를 거듭하다가 국내에 혁명이 두 번이나 벌어져 볼셰비키가 집권하면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동맹국과 단독강화를 맺고 전쟁에서 빠졌고, 그 다음은 국내에서 적백내전이 벌어져 이스탄불에 신경쓸 여력이 없어졌다. 오히려 1920-30년대 신생 튀르키예와 소련은 사이가 매우 좋았다. 이는 소련군이 중앙아시아를 병탄하면서 아타튀르크의 정적이 될 수 있는 舊 오스만에 대한 충성파 군벌들을 토벌해 주었기 때문도 있지만 튀르키예 독립 전쟁 당시 튀르키예군을 소련이 지원해 주고 이후 튀르키예 공화국을 통치한 공화인민당이 사회주의, 세속주의 성향이었던 것이 컸다. 튀르키예와 소련의 사이가 멀어진 것은 2차 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고, 튀르키예가 소련의 남하에 압박감을 가져서 친미 성향으로 기운 이후이다. 

 

한편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수립된 소비에트 연방은 당연히 이 로마와의 연관성을 부정하였다. 그런데 정작 로마 특유의 보편 제국 특성과 패권주의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시기는 이 소비에트 연방 시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와의 연관을 부정했던 소련이야말로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로마스러운 시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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