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로마제국 분열
테오도시우스, 두 아들에게 동서로마 물려줘
-군인황제시대(235년~284년)-로마의 혼란기
-콘스탄티누스 황제 집권(306년~337년)
크리스트교 공인(313년)
일요일 휴업령(321년)
크리스트교 공인 이후 국가가 보호(322년)
비잔티움을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인 새 로마로 선포(330년)
-크리스트교, 로마의 국교화(392년)
- 동서로마 제국 분열(410년)
- 서로마제국 멸망(476년)
동서 로마 제국의 분열은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사망 후, 그의 아들들에게 제국을 나누어 통치하도록 하면서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제국의 규모가 커지고, 통치 효율성이 떨어지면서 발생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며,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인해 476년에 멸망하고, 동로마제국은 비잔틴 제국으로 이어졌다.
주요 원인
제국의 규모 확대 및 통치력 약화:
로마 제국이 점차적으로 넓어지면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지역 간의 차이가 심화
경제적 어려움:
과도한 세금 부담, 중간 계층의 몰락, 산업 파탄 등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이 심화
군사적 위협:
게르만족의 침입과 이로 인한 혼란은 제국의 안정을 위협
내부 분열:
황제들의 권력 다툼과 정치적 불안정은 제국의 분열을 가속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사망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들에게 제국을 나누어 통치하도록 하면서 동서로마제국으로 공식적으로 분열
서로마제국의 멸망: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인해 476년에 멸망하고, 동로마제국은 비잔틴 제국으로 이어졌다.
1) 카이사르, 공화정 종식…황제시대 서막
①갈리아 정복 등으로 로마의 영토를 크게 넓힌 카이사르(BC100년 7월12일~BC44년 3월15일)가 암살당하면서 로마의 공화정은 사실상 끝나고 황제시대가 막을 연다. 역사가들은 사실상 카이사르부터 황제체제가 시작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②후계자 옥타비아누스는 스스로를 황제라고 호칭하지 않았지만, ‘제일시민(프린켑스)’으로 자처했다. 원로원이 헌정한 ‘존엄한자(Augustus)’라는 칭호는 교묘한 독재정치의 산물이었다.
③이후 혼란을 거쳐 5현제시대에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로마제국은 이후 군인황제시대(235년~284년)를 맞아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실상은 5현제시대에 안정을 되찾았다기 보다는 제국 내부의 모순(이민족의 침입, 노예공급 감소)을 잠시 억누른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 후대 역사가들의 평가다.
2)콘스탄티누스, 수도 이전…분열 단초
④군인황제시대 들어 이미 로마는 각 지역에서 군벌화한 장군들이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하며 한때 4개의 로마제국이 잠깐 등장할 정도로 혼란기를 맞는다.
⑤영토는 넓고, 각 지역의 군사령관은 독립세력화하고, 군의 주요 구성원은 이미 게르만 용병으로 채워지면서 로마는 수습불능에 이른다.
⑥이같은 로마의 혼란기에 등장한 황제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집권 306년~337년)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당시 로마의 분열과 부패를 피해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천도(330년)한다. 이 비잔티움이, 훗날 황제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이다.
3)로마와 콘스탄티노플 2명의 교황
⑦이 당시 크리스트교는 5개의 교구를 정립하고, 그 중 로마교구가 중심지 역할을 한다.[로마,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⑧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천도하면서, 종교적 정통성은 로마가, 정치적 정통성은 콘스탄티노플이 나눠 갖는 크리스트교의 분열이 서서히 싹튼다. 즉, 로마에도 교황이, 콘스탄티노플에도 교황이 있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⑨이미 거대한 제국은 동서로 쪼개져, 서로마를 통치하던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삼촌이기도 한 동로마의 황제 발렌스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378년)에서 전사하자, 유능한 장군 테오도시우스를 동로마의 황제로 추대한다.
⑩이민족과의 전투, 내분 등을 수습한 테오도시우스는 동서로마를 모두 통치(서로마의 그라티아누스는 383년 암살)하지만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동로마)와 호노리우스(서로마)에게 제국을 나누어 물려준다(395년 1월). 이때를 동로마와 서로마의 분열로 본다.
4)콘스탄티누스 사후, 동서 분열
⑪콘스탄티누스 황제 사후, 로마측이 콘스탄티노플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경우가 빈번해지면서 제국은 동서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다가 결국 410년 동로마(비잔틴 제국)와 서로마로 제국은 분열된다.
⑫분열 직후인 476년 게르만족 용병대장인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제국을 무너뜨리면서, 서로마제국은 사라진다. 강대했던 서로마제국이 사라지면서 수많은 군소국가가 성립하는데, 이미 크리스트교가 급속히 전파된 후라, 크리스트교의 권위는 급속히 올라간다.
이 와중에 크리스트교의 수장인 교황의 권위마저 높아지면서 카놋사의 굴욕(1077년)같은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⑬비록 동서로마로 갈라졌고, 서로마는 멸망했지만, 크리스트교라는 동일체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결국 성상파괴령(8~9세기)을 두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서로마는 가톨릭, 동로마는 동방정교로 각각 발전하면서 종교적으로도 결별하게 된다.
5) 로마 카톨릭과 동방정교회의 분열
⑭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은 당시에도 제2의 로마라고 불렀다. 그랬던 것이 비잔틴제국의 멸망(1453년)으로, 동방정교의 정통을 러시아 정교회가 지키면서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로 불리게 된다.
이후 무주공산으로 군소국가들이 난립하던 서로마제국의 옛 영토에 강력한 왕이 등장한다.
⑮현대 유럽의 기틀을 닦은 셈인 카를 대제가 바로 그였다. 비잔틴제국의 위협 속에서 전전긍긍하던 로마교황 레오3세는 카를대제에게 서로마제국(800년, 정식명칭=도이치민족의 신성로마제국 Das Heilige Romische Reich des Deutschen Volks)의 관을 씌워주며, 로마교회의 안전을 부탁한다.
비록 동서로 갈렸지만, 크리스트교라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 있던 동로마(비잔틴 제국)와 서로마는 이 사건을 계기로 독자적인 발전을 시작한다.
크리스트교는 로마교황의 로마가톨릭과 비잔틴제국 황제의 동방정교로 완전히 결별(1054년), 새로운 발전을 하게 된다.
395년, 로마제국의 분할통치가 분열로 이어지다.
B.C. 753년, 도시국가에서 시작된 로마는 왕정(B.C.753-B.C.509)과 공화정(B.C.510-B.C.27)을 통해 당시 지중해의 패권을 쥐고 있던 카르타고(B.C.146)를 손에 넣고 지중해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로마공화정으로는 지중해 밖으로 넓혀진 새로운 영토를 관리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이에 로마 원로원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군 통수권과 권력을 가진 독재관(Dictator)과 군사령관의 지위를 주어 이 문제를 해결하려하였으나 그가 암살당하므로 진전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암살사건은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황제)시대로 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 로마 원로원은 이어진 내전에서 승리한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주었고, 그 칭호는 그가 로마 초대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지렛대 역할을 했다. 이후 로마 정치체제는 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제정(황제)시대가 존속되었다.
로마제국의 분열의 단초는 가장 강력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Constantinus 재위 306-337)가 로마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는 내부적으로 분열을 막고, 외부적으로 유럽으로 진출해 오려는 페르시아와 이슬람의 세력을 막을 수 있는 요충지로 판단하여 수도를 옮겼지만 종교적인 정통성까지는 옮겨가지 못했다. 오히려 종교적인 정통성은 로마에 있었고, 콘스탄티노플은 정치적인 중심이 되었다. 이후 로마교회와 비잔티움 황제들 간에 서로 종교와 정치적인 입장을 달리하면서 분열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재위 379-395)때는 넓혀진 땅을 혼자서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로마제국을 동서로 분할하여 자신의 두 아들에게 맡겼다. 그것은 곧 동서로마가 분리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무엇보다 서로마제국은 동로마에 비해 허약한 경제와 내전으로 인해 피폐해진 군대로 동로마보다 넓은 국경을 방위해야만 하는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찍이 패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동서 로마제국을 함께 통치한 마지막 황제로, 395년 그가 죽은 후 동서 로마제국은 완전히 분열되어 다시 통일되지 못했다. 분할 통치는 분열로 이어지고 말았다.
476년, 포용정책으로 지탱한 서로마, 포용정책으로 멸망하다.
“지성은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은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은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은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진 로마가 어떻게 역사의 중심이 될 수 있었을까?” “로마인 이야기” 15권을 집필한 일본의 시오노 나나미가 그의 책 1권 서문에서 던진 질문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질문에 대하여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가 찾은 해답은 “로마의 개방성(포용성)”이라고 했다. 로마제국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1737-1794)은 이미 답을 내놓은 상태다. “로마는 노예나 이방인, 심지어 적까지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든 개방성(포용성)이 로마제국을 만들게 했고 또한 개방성이 제국을 멸망하게도 했다.”
476년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재위 475-476)는 게르만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한다. 서로마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가 그의 아들에게 동서 로마제국을 분리 통치하게 한 지 겨우 81년 밖에 되지 않았을 때다.
세계사에서 서로마제국의 멸망의 원인은 훈족(흉노적)의 침입과 게르만 민족의 침입(대이동)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413-426)에 “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이란 책을 집필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동일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그가 “신의 도성”을 집필한 배경은 410년 로마의 함락으로부터 시작된다. 410년 8월24일, 고트족이 800여 년 동안 한 번도 공격받지 않았던 로마를 단 삼일 만에 함락시켰을 때에 그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서로마제국의 멸망에 대해 가장 예민한 사람은 바로 이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제국의 멸망을 제국의 국교였던 기독교에서 찾았다. 그들은 제국이 가장 무력해진 시기가 기독교가 가장 번성한 시기였다는 점을 주목했다. 한편 기독교인들은 이교도들의 비난에 대해 변명하기에 바빴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기독교와 이교도들 모두에게 바른 해답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는 로마함락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는 이교도들과 그 비난이 무서워 변명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로마가 멸망하게 된 원인은 로마의 부도덕성과 무 신앙에서 왔지만 오직 하나님의 도성만이 영원함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로마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미덕을 발휘할 때 남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1453년, 1000년의 유산을 남기고 동로마제국이 멸망하다.
독일의 법학자 예링(1818-1892)은 그의 저서 “로마법의 정신” 첫머리에서 로마가 천년이란 긴 세월동안 세계를 지배한 사실에 대하여 이같이 기록하고 있다. “로마는 세 번 세계를 통일하였다. 첫 번째는 무력에 의하여 국가를 통일하였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교로써 교회를 통일하였고, 세 번째는 로마법으로 세계를 통일하였다.” 그런데 그 천년의 긴 세월도 종말을 고하는 날이 왔다. 바로 1453년 5월29일, 오스만제국이 비잔티움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였다. 오스만 튀르크의 제7대 술탄 메흐메트 2세(1432-1481)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이스탄불이라 명명했다. 비잔티움제국은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하고 동서로마가 분할된 이후부터 1453년까지 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약 90여명의 황제와 125명에 이르는 대주교가 지배했다.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에게 점령당해 느린 속도로 문명화되는 동안에 비잔티움제국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오롯이 보존하고 발전시켰다. 그 결과 비잔티움제국은 대체로 로마제국의 고전적 전통을 따랐고, 정치제도는 로마의 이념과 철학을 이어받았고 종교적으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았다. 예술에서는 비잔틴 양식을 확립하였으며 언어와 문화와 생활은 그리스의 전통을 많이 따랐다.
비잔티움제국은 두 번의 큰 위기가 있었다. 훈족과 게르만족의 침입과, 기독교의 진리를 훼손하는 이단과 싸움이었다. 특히 이단으로부터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해 니케아공회의(325), 칼케돈공회의(451)를 통해서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확립시켰다. 무엇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수도를 천도한 것에서 볼 수 있었듯이 콘스탄티노플은 군사적으로 서유럽의 방파제 역할을 감당해 왔다. 즉 비잔티움제국의 멸망은 서유럽입장에서 볼 때에 방파제가 무느진 것과 다름없었다. 또한 비잔티움제국은 수백 년 동안 그리스의 철학과 문화, 로마의 법과 문명 그리고 기독교의 전통을 다듬고 보존해서 유럽에 전해 주었다. 그럼에도 유럽은 제4차 십자군원정(1202-1204)을 결성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약탈과 패륜을 저질렀다. 참으로 역사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유럽은 한동안 동로마제국으로부터 불신과 이슬람 세력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다.
비잔티움과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은 로마의 법과 그리스의 철학, 기독교가 완벽하게 결실한 곳이라 할 만하다. 로마교회와 개신교회, 희랍정교회와 이슬람교의 네 종교는 모두 비잔티움과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이스탄불에서 뿌리를 두고 각기 지중해로 뻗어 나갔다. 로마가 인류역사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랑케(1795-1886)의 말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는 것 같다. “고대 모든 역사가 로마라는 호수로 흘러 들어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의 호수로부터 다시 흘러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