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국어/고전문학

만보, 晩步(늦을 녘에 거닐다), 이황(李滉)

Jobs9 2021. 4. 27.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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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보, 晩步(늦을 녘에 거닐다)
          이 황(李滉)

苦忘亂抽書(고망난추서) 잊음 많아 이 책 저 책 뽑아 놓고서
散漫還復整(산만환복정) 흩어진 걸 도로 다 정리하자니,
曜靈忽西頹(요령홀서퇴) 해가 문득 서으로 기울어지고,
江光搖林影(강광요림영) 가람엔 숲 그림자 흔들리누나. 
扶筇下中庭(부공하중정) 막대 짚고 뜨락으로 내려를 가서
嬌首望雲嶺(교수망운령) 고개 들고 구름재를 바라다보니,
漠漠炊烟生(막막취연생) 아득아득 밥 짓는 연기가 일고,
蕭蕭原野冷(소소원야랭) 으스스 산과 벌은 싸늘하구나.
田家近秋穫(전가근추확) 농삿집 가을걷이 가까워지니,
喜色動臼井(희색동구정) 방앗간 우물터에 기쁜 빛 돌아.
鴉還天機熟(아환천기숙) 갈가마귀 날아드니 절기 익었고,
鷺立風標迵(노입풍표동) 해오라기 우뚝 서니 모습 훤칠해.
我生獨何爲(아생독하위) 내 인생은 홀로 무얼 하는 건지 원.
宿願久相梗(숙원구상경) 숙원이 오래도록 풀리질 않네.
無人語此懷(무인어차회) 이 회포를 뉘에게 얘기할거나.
搖琴彈夜靜(요금탄야정) 거문고만 둥둥 탄다, 고요한 밤에.
                               <신호열(辛鎬烈) 옮김>


  작품 해설 
 이 시의 시간적 배경을 먼저 떠올려 보자. 해는 지고 멀리 저녁이 오고 있다. 하루의 끝을 알리는 시간이다. 그리고 눈을 멀리 들로 던지니 가을걷이가 가까워져 무르익은 들녘이 보인다. 한 해의 끝을 알리는 시간이다. 그래서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또, 방앗간이며 우물터에서는 사람들이 수확의 기쁨에 들떠 있다. 모든 것이 성취의 기쁨을 맛보는 시간이다. 밥 짓는 연기며 방앗간 우물터의 기쁜 빛이 그런 뜻을 함축한다. 그래서 날아드는 갈가마귀며 우뚝 선 해오라기까지도 다 기쁨과 자랑에 차 있다.

 이런 가운데 나만 오로지 이룬 것이 없다. 책을 뽑아 놓고 흩어진 걸 정리하면서 그 공허함이 새삼 뼈에 사무친다. 숙원을 가진 지 오래지만, 하루 일이나 농사일 같은 소득이 없다. 그 말을 누구에게 할 수 있으랴, 거문고만 탈뿐이다. 이처럼 바라보는 사물과 대비되는 나를 발견하면서 숙연한 고요에 잠기는 정서가 깃들여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문학이 대상으로부터 ‘나’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공부한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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