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장 전
박지원
줄거리
송욱, 조탑타, 장덕홍 등 세 사람이 광통교에 모여 친구를 사귀는 것에 대해 서로 이야기 하게 되었다. 조탑타와 장덕홍이 교도에 대해 이야기하자 송욱은 그것이 교태와 교면은 될 지언정 교도는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군자의 교우에 세 가지가 있고 그 처리 방법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하며, 자신은 그 가운데 한 가지도 못하기에 나이 삼십이 되도록 친구가 없다고 하였다. 송욱의 이야기를 장덕홍은 알아듣자 삼교오수를 일러 주었다. 그러나 조탑타가 이해하지 못하므로 장덕홍이 자세히 설명해 주며 삼십여 년을 국내를 두루 돌아 다녔으나 친구가 없는 것은 화와 원망을 풀어주는데는 우는 것이 신속하나 자신은 울지도 못하고 울어도 눈물을 흘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장덕홍의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조탑타가 충의로써 사귈 것을 제의하자 장덕홍은 그의 낯에 침을 뱉으며 말하기를 부자가 인색하다는 말을 듣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주기를 바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며 친한 사람은 아낄 것이 없기 때문에 충을 실천하는 어려움을 사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의는 빈천한 자들이 하는 것이며 부귀한 자는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조탑타는 친구가 없을지라도 군자의 교도는 하지 않겠다고 하며 세 사람은 의관을 찢고 구면봉발(垢面蓬髮)에 새끼를 허리에 띠고 시중(市中)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 작품은 당시 군자의 미명을 헛되이 향유한 문인 학자군이 교도가 극도로 부패하여 있음을 통탄한 것이다. 이는 조선의 당쟁이 악화하여짐에 선비의 교도가 다만 명리에 휩쓸려 온갖 아첨과 고자질을 일삼는 진상이 저 시정 하류배의 행위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등장인물
송 욱 : 지식과 이론이 우수한 존재며 은어에 능통한 천재적 인물이고 나이는 30세이다.
조탑타 : 송욱의 말을 해득하지 못하는 둔한 인물이다. 순진무구한 개성을 가져 끝까지 다른 2인과 함께 행동한다.
장덕홍 : 송욱의 은어를 재빨리 해득하였고 시문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 당시 저속한 무리는 아님을 짐작 할 수 있다. 특히 <광가어시> 라는 어구로 보아 노래를 잘 부른 것 같다.
본문읽기
“말 거간꾼과 집 거간꾼 따위들이 손바닥을 치면서 옛날 관중, 소진을 흉내내어 닭, 개, 말, 소 등의 피를 마시며 맹세한다"더니 과연 그렇다.
“이별이 다가온다"는 말을 듣자마자 가락지를 팽개치고 수건을 찢어 버리며, 등불을 등진 채 바람벽을 향하여 머리를 숙이고 슬픈 목소리를 머금는 여인이야말로 믿음직스러운 첩이었다. 또한 간을 도할 듯이 쓸개를 녹일 듯이, 손을 마주 잡고 마음을 내 보이는 자야말로 믿음직스러운 벗이었다.
그러나 콧마루에 부채를 가친 채 양쪽 눈을 깜박거리는 것이 장쾌(거간꾼)의 요술이다. 위험한 말로 움직여 보기도 하거니와 아름다운 말로 핥아 주기도 하고, 그가 꺼리는 것을 꼬집어 내기도 하며, 강한 놈에게는 위협으로, 약한 놈에게는 억압으로, 같은 것들끼리는 흩어지게 하고, 헤어져 있는 것들은 합치게 해 주는 솜씨는 패자나 변사(辯士)들이 마음대로 열고 닫는 임기 응변이기도 하다.
옛날에 심장병을 앓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아내에게 시켜 약을 달이게 하였는데, 많아지기도 하고 적어지기도 해서 그 분량이 적당하지 않았다. 그는 화가 나서 첩에게 달이도록 시켰다. 첩이 달이는 약은 많고 적음이 한결같았다. 그는 첩이 잘한다고 여겨서, 창구멍을 뚫고 엿보았다. 그랬더니 그 첩은 약물이 많아지면 땅바닥에 내버리고, 적어지면 물을 더 탔다. 이것이 바로 약물의 분량을 적당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니 귀에다 입을 대고 속삭이는 소리는 지극히 솔직한 말이 아니다. “비밀을 누설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말도 깊은 사람은 아니다. 정이 얕고 깊은 것을 나타내려고 애쓰는 자도 참다운 벗은 아니다.
송욱, 조탑타, 장덕홍 세 사람이 광통교 위에서 벗 사귀는 방법을 서로 논하였다. 탑타가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아침나절에 바가지를 두드리면서 밥을 빌러 가다가 어떤 가겟집에 들렀거든. 때마침 가게 이층에 올라가서 옷감을 흥정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옷감을 골라서 혀로 핥아 보고는, 공중을 쳐다보며 햇빛에다 비추어서 그 두터운 정도를 따져 보더군. 그 옷감의 값은 그들의 입에 달렸는데, 서로 먼저 부르라고 사양하더라구. 얼마 지나자 두 사람 다 옷감에 대한 일은 잊어버렸어. 옷감 가게 주인은 갑자기 먼 산을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구름 위로 치솟더군. 그 사람도 뒷짐을 지고 어정거리며 벽 위에 걸린 그림을 보더라구."
송옥이
“네가 벗 사귀는 도리는 그럴 듯하지만, 참된 도리는 그게 아냐."
하자, 덕홍도
“허수아비도 포장을 드리울 수 있으니, 그것을 당기는 노끈이 있기 때문이지."
라고 말하였다. 송욱이 또 이렇게 말하였다.
“넌 얼굴로 사귀는 것만 알고, 참된 방법은 알지 못했구나. 대개 군자의 벗 사귐이 세 가지고, 그 방법은 다섯 가지거든. 서른이 되어서도 참된 벗이 하나도 없는 거야. 비록 그렇지만 나도 오래 전에 참된 방법을 들은 적이 있다네. 팔이 바깥으로 뻗지 않는 까닭은 술잔을 잡기에 편리하게 하려고 그렇다네."
덕홍이 말하였다.
“그렇고말고. 옛 시에 이르기를,
저 숲 속에 학이 울 제
그 새끼가 따라 우네.
벼슬이 아름다우니
너와 함께 하여 보세.
하였거든. 이를 두고 한 말일 게야."
송욱이 말하였다.
“너하고는 벗에 대하여 논할 수 있겠구나. 내가 아까 그 가운데 하나를 가르쳤더니, 너는 벌써 둘을 아는구나. 온 천하 사람들이 쫓아가는 것은 오로지 세(勢)요, 서로 다투어 얻으려 하는 것은 명(名)과 이(利)야. 그러니까 술잔이 처음부터 입과 더불어 꾀한 것은 아니었지만, 팔이 저절로 굽어든 까닭은 자연스러운 세(勢)이기 때문이지. 저 학이 서로 소리를 맞추어 우는 것도 명(名)을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아름다운 벼슬이라는 것도 이(利)를 말하는 거야. 그러나 쫓아오는 자가 많아지면 세(勢)가 나누어지고, 얻으려는 자가 많아지면 명(名)과 이(利)도 공(功)이 없는 법이지. 그래서 군자가 이 세 가지에 대하여 말하기를 싫어한 지가 오래 되었단다. 내가 일부러 은어(隱語)를 써서 네게 가르쳤는데, 너는 알아들었구나.
이제부터 남과 사귈 때에 앞으로 잘할 것을 칭찬하지 않고 오직 앞서 잘한 것들만 칭찬한다면, 그는 아무런 아름다움도 느끼지 못할 거야. 그리고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점도 깨우쳐 주지 마라. 그가 앞으로 그 일을 행해서 알게 된다면 무색하게 되기 때문이지. 또 여러 친구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느 한 사람을 '제일'이라고 칭찬하지도 말게. '제일'이라는 말은 보다 더 위가 없다는 뜻이니 만큼, 한자리에 가득 찬 사람들이 모두 쓸쓸하게 기운이 떨어지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벗을 사귀는 데 다섯 가지 방법이 있으니, 장차 그를 칭찬하려고 한다면 먼저 잘못을 드러내어서 꾸짖을 것이며, 장차 기쁨을 보여 주려면 먼저 노여움으로 밝혀야 하네. 장차 친하게 지내려고 한다면 먼저 내 뜻을 꼿꼿이 세우고 몸가짐은 수줍은 듯이 가져야 하네. 남들로 하여금 나를 믿게 하려면, 짐짓 의심스러운 듯이 기다려야 하네. 대개 열사(烈士)는 슬픔이 많고, 미인은 눈물이 많은데, 영웅이 잘 우는 까닭은 남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기 때문이야. 이 다섯 가지 방법이 군자의 비밀 계획인 동시에 처세하는 데 쓰는 아름다운 방법이지."
탑타가 그 말을 듣고서 덕홍에게 물었다.
“송 군의 말은 너무 어렵고 은어라서, 나는 알아듣지 못하겠네."
덕홍이 말하였다.
“네가 이 말을 어떻게 알아듣는단 말이냐? 그가 잘하는데도 일부러 소리쳐 가며 책망하면, 그의 명예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노여움은 사랑에서 나오고 인정도 견책에서 나오므로, 한 집안 사람 사이에서는 아무리 종알거려도 싫어하지 않는 법이다. 이미 친하면서도 더욱 거리가 먼 듯 한다면, 더할 수 없이 친해지게 된다. 이미 믿으면서도 오히려 의심스러운 듯이 한다면, 더할 수 없이 미덥게 된다. 술에 취하고 밤은 깊어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쓰러져 자건만, (친한 벗 두 사람만이) 말없이 마주 쳐다보며 취한 나머지 흥겨워 비분 강개한 빛을 띠고 있으면, 그 누가 처연하게 감동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벗을 사귈 때에는 서로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보다 더 고귀한 방법이 없으며, 서로 그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것도 없다네. 성급한 자가 자기의 노여운 마음을 풀거나 사나운 자가 자기의 원망스러운 마음을 풀려면, 울음보다 더 빠른 방법이 없다네. 그래서 나도 남과 사귈 때에 가끔 울고 싶은 적이 없지 않았지만, 울려고 해도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더군. 그래서 지금까지 나라 안을 돌아다닌 지 삼십일 년이나 되었지만, 아직 참된 친구가 하나도 없다네."
탑타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충성스럽게 벗을 사귀며 정의롭게 벗을 정하겠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나?"
덕홍이 그 말을 듣고는 탑타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에이, 더럽구나. 너는 그것을 말이라고 하느냐? 내 말을 들어 봐라. 대체로 가난한 사람은 바라는 것이 많이 때문에 정의를 한없이 그리워해서, 저 하늘을 쳐다봐야 가물가물하건만 오히려 곡식이라도 쏟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단다. 남의 기침소리만 들어도 목을 석 자나 뽑곤 하지. 그러나 재산을 모으는 자는 인색하다는 이름쯤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니, 남이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생각조차 못하게 하는 거야. 또 천한 사람은 아낄 것이 없으므로 그의 충성심은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사양하지 않는 법이지. 왜 그런가 하면, 물을 건널 때에 옷을 걷지 않는 까닭은 다 떨어진 홑바지를 입었지 때문이고, 수레는 타는 사람이 가죽신 위에다 덧버선을 신는 까닭은 진흙이 스며들까 봐 걱정하기 때문이거든. 가죽신 밑창까지도 아끼는 사람이 제 몸뚱이야 오죽하겠느냐? 그러기에 충(忠)이니 의(義)니 하고 부르짖는 것은 가난하고 천한 자들의 상투적인 구호일 뿐이고, 부귀를 누리는 자들에게는 논할 거리도 안 되는 거야."
탑타가 추연히 얼굴빛을 붉히면서 말하였다.
“내가 한평생 벗을 하나도 사귀지 못할지언정, 너희들 말처럼 '군자의 사귐'은 안 하겠다."
그래서 세 사람이 서로 갓과 옷을 찢어 버리고, 때묻은 얼굴과 흐트러진 머리에다 새끼줄을 띠 삼아 졸라매고는 시장 바닥에서 노래 불렀다.
골계 선생이 일을 듣고는 〈우정론〉이라는 글을 지었다.
“나무쪽을 붙이는 데에는 부레풀이 제일이고, 쇠끝을 붙이는 데에는 붕사가 그만이며, 사슴 가죽이나 말가죽을 붙이는 데에는 찹쌀 밥풀보다 잘 붙는 것이 없다. 벗을 사귐에 있어서는 ‘틈'이 가장 중요하다. 연(燕)나라와 월(越)나라 사이가 멀지만, 그런 틈이 아니다. 산천(山川)이 그 사이에 가로막혔다 해도, 그 틈이 아니다. 둘이서 무릎을 맞대고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해서 '서로 밀접하다'고 말할 수 없고, 어깨를 치며 소매를 붙잡았다고 해서 '서로 합쳤다'고 말할 수 는 없으므로, 그 사이에는 틈이 있을 뿐이다.
옛날에 위앙이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자 진(秦)나라 효공은 못 들은 척하며 졸았고, 응후가 노여워하지 않는 척하자 채택은 벙어리처럼 말을 못했다. 그러므로 마음에 있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어 남을 꾸짖는 것도 반드시 그럴 처지의 사람이 있겠고, 큰소리를 치면서 남을 노엽게 만드는 것도 반드시 그럴 처지의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옛날 공자 조승이 소개한 성안후와 상산왕도 틈이 없이 사귀었다. 한 번 틈이 벌어지면, 아무도 그 틈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사랑스러운 것도 틈타서 결합되며, 고자질도 그 틈을 이용해서 벌어지게 만든다. 그러므로 남을 잘 사귀는 자는 먼저 그 틈을 잘 타야 한다. 남을 잘 사귀지 못하는 자는 틈을 탈 줄 모른다.
대체로 곧은 사람은 곧바로 가 버린다. 굽은 길을 따라가지 않고, 자기의 뜻을 꺾어 가면서 무슨 일을 하지는 않는다. 한마디 말에 의견이 합해지지 않는 것은 남이 그를 이간질시켜서가 아니라, 제 스스로 앞길을 막은 셈이다. 그래서 속담에도 이르기는 '열 번 찍어서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 하였고, '성주를 위하려면 먼저 조왕께 지성을 드려라' 하였으니,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아첨하는 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자기 몸을 가다듬고 얼굴을 꾸민 뒤에 말씨도 얌전히 할뿐더러 명리(名利)에 담박하며, 다른 사람들과 사귀기를 싫어하는 척해서 자기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것이 상첨(上諂)이다. 둘째, 곧은 말을 간곡하게 해서 자기의 참된 심정을 나타내되, 그 틈을 잘 타서 이편의 뜻을 이해시키는 것이 중첨(中諂)이다. 셋째 말발굽이 다 닳고 자리굽이 해지도록 자주 찾아가서 그의 입술을 쳐다보며 얼굴빛을 잘 살펴서, 그가 말하면 덮어놓고 칭찬하며 그의 행동을 무조건 아름답게 여긴다면, 저편에서 처음 들을 때에는 기뻐한다. 그러나 오래 되면 도리어 싫증나고, 싫증나면 더럽게 여기게 된다. 그제는 ‘저놈이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법이니, 이는 하첨(下諂)이다.
관중은 아홉 번이나 제후를 규합했고, 소진은 여섯 나라를 합종하였으니, ‘천하에 가장 커다란 사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송욱과 탑타는 길에서 빌어먹고 덕홍은 시장 바닥에서 미친 노래를 부를지언정, 말 거간꾼의 나쁜 술법을 쓰지는 않았다. 하물며 글 읽는 군자가 그런 짓을 할까 보냐?"
박지원(朴趾源)
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소설가, 문신, 학자로서 1737년(영조 13) 2월 5일 서울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호는 연암(燕巖) 또는 연상(烟湘),열상외사(列上外史)이다.
고려말의 문호 박상충, 이조 때의 박동량, 박미와 같은 시문의 대가 등이 배출된 명문가인 반남박씨 사유(師愈)와 함평이씨(咸平李氏) 창원(昌遠)의 딸에게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부모를 일찍 여의고 경기도 관찰사, 예조참판, 지돈녕부사를 지낸 조부 박필균(朴弼均)에 의해 양육되었다. 성장하면서 신체가 건강하고 매우 영민하여 옛사람 선침(扇枕)과 온피(溫被) 같은 일을 흉내내기도 하였다. 15세까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1752년 (영조 28) 16세에 전주이씨(全州李氏) 처사(處士)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혼인하면서 <맹자>를 중심으로 학문에 정진하게 되었으며, 특히 홍문관교리인 이양천에게 <사기>를 비롯한 역사서적 등을 교훈 받아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는 등 본격적인 교육을 받았다.
처남 이재성(李在誠)과 더불어 평생의 문우로 지냄과 아울러 그의 학문에 충실한 조언자가 되었다. 1755년 19세에 이르러 문단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스승 이양천의 죽음으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연암별집>> <방경각외전>에 실린 <마장전> <광문자전> <예덕선생전> <민옹전> <양반전> <김신선전> <우상전>과 원문이 전하지 않는 <봉학사대전> <역학대도전>을 포함한 구전(九傳)의 작품을 지었다. 1760년 할아버지가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하였다. 그 사이 1765년에 처음 과거에 응시하였다.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이후로 과거시험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68년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며 박제가(朴濟家),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득공(柳得恭), 유금(柳琴) 등과 이웃하면서 학문적 깊은 교우를 가졌다. 이때를 전후하여 홍대용(洪大容), 이덕무(李德懋), 정철조(鄭喆祚) 등과는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대하여 자주 토론 하였으며, 이 무렵 유득공, 이덕무 등과 서부지방을 여행하였다.
이 당시의 국내정세는 홍국영(洪國榮)이 세도를 잡아 벽파(僻派)에 속했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어 결국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하게 되었는데 그의 아화가 연암으로 불려진 것도 이에 연유한다. 그는 이곳에 있는 동안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게 되었다. 1780년(정조 4)에 삼종형 박명원(朴明源)과 함께 청에가서 (1780년 6월 25일출발. 10월 27일귀국)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 이때의 견문을 정리하여 쓴 책이 <열하일기>며 이 속에는 그가 평소에 생각하던 이용후생에 대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저술로 인하여 그의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기도 하였으나 문원(文垣)에서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뒤늦은 1786년에 음사(蔭仕)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된 것을 필두로 1789년에는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사복사주부(司僕寺主簿), 1791년에는 한성부판관, 1792년에는 안의현감(安義縣監), 1797년에는 면천군수(眄川郡守), 1800년에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안현감 시절은 북경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이 때에 그의 마지막 소설인 <열녀함양박씨전>을 지었다. 면천군수 시절의 경험은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안설(按設)>> 등을 남기게 되었다. 1801년 신유사옥 사건을 계기로 실학자들의 공개적 활동이 엄금되자 그는 벼슬길에서 물러나와 저술을 계속하다가 1805년(순조5) 12월 10일 69세를 일기로 필전의 일생을 마쳤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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