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즈벨트, 냉전, 한국전쟁, 뉴딜정책, 트루먼 독트린
루즈벨트 살았다면 냉전은 없었고 한국전쟁도 없었다.
루즈벨트에 대해, 리버럴 진영에서는 뉴딜 정책이 가축 대량 살처분 같은 부작용도 일부 남겼지만, 이때 추진한 여러 정책 중 상당수는 이후 서구권에서 수십 년간 이어진 자본주의 황금기를 만드는 토대가 되었고, 실제 뉴딜 정책 이후 경제학계의 주류로 올라선 케인즈주의를 언급하며 세계 경제학의 기조 자체를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실제 이때 많은 노동권 신장이 이뤄지며 이후 아이젠하워 등 공화당 정부도 뉴딜 정책 당시 수립된 다수의 정책들을 계승했고, 지금도 사회보장제도 등의 형태로 남아 있다. 또 루스벨트 행정부 2기(1937 ~ 1938) 경기 침체의 경우, 상기되어있듯 뉴딜 정책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고전학파적 견해와 의회 비협조나 크루그먼 등이 주장하는 재정 지출 감소 때문에 오히려 뉴딜 정책을 지속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정반대의 견해가 대립한다.
사실 뉴딜 정책이 갖는 중요한 의의는 정책의 호불호를 떠나, 미국이 방임주의로 대공황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지만, 다른 지역이 파시즘을 대안으로 선택하던 시절 대중들에게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사회 내 극단주의자들의 성장을 억제하고 큰 틀에서의 기존 체제를 지켜낸 점이라고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뉴딜은 일각에서 비난하는 공산주의스런 정책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공산주의로부터 자본주의를 수호한 수정자본주의적 정책이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일각에선 루스벨트가 2차 대전 당시 소련의 힘을 과대평가해 스탈린에게 너무 유화적이었던 것 아니냐고 비판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실제 2차 대전 기간 서방 진영 지도자인 루스벨트, 후임인 트루먼, 처칠 가운데 소련에 상대적으로 가장 호의적이었던건 루스벨트였는데, 그는 소련의 독일 분단안과 동유럽 공산화에 국민투표 등 몇몇 조건을 달긴 했지만 적극적인 반대는 하지 않았고 대일 전선에서도 소련의 참전을 독촉하며 극동에서 소련의 지분을 용인하려 했다. 2차대전 승전이 확정된 1945년 2월에도 소련의 대일전선 참전을 독촉할 정도였다. 물론 이에 대해 일각에선 온전히 미국 vs 일본 상태로 진행되던 태평양 전쟁에서 자국 병사들의 희생을 줄이고자 소련의 참전을 독촉한 것이란 해석도 하는데, 이에 대해 어차피 전쟁으로 피 보던 판국에 고작(?) 그런 이유로 잠재적 적국이 될 수도 있는 소련을 끌어들인건 현명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결국 소련의 부상과 냉전의 성립에는 루스벨트의 지분도 어느정도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루스벨트의 대소 유화적인 태도와 상반되는 것이 후임자 트루먼으로 그는 유럽이 되었든 극동이 되었든 소련의 지분 확대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실시한 베를린 공수작전과 마셜 플랜은 유럽에서의 소련 영향력 약화 차원이었고 빠른 원폭 투하 결정도 극동에서의 소련 지분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트루먼은 소련의 홋카이도 점령과 같이 비교적 작은 부산물에도 격렬히 반대했고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남한을 지키기 위해 즉각적으로 안보리를 소집해 한국에 파병할 정도로 소련과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높이 보았다.
다만 이런 주장에 대해, 사실 FDR은 전후 평화 체제의 핵심이 미소관계라고 봤기에 초강대국인 미국이 먼저 아량 넓게 손을 한번 내밀어본 것일뿐이란 반론도 있다. 실제 당시 소련은 대공황을 극복하고 제2의 경제대국으로 치고 올라온 상태긴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제 갓 농업국가를 탈피하고 공업국가로 진입한 신생국이었고, 특히 독일과 피비린내 나는 전면전을 치르면서 사실 미국 입장에선 좀 만만하게 볼법한 구석도 있었다. 즉, 루스벨트가 사망하면서 모든게 IF의 영역이 되긴 했지만, FDR이 살아있었더라면 이때 쌓은 스탈린과의 친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전후 국제 질서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여담으로 FDR은 1942년 처칠에게 미국 국무부나 영국 외무부보다 자신이 스탈린을 더 잘 다룰 수 있다는 소신을 밝힌 적도 있는데, 스탈린 역시 FDR을 내심 경계했는지 유고슬라비아의 공산주의자였던 밀로반 질라스에게 '처칠은 사람들이 안볼 때 당신 주머니에서 잔돈만 훔쳐갈 인물이지만, FDR은 더 큰 동전 골라서 훔쳐갈 인물'이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들어 그린슈타인 교수는 FDR을 분석보다 직관을 더 믿은 정치인이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또 루스벨트가 소련에 호의적인 제스처를 처한 이면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있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FDR은 연합국 안에서도 여전히 제국주의 노선을 고집하는 국가들의 방식은 낡은 것이라며 거부감을 표하기도 했다. 이런 연장선상인지 FDR은 중화민국 등에도 호의적인 편이었다.
사실 이 문제에 있어서 루스벨트만 비판받는건 좀 억울한 부분도 있는게, 당장 '동유럽에서의 소련 지분 확대를 막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베를린 진격을 주장했다'는 처칠과 영국 정부는 정작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1941년 6월 22일에 소련과 접촉해 동맹을 제의했으며 곧바로 동맹을 체결했다. 그리고 처칠은 1944년에 스탈린과 퍼센트 합의를 진행해 동유럽을 완전히 소련에 넘겨주고 남유럽에 대한 영국의 이권을 보장받으려 했다. 또한, 처칠은 지중해에서의 패권 유지를 위해 미, 소를 무시하고 이탈리아를 준 식민지로 취급했고 이 때문에 영국 정부는 폴란드 망명 정부를 보호하고 있었음에도 소련이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는 루블린 정부를 폴란드의 임시 정부로 공인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영국이 이 사안에 대해 항의하는 순간, 소련은 영국이 이탈리아에 점령주의 원칙을 적용해 자기들 마음대로 정권을 수립하고 교체한 일을 제기하며 영국의 항의를 무력화할 수 있었다. 게다가 처칠은 독일을 분할하고 완전히 무력화하는 미국의 모겐소 계획과, 스탈린의 독일 분할안에도 동의한 바 있다. 마치 처칠은 소련을 막으려 했는데, 루즈벨트는 용인하려 했다는 말은 처칠과 영국 정부가 소련과 협력하고 소련의 동유럽 장악을 용인하려 했다는 사실을 무시한 잘못된 평가이다.
그리고 독일의 분할은 소련에게 양보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논의되어 오던 전후 독일에 대한 다양한 처리 방안들을 조정하여 얄타에서 결정지은 것이다. 폴란드를 위시한 동유럽 문제 역시, 루즈벨트와 스탈린, 처칠이 어느 한쪽에게 완전히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타협과 조정을 거쳐서 매듭지은 것이었다.
스탈린의 경우, 독소전 초기부터 전후 독일의 분할을 부르짖었으나, 냉전이 시작하던 유럽에서의 종전 ~ 포츠담 회담 시점에는 기존의 입장을 버리고 비무장 중립화된 통일 독일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했으며 포츠담에서 트루먼, 애틀리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론을 내리자면, 전후 독일의 분할은 소련의 분할안을 따른 것이 아니며, 스탈린도 상황에 따라서 분할이 아닌 통일 독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기도 했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소련을 잠재적 적국으로만 판단하는 것도 상황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단견이다. 루즈벨트는 독일군의 80%를 상대한 소련에게 어느 정도의 양보를 하는 것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를 용인받았다. 스탈린 또한, 미국이 주도하는 대연합에 합류하는 대신, 소련의 안보와 적대 국가들의 무력화를 보장받았다. 루즈벨트의 미국과 스탈린의 소련은 얄타까지만 하더라도 서로를 적대할 생각이 없었다.
스탈린은 세계 혁명과 공산권의 확장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독일과 일본의 무력화, 소련의 안보를 위한 동유럽의 완충 지대 확보에만 몰두했다. 서유럽 국가들이 두려워하던 유럽 전역에서의 공산 세력의 강화에 대해서는 서유럽과 그리스의 현지 공산 세력을 통제하고 혁명 운동을 막겠다는 약속을 했으며 실제로 스탈린은 냉전이 본격화되던 시점에서조차 그리스 공산 파르티잔들의 활동을 통제하려 했다. 자신이 완충 지대로 삼으려 한 동유럽 국가들도 루즈벨트의 눈치가 보여 의회제와 시장 경제를 허용하는 인민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으로 끝내려 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전후에도 미국과 적대할 생각이 없었으며 도리어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강화하려 했다. 스탈린은 자신을 제외한 소련 수뇌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시장을 개방하여 과학 기술과 공산품을 받는 대신, 소련의 원자재를 미국에 넘겨주려 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전후 세계를 인정하고 미국이 만든 세계 질서를 받아들이려 했고 루즈벨트가 구상하여 실현한 UN에 소련이 가입한 것도 소련이 미국의 전후 구상을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이다.
동아시아에서도 스탈린은 미국의 눈치를 봐서 제정 러시아의 고토를 회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극동에서의 진출을 정당화했으며, 루즈벨트도 이를 받아들였다. 만약, 스탈린이 그 이상을 원했다면, 루즈벨트는 스탈린과 다시 길고 긴 협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관동군에 대한 평가는 핵 2방 맞고 항복한 지금에 와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모든건 결과론적 해석일 뿐이며 그때 당시 일본 관동군은 미드웨이와 과달카날 패배 이후에도, 만주와 한반도를 손아귀에 쥐고 있었으며 그 숫자만 100만에 가까웠다. 미군 수뇌부와 백악관은 일본 본토에 침공하는 몰락 작전을 개시할 경우,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미국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소련이 제2전선 개설을 지속적으로 요청하던 것처럼 자신도 소련에게 대일전에 참전할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이탈리아 전선의 개설과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개시는 전후 지분의 확보만을 위해서 이뤄진 일이 아니라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소련의 제2전선 개설 요청을 받아들여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하여튼 이렇게 다양한 평을 남긴 대통령이지만, 결과적으로 대공황을 극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오늘날 초강대국 미국의 기반을 마련한 대통령이었다는 것에는 많이들 공감하고 있기에 FDR은 오늘날에도 대통령 업적 평가 등을 보면 주로 조지 워싱턴이나 에이브러햄 링컨 등과 함께 세 손가락 내로 드는 경우가 많은데, 2010년 시에나 대학의 업적 평가에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2000년대 한 조사에선 지도력, 인사, 위기 대응 등 다른 분야는 수위권인데, 도덕성에서 상대적으로 처지는 15위를 차지해 종합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냉전체제
20세기의 중·후반의 세계 질서
2차대전 직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공산주의) 진영 간의 이데올로기(이념) 대결을 기반으로 형성된 국제 질서를 지칭한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양 진영간 대립은 냉전 기간 세계 질서를 움직인 핵심적인 힘이었으며, 각국의 시민들은 정치·경제·사회·문화를 망라하는 다양한 영역에서 광범위한 ‘비(非)평화’ 상태를 경험했다.
냉전의 정의와 기원
‘냉전(cold war)’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47년경이다. 1947년 4월 당시 트루먼(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의 고문이었던 바루크(Bernard Baruch)가 최초로 공식 석상에서 ‘냉전’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같은 해 미국의 언론인 리프먼(Walter Lippman)이 『냉전. 미국 대외정책 연구(The Cold War. A Study in US Foreign Policy)』 라는 제목의 논문을 출간하면서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양 진영의 대결 구도를 ‘냉전’으로 지칭하는 용례가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냉전은 물리력을 동원한 직접적인 무력 충돌을 의미하는 열전(hot war)에 대비되는 용어로서, 병력과 무기를 동원하여 맞붙는 일반적인 의미의 전쟁은 아니지만, 사실상 전쟁을 방불케 하는 대결·긴장 상태가 유지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냉전 기간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 사회주의 진영은 자기 진영 전체의 무력을 총동원한 세계대전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전면전을 제외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상대 진영을 약화시키고 자기 진영의 결속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이처럼 ‘전면적인 무력 대결 없는 대결 상태’가 ‘냉전’ 개념의 핵심적 의미라고 볼 수 있겠으나, 냉전 기간 한반도를 포함한 탈식민 지역, 제3세계에서는 ‘열전’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서구 강대국들과 소련의 직접적인 대결 무대였던 유럽에서는 냉전 기간 직접적인 무력 충돌은 없었던 데 반해, 2차대전 이후 등장한 신생 독립국의 대부분이 모여 있었던 아시아·아프리카지역에서는 자본주의·사회주의 이념 대립으로 무수한 전쟁과 무력 대결이 발생했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6·25 전쟁(1950~1953),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벌어진 베트남전쟁(1946~1975)은 냉전 시기 발생한 열전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이 때문에 ‘냉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지나치게 미국 및 유럽 중심적이라고 비판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냉전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 다시 말해 냉전의 ‘기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냉전의 기원에 대한 주장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첫째, 소련의 팽창주의가 냉전의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소련이 세계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의 전 세계적 확산을 꿈꾸었고, 이러한 소련의 호전성과 ‘야욕’이 냉전을 불러온 핵심 원인이라는 것이다. 둘째, ‘첫째’와는 반대로 미국이 냉전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소련은 2차대전 직후 전쟁의 참화로 팽창과 정복을 꿈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이 지속적인 시장 확보를 위해 소련에 대해 공격적이고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냉전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첫째’ 및 ‘둘째’ 주장에 대한 일종의 대안적인 주장으로, 미국과 소련의 서로의 의도에 대한 ‘오해’ 및 잘못된 판단이 결국 냉전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냉전이 끝난 이후 각국의 문서고가 열리며 새로운 사료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역사학적 연구를 통해 냉전의 원인을 보다 명확하게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냉전의 전개 과정
2차대전 기간 미국과 소련은 일시적인 동맹 관계를 형성했다. 2차대전 발발 이전 미국과 소련은 전반적으로 불편한 관계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은 영국, 프랑스, 일본 등과 함께 혁명을 저지할 목적으로 시베리아에 간섭군을 파병했고, 1933년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정권기에 와서야 뒤늦게 소련을 외교적으로 승인할 정도였다. 그러나 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2차대전을 시작하고, 뒤이어 1941년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미국과 소련은 나치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을 격퇴하기 위해 영국·프랑스 등과 함께 연합국을 형성했고, 결국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성공했다. 영국, 프랑스 등 ‘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승전국임에도 전쟁 기간 국가 역량을 크게 소진하며 주춤한 사이 미국과 소련은 전후 질서를 좌지우지하는 초강대국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미-소의 ‘일시적’인 동맹 관계가 깨지면서 냉전이 본격화되었다. 1945년 종전 직후 미국 정부와 군부 내에서는 전쟁 이전의 반공주의와 대소 경계심이 되살아나기 시작했으며, 소련 또한 미국의 태도 변화를 감지하며 점점 공격적 태도를 취했다. 미-소 관계가 점점 악화하는 가운데, 1947년 3월 미국이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국가들에 대한 원조를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하면서 냉전은 공식화되었다. 이에 맞서 소련도 1947년 9월 정권의 2인자 즈다노프(Andrei Zhdanov)의 입을 빌려 세계를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적 반민주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반제국주의적 민주주의 진영”으로 양분하는 ‘두 개의 진영론’을 발표하며 맞섰다. 냉전이 표면화하는 과정에서 동유럽, 중국, 한반도 북부 등의 지역에는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며 소련과 더불어 ‘제2세계(공산권)’를 형성, 미국 중심의 ‘제1세계(서방 자본주의 진영)’와 대결구도를 형성했다.
1950~60년대 일련의 사건들은 양 진영 사이의 대립선을 더욱 선명하게 했다. 1950년 발발한 6·25 전쟁은 냉전 시기 최초로 벌어진 열전으로, 냉전이 언제라도 대규모 병력과 무기를 동원한 물리적인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음을 전 세계에 일깨워 주었다. 1950년대 중반 스탈린(Joseph Stalin)을 이어 소련의 지도자로 등장한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가 ‘평화공존론’을 내세우면서 냉전의 긴장이 일시적으로 이완되는 듯 했지만,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는 미-소 대립이 언제든 전 세계를 핵전쟁으로 몰아넣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양 진영의 대립 구도는 1970년대 초 이른바 ‘데탕트’라는 국제적인 긴장 완화 정세를 만나며 변화를 맞게 된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근본적으로 해소된 것은 아니었지만, 데탕트를 거치며 기존의 양극적인 냉전 질서는 상대적으로 다극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변화를 불러온 요인 중 하나는 ‘제3세계’의 등장이다. 2차대전 패전국의 식민지는 종전 직후에 대부분 독립했지만, 영국·프랑스 등 승전국의 식민지는 상당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 독립에 대한 요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렬해졌고, 그 결과 1950~60년대를 지나며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다수 식민지들이 독립하여 국제 무대에 등장했다. 이들 중 상당수 국가들이 ‘중립’을 표방하며 미국과 소련 양대 진영의 어느 한 편에 서기를 거부했고, 반둥회의(1955), 비동맹회의(1961)를 개최하며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도모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의 실패로 냉전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남베트남과 동남아시아의 공산화를 방지하기 위해 1960년대 초반부터 막대한 군사력과 재정을 투입하여 베트남전에 개입했지만 큰 희생만을 남긴 채 물러나야 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실패를 겪으며 대외적 개입을 대폭 축소하는 등 근본적인 정책 변화를 모색했다.
소련-중국의 대립과 그 반대 급부로 이루어진 미국-중국의 관계 개선도 중요한 요소였다. 1950년대 중반부터 중국이 소련의 평화공존론을 비판하자 양국은 불편한 관계로 접어들었고, 1960년대 들어서는 서로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국경에서의 무력 충돌까지 겪었다. 소련-중국의 대립으로 인해 미국과 중국이 ‘소련 견제’라는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게 되었고, 이는 1970년대 초반 양국 간 최초의 정상회담 등 관계 개선 노력으로 이어졌다. 소련과 더불어 공산권의 양대 강국이었던 중국의 이러한 행보는 기존의 양극적 냉전 질서를 흔들어 놓았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데탕트 분위기가 깨지면서 다시금 양 진영간 첨예한 대립의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지만, 1980년대 들어 냉전의 와해는 가속화되었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실패, 과도한 군비 지출, 누적된 경제 위기 등 다방면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에 1985년 집권한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을 선언하며 개혁에 착수했다. 소련의 변화는 동유럽 국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1989년을 전후한 시기 동유럽의 사회주의 정권은 연쇄적으로 붕괴했다. 1990년에는 동독이 서독으로 통합되면서 유럽 냉전의 상징이었던 독일의 분단 문제가 해결되었으며, 1991년에는 소련이 해체되면서 냉전이 종식되었다.
냉전체제와 한국현대사
한반도는 냉전체제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이고 깊게 경험한 지역 중 하나이다. 1945년 해방 직후 38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임시적으로 주둔했다. 1946년까지 미국과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타협적인 방식으로 통일 한국 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모색했지만, 1947년 양국이 냉전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1947년 미국은 자신이 유리한 유엔(UN)에 한국의 정부 수립 문제를 상정했고, 소련과 북한의 거부 속에 1948년 5월 유엔 감시 하에 남한만의 총선거가 치러졌다. 결국 1948년 8월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9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며 분단 체제가 도래했다.
6·25 전쟁은 냉전기 양 진영의 대리전이었다. 미국은 자본주의 진영 국가들과 함께 유엔군을 조직하여 대규모로 참전했고, 공산 진영에서는 중국의 대규모 파병 및 소련의 배후 지원이 이루어졌다. 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대를 바라지 않았던 양 진영은 전쟁을 한반도 안으로 제한했고, 결국 전쟁은 남북한의 분단선을 38선에서 휴전선으로 바꾼 채 정전협정 체결이라는 불완전한 결말로 마무리되었다.
냉전체제는 한반도 주민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냉전체제는 남북한에 독재정권이 등장하는 핵심적인 배경을 제공했고, 국제적 차원에서 냉전이 종식되었음에도 한반도의 분단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냉전체제의 마지막 유산 중 하나인 한반도의 분단 질서를 어떻게 평화 질서로 전환할 것인지 깊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