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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무조건 항복은 소련군 만주 참전, 소련-일본 전쟁,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진짜 항복한 이유

Jobs 9 2023. 5. 19.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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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진짜 항복한 이유, 일본 무조건 항복은 소련군 만주 참전, 소련-일본 전쟁


제2차 세계대전(World War 2)은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초래한 전쟁이었다. 시작은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만주사변, 중일전쟁, 스페인 내전 등이 시작이라는 논쟁이 있긴 하지만)이지만, 종결은 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이었다.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두 개의 원자폭탄(Atomic Bomb)은 일본의 저항의지를 꺾었고,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는 결국 항복하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러나 일본이 진짜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이 아닌 소련군의 만주진격이라는 얘기가 학계에서 주장되기 시작했고, <폭격의 역사>를 쓴 아라이 신이치나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올리버 스톤(Oliver Stone)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소련군을 중심으로 연구한 데이비드 글랜츠(David Glantz)등과 같은 인물들도 “일본이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이 아닌 소련군의 만주 공세에 있다”고 주장한다. 
1945년 5월 나치독일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하면서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 그러나 미국은 그 와중에도 오키나와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치렀고, 치열한 전투 끝에 오키나와를 겨우 함락시켰다. 오키나와 전투(Battle of Okinawa)에서 많은 전사자를 냈던 미국은 일본 본토에 상륙하여 작전을 펼치면 대략 100만 이상의 미군 전사자가 속출할 것이라는 계산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미국은 일본 본토 전역을 대상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같은 군사작전을 계획했었으며, 그렇게 될 경우 태평양 전쟁을 1,2년 더 진행할 것을 감안하고 있었다. 
미국이 가장 걱정했던 것은 소련이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반소련감정을 내려놓고, 소련에 대한 칭찬을 아낌없이 했다. 심지어 반공주의자인 더글라스 맥아더고 독일에 맞선 소련의 공로를 매우 높게 인정했을 정도며, 정훈교육 차원에서 만들어진 동영상도 소련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3년 테헤란 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이런 미국의 입장은 나치독일이 패망하고 미국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고전하면서 점차 달라졌다.
당시 미국은 비밀리에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라 하여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1945년 5월쯤 되어 핵폭탄 실험이 완성단계에 도달했고,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 외곽 사막에서 처음으로 실행한 핵실험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원자폭탄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트루먼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지지했었지만, 핵실험이 성공한 이후 그의 생각은 바뀌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핵 보유는 “소련의 도움 없이도 미국이 원하는 조건대로 일본의 항복을 앞당길 수단”을 갖게 된 것이었다. 루스벨트가 급병으로 사망하고 나서 대통령이 된 해리 트루먼은 매우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다. 따라서 트루먼은 핵실험이 성공한 이후 더 이상 소련의 참전을 환영하지 않게 됐다. 
포츠담 회담에서 스탈린을 만난 트루먼은 회담이 끝나기 전 슬며시 다가가 지나가는 말투로 “미국이 비상한 파괴력을 지닌 신무기를 개발했다”고 말했다. 물론 소련은 이미 정보부를 통해 맨해튼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고, 따라서 스탈린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스탈린은 포츠담에서 트루먼의 행동을 보면서 ‘미국은 전쟁을 빨리 끝냄으로써 소련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결국 1945년 8월 6일 리틀 보이(Little Boy)를 탑재한 B-29 폭격기가 마리아나제도의 티니안 섬 기지를 이륙해 일본으로 향했고,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원폭투하 이후 미국의 트루먼은 환호했다. 당시 원폭투하의 소식을 들은 소련 지도부는 원자폭탄 투하의 진짜목적은 “일본의 항복이 아닌 소련을 견제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소련은 미국이 일본을 무찌르는데 원자폭탄까지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소련 지도부는 미국이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려는 이유는 소련이 아시아에서 이득을 취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고, “히로시마에 원폭을 사용함으로써 소련이 미국의 이익을 위협할 경우 주저 없이 소련에도 원폭을 사용할 것”이라는 신호로 생각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만주 전역에서 공세를 개시했다. 소련군이 공세를 개시하자 일본 외무성 최고위급 관리 4명이 스즈키 간타로 총리 관저로 달려가 나쁜 소식을 알렸다. 스즈키의 반응은 “우리가 우려하던 일이 마침내 일어났다”였다. 일본이 소련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나가사키에 또 다른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당시 소련군의 공세가 있자 비상 내각회의를 소집한 일본 관리들은 회의도중 나가사키 원폭 투하 사실을 알게 됐다. 확실한 것은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미국이 300대의 항공기와 수천 발의 폭탄으로 도시들을 쓸어버리느냐, 한 대의 비행기와 한 발의 폭탄으로 그렇게 하느냐에 대해 별로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소련의 만주 공격은 일본 지도부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렸다. 당시 소련군은 소만 국경지대와 몽골 만주 국경지대에 배치된 자바이칼전선군, 연해주 지역과 블라디보스토크 쪽에 배치된 제1극동전선군,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주 샤오싱안링 산맥을 향해 공격하게 될 제2극동전선군이 공격을 개시한 상황이었고, 이들은 만주와 몽골, 중국, 한반도 이북 그리고 그 외의 쿠릴열도와 사할린 이남을 통틀어 공격을 개시했다. 당시 일본이 소련군의 만주진격에 사기가 완전히 꺾인 것은 이러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은 남방정책으로 동남아와 태평양 일대를 장악했고, 미군과의 전투는 태평양에서 일어났다. 비록 보급이 안되긴 했어도 일본군은 주로 만주와 중국 그리고 한반도를 통해 보급물자와 지원병력을 받을 수 있었다. 즉 일본 지도부는 미국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더라도 만주와 중국 한반도를 포함한 지역에서 지원을 받음으로써 미국에게 격렬히 저항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소련과 접촉하여 외교적인 해법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만주에서 진격을 개시하면서 그런 계획은 무산되었다. 또한 소련군의 진격은 매우 신속했다. 동부전선에서의 4년간의 경험은 소련군을 전차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기술을 발전시켜 놓았고, 만주에서 작전을 개시한 소련군은 아주 빠른 속도로 일본군의 만주전선을 붕괴시켜버렸다. 비단 만주뿐만 아니라 소련군은 중국 일부와 쿠릴열도, 사할린 이남, 그리고 한반도 이북까지 진격하여 그곳에 있던 일본군을 궤멸시켰다. 결국 일본 지도부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소련의 참전을 통해 알게 됐다. 스즈키 총리의 경우 즉각 항복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결국 일본 지도부는 무조건 항복의 길을 선택했고,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 추축국의 패배로 끝이 났다. 
종전 후 일본 지도자들은 항복의 이유를 미국의 원폭투하와 소련의 만주 진격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해군참모총장 도요다 소에무 역시 “원자폭탄보다는 러시아의 대일전 참전이 항복을 더 앞당겼다고 본다”라고 말했으며, 당시 내각종합계획국 책임자였던 이케다 스미히사 중장도 “소련이 참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우리는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한 진짜 이유는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라기 보단 소련의 만주 진격 작전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판단이다. 




소련-일본 전쟁

소련-일본 전쟁(러시아어: Советско-японская война), 소련 대일 참전(일본어: ソ連対日参戦) 또는 1945년 해방 전쟁(몽골어: 1945 оны чөлөөлөх дайн)은 소련이 1945년 8월 9일 일본 제국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을 침공하면서 발발한 전쟁이다. 이 전쟁을 통해 소련과 몽골 인민공화국은 만주국, 몽강연합자치정부, 한반도 북부, 가라후토청, 그리고 지시마 열도에서 일본의 통치를 종식시켰다. 일본 관동군의 패배는 일본의 항복과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식을 이끌어냈다. 소련의 참전은 일본 정부가 무조건 항복하기로 결정한 중요한 요인이었는데, 이는 소련이 조건부 적대행위 종식 협상에서 제3자 역할을 할 의사가 없음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소련-일본 전쟁의 결과는 동아시아 전체, 그리고 향후 동아시아에서 벌어질 냉전에 영향을 미쳤다. 이 전쟁의 결과로 외몽골과 내몽골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한반도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분단되었으며 소련이 중화민국에 반환하기로 한 만주 지역은 제2차 국공 내전의 주요 전장이 되었다. 소련이 이 전쟁에서 강제 병합한 사할린과 쿠릴 열도는 여전히 러시아와 일본의 영토 분쟁 지역으로 남아있다. 

소련군의 만주 침공의 시작은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와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 사이에 있었다. 스탈린은 연합군으로부터 미국과 영국의 원폭 프로그램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듣지 못했지만, 얄타 협정과 독일의 항복, 그리고 8월 3일 바실렙스키가 스탈린에게 필요하다면 8월 5일 아침 일본군을 공격하겠다고 보고한 사실을 통해 소련군의 침공 시기를 예측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소련은 연합국의 편에 서서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일본을 공격하기에 시간이 충분했다.

1945년 8월 8일 오후 11시, 바이칼 횡단 시간에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일본 대사 사토 나오타케에게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8월 9일부터 소련 정부는 일본과 전쟁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명칭
전투는 전통적으로 만주족이 살았던 지역인 만주로 알려진 지역을 넘어 확장되었지만, 소련이 개시한 일본의 북방 영토에 대한 조정되고 통합된 침략작전도 만주 전투라고도 불려왔다. 1983년 이후 미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M. 글랜츠가 작전에 관한 논문 제목으로 "8월 폭풍 작전"이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8월 폭풍 작전이라는 명칭을 쓰기도 한다. 몽골 측에서는 이 전쟁을 1945년 해방 전쟁이라고 부르며, 일본에서는 일소전쟁(일본어: 日ソ戦争)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만,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에서는 대소방위전(일본어: 対ソ防衛戦)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련-일본 전쟁 결과


일본의 항복
1945년 9월 18일 우한에서 오카베 나오자부로가 중화민국 제6전쟁구역 사령관 쑨웨이루에게 항복하는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어 중산함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을 통해 일본은 공식적으로 연합국에 항복 의사를 전달했지만 옥음방송의 소리가 명확하지 않았고 천황이 사용한 단어 역시 황실 언어였으며 옥음방송에서 "항복"이란 단어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정부 측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겠다는 확약을 다시 보냈다.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항복은 1945년 9월 2일 USS 미주리에서 시게미쓰 마모루와 우메즈 요시지로, 그리고 연합국 대표가 일본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이루어졌다. 소련은 쿠즈마 데레비얀코를 대표로 파견해 항복문서에 서명하게 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 이후, 일본이 점령한 식민지 및 전투 지역에서도 일본군의 항복이 이어졌다. 동남아시아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각각 9월 2일 페낭에서, 9월 10일 라부안에서, 9월 11일 사라왁 왕국에서, 그리고 9월 12일 싱가포르에서 항복했다. 한편 1945년 9월 9일 더글러스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만주를 제외한 중국 전역과 대만, 그리고 북위 16도선 이북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주둔한 일본군은 모두 중화민국의 장제스에게 항복하게 되었다.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은 북위 38도 이북의 경우 소련에, 북위 38도 이남의 경우 미군에게 항복했다. 1945년 9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제1호 포고문을 발표하고, 38선 이남의 한국에 대한 미군의 통제권을 선포하고, 군사통제 중 영어를 공용어로 제정하였고, 이에 따라 서울에 위치하고 있던 조선총독부는 소련이 아닌 미국에 항복하게 되었다.

소련의 만주 및 다롄 점령
1945년 8월 14일 체결된 중소우호동맹조약에 따라 소련은 만주 지역을 중화민국 측에 반환해야 했다. 하지만 소련군은 일본과의 전쟁 이후 점령한 지역을 군 점령지로 통치했으며, 1946년 5월까지 만주에 주둔했다. 1945년 9월부터는 팔로군이 둥베이에 진출해 소련군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소련은 만주에 입성했고, 뒤이어 소련군은 만주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둥베이에 있는 동안 심각한 군기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붉은 군대 병사들은 패전한 일본인을 약탈 폭행하고, 일본 전쟁 포로들과 일본 교민들을 학살하였으며, 일본으로 철수할 겨를이 없었던 많은 일본 교민들은 소련군에 의해 학살되었다. 현지의 중국인들에 대해서도 소련군 병사들은 백주 대낮에 오가는 중국 행인들을 약탈하였는데, 소련군은 임의로 개인 건축물에 들어가 총칼로 위협하여 물건을 강탈하거나 부녀자를 강간한 뒤 사살하였다. 소련 측은 외교 의례에도 불구하고 둥베이 각 도시에 소련 지도자의 초상화를 내걸도록 하고, 광장에 소련군을 강제로 주둔시켰고 이 때문에 점령지를 통제하고 치안을 유지하려는 팔로군과 붉은 군대 사이에 교전 충돌까지 일어났다.

다롄 지역의 경우, 특수해방구(중국어: 特殊解放区) 또는 관동해방구(중국어: 关东解放区)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소련이 점령한 다롄에서 전반적인 통치는 소련군이 맡았으나, 주요 행정직은 중국 공산당이 맡게 되었다.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다롄에 주둔하다가 1955년 4월 16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다롄의 방어를 맡기로 합의하면서 철수를 시작하였고 5월 27일 완전 철수했다.

한반도 분단
1945년 한국 내 각 독립운동 세력은 일본의 항복에 발맞추어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려고 했다. 1919년부터 활동해 오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1945년 8월 건국동맹에 기반하여 설립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그것이었다. 1945년 8월 14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는 건국동맹의 지도자 여운형을 만나 행정권을 건국동맹에 이양하려고 했다. 여운형이 제시한 조건에 조선총독부가 수락하면서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설치하였다. 이 시기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한 세력은 여운형 외에도 안재홍, 박헌영 등이 있었고, 건준은 창립한 지 15일 만인 8월 30일 전국에 145개의 지사를 보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인 1945년 8월 14일 미국과 소련 양측은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단하기로 결정했고, 이 결과에 따라 1945년 8월 말부터 38도선 이북에는 소비에트 민정청이, 1945년 9월 8일에는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이 서울에 수립되었다.  

영향
만주와 국공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중화민국 국군 소속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중국 공산당의 부대였던 팔로군과 신사군은 1,200,000명에서 1,270,000명에 이르렀고 중국 공산당 소속 민병대까지 합치면 중국 내 공산당 군대의 숫자는 약 3,000,000명에서 4,000,000명까지 증가한다. 중소 우호 동맹 조약에 따라 중국 국민당은 만주를 소련으로부터 인계받기 위해 군대를 출병시켰지만 1945년 당시 이미 중국 공산당 소속 린뱌오와 그의 군대는 진저우를 비롯한 만주의 교외 및 그 주변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1945년 11월 15일 중국 국민당은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린뱌오의 군대를 섬멸하기로 했고, 11월 26일 중국 국민당은 진저우까지 진출했다. 중국 공산당이 완전히 섬멸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스탈린은 만주를 점령하고 있던 소련군 총사령관인 로디온 말리놉스키에게 노획한 모든 일본제 무기들을 중국 공산당에 인계하라고 명령했다.

장제스의 지속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로디온 말리놉스키가 지휘하는 소련군은 만주에서 철수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말리놉스키는 은밀하게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고 있었다. 1946년 3월 말리놉스키의 비호 아래 마오쩌둥은 주더와 린뱌오를 만주에 파견해 쓰핑과 하얼빈을 점령했다. 이러한 여러 조건들 덕택에 중국 공산당 내부의 지도층에도 변화가 생겼으며, 중국 전체를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급진파가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1946년 5월 3일 소련군은 완전히 만주에서 철수했으며,[c] 지역 내 공산당 군대와 국민당 군대 사이의 전투가 치열해졌다. 장제스가 1946년 여름 화베이 지역의 중국 공산당 영토를 목표로 대공세를 감행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국지전은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1947년 10월 10일 중국 공산당은 중국 인민해방군을 편성하였고, 1948년 11월 2일 중국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은 랴오션 전역에서 승리하여 창춘과 선양을 점령하고 둥베이 전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1949년 1월 중국 인민해방군은 핑진 전역과 화이하이 전역에서도 승리를 거두었고 이 두 승리를 통해 중국 공산당은 화중과 장강 이북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중국 내에서 연립정부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강 이남으로 진격하는 것과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를 공격하는 것을 모두 중단하라고 마오쩌둥을 설득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1948년 4월 21일 스탈린의 요청을 무시하고 장강 이남으로 도하 작전을 시작했으며 1949년 4월 23일에는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했다.[226] 국민당 정부는 광둥성과 광저우로 이동했고, 뒤이어 충칭과 청두로 이동했지만 1949년 12월 7일 결국 대만으로 정부를 옮겼다. 한편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내몽골과 외몽골의 분리
1945년 8월 16일, 수니트 주둔 수니트 연합군 우기부대 책임자인 롭산과 이바노프의 요청으로 몽골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모두 드무추크동루프왕부로 이전하였고, 길가랑(드구레), 무크덴보, 보영달라이, 두구르수영, 델리겔차오크투 등 13명이 내몽골 인민위원회를 설립하여 임시 권력기구로서 참의부, 참군부 및 약간의 위원회를 설치하여 내몽골 중서부의 각 맹기를 호령하였다. 이와 함께 몽골 청년혁명당과 내몽골 인민위원회는 롭산, 이바노프에게 내외몽골 통합을 공식 요청했으며 몽골청년혁명당과 내몽골인민위원회 명의로 시린궈러, 차하르, 울란차부 등 맹과 동부 맹기에 통지하고 수니트우기에서 내외몽골 맹기 인민대표대회를 열어 내외몽골 통합을 논의하기로 했다. 몽골 인민공화국이 이를 거부하자 내몽골 인민대표대회에서 의제를 내몽골 독립 문제로 바꾸고 《내몽골 독립 선언》,《내몽골 인민 공화국 임시 헌법》 등의 문서를 기초하였다.

1945년 8월 19일, 몽강국은 소련-몽골 연합군에 항복하였고, 내몽골 지역은 소련의 점령을 받게 되었다. 1945년 9월 9일, 내몽골 맹기 인민대표대회가 수니트 우기 온두얼 사원의 옛 몽골군 유년학교 강당에서 열렸고, 그리고 이 대표대회에서 내몽골 인민공화국 임시정부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1945년 10월 하순, 우란푸는 수니트 우기에서 인민대표회의를 주재하여 임시정부를 개편하였고, 내몽골 인민공화국 임시정부는 몽골 자치정부로 개편되었다. 우란푸는 자치정부 주석 겸 군사부장을, 퀴비는 내무부 장관, 칼레트는 경제부 장관, 다토는 군사부 부부장을 맡았으며, 몽골계 청년 지식인과 상층부 일부가 정부 보직에 선출되면서 달라이 라마의 정부 위원을 유지하게 됐다. 11월 몽골 자치정부는 장자커우(張家口) 장베이(張北)현으로 이전했고, 임시정부 명의의 발표나 각 맹기(盟旗)와의 연락을 끊고 내몽골 자치운동의 길을 걸었다. 1947년 5월 1일 우란푸는 내몽골 자치정부를 수립했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1949년 12월 2일 내몽골 자치정부에 기반을 둔 내몽골 자치구가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 중 하나로 편성되었다.

6.25 전쟁
1945년 8월 일본으로부터 한반도가 독립한 이후, 1945년 9월 38도선 이북에는 소비에트 민정청이, 38도선 이남에는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이 들어섰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 따라 한반도는 미국-소련 공동위원회의 통치를 받고 있었고, 신탁통치 5년 뒤에는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것을 확약했다. 하지만 한국 주민들은 신탁통치에 반대해 봉기가 일어났고, 이에 따라 미 군정청은 1945년 12월 8일 봉기를 금지하고 조선인민공화국 혁명정부와 인민위원회를 12월 12일 모두 해체시켰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1948년 9월 8일에는 소련의 후원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수립되었다. 1949년 5월 4일 개성 송악산 일대에서 조선 인민군과 대한민국 국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조선인민군이 송악산을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남 게릴라 침투 작전도 1949년부터 더욱 강화되었다. 이로 인해 건군 이후 대한민국 육군은 재래전이 아닌 대반란전 또는 게릴라 소탕 작전에 참여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8년 소련군이 북한 지역에서 철수하였고 1949년에는 미국도 대한민국에서 철수했다. 1949년 10월 1일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베이징에서 선포되었고,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복무했던 50,000명에서 70,000명 사이의 한국인이 그들의 무기와 함께 조선 인민군에 편입되었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 정부는 새로 들어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국가 안보에 위협을 줄 수 있는 잠재적인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중화인민공화국 지도부 역시 19세기부터 서양에 의해 겪어야 했던 백년국치, 국공 내전 당시 미국의 중국 국민당 지원, 그리고 혁명가와 반동파 사이의 권력 투쟁 등으로 미국이 공산주의에 맞선 십자군을 일으킬 때 중국이 그 전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중화인민공화국 지도부는 중국의 변방 영토 전역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적극적으로 촉진하는 외교 정책을 채택했다.

한편 김일성은 남한 일대에서 광범위한 봉기가 한국군을 약화시키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침략이 많은 한국인들에게 환영을 받을 것이라고 판단해 1949년 3월부터 스탈린에게 대한민국 침공을 승인받고자 모스크바로 여행했다. 스탈린은 1949년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만 하더라도 중국 인민해방군이 여전히 국민당과 교전 중이었고 남한에 미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1950년 1월 12일 딘 애치슨은 애치슨 선언을 통해 미군의 방위선에서 대한민국과 대만을 언급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는 전쟁이 발발할 시 미군이 지원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1949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국공 내전에서 승리하고,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했으며, 소련에서 핵폭탄 실험이 성공하였으며, 소련은 주모스크바 미국 대사관의 수신 내용을 해독해서 한국이 미국 방위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249] 스탈린은 1950년부터 보다 공격적인 전략을 취했으며 중국과 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다.[250] 1950년 4월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남한에 대한 전쟁을 개시해도 좋다고 승인하였으나 미국과의 직접 교전을 피하기 위해 소련이 참전하지는 않을 것임을 확실시했다.[251] 1950년 5월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만났고, 마오쩌둥이 김일성의 전쟁 계획에 대해 승인했는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갈린다.[d] 하지만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 한국인 베테랑들을 더 많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파견했고 북중 국경 지역에 군대가 오면 중국 인민지원군도 참전할 것이라고 약속했다.[254]

김일성은 마오쩌둥의 약속을 받고 난 뒤 전쟁 준비를 강화했다.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경험이 풍부한 장교들을 소련 고문단이라는 이름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파견했고, 소련 장교들은 1950년 5월 군사 작전 계획을 완성했다. 옹진반도를 중심으로 국지전이 발생하면 조선인민군이 반격한 뒤 남한 전체를 점령한다는 원래 계획은 1950년 6월 21일 38도선 이남을 목표로 한 전면전으로 변경되었고 스탈린은 계획 변경에 찬성했다. 비록 일부 한국과 미국 정보관들이 북한의 공격을 예상했지만, 비슷한 예측이 이전에도 있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조선인민군이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목격했지만 이걸 방어를 위한 이동으로 판단하고 침공이 일어날 일이 없다고 결론지었다.[260] 1950년 6월 23일 유엔 감시단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은 38도선을 넘어와 전쟁을 개시했고, 이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이어졌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및 소련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었지만, 회의가 시작될 때부터 소련은 미국과 영국이 작성한 조약 초안에 강력한 반대를 표명했고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이끄는 소련 대표단은 절차를 지연시키기 위해 몇 번의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다.[262] 소련의 반대는 1951년 9월 8일 그로미코의 성명에서 상세히 설명되었다.[263] 소련 대표단은 아래와 같은 이유를 들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반대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 군국주의의 부상에 대한 어떠한 보장도 제공하지 않았다.
중국은 일본 침략의 주요 피해국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참여를 요청받지 못했다.
소련은 조약이 준비될 때 제대로 협의를 받지 않았다.
조약은 일본을 미국의 군사 기지로 설정하고 일본을 소련에 대항하는 군사 연합으로 끌어들인다.
조약은 사실상 별개의 평화 조약이었다
조약 초안은 대만과 몇몇 다른 섬들에 대한 중국의 권리를 침해했다.
얄타 협정을 위반한 조약 초안은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에 대한 소련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1951년 9월 8일 소련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소련과 일본은 대신 1956년 일소공동선언을 통해 양국의 관계를 회복했다.[264] 하지만 1956년 선언에서 규정된 '2개 섬 이전'과 일본의 끈질긴 '4개 섬 반환' 요구 사이의 이견은 구소련과 구소련 이후 시기에 쿠릴 열도 분쟁이 지속되는 기반이 되었다.

쿠릴 열도 분쟁
2010년 11월 1일 유즈노쿠릴스크에 방문 중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전 대통령.
쿠릴 열도 분쟁이란 러시아와 일본이 쿠릴 열도 남서쪽에 위치한 4개의 섬을 두고 벌이는 영토 분쟁이다. 쿠릴 열도는 일본의 홋카이도 동북쪽과 러시아의 캄차카반도 남서쪽을 따라 난 열도로 태평양과 오호츠크해를 분리하고 있다. 일본과 러시아가 분쟁을 벌이는 지역은 이투루프섬, 쿠나시르섬, 시코탄섬, 그리고 하보마이 군도이다. 일본 측은 현재 이 지역을 북방영토(일본어: 北方領土) 또는 북방사도(일본어: 北方四島)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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