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한 서부전선, 獨 2급 수준 59개 사단만 배치
피 튀기는 동부전선, 전쟁 중 전사자 90% 소련군에 당해
승리의 주역은 소련, 흐름 바꾼 전투는 늘 동부서 벌어져
1939년 9월 1일부터 여섯 해 동안 남극을 뺀 지구 곳곳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역(戰域)은 연합국과 추축국이 맞선 유럽ㆍ지중해 전역과 연합국과 일본군이 맞선 동아시아ㆍ태평양 전역으로 양분된다. 유럽 전역은 다시 영미군이 독일ㆍ이탈리아와 대적하는 서부전선과 소련군이 독일군과 대적하는 동부전선으로 나뉜다.
여기서 우리나라에 상영되어 인기를 끈 2차 세계대전 영화를 떠올려보자. 최근만 해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퓨리’ ‘밴드 오브 브라더즈’ ‘더 퍼시픽’ ‘씬 레드 라인’ ‘윈드토커’ ‘진주만’이 있다. 1990년대 이전의 영화까지 덧붙이면 목록이 무척 길어진다. 그런데 이 목록에서 독소전쟁 영화를 찾기란 쉽지 않다. 기껏해야 21세기에는 ‘에너미 앳 더 게이트’ 20세기에는 ‘철십자 훈장’이 있을 따름이다. 영화의 엄청난 파급력을 고려하면, 우리나라에 형성되어 있는 제2차 세계대전의 이미지에서 유럽 동부전선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세 전선의 비중을 다시 따져볼 필요가 여기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한 전역은 아무래도 동아시아보다는 유럽이었다. 인력과 물자의 규모 면에서도 유럽 전역이 동아시아 전역을 압도했다.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전화가 타오르는 지역은 광활했지만, 투입된 병력과 물량의 규모는 유럽 지중해 대서양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았다. 유럽과 아시아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하던 미국은 아시아가 아닌 유럽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유럽 전역의 서쪽도 비교적 조용했다. 1940년 5, 6월에 프랑스가 독일에게 너무나도 하릴없이 무너진 뒤 유럽 본토에서는 1944년 6월까지 유의미한 대규모 지상전이 없었다. 미국과 영국을 오가는 선단을 공격하는 독일 잠수함과 영국 해상함대가 대서양에서 벌이는 대결은 영국의 입장에서야 사활이 걸렸을지 몰라도 대전의 흐름을 결정하는 결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독일이 점령한 유럽 지역을 상대로 영국과 미국이 수행하는 전략폭격도 마찬가지였다. 그 항공 폭격이 독일의 전쟁수행 기구에 미치는 영향은 단기적으로는 미미했고 장기적으로도 그리 크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1943년 5월까지 독일의 롬멜 장군, 영국의 몬트고머리 장군, 미국의 패튼 장군이 대결하는 북아프리카 전선의 지상전 규모는 사실 보잘것없었다. 영미군을 곤경에 빠뜨리던 독일의 아프리카군단 병력은 4개 사단에 지나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유럽 동부전선의 스탈린그라드에서만 소련의 붉은 군대는 200개 사단을 훌쩍 넘는 독일 최정예 병력을 상대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관심이 온통 소련군을 무너뜨리는 데 쏠린 탓에 보급을 받지 못해 휘발유 대용으로 독주를 증류해서 추출한 알코올로 기갑차량을 굴리던 독일군 아프리카군단이지만 영미군을 쩔쩔매도록 만들던 곳이 북아프리카였다.
1941년 가을에 영국의 처칠 총리는 마운트배튼 제독에게 이렇게 말했다. “귀관은 유럽 침공을 준비하게 될 거요. 우리가 유럽에 상륙해 히틀러와 싸워 그의 군대를 지상에서 물리칠 수 없다면 우리가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오.” 그러나 영미군이 유럽 본토에서 본격적인 지상전을 벌이게 되는 데에는, 다시 말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실행하는 데에는 그로부터 세 해가 걸렸다. 1943년 여름에 영미군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 발을 디뎠지만, 처칠의 바람과는 달리 북상 속도가 워낙 달팽이 걸음인지라 추축국의 “부드러운 아랫배”에 결정타를 가하기는커녕 독일에게 솜방망이를 휘두르는 격이었다. 1944년 6월 6일까지 유럽의 서쪽 땅은 잠잠하기만 했다.
그렇다면 그 동안 유럽의 지상전은 대체 어디에서 벌어지고 있었을까? 피가 튀고 뼈가 꺾이는 접전이 일어나는 지역은 동부전선이었다. 독일이 소련을 기습 공격한 1941년 6월 이후로 두 나라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규모의 병력과 물량을 투입하며 1945년 4월말까지 사투를 이어갔다. 1942년에 독일은 동부전선에 260개가 넘는 정예 사단을 배치한 반면에 서부전선에는 2급 수준의 59개 사단을 배치했다. 그 59개 사단 가운데에는 소련군과 격전을 치르느라 진이 빠진 심신을 추스르고자 프랑스로 이전 배치되어 휴양을 취하는 사단이 여럿 있었다. 전쟁 기간 동안 소련군은 독일군 최정예 병력의 5분의 4를 대적했다.
동원된 인력과 물자의 규모 면에서도 동부전선이 서부전선을 압도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전쟁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전투도 늘 유럽의 동부전선에서 벌어졌다. 100만명이 넘는 시민이 굶어 죽는 와중에도 끝끝내 버텨내어 전선을 유지한 레닌그라드 봉쇄전, 독일군의 불패 신화를 깨뜨린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독일군의 주특기인 기갑전에서 오히려 독일군을 압도한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이 얻어낸 승리는 하나하나 다 전쟁의 분수령을 이루었다.
어떤 이들은 1944년 6월 6일에 개시된 영미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제2차 세계대전과 더 나아가 “현대 세계사의 분수령”으로 일컫는다. 하지만 D-데이는 서부전선의 분수령일지는 몰라도, 그 이상은 아니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도입부에 나오는 오마하 해변의 전투 장면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D-데이에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한 연합군 가운데 24시간 안에 목숨을 잃은 전사자는 2,000명 안팎이었다. 이런 수준의 인명 피해는 동부전선에서는 피해는 축에도 끼지 못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노르망디에 발을 디딘 연합군은 독일군의 반격에 밀려 두 달 동안 해안 지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만을 거듭했다.
한편 “사상 최대의 작전”이라 불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실상은 거의 같은 시기에 유럽의 동쪽에서 소련군이 수행한 바그라티온 작전의 성과와 확연히 대비된다. 1944년 6월 22일부터 8월 19일까지 북으로는 발트해에서 남으로는 흑해까지 1,000㎞에 걸친 전선에서 소련군 240만명이 독일군 중앙집단군 120만명을 들이쳐 700㎞를 전진했다. 스몰렌스크에서 폴란드의 바르샤바 코 앞까지 성큼 다가선 셈이다. 이로써 스탈린은 전쟁의 주도권을 틀어쥐었다.
한 해 전에 벌어진 “사상 최대의 기갑전” 쿠르스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스탈린은 1943년 말에 이란 테헤란에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총리를 만나 회담을 했다.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길에 스탈린은 주코프 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루즈벨트가 1944년에 프랑스에서 광범위한 군사 활동을 전개하겠다고 확약을 했어. 루즈벨트는 약속을 지킬 거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그 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않더라도 우리에겐 히틀러의 독일을 쳐부술 힘이 충분히 있지.”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대비되는 바그라티온 작전의 대성공은 스탈린의 말이 허풍이 아님을 입증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전투 중에 죽거나 다치거나 사로잡힌 독일군인의 수가 1,350만명인데, 이 가운데 80%에 해당하는 1,000만명이 동부전선에서 나온 피해였다. 독일군 전사자의 90%가 소련군에게 당한 것이기도 했다. 소련 860만, 독일 325만, 일본 120만, 이탈리아 33만, 영국 32만, 미국 26만이라는 전사자 수만 따져보더라도 각 교전국의 피해 정도가 드러난다. 전쟁 기간을 통틀어 유럽에서 전사한 미군은 10만명인데, 1945년 4월 전쟁의 막바지에 베를린 점령하는 작전에서만 소련군 1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럽의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3월에 스탈린은 그답지 않게 상념에 잠겨 주코프 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전쟁이지. 전쟁이 우리나라 사람 목숨을 얼마나 많이 앗아갔는가. 우리나라에는 일가친척이 죽지 않은 집안이 십중팔구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걸세.” 스탈린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전쟁 동안 동원된 소련 군인 3,450만명 가운데 죽거나 크게 다치거나 적에게 사로잡힌 이가 2,900만명을 웃도니, 그 비율이 무려 84%를 넘는다. 1998년에 인터뷰를 요청한 미국인 역사가에게 한 참전 소련 군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소련이 겪은 인명 피해의 실상을 생생히 알려준다. 우크라이나의 시골 마을에서 자라면서 학교에 다닌 자기 또래 동무 100여 명을 다 알고 지냈다는 그 참전용사는 그 동무들 가운데 92명은 전선에서 죽고 6명은 불구의 상이용사가 되어 귀향했고 자기만 몸 성히 살아남았다고 술회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의 패배에 가장 큰 이바지를 한 나라는 소련이었다. 그러나 이 자명한 사실이 20세기 후반 냉전 시대에 이념 대결이 벌어지면서 자본주의 진영에서 감추어졌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자 추이코프 소련군 장군은 처칠이 써서 노벨상을 받은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의 수천 쪽 중에서 동부전선에는 겨우 열 몇 쪽이 할애되었다고 투덜댔다. 냉전이 끝난 지 한 세대가 되는 지금 누누이 진상을 가릴 필요는 없다. 21세기에 들어서서 우리나라에도 독소전쟁의 실상을 알리는 좋은 외국의 학술서가 여럿 번역되어 많이 바로잡히기는 했어도,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유럽 전역 동부전선의 역할을 터무니없이 과소평가하는 기운이 쉬이 가시지 않고 있다.
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동부 전선은 추축국이 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를 비롯한 다른 연합국과 싸운 전역을 일컫는다.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로 전쟁이 시작되었고, 베를린 공방전이 끝난 1945년 5월 9일 전투가 끝나게 되었다. 이 전역은 남유럽과 북유럽, 그리고 동유럽 전체를 전장으로 하고 있다. 구소련권에서는 대조국전쟁(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Velikaya Otechestvennaya voyna) 이라고 부르며 독일에서는 동부 전선(die Ostfront), 동부 전역 (der Ostfeldzug), 러시아 전역 (der Rußlandfeldzug),이라 불리고 있다. 전쟁 당사자국이 아닌 지역에서는 독일-소련 전쟁이라 불리며, 대한민국과 일본 등에서는 이를 축약해 독소전쟁 또는 독소전이라 부른다.
동부 전선의 여러 전투들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군사적 대립으로 여겨진다. 이 전투들은 예상치 못한 흉포함, 대량파괴, 대규모의 이동, 그리고 전투나 기아, 질병, 학살, 또는 폭로로 인한 엄청난 인명 손실로 특징지을 수 있다. 절멸 수용소, 죽음의 행진, 나치 게토, 포그롬 등이 위치한 동부 전선은 홀로코스트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의 인명 손실치인 약 7,000만 명 중 다수가 민간인으로 집계되는 3,000만 명이 동부 전선에서 발생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동부 전선은 나치 독일의 패배에 대한 주요 원인이라는 점에서 유럽 전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전쟁으로 제3제국은 파괴되었으며, 독일의 재통일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독일의 분단 시대가 열렸다. 무엇보다도 소련이 군사 분야와 산업분야에서 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2개의 주요 교전세력은 나치 독일과 소련이며, 이들의 동맹국도 전쟁에 참여했다.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무기대여법을 통해 미국과 영국도 소련을 지원했다. 핀란드-소련 국경지대와 무르만스크주에서 벌어진 소련의 작전도 동부 전선의 일부로 포함된다. 소련과 핀란드 간의 분쟁인 계속 전쟁 역시 동부 전선의 북측 전역이라 보기도 한다.
발발 원인
독일과 소련의 사상이 이질적인 것이었고 양국이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에 불만족스러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양국 정부는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를 유지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결과로 동유럽에서 상당한 영토를 잃었다. 페트로그라드의 볼셰비키들은 독일의 요구에 부응해 동맹국에 발트 3국과 핀란드, 폴란드를 비롯한 여러 지역을 할양했다. 이후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하고 점령 지역이 파리 강화 회의 조항으로 인해 해방될 때, 소비에트 러시아는 러시아 내전을 겪고 있었고 연합국은 볼셰비키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비에트 러시아 대표는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1939년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이 조약은 소련과 나치 독일의 불가침 조약으로 인정받았다. 이 조약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중앙유럽을 회복하자는 조항을 담고 있었으며 독일과 소련이 이 지역을 분할하는 것도 비밀 조항의 주요 골자였다. 핀란드와 발트 3국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폴란드와 루마니아는 분할되는 것이 비밀 조항의 주요 내용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1939년 8월 11일 국제 연맹 위원장인 카를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소련을 침공할 의도를 표현했다.
제가 착수하는 모든 것은 러시아인들을 겨냥한 것입니다. 만약 서구가 이 기회를 잡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고 아둔하다면, 제가 러시아인과 합의에 도달해 서구를 무찌르고 이후 제 전군을 동원해 그 패배를 소련에게 안겨줄 것입니다. 저는 그들이 우리를 굶기지 않게 하기 위해 지난 전쟁에서 그랬듯이 우크라이나가 필요합니다.
양국은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한 후 분할했다. 이후 소련은 1939년 11월 30일 핀란드를 공격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겨울 전쟁이다. 1940년 6월, 소련은 발트 3국을 병합했다.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은 소련의 발트 3국 점령을 인정하지 않았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은 히틀러가 소련의 침공을 선언할 때 소련의 발트 3국 및 루마니아 북부 병합이 독일의 조약 이해에 위배되었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표면상으로 발트 3국과 루마니아 북부 지역의 점령을 통해 소련에게 안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소련은 병합한 루마니아 영토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분할했다.
이데올로기
독일의 이데올로기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자서전인 나의 투쟁에서, 독일의 동유럽 정착을 위한 새로운 영토 확장인 레벤스라움을 주장했다. 그는 독일인의 정착과, 대부분의 원주민은 시베리아로 강제 추방하거나 노예로 시키는 것을 구상했다. 베를린에서의 두꺼운 나치의 선 (히틀러 같은 경우에는), 공산주의 하의 소련에서 나치즘을 도입해 아리아 민족을 제외한 슬라브인을 언테르멘스첸으로 보았다.) 히틀러는 독특한 측면에서 "종말의 전쟁"이라 칭했다. 게네라플렌 오스트라고 불린 계획은, 점령한 중부유럽과 소련의 시민들은 서부 시베리아로 추방하고 부분적으로 노예는 사라졌지만, 정복 지역에서 독일인을 이주시켜 독일 민족이 분포하게 하였다. 또한, 나치는 중앙과 동부유럽의 유대인을 추방시키기 위한 부분으로, 나치가 모든 유럽의 유대인들을 없애기 위한 목표로 학살했다.
키예프 전투의 승리 이후, 아돌프 히틀러는 소련을 군사가 약하고 즉각적인 정복이 가능한 국가로 보았다. 1941년 10월 3일, 그는 "우리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면 전체 구조는 카드집처럼 무너져 내릴 것이다."라고 연설했다. 따라서, 독일은 짧은 기습 정복을 예상하고 장기적인 측면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의 결정적인 승리 이후 독일군의 피해가 매우 커지자, 히틀러는 전쟁을 유럽에서 광대한 볼셰비키를 저지하기 위한 전쟁이란 목표를 세웠다.
소련의 이데올로기
소련의 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상을 확대하고 세계 혁명의 발전에 힘을 썼다. 현실에서는,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를 목표로 사회를 획일화하고 1930년대 동안에는 5개년 계획을 발표하여 경제 성장에 중점을 두었다. 나치 독일은 일관되게 반공 정권을 유지하며, 이것은 일본과 방공 협정을 맺으며 공식화되고 이탈리아 왕국도 가입하여 이 국가들은 공산주의와 대립 양상을 보였다. 나치 독일과 소련 사이 이념전은 대리전으로까지 이어졌다. 1936년,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 정권을 지원하고, 소련과 사회주의 세력은 스페인 제2공화국을 지원했다.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과 체코슬로바키아 분할 당시, 유럽에서의 집단 안전 보장 체제의 불완전성을 소련의 외무장관 막심 리트비노프가 주장했다. 이것 뿐 아니라, 소련은 반-독일 동맹을 협상하기 위한 프랑스와 영국의 무기력함을 보자 1939년 8월 소련과 독일 간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에 서명한다. 소련은 불가침 조약을 선전에 이용했다. 나치는 더 이상 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소련은 폴란드, 영국, 프랑스와 독일간의 전쟁을 비판했다. 그러나, 독일의 침공 이후 소련 정부의 입장은 완전히 바꿔 나치를 적으로 돌렸다.
양국 병력
독일 외에 독소전쟁에 참가한 세력은 헝가리 왕국, 루마니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슬로바키아 공화국,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있다. 핀란드는 겨울 전쟁 이후 계속 전쟁에도 참가했다. 독일 국방군이 진격하면서 반공주의의 파르티잔들이 서부 우크라이나, 발트3국, 크림 반도 등에서 호응했다. 가장 눈에 띠는 자원군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에스파냐 정부가 보낸 청색 사단이었다.
소련은 독일 국방군이 점령한 중부 유럽에서 폴란드, 유고슬라비아의 레지스탕스나 반나치 군대를 지원했다. 여기에 옛 폴란드 군 출신인 폴란드 동부군, 특히 폴란드 제1군과 폴란드 제2군은 붉은 군대과 함께 싸웠다. 자유 프랑스는 GC3(프랑스어: Groupe de Chasse 3)이 붉은 군대에 지원하였다. 영국군과 영연방군은 호송대와 제151 RAF 연대를 지원하며 전투에도 직접 참전하기도 했다. 미국과 캐나다 또한 철강 및 중요 부품을 무기 대여법을 통해 소련에 지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