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 ,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탐미 문학의 대가이자 노벨문학상 후보로 세 차례나 거론된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대표작 『금각사』다. 작품에서는 말더듬이에 추남이라는 콤플렉스를 안은 채 고독하게 살아가는 주인공 미조구치가 절대적인 미를 상징하는 ‘금각’에 남다른 애정과 일체감을 느끼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섬세하고 유려한 언어로 그려낸다. 미시마 문학 특유의 미의식과 화려한 문체, 치밀한 구성으로 정평이 난 『금각사』는, 1950년에 일어난 실제 방화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어 쓰인 ‘시사 소설’인 동시에 작가의 내면이 반영된 ‘고백 소설’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작품에는 젊은 시절의 고뇌와 더불어 말년에 극우 사상에 심취하기 전 작가가 거쳤을 내적 갈등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간행된 지 반세기가 넘은 지금까지도 『금각사』는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탐미주의 문학의 걸작이자 소설의 바이블로 자리매김하며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말더듬 증세는 나와 외부 세계 사이에 하나의 장애로 작용했다. 첫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첫 발음이 나의 내부와 외부 세계 사이를 가로막는 문의 자물쇠 같은 것이었으나 자물쇠는 순순히 열린 적이 없었다. 일반 사람들은 자유로이 말을 구사함으로써 내부와 외부 세계 사이에 있는 문을 활짝 열어놓고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해둘 수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했다. 자물쇠가 녹슬어버린 것이다.
--- p.10~11
밤하늘의 달처럼 금각은 암흑시대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꿈꾸는 금각은 그 주위에 몰려드는 어둠을 배경으로 할 필요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아름답고 가냘픈 기둥의 구조가 안으로부터 희미한 빛을 발하며 고요히 앉아 있었다. (……) 나에게는 금각 그 자체도 시간의 바다를 건너온 아름다운 배처럼 여겨졌다. 금각은 수많은 밤을 노 저어왔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항해. 그리고 낮 동안 이 신비스러운 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닻을 내린 채 뭇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밤이 오면 주위의 어둠으로부터 힘을 얻어 지붕을 돛처럼 부풀려 출범하는 것이다.
--- p.32~34
내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직면한 문제는 미(美)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골의 소박한 승려였던 아버지는 어휘도 부족하기에 단지 “금각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라고만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는 곳에 이미 미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에 불만과 초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미가 명백히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면, 나라는 존재는 미로부터 소외된 것이 된다.
--- p.34
“밟아. 네가, 밟아봐!” 무슨 소린지 나는 몰랐다. 하지만 그의 파란 눈은 높은 곳에서 명령하고 있었다. 그의 넓은 어깨 뒤에는 눈에 덮인 금각이 빛나고, 씻어낸 듯이 파란 겨울 하늘이 촉촉이 어려 있었다. 그의 파란 눈은 조금도 잔혹하지 않았다. 그것을,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서정적이라고 느낀 것은 어째서일까? (……) 저항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나는 고무장화의 발을 들었다. 내 발은 내려와, 봄날의 진흙처럼 부드러운 물체를 밟았다. 그것은 여자의 배였다. 여자는 눈을 감은 채 신음했다.
--- p.113
“‘남천참묘’라. 남천 스님이 베어버린 그 고양이가 예사롭지 않지. 고양이는 아름다웠단 말이야, 알아? 이를 데 없이 아름다웠지. 미라는 것은 마치, 뭐라고 할까, 충치 같은 거야. 그건 혀에 닿아 신경 쓰이고 아프게 해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지. (……) 고양이를 벤 것은 마치 아픈 충치를 빼내서 미를 척결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로 그것이 최후의 해결책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 미의 뿌리는 근절되지 않았고, 설령 고양이는 죽었어도 아름다움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이토록 해결이 안이했던 것을 풍자해서 조주는 그 머리에 신발을 올려놓았지. 그는 충치의 아픔을 참는 것 외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나는 처음으로 가시와기에게서 진정한 두려움을 느꼈다. 잠자코 있기가 두려웠기에 다시 되물었다. “너는 그러면 어느 쪽이냐? 남천 스님이냐, 아니면 조주냐?” “글쎄, 어느 쪽일까. 지금으로서는 내가 남천이고 네가 조주지만, 언젠가는 네가 남천이 되고 내가 조주가 될지도 몰라. 이 공안은 그야말로 ‘고양이 눈처럼’ 변하니까.”
--- p.211
영원의, 절대적인 금각이 출현하여 내 눈이 그 금각의 눈으로 변할 때 세계는 이처럼 변모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변모한 세계에서는 금각만이 형태를 유지하고 미를 점유하여 그 밖의 것들은 흙먼지로 만들어버린다는 사실을 이 이상 장황하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이전에 금각의 정원에서 창녀를 밟은 이후로, 또한 쓰루카와가 급사한 이후로 내 마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과연 악은 가능할까?’
--- p.231
문득 나는 가시와기가 처음 만났던 날 나에게 한 말이 기억났다. 우리들이 갑자기 잔학해지는 것은 화창한 봄날의 오후, 잘 깎인 잔디밭 위에서 나무 사이로 새어 나온 햇빛이 여기저기 비치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을 때 같은 순간이라고 했던 말이.
(……) 돌연히 나에게 떠오른 상념이 가시와기의 말처럼 잔학한 상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상념은 느닷없이 나의 몸속에서 생겨나, 아까부터 떠오르던 의미를 계시하며 환하게 나의 내부를 비추기 시작했다. 생겨남과 동시에 강력하고 거대해졌고, 오히려 내가 그것에 감싸였다. 그 상념이란 이런 것이었다. ‘금각을 불태워야 한다.’
--- p.276~277
“남에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 나의 유일한 긍지였다.”
금각의 아름다움과 정반대에서 억눌려 살던 말더듬이 추남의 고뇌
탄탄한 서사, 치밀한 구성을 가능하게 한 실화의 힘
추남인 데다 말더듬이에 내성적인 성격의 주인공 미조구치는 유년 시절부터 고독한 삶을 살아왔다. 작은 절의 스님이었던 아버지는 “금각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라고 말하곤 했고, 미조구치는 추한 자신과는 정반대에 있는 ‘금각’을 미의 상징으로 여기며 남다른 애정과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그 방식은 실로 독특했다. 이제껏 아름다움에서 소외되어 있었다고 자부하던 그는, 예상치 못한 폭격이 난무하는 전쟁 상황에서 비로소 절대미의 상징인 금각과 한낱 추한 말더듬이에 불과한 자신이 동일한 존재로 거듭난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도 금각은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채 여전히 견고하고 빛나는 자태로 존재감을 과시했고, 미조구치는 다시 혼자가 된 기분에 휩싸이며 좌절한다.
인물들의 심리가 복잡하게 시시각각 변함에도 불구하고 구성이 치밀하고 서사가 탄탄하게 이어질 수 있던 것은, 바로 『금각사』가 1950년 일어난 방화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어 창작된 ‘시사 소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시마 유키오는 약 5년에 걸쳐 금각사 방화 사건과 범인인 하야시 쇼켄의 삶을 면밀히 취재했고, ‘인간의 소외’와 ‘미에 대한 질투’라는 하야시의 증언에 주목했다. 물론 이는 하야시 쇼켄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30대를 맞이한 미시마 유키오가 육체미 운동에 집착한 이유 역시, 허약하게 태어난 데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결국 극 중에서 미조구치가 몸의 콤플렉스로 인해 열등감에 휩싸이고, 아름다움에서 소외된 자신의 처지를 견디다 못해 금각을 파멸시키려는 일련의 과정은 작가 자신의 맨얼굴이기도 한 셈이다.
‘논란 속의 작가’이자 노벨문학상 후보에 세 차례나 오른
미시마 유키오가 문학적 전환기에 써 내려간 ‘고백 소설’
‘쇼와의 귀재’라는 별명에 걸맞게, 미시마 유키오는 23년의 집필 기간 동안 180편의 소설과 60편의 희곡 그리고 막대한 분량의 수필 및 평론을 발표했다. 그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금각사』는 미시마 유키오를 당대 최고의 작가로 거듭나게 한 역작이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1957년 요미우리문학상을 수상한 데 이어,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연달아 세 차례나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우스이 요시미가 “이렇게 자신을 가득 채워 소설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랍다”라고 평했던 것처럼, 『금각사』는 미시마 유키오의 문학적 전환기에 쓰인 ‘고백 소설’이다. 타고난 불안 심리와 예민한 감수성에 초점을 맞춰 창작 활동을 이어온 초기와는 달리, 30대에 접어든 그는 능동적으로 ‘자기 개조를 시도’하는 육체적 지성에 주목한다. 이러한 시도가 처음 행해진 것이 『침몰하는 폭포』였고, 궁극적으로 완성된 형태를 이룬 작품이 『금각사』였다.
“나는 너에게 알려주고 싶었다구. 이 세계를 변모시키는 건 인식이라고. 알겠냐, 다른 것들은 무엇 하나 세계를 바꾸지 못해. 인식만이 세계를 불변인 채로 그대로의 상태에서 변모시키지. 이 삶을 견디기 위해서 인간은 인식을 무기로 삼게 됐다고 할 수 있지.”
“세계를 변모시키는 건 절대로 인식이 아니야”라고 나는 얼떨결에 고백에 가까운 위험을 무릅쓰고 반박했다. “세계를 변모시키는 건 행위야. 그것밖에 없어.”
-본문 중에서
극 중에서 주인공 미조구치가 안짱다리인 가시와기의 도움으로 인식의 세계에서 벗어나 ‘행위자’로 거듭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나약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내던지고 육체미 운동에 열중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하려는 작가의 의지와 맞닿아 있다. 『금각사』가 간행된 지 14년 후, 미시마 유키오는 할복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자신을 개조시키면서까지 삶을 살아내려던 그가 어쩌다 극단적인 죽음에 이르렀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여전히 미시마 유키오가 말년에 걸었던 행보는 짙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어, 개인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중요한 분기점에 쓰인 『금각사』가 지닌 가치는 여전히 생생하다. 작품에는 젊은 시절의 고뇌와 더불어 극우 사상에 심취하기 전 그가 거쳤을 내적 갈등의 실마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금각사』와 미시마 유키오에 따라붙는 수식어들은 다양하지만, 그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탐미주의 문학의 대가라는 것은 모두가 합의하는 사실이다. 미시마 유키오가 말년에 걸었던 극우적 행보와는 별개로, 그의 독특한 미의식과 유려한 문장, 치밀한 구성, 섬세한 심리 묘사를 평가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본의 근대 비평을 확립한 문학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는 『금각사』를 두고 “소설이라기보다 매우 아름다운 서정시”라고 극찬하며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기풍에 거듭 감탄했다. 베스트셀러 『냉정과 열정 사이』를 쓴 작가 쓰지 히토나리 역시, “『금각사』만 수십 번 넘게 읽었다”라고 말하며 미시마 유키오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미라는 관념은 천박하고 바보 같지만 국보에 방화하는 범죄 동기로는 충분할지도 모른다.
-미시마 유키오, 『누드와 복장-일기』(1959)
미시마 유키오 문학에서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하는 이유는, 자신의 내면과 외부 세계를 일치시킬 수 없어 자기혐오에 빠지고 마는 근본적인 딜레마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인 이상, 완전무결한 대상에 매료되면서도 한없이 위축되기 마련이다. 금각 같은 절대미를 선망하지만 그에 못 미치는 자신의 모습에 괴로워하다 끝내 우상을 파멸시키려는 미조구치나 하야시 쇼켄 같은 면모를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금각사』는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존재가 품은 심연을 적나라하게 내보이고 있다. 문장은 한 편의 서정시처럼 더욱 돋보이고, 인물들의 심리 묘사는 미세한 떨림이 전해질 정도로 섬세하며, 아름다움 자체를 표현할 땐 화려하지만 결코 과하지 않다. 그렇기에 출간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금각사』는, 수많은 작가들이 습작하는 ‘소설의 바이블’이자 전 세계 독자들의 감성을 건드리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탐미 문학의 걸작’으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금각사>는 실화를 소설화했다. 아름다운 일본 국보에 불을 지른 한 어린 중 이야기다. 특정 사건에 작가로서의 상상력과 치밀한 설계, 정교한 서사를 불어넣었다.
한 줄 문장을 완결된 작품으로 만드는 능력, 무형의 영감 하나를 유형의 건물로 뚝딱 지어내는 건축술이 놀라웠다. 누에고치에서 실 하나를 뽑아 가늘게 나누고 나눈 뒤 씨줄, 날줄을 엮어 근사한 옷 한 벌을 직조해내는 능력이
미려한 문장이다. 매 쪽마다 철학과 미학, 문학이 합해진 명문장의 향연이다. 예컨대 주인공인 말더듬이에 대한 묘사다. 말을 할 때 어색함, 답답함, 부조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은 한 단락 글로 절묘하게 표현했다.
말더듬이가 말문을 열려고 조바심을 치고 있는 동안, 나는 마치 내부의 찰진 찰떡에서 몸을 떼 내려고 파닥거리며 몸부림 치고 있는 참새와도 다를 바 없었다. 겨우 몸을 떼어 냈을 때는 이미 늦다. 바깥 세계의 현실이 내가 쩔쩔매고 있는 동안, 일손을 쉬고 기다려 주는 듯 여겨질 때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기다려주는 현실은 이미 신선한 현실이 아니다. 내가 애써서 겨우 바깥 세계에 도달해 보았자 언제나 거기에는 순식간에 빛이 바래고 어긋나 버린... 그리하여 그것만이 내게 걸맞는듯한 낡은 현실, 절반쯤 상한 냄새가 나는 현실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었다. -본문
열등의식을 가진 이 어린 중은 일련의 사건을 거친 후 모두가 숭배하는 건물을 불태우기로 작정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외친다.
'인간처럼 필멸한 것은 근절시킬 수 없지만, 금각사처럼 불멸한 것은 소멸시킬 수 있다.'
이 책의 주제를 압축한 이 문장은 역설이란 단어를 오래도록 곱씹게 만든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즉 일회적이다. 그런데 사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은 영원하다. 사람 한 명이 죽는다고 해서 인간이란 종이 근절될 수 없다. 반면에 아름다운 건축물, 예컨대 금각사 같은 것은 영원하리라 여긴다. 그러나 사실 언젠가는 사라진다. 이 문장을 읽고 사유하는 일만으로 독자는 일정 부분 문학적 철학적 성취를 이룬다.
이 소설은 기묘한 마력이 있어 첫 페이지부터 홀연히 빠져든다. 그날은 예외였다. 몇 장 넘겨도 도무지 감흥이 일지 않았다. 내 취향이 변한 걸까. 감성이 마른 걸까. 아니면 훌쩍 성장해 버린 걸까. 별 생각을 했다.
그렇게 끝났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혹시나 하는 의문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번역 때문이 아닐까 하는.
곧장 국회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앞서 읽은 번역본은 ‘아무개’가 했다. 도서관에서 원래 소장했던 김후란 번역 본(1988년, 학원사)을 펼쳤다. 그런데 첫 장을 읽자마자 이내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갔다. 두 개의 간극은 번역의 차이였다.
소설가 신경숙을 파멸로 몰아간 작가의 작품
다음은 번역자 김후란(시인)과 추억이다.
명작을 읽으면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된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고픈 욕구다. 학원사를 통해 김후란 선생하고 통화했다. 선생에게 격정의 독후감을 전하며 다른 작품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국내에는 번역된 작품이 없다는 답이 왔다. 당시는 쌍 팔년 시기다. 다른 작가 작품 하나를 소개해줬는데 성이 안찼다.
훗날, 한 20년 후 쯤 어떤 책 행사장에서 김후란 선생을 만났는데 아쉽게도 당시 통화한 일을 기억 못했다.
어쨌거나 나는 <금각사>의 갈증을 한 작품을 되풀이해 읽는 일과 그 책을 추천하는 일로 채웠다. 한때엔 국내에 출판되지 않은 작품을 원서로 읽기위해 일어 학원을 다닌 적도 있었다. 그만큼 강렬했다.
번역의 문제에 또 하나 언급할 사건이 있다. 신경숙의 표절시비다. 신경숙은 자신의 소설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또 다른 소설 <우국> 내용을 표절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여러 가지 정황이 나왔는데, 내가 보기엔 딱 하나 증거로 ‘유죄’가 입증될 법했다. 다음 문장이다.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
나는 <우국>을 읽을 때 이 문장에서 오랫동안 눈을 멈추었다. 매우 독특한 표현이어서 머리에 각인되었었다. 문학도라면 누구도 우-연-히, 같은 문장을 구사할 수 없다! 따라서 신경숙의 해명은 믿기 힘들었다.
그 표현은 원래 '...레이코는 기쁨을 알았고...'라는 식으로 단순했다. 번역의 손을 거쳐 탄생한 문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신경숙 표절사건의 다른 포인트는 번역의 문제이며, 문장에 관한 문제였다. 김후란이 없었다면, 그렇게 사람 잡을 만큼 인상적이게 번역하지 않았다면 사건은 없었을지 모른다.
평범하지 않은 인간이 갖는 불멸과 탐미의 욕망
<금각사>의 주제는 절대 미의 추구다. 어린 중이 불을 지른 이유, 즉 어떤 영원성과 불멸의 아름다움을 소멸시키고 싶은 욕망은 평범하지 않은 인간이 종종 갖게 되는 치기어린 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