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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쟁, 미국 독립 원인, 왕조 전쟁, 세력 균형

Jobs9 2024. 11. 20.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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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전쟁과 세력 균형


17세기 후반으로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유럽에서는 큰 전쟁이 여러 번 일어났으며, 그러한 전쟁을 통하여 유럽의 국제 정치의 틀이 잡히고, 해외 식민지 쟁탈전의 판가름이 났다.

에스파니아 왕위 계승 전쟁은 에스파니아 왕이 루이 14세의 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망하자, 두 나라를 합침으로써 프랑스가 지나치게 강대해질 것을 두려워한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이 이를 방지하려는 데서 일어났다. 긴 전쟁 끝에 유트레히트 조약이 체결되고(1713), 루이 14세의 손자는 두 나라가 통합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에스파니아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으나, 영국은 캐나다의 토대가 될 식민지를 프랑스로부터 얻는 동시에 에스파니아로부터는 지브로올터를 얻어 지중해의 관문을 장악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 전쟁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황제의 지위를 계승하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실레지엔을 점령하고, 바이에른, 프랑스, 에스파니아가 저마다 영토를 얻고자 프로이센에 가담하여 일어났다. 이 때, 영국은 약세의 오스트리아를 원조하였다. 엑스라샤펠 조약(1748)으로 각국은 점령한 땅을 오스트리아에게 돌려 주기로 하였으나, 프로이센만은 실레지엔을 그대로 보유하였다. 7년 전쟁(1756~1763)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프로이센에 대한 복수전이었다. 여제는 실레지엔을 탈환하고자 러시아, 스웨덴, 작센, 그리고 프랑스를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고, 영국은 이번에는 약세로 몰린 프로이센을 원조하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여러 번 어려운 고비를 당하였으나 이를 극복하고, 파리 조약(1763) 으로 실레지엔의 보유를 확인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아이들
7년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해외 식민지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그 결과, 영국은 신대륙에서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 강 동쪽과 캐나다를, 에스파니아로부터는 플로리다를 획득하고, 인도에서도 프랑스에게 승리하여 오래 계속된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러한 전쟁에는 몇 가지 공통된 중요한 특징이 있었다. 첫째, 국민적인 이해 관계보다 왕조적인 이해 관계가 앞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유럽에서의 큰 전쟁은 해외 식민지와 무역의 패권을 둘러싼 전쟁이기도 하였다는 점이다. 세째, 유럽 국제 정치의 가장 중요한 틀이라고 할 수 있는 ‘세력 균형’이 작용하고 있는 점이다. 이 세력 균형은 한 국가가 지나치게 강대해짐으로써 주변 국가에 위협을 가하게 되는 경우, 위협을 받은 국가들이 결속하여 이를 억제하고 세력의 균형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세력 균형의 작용에 있어 영국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7년 전쟁
Seven Years' War | The French and Indian War


시기
1756년 ~ 1763년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다. 프로이센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 러시아 제국, 영국, 프랑스 왕국, 스웨덴, 스페인 왕국 등 당시 유럽 열강 전부와, 기타 포르투갈 왕국이나 신성 로마 제국과 이탈리아반도의 크고 작은 제후 국가들까지 참전했다. 

아시아 쪽에서는 무굴 제국도 끼어들었다. 게다가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가 있는 신대륙에서는 아예 유럽 본토와 별개로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고 부를 정도로 판이 커져버려 이 식민지들이 모국을 따라 서로 싸우고, 이 싸움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끌어들이며 싸웠다. 

 

 

 

 

배경

7년 전쟁



단순하게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으로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빼앗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이를 되찾고 프리드리히 2세에게 복수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복수는 단순히 개인적 원한을 떠나, 지난 전쟁으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끊고 정치적으로 완벽히 독립한 프로이센의 국력을 철저히 박살내고 프로이센 왕을 과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처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봉신으로 되돌려놓고 프로이센을 철저히 분할, 과거 변경백국 수준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만 볼 경우 이 전쟁이 유럽 전역 및 세계 각지로 확산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강대국으로 부상한 프로이센을 혼자서 압도할 수 없어서 동맹국을 끌어들여야 했고, 당시 유럽의 외교 관계는 여러 국가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전통적으로 영국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의 팽창 야욕에 대항하고 있었고, 프로이센은 이전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공격한다면 프랑스가 프로이센 편에서 참전하는 것은 기정사실과도 같았다. 전쟁이 발발할 경우 프랑스는 예전부터 눈독들이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이탈리아반도 북부를 침략할 것인데, 이미 프로이센만으로도 버거운 오스트리아 입장에서 강력한 프랑스군을 상대로 또 다른 전선을 형성하는 것은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프랑스를 이탈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동맹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한편, 영국의 하노버 왕가는 오스트리아 편으로 참전할 경우 프로이센과 프랑스라는 두 육군 강국 사이에 끼어있는 하노버를 방어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 불안에 떨고 있었다. 당시 영국은 하노버 선제후국과 동군연합을 구성하고 있었는데, 조지 2세는 영국 국왕인 동시에 하노버의 선제후로써, 하노버의 안전을 우선 순위로 두고 있었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프로이센을 붙잡아 두는 탱커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지난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한심한 전과를 보인터라 영국은 오스트리아가 미덥지 못하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영국은 하노버를 지키기 위해 러시아에 군자금을 지원해서 러시아 군대로 프로이센을 견제하는 동시에, 프로이센에도 접근하여 하노버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러시아의 경우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북부의 발트해 연안으로 진출하고자 하고 있었으며, 이를 완수하기 위해 프로이센과 대결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스웨덴이나 독일의 작은 공국들 등 크고작은 나라들이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유럽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는 7년 전쟁 발발 이전에도 북미와 인도에서 식민지를 두고 이미 무력충돌을 벌이는 중이었다. 거기에 스코틀랜드 왕국과의 연합왕국을 계기로 앤 여왕 때부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1801년까지 프랑스의 왕을 자칭하기도 했다. 물론 진지하게 왕위를 요구한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폼이었다.

이렇게 얽히고 섥힌 유럽 국가들 사이의 교착 관계는 미묘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서 잘 싸운다고 하더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세습령의 수장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으로부터 슐레지엔을 회복하겠다는 집념에 불타고 있었고, 어떻게 해서든지 외교를 통해서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자 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넘겨준다는 강수까지 두면서 프랑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고, 비밀리에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다. 이 소식을 들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러시아와 프랑스를 견제하고자 영국과 동맹하기로 하였다. 프로이센이 영국편으로 돌아서 버리자 동맹국 없이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버린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오스트리아는 이른바 동맹의 역전을 통해 단숨에 프로이센을 3면에서 포위하게 되었다.

원래 '오스트리아-영국 동맹 vs 프로이센-프랑스 동맹'이였던 외교 관계가 순식간에 '오스트리아-프랑스-러시아 vs 프로이센-영국'으로 바뀐 것이다.

전쟁은 프랑스 해군이 영국령 메노르카 섬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의 프로이센은 예방전쟁 차원에서 작센 선제후국을 침공하여 점령했다. 이는 독일 내에서의 전쟁에 소극적이었던 프랑스를 자극했다.

 

 

중부 유럽 전역 (1756 ~ 1761)

프리드리히 2세는 전력을 다해 오스트리아를 공격해서 먼저 전열에서 이탈시킨 후, 러시아를 상대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를 위해 개전 첫 해인 1756년 8월 기습적으로 오스트리아 편의 영방국가인 작센 선제후국으로 진군했다. 프리드리히 2세의 계획은 작센을 교두보 삼아 보헤미아를 거쳐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을 점령하여 오스트리아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것이었다. 비록 오스트리아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이후 군제를 개편하고 군비를 강화했다고 하지만, 이러한 프로이센의 기습은 오스트리아가 미처 군대를 동원하기 전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프로이센은 손쉽게 작센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고, 로보지츠 전투에서 뒤늦게 달려온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작센에서 겨울을 난 프로이센 왕국군은 이듬해 봄에 보헤미아로 진격하여 라이헨베르크 전투, 프라하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며 보헤미아의 수도인 프라하 공략을 가시권에 두었다. 하지만 1757년 6월 콜린 전투에서 뼈아픈 패배를 당하면서 프리드리히 2세의 조기종결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해 여름 7만 5천의 러시아 제국군이 동프로이센으로 진격하여 프리드리히 2세가 남겨둔 2만 5천여명의 수비군을 격파하였다. 하지만 러시아군이 내부사정으로 후퇴하여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러시아군은 진창길 투성이인 동유럽의 긴 보급선을 통해 겨우 보급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이후에도 일정 수준의 탄약을 소비하고 나면 승전 이후에도 추가 전투를 회피하고 후퇴하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한편, 기회를 엿보던 스웨덴군은 프로이센의 위기를 틈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하고, 1만7천명의 비교적 적은 병력으로 포메른을 침공하였다. 

그 사이 프랑스는 하노버를 성공적으로 공략하고 있었으며, 독일 내 친오스트리아 제후국들과 연합하여 서지에서 프로이센을 향해 진군하였다. 사방에서 적이 몰려오면서 프로이센에게 암울한 상황이 되었지만, 러시아군이 한동안 움직이지 않을 것을 짐작한 프리드리히 2세는 과감하게 주력군을 서부로 돌렸다. 

프리드리히 2세는 1757년 말에 벌어진 로스바흐 전투, 로이텐 전투에서 각각 프랑스-독일 제후국 연합군과 오스트리아군을 대파하며 다시 한번 천재적인 전술역량을 보여주었다. 로스바흐 전투의 패배로 인해 본래 독일 내 전쟁에서 전의가 높지 않던 프랑스는 이후 대 프로이센 전선에서 사실상 이탈하였으며, 로이텐 전투는 세계 전사에서 손꼽히는 천재적인 작전으로 아직까지도 회자되며 각국의 사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1758년 1월 러시아군이 침공을 재개하여 동프로이센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프로이센에게 있어서 동프로이센은 낙후된 지역이라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곳이었고, 프리드리히 2세는 일단 먼저 오스트리아에 전력을 집중하여 격파하고 난 뒤에 러시아를 상대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하지만 1758년 여름까지 이어진 프리드리히 2세의 오스트리아 공세는 보급부대의 붕괴 등으로 인하여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본국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사이 본격적으로 영국의 군자금 지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프로이센에게 있어 호재였다. 그해 여름 보급 문제 때문에 한동한 지체되어 있던 러시아군이 다시 진격을 시작해오자, 프리드리히 2세는 요격에 나섰다. 

하지만 1758년 8월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러시아군과 맞붙어 양패구상의 피해를 입으면서 슬슬 암울한 기운이 돌기 시작하더니, 호크키르히 전투, 카이 전투에서 연전연패했고 1759년 8월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최악의 패배를 당하며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렸다. 프리드리히 2세가 독약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전투 직후이다.

7년 전쟁 전반부의 프로이센의 전략은 오스트리아-러시아 동맹군이 프로이센 영내에서 합류하기 전에 선제적으로 멀리 요격을 나가서 각개격파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각 전투에서는 프로이센 정예 보병이 상대의 예상을 뛰어넘는 행군속도로 상대의 측면을 후려쳐 진영을 무너뜨리는 전술을 즐겨 사용하였다. 만약 상대가 측면 방어에 신경을 쓴다고 해도 좌익과 우익 중 어느 곳을 집중적으로 후벼팔지를 정해서 상대를 농락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로이센의 전략전술을 연구한 오스트리아-러시아 동맹군은 프로이센 주력군이 접근해 오면 근처의 방어가 용이한 곳에 주저앉아 우주방어를 하면서 동맹국 군대가 합류하기를 기다리는 방식으로 대응하였으며, 측면에는 언덕이나 습지대를 끼고 진형을 펼쳐서 프로이센의 측면공격을 원천봉쇄하였다.

이런 수비적 전술을 상대하려면 경기병을 풀어서 적의 정찰과 보급을 방해해야 하지만, 오스트리아-러시아 동맹군이 동유럽 평원 지대에서 경기병을 풍부하게 수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프로이센이 경기병 전력에서 열세에 있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프로이센이 적 진영에 대한 정면돌파를 시도해야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이러한 선택의 대부분은 결과가 좋지 않았다. 특히 러시아 병사들은 프로이센 정예병을 상대로 끈질지게 전선을 사수하며 버텨내어, 프리드리히 2세에게 패배의 쓴맛을 안겼다.

조금씩 빼앗기는 영토와 계속되는 병력의 손실로 인해 프로이센의 군세는 러시아-오스트리아-스웨덴 연합군에 비해 열세에 처했으며, 그나마 남아 있는 군대의 다수도 신병이 차지했다. 당시 전황은 일시적으로 프로이센의 수도인 베를린이 함락될 정도로 프로이센이 불리했으며, 그나마 프로이센이 리그니츠 전투와 토르가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분전하였지만 압도적인 국력 차로 찍어누르는 다굴빵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후 프로이센은 공세를 포기하고 방어전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으며, 적의 길어진 보급선을 습격하여 진격을 늦추려고 노력하였다. 그나마 이때까지 프로이센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1759년부터 프랑스군을 상대로 영국-하노버 연합군이 선전하며 프랑스의 공격을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하노버군 역시 방어전 중심으로 일관하고 있었고 공세는 여전히 동맹국이 주도하고 있었다.

특히 1761년 12월에 러시아군이 끈질긴 공성 끝에 콜베르크를 함락시키면서 전황의 무게추가 러시아-오스트리아-스웨덴 연합군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발트 해의 항구 도시인 콜베르크가 러시아의 손에 떨어지면서 해운을 통한 보급이 가능해졌고, 이 때문에 그동안 러시아군을 괴롭히던 보급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 프로이센의 패배가 임박했다고 판단한 영국은 프로이센의 항복을 종용하면서 군자금 지원을 끊어버렸다. 영국의 지원이 끊어지면서 그동안 어려운 상황에도 10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프로이센의 군세가 6만까지 줄어들었고, 베를린까지 다시 포위되면서 연합군이 승기를 잡은듯 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프랑스가 영국과의 전쟁에 치중하느라 일찍 대 프로이센 전쟁에서 이탈했다는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프랑스와 어렵게 손을 잡은건 프로이센을 효과적으로 다굴하기 유럽 최대 육군 국가인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해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까지 프랑스에 내어줄 의향이 있었는데, 정작 프랑스는 몇 번 발렸다고 초반부터 이탈해버리니 속이 상했을 것이다. 결국 이는 유럽 전장에서 동맹국이 프로이센을 빨리 무너트리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 외에도 오스트리아의 러시아에 대한 불신은, 가뜩이나 병참 문제로 승패 무관하게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러시아군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만 오스트리아측 입장에서도 지난 전쟁당시 혼자서 프랑스-프로이센 양국을 상대하다가 이번엔 러시아와 함께 프로이센과 2:1 승부를 펼친 것이니 손해는 아니었다. 그리고 프랑스가 아주 발을 뺀 것도 아니고 서부 독일 지역에서 계속 군사행동을 펼치긴 했는데, 프로이센 이전에 서북 독일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하노버 공국, 그리고 하노버 선제후국과 동군연합 상태인 영국과 격전을 치르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부독일 지역만이 아니라 영국은 다수의 병력을 기습적으로 프랑스 북부 해안에 상륙시켜 약탈 및 파괴행위를 하고 있었기에 후방을 비울 수 없었던 상황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도 사실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참전해주면 좋지만, 그냥 대륙에서 상대할 적을 하나 줄이는 것만 해도 엄청난 전략적 이득이었고 애시당초 동맹 체결 당시부터 프랑스의 주 전략목표가 영국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좀 섭섭하다는 의사표시만 하고 그쳤다.

 

 

유럽 외 전장
중부 유럽 전선과 달리, 식민지에서는 프랑스군이 압승하고 있었다. 북미 전역에서는 유능한 장군이었던 루이 조제프 드 몽캄과 프랑스군의 선전으로 영국군은 참패를 거듭하던 상황이었다. 일례로 1758년 뉴욕주의 카리용 요새 전투에서 1만 6000명의 영국군이 몽캄 장군이 이끄는 3600명에 불과한 프랑스군에 대패를 당한다. 

그러나 영국군은 본국에서의 대대적인 증원과 제임스 울프라는 뛰어난 지휘관의 등장으로 전세를 역전했다. 특히 프랑스령 캐나다의 중심부인 퀘벡에 대한 공성전중 벌어진 아브라함 평원 전투에서 제임스 울프 장군은 4,400명의 병력으로 5,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몽캄 소장을 전사시키지만 그 자신도 역시 전투 막바지에 전사한다. 피해 자체는 영국이 좀 더 컸지만 영국 해군 때문에 병력충원과 보급이 막힌 프랑스군은 더이상 싸울 수 없었다. 공군도 없었던 시절이니, 제해권을 내주어 배후 보급선이 막혀버린 프랑스군의 패퇴는 예정된 수순이었던 셈. 

울프의 죽음은 대(大) 윌리엄 피트 등에 의해 적극적으로 우상화될 정도로 영향이 컸는데, 이 전과를 통해 루이지애나를 제외한 북미 전역의 프랑스 세력을 소멸시켰기 때문이다. 루이지애나도 먹으려고 했는데 황열병 때문에 침공을 못한 것이었다. 거꾸로 나폴레옹이 북미 전역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것도 모기로 인한 황열병 때문이다. 

프랑스도 한때 승리의 기회가 있었고, 영국의 북미주둔군을 절대적인 위기로 몰아넣은 적이 있었으나, 영국 함대가 신속하게 병력증원을 해주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프랑스 주력함대가 영국 함대에게 격파당해 대서양 제해권을 영국에 빼앗겨 본국으로부터의 추가증원에 실패한 것이 북미 전역을 결정지었다. 

그리고 북미 전역을 별도로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고도 한다. 영국군과 프랑스군 모두 병력과 보급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각기 다른 원주민 부족과 연합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도 클라이브가 이끄는 영국 동인도회사군이 플라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친영국적인 벵골 태수를 앉히고, 남인도에서 프랑스의 핵심거점인 퐁디셰리를 함락시켰다. 

1760년, 프랑스의 동맹으로 참전한 스페인도 영국군에게 쿠바와 필리핀을 빼앗기며 패배를 거듭했다. 

영국군은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를 모조리 휩쓸었고, 필리핀과 쿠바라는 스페인의 식민제국의 두 핵심지역을 장악했으며, 쿠바에서 막대한 부를 전리품으로 확보해 전시재정을 크게 보충했다. 스페인군은 남미 우루과이 지역에서 포르투갈군 수비대를 격파하고 브라질로 약간 진격했으나 큰 의미는 없는 승리였다. 이로써 대영제국과 거의 판도가 맞먹던 프랑스 식민제국은 몰락했다. 
그러나 영국의 이와 같은 승리는 모두 비유럽 지역에서의 것으로, 대륙의 동맹국 프로이센이 패전 직전에 내몰리면서 이와 같은 승리는 빛이 바래고 있었는데...

 

 

 

 

다시 중부 유럽 전역 (1762 ~ 1763)

1762년 초, 대프로이센 동맹의 한 축이던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죽고, 그 뒤를 표트르 3세가 이었는데, 이 표트르 3세는 열렬한 프리드리히 2세 숭배자였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절부터 천재적인 용병술을 보였던 프리드리히 2세는 당시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유럽 전역에서 인기가 드높았는데, 표트르 3세 역시 왕자 시절부터 프리드리히 2세의 무용담에 감복하여 그의 열렬한 빠돌이가 되었다. 

표트르 3세는 즉위하자마자, 프리드리히 2세에게 영토를 포함, 전쟁 이전 상태로의 회귀를 아무 조건없이 제안했고, 품 안의 독약을 언제 먹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프리드리히 2세는 냉큼 화친을 받아들였다. 표트르 3세는 그걸로 부족해서, 대프로이센 전쟁의 동맹국이던 스웨덴까지 설득시켜 스웨덴도 전쟁에서 이탈하게 만들었다. 이 믿기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을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Mirakel des Hauses Brandenburg)"이라고 부른다. 
이런 대반전으로 인해 프랑스의 루이 15세나 마담 드 퐁파두르, 그리고 무엇보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원래 대프로이센 동맹은 마담 드 퐁파두르, 마리아 테레지아, 옐리자베타 여제 때문에 3부인 동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옐리자베타 여제의 죽음이 전황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뒤엎을 정도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 일이 현실로 닥친 것이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7년에 걸친 전쟁으로 더 이상 국력이 남아나질 않는 상태였으며,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 전쟁의 패배로 전쟁을 지속할 동기가 사라진 상태였는데, 유일하게 건재한 동맹국 러시아가 이탈하니 그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준이 아니었다. 동맹 이탈도 이탈이지만, 이런 식의 말도 안되는 협상 내용을 그것도 러시아가 먼저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표트르 3세가 단순히 빠심에 의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게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 러시아는 근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며 표트르 3세는 이 근대화의 모델을 프로이센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미 몇 세기 전부터 러시아에 북부 독일 출신의 상인이나 기술자들이 많이 들어와 살아서, 러시아어로 '독일인'을 뜻하는 немец의 어원이 '외국인'일 정도였다. 즉 촌동네인 러시아까지 들어와 살 외국인은 독일인 정도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는 종교의 자유와 러시아의 봉건제도에 귀속되지 않을 특권을 약속하면서 이들을 붙잡아두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표트르 3세의 외할아버지인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를 근대화시키기 위해 많은 북부 독일 출신의 지식인과 장교를 초빙하여 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러시아 토착 귀족들은 궁정의 요직을 차지한 독일인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옐리자베타 여제가 독일인을 증오해서 정권을 잡자마자 러시아 궁정에서 독일인 관료들을 쓸어내 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표트르 3세가 러시아 토착 귀족을 억누르고 유럽식 근대화를 재개하기 위해서는 프로이센과의 관계를 재건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3국동맹으로 프로이센을 쥐어패는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프랑스는 이미 식민지 전쟁에 눈을 돌려 유럽 전장에서는 거의 이탈한 상황이었으며, 오스트리아도 사실상 마른 수건을 쥐어짜내며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미 공세 종말점에 도달했을뿐만 아니라 재정적 압박을 받고 있던 러시아가 프로이센을 멸망시키긴 어려웠고, 러시아의 전쟁 목표 또한 프로이센의 멸망은 아니었다. 

이 전쟁이 끝난 뒤에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의 뒷마당이나 다름없는 동유럽과 흑해 연안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었으며, 이 때를 대비해서 프로이센을 살려두어 오스트리아의 힘을 분산시키는 것이 더 나았다. 실제로 표트르 3세는 6개월만에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서 폐위되었는데, 그 이후로도 러시아는 재참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 바로 예카테리아 2세가 프로이센과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오스트리아를 견제하면서 동유럽과 흑해 연안에서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즉, 동맹에서 빠진게 마냥 이유없는 선택은 아니었다는 것.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전쟁 배상금이나 영토 일부의 할양처럼 러시아에게 유리한 조건을 내걸었다면 모르겠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이 부분에서 러시아가 가시적으로 얻은 성과가 없었다. 러시아가 7년 전쟁에 가담한 이유는 발트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동프로이센을 점령한 뒤 프로이센과 강화하여 동프로이센을 얻어낸 후 이를 폴란드의 쿠를란트-젬갈렌과 교환할 속셈이었다. 차라리 원래 속셈대로 아직까지 물러나지 않은 동프로이센을 내놓으라 하면 좋았을 것이다.

당시 프로이센-러시아 전선은 러시아가 유리하긴 했지만 보급선이 너무 길어져 사실상 공세종말점에 가까워졌고, 프로이센군은 이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반전을 꾀하고 있었다고는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약체화된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군을 견제하는 동시에 러시아군을 깨부수고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웠다. 괜히 이 일이 기적이라 불리는게 아니다. 즉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고는 하나, 그것으로 러시아 국내의 여론을 납득시키기엔 여러 모로 부족했다. 무엇보다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가 패전국 상대로 되려 패전국에 이득이 되는 미친 협상을 해버렸다는 것 자체가 국내 뿐 아니라 국외, 나아가 현대 외교사를 비롯한 역사계에서 보면 정말 어이없고 유례를 찾기 힘든 사례이다.

이렇게 표트르 3세의 삽질은 프로이센에겐 큰 회생 기회가 되어버렸고 이 때문에 표트르 3세를 몰아낸 예카테리나 2세조차 그렇게 타격을 입었음에도 6개월만에 좀비같이 살아나 오스트리아에게 대반격을 성공해버리는 것을 보고 승기를 다시 잡기 어렵다 판단했는지 표트르 3세의 명령으로 프로이센 지원을 하게된 러시아군을 물리는 것으로 전쟁을 그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의 마지막 국력 한 방울까지 쥐어짜내며 최후의 공세를 시도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기 시작했으며, 작센 전역에서는 1762년 10월 프리드리히 2세의 동생인 하인리히 왕자가 프라이베르크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였다. 이보다 앞선 1762년 6월에는 하노버의 빌헴스타흘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영국-하노버 연합군을 상대로 졸전 끝에 패배하였다. 프랑스는 안그래도 신대륙에서의 계속된 패배와 영국 해군의 항구봉쇄로 인해 전쟁 수행 의지가 떨어지고 있었는데, 두 전투의 패전 소식을 듣자 영국-프로이센 연합국과 강화하고 전쟁에서 완전히 발을 뺐다.

한편 1762년 뒤늦게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서 전쟁이 터졌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침공하였으며, 영국의 지원을 받은 포르투갈은 게릴라전을 통해 스페인을 격퇴하였다.

전쟁 마지막해인 1763년에 접어들면서, 유럽에서 오직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만이 전투를 지속하고 있었다.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군을 슐레지엔에서 거의 몰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작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모두 국력을 완전히 소진하여 상대에게 결정적 한방을 날릴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프로이센이 점령한 작센 영토와 오스트리아가 끝까지 사수하고 있던 슐레지엔의 영역을 교환하기로 합의하면서 1763년 2월에 길었던 7년 전쟁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7년 전쟁 결과
프로이센은 18만 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3만 3천 명이 사망했다. 오스트리아군은 151,026명이 전사하고 19,592명이 실종, 17,388명이 장애를 입었으며 78,360명이 포로로 잡혔다. 프랑스군은 20만 명이 전사하고 8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러시아군은 전사, 실종, 장애 인원 및 포로가 약 13만 8천 명, 영국군은 전사 및 장애 인원이 총 61,512명, 스페인군은 전사, 실종자 및 포로가 약 3만 4천 명이다. 스웨덴군은 2만 8천 명이 전사했다. 기타 국가 및 통계는 집계가 불가능하다.
7년 전쟁은 참전한 모든 국가에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남겼다. 전쟁 발발 전에도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 대부분의 참전국들의 재정 상태가 영 좋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서 수년간 사방에서 전투를 벌인 탓에 이미 전쟁 4년차인 1760년 경이 되면 모든 참전국들이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과거 유럽의 전쟁은 몇차례의 결정적 전투로 결판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큰 전투가 있고 난 뒤에는 이긴 쪽도 반년 이상 버로우하면서 천천히 세력을 회복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한번 전투에서 박살이 나도 몇달 내로 같은 규모의 대군을 또 일으킬 정도로 싸웠다. 가장 부유하다는 그리고 비교적 인력을 적게 동원했던 영국조차 7년간의 전쟁 기간동안 정부 부채가 5천 8백만 파운드나 증가했는데, 이 액수는 영국의 1년 국민총생산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프로이센은 영국의 원조금을 받고도 부족해서 자국의 화폐를 평가절하하는 극단적인 처방으로 빚을 해결해야 했으며, 오스트리아는 전쟁이 한창인 시절에 장교의 수를 줄여야 했고, 러시아는 황태자비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보석을 팔아서 군자금에 보탤 정도였다.
만약 전쟁이 한쪽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면 이긴 쪽은 상대로부터 많은 배상금을 뜯어내거나 새로 얻은 땅에서 세금을 걷어서 전쟁이 끝난 뒤에 어떻게든 해결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전쟁은 백중세로 끝났고 유럽의 국경선은 7년 전쟁 이전과 거의 바뀐 것이 없었다.
오스트리아와 마리아 테레지아는 막대한 국력을 소모하고, 또 불구대천의 원수 프랑스와 혼인동맹까지 맺었음에도 또 패배하여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물론 슐레지엔 자체는 이미 전쟁 전부터 프로이센이 실효지배하고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잃은 것은 거의 없었지만, 이후로 두 번 다시 슐레지엔에 대한 영유권을 명목 상으로도 주장하지 않았다. 전략적으로 실패한 마당에 경제적으로도 손실만 본 전쟁이었다. 슐레지엔이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 전체 세입의 22%가 걷히는 중요한 지역이기는 했지만 그것을 수복하겠답시고 전비로만 무려 오스트리아의 11년치 예산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종전 시점에서 오스트리아 국가 재정은 부도 직전이었지만 남편인 프란츠 1세의 뛰어난 재정 운용 능력으로 불려놓은 어마어마한 왕실의 사유재산을 써서 재정 파탄은 피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전쟁을 통해 얻은 것이 없지는 않았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전쟁을 통해 대외적 이미지를 일신하고 국력의 굳건함을 과시했다. 이전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절 때 한 수 아래 국가로 보았던 프로이센에 계속 털리면서 '이제는 지는 해'라는 이미지가 박혔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프로이센과 대등하게 싸우면서 타국이 오스트리아를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동맹의 역전으로 프로이센을 단숨에 포위하는 외교적 수완과 다굴에 힘입은 것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군사강국인 프로이센의 수도까지 털어볼 정도였다. 전쟁 준비와 수행 과정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도력을 의심했던 헝가리인 귀족과 체코인 도시민들을 상대로 다시 오스트리아의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고, 이후 프로이센에게도 오스트리아는 함부로 더 이상 도발하기 힘든 여전한 강대국이라는 위신을 새웠다.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독일어권 내 독보적인 일인자 지위에서 내려왔지만 대신 헝가리, 보헤미아 같은 다른 합스부르크 가문 직할 제후령들의 힘을 재확인하면서 훗날 백여년에 걸쳐 밟게 될 독일어권 내에서 입지가 약화하는 대신 독일과는 또 다른 독자적인 중동부 유럽 열강으로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합스부르크 제국 입장에서는 분명 잃은 것도 있지만 나름 얻은 것도 있었고,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과거의 신성 로마 제국 황실이라는 중근세적 정체성에서 독일과 문화적으로 통하지만 비독일인들의 입지와 영향력도 막강한 중동부 유럽 다문화 제국이라는 19~20세기적 정체성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던 복잡하고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프로이센은 승리하기는 했지만 막대한 전쟁 피해를 회복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전쟁 과정에서 국토가 초토화됐고 주변을 포위한 강대국들의 침공에 거의 단독으로 맞서야했으니 물리적인 손해는 프로이센이 가장 컸다고 할 만하다. 특히 장교진의 손실이 엄청났으며, 이 손실은 프리드리히 2세 사후에 일어난 나폴레옹 전쟁 때까지도 제대로 회복되지 못해 결국 프로이센군이 나폴레옹군에게 참패하여 굴욕을 겪는 주 원인이 되었다. 
더군다나 슐레지엔은 이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때부터 실효지배하고 있던 터라 승전으로 얻은 물리적인 이득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확고하게 다져 오스트리아가 다시는 슐레지엔을 넘보지 못하게 했고 전 유럽에 프로이센의 군사적 강대함을 알렸다는 것이 소기의 성과였다. 
러시아의 표트르 3세는 이 전쟁에서의 실책으로 몇 달만에 부인 예카테리나 2세의 궁정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지나친 친독정책으로 전쟁 승리를 날려먹은 것에 대한 러시아 제국 내부의 반감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무능의 대가로 표트르 3세는 폐위 후 목숨을 잃었다. 이와 별개로 이 전쟁은 러시아가 유럽의 국제 정치에 참여하는 시발점이었다. 러시아는 이전까지는 후진적인 사회구조와 경제 수준, 야만적인 문화 때문에 유럽의 일원으로 대우받지도 못했으며 아예 야만족으로 취급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바탕으로 유럽에서 일어난 국제전에 러시아가 소방수 역할을 하면서 서구 열강 정치에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할 만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7년 전쟁에서 국력을 거의 소진한 틈을 타서 7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을 일으키고 폴란드를 분할하면서 흑해 연안과 동유럽에서 영토를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영국은 이 전쟁으로 인해 인도와 북미의 식민지 전쟁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이들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장기간의 전쟁에 따른 지나친 전비 부담은 영국의 재정을 악화시켰다. 결국 이 재정난을 북미 식민지에서의 과세를 통해 메꾸려다가 북미 식민지 주민의 반발을 가져왔고, 결국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거기다 프로이센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실책까지 저지렀다. 물론 7년 전쟁 이전에도 영국이 프로이센에 재정 지원을 하는 대가로 온갖 내정간섭을 해 프로이센 내부에서는 영국에 대한 불만이 꽤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 7년 전쟁 때 영국은 유럽 한복판에서 프로이센이 여러 강대국에게 얻어맞는 것을 보고 있음에도 해외 식민지를 싹쓸이하고, 심지어 재정 지원까지 중단해 프로이센을 어려움에 빠뜨리기까지 하는 바람에 프로이센은 영국에 원한을 갖게 되었다. 영국은 의회제로 돌아가고 있었고, 이때 영국 의회는 왕가의 본가인 하노버보다 영국의 국익이 중요하다는 논리가 주를 이루고 있어서 프로이센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영국의 사정이 어떻든 간에 프로이센으로서는 영국의 이러한 행태가 박쥐같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훗날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프로이센은 미국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여 영국에게 엿을 먹였다. 이 때문에 미국 독립전쟁 때 영국은 유럽 본토 내에 변변한 동맹국 하나 없는 심각한 외교적 고립 상태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심각한 재정난을 겪기는 했지만 영국 본토는 전란의 피해애서 벗어났기에, 그리고 대량의 식민지를 얻어내며 유럽의 패권국으로 부상할 준비를 갖췄다.

본격 4배로 팽창한 영국의 북미 식민지



오스트리아가 이 전쟁에서 제일 망한거 같지만, 실제로 제일 쪽박찬 것은 프랑스였다. 오스트리아(그리고 러시아)는 전술한대로 명목상으로는 패전국이 됐지만 내부 결속, 군제 개혁, 국력의 건재함 과시 등 나름 얻은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루이 14세 말기부터 마이너스로 변하기 시작한 국가 재정이 악화된 건 물론이고, 캐나다와 미시시피 강 동쪽 전체를 영국에게 빼앗기고 인도 역시 영국에게 넘겨주어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도 막대한 피와 돈을 썼음에도 얻은게 없었지만, 이번엔 얻은게 없는 수준이 아니라 참전국 중 가장 큰 손실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몰랐겠지만 이번 전쟁으로 부르봉 왕가의 몰락의 씨앗도 심어지게 된다. 
예전에 영국과 싸울 때는 영국 해군에게 해외 식민지는 털려도 강력한 프랑스 육군이 유럽 대륙에서 영토를 얻어냈기 때문에, 휴전 협정시에 유럽에서 얻은 땅을 빼앗긴 해외 식민지와 교환하는 방식으로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프랑스군이 유럽에서도 전혀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식민지만 털리고 끝났다. 
원래 계약대로라면 오스트리아로부터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넘겨받아야 했지만, 오스트리아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나마 설탕과 커피로 막대한 수익을 보던 생도맹그 등 카리브의 식민지는 유지해서 최악을 면하긴 했지만... 이러한 막장테크를 제대로 탔기에 루이 16세 때는 국고가 바닥이 나서 난리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왕인 루이 16세는 오로지 영국을 엿 좀 먹이려고(!!) 다시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이기긴 했는데, 국가 재정은 더 악화되어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여기에 더불어 동맹의 역전 이후 프랑스 부르봉 왕가는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협력을 돈독하게 하기 위해 프랑스 왕위 후계자인 루이오귀스트와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를 정략 결혼시키고 얼마디 루이오귀스트가 왕이 되면서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때마침 시작된 민족주의의 여파로 30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죽일듯이 치고 받던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에 대한 엄청난 반감이 프랑스 시민들 사이에서 불어닥쳤고 이것은 고스란히 부르봉 왕가에 대한 반감으로 발전한다. 

압스부르고 왕조 이후 17세기 내내 내리막길만 타던 스페인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거쳐 보르본 왕조가 들어선 이후 체질 개선에 성공해 16세기의 전성기까지는 아니지만 예전 열강으로서의 국력을 상당 부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스페인은 7년 전쟁에서도 선전하여 플로리다를 영국에게 빼앗기긴 했지만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얻으며 중남미 일대에 거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며 원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미국 독립의 원인이 된 7년 전쟁


지구 위에서 벌써 두 번씩이나 세계 차원의 전쟁이 일어났다. 우리는 이것을 세계대전이라 부른다.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훨씬 전에도 벌써 세계대전과 거의 동급의 세계적인 전쟁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세계대전이라고 이름 지을 만한 개념이 생기기 이전의 일이라 세계대전이라 불리지 않을 뿐이다. 1756년에서 1763년까지 7년간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전쟁이 그것이다. 7년 동안 다툰 전쟁이라고 해서 7년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7년 전쟁이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 간접적인 원인이라고 한다.  

‘7년 전쟁’이란 오스트리아가 몇 해 전에 프로이센에게 빼앗긴 영토를 도로 찾겠다고 일으킨 싸움이 세계적으로 번진 전쟁을 말한다.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양쪽으로 편을 갈라서 이리저리 얽혀서 싸웠다. 유럽에서 싸움이 벌어지니까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편을 갈라서 싸웠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가 북아메리카에서 서로 영토를 많이 차지하기 위해 격렬하게 싸웠다.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이 힘이 모자라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전쟁에 끌어들여 싸우기도 했다. 

그래서 북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전쟁을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프랑스와 인디언이 서로 싸웠다는 뜻이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이 인디언을 꼬드겨 인디언과 함께 영국에 대항해 싸운 전쟁이라는 뜻이다. 즉 영국 사람의 시각에서 보고 붙여준 전쟁 이름이다. 전쟁 초기에는 프랑스군이 우세하여 영국이 밀렸으나, 프랑스 본토로부터의 지원이 끊긴 프랑스 식민지가 마침내 손을 들고 말았다. 결국, 유럽에서는 영국이 편을 들어 도와준 프로이센이 이겼고,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영국이 프랑스를 완전히 제압했다. 이때 영국이 프랑스로부터 빼앗아 차지한 땅이 바로 지금의 캐나다의 퀘벡 지역이다. 현재에 와서도 퀘벡 지역에서 프랑스어가 계속 쓰이고 있는 이유가 이 지역이 과거에는 프랑스의 식민지였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문제는 영국이 유럽과 북아메리카 대륙 양쪽에서 모두 승리했으나, 전쟁을 치르는 동안 너무나 많은 전쟁 비용이 들어간 점이다. 영국은 이 전쟁으로 인해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이때 영국이 생각해 낸 아이디어가 “식민지에서 일어난 전쟁 비용은 식민지 사람들이 부담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 영국은 식민지에 인지세, 설탕세, 홍차세 등 돈이 거의 모든 일용품까지 세금을 물렸다. 이것에 대해 식민지 사람들이 반항하여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보스턴 티파티 사건 등 여러 폭동 사태를 불러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7년 전쟁의 여파인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 미국의 독립전쟁을 몰고 왔으며 마침내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는 말이 된다. 

많은 전쟁이 경제적인 이유로 생긴다. 만일 영국이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전쟁 비용이라는 명목으로 수탈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미국은 어떤 형태의 국가가 되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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