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전쟁의 원인 중세에는 어떤 왕이 자신의 왕국 밖에서 작위를 상속하면 다른 왕의 봉신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영국은 1066년 노르만 왕조 성립 이후 프랑스 영토 내에 많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역대 프랑스 왕들은 이를 회복하려고 하여 양국 사이에는 언제나 전쟁과 대립이 계속되었다. 특히 기옌(현재 가스코뉴) 지방과 플랑드르는 분쟁의 씨앗이었다. 1328년 프랑스 카페 왕조의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죽자, 그의 사촌 형제인 발루아가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올랐다. 기옌(프랑스 남서부) 공작이자 퐁티외 백작이었던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어머니가 샤를 4세의 누이라는 점을 들어 자신이 프랑스 왕위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필리프 6세는 즉각 반발하였고, 두 나라의 대립이 깊어졌다. 백년 전쟁의 영향 백년 전쟁의 결과, 영국과 프랑스 모두 봉건 기사 세력이 무너지고 농민 해방의 진전, 부르주아 계급의 대두, 중앙 집권 국가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는 장기간에 걸친 백년 전쟁과 내란에 의해서 봉건 귀족 세력이 극도로 약화된 반면, 국왕의 권력이 크게 확대되었다. 샤를 7세는 자크 쿠르를 등용하여 왕실의 재정을 정비하고, 국왕의 상비군을 강화하며 귀족 세력을 누르고 중앙 집권제를 추진해 나갔다. 영국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 왕위 계승문제를 둘러싸고 30년간에 걸친 장미 전쟁(1455~1485)이 일어났으나, 이는 귀족 세력이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와, 헨리 7세에 의한 중앙 집권화의 기초을 굳혀 주었다. 또한 영국은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함으로써 그 이후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문제들에 휩쓸리지 않게 되어, 독자적인 국민 국가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
위기의 도팽 샤를
샤를은 프랑스 샤를 6세와 왕후인 바이에른의 이자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3명의 형이 차례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AD 1417년 프랑스에서 왕세자를 뜻하는 도팽의 칭호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AD 1418년 5월에 부르고뉴파가 파리를 장악하자 아르마냐크파와 함께 부르주로 달아나야 했다.
당시 프랑스는 잉글랜드 헨리 5세에게 아쟁쿠르 전투(AD 1415년)에서 대패를 당한 이후 북부지방을 차례로 점령당하던 불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도팽 샤를은 부르고뉴파와의 화해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AD 1419년 9월에 아르마냐크파가 부르고뉴파의 수장인 공작 장 1세를 회담장에서 살해해버리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도팽 샤를이 얼마만큼 관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암살은 샤를에게 커다란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결국 장 1세의 아들인 필리프 3세가 새로운 부르고뉴 공작이 되어 잉글랜드와 동맹을 체결하였고 AD 1420년에는 왕후인 이자벨을 설득하여 잉글랜드와 트루아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을 통해서 잉글랜드의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딸인 카트린과의 결혼을 통해 샤를 6세의 뒤를 잇는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확보하였고 헨리 5세와 카트린 사이에 태어나는 아들까지 그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한 도팽 샤를은 야르마냐크파와 함께 부르지를 중심으로 잉글랜드에 대한 저항세력을 모으고 트루아 조약이 무효를 선언했다. 그러나 수도인 파리를 포함한 프랑스의 루아르 강 이북 지역은 이미 잉글랜드-부르고뉴 동맹에게 장악당한 상태였고 파리에 위치한 고등법원과 대학마저 트루아 조약의 적법성을 인정했기 때문에 모든 상황이 도팽 샤를에게 불리하기만 했다.
AD 1422년 잉글랜드 헨리 5세와 프랑스 샤를 6세가 차례로 사망하면서 도팽 샤를은 헨리 5세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헨리 6세와 왕위를 다투게 되었다. 무엇보다 도팽 샤를이 프랑스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뤄야했지만 역대 프랑스 국왕이 대관식을 치르던 랭스를 잉글랜드-부르고뉴 동맹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다만 AD 1422년에 앙주백작 루이 2세와 아라곤이 욜란데 사이에서 태어난 정혼자 마리와 정식으로 결혼하면서 프랑스 남부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는 점과 잉글랜드의 헨리 6세도 아직 갓난아기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아직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다는 점만이 희망을 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도팽 샤를 진영에게 닥친 가장 큰 어려움은 경제적인 문제였다. 당시 프랑스는 일정한 세금을 징수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삼부회의 동의를 받아 조세를 걷고 있었지만 아직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지 않은 도팽 샤를에게 삼부회는 충분한 세금을 걷어주지 않았다. 이에 따라 도팽 샤를은 충분한 숫자의 용병을 고용할 수 없었고 더욱이 전황이 도팽 샤를에게 불리해져만 갔기 때문에 승리 이후의 전리품에 대한 약속만으로 용병을 구할 수도 없었다.
AD 1428년 루아르 강 주변에서 마지막으로 도팽 샤를을 지지하던 오를레앙(Orleans)이 잉글랜드군에게 포위되면서 도팽 샤를은 최대 위기를 맞이하였다. 오를레앙은 프랑스 북부를 장악한 잉글랜드 군의 남하를 저지하던 최후의 보루로서 만일 오를레앙이 무너진다면 잉글랜드 군이 본격적으로 프랑스 중부지방까지 내려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자금부족으로 충분한 숫자의 군대를 조직할 수 없었던 도팽 샤를은 지원군을 파견하지 못한 채 이에 절망에 빠져 잉글랜드의 요구에 굴복할 생각까지 하였다. 그러나 도팽 샤를은 18살의 시골처녀 잔 다르크를 만나면서 기적적인 반격의 기회를 잡게 된다.
잔 다르크의 등장
잔 다르크는 AD 1412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인 동레미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잔 다르크는 AD 1424년 대천사 미카엘, 성 카테리나, 성 마르가리타으로부터 프랑스에서 잉글랜드 세력을 몰아내고 도팽 샤를을 왕위에 올리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잔 다르크는 AD 1428년 16살이 되자 도팽 샤를을 지지하던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 백작을 찾아가 자신의 계시를 설명하고 도팽 샤를을 만날 수 있도록 부탁했다. 처음에 웃어넘겼던 로베르 백작도 잔 다르크의 굳은 의지와 신앙심에 감명받아 도팽 샤를이 머물던 시농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줬다. 불과 6명의 호위군만 대동하고 잔 다르크는 적의 영토를 가로질러 가야 했지만 무사히 시농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잔 다르크는 이때부터 남장을 했다고 한다.
도팽 샤를은 처음에 잔 다르크를 만나기를 주저하였으나 이틀 뒤 접견을 허락하였다. 다만 잔 다르크를 시험하기 위해 시종에게 자신의 옷을 입히고 중앙의자에 앉힌 대신에 자신은 신하들 속에 숨어있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도팽 샤를 앞에 무릎 꿇고 그가 프랑스 왕위에 오르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엄숙하게 말했고 이어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위기에 빠진 오를레앙 구원군에 참가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신의 사명을 받았다는 잔 다르크의 주장을 선뜻 믿을 수 없었던 도팽 샤를은 교회 성직자과 저명한 신학자들로 하여금 잔 다르크에 대한 철저한 심문을 진행하도록 하였고 잔 다르크가 이 과정을 모두 통과한 후에야 오를레앙 구원군 참가를 허락하였다. 한편 잔 다르크는 심문을 받는 동안 앞으로 강력한 지원세력이 되어줄 도팽 샤를의 친척인 알랑송 공작 장 2세와 만났다.
오를레앙 포위전
잉글랜드의 오를레앙 공격부대는 처음에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드 몬터규가 지휘하였으나 AD 1428년 전사하면서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잉글랜드 군은 루아르 강 주변의 중요 지점들을 장악하면서 오를레앙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오를레앙 측은 AD 1429년 2월에 야심차게 시도한 반격이 실패한 이후 절망에 빠져 방어만 일관하고 있었다. AD 1429년 4월 30일 잔 다르크는 보급품을 가지고 강을 통해 오를레앙으로 들어갔다.
오를레앙 공작 장 드 뒤노아를 비롯한 귀족 지휘관들은 비록 잔 다르크가 도팽 샤를의 명령으로 왔지만 너무 어린 여자였기 때문에 작전 회의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마을로 직접 내려가 주민들을 설득하여 병력을 조직하였다. 잔 다르크는 자신의 부여받은 신의 사명에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격에 소극적이었던 귀족 지휘관과 달리 적극적인 공세를 주장하였다. 잔 다르크는 아무런 언질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5월 4일 병사를 이끌고 나가 잉글랜드가 구축한 성 라우프 요새에 대한 공격에 가세하여 백명 이상을 죽이고 40명의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의 승리 덕분에 오를레앙은 후방에 머물던 블루아 증원군과 연락과 이동이 가능한 통로를 얻었고, 잔 다르크에 대한 신망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잔 다르크는 계속해서 적극적인 공세를 주장하여 2일 뒤인 5월 6일에 강의 남쪽 둑의 잉글랜드 요새들을 점령하였고 잉글랜드 군을 레투렐 요새로 몰아내었다. 다음날 새벽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 군과 함께 총공세를 펼치기 시작했고 전투 중에 부상을 입었지만 응급처치를 받은 후 곧바로 전장에 복귀하였다. 전투는 치열했지만 잔 다르크의 활약에 자극받은 프랑스 군이 맹공격을 펼쳐 저녁무렵에 승리를 거뒀다. 다음날 아침 잉글랜드 군이 흩어진 군대를 모아 전투진형을 갖췄고 프랑스 군도 이에 맞서도록 군대를 배치하였지만 양군 중 어느 쪽도 먼저 공격하려고 하질 않았다. 결국 잉글랜드 군이 철수하기 시작했고 잔 다르크는 그 날이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군이 추격하지 못하도록 했다. 잉글랜드 군의 철수가 완료되면서 오를레앙은 비로서 포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루아르 강 토벌전과 파테 전투
오를레앙을 성공적으로 구원한 잔 다르크는 시농으로 돌아가 도팽 샤를을 만났고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랭스로 진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도팽 샤를은 랭스로 가는 길을 아직도 잉글랜드 군이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랭스 진격에 대해 머뭇거리다가 우선 루아르 강 주변의 잉글랜드 요새들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6월 11일부터 잔 다르크는 알랑송 공작과 함께 루아르 강 소탕전에 나서 차례로 잉글랜드 요새를 부수고 중요 다리를 확보한 후에 6월 17일 중요거점인 보장시를 함락시켰다. 이 때 프랑스 군은 대포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잉글랜드 군은 루아르 강 거점을 잇달아 잃어버리게 되자 파리에서 존 파스톨프이 이끄는 지원병을 보내왔고 양 군은 6월 18일에 파테 근처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백년전쟁 기간동안 프랑스 군은 잉글랜드 군에게 야전에서 잇달아 패배했었는데 이는 잉글랜드 군이 전투전에 장궁병을 보호할 목책과 장애물을 충분히 준비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잉글랜드 군도 역시 장궁병을 배치하고 이들을 기사단의 돌격으로부터 보호할 장애물을 설치하고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주의한 장궁병 일부가 숲에 있던 사슴을 사냥하면서 프랑스 정찰병의 눈에 띄었기 때문에 프랑스 군의 선봉대가 신속하게 공격을 시작했고 아직 충분한 장애물의 보호를 받지 못한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일방적으로 학살당해야 했다. 전투가 종료되자 잉글랜드 군은 총 2,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대부분이 병력의 핵심인 장궁병이었기 때문에 잉글랜드 군은 후퇴했다.
도팽 샤를의 즉위
파테 전투로 프랑스 군은 전세를 완전하게 만회하게 되었고 잔 다르크는 다시 한번 도팽 샤를을 찾아가 랭스로 진격할 것을 요청했다. 아직까지 잉글랜드 군의 위협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잔 다르크의 적극적인 권고에 도팽 샤를도 마침내 결단을 내려 랭스로 진격하기로 했다. 6월 29일 랭스로 가는 도중에 프랑스 군은 트루아를 함락시키고 샬롱의 항복을 받으면서 7월 16일 마침내 랭스에 도착하였다. 마침내 다음날인 7월 17일에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이 열려 도팽 샤를이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샤를 7세가 되었다. 대관식을 제단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깃발을 들고 참관하던 잔 다르크는 대관식이 끝난 뒤 가장 먼저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였다. 잔 다르크는 자신의 사명이 완수되었음을 느꼈다.
잔 다르크의 좌절과 죽음
파리 공격 실패와 잔 다르크의 위상추락
샤를 7세는 염원하던 대로 왕위에 정식으로 오른 뒤 약 1개월 동안 샹파뉴와 일드 프랑스 일대를 행진하였고 8월 2일 전격적으로 철군을 결정하였다. 파리 수복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 잔 다르크는 이 결정을 반대하였지만 번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8월 2일 프랑스 군이 브레이에서 센 강을 건너는 것을 잉글랜드 군이 막아서면서 샤를 7세의 철군은 저지되었고 잔 다르크에게 기회가 생겼다.
잔 다르크의 기대와 달리 프랑스 군과 잉글랜드 군 사이에 소규모 접전만 몇 차례 일어났을 뿐 어느 한쪽도 전면전을 시작하지 않았고 결국 8월 28일에 센 강을 경계로 부르고뉴와 4개월간의 휴전이 이루어졌다. 초조해진 잔 다르크는 8월 26일에 이미 알랑송 공작과 함께 파리 북쪽 교외 생드니로 이동하였고 파리 공격을 계속해서 주장하였다. 결국 9월 7일 샤를의 본대가 도착하여 다음날부터 파리에 대한 공격을 개시되었다. 잔 다르크가 부상에도 불구하고 군사들을 계속 독려하며 파리 함락을 위해 애썼지만 파리 시민의 완강한 저항에 막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잔 다르크의 불패의 신화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이단재판과 화형
파리 공략 실패 이후 샤를 7세는 루아르 강으로 후퇴하였고 잔 다르크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 9월 22일 지앵에 도착한 샤를 7세는 군대를 해산하였고 귀족들도 영지로 돌려보냈다. 알랑송 공작은 노르망디 지방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였지만 많은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잔 다르크는 샤를 7세와 함께 부르지로 갔고 그 곳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선행과 온정을 베풀었다. AD 1429년 12월말에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와 그녀의 가족들을 귀족으로 임명하였다.
AD 1430년초 휴전기간이 종료되자 부르고뉴 공작이 콩피에뉴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잔 다르크는 이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빠와 시종, 무장병사 몇 명만 대동하고 떠났다. 5월 23일 잔 다르크는 결사대를 이끌고 부르고뉴 군을 물리치기도 하였으나 잉글랜드 증원부대에 밀려 후퇴해야 했다. 후퇴하는 동안 잔 다르크는 후위를 방어하다 낙마하였고 부르고뉴 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 공작에게 끌려갔고 부르고뉴 공작은 샤를 7세에게 몸값을 요구하였으나 샤를 7세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부르고뉴 공작은 1만 프랑을 받고 잉글랜드 군에게 넘겼고 잔 다르크는 노르망디의 루앙으로 압송되어 피에르 코숑 주교가 주관하는 이단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은 잔 다르크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어 정당하게 보장된 자문관이나 변호인 선임권리와 교황에게 항소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교육도 못 받아 글자도 몰랐던 18세의 잔 다르크는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저명한 주교와 신학자로 구성된 심판관이 부여한 70여가지 죄목에 대하여 자신의 신념과 신앙을 논리정연하게 주장하여 12가지로 줄이는 데 성공하였다. 궁지에 몰린 피에르 코숑 주교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잔 다르크의 남장 복장에 대해 추궁했다. 당시에는 여성이 남장을 하는 것을 종교적으로 금지하고 있었고, 또한 여자가 다리를 공공연히 보이는 것을 퇴폐적인 행위로 취급했다. 하지만 짧은 바지가 일반적인 시절이었으므로 남장을 한 잔 다르크는 어쩔 수 없이 다리를 들어내야만 했다. 이에 대해 잔 다르크는 자신의 남장이 전쟁터에서 정조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주장하였고 실제 종교재판 사례에서도 여성이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남장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죄로 판결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피에르 코숑 주교는 결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랜 고문에 지친 잔 다르크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교회의 처분에는 따르겠다는 문서에는 서명했다. 재판 결과 잔 다르크는 종신형에 처해졌고 여성의 옷을 입도록 명령받았다. 잔 다르크는 순순히 따랐으나 여자 간수가 지키는 수녀원 대신 병사들이 감시하는 일반 감옥으로 보내졌고 그 곳에서 강간위협을 받자 다시 남장 차림으로 돌아갔다. 종교재판관들은 잔 다르크에게 여자옷을 입도록 다시 명령하였으나 잔 다르크는 거절하였다. 이에 다시 재판에 회부된 잔 다르크는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고 AD 1431년 5월 30일 19살의 어린 나이에 화형대에 불타 죽었다.
한편 포로가 된 잔 다르크를 구출하려고도 몸값을 지불하려 하지도 않았던 샤를 7세는 훗날인 AD 1450년 루앙을 방문하여 당시 재판에 대한 재검토를 명령했다. AD 1456년에 열린 명예회복 재판을 통해 잔 다르크에게 부여 되었던 이단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언되면서 잔 다르크의 명예는 복권되었다. 그러나 이는 샤를 7세가 잔 다르크를 위해서 한 일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즉위과정에 대한 잡음을 없애기 위해서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일설에는 잔 다르크의 인기가 너무 높아진 것을 시기한 샤를 7세가 잔 다르크의 죽음을 방치했다고도 한다.
샤를 7세의 의도와 상관없이 명예가 회복된 잔 다르크는 프랑스의 국민적인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AD 1920년 5월 16일 교황 베네딕토 15세에 의해 성녀로 시성받으며 축일이 정해졌다. 하지만 루앙의 이단재판 결과에 대해서도 로마 교황청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잔 다르크는 공식적으로 카톨릭의 성인이자 마녀로 남게 되었다.
잔 다르크 등장의 전술적 의미 18살의 잔 다르크가 신의 음성을 듣고 전쟁에 가담하여 위기에 빠진 프랑스를 구했다는 사실은 언듯 믿어지지 않지만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이다. 잔 다르크는 역사무대에 등장한 지 2년 만에 패배만 거듭하던 프랑스 군을 이끌고 연전연승을 거두며 프랑스에게 백년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을 선사하였다. 그렇지만 잔 다르크가 뛰어난 전술가였는지 아니면 단순히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는 존재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잉글랜드의 종교재판 기록에 의하면 잔 다르크 스스로는 자신이 무장을 하기는 했지만 주로 깃발을 들고 병사들을 독려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에서 잇달아 잉글랜드의 장궁병 전술에 대패를 경험한 프랑스 군이 전투에서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한 것에 반해 잔 다르크는 적극적인 정면공격을 주장하였고 이것이 효과를 발휘하여 오를레앙 포위전에서 대승을 거두는 계기가 되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평민 출신이었던 잔 다르크는 귀족들의 전쟁에 관심이 없던 일반평민들에게 백년전쟁이 단순히 귀족간의 권력다툼이 아니라 프랑스와 잉글랜드라는 두 국가 간의 싸움이라는 점을 인식시켜 주었고 이로 인해 프랑스 국민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적극적으로 전쟁에 임하게 만들었다. 그 뿐만 아니라 잔 다르크는 알랑송 공작의 조력 덕분에 당시까지는 사용이 기피되었던 대포를 전쟁에 동원하여 중무장 기사들이 전장의 중심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도 하였다. |
프랑스의 내정정비와 영토 회복
부르노뉴 공국과의 화해와 내정정비
비록 잔 다르크가 죽었지만 프랑스 내에서 샤를 7세의 세력은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샤를 7세는 본격적으로 내정을 정비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는데 세재를 개혁하여 삼부회의 승인 없이도 과세할 수 있는 권리를 단계적으로 얻어냈고 군사제도도 개선하여 신병모집과 훈련제도를 개선했으며 군대 통수권도 되찾아 왔다. 무엇보다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샤를 7세를 적대하던 부르고뉴 공작과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다.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는 아버지 장 1세의 암살 책임이 샤를 7세에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트루아 조약을 추진하여 샤를 7세를 위기에 몰아넣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프랑스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확장에만 관심이 있었다. 잉글랜드의 세력이 점차 약화되자 필리프 3세도 샤를 7세와의 화해를 고려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AD 1435년 샤를 7세와 필리프 3세는 장 2세 암살에 관여한 사람들을 처벌하는 조건으로 샤를 7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는 아라스 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AD 1436년에 파리를 샤를 7세에게 돌려주었다.
잉글랜드는 부르고뉴 공작과의 동맹이 깨어지면서 큰 타격을 받았지만 여전히 장궁병을 이용한 전술이 위력을 보이고 있었고 슈루즈버리 백작 존 탈보트라는 명장을 보유했기 때문에 AD 1436년부터 AD 1439년까지 프랑스 군의 노르망디 공격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 군은 철저하게 잉글랜드 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대신 잉글랜드에게 항복했던 프랑스 지역을 뇌물로 매수하는 전략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전쟁기간이 지리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포미니 전투
AD 1444년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투르 조약이 체결되어 휴전이 성립되었고 휴전의 조건으로 잉글랜드 헨리 6세와 프랑스 샤를 7세의 조카인 앙주의 마가렛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샤를 7세는 휴전기간을 이용하여 프랑스 군을 재조직하고 체제를 정비하였으나 헨리 6세의 무능한 통치로 인해 잉글랜드 군은 기강이 무너지고 세력이 약화되었다. AD 1449년 가을에 샤를 7세는 휴전조약을 파기하고 공세로 돌아서서 노르망디 지방을 공격하여 잉글랜드의 노르망디 주둔군 사령관인 존 탈보트를 생포하고 주도인 루앙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다음해 1월에 캉 지역까지 진격하였다.
겨울 동안 잉글랜드는 흩어진 병력을 모아서 약 4천명의 부대를 편성했다. 이에 맞서는 프랑스 군은 3개의 부대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먼저 클레르몽 백작이 이끄는 2개의 부대가 카렝탕 근처의 포미니에서 잉글랜드 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잉글랜드 군이 자랑하는 궁병이 프랑스 군에 비해 3배정도 더 많았으며 언제나처럼 궁병을 보호할 수 있는 목책과 장애물을 설치했다. 한편 프랑스 군도 잉글리쉬 롱보우를 상대하기 위해 대포 2문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대포는 발사 후 이어지는 긴 장전 시간 때문에 잉글랜드 군의 돌격에 빼앗기고 말았다.
소규모 접전이 3시간 가량 이어졌고 그 사이 프랑스 군은 리치몬드 백작이 이끄는 나머지 1개의 부대가 남쪽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협공을 우려한 잉글랜드 군은 퇴각해야 했기 때문에 미리 구축한 진지와 장애물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프랑스 군의 돌격이 연이어 이어지면서 잉글랜드 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잉글랜드 군의 사상자는 2,900명이었으나 프랑스 군의 피해는 1,000명 정도였다. 포미니 전투 결과 잉글랜드의 노르망디 방어군은 완전히 격파되었고 프랑스 군이 노르망디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다만 칼레항 만이 잉글랜드의 영토로 여전히 남아 있게 되었다.
카스티용 전투
AD 1450년 포미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프랑스 군은 노르망디 지방을 장악하고 남진하여 보르도와 바욘까지 점령하면서 잉글랜드가 300년 동안 지배한 가스코뉴와 기옌 지방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아온 가스코뉴와 기옌 지방 사람들은 프랑스의 지배를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헨리 6세에게 재점령을 요청하였다. 이에 프랑스 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가 풀려났던 슈루즈버리 백작 존 탈보트가 지휘하는 잉글랜드 군 3천명이 AD 1452년에 보르도에 입성하였고 이후 3천명을 더 보강하여 6천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샤를 7세는 군대를 다시 소집하였고 지휘를 장 뷔로에게 맡겼다. 프랑스 군의 규모는 7천명~1만명으로 추산되고 있고 특이한 것은 장 뷔로에 의해 대포 300문이 배치되었다는 점이었다. 프랑스 군은 기옌 지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도르도뉴 강 하류에 위치한 카스티용의 잉글랜드 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병력수에서 열세에 놓였던 잉글랜드의 존 탈보트는 사기를 올리기 위해 1천여명의 기병을 이끌고 먼저 프랑스 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때 프랑스 군이 진영을 버리고 철수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존 탈보트는 급하게 병력을 재정비하고 프랑스 군 진영으로 달려갔으나 불행히도 철수하는 것은 프랑스 군이 아니라 단순히 따라온 상인들이었다. 프랑스 군의 중무장한 궁수와 300문에 달하는 대포가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였고 이에 잉글랜드 기병은 큰 피해를 입었다. 보병이 증원군으로 도착하자 존 탈보트가 다시 반격을 개시하였으나 결국 프랑스 군에게 패배하였다. 존 탈보트는 전사하였고 카스티용 주둔군은 항복하였다.
이렇게 하여 백년전쟁은 카스티용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를 거두면서 프랑스의 최종승리로 막을 내렸다. 프랑스는 잉글랜드가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 영토 대부분을 수복하였고 잉글랜드의 영토는 이제 칼레항만이 유일하게 되었다. 칼레항은 AD 1558년이 되어서야 프랑스의 영토가 된다.
야전 대포의 사용 카스티용 전투는 전사상 야전 대포의 존재가 전쟁의 향방에 영향을 준 최초의 전투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발명된 화약이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에 소개되면서 화약으로 돌이나 조그마한 철구를 날리는 초기 형태의 대포가 등장하였다. 하지만 초기 대포는 금속 제련기술이 부족하여 크기가 너무 크고 무거웠지만 명중률이 매우 낮고 장전시간 또한 너무 길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큰 효과를 발휘하기는 힘들었다. 백년전쟁에서도 대포가 전투에 동원되기도 하였으나 주로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대상인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에만 사용하였다. 하지만 잉글랜드 장궁병의 긴 사정거리와 연사속도에 고전하던 프랑스 군 내부에서 대포를 야전에서도 사용하는 방안이 강구되었고 그 성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카스티용 전투의 승리였다. 대포의 등장은 잉글랜드 장궁병이나 스위스 장창병에게 고전하던 중세 기사들이 완전히 전장의 주역에서 물러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중세 전투를 벌이던 귀족들은 전투 중에 적 기사들을 죽이기 보다는 생포해서 몸값을 받아내려는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전투 중 전사하는 기사들의 비율이 그리 높지 않았으나 대포가 등장하면서 무조건 적군을 많이 죽이는 것으로 전투의 양상이 바뀌게 된다. 한편 야전 대포의 효용성을 깨달은 프랑스는 AD 15세기에 컬버린이라고 불리는 가볍고 긴 포신의 대포를 개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샤를 8세(재위 AD 1483년 ~ AD 1498년) 시대에 벌어진 이탈리아 침공에서 큰 효과를 보게 된다. 하지만 야전 대포가 본격적으로 전쟁에서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것은 30전쟁 중인 AD 1631년 스웨덴의 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야전대포를 본격적으로 활용하는 브라이텐펠트 전투 이후부터가 된다. |
백년전쟁 종료와 양국의 정세
잉글랜드 왕위다툼, 장미전쟁
잉글랜드는 프랑스의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지만 내부 정세가 혼란해지면서 이를 수복하기 위한 군대를 다시는 파견할 수가 없었다. 잉글랜드의 헨리 6세가 AD 1453년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요크 공작 리처드가 섭정이 되어 대리통치를 시작했고 AD 1455년 건강을 회복한 헨리 6세가 통치권을 되찾아 오려고 하였으나 리처드 공작이 이를 거부하면서 랭커스터가와 요크가 사이에 내전이 발생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헨리 6세의 정신병은 외할아버지가 되는 프랑스의 샤를 6세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도 한다. 랭커스터가가 붉은 장미를, 요크가가 흰 장미를 각각 가문의 문장으로 삼은 것으로부터 장미전쟁이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AD 1465년 장미전쟁 도중에 리처드가 전사하였으나 그의 아들인 에드워드가 뒤를 이었고 마침내 AD 1461년 헨리 6세를 국외로 추방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하여 에드워드 4세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랭커스터 왕조가 멸망하고 잉글랜드에 새로운 왕조가 열리게 되었지만 AD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죽고 그의 어린아들인 에드워드 5세가 왕위에 오르자 에드워드 4세의 아우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리처드 3세)가 에드워드 5세를 유폐하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이렇게 왕위를 둘러싼 혼란이 다시 시작되자 이 무렵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랭커스터 계열의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가 리처드 3세에 반대하는 귀족들과 연합하였고 AD 1485년 웨일스에 상륙하여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에게 승리를 거뒀다. 헨리 튜더가 왕위에 올라 헨리 7세가 되면서 30년에 걸친 장미전쟁이 종식되고 잉글랜드에 새로운 튜더왕조가 열리게 된다.
프랑스 샤를 7세 말년
기나긴 백년전쟁을 종식시킨 샤를 7세였지만 잉글랜드로부터 탈환한 지역들이 여전히 샤를 7세의 정책에 반발하였고 샤를 7세의 개혁정치에 반발한 귀족들이 연합하여 왕권을 계속해서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샤를 7세의 통치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더욱이 아르마냐크 백작 장 5세의 반란과 알랑송 공작 장 2세의 모반을 잇달아 겪으면서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맏아들인 루이(훗날 루이 11세)마저 반란과 음모에 가담했다는 점이었다. 루이는 처음에 샤를 7세에게 용서를 받았으나 결국 불화가 다시 발생하여 부르고뉴 공국으로 도망쳐야 했다. 샤를 7세는 여성 편력도 심해서 말년에는 여러 명의 정부를 두었고 이들에게 휘둘리며 국정을 다스리기도 하였다.
어수선했던 말년에도 불구하고 샤를 7세는 백년전쟁으로 왕권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에서 프랑스 국민의 지지를 받아 정통성을 세웠기 때문에 귀족세력을 누르고 프랑스 재통합한 왕으로 생각된다. 샤를 7세는 AD 1445년과 AD 1448년에 각각 기병대와 보병대를 창설하며 군제를 개혁했고, 직접세에 해당하는 타이유 세와 거래에 소비세를 부과하여 왕실 재정을 안정시켰다. 이처럼 귀족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신장시켜 나갔기 때문에 샤를 7세는 역사적으로 프랑스 절대왕정의 길을 열어준 것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