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의 전사 노르만(Normans) 프랑스 북서 해안지역,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상륙작전으로 유명한 그 곳의 이름 노르망디(Normandy)는 북쪽에서 온 유랑집단의 명칭에 기원을 둔다. 이들 북방인(the Norsemen)들은 중세 초 고대 노르스어(the Old Norse language)를 사용하던 북부 게르만 집단이었다. 인도유럽어족 북게르만어군에 속하는 고대 노르스어는 Old Icelandic이라고도 불리는 9~16세기 고대 아이슬란드어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사용되는 현대 게르만어들의 조상이다. |
노르만 정복, 잉글랜드, 노르망디, 시칠리아
노르만 정복은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 유럽 대륙 전체를 대상으로 진행되었던 노르만족의 정복이다. 롤로의 노르망디 침공으로 시작하여 잉글랜드에서의 노르만 왕조 설립, 남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시칠리아 왕국 건국이 모두 노르만 정복의 일환이다. 다만, 아일랜드와 같이 그 저항이 강력하여 성공했다고 볼 수 없는 사례도 존재한다. 노르만 정복의 말미에는 바이킹의 일족이었던 노르만족이 서서히 타민족과 융화되며 그 정체성을 잃게 된다.
프랑스에서의 노르만족 탄생
모든 노르만 정복의 전신이 되는 사건으로 820년 노르만족이 따뜻한 장소를 찾아 프랑스 북부 세느 강 일대를 공격하며 시작되어, 911년 롤로 공과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3세의 조약으로 노르망디 공국이 세워지기까지 약 100년간 진행된 일련의 사건들이다.
잉글랜드에서의 노르만 정복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며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를 세웠다. 이 과정에서 윌리엄 1세를 따라온 노르만족 기사들이 잉글랜드의 영지를 받고 대륙의 봉건제도를 잉글랜드로 들여오며 새 지배계층을 이루기 시작해 앵글로색슨족과 대립했다. 후에 존 왕이 노르망디, 앙주 등 대륙의 영토를 대거 상실하며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귀족들을 이어주던 연결고리가 사라졌고 결국 이들은 대부분 동화되어 잉글랜드인의 정체성을 가지기 시작했다.
노르만족은 바이킹의 후예이긴 하지만 이미 노르망디에 정착한지 200년이 흘러 그 정체성과 혈통, 언어, 풍습, 문화, 종교는 프랑스인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 영향으로 오랫동안 영국 왕실과 주요 귀족층은 프랑스어를 썼으며, 대표적인 예시로 그 유명한 사자심왕 리처드 2세도 평생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구사했다. 그래서 영국-프랑스 라이벌 관계를 들먹일 때 노르만 정복은 사실 프랑스의 잉글랜드 정복이었다라는 떡밥은 양국 국민들의 불타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에서의 노르만 정복
11세기 초 노르만 기사들은 이탈리아 남부 도시국가들의 용병으로 고용되어 동로마 제국과 무슬림 군주들과 싸웠는데 이들은 나중에 시칠리아의 정착하며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로베르 기스카르의 조카였던 루지에로 2세가 당시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와 교황 인노첸시오 2세의 지지로 시칠리아 왕국의 왕이 되며 오트빌(Hauteville) 왕조를 세웠다.
아일랜드에서의 노르만 정복
코노트 왕국(Kingdom of Connacht) 국왕으로부터 추방당한 렌스터 왕국(Kingdom of Leinster) 국왕이 잉글랜드 헨리 2세로부터 도움을 요청하자 리처드 드 클레어 (Richard de Clare) 등이 이끌던 노르만계 기사들이 아일랜드로 들어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들이 독단적으로 노는 것을 안 좋게 본 헨리 2세는 1171년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일랜드를 정복해 명목상 아일랜드 국왕으로 인정 받았다. 중세 초 아일랜드에 정착한 잉글랜드 노르만족은 켈트족과 크고 작은 전쟁를 벌이며 성장했다. 그러나 백년전쟁이나 장미 전쟁 등으로 바빴던 잉글랜드 국왕은 잉글랜드에 충성하던 노르만족 귀족들의 지원을 끊었고 흑사병으로 노르만족 정착민 수가 감소하며 이 두 민족이 차츰 동화되어 아일랜드인이라는 정체성이 생겼다.
이 사건은 고대 영어에서 중세 영어로 전환하는 과도기가 되었다.
노르만족
노르만족이란 바이킹 중에서 서프랑크 왕국과 협상하여 침공을 중단하고 프랑스 북부 센 강 하구에 정착한 일파의 후손들을 말한다. 정착하고서도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팽창했고 남북으로는 브리튼 섬의 잉글랜드부터 시칠리아섬까지, 동서로는 이베리아반도에서 동지중해의 성지인 예루살렘까지 중세 유럽 전역의 역사에 다대한 영향을 미쳤던 강력한 전투종족이었으며 바이킹의 항해 능력에 프랑크식 기마술을 모두 갖춘 최고의 기동전 집단이었다. 당대에 이미 현지에 강력하게 동화되어 언어는 로망스어로, 종교는 가톨릭 기독교로 완전히 물갈이되어 버렸고 어차피 당시 서유럽의 지배층이었던 살리 프랑크인들도 피지배층인 켈트인과 라틴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민족이었으므로 이후의 노르만인들은 사실상 프랑크 귀족이나 다를 바 없게 되었다.
어원
옛 유럽인들에게 바이킹은 북방 사람이었는데 프랑크 왕국의 지배층인 프랑크족이 처음에는 자기네 모어인 서부 게르만 방언으로 바이킹을 noord(북방)과 man(사람)을 합쳐 noorman이라고 부르다가 곧 모어를 갈리아 속라틴어로 바꾸면서 Normand이라는 말 자체를 바이킹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쓰게 되었다. 바이킹 중 일부가 오늘날의 프랑스 북서부 변방에 영지를 받고 서프랑크 왕국의 단순왕 샤를 3세의 봉신이 되고 나서부터는 그 영지를 바이킹이 사는 땅이라고 하여 Normandie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최종적으로 Normand은 그 Normandie 출신이라는 뜻으로 굳어졌다.
오해
한국에서는 정보의 부족과 유럽 문화에 대한 낮은 이해도 탓에 노르만과 노르드를 거의 혹은 완전히 동일시하여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아이슬란드 섬의 북게르만인까지 노르만족으로 퉁쳐 부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대단히 큰 오류로, 해외에서는 이들의 발원지였던 스칸디나비아에서 살던 집단과 노르망디에 정착하여 동화된 집단을 서로 명확하게 구별한다. 이는 노르만은 부계 혈통과 그에 대한 기억, 자부심을 빼면 당시의 바이킹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피동화 집단이기 때문이다. 바이킹의 후손인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에서조차 자신들을 "노르드"나 "게르만"이라 칭하지 "노르만"이라고 칭하지는 않는 등 북게르만과 노르만을 아주 철저하게 구별한다. 가령 프랑스어에서는 초기에 "Normands"이 곧 노르드인을 가리키다가 노르망디 정착과 함께 이들 노르만인을 가리키는 말로 변용되자 노르드인을 가리킬 때에는 "Vikings"나 "Hommes du Nord"(북쪽의 사람), "Scandinaves"(스칸디나비아인) 등을 사용하였고, 독일어에서는 각각 "Normanne"(노르만인)와 "Nordmann"(노르드인) 혹은 "Wikinger"로 구분하였다.
물론 프랑스어 "Normands" 및 그에 해당하는 계통 어휘 언어 자체는 언어에 따라서는 두 개념을 구별하지 않기도 하지만, 그러한 언어들에서는 이미 별개 계통의 어휘가 노르드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여서 그러할 뿐 두 집단 및 개념 자체는 명확히 구별한다. 예컨대 러시아어 "НорманныNormanny"의 경우 맥락에 따라서 노르망디의 노르만족을 가리킬 수도 있고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드인을 가리킬 수도 있는 말인데, 러시아 사학계에서 류리크 왕조 바이킹설을 노르만스키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러시아어에서도 노르만인과 노르드인을 구분해야 한다면 전자는 그냥 "Норманны"라고 부르고 후자는 "ВикингиVikingi"(바이킹)나 "СеверянеSeveryane"(북구인)라고 불렀다. 이는 러시아인들은 동쪽으로 진출하던 스웨덴 계통의 "ВарягиVaryahy"(바랑인)를 주로 접하였지 서유럽으로 향하던 노르웨이계 "Норманны"에 관해서는 오히려 서유럽을 거쳐서 접하였던 까닭이다. 이러한 면에서 한국에서는 대중적으로 덜 익숙할 "노르드인"이라는 말을 모르거나 일부러 쓰지 않더라도 노르드인과 노르만인 각각을 "바이킹"과 "노르만"이라고 부르고 서로를 바꾸어 부르지 않는 방식이 더 정확한 언어 구사라고 할 수 있다.
노르만인들은 최초 정착자들이 계보학적인 기원에서 따져볼 때 북게르만족에 속했으므로 정체성 면에서는 북유럽 노르드인의 후예로 여겨졌지만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인 노르망디 지역에 정착하면서 프랑크 귀족 세력에 편입되어 프랑스 문화에 동화되었고 그로 인해 이미 갈리아를 정복하고 프랑스 문화를 구축했던 같은 게르만계 프랑크족이나 토착민족인 켈트족 혈통의 갈리아인 혹은 프랑크족보다 먼저 갈리아 지역을 정복한 라틴족과 혼혈을 이뤘다. 따라서 유전적으로는 순수 노르드인이 아닌 프랑크족·켈트족·라틴족 혼혈로서 북게르만계라기보다는 거의 라틴계에 가까웠다. 이 점은 그들의 외모에 대한 기록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대표적으로 영국 문학에서 흔히 묘사되는 노르만족의 외형은 보통 흑발에 벽안이었다. 잉글랜드를 침공한 정복자 윌리엄 본인부터가 짙은 흑발이었으며 그를 따라 잉글랜드를 침공한 군대와 가신들도 노르만인은 물론 현지 프랑스인이나 주변의 플란데런인, 브르타뉴인 등이 다수를 차지하는 등 종족을 초월하여 교류하고 통혼도 일어났다. 현대에도 노르만족의 후손인 영국 상류층의 대부분은 근래에 도래한 독일계 혈통인 영국 왕실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금발이 아닌 흑발에 피부도 평균적인 잉글랜드인보다 까무잡잡하다.
현재는 대부분 각 지역에 동화되어 노르만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우는 경우가 별로 없지만 정복자로서 지배계급을 형성했으므로 특히 유서깊은 귀족들 중에는 노르만 계통이 많다. 유명인 중에서는 대표적으로 볼드모트역을 맡았던 영국의 배우 레이프 파인스가 노르만의 후예다. 특히 노르망디 주민은 노르만족 혈통을 이어받은 경우가 많으며 채널 제도와 노르망디에서는 지금도 노르만어를 사용하고는 한다. 더불어 노르망디는 노르만족의 고향으로서 문화나 음식 면에선 노르만족들의 영향이 남아 있다.
역사
노르드인은 8세기부터 인구 증가 추세와 인구 부양력 한계의 압박으로 본토 밖 새 정주지를 찾아 남하했으며 소위 바이킹으로 불리면서 유럽 북부 해안을 공격했다. 9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들 중 롤로 일파가 센 강 하구인 루앙에 기틀을 잡았다.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3세는 그들을 제압하는 대신 회유하여 봉토를 주고 루앙 백작으로 삼았으며 롤로와 그 후손들은 곧 센 강 너머 반도 지역까지 장악하면서 노르망디 공국을 형성했다.
이들은 외부인 노략자에서 현지인 지배자로 탈바꿈하면서 지역 사회와 융화되었다. 프랑스-라틴 문화에 동화되면서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언어적으로도 차츰 모어인 북게르만어를 쓰지 않고 노르만어라고 불리는 변형 프랑스어를 새로운 모어로 삼았는데 프랑스의 군사문화도 적극 수용했을뿐 아니라 그대로 현지에 눌러앉아 통혼도 했다.
프랑크식 군사문화를 받아들이며 해양민족 출신답지 않게 완벽한 기마민족으로 탈바꿈한 이들은 소수 정예의 돌격으로 바이킹을 격퇴할 수 있는 중세 중장기병술의 선두주자였고 따라서 독보적으로 강력한 단위전투력을 갖췄기에 단지 노르망디의 지배층으로 만족하지 않고 지중해 세계로 원정을 가서 당대의 굵직한 세력들을 상대로 싸움을 벌였다. 말이 좋아 진출이고 정복이었지 같은 기독교도도 거리낌없이 배신하고 공격하는 등 행패가 지나치게 심해서 사실상 지중해 세계에서는 이들을 무장폭력단체로 간주하고 싫어했다. 심지어 기독교의 동서 대분열로 인해 사이가 갈라진 로마 교황청과 동로마 제국도 이민족의 준동 때문에 국경이 불안한 틈을 타 영토와 왕위를 노리고 마구잡이로 침략을 해대는 노르만족을 한마음 한 뜻으로 증오했을 정도였다. 특히 노르만족이 최종적으로 점거하는 데 성공한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 남부는 노르만족의 상륙으로 인해 이탈리아 남부 고대 항구도시들의 부유한 해양상업 전통이 단절되면서 쇠퇴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탈리아 남부의 빈곤 문제와 마피아 문제의 단초가 되었다.
1066년에는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점령하면서 노르만 왕조가 개창되었는데 이는 웨식스 왕조의 단절을 틈타 앵글로색슨 영주들이 선출한 해럴드 2세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무력으로 획득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앵글로색슨족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으나 이를 진압하고 지배를 공고히 다졌으며 백년전쟁이 시작될 즈음에는 완전히 융합되면서 영국인(english)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노르만족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일어난 레콩키스타에도 상당히 기여했다.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정복 이전부터 굉장히 활발했는데 1018년 로저 토스니(Roger I of Tosny)가 무슬림의 침략으로부터 카탈루냐의 바르셀로나를 지키는 데 참여해 그 댓가로 바르셀로나 백작의 딸과 결혼한 것을 시작으로 로베르트 크리스핀이나 월터 기파드 같은 노르만족 모험가들이 1064년에 교황이 이베리아 반도의 바르바스트로라는 도시에 선포한 십자군에 참여했고 로베르트 부르데와 같은 이는 투델라 지역을 정복할 때 공을 세운 것에 대한 보상으로 타라고나 공작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렇게 이베리아 반도의 성전에 참가하는 것이 노르만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지자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 잉글랜드에 정착했던 노르만인들 중 일부가 다시 이베리아로 떠나 원정을 벌이기도 했다. 1142년 포르투갈의 아폰수 1세가 리스본을 점령하려고 했을 때 많은 잉글랜드 출신 노르만인들이 참가하기도 했으며 1147년 다시 전투를 벌여 도시가 함락되었을 때 아폰수 1세는 전투에 참가한 노르만인들을 리스본에 정착시켰다. 그 다음해인 1148년에는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가 토르토사 공략을 위해 노르만인 용병들을 초청하기도 했으며 역시 이 전투 이후에도 그들은 영지를 하사받았다.
한편 프랑스 북부의 노르만인은 오랜 기간 동안 노르망디 공작 겸 잉글랜드 왕이었던 노르망디 가문 및 그 후계 가문을 따르면서 정체성을 유지했다. 노르망디 지역이 프랑스에 완전히 흡수된 후에는 프랑스인에 점차 동화되어 사실상 사라졌다. 시칠리아 섬을 정복했던 노르만족은 역시 정주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다시 동방으로 원정을 떠났지만 실적이 신통치 않아 객지에서 전사하거나 동로마 제국의 라티니콘 부대 또는 바랑인 친위대에 입대했다. 나머지 잔존 노르만인들은 기독교도와 무슬림 간의 유혈충돌과 강대국의 침략에 시달리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노르만들은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듯 십자군 원정에 빠졌다. 그들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근처를 점령하고 동로마 제국이나 사라센과 싸웠다. <킹덤 오브 헤븐>에서 묘사된 것처럼 성지 예루살렘에 가려면 보통 이탈리아 남부를 경유했는데 전투민족이었던 이들은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섬의 아랍인들을 몰아내는 용병으로 고용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섬에 자신들의 왕국을 세웠으며 최종적으로는 이탈리아 문화에 동화되었다. 이들도 이베리아반도의 레콩키스타에 상당수 가세했다.
유명한 노르만 가문 및 인물
노르만 왕조
롤로
윌리엄 1세
오트빌 가문
로베르 기스카르
보에몽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