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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거리를 뒤덮은 청년들은 단순히 새로운 정치 구조나 사회 제도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삶의 양식과 태도와 가치 전체를 문제삼았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순응주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50년 전, 세상은 요동쳤다. 젊은이들은 일제히 학교와 일터를 벗어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서유럽과 미국에서 분출한 거대한 에너지의 파장은 미약하나마 동유럽과 아시아에까지 전해졌다. 젊은이들은 전쟁과 억압, 착취에 반대하고, 온몸으로 기성 질서를 거부했다. ‘혁명’의 기운은 차츰 잦아들었으나, 사회 곳곳으로 스며들어 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 ‘1968년’의 현재적 의미를 되새겨 본다.
‘요즘 늙은것들은 버릇이 없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중국의 한비자, 심지어 수메르 문명의 점토가 남긴 청년들에 대한 한탄을 한번은 뒤집어야 진실에 한발짝 더 다가설 수 있다. 청년들은, ‘언제나’는 아니지만 ‘자주’, 기성세대와 기존 사회질서에 몸서리쳤다. 나이는 성찰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 권위의 뼈다귀만 남겼고, 전통은 경험 축적의 지혜로 거름이 되지 못한 채 폐습의 악취만 풍겼기 때문이다. 1968년이 조금 달랐다면, ‘요즘 늙은것들은 버릇이 없다’고 생각했던 청년들이 ‘세계 도처에’, 그리고 ‘동시에’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지구촌 곳곳의 청년들은 ‘늙은것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을’ 심산이었다. 1968년 세계 각 지역의 청년들은 언어나 외양이 달라도 순식간에 통했고, 작은 몸짓도 금세 따라 했다. “반란이냐?”는 구체제의 물음에 그들은 “혁명!”이라고 답했다.물론, 말을 옮기고 돌을 던지던 투사들이 ‘혁명’이라고 외쳤다고 해서, 곧장 그 사건이 혁명이 되는 건 아니다. 1968년의 청년 저항은 오랫동안 ‘68혁명’이나 ‘68(학생)운동’이라고 불렸다. ‘68혁명’이란 정명은 상황을 오해하게 만든다. ‘혁명 주체’인 청년들이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고 정치권력을 장악한 것도 아니고, 그들의 급진 요구와 변혁 강령이 ‘그 후’에 구현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곧 “질서가 지배했다”.그렇다고 해서 기성 체제에 대한 저항의 급진적 성격과 사회적 특징을 지운 채 그저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도 충분하지는 않다. 비록 대학생들이 저항을 이끌긴 했지만, 청소년들과 청년 노동자들의 참여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기에 ‘청년 봉기’라는 규정이 그나마 ‘1968년’의 성격에 가장 근접해 보였다. 가장 인상적인 건 새로운 정치적 급진 세대의 등장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카를 만하임의 말대로, 세대는 객관적 조건인 세대상황 외에 집단의식과 소속 감정 및 행위 양식에서 비롯된다. 세대는 그저 공통의 연령집단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자기인지와 차별화의 결과물이다. 집단의식과 소속 감정은 다른 세대와의 차이를 의식하면서 자라나고, 집단적 행위양식은 그 차별화 과정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원인이다. 1968년 세계의 여러 지역 청년들은 두 기성세대들, 즉 1차 세계대전 체험 세대 및 ‘45세대’와의 차이를 의식하며 거리를 뒀다. 1차 세계대전 체험 세대의 엘리트들은 전후 질서를 주조했고 노인정치의 주역이었다. 1920년대 초반에서 1930년대 초반 사이에 출생한 ‘45세대’는 청(소)년기에 파시즘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했지만 전후 안정과 번영을 만끽하며 장년을 맞이했다. 그들은 전후 ‘재건’에 동참했기에 앞 세대와의 갈등을 피했다.“서른 살이 넘은 사람은 누구도 믿지 말라!”반면, ‘68세대’는 대략 1940년대에 출생한 이들로서 1960년대인 청년기에 급진적 정치화를 경험한 연령 집단이다. 유럽에서 앞의 두 세대는 전후 사회의 외면적 민주화와 물질적 복리에 만족했으나, 이 청년 세대는 달랐다. 양차 세계대전과 파시즘의 광포함으로 인해 지체되고 망각되었던 오래된 민주화 과제와, 냉전이 낳은 새로운 정치적 문제, 문화적 질곡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전후 재건 과정에서 권위주의적 관헌국가와 위압적인 대학 행정, 반공주의에 기초한 냉전 억압과 불관용의 정치 문화, 가부장적인 가족 내 위계질서, 억압된 성(性)과 소통, 위선적인 기성 사회의 도덕, 물신주의적 가치와 물질주의적 거만 등은 1960년대 전반 이미 다양한 신좌파 사상으로 무장한 새로운 급진 청년들에게 그 자체로 “역겨운” 것이었다. 그들은 “서른 살이 넘은 사람은 누구도 믿지 말라!”고 외치며 기성 사회에 온몸을 내질렀다.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라는 구호는 대안적 삶을 위한 가능성에 대한 갈망이면서, 동시에 현존 질서에 대한 완강한 거부였다. 심지어 그들은 “같은 사람과 두 번 자는 사람은 이미 기성 체제에 속한다”며 자유연애와 성적 해방을 실험하기도 했다. 전쟁과 억압을 일삼고는 자유니 문명이니 으스대기보다는 차라리 더 많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자기 삶의 본능에 충실하라는 도발이었다. 요컨대, 68세대는 단순히 새로운 정치 구조나 사회 제도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삶의 양식과 태도와 가치 전체를 문제삼았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순응주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1968년 2월 베를린 시내에서 열린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 장면. 서구 청년들은 제1세계와 제3세계 사이의 불평등한 억압과 종속 관계에 눈을 떴다. 사진집 <1968>
1968년 5월 학생-노동자와 경찰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바리케이드 전투’로 인해 거리에 파괴된 차량이 늘어서 있다. ‘1968’.
1968년 당시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을 통해 시위에 나선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위키피디아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란 구호는
대안적 삶에 대한 갈망이면서
현존 질서에 대한 완강한 거부‘68세대’는 단지 새로운 정치구조나
사회제도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대안적 삶에 대한 갈망이면서
현존 질서에 대한 완강한 거부‘68세대’는 단지 새로운 정치구조나
사회제도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삶의 양식과 가치를 문제삼았다
1968년이 지나자 청년들은 혁명의 열기를 더는 유지하지 못했다. 저항을 주도했던 학생운동 조직은 이념 투쟁을 겪으며 내분을 거듭하고 분화됐다. 그중 일부는 억압적인 국가와 기만적인 사회 및 속물적인 대중들과 도저히 화해할 수 없었다. 1970년대 독일(적군파)과 이탈리아(붉은 여단)의 ‘테러주의자’들은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걸어갔다. 극좌 테러주의는 대다수 68세대들에게 딜레마였다. 그들은 테러 행위와 테러를 통한 사회전복 전략에 동조할 수 없었지만, 기성 체제와 보수 언론이 테러 조직을 악마화하면서 ‘68 정신’의 의미를 모독하는 것을 마냥 감내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1970년대 유럽 곳곳에서 정치 민주화가 확대되고 일상문화에서도 혁신이 일어난 것은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다.
68세대가 창립하고 주도한 시민단체는 급격히 늘어났고, 신사회운동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68세대의 정당 정치 참여와 권력 분점으로 권위주의 정치 문화도 꽤 변했다. 특히 68세대가 가장 많이 진입한 교육과 문화 영역에서 가장 인상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대학 행정과 운영에 학생들의 참여가 보장됐고, 교수와 학생 간의 관계도 개선됐다. 대안 생활공동체와 하위문화도 융성했다. 다만 여기서 한가지 유의할 대목이 있다. ‘정치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성공했다’는 식의 68에 대한 평가는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68세대 일부가 집단 결집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슬로건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정치와 일상문화를 서로 떨어진 것인 양 둘로 나누는 접근이야말로 68세대가 극복하려고 했던 인식 태도였기 때문이다. 68세대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힘겹지만 부분적 성취를 이뤄냈다.곳곳에 뿌리내린 68의 ‘현재화’ 작업그로부터 50년이 지났다. 2018년 벽두부터 유럽 대륙 곳곳에선 ‘68’을 기억하는 마당이 활짝 열리고 있다. 2017년은 러시아 10월혁명 100주년을 맞는 해였고, 내년은 1989년 동유럽 공산주의 체제 붕괴 30주년이 되는 해다. 그 사이에서 ‘68’ 50주년을 맞는 경험은 가히 특별하다. ‘17’과 ‘89’ 사이에서 과연 68이란 어떤 의미를 지닐지에 대해 숙고할 더없이 좋은 기회다. 1968년 청년 봉기는 어느새 역사 전시를 통한 공적 기억의 대상이자 문화적 전승의 주제가 됐다. 유럽에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1968년 청년 봉기를 주제로 한 전시가 여러 지역에서 잇달아 열리고 있다. 크고 작은 역사박물관과 전시관 행사를 다 합치면 올해 대략 열 개가 넘는 ‘1968’ 기획 전시가 열린다.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1968년 청년 봉기의 거점 도시인 파리와 베를린만이 아니라 그동안 68과 관련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도시들도 68의 현재화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독일만 놓고 봐도 슈투트가르트, 브레멘, 뮌스터와 카를스루에, 뉘른베르크 시의 박물관들이 ‘1968’ 특별 전시를 마련했다.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 있는 역사박물관도 지난해 11월 중순부터 ‘1968 스위스’라는 제목으로 흥미로운 기획 전시를 열고 있다. 베른역사박물관의 기획 전시는 68세대의 생애사를 부각하고 있는데,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방문객이 찾고 있다.스위스 베른이나 독일의 몇몇 중소 도시에서 68을 기억하는 전시가 열리는 사실 자체가 이미 68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1968년 당시 스위스의 경우엔 드골 식의 권위주의 억압이나 서독의 긴급조치법 도입 같은 정치적 억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학 행정의 권위주의나 학생 자치권의 제약, 성적 억압과 문화 욕구의 억제, 동성애자에 대한 탄압, 여성 차별 등은 고스란히 스위스 청년들의 비판 대상이었다. 그들도 거리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를 외쳤고 롤링스톤스의 록 음악을 따라 불렀다. 전시는 위로부터의 직접적인 정치 억압의 유무가 아니라 청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저항의 거점이 되었음을 똑똑히 알린다. 더 많은 자유와 문화 충족에 대한 청년들의 욕망이 넘쳤기 때문이다.
68세대는 단지 새로운 정치구조나 사회제도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삶의 양식과 가치 전체를 문제삼았다. 사진집 <1968>
베트남전쟁 반대 투쟁은 여러 나라 청년들을 하나로 묶는 결정적 주제였다. 1968년 당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벌어진 반전 시위 모습. 위키피디아
당시 청년들은 “서른 살이 넘은 사람은 누구도 믿지 말라!”고 외치며 기성 사회의 모든 것을 온몸으로 거부했다.
더 많은 자유와 연대와 해방을 원했던
장기 투쟁의 중간 정점이었다‘장기 60년대’는 68년의 혁명을 낳은
씨앗이거나 배경이 아니라
오히려 ‘1968년’의 구체적 실재‘68’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함의는
두려움과 소심함을 극복하고
삶의 조건에 균열을 내는 용기
프랑스 파리 ‘쇼아 추념관’ 올해 기획전시장 모습. 20대 여성 언론인 베아테 클라르스펠트가 독일 총리의 뺨을 때린 사건과 관련된 내용이 전시돼 있다. 이동기 제공
아울러 역동적인 장기 60년대는 우리에게 지구적 연관성과 상호작용이 지닌 동력을 일깨웠다. 1960년대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도 서구의 장기 60년대 발전에 영향을 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베트남전쟁 반대 흐름에 한국은 동참하지 못했다. 회고적으로 보면,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 못지않게 세계적 반전 투쟁이 한국에 전이되지 못한 이유와 맥락도 비판적으로 따져 봐야 할 것이다. 68의 세계사적 동시성에 한국 사회가 함께하지 못한 건 그 후의 정치적 질곡과 문화적 지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최근 ‘미투’(#me Too) 운동에서 알 수 있듯이, 저항과 봉기는 지구적 연대와 동시적 전이를 통해 더 큰 폭발력을 갖는다. 한국 사회의 가부장 질서와 남성 지배의 문화를 염두에 둔다면, 세계적 동시성과 확산 과정이 없었을 경우 그것이 이 땅에서 과연 순조롭게 발현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세계적 상호작용과 전이 가능성을 높이면, 저항 방식과 투쟁 기회가 더 많이 발견되고 발명될 것이다. 21세기 지구적 연관성이 강화되면서, 삶에 대한 자기결정과 사회관계에 대한 공동결정의 학습 과정이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 어쩌면 삶의 많은 영역에서 남성(!) 권력자들의 ‘버릇을 고칠’ 기회가 다시 찾아오는 듯하다. 밥 딜런이 노래한 것처럼 “시대가 변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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