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의 뺨을 때리며 “나치! 꺼져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8년은 유독 ‘5월’에 가장 빛났고, 그것은 파리의 시간이었다. 독일 출신 유대계 학생인 다니엘 콘벤디트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의 시위에 파리 경찰은 폭력으로 대응했다. 학생들은 돌을 던지며 맞섰고 5월10일 거리에 바리게이트를 쳤다. 경찰과 학생시위대 사이에 ‘무자비한 전투’가 진행되자 노동자 조직들이 총파업을 통해 학생들을 지지하고 나섰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이었고 프랑스의 지배 질서는 마비될 듯했다. 6월에는 이탈리아에서 학생들이 투쟁의 파고를 높였고, 프랑스를 본받아 ‘학생 노동자 연합’을 결성했다. 하지만 학생운동 내부의 분파 투쟁, 노동자 조직들의 배반 및 지지 감소, 그리고 국가 권력의 새로운 공세로 인해 프랑스와 이탈리아 모두에서 혁명 투쟁의 파고는 차츰 가라앉았다. 1969년 초까지도 시위와 점거는 이어졌지만 혁명의 불꽃은 더 활활 타지 못했다.1968년 청년 봉기가 초국가적인 보편적 배경과 지구적 성격을 지녔다고 해서 국가별 특수한 조건과 고유한 쟁점이 없진 않았다. 미국의 청년 봉기에서는 베트남전쟁 외에도 자유언론운동과 흑인 민권 투쟁이 항상 중요한 주제였고, 프랑스에서는 권위주의적 드골 체제에 대한 저항이 출발점이었다. 서독 청년들은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의 과거사 범죄에 대한 기성세대의 침묵을 참지 못했다. 이를테면, 1966년 말 나치 전력자인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가 연방총리로 지명되었을 때, 청년들의 저항은 격렬한 방식을 띠게 되었다. 당시 나치 과거의 유산을 추적해 가고 있던 여성 언론인 베아테 클라르스펠트(1939년생)는 1968년 11월 집권당인 기민련(CDU)의 당 대회에서 단상에 앉아 있던 키징거 총리의 뺨을 때리며 “나치! 나치! 꺼져버려”라고 외쳤다. 20대 후반의 무명 여성이 남성 최고 권력자의 뺨을 후려친 이 사건은 ‘1968년 정신’의 실재였다. 그것은 기성세대에 대한 당시 청년세대의 환멸을 표현하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