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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감(訓鍊都監), 조선 후기, 중앙군영

Jobs9 2021. 4. 17.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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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설치되었던 중앙군영.

 

훈국(訓局)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8월에 임시기구로 설치되어 점차 상설기구로 변모한 뒤 1746년(영조 22)『속대전』에 올라 법전에 규정되었다.

조선 전기의 양인 의무 군역을 바탕으로 한 중앙 군사 조직인 오위(五衛)는 일찍부터 군인으로 복무하는 대신 포(布)를 내는 사람이 늘어나는 등 여러 모순을 드러내어 16세기말에는 그 조직이 허구화되어 있었다.

그 결과 임진왜란에서 조선군이 왜군에 참패함으로써 당장의 전쟁을 수행하고, 나아가서는 발전된 사회상에 맞는 군사 제도를 갖추기 위해 군사 조직의 재정비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에 급료병으로써 새 군사 편제에 의해 설치한 것이 훈련도감이다.

이 기구의 창설은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든 1593년 7월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의 진(陣)에 화포 교습을 의뢰해 포군(砲軍)을 양성하게 한 조처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8월에 왕명으로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10월에는 삼도도체찰사로서 군사 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류성룡(柳成龍)의 건의에 따라 정예 군사 양성과 기민구제(飢民救濟)를 목적으로 모병해 명나라의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 紀效新書』를 참고하면서 명나라 군사의 실제 훈련법을 습득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도제조에 유성룡, 유사당상(有司堂上)에 이덕형(李德馨)을 임명해 일반 서무를 관장하고 대장(大將) 조경(趙儆)에게 군사 훈련을 맡게 함으로써 관원이 갖추어져 갔다.

이어 11월에 군사를 좌영·우영으로 나눈 데서 시작해 이듬해인 1594년 2월 무렵에는 속오법(束伍法)에 의한 군사 조직 체계도 갖추어지게 되었다.

훈련도감군은 포수(砲手)·살수(殺手)·사수(射手)가 구분되어 삼수군으로 조직되었으며, 그 수는 약 1,000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군사 1인당 1개월에 쌀 여섯 말의 급료를 받는 군사로 모집되어 교대 없이 근무하였다.

종래의 양인 의무병과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도감군이 된 자는 유생이나 한량으로부터 공노·사노와 승려에 이르기까지 신분적으로 다양했는데, 생계를 잇기 위한 방편으로 들어온 자들도 많았다.

정부는 우수한 자에게는 양인이면 금군(禁軍)으로 발탁하고 천인이면 면천(免賤)하는 등의 특전을 주고, 경기도·충청도의 황전(荒田)을 둔전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란 후의 피폐한 재정 형편에서 군영의 운영비는 물론 도감군의 급료 마련조차 어려운 문제였다. 더구나 훈련도감은 임시군영이며 전란이 소강 상태로 접어든 뒤로 굶주림에 대한 불안이 줄어들자 도망하는 군인이 많아지고 지휘관들마저 많은 수가 결원되었다. 이로써 한때는 그 존립이 어려워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도감군의 수는 1602년 삼수미(三手米)를 거두게 되어 경제 기반이 일부 마련된 뒤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후금(後金)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던 병자호란 직전에는 5,000명을 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7세기를 거치는 동안 경제 기반의 강화를 위해 도감군에 대한 보인(保人) 지급이 확대되었다.

그 결과 18세기 초엽에 이르러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6도에 총 4만4000여명의 포보(砲保)와 향보(餉保)를 정해 1인당 포 두 필이나 쌀 12말씩을 거두어 주요 재정원으로 삼게 되었다. 이는 훈련도감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상설군영으로 자리잡고 나아가 5군영의 중심군영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1750년 균역법이 실시되자 부족하게 된 재정 부분은 균역청에서 ‘급대(給代)’라는 이름으로 받아 메우게 되었다. 그동안 1669년(현종 10)에 번상군인 훈련별대(訓鍊別隊)를 설치해 급료병을 점차 축소시켜 혁파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13년 뒤 훈련별대가 정초청(精抄廳)과 함께 금위영(禁衛營)으로 발족되어 191명씩 번상하는 6도 승호(陞戶)를 제외하고는 도감군은 모두 장번급료병으로 유지되었다.

관원은 대장(종2품)을 중심으로 하여 도제조(정1품) 1인과 제조(정2품) 2인, 그 아래로 중군(中軍, 종2품) 1인, 별장(別將, 정3품) 2인, 천총(千摠, 정3품) 2인, 국별장(局別將, 정3품) 3인, 파총(把摠, 종4품) 6인, 초관(哨官, 종9품) 34인 등의 지휘관과 종사관(從事官, 종6품) 6인 등이다.

도제조는 의정 가운데 1인의 겸임으로 훈련대장 유고시에는 대신 지휘를 맡고, 호조판서와 병조판서가 당연직으로 겸임하는 제조와 함께 훈련도감 운영을 감독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훈련대장은 휘하 군사력이 중앙군영 가운데 가장 크고 정예병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직책이다. 뿐만 아니라 18세기 이후 장용영(壯勇營)이나 총위영(總衛營)이 설치되어 있던 일부 기간을 제외하고는 무장의 인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도 무장의 직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직책이었다.

또한, 중군 이하의 지휘관도 무장 또는 장교가 승진하는 요로로서 구실하고 있었다. 종사관은 재정을 관할하는 직책으로서 4인을 훈련대장이 임명하였다. 그러나 훈련도감에서의 조총과 화약 제조가 중단됨에 따라 19세기 초엽에 2인이 감원되었으며, 2인은 호조와 병조의 낭관 1인씩이 겸임하고 있다.

도감군의 조직은 초기에는 대장과 중군, 천총의 지휘부에서 사(司)-초(哨)-기(旗)-대(隊)-오(伍)로 연결되어 파총이 사, 초관이 초, 기총(旗摠)이 기, 대장(隊長)이 대를 지휘하도록 짜여졌다.

군사의 수효가 늘어나자 도감군의 체제는 위의 틀을 바탕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주력인 삼수군은 사수 7초 833명, 포수 20초 2,440명, 살수 6초 738명 등 총 33초 4,011명으로서 조총과 화포의 중요성이 높아져 포수가 주축을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훈련도감에는 이밖에 국왕 호위군인 무예별감 198명과 별무사(別武士)·한려(漢旅)·국출신(局出身) 등의 각종 특수군 및 군사 훈련이나 각종 행정에 종사하는 군관들이 있어서 몇 차례의 변화가 있었지만, 조선 말기까지는 대개 5,000명 정도의 군사력을 유지하였다. 군영의 잡무를 보는 표하군(標下軍)도 2,000명 가까운 숫자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도감군의 지휘 체계는 삼수군 안에서도 보병(살수와 포수)만이 초기의 체제대로 좌우 2부-6사-26초로 편성되어 천총이 지휘하였다.

이외에 마병(사수)은 별장 2인이 지휘하는 부대를 이루었으며, 국출신은 국별장이 지휘하고, 무예별감은 무예청(武藝廳)을 구성하는 등 군인의 성격에 따라 계통을 달리하였다.

이러한 체제는 종래의 대부대 단위의 편제로부터 속오법에 입각한 소부대 단위 편제로 바꾼 결과로서 단위 부대 사이의 책임과 질서가 분명하고 부분 연습에 유리한 장점을 지니는 반면 대규모 군사 운동에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훈련도감은 1594년 11월에 수도의 치안을 주임무로 하는 5영에 그 군사가 나누어져 배치됨으로써 이로부터 본래 임무인 군사 훈련 외에 수도 방위와 국왕 호위의 중요한 임무를 맡아 종래의 오위가 담당하던 기능을 대신해 가고 있었다.

이어서 5군영체제가 갖추어지자 어영청(御營廳)·금위영과 함께 삼군문(三軍門)으로 불리면서 궁성과 서울의 방위를 맡았으며, 이 단계의 모습이 『속대전』에 수록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훈련도감은 핵심에 위치했으며, 도감군은 국왕의 호위를 비롯해 궁성과 도성의 파수 및 순라 등의 여러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편, 다른 군영의 군사와는 달리 도감군은 거의 전부가 매월 쌀 4∼9말 정도를 받는 장번급료병이어서 대부분 서울과 그 인근에 사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19세기 전반에 금위영과 어영청의 군사력이 축소되는 가운데서도 별다른 변화가 없던 훈련도감은 1861년(철종 12) 도망이 심한 6도 승호(陞戶)의 번상이 폐지되었다. 이어 1881년(고종 18)에 군제 개혁으로 별기군(別技軍)이 설치되어 신식 군대 조직이 이루어지자 그 이듬해 결국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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