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국어/현대문학

뿌리에게, 나희덕 [현대시]

Jobs9 2024. 5. 21.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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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에게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 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
 

 

개관

- 제재 : 흙과 뿌리
- 주제 : 뿌리에 대한 흙의 무조건적 사랑과 희생 / 생명(자식)의 탄생과 성장을 위한 희생적인 모성애

- 성격 : 희생적, 비유적
- 표현 : 자연물을 의인화(비유)하여 주제를 드러냄 / 시간의 흐름에 의한 시상 전개와 영탄적 어조 / 생명의 '탄생 - 성장'의 순환 구조를 취함.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밝은 피 → 원관념은 흙속에 있는 '물'을 가리키며, '생명, 희생적 사랑'을 함축함.
나의 사랑 → 원관념은 '뿌리'이며, '자식, 제자'등의 의미를 함축함.
먼우물 → 묽이 맑아 먹을 수 있는 우물물(반대말 : 누렁 우물)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 → 자식을 위해 아낌없이 사랑을 줌으로써 느끼는 기쁨
단단해지는 나의 살 → 뿌리가 성장하면서 흙의 연한 본 바탕(기름진 상태)이 거칠어지고 척박해진 상태
마지막 잔 → 생명과 몸을 다하면서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 뿌리에게 줄 수 있는 영양분, 사랑.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 → 뿌리가 성장해서 결실을 맺은 후에는 다시 연한 흙(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여건)으로 일구어짐.
흙에 대한 보조관념으로 쓰인 말 : 착한 그릇 → 껍데기 → 빈 그릇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흙과 뿌리의 만남 - 뿌리를 향한 흙의 첫사랑
- 2연 : 뿌리의 성장을 기원하는 흙
- 3연 : 뿌리의 성장에 기쁨을 느끼는 흙
- 4연 : 뿌리가 성장할수록 황폐해지는 흙
- 5연 : 뿌리가 성장한 후 다시 재생되는 흙의 순화적 삶.(생명 '탄생 - 성장'의 순환 구조)
 
이해와 감상
흙과 뿌리의 관계를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에 설정하여, 뿌리가 성장하면서 흙이 거칠어지는 자연 현상에서 자식을 향한 희생적인 모성애를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의인화의기법으로 상징적 의미를 잘 살리고 있는 이 시는 흙이 '착한 그릇 → 껍데기 → 빈 그릇'의 과정을 거쳐 다시 연한 흙이 된다고 하여, 또 다른 생명을 탄생 · 성장시키는 순환 과정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흙과 뿌리의 관계를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로 보는 것과 함께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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