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 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개관
- 성격 : 비유적, 성찰적, 회고적
- 표현 : 감정의 절제를 통해 지식인인 시인과 노동자인 화자 사이의 균형을 획득함. / 인생을 자연물인 '강'의 이미지와 결합하여 시적 의미를 획득함. / '강물'의 이미지 : '저문 강 = 썩은 강물' → 화자가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화자의 부정적 세계관이 반영된 대상임.
- 주제 : 노동자로 살아온 인생에 대한 성찰 / 도시의 가난한 근로자들의 삶의 비애
- 강물의 이미지 : 이 시는 강물의 이미지와 화자의 세계 인식이 병행되며 전개되고 있다. 강물의 이미지는 곧바로 화자의 세계관을 대변한다. '강'은 도회를 흐르고 있으며, 시간적 배경은 저물녘이다. 맑게 흐르는 강이 아니라 무겁게 흐르는 강물이며 썩은 강물이다. 이러한 물이 흐르듯이 소외받은 소시민의 삶도 정체성을 지니지 못하고 유동적으로 흘러간다. 삶의 애환을 가슴에 가득 안은 채 강물처럼 흘러간다. 하루의 노동이 끝난 뒤 삽을 씻으며 삶의 슬픔 또한 삽을 씻듯 씻어본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씻겨 나가는 아픔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며, 일시적 현상도 아니다.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생활고이며, 쉽사리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스스로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애감은 강물처럼 무겁게 드리우는 것이다.
- 이 시에 나타난 민중의식
이 시는 일상성의 영역에서 삶의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여, 시적 형식의 자유로움과 감성의 역동성을 확보하고 있다. 시인은 이 시에서 민중의 삶의 현장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하여 조용한 목소리로 우리가 처한 노동 현실을 통해 삶의 궁극적 가치를 묻고 있어, 참여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물 → 노동자의 삶 또는 노동자의 비애를 상징함.
* 우리가 저(흐르는 강물)와 같아서. → 우리의 삶을 흐르는 강물에 비유함. / 흘러서 가고 오고, 차고 기울고 하면서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자기 완성을 이루어 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과 유사함.
*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 강물을 바라보며 하루의 고단함이나 설움을 씻어 보려고 하는 모습이지만, 그 슬픔이 쉽게 씻겨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왜, 썩은 강물이기에)
* 삽 → 노동자의 생계 수단
* 삽을 씻으며 → 삶의 성찰과 관조
*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 나는 돌아갈 뿐이다. → 삶에 대한 무기력하고 체념적인 태도.
*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 화자의 처지를 짐작케 하는 표현으로, 중년을 넘어서는 노동자임을 추측케 함.
* 샛강 바닥 썩은 물 → 화자가 처한 상황이 황폐하고도 부정적인 현실임을 암시하는 표현. / 샛강은 스스로 썩은 것이 아니라, 썩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인해 썩은 것이다. 곧 산업화, 도시화라는 문명적 속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고, 그러한 문명화로 인해 점점 소외되어 가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나타냄.
* 달 → 절망 속에서 발견한 희망(노동의 피로와 우울한 심경을 위로해주는 희망의 대상임) / 고단하지만 다시 삶의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하는 원동력. / 삶의 순환과 반복
* 우리가 저와 같아서 → 이 구절의 '저'는 '강' 혹은 '달'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중의적 시어임. → 고단한 삶을 쉴 수 있는 가난하고 누추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힘겨운 모습. / 삶의 조건이 열악하더라도 그것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체념적인 태도가 엿보임. / 차분한 자기 확인의 태도 및 인생에 대한 따뜻한 긍정과 공동체적 삶에 대한 자각.
시상의 흐름(짜임)
- 1행 ~ 4행 : 흐르는 강물을 보며 인생의 의미를 발견함.
- 5행 ~ 8행 : 무기력한 삶에 대한 체념
- 9행 ~ 12행 : 노동자로서의 삶에 대한 인식과 소망
- 13행 ~ 16행 : 현실에 대한 체념과 삶의 수긍
이해와 감상
정희성은 도시 근로자의 지친 삶과 무거운 비애를 노래한 시를 많이 발표한 시인이다. 평생을 가난하게 노동자로 살아온 사람의 차분한 어조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의 소리를 기대하겠지만 이 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강물을 바라보는 화자의 자세는 외부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내면적 성찰로 일관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지나온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슬픔과 무기력함을 느끼지만 그런 상황에서 체념적 태도를 드러낸다. 그러나 샛강에 뜨는 달을 보며 언젠가 희망이 생길 것을 막연하게나마 기대한다. 이러한 희망마저 없다면 시적 화자는 더 이상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화자인 노동자의 모습은 무기력감과 서글픔을 느끼게 한다. 힘든 노동의 대가는 언제나 보잘것 없으며, 육체적 노동은 항상 천시당하기만 하고, 주어진 현실에 정면 대결할 결단이나 용기는커녕 무력감과 실의만 있을 뿐이다. 적극적인 현실 극복의 의지가 없는 그에겐 강가에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돌아가는 일이 고작이다. 결국 내일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화자의 뒷모습은 산업 사회의 그늘에서 소외당한 1970년대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서글픔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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