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1
-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주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시집 21인 신작 시집, 1982)
<감상의 길잡이>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은 우리 시대의 가장 소중한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시 세계는 현대인들이 잊고 지내는 농촌, 풀 한 포기, 어머니의 머릿기름 냄새 등에서 출발점을 이룬다. 그가 쏟아 넣는 애정의 대상은 어떤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주변 사람들이거나 지나치기 쉬운 주위의 흔한 사물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도시인들에게는 더욱 소중한 것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러나 그의 시가 갖는 소중함은 농촌에 대한 친근감 넘치는 섬세한 묘사가 단지 현상 파악에 그치지 않고, 매서운 비판의 시선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리고도 투명한 정서 속에 숨어 있는 당당함이 그의 시를 그의 시로 존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는 농촌 실정을 왜곡하는 도시의 위정자나 정책 당국에 대한 강한 외침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로부터 비롯된다. 그와 함께 그의 시에는 오랜 옛날부터 전해 오는 공동체에 대한 소박한 소망이 깔려 있다. 그 소박함이야말로 화려한 논리가 난무하고 가치가 왜곡된 현실 상황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깨닫게 해 줄 뿐 아니라, ‘우리’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고려할 때, 그의 시는 더욱 존재 가치를 얻게 된다. 거기에다 전라도 사투리로 진행되는 가사체, 타령조, 판소리체 가락과 형식은 그의 시를 옹골찬 비판의 맛이 잘 드러나게 하는 동시에, 농촌 공동체적 유대감을 더욱 강화시킨다.
김용택의 등단작이자, 첫 시집이면서 대표 시집인 섬진강의 표제시이기도 한 이 시는 오늘의 김용택을 있게 한 작품으로, 같은 제목의 연작 시편이 30편 가까이 된다. 이 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김용택 시의 가장 큰 특징은 섬진강같이 맑고 투명하면서도 진한 서정성이다. 이 서정성은 섬진강 강변 마을의 아름답고 서럽고 한맺힌 삶의 실상을 어루만져 끌어안는 그의 기막힌 언어 구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시인은 이 시에서 섬진강을 어머니의 젖줄로 하여 질박한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는 남도 사람들의 가슴 속 상처가 된 응어리진 한과 설움을 보여 주는 한편, 그들의 설움을 위무해 주는 포용력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기에 ‘전라도 실핏줄 같은 /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는 섬진강은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에 피어난 ‘토끼풀꽃’과 ‘자운영꽃’같이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온갖 서러운 ‘어둠을 끌어다 죽이’는 젖줄로 흐를 뿐 아니라, ‘그을린 이마’로 제시된 남도의 깊은 한을 달래며 ‘훤하게 꽃등도 달아주’기까지 한다. 그렇게 흘러가는 섬진강은 지역에 따라서는 영산강을 가까이 불러내기도 하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한편, 지리산과 무등산 사이를 굽이치며 흘러가면서 남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두 산을 교통, 결합시키기도 한다. 이렇듯 어느 한구석도 빼놓지 않고 남도 전체를 푸근히 얼싸안고 흘러가는 섬진강이기에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로 제시된 위정자 내지 정책 당국이 아무리 남도 사람들의 삶을 위협한다 해도 그들은 결코 위축되거나 굴복되지 않을 것임을 몇 번씩이나 강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시는 남도의 지극한 한과 설움의 세계로까지 심화, 확대되어 마침내 폭넓은 민중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만인보(萬人譜) 서시
- 고 은
너와 나 사이 태어나는
순간이여 거기에 가장 먼 별이 뜬다
부여땅 몇천 리
마한 쉰네 나라 마을마다
만남이여
그 이래 하나의 조국인 만남이여
이 오랜 땅에서
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확대이다
어느 누구도 저 혼자일 수 없는
끝없는 삶의 행렬이여 내일이여
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
<연작시 「만인보」 ‘서시’ 全文>
<연작시 만인보 해설>
고은(63)씨는 연작시 <만인보(萬人譜)>를 1980년 여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제7호 특별감방에서 구상했다. 그해 5월17일 자정을 기해 발효된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처와 동시에 체포된 시인은 김재규가 사형 직전까지 머물렀던 방에 갇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운명의 발자국 소리를 하릴없 이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손바닥만한 창 하나 없이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는 그 무덤과 같은 방에서 그의 의식은 옛일의 회고와 추억을 탈출구로 삼았다.
만일 살아서 나간다면 지나간 삶의 구비에서 마주친 이들을 시로써 되살리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은 그로부터 6년 뒤에야 실현된다. 그 사이 시인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 사면, 석방되며 결혼하고 자식을 본다.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화살' 제1연>
라고 선동했던 그가 80년 5월 광주를 통과하면서 <만인보>의 세계로 나아간 것은 하나의 놀라움이었다. 막말로 말해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이라는, <만인보>에 대한 설명에서 그의 70년대를 특징짓는 전투성과 이념성을 찾기란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인보>를 권력에의 투항이나 현실 순응으로 보는 시각 역시 맹목과 단견으로서 타기되어 마땅하다. 그보다는 싸움의 역사로부터 견딤의 역사로, 화살의 세계관에서 장강(長江)의 세계관으로 변모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이해가 될 터이다.
실제로 `서시'에 이어지는 `할아버지'와 `머슴 대길이'는 인간과 세계와 역사를 대하는 시인의 관점에 조금치의 변화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취해서 소리 지르고 깨부수는 것 말고는 권세도 명예도 누리지 못한 할아버지 고한길을 기리는 노래의 끝 연은 이렇다. 이 세상 와서 생긴 이름 있으나마나/죽어서도 이름 석 자 새길 돌 하나 없이/오로지 제사 때 지방에는 학생부군이면 된다/실컷 배웠으므로/실컷 배웠으므로.
그런가 하면 시인에게 가갸거겨를 배워준 친구네 집 머슴 대길이는 그가 속한 계급과 무관하게―혹은 바로 그 계급으로 말미암아― 곧고 바른 인격의 담지자로 그려진다. 봄 산에 올라서도 마을 처녀에게 허튼 시선 한번 주지 않으며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남하고 사는 세상인데라고 말하는 그를 향해서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대길이 아저씨/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 새우는 불빛이었지요라는 진술은 민중적 모범에 대한 시인의 귀의를 말하고 있다.
할아버지와 머슴 대길이로부터 시작한 <만인보>의 여정은 시인의 가족과 친척, 고향 사람들을 두루 훑은 다음 시인 자신의 편력을 따라서 이 땅 곳곳으로 벋어나가도록 돼 있다.
지난 86년과 88, 89년 세 차례에 걸쳐 한번에 3권씩 모두 9권이 나온 <만인보>의 초반부는 시인의 유년시절 고향 사람들의 모습과 삶의 이모저모를 소묘한다. 거기에 그려진 것은 배고파서/하루이틀 꼬박 굶고/물배만 채워/다섯 식구/서로 얼굴 보고 앉았(`굶는 집')는 궁상과 허기의 삶이지만, 민중의 생명력에 대한 시인의 굳은 믿음으로 밝은 빛깔로 채색된다. 가령 대를 이은 소도둑으로 군산형무소 감방에서 마주치게 된 어느 부자간의 대화를 들어 보라. 선득아 너 들어왔냐/예 2년 먹고 나가려고 들어왔어라오/밥 먹을 때 오래오래 씹어먹어라/예(`소도둑').
그러나 이처럼 밝고 낙천적인 어조도 한국전쟁기의 끔찍한 나날을 서술할 때에는 별무소용이 되고 만다. 인민군 들어와/반강제로 여맹 간부 노릇 하며/찢어진 치마 입고 다니고/여맹 간부 노릇한 죄목으로/이 사내/ 저 사내/치안대한테 욕보고 나서/혓바닥 깨물고 죽어버린 `임영자'나 동네 이사장 구장 이장 다 거치며 존경받다가 이복형제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치안대에 잡혀와서는 그 치욕을 못 견뎌 우물에 빠져 죽고 만 `김병천', 그리고 싸락눈 쌀쌀맞은 초겨울 아리따움에 공부도 잘해서 인공 때/여맹 간부였다가/수복 후/어찌어찌 몸 상해버리고//그 아리따움 일거에 망해버리고/죽음보다도 못하게시리/죽음보다도 못하게시리의 `조부희'의 경우는 그 악몽과도 같은 기억의 몇몇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보도연맹 가입자의 학살과 우익 및 지주의 처형, 다시 인공시절 부역자의 처단으로 이어지는 살육의 악순환은 십대 후반의 소년의 정신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다. 마을 주변의 참호와 방공호 속에서 공산군들에게 학살당하거나 생매장당한 시체를 파내는 일에 동원됐던 고은태(시인의 본명) 소년은 기어이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며 산과 들을 정처없이 쏘다니게 된다. `아아 50년대!'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논리를 등지고 불치의 감탄사로써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시인은 그의 산문집 <1950년대>에서 썼거니와, 자살 시도와 출가, 환속, 투쟁으로 이어지는 파란 과 갱신의 출발점이 바로 그의 50년대였다.
시인의 고향은 현재의 전북 군산시 미룡동. <만인보>에 미제방죽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하는 은파유원지와 할미산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은태 소년이 학살당한 이들의 주검을 나흘 걸려 파내었던 할미산의 참호는 우거진 관목에 가리기는 했지만 예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문둥이만 혼자 살 뿐 인적 하나 없던 저수지 가에는 고층아파트군이 숲을 이루게끔 되었고, 그 너머로 희미하게 장항제련소의 굴뚝이 건너다 보인다.
시인이 다녔던 미룡초등학교 자리에는 군산대학교가 들어서 있고, 군산중학교를 오가는 길에 <한하운 시초>를 주움으로써 문둥이 시인이 될 꿈을 키웠던 한길은 지금은 왕복 4차선 도로로 바뀌었다. 시인의 생가는 없어졌지만, 팔순의 어머니는 생가 근처에 홀로 살면서 노년을 즐기고 있다
. 어느새 환갑을 훌쩍 넘겨버린 큰아들을 위해 손수 담근 인삼주를 내오신 어머니는 치다 보기도 아깐 내 아들이라며 황홀해하고, 시인 아들은 그 어머니를 보며 늙은 주제에도 싸가지가 있어 한마디 한다. 이어서는 권커니 잣커니 오가는 술과 노래…. 미성년의 나이로 출분을 행했 던 시인은 한결 귀가 순해져서야 돌아와 어머니이신 고향을 끌어안는가.
눈길
- 고 은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어 들리나니 대지(大地)의 고백(告白)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寂寞)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 1960>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1958년 <현대문학>지 11월호에 「봄밤의 말씀」「천은사운(泉隱寺韻)」 등 다른 두 작품과 함께 서정주 시인의 추천을 받아 발표된 실질적 데뷔작으로서 첫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 같은 제목의 다른 작품과 구별하기 위하여 본디 「속(續) 눈길」이라 하였으나, ‘속(續)’자를 떼고 보통 「눈길」이라 불리운다. 이 시는 눈 덮인 길을 바라보며, 긴 방황과 고뇌를 가라앉히고 명상에 잠기는 체험을 노래한 시다. 눈길을 보는 화자의 시야에 어린 인식의 추이를 좇아 보자.
▶ 성격 : 명상적, 관념적, 상징적
▶ 어조 : 엄숙하고 묵직한 어조(←종결형 어미 ‘-노라’의 반복)
▶ 구성 : ① 방황 끝의 명상(1-4행)
② 공(空)으로 정화된 세계의 발견(5-9행)
③ 새로운 정신 세계의 열림(10-15행)
④ 정화된 외부 세계의 내면화(16-21행)
▶ 제재 : 눈 내리는 풍경
▶ 주제 : 모든 고뇌와 방황을 씻고 무욕(無慾)의 상태에서 모든 것을 다시 인식하고자 함. [명상을 통하여 깨달은 적멸(寂滅)의 평화]
<연구 문제>
1. ㉠의 시상은 ㉡과 ㉢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시적 의미의 발전 과정을 5문장, 200자 이내로 서술하라.
‘눈’은 이 시의 모티프이고 지배적 심상이다. ‘눈’은 ‘모든 것’을 덮어 버리고, 곧 삶과 죽음까지도 소멸시켜 버리고 ‘평화’의 세계를 연출한다. 이러한 외부적인 ‘평화’의 풍경은 다시 내면화하여 ‘어둠’이 된다. 실로 화자와 세계의 정서적 융합인 셈이다. 결국 ‘눈’은 화자의 번민과 고뇌와 절망을 정화하여 무념 무상의 경지를 만들기에 이른 것이다.
2. 이 시의 ‘엄숙하고 묵직한 어조’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크게 작용하고 있는 언어 조직상의 특징을 15자 이내로 쓰라.
종결형 어미 ‘-노라’의 반복
3. ㉢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지 한 문장으로 쓰라.
그 동안의 방황에서 벗어난 정신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모든 욕심, 후회, 애증 따위를 지워 버린 무념 무상의 경지를 뜻한다. 그것은 곧 ‘위대한 적막’과 같은 의미이다.(모든 것을 비우고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려 하는 무욕의 상태 혹은 명상의 경지를 뜻한다.)
4. 이 시의 화자가 지나온 삶을 간략히 설명하되, 본문에서 단서가 될 만한 두 시행을 찾아 설명하라.
제3행의 ‘온 겨울을 떠돌고’와 제18행의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에서 ‘겨울’은 고통스런 삶을, ‘떠돌고’는 방황하는 영혼을 말한다. 즉, 화자의 과거는 고통 속에서 방황을 거듭해 온 삶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시인이 민족과 역사를 만나기 전, 허무주의적 세계에 빠져 있던 초기시의 대표 작품이다. 그의 허무주의는 50년대 전후(戰後)의 폐허를 배경으로 방랑과 입산, 환속으로 이어진 자신의 행려 의식(行旅意識)과 노장(老莊)의 무위(無爲) 사상, 그리고 불교의 공(空) 사상과 관련 깊은 것으로, 그의 초기시 세계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시인은 눈 덮인 길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 왔던 방황과 고뇌를 가라앉히고 무념 무상(無念無想)의 명상적 경지에 다다르는 체험을 노래하고 있다. ‘눈’은 그 흰 빛깔로 인해 ‘정화(淨化)’의 이미지이며, 모든 것을 너그럽게 감싸 안는다는 의미에서 ‘관용(寬容)’ 내지 ‘포용(包容)’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눈길은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즉, 지난날의 방황과 고뇌를 정화시켜 포근히 감싸 안는 평온한 상태를 의미한다.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라는 구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화자는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오래도록 방황을 거듭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방황의 끝에서 그는 모든 것을 덮어 버리는 눈을 바라보며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솟구쳐 오르는 벅찬 감동과 희열을 느낀다. 바로 이 순간의 눈 덮인 풍경을 그는 ‘설레이는 평화’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눈길’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인데, ‘안에서는 어둠’이다. 나아가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라고 하고 있다. 이 어둠은 실제 어둠이 아닌, 마음 속에서 느끼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눈길과 서로 조응되는 이미지이다. 따라서 어둠은 절망적 암흑이 아니라 평화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에서 느끼는 어떤 감정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눈’은 ‘겨울’, 즉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방황을 거듭해 온 시인의 삶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 주는 이미지요, ‘어둠’은 ‘눈’으로 덮인 평화의 경지를 바라보며 느끼게 되는 평온하고 고요한 평정심의 의미이다.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 고 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 1974)
* 문의 마을 : 충북 청원군 대청 호반(湖畔)의 마을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고은의 네 번쩨 시집 문의(文義)마을에 가서(1974)의 표제시다. 이 시는 시인이 50-60년대 초기시의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작가가 사회적, 역사적 책무를 절감하고 민중적 각성의 시인으로 변신한 중기시의 서두를 장식한 것이다.
이 시는 모친상을 당한 신동문 시인의 고향인 충북 청원군 문의마을에 가서 장례식을 주관했던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성격 : 명상적, 주지적, 관념적, 철학적
▶ 어조 : 담담하게 절제된 어조
▶ 구성 : ① 죽음과 삶의 길이 어떻게 다른가(1연)
② 죽음과 삶의 길이 하나임(2연)
▶ 제재 : 장례 의식
▶ 주제 : 죽음과 삶의 상거(相距)와 합일(合一)
(죽음을 통하여 깨달은 삶의 경건성)
<연구 문제>
1. ‘죽음’과 ‘삶’이 상거(相距)와 합일(合一)의 모순적 관계에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시행을 찾아 쓰라.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2. 제1연 5행의 상대되는 시어를 제2연에서 찾아 쓰라.
인기척
3. 제1연의 5행에서 반복되는 두 개의 ‘죽음’, 곧 ㉠과 ㉡이 갖는 의미를 구별하여 150자 정도로 설명하라.
㉠은 이 시 전체의 문면에 나타나는 행동 주체로서의 죽음이다. 시적 화자에 능동적으로 다가왔다 사라지는 죽음으로 시적 화자의 자의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소진되면서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은 시적 화자의 정서에 의해 착색된 죽음이다. 적막한 죽음, 이것은 시적 화자가 느끼는 죽음이다.
4. ㉢의 의미를 20자 이내로 쓰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감상의 길잡이>
전기적 시실이야 어떻든 문면(文面)에 드러난 바로는 ‘문의 마을’은 이 시에서 죽음과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시적 공간으로 이해될 수 있다.
두 개의 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의 첫 연에서 죽음은 길이 ‘적막’하기를 바라고,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어, 죽음과 삶의 길이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둘째 연에 가면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한 죽임이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다가 뒤를 돌아보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어, 죽음과 삶의 길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만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에 이르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첫 연과 둘째 연이 서로 대립적이면서도 상응하는 구조인 바,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이라는 구절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이라는 구절과 대응하는 것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편, 제2연 6행의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는 구절에서는 기묘하게도 죽음과 삶의 상거(相距)와 합일(合一)을 함께 읽을 수 있다. 죽음과 삶의 길은 서로 모순된 것이면서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일 터이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자가 아무리 돌을 던져 죽음을 쫓고자 하여도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임을 깨닫게 된다.
화살
- 고 은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
몇 십 년 동안 가진 것,
몇 십 년 동안 누린 것,
몇 십 년 동안 쌓은 것,
행복이라던가
뭣이라던가
그런 것 다 넝마로 버리고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이 소리친다.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단 한 번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돌아오지 말자!
오 화살 정의의 병사여 영령이여!
(시집 새벽 길, 1978)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1970년대 유신 정권의 독재에 온몸으로 맞서 싸웠던 시인의 민주화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그러므로 ‘화살’은 민주화 운동에 헌신적으로 앞장서 투쟁했던 사람, 즉 민주화 투쟁의 전위를 상징한다.
시인은 이 땅의 자유와 민주를 위해서 ‘가진 것’․‘누린 것’․‘쌓은 것’이라는 부와 명예뿐 아니라 ‘행복’도 넝마처럼 버리자고 한다. 나아가 날아가 돌아오지 않는 화살처럼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고 반복해서 외침으로써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출한다. 또한, ‘박힌 아픔과 함께 썩’겠다, ‘피를 흘리’겠다는 다짐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 민주화를 앞당기겠다는 순국(殉國)의 의지로 하나의 밀알이 썩어야만 만인을 먹이는 빵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와 상통한다. ‘캄캄한 대낮’으로 표상되는 폭압의 현실 속으로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겠다’는 시인의 대 사회적 선언은 마침내 그를 허무의 깊은 늪에서 벗어나 멀고도 험한 민중․민족․통일 문학의 금자탑으로 우뚝 서게 한 것이다.
초토(焦土)의 시 8
-- 적군 묘지 앞에서 --
- 구 상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드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다.
이 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삼십 리면
가루 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지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北)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 놓아 버린다.
(시집 초토의 시, 1956)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6·25의 체험을 형상화한 15편의 연작시 중의 여덟 번째 작품으로, 동족 상잔(同族相殘)의 비극으로 생겨난 ‘적군 묘지’ 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사랑과 화해로 민족 동질성의 회복과 통일에의 염원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 민족사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된 6·25의 비참한 현실을 시인은 어떻게 시화(詩化)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적군 병사들의 응어리진 원한이 나의 바람에 일치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아울러, 이 시의 화자가 시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 성격 : 관념적, 종교적, 인도적
▶ 어조 : 비분과 통한의 어조
▶ 표현 : 크리스트교적 윤리관에 바탕을 두고 평범한 시어를 사용함.
▶ 구성 : ① 적군 병사에 대한 애도(1-3연)
② 분단의 비극(4-5연)
③ 통일에의 염원(6-7연)
▶ 제재 : 적군 묘지에서 느끼는 비분
▶ 주제 : 적군 묘지에서 느끼는 분단 현실에 대한 통한과 통일에의 염원
<연구 문제>
1. 이 시에 드러난 화자의 윤리관이 집약되어 있는 시어를 찾아 쓰라. 사랑
2. ㉠이 담고 있는 구체적 내용을 두 어절로 쓰라.
조국의 통일(분단의 극복)
3. 이 시가 독자에게 공감을 주는 것은, 화자의 적군에 대한 어떤 태도 때문인지 50자 정도로 설명하라.
적군에 대한 적대 의식이나 증오보다는 동포애로부터 우러나오는 관용과 연민의 태도 때문이다.
4. 이 시에서 ‘미움’과 ‘사랑’이라는 시어의 역할과 의미를 밝혀, 제3연의 내용을 200자 정도로 설명해 보라.
두 시어는 이 시의 주제를 드러내는 핵심어이다. ‘미움’은 이념적 대립에 의한 갈등으로 말미암아 동족의 가슴에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의 원인이었음을 말하고, ‘사랑’은 민족애와 크리스트교적 윤리에 의한 화해와 용서를 말한다. 그러기에 죽음은 이념적 대립의 적대감(미움)을 넘어서서 민족애와 크리스트교적 관용(사랑)을 불러일으킬 만큼 크고 너그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6․25의 체험을 노래한 <초토의 시>라는 연작시 15편 중, 여덟 번째 작품으로 직설적 어투의 무기교의 시라는데 그 형식적 특징이 있다. 시인은 동족 상잔의 비극으로 생겨난 ‘적군 묘지’ 앞에서 이데올로기라는 허상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권력욕으로 인한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편, 기독교적 윤리관에 바탕을 둔 사랑과 화해의 정신으로 민족 동질성의 회복과 평화 통일에 대해 염원하고 있다.
생존의 극한 상황인 전쟁 중에는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우던 원수 사이었지만, 가로막힌 휴전선으로 인해 넋마저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들은 이미 저주와 원한의 적(敵)이 아니라, 같은 겨레요, 형제일 뿐이다. 고향을 북에 둔 시인은 분단의 상징물인 휴전선을 바라보면서 민족의 고통을 절감하며, 적군 병사들의 ‘풀지 못한 원한’을 그들만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동일시하는 일체감을 보여 주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분단으로 인해 돌아가지 못하는 그들의 죽음을 뜻하며, 그들의 죽음이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시인의 뜨거운 열망을 반영하고 있다.
기도
- 구 상
땅이 꺼지는 이 요란 속에서도
언제나 당신의 속사귐에
귀 기울이게 하옵소서.
내 눈을 스쳐가는 허깨비와 무지개가
당신 빛으로 스러지게 하옵소서.
부끄러운 이 알몸을 가리울
풀잎 하나 주옵소서.
나의 노래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내 혀를 닳게 하옵소서.
이제 다가오는 불 장마 속에서
‘노아’의 배를 타게 하옵소서.
그러나 저기 꽃잎 모양 스러져 가는
어린 양들과 한 가지로 있게 하옵소서.
(시집 초토의 시, 1956)
<감상의 길잡이>
구상의 시는 가톨리시즘을 형상화한 기독교적 세계관의 중심에 서 있다. 그는 시와 삶의 믿음을 인생의 존재 의미와 역사적 의의를 집약시켜 살아온 가톨릭 시인으로, 전통적 서정시가 개인의 정서에 몰입하여 체관(諦觀)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즉물적인 언어와 물질주의적인 현대 문명을 지향하는 모더니즘의 세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그의 시적 태도는 철저하게 존재론적인 기반 위에서 미의식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는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이 없는 감성을 수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역사 의식에 기초하지 않은 생경한 지성이라는 것도 신뢰하지 않는다.
이 시는 명상과 기도의 심오한 내면적 자유를 구현하고 있다. 화자인 시인은 성서(聖書)의 단순한 장면과 사건을 환기하고, 그것들에서 함축적인 의미를 찾아낸다. 그것은 바로 ‘불 장마 속’ 같은 고통의 체험에서 생성된 것으로, 각 연의 마지막 행마다 쓰이고 있는 ‘ ― 하옵소서’의 기원적 태도에서 기독교 신앙과 삶의 진실성이 잘 나타나 있다. 물론 그의 삶의 진실성을 뒷받침해 주는 진리는 투철한 신앙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1연에서 화자는 지상적 고뇌에 대한 천상적 구원을, 2연에서는 ‘허깨비’와 ‘무지개’로 표상된 관념의 허상에서 벗어난 이성의 회복을, 3연에서는 원죄 의식의 신앙적 겸손을 호소하는 한편, 4연에서는 신에 대한 절대적 찬미를, 5연에서는 ‘불 장마 속’으로 표현된 인간의 불행에 대한 회복을, 6연에서는 ‘어린 양들’로 비유된 묵시적인 세계로 접근하고 있다.
한편, 이 시의 구조는 상충과 대립의 양상으로 되어 있다. 즉, ‘요란함 / 속삭임’, ‘허상 / 실상’, ‘부끄러움 / 떳떳함’, ‘멸망 / 구원’, ‘스러짐 / 있음’의 이미지에서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면서도 식물계의 ‘풀잎’과 동물계의 ‘어린 양’이라는 천국과 연관된 이미지를 통하여 기독교의 구원 사상을 사상적으로 통일시키고 있다.
장날
- 노천명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송편 같은 반달이 싸릿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 “여성”(1939)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일상적인 용어를 구사하여 이해하기가 비교적 쉬운 작품이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시골, 그러나 푸근한 인정이 넘치는 고향을 눈앞에 그려 보자. 심오하고 깊은 의미만 가득 숨어 있는 시가 아님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의 배경은 어느 시골이며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한 장면이 그려져 있다. 장날 새벽의 정경과 저녁의 풍경이 소박하고 평화롭게 펼쳐져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먼저 그 분위기나 상황을 상상해 보자. 시구마다 어떤 깊은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을까 하고 분석하거나 깊이 파고 들 것은 없다. 평범한 말뜻의 이해만으로 충분하다.
▶ 성격 : 감상적, 관조적
▶ 특징 : 동시적(童詩的) 분위기의 소품(小品)
▶ 구성 : ① 장날의 새벽 정경(제1연)
② 장날의 저녁 정경(제2연)
▶ 제재 : 시골 장날
▶ 주제 : 옛 고향에 대한 추억
<연구 문제>
1. ㉠의 뜻을 15자 내외로 풀어 쓰라.
<모범답> 내다 팔아 돈을 만들어야
2. 이 시에 관한 설명으로 바르지 않은 것은?
<모범답> ④
① 시적 대상의 구체화가 두드러진다.
② 시골 풍물의 인상적 표현이 뛰어나다.
③ 토속어의 배열이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
④ 작가의 외로운 정서가 이쁜이에게 이입(移入)되어 있다.
3. 이 작품을 소설에 견준다면 어떤 시점에 해당될까? 그렇게 보는 근거를 들어 80자 내외로 쓰라.
<모범답> 화자가 표면에 드러나 있지 않고, 주관적 감정이 노출되지 않았으며, 대상을 객관적 거리를 두고 묘사하는 점으로 보아 작가 관찰자 시점으로 볼 수 있다.
<감상의 길잡이>
이 시의 제1연은 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의 정경이고, 제2연은 장을 보로 돌아오는 ‘저녁’의 정경으로 되어 있다.
나귀 등에 짐을 싣고 새벽에 집을 떠나 20리나 걸어야 열하룻장을 볼 수 있는 시골. 살림이 넉넉할 리가 없다. 울 안에 한두 그루 심어 놓은 대추나무, 밤나무의 열매를 쓸 만큼 남겨 놓고 몇 됫박이라도 내다 팔아야 추석을 쇤다. 일 년 중 가장 풍성해야 할 농촌이지만 우리네 살림이 다 그렇지만은 못하다. 요리조리 재며 한 푼이라도 쪼개 써야 하는 현실을 어린 아이가 알 턱이 없다. 철모르는 막내딸 이쁜이는 내다 팔아야 할 대추를 안 준다고 운다. 딸에게 대추 한 줌을 집어 줄 수 없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마는 이 시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끝까지 비참함으로 몰고 가지 않은 데 있다. 이 시의 시다운 맛은 그 비참함보다는 차라리 순박한 정경에 있다. 그것을 제대로 느끼려면 무엇보다 각 연의 마지막 행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를 놓쳐서는 안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는 장보러 가는 아버지의 가난함을 여지없이 드러나게 하지만, 우리는 그 아버지의 비참함보다는 어린 딸의 천진스러움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끝 연에서는 그것이 더 재미있게 전환된다.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울던 딸의 모습을 생각하며 아버지는 내내 언짢은 기분이었으리라. 그러나 울다가 잠이 든 것일까? 딸 대신 삽살개가 먼저 나와 꼬리를 친다. 아무것도 모르는 삽살개가 주인을 반기는 정경이 이 시의 긴장된 분위기를 누그려뜨리며 읽는 이의 입 가에 엷은 웃음을 번지게 한다.
사슴
-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 시집 “산호림(珊瑚林)”(1938)
<핵심 정리>
▶ 시작(詩作) 배경
‘사슴과 5월과 고독의 시인’으로 불리는 노천명의 대표작. 현실에 타협하지 못하고 결혼도 않고 고독과 빈궁으로 일생을 마친 시인의 자화상(自畵像)이다.
▶ 감상의 초점
노천명 시인의 대표작으로 널리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작품이다. “공소한 감정의 유희와 허영된 언어의 과장을 발견할 수 없다”고 평할 만큼 감정이 절제되어 있고, 언어의 낭비가 없는 작품이다. 정결한 몸가짐, 흐트러지지 않은 매무새를 지니려 애를 쓴 흔적이 배어 있다. 그러나 일제하 잘못된 현실 인식으로 자초한 불명예, 6·25 전란시의 부역으로 인한 고초 등등 시인의 작품 외적(外的) 생애를 알면 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 마리의 사슴을 스케치한 소품으로 보이는 이 시는 감정 이입의 수법으로 사슴을 시인의 분신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슬픈 짐승’은 시인의 어떠한 모습을 투영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잃었던 전설’과 ‘높은 족속’이 향수의 근원을 나타낸 것이라면 ‘먼 데 산’의 상징 의미는 무엇인지 시인의 시심을 헤아려 보자.
▶ 성격 : 감상적, 관조적
▶ 특징 : 절제된 언어를 통한 감상(感傷)의 극복
▶ 표현 : 의인법, 감정 이입법
사슴을 의인화하여 감정을 이입함으로써 사슴으로 하여금 작자의 분신(分身)이 되게 하였고, 표현이 여성답게 간결.섬세하며, 내용이 고독하고 회고적(回顧的)이나 여성이 빠지기 쉬운 지나친 감정의 노출은 극복되었다.
▶ 구성 : ① 사슴의 외모(속성)― 귀족적 품위(고고함)(제1연)
② 사슴의 내면― 향수,애수,동경(제2연)
▶ 제재 : 사슴
▶ 주제 : 이상향에 대한 동경. (이상적 생명에의 향수)
▶ 시어의 풀이
* 제1행 -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고독한 시인의 모습(감정이입,의인법)
* 제5행 - 내면적 성찰을 통해 자기의 참모습을 응시함. Narcissism과 통함.
* 잃었던 전설 - 높은 족속이었던 지난날(고고한 마음의 본향)
* 먼 데 산 - 향수에 젖은 모습(동경과 자유의 세계 상징)
<연구 문제>
1. <보기>에 나오는 ‘청노루’와 이 시의 ‘사슴’을 비교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100자 이내로 쓰라.
<보기>
머언 산(山)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山)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굽이를 |
청(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 박목월 「청(靑)노루」 |
<모범답> 시적 관심이 현실이 아닌 자연에 두어진 점은 같지만, 박목월의 ‘청노루’는 풍경의 일부이며 단순한 정물(靜物)로서 그려진 반면, 노천명의 ‘사슴’은 감정 이입을 통해 인격화되어 있다.
2. ㉠은 화자의 어떤 모습을 어떤 이미지로 표현한 것인지 이 시에 나오는 주제어를 넣어 한 문장으로 쓰라.
<모범답> 향수에 젖어 있는 모습을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하였다.
3. 이 시의 화자가 제재에 대하여 가지는 태도를 4자의 한자 성어로 쓰라.
<모범답> 동병상련(同病相憐)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조용히 다스려온 삶의 자세를 사슴에 투영시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먼저 이 시가 제시하는 정경을 떠올려 보자. 여기에 사슴 한 마리가 있다. 그 사슴은 긴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보고 있다. 아무래도 사슴이 지금 서 있는 자리는 그것이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온전한 자연은 아니다. ‘먼 데 산’은 사슴이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과거의 영토이다. 과거에 대한 향수가 사슴의 모가지를 길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과거가 향수의 대상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잃어버린 전설’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전설은 바로 그가 ‘높은 족속’으로서 고고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시절을 의미한다.
이렇게 문맥을 짚어갈 수 있는 이 시는, 겉으로는 사슴을 가볍게 스케치한 한 폭의 작은 그림 같지만, 사슴에게 인격을 불어 넣고 감정을 이입(移入)시켜 어느덧 사슴은 시인 자신의 모습으로 변모되어 독자 앞에 나타난다. 불행한 현실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이는 사람에게 하나의 질곡(桎梏)일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거기에 바로 노천명 시인의 ‘슬픔’이 자리잡고 있다.
푸른 오월
- 노천명
청자(靑瓷)빛 하늘이
육모정[六角亭]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잎에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正午)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 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딴 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 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 순이 뻗어 나오던 길섶
어디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호납나물, 젓가락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시집 산호림, 1938)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청명한 오월에 느끼는 서정을 노래하고 있는 9연의 자유시로서 노천명다운 호사스런 시심이 잘 나타나 있다. 시인은 1연의 ‘청자빛 하늘’․‘육모정 탑’․‘연못 창포’, 6연의 ‘청머루 순’․‘꿩’․‘활나물’을 비롯한 여러 나물, 8연의 ‘보리밭’․‘종달새’ 등의 시어로 우리 고유 정서를 드러내는 한편, ‘라일락 숲’․‘여왕’․‘여신’과 같은 시어를 통해 서구적 정감을 가미시키고 있다. 그러나 화자는 ‘계절의 여왕’인 오월에서 환희와 즐거움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더욱 아름다워지는 계절의 흐름 속에서 점점 초라해지는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옛날에 대한 향수와 비애를 함께 노래하고 있다.
1연에서는 오월의 정경을 ‘청자빛 하늘’․‘연못 창포잎’ 등 청색의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으며, 2연에서는 화자가 오월의 푸르름 속에서 느끼는 고독을 보여 주고 있다. ‘젊은 꿈은 나비처럼 앉는 정오’이지만, 화자는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다고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3연에서는 옛 시절에 대한 향수의 감정을 제시하고, 4연에서는 산책을 하며 회상에 젖는 화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봄날의 아름다움 속에서 느끼는 화자의 외로움은 다소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들도 흔히 경험하게 되는 감정이다. 5․6연에서는 향수와 동경의 대상이 된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 그 지난날은 5연에서는 ‘풀 냄새’라는 후각적 이미지로 나타나 있으며, 6연에서는 ‘청머루 순이 뻗어 나오던 길섶’의 시각적 이미지와 ‘꿩’의 울음 소리인 청각적 이미지의 조화로 나타나 있다. 7연에서는 다시 현재로 돌아와 느끼는 화자의 심정이 제시되고 있다. ‘노래’를 부르자고 하는 것은 화자가 자신의 비애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볼 수 있으며, 8․9연에서 화자는 옛날에 대한 향수를 떨쳐 버리고, 오월의 하늘로 힘차게 비상하는 환희가 그려지고 있다. 이렇듯 이 시는 환희에서 출발한 감정이 옛날에 대한 향수와 비애로 바뀌었다가 다시 환희로 돌아옴으로써, 시인의 감정은 더욱 호사스러워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남사당(男寺黨)*
- 노천명
나는 얼굴에 분(粉)칠을 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香丹)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램프불을 돋운 포장(布帳) 속에선
내 남성(男聲)이 십분(十分) 굴욕되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道具)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삼천리, 1940.9월호)
* 남사당(男寺黨) : 사당 복색을 하고 이곳 저곳 돌아다니면서 노래와 춤을 팔고 노는 사내.
* 초립(草笠) : 관례(冠禮)한 남자가 쓰던, 매우 가는 풀줄기로 엮은 갓.
* 쾌자(快子) : 옛날 전투복의 한 가지. 조끼 모양이며 등솔기가 단에서 허리께까지 틔었고 길이가 두루마기처럼 길다.
* 조라치 : 원뜻은 절에서 청소 등의 일을 하는 하인이지만, 여기서는 남사당패의 구성원을 가리킨다.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섬세하고 다정한 정감의 시를 주로 쓴 노천명의 시 가운데 예외적으로 건강미를 획득한 작품이다. 어린 시절, 남동생 보기를 원했던 부모에 의해 남장(男裝)을 하고 다녀야 했던 수치심이 시작(詩作)의 계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여기서는 그것이 거꾸로 나타나 있다. 화자는 시인 자신이 아니라 따로 설정된 가공 인물임에 유의하자.
▶ 성격 : 주정적, 감상적
▶ 특징 : 감상(感傷)에 흐르기 쉬운 소재임에도 절제된 언어를 통해 이를 잘 극복함.
▶ 구성 : ① 여자로 분장한 남사당패 사나이(제1연)
② 남사당패 사나이의 비애(제2연)
③ 떠돌이 인생의 서글픔(제3연)
④ 새벽 길의 애환이 교차되는 감정(제4연)
▶ 제재 : 남사당
▶ 주제 : 남사당 소년의 애환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유랑인의 ‘근원적 슬픔’을 의미하는 시구를 찾아 쓰라. <모범답> 집시의 피
2. <보기>의 밑줄 그은 부분의 의미는 이 시가 발표된 일제하의 시대 상황과 관련하여 어떠한 의미로 보아야 하는가?
이 시가 성공하고 있는 것은 노천명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먼 데’가 ‘석포리’라는 구체적인 장소와 그의 유아적 체험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시에서 느끼는 설움이나 외로움은 남사당패 한 소년의 그것을 넘어 보편적인 사람의 설움이요, 괴로움이라는 느낌을 준다. |
<모범답> 일제에 밀려 유랑하는 민족의 서럽고 고통스러운 삶.
3.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는 시인 자신이 아니라 시인이 설정한 가공적 인물이다. 이 가공 인물을 통해 남사당의 고충을 말하고 있다면, 화자의 그런 감정이 가장 강하게 나타난 두 시행을 찾아 쓰라.
<모범답> 내 남성(男聲)이 십분(十分) 굴욕되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감상의 길잡이>
남사당이란, 꼭두쇠라고 불리는 우두머리를 비롯하여 40-50명으로 구성된 놀이패로서 전국 각지를 떠돌며 춤과 웃음과 노래로 삶을 영위하던 집단이다.
이 시에는 유랑 인생의 애상이 그려져 있다. 화자인 ‘나’는 시인 자신이 아니라 따로 설정된 가공 인물인데, 어린 시절 남장(男裝)을 하고 다녀야 했던 시인 자신의 삶에 비추어 볼 때 묘한 느낌을 준다. 화자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나이’이며, 저녁이면 향단이 등의 배역을 맡아 여자 목소리를 내야 하는 자신을 서글프게 느껴 ‘내 남성(男聲)이 십분 굴욕되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유랑 인생의 생업인 바에야 어쩌랴. 더욱 한스러운 것은, 이런 놀이판이 끝나고 길을 떠나야 하는 처지이기에 인연을 두고 정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 역시 젊은 나이이기에 ‘은반지를 사 주고 싶은 / 고운 처녀’를 만날 때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정착하지 못하고 새벽이 되면 짐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새로운 동리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싱가폴 함락
- 노천명
아세아의 세기적인 여명은 왔다
영미의 독아에서
일본군은 마침내 신가파를 뺏아내고야 말았다
동양 침략의 근거지
온갖 죄악이 음모되는 불야의 성
싱가폴이 불의 세례를 받는
이 장엄한 최후의 저녁
싱가폴 구석구석의 작고 큰 사원들아
너의 피를 빨아먹고 넘어지는 영미를 조상하는 만종을 울려라
얼마나 기다렸던 아침이냐
동아민족은 다같이 고대했던 날이냐
오랜 압제 우리들의 쓰라린 추억이 다시 새롭다
일본의 태양이 한번 밝게 비치니
죄악의 몸뚱이를 어둠의 그늘 속으로
끌고 들어가며 신음하는 저 영미를 웃어줘라
점잖은 신사풍을 하고
가장 교활한 족속이여 네 이름은 영미다
너는 신사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상을 해적으로 모신 너는 같은 해적이었다
쌓이고 쌓인 양키들의 굴욕과 압박 아래
그 큰 눈에는 의혹이 가득히 깃들여졌고
눈물이 핑 돌땐 차라리 병적으로
설웃음을 쳐버리는 남양의 슬픈 형제들이여
대동아 공영권이 건설되는 이날
남양의 구석구석에서 앵글로색슨을 내모는 이 아침
우리들이 내놓는 정다운 손길을 잡아라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에
일장기가 나부끼고 있는 한
너희는 평화스러우리 영원히 자유스러우리
얼굴이 검은 친구여!
머리에 터번을 두른 형제여!
잔을 들자
우리 방언을 서로 모르는 채
통하는 마음 굳게 뭉쳐지는 마음과 마음
종려나무 그늘 아래 횃불을 질러라
낙타 등에 바리바리 술을 실어 오라
우리 이날을 유쾌히 기념하자
매일신보.1942.2.19. <친일시의 한 모형>
<감상의 길잡이>
* 일본군은 1942년 2월 15일 말레이반도 남단 싱가폴을 공략했는데,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말레이, 싱가폴작전에서 기대 이상의 승리를 거두었다. 서전에서의 이 승리는 일본 전역을 열광케 하면서 제 1차 승전축하회가 전국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시는 그같은 분위기 속에서 발표된 것이다.
* 9연 - 일제의 지배아래서만이 평화와 자유가 보장된다는 것인데, 이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와 자유는 아니다. 식민통치하의 민족은 지배자의 착취대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는 자유와 평화는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다.
물결
- 노자영(盧子泳)
물결이 바위에
부딪치면은
새하얀 구슬이
떠오릅디다.
이 맘이 고민에
부딪치면은
시커먼 눈물만
솟아납디다.
물결의 구슬은
해를 타고서
무지개 나라에
흘러 가지요……
그러나 이 마음의 눈물은
해도 없어서
설거푼 가슴만
썩이는구려.
(조선문단 12호, 1925.10)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자연의 물결과 시적 자아가 갖고 있는 고민의 물결을 대비시켜 “자연의 물결은 저절로 가라앉지만, 고민의 물결은 구원받지 못해 더욱 애태운다.”는 평이한 내용으로, 일제 치하에서 겪고 있는 삶의 고뇌와 절망감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6․5조의 정형률에 의존하면서도, 마지막 4연의 첫 행은 파격(破格)으로 처리하여 율격적으로 돋보이지만, ‘물결’ ― ‘마음’을 비롯하여 ‘바위’ ― ‘고민’, ‘새하얀’ ― ‘시커먼’, ‘구슬’ ― ‘눈물’의 어휘를 대칭적으로 배열함으로써 자유로운 시상의 전개를 스스로 차단시켜 버린 점은 가장 큰 약점으로 남는다. 4연의 ‘해도 없어서’는 암울한 식민지 현실 상황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이 작품의 동요적 어법과 유아적 상상력은 시인의 저급한 현실 인식 수준과 둔감한 시적 감수성을 짐작하게 해 준다.
도종환論 1
―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
눈물이, 떠난다는 생각을 얼핏 떠올렸을 때/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던지/애착이나 억울함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부정하고 부정해도 끝내 부정할 수 없는/우리의 마음 하나 아주 여리고/아주 작던 그래서 많이도 고통스러웠던/지금까지 나를 끌고 온 그런 것 하나를/역시 버릴 수 없어서 아팠다.
해직교사 시인 도종환(42)씨의 최근작 `겨울 금강'의 한 대목이다. 지난 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교단에서 쫓겨나 햇수로 9년째를 맞는 처연하면서도 굳건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전교조 충북지부장인 그는 동료들과 함께 11일부터 다시한번 단식에 들어간다. 최근 확정된 정부의 노동법 개정안이 교직원노조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데 대한 항의의 표시이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일은 이토록 어려운가/단식 농성장에서 병원으로 실려오는 차 안에서/주르르 눈물이 흐른다, 나이 사십에.//아름다운 세상 아, 형벌 같은 아름다운 세상 (도종환, `단식' 전문).
지난 92년의 복직투쟁 당시 그는 단식 나흘째에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 지쳐 있는 내게 다가와/몰래 하나씩 먹으라고/김선생이 손에 쥐어 준/빠알간 대추 한 줌(`대추')을 요령껏 먹었더라면 병원 신세를 지도록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으로서의 양심과 자존심이 그런 요령을 허락하지 않았다.
얼어붙은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얼음 속에 갇힌 빈 배 같은 그대를 남겨 두고/나는 아직 살아 있어서 굽이굽이 강길을 걷는다/그대와 함께 걷던 이 길이 언제 끝날지/아직은 알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이 길을 걸어/새벽의 바다에 이르렀음을 끝까지 믿기로 한다/내가 이 길에서 끝내 쓰러진 뒤에라도/얼음이 풀리면 그대 빈 배만으로도 내게 와 다오/햇살 같은 넋 하나 남겼다 그대 뱃전을 붙들고 가거나/언 눈물 몇 올 강가에 두었다 그대 물살과 함께 가리라 (`겨울강' 전문).
전교조가 무엇이관데 시인으로 하여금 이토록 비장한 노래를 부르게 하는가. 시인이 배를 곯다가 쓰러지면서까지 놓치지 않는 아름다운 세상과 새벽의 바다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전교조는 멀리는 1960년 4․19가 열어젖힌 해방과 자유의 공간에 나타났다가 5․16으로 된서리를 맞은 4․19 교원노조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좀더 가까이는 70, 80년대의 전사회적 민주화 투쟁과 그 일부로서의 교육 민주화 투쟁의 소산이다. 전교조의 전신은 6월항쟁 직후인 87년 9월에 창립된 (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였다.
전교협이 전교조로 변신하게 된 것은 협의체 성격의 임의단체인 전교협 보다는 노조로서 강력한 조직력을 갖는 전교조가 교육민주화투쟁에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임의단체 전교협을 주시해오던 당국은 전교조의 결성과 동시에 강경 탄압에 나섰고, 전교조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싸움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
다.
도종환씨의 시집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은 전교조 사태로 인해 해직의 아픔을 감수해야 했던 시인의 심정이 교육 현실에 대한 비판적 소묘와 함께 담겨 있다.
나는 또 너희들 곁을 떠나는구나/기약할 수 없는 약속만을 남기고/강물이 가다가 만나고 헤어지는 산처럼/무더기 무더기 멈추어 선 너희들을 두고/나는 또 너희들 곁을 떠나는구나/(…)/우리 꼭 다시 만나자/이 짧은 세상에 영원히 같이 사는 사람은 없지만/너희들이 자라고 내가 늙어서라도 고맙게 자란 너희들의 손을 기쁨으로 잡으며/이 땅의 인간다운 삶을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하나 되어 꼭 다시 만나자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전교조 결성 초기의 싸움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랑하는 선생님들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었다. 머리가 굵은 고교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수만명의 학생들이 교내 농성에서부터 항의 투신, 투석전 등의 방식으로 싸움에 나섰고, 광주와 부산, 인천 등지에서는 고교생대표자협의회라는 조직이 결성되기도 했다. 해마다 1백명 이상의 학생들이 성적제일주의 교육에 절망해 죽음을 택하는 상황에서 전교조의 교육이념과 소속 교사들의 실천이 어린 학생들에게도 커다란 호소력을 지녔다는 반증일 터였다.
초기 전교조의 싸움이 벌어진 89년 여름은 잇따른 방북사건으로 조성된 공안정국의 한파가 전체 사회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 무렵이었다. 야당은 물론 재야와 노동운동 진영조차도 숨을 죽이고 있던 공안한파 속에서 전교조는 반독재민주전선의 최전위에서 모범적으로 싸웠다. 전교조의 헌신적인 싸움에 고무된 민주진영은 `전교조 탄압저지와 참교육실현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참교육실현을 위한 학부모회' 등의 단체를 결성해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인 범국민대회를 열기도 했다.
청주 중앙중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도종환씨는 전교조 결성 초기에 구속되었다.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에 실린 많은 시들은 유치장과 감방에서 지은 탓에 비장한 결의에 차 있는 경우가 많다.
옳다고 믿어 이 길을 택했으므로/옳은 것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 것도/죄악이라고 믿었으므로/우리는 새벽이 오는 쪽을 향해/담담히 웃으며 갈 수 있습니다./서슬 푸른 칼날에 수천의 목이 잘리고/이 나라 땅이 곳곳이 새남터가 된다 하여도/우리는 이 감옥에서 칼날에 꺾이지 않는/마지막 이름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쓰러져 있어도/빛나고 높은 그곳을 향해/우리는 이 길을 곧게 갑니다.
(`정선생님, 그리고 보고 싶은 여러 선생님께').
어쩌다 늦은 오후 길에서 하교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눈물이 핑돕니다라고, 시인은 시집 후기에 쓰고 있다. 그것이 89년 9월이었고, 그로부터 어느새 7년 남짓의 세월이 흘렀다. 그때 그가 담임을 맡았던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은 이제 대학 2학년의 청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남들 다 출근할 때 `나만 갈 곳이 없다'는 생각으로 착잡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에게도 출근할 곳이 생겼다. 청주시 상당구 우암동의 `참교육 빌딩' 3층 전교조 충북지부 사무실이 그곳이다. 사무실에서는 이 교사 시인이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중앙중학교가 지척에 바라다 보인다. 더이상 학생들의 모습에 눈물바람을 하는 일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조차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해직될 당시에 그 기간이 이토록 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도 전교조를 탈퇴하고라도 현직에 남는 길을 택했을 것이라는 그의 말에서 해직의 아픔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정부의 노동법 개정안 발표에 대한 대책 마련을 위해 걸려오는 전화로 석유난로가 안온하게 덥혀 놓은 사무실 안의 분위기는 새삼 분주하고도 긴박하게 바뀐다. 또 한번의 단식농성을 위해 서울로 올라가기 전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 속에 중앙중학교를 찾는다. 학생들은 모두 교실에서 수업 중이라 운동장은 텅 비어 있다. 당분간은 들어설 수 없는 그 운동장을바라보며 좋은 선생님이 되고자 했던 어릴 적 꿈을 가만히 되새겨 본다. 무엇이 그 꿈을 이처럼 유예시키고 있는가도 따져 보면서.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나뭇잎 냄새 나는 계집애들과/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녀석들에게/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 주며/창 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어릴 때 내 꿈은'>
옥수수 밭 옆에 당신을 묻고
- 도종환
견우 직녀도 이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땅에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해 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에 나눠 주고
옥수수 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 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 시집 ‘접시꽃 당신’(1986.12)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작품은 고려 시대의 「가시리」, 황진이의 시조 「어져 내 일이야…」, 김소월의 「진달래꽃」 같은 이별의 노래와 주제가 비슷하다. 도종환이 개인의 주관적 정서를 노래한 시 중에는 이별을 제재로 삼은 시가 유난히 많다. 사별(死別)한 임(아내)을 그리워하고, 임에게 생전에 못다한 정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담긴 이 시가 특히 독자의 사랑을 얻고 있다. 한 사내가 앞서 간 제 아낙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슬픔을 달래는 노래이다.
▶ 성격 : 애상적, 산문적, 회고적
▶ 심상 : 시각적 심상
▶ 구성 : 내용상 전 · 후반으로 나뉜다.
①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옴(1-7행)
② 돌아오면서 느낀 회한(8-14행)
▶ 제재 : 그리움
▶ 주제 : 사별(死別)한 임에 대한 그리움
<연구 문제>
1. 다음 시의 밑줄 그은 ‘그러나’가 보여 주는 시상 전환이 윗시에서는 어디부터인가? 그 첫머리 두 어절만 찾아 쓰라.
<모범답> ‘은하 건너’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
2.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상반되게 삶에의 강한 의지가 구체화된 시행을 찾아 쓰라.
<모범답> 내 남아 밭 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3. 향가 제망매가의 내세 의식과 이 시의 내세 의식의 차이점을 100~14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제망매가의 내세 의식은 ‘이승’을 멀리하고 아미타불이 산다는 미타찰을 추구하는 데 비해, 이 시의 내세 의식은 죽어서도 이 땅의 흙과 바람으로 만나려는 그리움 때문에 현실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식이 들어 있다.
4. 회한(悔恨)의 정서를 가장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연속된 두 시행을 찾아 쓰라.
<모범답>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해 주고 /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연의 구분은 없지만, 내용 전개상 전반부 7행과 후반부 7행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겠다.
전반부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로 요약될 수 있는 내용이고, 후반부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면서 새삼스레 알게 된 것들이 그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시의 상황 설정이 아이러니컬하게 느껴지는 것은 임을 땅에 묻는 날이 공교롭게도 견우 · 직녀가 오랜 이별 끝에 서로 만나는 칠석날이라는 데 있다. 화자가 현재 처해 있는 정황과 상반된 의미를 지니는 이 ‘칠석날’의 의미는, 그러나 끝까지 상반된 의미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의 계기로 귀착된다는 데 이 시의 매력이 있는 것이다.
즉, ‘칠석날’은 임이 죽어 땅에 묻힌 날이라는 표면적인 의미 외에도 언젠가 당신이 ‘흙’이 되고 내가 ‘바람’이 되어 견우 · 직녀처럼 다시 만날 것이라는 함축적인 의미를 띠고 있는 날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이 시의 화자는 섣불리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임의 죽음 앞에서 자칫 감상에 젖지 않을 수 없을 터인데, 그 슬픔을 새로운 희망으로 전환시켜 내는 힘이 느껴지는 시로서 한용운의 어떤 면모를 떠오르게 한다.
용인(龍仁) 지나는 길에
- 민 영
저 산벚꽃 핀 등성이에
지친 몸을 쉴까
두고 온 고향 생각에
고개 젓는다.
도피안사(到彼岸寺)에 무리지던
연분홍빛 꽃너울.
먹어도 허기지던
삼춘(三春) 한나절.
밸*에 역겨운
가구가락(可口可樂)* 물 냄새.
구국구국 울어대는
멧비둘기 소리.
산벚꽃 진 등성이에
뼈를 묻을까.
소태*같이 쓴 입술에
풀잎 씹힌다.
(시집 용인 지나는 길에, 1977)
* 밸 : ‘배알’의 준말. 창자 또는 마음.
* 가구가락 : ‘코카콜라’의 중국식 표기.
* 소태 : 소태나무 또는 소태껍질, 맛이 몹시 쓰며 한약재로 쓰임.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한국적 의식의 정수를 밀도 높은 서정의 가락에 용해시켜 간결하고 응축된 단시(短詩) 형식의 작품 경향을 보여 주는 민영의 대표작이다. 발음의 동일성에 의한 ‘유음 연상(類音聯想)’으로 주제를 강화시키는 한편, 기․승․전․결의 구조 속에 1․4연을 유사한 내용과 동일한 각운으로 배치한 수미상관의 구성을 결합시킴으로써 보다 안정된 구조 형태를 갖추고 있다.
화자는 경기도 용인 땅을 지나가다 산등성이에 무리지어 피어난 산벚꽃을 바라보며 향수에 젖는다. 그 벚꽃 풍경은 개화와 낙화에 따라 그에게 휴식을 선택하게 하거나 죽음 이후의 안식에 대한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그는 ‘지친 몸을 쉴까’, ‘뼈를 묻을까’ 하는 유혹에 잠시 빠져들기도 하지만, 이내 ‘두고 온 고향 생각에’ 그것을 물리친다. 고향은 ‘도피안사에 무리지던 / 연분홍빛 꽃너울’처럼 아름다움의 상징인 동시에, ‘먹어도 허기지던 삼춘 한나절’의 유년 시절을 환기시키는 아픔의 표상이기도 하다. 또한, 고향은 서구 문화의 유입으로 인해 오염되어 가는 우리 고유 문화를 뜻하기도 한다. 물밀 듯 밀려 오는 서구 문화로 파괴되고 있는 고향을 생각하면 할수록 화자의 가슴은 ‘소태같이 쓰’기만 할 뿐이다.
‘구국(救國)을 연상하게 하는 멧비둘기의 울음 소리 ‘구국구국’과 서구 문화를 대표하는 코카콜라의 중국식 표기인 ‘가구가락’을 교묘하게 배치시킴으로써 서구 문화로 인해 파괴되고 있는 우리 문화의 현재 모습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한편, 이 시의 주제인 ‘나라 사랑’에 대한 마음이 자연스레 솟구치도록 하고 있다. 화자는 코카콜라를 ‘밸에 역겨운 / 물 냄새’라 힘주어 말하고 있지만, 오히려 현실은 정겨운 우리의 멧비둘기 울음 소리를 ‘소태같이 쓰’다고 하지나 않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이 시는 독자들에게 산벚꽃 피고 멧비둘기 우는 들판에 나가 이름 모를 풀잎이라도 씹으며 우리 문화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하는 반성의 계기를 제공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답십리(踏十里)
- 민 영(閔暎)
하나
땅거미 지면
거나해서 돌아온다.
양 어깨 축 늘어진
빨래가 되어.
새벽에 지고 나선
청석(靑石)의 소금 짐은
발끝에 채이는
돌멩이만도 못하구나!
촬영소 고개 너머
십리(十里) 불빛.
중랑천 둑방에는
낄룩새 운다.
둘
고개 하나를 넘으면
아주까리 마을.
오리 치는 초막(草幕)에는
사당이 산다.
머리가 반백인
늙은 사당,
전축 소리만 들려 와도
어깨춤 춘다.
김세나 낙양성 십리허(洛陽城十里許)
에도 덩실거리고,
심청가 자진모리에도 고개 떨군다.
셋
어디로 간들
숨통이 트이랴.
여뀌풀 흐드러진 하빈(河濱)
기(氣)를 돌린다.
저자의 왁자지껄
들 앞에서 멈추고,
거무튀튀한 쓰거운 물이
창자를 훑는다.
내 생애의 만리의 구름,
짓씹는 어금니의 허전한 새벽.
예서 살으리
㉠발굽 닳을 때까지!
넷
<생략>
(창작과 비평, 1977)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모순과 허위로 가득찬 세상을, 공업화의 폐해로 죽어가는 중랑천의 모습으로 구체화하며, 그 안에서 무력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순박한 인간들의 모습을 드러내 현실을 비판한다. 그러면서도 이곳을 부정하거나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오히려 애정을 느끼고 애착을 갖는다. 봇짐장수와 머리 흰 사당 등의 고달픈 삶을 긍정하는 화자의 따뜻함이 느껴진다.
▶ 성격 : 현실 비판적
▶ 어조 : 자조적, 영탄적 어조
▶ 특징 : 제목의 중의성. (답십리는 공간적 배경과 봇짐장수라는 두 가지 성격을 드러냄)
▶ 구성 : ① 하나 : 시적 화자의 모습(1연)
② 둘 : 별로 흥겨울 것 없는 현실에서도 흥겨워하는 늙은 사당(2연)
③ 셋 : 시적 화자의 본질 자각(3연)
▶ 제재 : 중랑천
▶ 주제 : 고달픈 삶에 대한 자각과 긍정
<연구 문제>
1. 현실 상황에 대한 시인의 좌절 의식이 드러난, 연속된 두 시행을 찾아 쓰라.
<모범답> 어디로 간들 / 숨통이 트이랴.
2. 부정적 상황 속에서도 현실을 삶의 근거로 긍정하려는 의지가 드러난, 연속된 두 시행을 찾아 쓰라.
<모범답> 예서 살으리 / 발굽 닳을 때까지!
3. ㉠에 담겨 있는 함축적 의미를 70~100자 정도로 상술하라.
<모범답> 등짐 장수로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는 자신의 삶을 자조적으로, 마소의 발굽에 비유하여 비참한 삶을 강조하였다. (자조적인 자기 응시의 태도가 나타나 있다.)
<감상의 길잡이>
민영은 짧은 시구들 속에 날카로운 비수를 감춘 듯한 표현을 즐겨 구사한다. 단도 직입적인 표현을 통해 모순과 허위로 가득찬 세상과 그 안에 무력하게 끼여 있는 자신을 비판적으로 응시하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유일하고 절대적인 삶의 근거로 긍정한다.
‘하나’에서, 소금을 지고 마을마다 떠도는 소금장수는 아름다운 전래 동화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나, 현실의 모습은 비참하기만 하다. 소금은 돌멩이만도 못하고, 팔리지 않은 소금을 지고 빨래처럼 피곤한 모습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둘’에서, 도부꾼의 여정에서 만난 머리 흰 사당은 ‘낙양성 십리허’의 노래에도 흥겨워하고, ‘심청가’ 판소리 가락에도 저절로 흥이 넘쳐난다. 흥겨워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 흥겨워하는 늙은 사당은 어쩌면 재미없는 이 세상을 반어적으로 드러내 주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셋’에서, 어디를 둘러봐도 모두가 숨막히는 상황들뿐이다. 저자 거리의 시끄러운 모습이나 거무튀튀한 쓰거운 물이 흐르는 중랑천은 바로 자신의 삶의 현장이다. 그러한 암담한 상황 인식 속에서 그는 자신의 삶이 ‘만리의 구름’과 같이 허무함을 인식한다. 그러나 물가에 흐드러진 여뀌풀의 강인한 생명력은 그에게 ‘어금니 짓씹고’ 여기서 살라고 외치는 듯하다. 그는 이곳을 절대적인 삶의 근거지로 여기고 자신을 결연히 긍정한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 나는 광주 산곡을 헤매이다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
- 모윤숙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식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
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 위와 가시숲을
이순신같이, 나폴레온같이, 시이저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 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스코바 크레믈린 탑까지
밀어 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날으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어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 지어 넘어진 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 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 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시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날으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리 숨 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이슬 나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 다고.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 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러싼 군사가 다아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 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리와 사자 떼가 강과 산을 넘는다.
내 사랑하는 형과 아우는 서백리아* 먼 길에 유랑을 떠난다.
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 체 하려는가?
아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도 좋다.
우리는 운명보다는 강하다. 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 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 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 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즐거이 이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운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식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시집 풍랑, 1951)
* 나이팅게일 : 지빠귀과의 새로 휘파람새와 비슷함. 밤꾀꼬리.
* 서백리아 : 시베리아.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6․25 때 광주 산곡에서 총상을 입고 죽어가는 어느 국군 소위를 발견한 화자가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그의 애국․애족심을 명확한 시어와 강한 호소력의 남성적 어조로 노래한 계몽시이다.
일찍이 시원 동인으로 시작 활동을 시작했던 모윤숙은 일제하에서 한때 민족적 색채가 강한 시를 발표하기도 하고, 창씨개명에도 반대하는 등 저항적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결국엔 일제의 압력과 회유에 굴복하여 친일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해방 후에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당시 최대의 문학지인 문예를 창간하고 민족주의,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현실 의식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6․25가 발발하자 모윤숙은 김윤성, 공중인 등과 함께 비상국민선전대에 참가하여 많은 격시(檄詩)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모윤숙은 문학뿐 아니라, 정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여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국제 무대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큰 공헌을 했으며, 1972년에는 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기도 하였다.
이 시는 전 12연의 자유시로 기(起)․서(敍)․결(結)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죽은 국군 소위가 말하는 대목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앞뒤에 서사와 결사를 결합한 형식이다.
1연~3연의 기(起)단락에서 화자는 외따른 골짜기에서 발견한 국군 소위의 시신에서 아직 식지 않은 피를 바라보며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고 있다.
4연~11연의 서(敍)단락은 죽어가는 국군 소위가 남기는 유언이지만, 이것은 실제로 그가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죽은 시신에게서 화자가 떠올린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25세의 대한민국 아들로 숨을 마친다. 나는 용감하게 원수의 하늘까지 진격하고 싶었다. 나는 내 부모, 동생, 사랑하는 소녀 등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서 살고 싶어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나는 군복을 입은 채 이름 모를 골짜기에서 죽어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벗이 되었다. 바람이나 새들에게도 이르고 싶다. 내 나라의 동포들이여,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내가 이루지 못한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를 갚기 위하여 무덤도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겠다.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내 나라의 한 줌 흙이 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마지막 12연의 결(結)단락은 3개 연으로 이루어진 기(起)단락을 하나의 연으로 만들어 재배치함으로써 수미상관의 구성으로 극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꽃과 언어(言語)
- 문덕수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현대문학 74호, 1961.3)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무의식의 심리 상태에서 연상 작용에 의해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결합하여 내면 세계를 그리려는 초현실주의적 수법을 사용한 시이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과 같이 언어는 무의미한 사물을 의미 있게 하는 명명 수단(命名手段)이 된다. 언어는 나비, 깃발, 밀물, 불꽃으로 이어지다가 마지막에 꿀벌이 된다.
언어란 인간 세계의 모든 사상(事象)을 표현하는 매개적, 상징적 기호라는 언어의 일반론을 토대로 이 시를 이해하면 작품 감상이 용이하리라 본다.
▶ 성격 : 주지적, 상징적
▶ 구성 : ① 언어는 나비기 된다.(1연)
② 나비가 된 언어가 펄럭이다가 쓰러진다.(2연)
③ 나비가 꽃의 둘레에서 불꽃처럼 타다가 꺼진다.(3연)
④ 어떤 언어는 꿀벌이 된다.(4연)
▶ 제재 : 언어
▶ 주제 : 언어의 생성과 소멸
<연구 문제>
1. 다음 시에서 ㉠과 상응하는 시어를 찾아 쓰라.
<모범답> 이름
<해설> 이름⇒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매개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 |
2. 이 시에서 언어는 여러 가지 사물에 비유되어 있지만, 핵심이 되는 것은 둘이고 나머지는 보조적 표현 수단에 불과하다. 핵심적 역할을 하는 두 개의 시어를 찾아 쓰라. <모범답> 나비, 꿀벌
3. “언어는 /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 된다.”는 말을 언어의 일반적 속성에 비추어 말한다면 어느 것과 관계되는가?
<모범답> ④
① 불연속성 ② 사회성 ③ 역사성 ④ 자의성 ⑤ 주관성
4. 이 시에 사용된 현대시의 기법을 60~80자 정도로 설명해 보라.
<모범답> 무의식의 상태에서 연상 작용에 의해 떠오르는 이미지를 결합하여 내면 세계를 형상화하는 초현실주의적 수법을 사용하였다.
<감상의 길잡이>
난해한 작품이다. 언어는 각 연에서 나비, 깃발, 밀물, 불꽃, 꿀벌에 비유되어 있는 점이 먼저 눈에 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들 사이의 상호 관련성은 모호하며 따라서 이 시의 일관된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시는 의미할 것이 아니라 존재해야 한다.”는 시법(詩法)에 충실한 시로 이해된다고 하겠다.
한 편의 시가 던져 주는 메시지에만 매달려 시를 읽어 온 독자들에게는 이 시는 글자 그대로 미의미적 시인 셈이다. 그러나 이 시를 좀더 세심히 뜯어 볼 필요가 있다.
산문적으로 이해하면 제1연과 제4연이 유사한 내용이고, 제2연과 제3연이 비슷한 의미 단락이다. 다시 말하면, 제1,4연에서-는 언어는 꽃을 매개로 하여 나비가 되고 꿀벌이 되며 제2,3연에서는 언어가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지거나 불꽃처럼 타다가 꺼지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시는 사물을 매개로 한 언어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주제를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한다.
선(線)에 관한 소묘(素描)․1
- 문덕수
선이
한 가닥 달아난다.
실뱀처럼,
또 한 가닥 선이
뒤쫓는다.
어둠 속에서 빗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이
꽃잎을 문다.
뱀처럼,
또 한 가닥의 선이
뒤쫓아 문다.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 나오는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꽃이 찢어진다.
떨어진다.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
찬란한 꽃 망사 위에
동그란 우주(宇宙)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앉는다.
(시집 선(線)․공간(空間), 1966)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이른바 ‘무의미의 시’ 계열의 작품으로, 일체의 관념과 감정을 제거함으로써 이미지와 이미지의 결합에 의한 순수 조형물로서의 시를 보여 주고 있다. 문덕수가 그의 시에 동원하는 이미지들은 대부분 기하학적인 형상을 드러낸다. 기하학적 상상력이라 부를 수 있는 그의 시작 태도는 선과 공간으로 요약되는 이미지의 원형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의 시는 이러한 이미지의 결합에 의해 창조되는 새로운 공간, 새로운 세계를 지향한다. 물론 새로이 창조되는 공간, 새로운 세계는 앞서 지적한 대로 조형적이며, 균제의 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미지의 형상들을 놓고 거기에 내포되어 있는 어떤 철학적인 관념을 찾아보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그의 시는 이미지 그 자체를 하나의 실체로 보려고 하는 모더니즘적 신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독특한 시작 방법은 소재 중심주의적인 시가 갖고 있는 좁은 한계를 벗어나 좀더 절대적인 표현의 자유를 획득하려고 하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쇄 반응, 즉 이미지의 자율성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자유 연상과 자동 기술법이라는 초현실주의적 수법을 원용하는 한편, 거기에 모더니즘의 특성인 분석적 언어 해체의 묘를 가미시키고 있다.
이 시에서 ‘선’은 ‘실뱀’이 되기도 하고, ‘빗살’이 되기도 하고, 다시 ‘꽃’과 ‘불꽃’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비유 관념들로서 다만 시인의 잠재 의식 속에서 자유 연상에 의해 우연히 추출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시인이 추구하는 바를 찾아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을 뿐더러, 왜 이러한 표현을 했느냐고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다. 그것 자체가 이미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승(女僧)
- 백 석
여승은 합장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시집 사슴, 1936)
* 가지취 : 취나물의 일종.
* 금덤판 : 금광. 금점판
* 섶벌 : 재래종 일벌.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시간적 순서로 구성하지 않고 소설의 플롯과 같이 역순행적으로 배열하고 있다. 감각적인 어휘의 사용으로 시상을 압축하여 표현한 시구를 찾아 보자.
시의 내용을 둘로 나누면 제1연은 여승의 현재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제2,3,4연은 여승이 되기까지의 그녀의 삶의 궤적을 더듬어 보고 있다.
이 시의 여승의 일대기를 재구성하여 상상해 보거나 산무으로써 써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 성격 : 애상적, 감각적
▶ 특징 : ① 감각적 어휘의 구사
② 시상의 압축, 절제
▶ 구성 : 역순행적 구성
① 여승의 현재(제1연)
② 여승의 삶의 궤적(제2~4연)
▶ 제재 : 한 여자의 일생
▶ 주제 : 여승의 비극적 삶. (가족 공동체의 상실)
<연구 문제>
1. 이 시를 소설의 서사 구조에 견주어 볼 수도 있다고 한다면, 그 시점(視點)과 구성 방법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모범답> * 시점 : 1인칭 관찰자 시점
* 구성 : 역순행적 구성
2. 지은이는 해금 시인(解禁詩人)이다. 이 시를 통해 시인이 20년대 프로 시의 한계였던 이념 편향성을 극복, 30년대에 보여 준 시의 새로운 면모를 100자 정도로 기술해 보라.
<모범답> 일제 강점기 속에서 농촌이 몰락하고, 가족 구성원이 상실되는 우리 민족의 삶의 현실을 토속적인 시어로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목적 문학에서 벗어나 리얼리즘 시로서의 발전을 보여 주고 있다.
3. 백석(白石)의 시 작품들이 다른 시인들의 작품에 비해 독특한 스타일로 쓰여져 더욱 높이 평가받고 있다면, 어떤 점을 들 수 있는지 4가지로 써 보라.
<모범답> ① 토착어의 적절한 활용과 토속 풍경을 배경으로 한 원초적 삶의 조명
② 체험을 바탕으로 한 감각적, 구상적 표현
③ 전통적 율격과 접목하여 산문시의 가능성을 보여 준 점
④ 삶의 리얼리티를 통한 민족 공동체적 연대감 형성
4. ㉠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시에 나오는 어떤 시어나 시구를 통해 그러한 의미를 유추해 내고 있는지 120자 정도로 써 보라.
<모범답> 이미 여승이 된 위치에서, 지난날의 고생과 번민을 회상해 보며, 지친 삶 속에 찌들린 처절한 모습을 ‘파리한 여인’,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돌무덤’ 등으로 표현하여 현재의 늙음을 유추해 내고 있다.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한 여자의 일생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한 여인의 일생, 가족 구성원들이 상실되면서 일어나는 삶의 비애를 종교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 가족은 지아비와 지어미 그리고 딸아이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농삿일을 했을 법한 지아비는 광부가 되어 집을 나가고, 아내는 남편을 찾아 금점판을 돌며 옥수수 행상을 하고, 그 고생에 못이기어 딸은 죽어 돌무덤에 묻히고, 자신은 산 속 절간에서 삭발을 하여 여승이 되었다.
절제된 시어와 직유의 표현 기법으로 일제 강점기의 민족 현실을 전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섶벌’처럼 일터를 찾아 나간 지아비, ‘가을밤같이 차게’ 울면서 자식을 때리는 어미, ‘도라지 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간 어린 딸, 온 가족을 잃고 여승이 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 산꿩의 울음이 곧 여인의 울음이요, 여인의 머리오리가 곧 눈물인 것이다.
이 여인의 삶의 역정을 생각하면서 화자는 불경처럼 서러워한다.
이 시는 사회적 현실을 사실적으로 반영한 리얼리즘 시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맥락 읽기>
1. 시 속에서 말하는 이는 누구일까? ☞ 나
2. 누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 여승(여인)
3. 여승과 여인의 관계는? ☞ 동일 인물이다.
4. 나와 여승(여인)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연은? ☞ 1, 2연
5. 1연과 2연은 만남의 시점이 어떻게 다를까?
☞ 1연: 현재(여인이 여승이 되고 난 후의 만남)
☞ 2연:과거(여승이 되기전 여인과의 만남.
6. 여승이 되기 전 여인과 만나게 된 곳은 어디이고, 어떻게 만나게 됐을까?
☞ 평안도 어느 산 금광입구,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사게 되면서
7. 여승이 되기 전 여인의 삶은 어떠했을까?
☞ 남편이 집을 나간 지 10년이 흘렀고, 딸아이는 죽어서 돌무덤에 묻혔다.
7-1. 남편이 왜 집을 나갔는지 생각해 보자.
☞ 집이 너무 가난하여 돈벌러 나갔을 것이다.
☞ 독립운동하러 나갔을 것이다.
7-2. 어린 딸은 왜 죽게 되었을까?
☞ 잘 먹지 못해 병들어 죽었을 것이다.
8. 그래서 여인은 어떤 길을 택하게 되었나?
☞ 여승이 되었다, 불교에 귀의했다.
8-1. 왜 그랬을까?
☞ 고통스러운 속세를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 집 나가서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남편, 죽은 딸아이의 명복을 빌고 싶었을 것이다.
9. 여인이 여승이 되던 날을 어떤 날이라고 했나?
☞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
10. 여승이 된 여인을 보며 ‘나’는 어떤 감정을 느꼈나?
☞ 서러움
팔원(八院)
- 서행 시초(西行詩抄) 3
- 백 석
차디찬 아침인데
妙香山行 乘合自動車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慈城은 예서 三百五十里 妙香山 百五十里
妙香山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自動車 유리창 밖에
內地人* 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車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해고 內地人 駐在所長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조선일보, 1939.11.10)
* 내지인 : 일본 본토인이란 뜻으로 일본인이 스스로를 일컫던 말.
* 내임 : 요금이라는 뜻의 일본말.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작가가 관서 지방을 여행하면서 이른 아침 승합 자동차에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타는 장면을 보면서 시작된다. 일본인 순사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면서 손등이 모두 얼어 터지고 밥을 짓고 걸레질을 하고 아이까지 보면서 살다가 ‘자성(慈城)’으로 가게 된다. 묘향산 어딘가에 삼촌이 살지만 알 수가 없고, 새로이 옮겨 가는 곳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생각하며 우는 것이다. 이 시에는 일제 강점하에 고난받던 민중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 성격 : 서정적, 애상적
▶ 특징 : 엄격한 행이나 연의 구별이 없이 자동차 속에서의 상황과 차창 밖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함.
▶ 구성 : 단련시(單聯詩)---승합 자동차의 안팎 묘사와 필자의 상상.
▶ 제재 : 승합 자동차를 타는 나이 어린 계집아이
▶ 주제 : 일제 강점하의 민족의 비애와 삶.
<연구 문제>
1. 백석(白石)의 시에 나타나는 외로움의 정서를 주제 및 소재와 연관지을 때 ‘향수(鄕愁)’라는 말로 집약될 수 있다. 여기에서 소재 표현의 방식을 세 가지로 쓰라.
<모범답> (1) 자신의 어릴 적 생활 반경과 연관된 고향 근처의 지명을 소재로 삼아 시를 쓰는 방식.
(2) 일가 친척 및 이웃들과의 공동체적 체험을 바탕으로 시를 쓰는 방식.
(3) 어릴 때 보고 들은 샤머니즘적 요소들에 대한 기억을 살려 시를 쓰는 방식.
2. 1930년대 시인들이 ‘모국어’ 지키기 운동을 전개하였다면, (1)이 시에 사용된 방법을 쓰고 (2)그 시어를 찾아 쓰라.
<모범답> (1) 방언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였다
(2) ‘아이보게’
3. 이 작품이 일반 서정시와 다른 점을 100자 내외로 기술해 보라.
<모범답> 일반적으로 서정시가 1인칭 화자를 내세워 그의 주관적 감정을 진술하는 데 반해, 이 시는 화자가 표면에 드러나 있지 않은 채 인물과 사건이 진술되고 있어서 서사적인 성격이 강하다.
<감상의 길잡이>
백석(白石)의 시는 거의 전적으로 상실된 고향 그 자체를 묘사하는 데 바치고 있다. 그는 동향인 관서 출신의 시인 김소월을 매우 흠모하고 존경했지만, 서로 만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소월의 시에 관서 지방 특유의 정서가 나오지만, 백석(白石) 역시 평안도 서북 지방의 정서를 특이한 문체로 노래하고 있다. 이 글은 관서 지방을 여행하는 도중 묘향산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만난 불쌍한 계집아이를 소재로 앞으로도 더 길게 이어질 그 소녀의 고달픈 삶의 역정을 시인은 상상해 내고 있는 것이다.
관서 지방의 아침은 차디찬데 의지할 곳 없는 어린 계집아이는 지금까지도 숱한 고생을 했건만 또다시 험한 삶의 터전을 찾아 정든 곳을 떠나고 있다.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새하얗게 얼은’, ‘텅 비인 차 안’ 등이 상징하는 것은 북방의 추위보다도 일제 치하의 을씨년스런 삶일 것이다. 백석(白石)은 그의 시에서 주로 북방의 마을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묘사를 한다. 마을은 분명 백석(白石) 자신의 성장지이며 그가 잘 알고 있는 세계이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우리의 고향이기도 할 터이다.
국수
- 백 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텀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베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베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기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러났다는 먼 녯적 큰 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기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끊는 아루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맥락 읽기>
1. 이 시에는 그 뜻이 잘 이해되지 않는 말(시어)이 꽤 많다.그런 말들을 한번 찾아볼까 ?
☞ 김치가재미: 북쪽 지역의 김치를 넣어 두는 창고, 헛간
☞ 양지귀: 햇살 바른 가장자리
☞ 은댕이: 가장자리
☞ 예대가리밭: 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비탈밭
☞ 산멍에: 이무기의 평안도의 말
☞ 분틀: 국수 뽑아내는 틀이라 한다.
☞ 큰마니: 할머니의 평안도의 말
☞ 집등색이: 짚등석, 짚이나 칡덩쿨로 짜서 만든 자리
☞ 자채기: 재치기
☞ 댕추가루: 고추가루
☞ 탄수: 석탄수
☞ 삿방: 삿(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를 깐 방 // 아르궅: 아랫목 //
☞ 고담(枯淡): (글, 그림, 글씨, 인품 따위가) 속되지 아니하고 아취가 있음
2. 이런 낱말들은 모두 지방 사투리인 것같아(평안도),이런 말들이 주는 효과는? ☞ 정겹다, 향토적, 토속적
3. 시 속에서 나타난 계절은? ☞ 겨울
4. 마을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 은근히 흥성흥성 들떠 있다.
5. 무엇이 마을 분위기를 들뜨게 하고 있을까? 시 속에 나오는 ‘이것’은 무엇일까? ☞ 국수
6. 국수를 반갑고 친밀하고 고담하고 소박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국수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어를 한번 찾아 보자.
☞ 하로밤 뽀오햔 입김 속에서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온다
☞ 왕사발,새끼 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
☞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7. 눈내린 겨울철의 산골 조그만 마을이 뜻밖에도 분주하고 흥성스러운 이유를 알겠제. 뭘하느라 이리 들떠 있나 ?
☞ 꿩사냥,국수 만드는 일,국수를 만들어 먹는 즐거움 때문에
8. 국수를 만드는 재료인 메밀이 익어가는 과정을 계절별로 나타내는 부분을 찾으면 ?
☞ 실같은 봅비 속을~ 갈 바람을 지나서
9. 12행~15행(이것은 아득한 옛날~텁텁한 꿈을 지나서), 19행~21행(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큰 아바지기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 설화적 분위기로 이 국수를 만들어 먹는 일이 오랜 전통을 가진 것으로 느껴지고 국수에 대한 친밀감을 더욱 강화시켜 준다.
10. 국수 만들어 먹는 일 하나로 마을 전체가 들떠 있다는 것은 평소 이 마을 주민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함을 말해 주는가 ?
☞ 서로 돕고 어울리는 공동체적인 삶의 모습을 짐작하게 해준다.
(아마도 마을 아이들이 낮 동안 잡은 꿩고기를 장만하며 이웃집 부인네들이 부엌에서 함께 국수를 누를 것이고 남정네들은 또 한방을 차지하고 앉았고 노인네들이 또 한방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
11. 국수와 곁들여 먹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 동티미국,댕추가루,산꿩고기
12. 긴 겨울밤 밤참으로 먹는 국수의 맛은 어떨까?
☞ 참 맛있지 !
정주성(定州城)
- 백 석
산(山)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려 조을던 무너진 성(城)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城門)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조선일보, 1935.8.31)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백석의 등단작이자 그의 초기시 세계를 확연히 보여 주는 작품으로 ‘정주성’과 그 주위의 밤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정주성’은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는 성이 아닌, 성문은 헐려져 그 일부만이 남아 있을 뿐인 퇴락한 성이다. 화자는 그처럼 폐허가 된 성의 모습을 ‘잠자려 조을던 무너진 성터’와 ‘헐리다 남은 성문이 / 한울빛같이 훤하다’라는 시각적 묘사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와 아울러 ‘정주성’ 주위의 밤풍경들을 다채로운 감각적 이미지로 묘사함으로써 폐허가 된 성의 모습을 한층 실감나게 환기시키고 있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라는 청각적 묘사와,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들 같다’와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짝이로 난다’와 같은 시각적 묘사가 바로 그것이다.
‘정주성’과 그 주위의 밤풍경들에 대한 이러한 다채로운 감각적 묘사는 폐허가 된 ‘정주성’의 풍경을 한층 을씨년스럽게 만드는 동시에 무너져버린 역사의 허망함까지도 환기시켜 주고 있다. 다시 말해, 풍경 묘사는 단순히 유물로서의 ‘정주성’에 대한 정물적 풍경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폐허가 된 ‘정주성’의 풍경으로부터 역사의 허망함을 환기시켜 주는 것이다.
이 같은 풍경 묘사에 이어 마지막 시행에서 ‘날이 밝으면 또 메기 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라는 행위의 서술을 첨가시키고 있다. 여기서 ‘메기 수염 늙은이’의 모습은 폐허가 된 ‘정주성’의 모습과 절묘한 시적 대응을 이루어, ‘정주성’의 황폐함과 역사의 퇴락함을 더욱 실감나게 환기시켜 준다. 물론 이러한 모습의 유사성보다도 풍경 묘사에 이어 첨가된 인간의 행위가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되고 있다. 즉 그 행위의 서술은 ‘청배’를 파는 것으로, 그것은 일상적인 삶의 행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일상적인 삶의 행위는 ‘또’라는 부사와 ‘올 것이다’라는 미래 시제와 관련 맺으면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행위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시는 역사의 허망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상적인 삶의 행위는 계속 이어진다는, 인간의 끈끈한 삶을 퇴락한 ‘정주성’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여우난 곬족(族)*
- 백 석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後妻)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 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 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 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 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육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 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조광, 1935.12)
* 여우난 곬족 : 여우난 골 부근에 사는 일가 친척들.
*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 아버지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 포족족하니 : 빛깔이 고르지 않고 파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 매감탕 : 엿을 고거나 메주를 쑨 솥을 씻은 물로 진한 갈색.
* 토방돌 : 집의 낙수 고랑 안쪽으로 돌려가며 놓은 돌. 섬돌.
* 오리치 : 평북 지방에서 오리 사냥에 쓰이는 특별한 사냥 용구.
* 반디젓 : 밴댕이젓.
* 저녁술 :저녁 숟가락 또는 저녁밥.
* 숨굴막질 : 숨바꼭질.
* 아르간 : 아랫간. 아랫방.
* 조아질하고 - 제비손이구손이하고 : 아이들의 놀이 이름들.
* 화디 : 등장을 얹는 기구. 나무나 놋쇠로 만듦.
* 홍게닭 : 새벽닭.
* 텅납새 : 처마의 안쪽 지붕.
* 무이징게 국 : 민물새우에 무를 넣고 끓인 국.
<감상의 길잡이>
백석 시는 초기에는 대체로 평북 사투리와 토속적인 소재의 선택으로 농촌 공동체의 원형적 정서를 그려 내다가, 후기에는 여행을 통한 풍물시와 모더니즘 시풍을 보여 주는 특징을 갖는다. 이 시는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명절날의 풍경을 통하여 공동체적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유년기 화자의 순진 무구한 정서를 자연스럽게 드러내기 위해서 산문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 속에 구수한 사투리와 다양한 이미지 수법을 개입시킴으로써 푸근한 고향 정서를 환기시켜 주는 한편, 문장 종결형을 현재 시제로 하여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독자에게 직접 말하고 있는 느낌을 전해 주고 있다.
우선 이 시는 유년의 ‘나’가 체험하는 명절날의 풍속을 시간적 경과에 따라 순차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서사적인 시간 구성을 지니고 있다. 즉 명절날 유년의 화자가 ‘엄매 아배를 따라’ 큰집으로 나서면서부터 저녁과 밤, 다음날 아침까지의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시간적 경과에 따라 서사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내용상으로 보면 크게 다섯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락은 화자가 부모님과 같이 큰집으로 명절 나들이를 떠나는 모습으로, ‘개’까지 따라 나선 명절날의 유쾌하고 들뜬 분위기가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둘째 단락은 큰집에 도착하여 명절날에 한데 모인 일가 친척들의 모습을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단순히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서 회화적으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얼굴 모습과 표정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그들의 성격, 취미, 행위, 사는 곳, 삶의 내력까지도 낱낱이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친척들 개개인에 대한 성격을 창조하면서도, 그들의 인생 역정과 삶의 정황을 압축된 서사로 표출함으로써 한결같이 평탄치 못한 친척들의 인생을 가늠하게 해 준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와 다른 어떤 특별한 존재가 아닌, 우리 모두의 평범한 이웃이 되기에 충분하다.
셋째 단락은 이러한 일가 친척들이 안방에 모여 있는 모습과 명절날 풍성하게 장만된 음식물에서 느끼는 유년의 정서를 다채로운 감각적인 묘사로 표출하고 있다. 여기서 표출되는 감각적 이미지는 후각과 촉각인데, 이 가운데서 특히 후각적 이미지 구사가 돋보인다. 즉, 명절날 설빔으로 입은 옷의 느낌을 ‘새옷의 내음새도 나고’라고 함으로써 시각을 후각으로, 여러 음식물을 ‘…… 내음새도 나고’와 같은 후각적 이미지로 표출함으로써 명절날 특유의 신선한 분위기와 정서를 전달하고 있다. 넷째 단락은 저녁밥을 먹고 난 후 아이들끼리 흥겹게 노는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다섯째 단락은 밤이 깊어 일가 친척들이 방안에 모두 모여서 엄매들은 엄매들끼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각기 모여 앉아 즐겁게 노는 모습을 서술한 다음, 유년의 화자가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새벽까지 잠이 드는 모습을 서술하면서 명절날 겪은 이야기를 마감하고 있다.
이처럼 이 시는 명절을 즐기는 공동체의 풍요로움을 다양한 시적 대상을 동원하여 표현함으로써 끈끈한 인간적 체취를 물씬 풍기게 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고향을 상실한 일제 암흑기에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원초적 공간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 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여성, 1938.3)
* 마가리 : 오막살이.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제목에서부터 이국 정취를 풍기고 있어서 백석의 시로서는 다소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기행 체험의 시에 해당하지는 않더라도 그간 지나칠 정도로 강한 집착을 보여 왔던 우리의 토속적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 도피적인 유랑 의식과 모더니즘 시풍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후기시에 속한다.
우선 화자인 ‘나’의 처지가 가난하고 쓸쓸한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런 화자는 ‘나타샤’를 사랑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화자는 현실을 떠나 깊은 산골로 가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한 현실 도피를 일러 화자는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행위가 현실에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현실을 능동적으로 버리는 행위임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화자의 인식에서부터 시대적 아픔과 고민을 애써 외면하려 하는 시인의 의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치열한 현실 인식이 나타나 있지 않아 아쉬움을 주지만, 인간 모두의 마음 속에 근원적으로 내재해 있는 사랑에의 환상적인 꿈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어 서정시의 한 진경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시에서 환기되고 있는 사랑에의 환상적인 꿈은 ‘눈’․‘나타샤’․‘흰 당나귀’ 등의 아름답고 환상적인 이미지의 조화를 통해 환기되고 있는데, 그러한 이미지들은 다분히 이국적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색채를 띠고 있다. 그러나 현실과의 거리감과 단절감을 느끼는 화자가 끝내 그 현실에 합일되지 못한 탓으로 이 시는 환상적인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고독하고 우수 어린 정조가 짙게 배어 있는 것이다.
고향(故鄕)
- 백 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氏)ㄹ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삼천리 문학 2호, 1938.4)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여우난 곬족>의 연장선에 선 작품으로 백석 특유의 고향 정서가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백석의 시는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원초적인 고향 개념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그의 시가 보여 주는 토속적 사투리와 현대적 가족 제도, 풍물의 세계는 단순한 풍물이 아니라 반드시 인간이 개입된 풍물로, 그는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의 삶의 방식을 감동적으로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민족 정서가 점차 상실되어 가는 일제 치하에서 더욱 존재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편, 백석의 시 세계의 주인공은 항상 공동체의 품속에 깊이 침잠해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공동체적 세계로부터 멀어져 있는 시인의 현실적 세계와 대립됨으로써 고향이라는 공동체는 삶의 풍요로움을 더해 주는 세계로 형상화된다.
이 시가 환기시키는 정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그 고향이 불러일으키는 따스한 정이다. <여우난 곬족>에서는 고향을 무대로 그 곳에서 벌어지는 토속적이고 원형적인 삶의 모습을 서사적 구조를 통해 고향 정서를 보여 준 데 반해, 이 시는 인물들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와 시적 상황을 압축적으로 서술하는 기법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연 구분이 없는 전 17행의 단연시 구조의 이 시는 내용상 4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이 시는 시적 화자가 타향인 ‘북관’에서 병을 앓아 ‘의원’을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첫째 단락인 1․2행은 바로 그러한 상황을 압축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부분으로, 외로운 타향살이를 하는 화자가 병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각별해진 향수를 느끼게 해 준다. 둘째 단락은 3․4행으로 화자가 의원을 찾아가 첫 대면한 ‘의원’의 풍모와 인상을 시각적 묘사로 표출하고 있다. 5행부터 15행까지의 셋째 단락은 ‘의원’이 화자인 ‘나’를 진맥하는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그 서술은 화자의 주관적 감정을 최대한 억제한 채, 진맥하는 ‘의원’의 행위와 표정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동시에 ‘의원’과의 극적이고 생생한 대화를 통해 전개시키고 있다. 넷째 단락은 16․17행으로 화자의 내면 세계를 보여 주는 독백 부분이다. ‘의원’에게서 부드럽고 따스한 정을 느끼게 된 화자가 마침내 그에게서 고향과 아버지를 느끼게 되었다는 감정의 토로는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는 평범한 서술로 나타나 있다. 화자의 이 같은 직접적인 감정 토로는 특별한 시적 수사 없이도 절실한 감동의 울림을 주고 있다. 그것은 셋째 단락에서 화자를 진맥하는 의원의 행위와 그와 함께 나눈 대화를 통해 그러한 정서가 충분히 환기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논개(論介)
- 변영로
㉠거룩한 분노(憤怒)는
종교(宗敎)보다도 깊고
불 붙는 정열(情熱)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신생활 3호, 1923.4)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수주(樹州) 변영로의 대표작으로 임진왜란 때 진주의 의로운 기생이었던 논개가 촉석루 술자리에서 왜장의 목을 안고 남강(南江)에 몸을 날려 죽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 성격 : 민족주의적
▶ 심상 : 시각적 심상.(푸른색과 붉은색의 대조)
▶ 운율 : 4음보의 율격
▶ 어조 : 경건하고 도도한 어조.(감정의 상승 효과를 노리면서도 절제함.)
▶ 표현 : 반복적, 대조법, 비교법, 영탄법
▶ 구성 : ① 논개의 분노와 애국적 정열(제1연)
② 논개의 의로운 죽음(제2연)
③ 논개의 충혼 추모(제3연)
▶ 제재 : 논개의 의로운 죽음
▶ 주제 : 청사(靑史)에 길이 빛날 논개의 헌신적 애국심
<연구 문제>
1. ㉠의 표현 기법과 담긴 의미를 140-180자 정도로 설명해 보라.
<모범답> ‘거룩한’과 ‘분노’는 겉으로 볼 때는 모순된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분노’가 의로운 것, 성스러운 것과 결부될 때, 그 분노는 고귀한 것이 되므로 역설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논개의 분노는 ‘나라 찾기’와 관계된 의로운 것이므로, 더욱이 그것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분노이므로 거룩한 것이다.
2. 이 시에서 ㉡에 사용된 ‘푸른 강물’이라는 소재가 표상하는 심상을 두 어절로쓰라.
<모범답> 청사(靑史)의 영원성.(역사의 영원함)
3. 이 시는 ‘우국 충절(憂國忠節)을 찬미’하는 진부한 주제를 가졌다. 그러나 이 진부한 주제를 참신하게 하기 위하여 순수 국어로 풀어 쓰고 있다. (1)순수 국어로 풀어 쓴 주제 시구를 찾아 쓰고, (2)이와 관련된 4자의 한자 성어도 쓰라.
<모범답> (1) 붉은 마음 (2) 一片丹心
4. 이 시는 논개의 의로운 죽음을 선명히 드러내기 위해 어떤 수사 기교와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는가?
<모범답> 색채의 대조, 시각적 이미지
<감상의 길잡이>
이 시의 의미를 특정한 시대적 한계 안에서만 파악할 것은 아니다. 이 시의 의미는 관념적인 애국주의 밖에 있다. 인류 역사의 어느 단계에서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로막고 우리를 황폐하게 하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그에 저항하는 민중의 분노와 정열은 ‘종교보다도 깊고’, ‘사랑보다도 강하다.’ 그 분노와 정열이야말로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역사의 물결을 흐르게 하는 힘이다. ‘아리땁던 그 아미’, ‘석류 속 같은 입술’로 어림가는 미인적 형상이 ‘죽음’과 입맞추는 순간, 그의 ‘꽃다운 혼’은 ‘양귀비보다도 더 붉은’ 것이 된다.
시인은 다른 자리에서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젊은 조선을 빛나게 할 많은 시인, 예술가, 철학자들이여! 명심할 것이다. 우리의 생은 유희가 아니고 분투임을, 도락이 아니고 노고임을! 로만 로랑은 말하였다. 「우리의 인생은 짙은 장미꽃을 뿌리는 탄탄대로가 아니다.」라고. 인간의 생명이란 죽음의 준비인 것뿐이다. 그림자가 물체를 따르는 것 같이 아름다운 죽음은 반드시 아름다운 생활의 뒤를 이어 오고, 의미 있는 죽음은 반드시 의미 있는 생활의 뒤를 따를 것이다.”
‘논개’의 죽음이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애국주의 때문이 아니라 역사를 관류(貫流)하는 민중적 진실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리라.
봄비
- 변영로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아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앞에 자지러지노라!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누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신생활 2호, 1923.3)
<감상의 길잡이>
1920년대 전반기 한국 서정시의 정상을 보여 주는 이 작품은 <논개>와는 달리 고요하고 잔잔한 시정(詩情)을 세련되고 섬세한 시어로써 유려하게 노래하고 있다.
각 연의 1․2행에서는 공통적으로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를 반복하여 봄비의 부름과 그에 대한 시인의 정감을 한 문맥에 접목시키고 있으며, ‘노라!’․‘누나!’ 등의 영탄조의 어미 사용은 이 작품을 보다 더 낭만적 분위기로 만들어 주는 데 기여하고 있다. 또한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와 같은 반복구(反復句, refrain)는 시의 리듬을 교묘하게 살리는 데 효과적인 표현법이 되고 있다.
각 연의 마지막 행은 봄비 내리는 모습을 보고 느낀 시적 자아의 마음을 ‘서운하고’, ‘아프고’, ‘기다리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여성 편향적 어조와 함께 시인의 감각적인 통찰로 빚어진 이 작품의 아름다운 정감과 선율은 그윽하고 부드럽기만 하다.
휴전선(休戰線)
- 박봉우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火山)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姿勢)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高句麗) 같은 정신도 신라(新羅)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意味)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流血)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廣場).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休息)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 같은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어야 하는가. 아무런 죄(罪)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火山)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姿勢)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조선일보, 1956.1.1)
<감상의 길잡이>
박봉우의 시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야 하는 ‘육성(肉聲)의 시’이다. 그의 시는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사회 곳곳에 숨어 있는 불의와 비리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이른바 참여시의 특성을 갖는다. 50년대의 전쟁과 폐허로부터 60년대의 민주 혁명과 군사 독재, 70년대의 속 빈 강정 같은 풍요 속에서 느끼는 정신적 빈곤감, 80년대의 민주화 열망 등 광복 이후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달려온 우리 사회를 온몸으로 맞닥뜨리고 시를 쓴 시인이다.
이 시는 1956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얼마 안 되는 당시 상황에 대단히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다.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과 적대감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민족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 날을 갈망하는 시인의 절규가 완곡한 산문 율조의 형식으로 절제되어 나타나 있다.
화자는 1․5연에서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155마일 휴전선을 마주하고 있는 민족의 분단 상황을 이상할 만큼 담담한 어조로 제시하고 있다. 화자는, 휴전선이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꽃’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꽃’은 실제의 꽃이라기보다는 전쟁은 일시 멈추었지만, 더욱 깊어진 증오심으로 대치해 있는 분단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요런 자세’라는 구절에서 ‘요런’은 ‘겨우 이것 밖에는 안되는’의 의미로, 일시 포성이 멈추기만 했을 뿐, 평화가 찾아온 것이 아닌 분단 상황을 비아냥거리는 화자의 심리가 내재해 있다.
2연에서 화자는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의 휴전선의 모습을 통하여 팽팽한 긴장감으로 대립하고 있는 남과 북의 현실을 제시하고 있다. 만주를 호령했던 ‘고구려 같은 정신’이나 삼국을 통일한 ‘신라 같은 이야기’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오늘날의 민족 상황을 비판하는 한편, 지금은 비록 남과 북이 허울좋은 이데올로기로 분단되어 있더라도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라며 통일의 당위성을 역설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이냐며 하루빨리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민족의 큰 소망으로 발전한다.
3연에서는 분단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있다. 분단은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이며, ‘정맥’이 끊어진 신체와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는 화자는 분단 상황이 계속되면 될수록 민족사는 더욱 ‘야위어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며 절망하고 있다.
4연에서 화자는 ‘독사의 혀 같은 징그러운’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함으로써 동족 상잔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다. ‘모진 겨우살이’와 같았던 6․25의 비극적 체험을 겪은 바 있는 화자는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이 바람에 쓰러지는 것 같은 전쟁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며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라고 외친다. 아무리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장식된 전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죄없는 백성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정치 지도자들의 허황된 정치 논리라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해
-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맑앟게 씻은 얼굴 고은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애뙨 얼굴 고은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딿아 사슴을 딿아,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딿아,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딿아 칡범을 딿아,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고 ㉡새도 짐승도 한 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애뙤고 고은 날을 누려 보리라.
(상아탑 6호, 1946.5)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박두진의 첫 시집인 <해>의 표제가 된 이 시는 일제 암흑기의 어둠을 몰아낸 8·15 광복이라는 벅찬 기쁨에 민족의 염원과 이상을 ‘해’라는 구체적 사물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노래한 작품이다.
‘해’는 새로운 탄생과 창조의 근원(평화 공존의 원동력)으로 이해될 수 있고, 시대와 관련해 볼 때, 조국의 밝고 원대한 이상으로 볼 수도 있겠다. 광복의 감격과 그 후의 격동 속에서 장차 펼쳐질 밝은 미래와 사랑과 평화로 대화합이 이루어지는 낙원의 모습을 그렸다.
희망찬 미래의 조국을 상징하는 시구를 찾아 보자. ‘해가 솟는 청산’의 의미를 알아 보자.
▶ 성격 : 열정적, 상징적, 예언적, 미래 지향적
▶ 특징 : ① 강렬한 남성적 의지
② 4음보의 급박한 리듬
▶ 구성 : ① 새로운 세계의 염원(1연)
② 절망의 거부(2연)
③ 새로운 세계와의 친화(3연)
④ 화해와 평화의 삶.(인간과 자연과의 친화)(4,5연)
⑤ 낙원에서의 대화합을 소망(6연)
▶ 제재 : 해
▶ 주제 : 민족의 웅대하고 기쁨에 찬 미래상 추구
<연구 문제>
1. 이 시의 지배적 심상을 비유하고 있는 시구를 찾아 쓰라.
<모범답> ‘말갛게 씻은 얼굴’
2. (1)이 시에서 화자가 소망하는 새로운 세계(낙원의 세계)를 표상한 시구와 (2)그 상징 의미를 쓰라.
<모범답> (1) 앳되고 고운 날
(2) 일체의 갈등이 해소된 화해의 경지
3. ㉠의 운율 구조는 aaba형으로, 고전 시가에서 흔히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러한 운율 구조를 가진 고려 가요의 한 구절을 외워 쓰라.
<모범답>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또는, ‘가시리 가시리잇고 ᄇᆞ리고 가시리잇고’)
4. (1)㉡에서 두 소재가 표상하고 있는 의미를 쓰고, (2)대조를 통해 지은이가 소망하고 있는 세계를 쓰라.
<모범답> (1) ‘새’는 선(善)의 표상, ‘짐승’은 악(惡)의 표상.
(2) 지은이는 선과 악이 화합하는 세계를 소망하고 있다.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8·15 광복이라는 역사적 계기와 그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벅차고 원대한 민족적 이상과 소망을 노래한 작품이다. 광복이라는 무한한 자유와 기쁨 속에서는 모든 생명들이 서로 갈등을 빚거나 두려워할 것 없이 평화롭게 화해하며 살아갈 수가 있다. ‘달밤, 칡범, 짐승’은 악(惡)과 추(醜)의 이미지로, ‘사슴, 청산, 꽃, 새’는 선(善)과 미(美)의 이미지로 대표되나, 결국 이들의 대화합(大和合)을 추구하여 사랑과 평화의 이상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제1연은 4음보를 기조로 하여 장중한 율동감을 주고 있으며, 광명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제2연은 ‘해’과 상반되는 ‘달밤’이 등장한다. ‘달밤’은 암흑이 가시지 않은, 고통과 비애의 시간이다. 그래서 ‘달밤이 싫여’는 어둠과 절망의 거부를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가 있다.
제3연의 ‘해’와 짝이 되는 ‘청산’은 새롭고 밝은 놀이터다. 이는 이상향이며 에덴 동산의 표상이다. 결국 새로운 세계, 낙원의 세계와의 친화를 그린 것이다. 그의 크리스트교적 세계관과 관련해서 ‘청산’의 의미를 이해해도 좋겠다.
제4,5연에서 선의 표상인 사슴은 물론 악의 표상인 칡범과도 함께 놀겠다는 것은 이 시인이 이상으로 하고 있는 우주의 조화요, 질서다. 결국 화해와 친화의 삶을 희구하고 있는 것이다.
제6연은 이 시의 주제연으로 자연과의 합일, 새로운 세계에서의 대화합을 소망하고 있다. 즉, 평과 공존과 통합론의 세계관이 나타나 있다.
도봉(道峰)
- 박두진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人跡)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먼 골 골을 되돌아 올 뿐.
산 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3인시집「청록집(靑鹿集)」(1946) / (시집 해, 1949)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박두진은 등단 초기부터 자연을 대하는 기쁨과 그 영원성을 노래하였다. 시인은 이 시에서 석양이 아름답게 도봉산을 비출 무렵에 느낀 감상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적절하게 토로하여 인간 심성의 그 내면적 깊이를 가늠한다. 특히, 가을 산에 홀로 앉아 있는 시인에게서 붉은 해가 하늘 끝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따라 변화해 가는 감정의 추이를 살펴볼 수 있어 감상의 묘미를 더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해 가는 시상의 전개 과정을 유념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
▶ 성격 : 관조적, 사색적, 서정적
▶ 심상 : 시각적, 청각적
▶ 어조 : 독백적 어조
▶ 특징 : 박두진의 시 가운데 산문적인 요소를 절제하여 나타냈으며, 어미의 과감한 생략으로 시적 여운의 효과를 거둠.
▶ 시상 전개 : ① 석양 무렵부터 황혼, 밤으로 이어지는 시간적 흐름에 따른 시상 전개.
② 원경(遠景)에서 근경(近景)으로 묘사됨.
▶ 구성 : ① 기 : 공간적 배경 묘사(1-3연) ---서경적
② 서 : 적막함, 허전함의 내면 세계(4-8연) ---서정적
③ 결 : 그대가 오는 내일의 밝은 아침을 갈망함(9,10연) ---서정적
▶ 제재 : 가을 산
▶ 주제 : 인생 본연의 외로움과 적막함.
<<역사적 관점에서 본 작품 분석>>
1. 시작(詩作) 배경
이 시는 일제 말기의 암흑기에 마음을 붙일 것이 없는 상태의 고독감과 한 줄기의 구원을 바라는 외로운 심경을 감미로운 서정과 애조(哀調)로 읊은 시이다.
2. 시상의 전개
* 제1연 - 외로운 배경의 모습
* 제2연 - 공허감
* 제3연 - 삶의 비탄
* 제4연 - 구원의 갈망
3. 제재 : 적막한 자아
4. 주제 : 구원을 그리는 외롭고 쓸쓸한 심정
5. 시어의 상징 의미
* 그대 - 특정의 대상이 아닌 애인,민족,여호와 등 어느 것일 수도 있다.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시간 변화가 화자의 심리 상태에 미치는 과정을 고려하여 뒤로 갈수록 드러나는 특징을 140-180자 정도로 밝히라.
<모범답> 이 시는 산에 대한 서경적 묘사를 시작으로 시적 화자의 심리 변화를 서술하고 있다. 어스름 저녁에서 별과 달이 뜨는 밤으로 진행될수록 화자는 외롭고 쓸쓸한 정서에서 마침내 슬픔의 정서까지 느낀다. 즉, 조용한 우수의 분위기에서 영탄 짙은 인간의 내면 의식까지 확대되고 있는 특징을 보여 준다.
2. 이 시에서 ‘산새’, ‘구름’, ‘황혼’ 등의 자연물이 갖는 이미지를 쓰라.
<모범답> (1) 산새 : 짝 잃은 외로움의 정서
(2) 구름 : 한 곳에 붙박히지 못한 채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는 나그네
(3) 황혼 : 저물어 가는 삶의 쓸쓸함, 처연함
3. 이 시의 모티브가 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찾아 쓰라.
<모범답> (1) 시간적 배경 : 어스름
(2) 공간적 배경 : 가을 산
<감상의 길잡이>
제1~3연은 사적(私的)인 감정이 배제된 부분이지만, 전반적인 정서의 흐름이 외로움과 적막함의 정서를 환기시킨다. 자연 이외에 다른 벗이 없는 시인에게 산새, 구름은 절대적인 존재이다. 자연의 한가운데로 찾아온 화자에게 울어 반겨야 할 산새가 울지 않고, 떠 간 구름이 오지 않는 상황은 비참하고 괴로울 뿐이다. 자연이 시인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으므로 마침내 시인은 인적 끊긴 가을 산에 홀로 앉아 지난 인생을 반추(反芻)할 수밖에 없다.
제4~8연의 상황은 시인의 내면 세계에 대한 관조를 서술하는 부분이다.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 없는 산 속에서 시인은 외로움을 이기려고 소리 높여 불러 본다. 하지만, 이런 부름은 산울림이 되어 돌아올 뿐이어서 오히려 나의 내면에 반향을 일으켜 적막함이 확대될 뿐이다. 온종일 산 속에 있어도 그대의 실체는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기에 괴롭고 슬프다.
제9,10연은 그대를 향한 화자의 그리움이 나타난다. 그 그리움의 대상인 ‘그대’가 누구인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 때문에 ‘나’는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 특히, 제9연의 ‘이제도’라는 시어는 그대를 향한 변함없는 사랑을 함축하고 있는 바 오직 그대를 향한 나의 마음 때문에 화자는 끝내 슬픔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이 시는 자연의 우수와 적막함에 심취된 화자의 정서를 강하게 드러낸다. 한편, 도봉은 일제 말기의 어둡고 암울했던 시대 상황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는 여지가 있다.(앞의 <<역사적 관점에서 본 작품 분석>>참조)
<맥락 읽기>
1. 어떤 느낌? ☞ 외롭고요, 쓸쓸하고요, 적막하고요
2. 화자는? ☞ 나.
3. 나는 무얼 바라보고 있지요?
☞ 산이요.
3-1. 무슨 산이지요?
☞ 가을산
3-2. 그래? 산새는?
☞ 날아오지 않는데요.
3-3. 구름은?
☞ 떠 가고 오지 않는데요.
3-4. 인적은?
☞ 끊겼는데요.
3-5. 산은?
☞ 홀로 앉았는데요, 그리고 가을 산인데요.
4. 배경이 어때요?
☞ 시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데요.
5. 자! 그럼, 나는 무얼 하지요?
☞ 누구를 부르는데요.
5-1. 대답이 있나요?
☞ 울림은 헛되이 되돌아 오는데요.
6. 시간적 배경은 어때요?
☞ ‘어스름’에서 ‘해가 넘어가고’ ‘밤’이 오는데요.
7. 전체적으로 배경은?
☞ ‘가을산’이고요 ‘밤’인데요.
8. 시인은 왜 그런 배경을 택했을까?
☞ ‘나’의 외로움, 쓸쓸함, 적막함을 잘 드러낼 수 있네요.
9.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왜 그럴까?
9-1. 너희들은 낮에 쓸쓸하냐, 밤에 쓸쓸하냐?
☞ 밤에요.
9-2. 사랑하는 사람이 널 슬프게하면 어때?
☞ 괴로워지겠죠.
10.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 자 이제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냐?
☞ 예, 밤이 길고 슬픔이 있기 때문에 삶이 쓸쓸하고 사랑이 괴로운 것 아닙니까?
11. 그럴꺼야? 그렇다면 이 시에서 ‘그대’는 누굴까?
11-1. ‘나’가 사랑하는 어떤 특정한 여인일까?
☞ 아닌 것같은데요.
11-2. 왜?
☞ 그대는 나도 모르는 마을에서 쉬고 있는데요.
11-3. 아까 ‘나’는 어떤 사람이었지?
☞ 외로운 사람요.
11-4. 그렇다면, 그대는 누굴까?
☞ ‘나’의 외로움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12. 이 시는?
☞ 인간의 채워질 수 없는 그리움,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요
어서 너는 오너라.
- 박두진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이 오 오래 정드리고 살다 간 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두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떼와 나비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다섯 뭍과, 여섯 바다와, 철이야, 아득한 구름 밖 아득한 하늘가에, 나는 어디로 향해야 너와 마주 서는 게냐.
달 밝으면 으례 뜰에 앉아 부는 내 피리의 설운 가락도 너는 못듣고, 골을헤치며 산에 올라, 아침마다 푸른 봉우리에 올라 서면, 어어이 어어이 소리높여 부르는 나의 음성도 너는 못 듣는다.
어서 너는 오너라. 별들 서로 구슬피 헤여지고, 별들 서로 정답게 모이는 날, 흩어졌던 너이 형 아우 총총히 돌아오고, 흩어졌던 네 순이도 누이도 돌아오고, 너와 나와 자라나던, 막쇠도 돌이도 복술이도 왔다.
눈물과 ㉠피와 푸른빛 깃발을 날리며 오너라……. 비둘기와 꽃다발과 푸른빛 깃발을 날리며 너는 오너라…….
복사꽃 피고, 살구꽃 피는 곳, 너와 나와 뛰놀며 자라난 푸른 보리밭에 남풍은 불고, 젖빛 구름 보오얀 구름 속에 종달새는 운다. 기름진 냉이꽃 향기로운 언덕, 여기 푸른 잔디밭에 누어서, 철이야, 너는 늴 늴 늴 가락 맞춰 풀피리나 불고, 나는, 나는, 두둥실 두둥실 붕새춤 추며, 막쇠와, 돌이와, 복술이랑 함께, ㉡우리, 우리, 옛날을, 옛날을 뒹굴어 보자.
(3인 공동 시집 청록집, 1946)
<핵심 정리>
이 시는 광복 직전에 써서 간직해 두었다가 광복 이후 1946년 <청록집>에 발표한 작품이다. 일부 작가들이 일제에 굴복하여 친일 문학으로 전향했음에도 이 시인은 암흑 속에서 내일에의 광명을 확신하며 꾸준히 시작(詩作)에 정진했던 것이다. 이 시의 화자가 복사꽃 피는 마을의 모습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한 소망을 밝혀 보자. 또 산문율의 급박한 호흡을 구사한 기법이 주는 효과를 생각해 보자.
▶성격 : 산문시, 미래 지향적, 예언적, 열정적
▶특징 : ① 향토적 정감
② 반복 어구의 나열
▶구성 : ① 조국 광복의 상황 제시(제1연)
② 헤어진 동포의 귀환 갈망(제2,3연)
③ 동포의 귀향에의 환호(제4,5연)
④ 민족 공동체적 삶의 재현 열망(제6연)
▶제재 : 복사꽃(한국적 이상향)
▶주제 : 조국 광복에의 열망
<연구 문제>
1. 이 시의 복사꽃 핀 마을이 상징하는 의미를 두 문장으로 쓰라.
☞ 일제로부터 광복된 조국을 의미하며, 그 곳은 또한 공동체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공간이다. 복사꽃 핀 마을은 무릉 도원(武陵桃源), 즉 이상향(理想鄕)을 가리킨다.
2. 이 시에서 ‘너’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80자 내외로 쓰라.
☞ 직접적으로는 철이를 가리키고 있으나, 그것은 곧 흩어져 유랑하던 우리 민족 전체를 말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참된 해방을 맞는 우리 민족을 상징한다.
3. ㉠의 상징적 의미를 쓰라.
☞ 투쟁. (일제와의 투쟁에서 얻은 승리)
4. ㉡에서 ‘옛날’의 함축적 의미를 30자 내외로 쓰라.
☞ 민족 공동체의 삶이 가능했던, 일제 시대 이전의 평화롭던 시절
5. 이 시에서 리듬감을 살리기 위해 사용한 수사법을 쓰라.
☞ 반복법
<감상의 길잡이>
박두진의 시는 크리스트교적인 정결한 갈망이 착색된 자연을 지향하여 신선한 생명력을 지닌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이 시에서는 복사꽃 핀 마을이 한국적인 이상향으로 토착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복사꽃은 동양에서는 무릉 도원(武陵桃源), 즉 이상향을 상징한다. 한국적인 것으로 토착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오랜 과거에나 있었을 법한 이상향으로의 복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일제에 의해 ‘함부로 짓밟힌’ 민족의 공동체적 삶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제1연에는 민족의 행복한 만남의 터전이 될 조국 광복의 상황이 제시되었다.
제2,3연은 광복이 되어도 흩어졌던 동포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어, 그들의 귀환을 열망하고 있다. 여기서 ‘너’는 일제의 억압을 피해 국외(國外)로 흩어져 나간 동포들에 대한 제유적(提喩的) 호칭이라고 하겠다.
제4,5연은 헤어졌던 동포들의 귀환에 환호하고 있으며, 아직 돌아오지 못한 ‘철이’(동포들)가 돌아오기를 갈망하고 있다.
제6연은 해방된 조국의 고향땅에서 옛날 아름다운 우리 민족 공동체의 삶을 회복하자는 열망을 담고 있다.
강(江) 2
- 박두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그날 강물은 숲에서 나와 흐르리.
비로소 채색되는 유유(悠悠)*한 침묵
꽃으로 수장(水葬)*하는 내일에의 날개짓,
아, 흥건하게 강물은 꽃에 젖어 흐르리
무지개 피에 젖은 아침 숲 짐승 울음.
일체의 죽은 것 떠내려 가리
얼룽대는* 배암 비눌 피발톱 독수리의,
이리 떼 비둘기 떼 깃쭉지와 울대뼈*의
피로 물든 일체는 바다로 가리.
비로소 햇살 아래 옷을 벗는 너의 전신(全身)
강이여. 강이여. 내일에의 피 몸짓.
네가 하는 손짓을 잊을 수가 없어
강 흐름 핏무늬길 바다로 간다.
(시집 거미와 성좌, 1962)
*유유: 다 잡아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냄.
*수장: 시체를 물 속에 장사함.
*얼룽대는: 같거나 다른 빛깔로 된 줄이나 점이 규칙적으로 무늬져 얼른거리다.
*울대(뼈):-조류의 발성 기관
-울타리를 만드는 데 세우는 기둥같은 대.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박두진은 시집 <거미와 성좌>에서 전쟁 때문에 황폐해진 민족의 비극적 상황을 강한 어조로 고발하고 어두운 민족 현실을 구원하기 위한 역사 의식과 민족 의식을 통찰력 있게 제시한다. 강은 이 시집의 주제 의식을 충실하게 반영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념으로 인해 빚어진 동족간의 살상과 반목, 갈등이 민족을 얼마나 비극적으로 만들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앞으로 지향해야 할 민족 정신이 무엇인가를 구명(究明)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는 시인의 현실적인 목적과 관념이 어떠한 언어로 상징화되었으며, 그 주제 의식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 성격 : 의지적, 상징적, 관념적
▶ 경향 : 주지주의적
▶ 운율 : 각운
▶ 어조 : 비장한 어조
▶ 특징 : 동물적 이미지의 대조적 표현
▶ 구성 : ① 미래에 대한 전망의 상징(제1-3연)
② 비극적인 현실 인식의 내용(제4,5연)
③ 예언적, 희망적인 전망(제6,7연)
▶ 제재 : 강
▶ 주제 : 전쟁의 비극적 현실과 극복의 전망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강’의 의미를 14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강은 끊임없이 흘러 바다로 흘러간다는 속성 때문에 역사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 시에서는 도도히 역사의 물결을 흘러가는 한민족의 심성을 나타낸다. 민족 상잔의 고통을 담고서 밝은 미래 세계로 힘차게 나아가는 민족의 영원한 생명력과 포용력을 상징하는 셈이다.
2. 이 시에 나타난 동물의 이미지를 두 종류로 나누어 100자 내외로 설명하라.
<모범답> 이 시에서 동물의 소재로 뱀, 독수리, 비둘기가 등장한다. ‘뱀, 독수리’는 민족의 미래와 상치되는 위협적인 갈등과 증오, 살상을 상징하며, ‘비둘기’는 이런 위험에 희생당한 민족과 약자를 나타낸다.
3. 박두진의 다른 작품 해와 이 작품을 비교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쓰라.
<모범답> 해 역시 찬란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강과 공통되지만, 해가 광복의 감격 속에서 솟구쳐 나온 순진하고도 낙관적인 꿈의 표현이었던 데 비해, 강에는 6·25의 민족적 비극과 그 이후의 사회적 갈등을 체험한 시인의 고통과 소망이 더 절실하게 담겨 있다.
4. (1)㉠이 어떤 때를 말하는지 짐작케 하는 시구를 찾아 쓰고, (2)그 말이 함축하는 의미를 70자 내외로 쓰라.
<모범답> (1) 비로소 햇살 아래 옷을 벗는
(2) ‘일체의 죽은 것’과 증오, 살육, 고통이 모두 떠내려가고 찬란하게 평화가 밝아 오는 아름다운 미래의어느 날을 뜻한다.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다양한 형식적 실험이라든가 언어의 정서적 표현에 치중한 작품이라기보다는 비극적인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주제 의식이 강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시 강은 박두진의 앞선 시기의 자연과 생명에 대한 정서적 감수성은 배제되고, 현실적인 상황과 그 극복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들의 상징물로 평가될 수 있는 강은 동족 상잔의 처참성을 ‘피’와 ‘죽은 것’ 등의 비극적인 언어로 형상화하여 고통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평가된다.
강은 우리 문학 작품에서 ‘죽음’, ‘이별’, ‘역사’ 등의 내용을 상징하여 왔다. 이 시에서 강은 끊이지 않고 우리 겨레의 가슴 속에 흐르는 내면의 강인 셈인데, 이 강이 흘러가는 ‘바다’는 긍극적으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순결을 표상하고 있다. 이를테면, 강이 바다로 흘러가기까지는 많은 고통과 비극이 있지만, 겨레의 가슴 속에 도도히 흐르는 강의 속성을 간직하고 산다면 자유와 이상이 넘치는 바다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제1,2연에서 강물은 내일을 약속하며 유유한 침묵 속에 꽃을 수장해 가면서 바다로 흘러간다. 제1연의 숲이 혼란해진 전쟁의 상황을 나타낸 것이라면, 제2연과 제3연의 꽃은 전쟁에 희생된 소중한 생명을 자양분으로 하여 자란 겨레의 밝은 소망을 상징한다.
제4,5연에서는 강물이 숲에서 나오기 이전의 상황, 즉 민족의 분열과 고통의 시대였던 전쟁의 상황을 통찰한다. ‘죽은 것’이라든지, 위협적인 뱀의 비늘이라든지, 피로 물든 독수리의 날카로운 발톱은 비둘기처럼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겨레 모두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고 피로 물들였다. 하지만 시인은 이에 절망하지 않는데, 그것은 우리 민족에게는 이런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할 수 있는 의지와 미래가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6,7연에서, 바다로 가는 길이 피로 얼룩진 길이지만 그것은 소망스런 내일을 향한 피몸짓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시는 강에서 바다로 가는 과정에서 고난과 역경을 넘어 아름다운 평화가 도래할 석을 믿는다는 의지와 확신을 노래한다.
<맥락 읽기>
1. 말하는 이는? ☞ 나
2. 노래하는 대상은? ☞ 강
3. 강은 어디에서 흘러 나오는가? ☞ 숲
4. 강물에는 무엇이 떠 내려오는가?
☞ 죽은 짐승의 시체들
☞ 무지개 피에 젖은 아침 숲 짐승 울음.
☞ 일체의 죽은 것은 떠내려가리
☞ 얼룽되는 배암 비늘 피발톱 독수리의,
☞ 이리떼 비둘기떼 깃쭉지와 울대뼈의 / 피로 물든 일체
5. 왜 죽은 짐승들이 떠 내려올까? 숲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 짐승들 사이에 싸움, 살륙, 파괴, 강자가 약자를 치는 일방적인 싸움, 비명 속에 서로 죽다.
6. 숲에서 흘러 나오면서 강이 겪는 변화는?
☞ 비로서 침묵이 유유히 채색되다.
☞ 꽃으로 수장한다.
☞ 꽃에 젖어 흐르리
☞ 비로소 햇살아래 옷을 벗다.
7. …비로소 채색…, …햇살 아래 옷을 벗는… 등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 밝음, 마음이 열림, 일단락됨, 어둠에서 벗어남, 희망……
<<시적 상황을 정리해보자.>>
☞ 그날 숲에서 싸운 시체들이 피에 젖어 강으로 떠 내려오고(살륙과 투쟁의 잔재를 갖고 온 강이 흐르다가 숲에서 벗어나면서) 채색되고 햇살 아래로 나오는 변화를 겪는다.
8. 이런 변화가 시작되는 때는 언제인가? ☞ 그날
9. 이 날 강물은 어디로 흘러 가는가? ☞ 바다
10. 바다에 가 닿는 날은 언제일 것 같은가? ☞ 내일
11. 강은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것 같은 데 흔히 어떤 함축적 의미를 지니는가? ☞ 죽음, 이별, 역사, 세월…
12.이 시에서 강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 역사
13. 그렇다면 강위에 떠 내려온 죽음의 시체는 어떤 의미로 해석될 수 있나? ☞ 살륙, 전쟁으로 인한 살상의 흔적.
14. 현대(역)사에서 어떤 사건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나?
☞ 육이오 전쟁
15. 그렇다면, 강이 숲에서 나와 마침내 바다로 흘러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 고난과 살륙의 세계가 사라지고, 분열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통합의 시대.
16. 시적 화자는 이런 강을 보며 어떻게 행동하려 하는가?
☞ (시적 화자도) 강 흐름 핏무늬길 바다로 간다.
17. “내가 바다로 간다.”는 말의 속뜻은?
☞ 내 마음도 강물에 동조하여 강물에 실려 간다.
꽃
- 박두진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靜寂).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湖心)아.
<하략>
(시집 거미와 성좌, 1962)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박두진의 시 가운데서 시어의 호흡이 짧고,간결하게 압축된 작품으로, 꽃을 통하여 자연의 신비와 생명의 고귀함,사랑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이 시는 꽃이 피는 과정을 통해 자연의 고귀한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비를 노래한 작품으로 자연물의 생성 과정을 노래한 것이지만 나아가 인간 생명의 철학적인 깊이를 관조한다. 삶과 죽음의 정신적 가치를 자연물을 통해 재발견하며 살아 있는 생명체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이 시는 꽃에 대한 여러 가지 은유가 각 연마다 나와 있어 그 은유를 발상하게 된 근거를 감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 성격 : 서정적, 관조적, 비유적, 암시적, 자연 귀의적
▶ 심상 : 제1연-청각적, 제2·3연-시각적, 제4연-촉각적
▶ 어조 : 차근차근하고 은근한 어조
▶ 표현 : 꽃을 ‘속삭임’, ‘울음’, ‘피 흘림’, ‘핏방울’, ‘정적’, ‘호심(湖心)’ 등의 은유로 표현함. 그 외 의인법, 돈호법이 쓰임.
▶ 구성 : ① 꽃을 통해 본 자연의 신비함(1연)
② 영원 속에서 단 한 번 피어나는(일회적인) 생명의 고귀함과 가치(2,3연)
③ 황홀하고 사랑스러운 꽃, 또는 사랑으로 비유된 꽃의 아름다움(4,5연)
▶ 제재 : 꽃
▶ 주제 : 자연의 신비와 생명(또는, 사랑)의 아름다움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꽃’을 비유하고 있는 시어를 모두 찾아 쓰라.
<모범답> 속삭임, 울음, 피흘림, 핏방울, 정적, 호심
2. ‘꽃’을 가장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연속된 두 시행을 찾아 쓰라.
<모범답> 황홀한 한 떨기의 / 아름다운 정적(靜寂)
3. 이 시는 내용상 세 단락으로 나뉜다. 각 단락에서 노래한 내용을 각각 2-3어절로 쓰라.
<모범답> 1단락(1연) : 자연 섭리의 신비
2단락(2,3연) : 생명의 고귀함
3단락(4,5연) : 황홀하고 사랑스러운 꽃
4. ㉠의 비유적 의미를 20자 내외로 쓰라.
<모범답> 사랑스런 꽃의 호수 같은 깨끗함, 순결함.
<감상의 길잡이>
박두진을 추천한 정지용은, “혜산(兮山: 박두진의 호)의 시가 유유히 펴고 앉아 그 시의 자세가 매우 편해 보인다”고 하였다. 또한, 그의 시적 체취는 무슨 삼림에서 풍기는 식물성과 같다고 말하였고 신자연(新自然)을 소개한 법열(法悅) 이상의 것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는 박두진의 시가 자연과의 친화와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시 꽃도 위에서 언급한 평자의 말을 벗어나지 않는데, 그것은 꽃과 인간이 하나로 합일된 경지를 노래할 뿐 아니라, 인간 생명의 근원과 경이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제1연은 우리가 먼 하늘의 해와 달의 속삭임을 모르는 것처럼 인간 생명도 신비롭고 경건한 존재임을 보여 준다. 해와 달이라는 시적 제재가 밝음이나 근원의 의미를 표상하고 있을뿐더러 이들의 합일에 의해 형성된 생명의 실체는 보통 인간이 감히 알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인 셈이다. 시인은 이런 생명의 실체를 어느 정도는 구명(究明)하는데, 그것은 시인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예언 능력에 근거한다. 그래서 이 시에서는 자연의 생명을 정확히는 밝힐 수 없다 해도 비유로써 어림가게 하는 것이다.
제2연에서 생명은 ‘피 흘림’으로 비유된다. 여기서는 ‘한 번만’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하는데 이것은 생명의 일회성 내지 유한성을 암시한 것이다. 그래서 제3연에서 생명을 ‘떨어지면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핏방울’이라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제4,5연에 오면 시인은 자신의 원래의 생명관으로 돌아오는데, 황홀함과 아름다움을 이 두 연에 교차시켜 배치한 것이 그렇다. 다시금 생명은 고귀한 것이고 이런 생명에서 배태되는 사랑은 호수 같은 정적과 깨끗함, 순결함을 잉태하는 것이다. 사랑은 시인에게 우주 만물의 근원인 동시에 생명의 궁극적인 귀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시인이 갈구하고 신비롭게 노래했던 생명의 실체는 결국은 자연과 인간의 황홀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