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시집 우리가 물이 되어, 1986)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시의 제목부터가 매우 함축적이다. ‘우리’, ‘물’, ‘가뭄’, ‘불’, ‘넓고 깨끗한 하늘’의 영상을 떠올려 보자. ‘물’의 보편적 성질과 ‘가뭄’이 내포하고 있는 상징을 연결지어 생각해 보자. 물과 가뭄이 대립적으로 짝을 이루어 가뭄은 물에 의해 그 갈증이 해소됨을 보이고 있다. ‘가뭄’을 인간적인 정이 고갈된 삶의 고독으로 볼 때, 시인이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물’이다.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와 ‘벌써 숯이 된 뼈’의 이미지를 그려 보자. ‘불’이 지난 뒤에 시인의 열망이 어느 시어에 나타나 있는가? 만남에 대한 화자의 태도의 흐름을 좇아 시를 이해해 보자.
▶ 성격 : 상징적, 의지적
▶ 표현 : ‘물이 되어 만난다면’이라는 미래 가정법 형태로 시작하여 만남에 대한 소망을 물과 불의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함.
▶ 특징 : ① 이별의 고통, 슬픔, 한스러움이 아닌 만나고 싶은 열망, 만남에 대 한 기대를 적극적, 능동적 자세로 노래함.
② 물과 불의 이미지로 만남을 노래함.
▶ 구성 : ① 물이 되어 만나고 싶은 심정(1,2연)
② 물과 불의 대비(3연)
③ 불이 지난 뒤의 만남(4,5연)
▶ 제재 : 물의 흐름과 만남
▶ 주제 : 원시적 생명력과의 만남에 대한 희구
<연구 문제>
1. 이 시에는 현대 사회에서의 이기주의, 무관심, 물질적 가치에 기울어진 삶 등 인간성이 메마른 상황을 나타낸 시어가 있다. 그것을 찾아 명사형으로 쓰라. 가뭄
2. ㉠에서 찾을 수 있는 ‘물’의 상징적 의미를 50자(띄어쓰기 포함) 이내로 쓰라.
현대 사회의 여러 병폐에 찌들어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새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실체
3. 이 시의 화자가 지향하는 세계를 표상하는 시구를 찾아 쓰라.
넓고 깨끗한 하늘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개성 있는 발상에 의해 ‘만남’을 노래한 5연의 자유시다. ‘나’와 ‘너’를 ‘우리’로 합일(合一)시킬 수 있는 매체인 물의 현상에 비겨 노래했다. 곧, 이 시는 이별의 슬픔이나 고통, 한스러움의 부정적인 상황을 탈피하여 만나고 싶은 열망, 만남에 대한 기대감을 표출하고 있다.
이 시의 구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제1,2연 :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그래서 이 세상의 가뭄을 해소시켜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라고 노래한다.
제3연 :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고, 물의 세계와 불의 세계를 대비시키고 있다.
제4,5연 :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불이 다 지난 다음에 물이 되어서 만나자는 내용이 나온다.
물, 불 그리고 불을 감싸는 물의 세계, 따라서 보편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 ‘물’, ‘불’이 이 시의 중심이 된다.
이 시에서 ‘물’은 주체와 객체를 ‘우리’로 만나게 하는 매체이며, ‘가뭄’으로 상징되는, 기계문명의 편의성에 물들어 타인과의 교감 없이 메말라 가는 삶의 고독을 해소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물이 유동적이면서 서로 완벽하게 하나로 섞일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가 물로 만나 흐를 때, 비로소 힘을 지니어 현대 사회의 여러 병폐에 찌들어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새 생명을 부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불은 무엇인가? 불은 삶의 기본 원리가 되는 물의 이미지와 대비되는 것으로 죽음, 파괴, 파멸 등 바람직하지 않은 삶의 방향을 상징한다. 이제, 이 불이 모든 것들을 깨끗하게 태우고 지나간 후에 ‘넓고 깨끗한 하늘’에서 만나자는 것은 단순한 연인이나 친구가 아닌, 원시적 생명력과의 만남, 합일에의 희구라 할 수 있다.
꽃을 위한 서시
-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문학예술, 1957.7)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김춘수의 시 꽃의 서시(序詩)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 이세 동원된 ‘미지 · 존재 · 무명 · 추억’ 등의 시어들은 독일의 릴케(R. M. Rilke)가 주로 즐겨 쓰던 시어들로 그의 영향이 강한 시다.
이 시에서 ‘너’, ‘신부’는 꽃으로 비유된 대상물에 불과하다. 시적 화자는 그 모든 사물 속에 내재하는 존재의 본질을 끊임없이 추구해 마지 않는다. ‘나’는 무딘 촉수로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고난의 몸부림을 거듭한다.
그러나 존재는 얼굴을 가리고 좀체로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안타까움을 읊은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시다.
▶성격 : 관념적, 주지적, 상징적
▶어조 : 사색적, 열정적 어조
▶특징 : 단순한 산문체의 시 같으면서도 깊은 의미를 지닌 난해시다. 꽃으로 대표되는 사물 속에 담고 있는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나 그 결과에 이르지 못하고 추구하는 자세 그 자체에 그친다.
▶구성 : ① 인식의 부재 상태(제1,2연)
② 인식에의 노력(제3,4연)
③ 인식 실패의 안타까움(제5연)
▶제재 : 꽃
▶주제 : 꽃의 참모습을 인식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존재의 본질 인식에의 염원)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너’가 가리키는 것을 밝히고, 그것과 같은 의미로 쓰인 시어를 찾아 그 상징 의미를 쓰라. 그리고 ‘나’는 ‘너’에 대해 어떠한 존재인지를 이 시의 주제와 관련하여 100자 이내로 쓰라.
<모범답> ‘너’는 ‘꽃’을 가리키며, 같은 의미로 쓰인 시어는 ‘신부’로서 존재의 본질을 상징한다. 시적 화자인 ‘나’는 존재의 본질을 끊임없이 탐구하나 본질 규명을 이루지 못하는 존재이다.
2. 존재의 본질 규명이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두 어절의 시구를 찾아 쓰라. <모범답> ‘얼굴을 가리운’
3. 이 시에서 다음 작품의 밑줄 그은 부분과 같은 의미를 가진 시어를 찾아 쓰라.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모범답> 금(金)
<감상의 길잡이>
릴케(R. M. Rilke)의 영향을 받아 존재론의 입장에서 사물의 내면적 깊이를 추구한 김춘수의 초기시에 해당한다. 그의 시 꽃이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존재가 남에게 바르게 인식되고 싶어하는 소망을 노래한 것이라면, 이 시는 반대로 인식의 주체로서의 화자가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고자 하는 욕망을 읊은 것이다.
사물의 본질적 의미를 파악할 능력이 없는 ‘나’(위험한 짐승)가 ‘너’(꽃)를 인식하려고 시도하면 ‘너’는 더욱 미지의 세계로 숨어 버린다. 그리하여 꽃은 아무런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 채, 불안정한 상태에서 무의미하게 존재하고 있다.
제3연의 ‘무명(無名)의 어둠’이란 존재의 의미, 본질이 드러나지 않은 상황을 말한다. 이 무명(無名)의 상태를 보다 못한 ‘나’는 의식을 일깨우는 불을 밝히고 인식을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나’의 이 노력이 돌개바람처럼 문득 큰 힘으로 변하여 사물의 본질을 꿰뚫기만 한다면 ‘나’는 드디어 꽃을 똑바로 인식하고 알맞은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꽃은 수줍은 신부(新婦)처럼 너울을 드리운 채 그 정체를 끝내 드러내지 않는 것을….
1950년대 김춘수는 ‘꽃’을 제재로 한 일련의 시로 우리 시에 존재론의 문제를 끌어들임으로써 한국 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는데, 이 시는 그 서시(序詩)에 해당하는 의의를 지닌다.
<맥락 읽기>
1. 화자는 누구인가? ☞ 나
2. 대상 혹은 듣는이는 누구인가? ☞ 너
3. 화자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 울고 있다.
4. 그 이유가 뭘까? 화자가 울고 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연을 찾아 보자.
☞ 1연 (나는 위험한 짐승이다. 왜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어둠이 된다)
☞ 2연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5. 시적 대상을 가리키는 다른 시구를 찾아 보아라.
☞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
6. 이로 미루어 볼 때 대상은 화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 지고 있는가 ?
☞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 : 알수 없는 존재
☞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 : 다가가고 싶으나 접근을 쉬 허락하지 않는 존재
7. 화자의 심정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시어를 찾아 보고 그것들을 통해 화자의 심정을 이야기 해보자.
☞ 나는 위험한 짐승, 나의 울음, 한밤내 운다.(자신의 부정적인 모습으로 괴로워하고 슬퍼한다.)
8. 자 그럼 화자가 처한 상황을 이해 하겠지. 한번 정리해 보자.
☞ 다가가고 싶은 존재가 접근을 쉬 허락하지 않기때문에 괴로워하고 슬퍼한다.
9.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얘기한 시어를 찾아 보아라.
☞ 무명의 어둠
10. 이런 무명의 어둠 즉 절망적인 상황에서 화자가 하는 행위는 ?
☞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한밤내 운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든다.
11. 그런 행위들이 뜻하는 바는 ?
☞ 절망적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대상의 실체에 다가가기 위한 끝없는 노력을 한다.
12. 그런데 과연 화자는 끝내 어떻게 될까? 울다가 세월 다 보내고 끝나는 걸까? ☞ ……
13. 대상의 인식을 위한 치열한 노력의 결과는 무엇인가 ?
☞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실체 파악의 가능성이 엿보임)
14. 대상을 가리키는 시구가 어떤 변화를 보이고 있는지 비교해 보자. 그 변화의 속뜻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 까마득한 미지의 어둠 ⇒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여.
☞ 아직 그 실체에 다가간건 아니지만 완전한 어둠에서 약간은 실체에 다가간 듯하네요.
15. 5연의 ‘나의 신부’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
☞ 언젠가는 얼굴을 드러낼 것이다.(아직까지는 얼굴을 가린 상태이지만 대상이 너울을 가린 저 편에 얼굴을 가진 존재임을 알고 있는 한 그리고 그 가린 너울을 벗겨 내려는 치열한 노력이 있는 한 언젠가는 얼굴을 마주 보게 될 것이다.)
16. 이 시에서 말하는 ‘너’는 무엇일까? ☞ 꽃
17. 기껏 꽃 한 송이를 두고 실체를 알 수 있느니 없느니 울고 불고 야단인데 도대체 뭘 얘기하고자 하는 걸까 ?
☞ 불가지론, 뭐 그런 철학적 내용이 아닐까요
☞ 그래 맞아.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쉬울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단다. 뿐만아니라 그것이 대상의 본질, 대상 그 자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중에도 그렇지 않은 것도 또한 많단다.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의미가) 되고 싶다.
(현대문학 9호, 1955.9)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김춘수 초기시의 특징인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존재의 의미를 조명하고 그 정체를 밝히려는 의도를 가진 이 시는, 주체와 대상이 주종(主從)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주체적인 만남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다분히 철학적인 시여서 정서적 공감과 함께 지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 성격 : 관념적, 주지적, 상징적, 인식론적
▶ 어조 : 갈망적 어조
▶ 특징 : 명명(命名) 행위에 의한 인식을 바탕으로 함.
▶ 표현 : 의미의 점층적 확대(단계적인 의미의 심화 과정을 보임)
┌ 나→너→우리
│
└ 몸짓→꽃→눈짓
▶ 구성 : ① 대상을 인식하기 이전의 무의미한 존재(제1연)
② 명명에 의해 의미 있는 존재로 다가옴(제2연)
③ 존재의 본질 구현에 대한 근원적 갈망(제3연)
④ 존재의 본질 구현에 대한 소망(제4연)
▶ 제재 : 꽃
▶ 주제 : 존재의 본질 구현에 대한 소망
<연구 문제>
1. 이 시와 꽃을 위한 서시(序詩)에서, ‘나’가 ‘너’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의 차이점을 14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꽃에서 인식의 주체인 ‘나’는 객체인 ‘너’를 인식함으로써 그것은 의미 있는 존재로 드러난다. 그러나 꽃을 위한 서시에서 ‘나’는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해도 ‘너’는 본질적인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2. ㉠과 대조의 관계에 있는 시어 셋을 찾아 쓰라.
<모범답> 꽃, 무엇, 눈짓
3. 다음 글의 밑줄 그은 ⓐ,ⓑ,ⓒ에 대응되는 시어를 찾아 쓰라.
인간을 자연과 우주로, 나를 남과 사회로 열어 주는 길들은, 자연과 우주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여 뜻있는 것으로 하며, 나와 남과의 사이에 사회의 질서를 세워 진정한 뜻에서의 인간적 세계를 창조한다. 이런 과정에서, 어떤 철학자가 말했듯이, ⓐ사물로서의 존재가 ⓑ빛을 받아 ⓒ원래의 은폐성(隱蔽性)에서 밖으로 뜻을 가지는 존재로 나타나게 되며, 동물로서의 인간이 자연을 초월하는 인간으로서 승화(昇華)하게 된다. -박이문의 길 |
<모범답> 존재의 본질을 밝혀 그것을 인식하는 행위.
<감상의 길잡이>
한 때 청소년들의 애송시의 선두 자리를 다투던 작품이다. 그들은 대체로 이 시를 하나의 연가(戀歌)쯤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성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느끼기 시작하는 그들에게 제3연과 제4연은 미상불 절창(絶唱)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사실 이 시는 그런 사랑의 노래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 인식’이라는 다분히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경향의 작품이다.(물론 연가로 읽는다고 해서 오독(誤讀)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제1연에서 ‘이름을 불러 주기’는 명명 행위(命名行爲)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대상을 인식하기 이전에는 그는 무(無)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몸짓’은 장미꽃이나 민들레꽃과 같은 구체적인 꽃이 아닌, 어떤 낯설고 정체 불명인 관념일 뿐이다. ‘몸짓’의 상징 의미는 ‘무의미한 존재’이다.
제2연에서 시적 화자가 대상을 인식하고 이름을 불러 줌으로써 그는 정체를 드러내며 ‘나’에게로 다가온다. 혼돈과 부재(不在)의 상태, 곧 존재의 은폐성(隱蔽性)으로부터 그는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하이데거가 “말은 존재의 집이다.”라고 하면서 만물은 본질에 따라 이름을 지으며, 시인의 사명은 성(聖)스러운 것을 이름짓는 데 있다고 한 말을 상기시켜 준다.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고 그것의 이름을 부를 때, 존재는 참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꽃’은 ‘의미 있는 존재’를 상징한다.
제3연에는 존재의 본질 구현에 대한 근원적 갈망(渴望)이 표출되어 있다. 주체인 ‘나’도 대상인 ‘너’에게로 가서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여기서 “대상 없는 주체도, 주체 없는 대상도 무의미하며, 성립될 수 없다.”는 말을 연상해 보면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빛깔과 향기’는 ‘존재의 본질’을 뜻한다.
제4연은 이 시의 주제연으로서 시젓 화자의 본질 구현에 대한 소망이 ‘우리’의 것으로 확산된다. 그리고 ‘꽃’은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임이 확인된다. ‘눈짓’은 ‘꽃’과 동격(同格)의 이미지로서 ‘의미 있는 존재’를 상징한다.
<맥락 읽기>
1. 화자는 누구인가.? ☞ 나
2. 내가 주된 관심을 가지고 노래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 그, 꽃
3. 내가 대상에 대해 한 행위는?
☞ 화자는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4. 화자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에게 일어난 변화는 ?
☞ 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름을 불러준 순간 꽃이 되었다.
5. 이름을 불러 주기 전의 ‘그’와 이름을 불러 준 후의 ‘그’를 지칭하는 말들을 찾아 보아라.
☞ 이름을 불러 주기 전의 그 : 몸짓
☞ 이름을 불러 준 후의 그 : 꽃
6. 그럼 ‘몸짓’이란 걸 화자는 어떻게 여기고 있나요?
☞ 하찮은 것, 별볼일 없는 것( ~에 지나지 않았다)
7. 이름을 불러준 후 그가 꽃이 되었다고 했는데 그때의 꽃은 무얼 뜻하는가? 이 시에 쓰인 다른 시어로 대답해 보아라.
☞ 의미 (의미있는 존재,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가치를 인정받은 존재)
8. 그럼 이 시의 화자는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을 어떤 행위로 생각 하는가?
☞ 대상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간다. ‘관심을 가진다. 대상을 알게된다. 대상에 정당한 의미를 부여한다. 대상의 가치를 인식한다.
9. 이 시의 화자(나)가 원하는 바는 무엇인가?
☞ 누가 나에게 나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을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
☞ 그래서 나도 남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되었으면 좋겠다.
처용단장(處容斷章)
- 김춘수
1의 1
바다가 왼종일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날이 저물자
내 근골(筋骨)과 근골 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꼬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 번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뚝, 뚝, 뚝, 천(阡)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히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또 밤이 와서
잠자는 내 어깨 위
그 해의 새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의 한쪽이 조금 열리고
개동백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내리는 그
희디흰 눈발을 보고 있었다.
1의 2
삼월(三月)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南)쪽 바다,
그 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삼월(三月)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시집 처용, 1974)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시인 김춘수를 제2의 이상(李箱)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가장 첨단적인 현대시의 기법을 구사하여 무의식 세계의 이미지를 구상화함으로써 우리 현대시의 진폭을 새로이 개척, 확대했다는 점에서 일리 있는 평가이다. 그는 비유적 이미지를 버리고,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로써 일종의 시의 순수한 상태 곧 무의미의 시, 절대시를 이룩하려 시도했다.
이 시는 어떤 주제 의식이나 특정한 의미를 내포하지 않고, 오직 심상만을 제시하고자 감각적인 언어들을 동원하고 있다.
▶ 성격 : 이미지즘, 회상적
▶ 어조 : 과거의 인상을 서술하는 어조
▶ 「1의2」의 구성 : 단련시
▶ 제재 : 남쪽 바다에 대한 추억
▶ 주제 : 삼월의 남쪽 바다에 대한 추억의 심상화.(감각적 체험 내용의 심상화)
<연구 문제>
1. ㉠은 어떤 소리인지 이 시에 나오는 한 시행을 사용하여 30자 정도로 설명하라.
<모범답> 그 날 밤 잠들기 전에 현실과 꿈의 경계선에서 듣는 환청(幻聽).
2. 이 시에 나타난 심상의 특징을 70자 정도로 설명하라.
<모범답> 비유를 통하여 새로운 관념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들이 감각적으로 어울려 이루어내는 이미지 그 자체만을 추구하는 서술적 이미지로 이루어져 있다.
3. 이 시의 화자를 ‘처용’으로 잡은 의도를 70-100자 정도로 설명하라.
<모범답> 고향인 ‘바다’를 떠나 서라벌 땅에서 소외감(또는 고독) 속에서 살아온 처용의 생애가, 동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이로 지낸 시인의 유년기와 상통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 이 시에서 여성적인 이미지를 드러내는 시구를 찾아 쓰라.
<모범답> ‘산다화의 보얀 목덜미’
<감상의 길잡이>
비유적 이미지는 관념의 수단이라고 생각한 김춘수 시인은 이미지를 서술적으로 쓰는 훈련을 계속해 왔다고 고백한다.
이 시는 서술적 이미지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시의 내면에는 어떤 관념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다만, 이미지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관념이 배제되었다고 해서 <시문학파>의 순수시를 생각해서도 안 되고, 이미지를 중시한다고 해서 김광균이나 김기림의 주지시를 연상해서도 안 된다. 김춘수의 이른바 ‘무의미의 시’, ‘존재의 시’는 언어와 언어가 부딪쳐 유발하는 미묘한 감각적 심상을 위주로 하고 있으면서도 객관적 형태의 사실적 묘사를 위주로 하지 않음으로써 등장하는 사물들 간의 관계가 서로 먼 거리를 가진다. 따라서, 개별 시행 속에서 관념이나 의미를 추출하는 데 익숙한 독자에게는 난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시의 경우, 이미지를 이루는 주된 사물은 ①삼월의 눈, ②라일락 새 순, ③산다화, ④겨울 털옷, ⑤남쪽 바다, ⑥물개의 수컷, ⑦그 울음 소리, ⑧수렁, ⑨보얀 목덜미 등이 있다. 이들이 의미의 고리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어적 감각으로 어울려 추억(또는 무의식) 속에 아련히 잠재해 있는 ‘눈 내리는 삼월의 남쪽 바다’의 정경이 인상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를테면,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에서 ‘물개’는 ‘바다’와 어울리는 이미지이고, ‘수컷’은 ‘바다’가 주는 ‘ㅂ’음의 언어 감각과 ‘수컷’의 ‘ㅋ’음이 주는 언어 감각을 어울리게 하여 ‘바다’에 더욱 싱싱한 이미지를 부여했다. ‘우는 소리’는 슬픔이나 비애의 감정을 지니고 있기보다는 다만 가슴에 부딪치는 울림, 곧 심상으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능금
- 김춘수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3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시집 꽃의 소묘, 1959)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시인 김춘수가 추구한 ‘무의미의 시’, ‘절대적 심상의 시’ 계열에 속하면서도 이 시는 상당한 친근감을 가지고, 상징의 너울 속에 가린 의미의 세계를 열어 보일 듯도 하다.
여기서 ‘능금’은 그가 즐겨 다루는 ‘꽃’과 마찬가지로 구체적 대상이라기보다는 어떤 관념의 표상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 성격 : 주지적
▶ 어조 : 존재의 신비를 발견하는 경이감을 담은 차분하고 동경에 찬 어조
▶ 구성 : ① 그리움으로 살고 그리움으로 다가와 축제의 여운으로 새겨져 남는 능금의 실체(제1연)
②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존재의 속살을 실하게 채운 능금이 받는 사랑(제2연)
③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서 마침내 도달하는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 생의 넘치는 감격(제3연)
▶ 제재 : 능금
▶ 주제 : 존재의 비밀과 경이로움
<연구 문제>
1. 이 시에 대한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모범답> ④
① 율격이 노출되지 않고 내면화되어 있다.
② 관습적인 판단을 뒤엎는 가진술(假陳述)이 보인다.
③ 막연한 감정이 아닌 견고하고 투명한 심상을 보여 준다.
④ 감정의 개입을 배제하고 지성적 비판의 자세가 나타나 있다.
⑤ 한국의 전통 정서가 지성의 통제를 받은 이미지와 적절히 조화되어 있다.
2. ㉠,㉡,㉢은 시적 묘미를 살려 표현한 것이다. 그 뜻을 각각 한 단어의 일상어로 밝혀라.
<모범답> ㉠ 과거 ㉡ 미래 ㉢ 하늘
3. 제3연의 심상을 역동적(力動的)으로 만든는 시어를 찾아 쓰라.
<모범답> ‘물결치는’
4. 이 시의 중심 제재인 ‘능금’의 실체를 구상화하는 데 시간과 공간의 심상이 기여하는 양상을 밝혀라.
<모범답> 높고 맑은 가을 하늘 밑에서 가을의 애무를 받으며 능금은 충실에 도달하였다. 숭고한 공간, 풍요로운 시간의 심상이 만나서 싱그럽고 경이로운 능금의 실체가 구체화되었다.(‘능금’은 높고 맑은 가을 하늘 밑이라는 광활, 청아하고 풍요로운 공간을 점유한 싱그럽고 그리운 실체이다. 그 싱그럽고 그리운 실체가 가을의 애무를 받기까지 그리움을 익혀 충실에 도달케 한 것은 시간이다. 이 시간이 익혀 온 그리움의 실체가 가을 공간 속에서 우리 앞에 놓여질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이 만나서 잉태, 산출한 것이 우리 앞에 놓이 ‘능금’이라는 실체이다.)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익어가는 능금에 대한 경이감을 차분한 어조로 읊은 작품이다. 능금이라는 존재를 밝히기 위하여 화자는 끊임없는 물음을 보내며 그의 비밀을 알아낸다. 능금은 겉모습이 아닌 속모습 곧 실체를 드러내며 다가오기 시작한다.
제1연의 능금의 실체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다시 능금의 빛깔과 향기가 되어 우리의 손에 닿게 되고 우리에게 축제처럼 찬란하고 흐뭇한 충족감을 안겨 준다.
제2연의 능금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알알이 익어 가고 그리고 가장 높고도 숭고한 곳에서 가을은 가장 큰 은총과 사랑으로 능금의 충실을 도와 준다.
제3연은 능금의 내면, 아름다운 미소가 있는 그 깊숙한 곳에는 예로부터 존재하는 한없이 넓고 시원한 감정의 바다, 넘치는 생의 감각이 물결치고 있다.
능금 하나를 두고 이런 감격을 우리에게 안겨 주는 시인의 존재가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존재의 비밀을 밝히는 주지시이면서도 ‘그리움’, ‘축제’, ‘애무의 눈짓’, ‘세월’, ‘감정의 바다’ 같이 함축적 의미가 풍부한 시어를 구사함으로써 얼음 같은 지성을 녹여 포근하고 풍요로운 서정의 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사물의 거죽을 벗기고 숨겨진 진실을 발견해 내는 마음의 눈으로 읽고 감상해야 할 것이다.
인동(忍冬) 잎
- 김춘수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近郊)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 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人間)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시집 타령조․기타, 1969)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김춘수 시의 특질로 지적되는 ‘인식의 시’로 자주 인용되는 작품이다. 끝의 2행을 제외하면, 이 시의 대상이 무엇인지, 시인은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이 시는 비유적 이미지를 철저히 배제한 풍경 묘사로만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인동 잎>으로 제시된 한 폭의 그림에서 우리는 조금의 티끌도 묻어나지 않는 짜릿한 감정이입의 순간을 느끼게 된다. 일상적인 사물을 구체적인 설명 방법으로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지 않는 대신, 시인의 가슴에 떠오른 어떤 관념을 압축된 풍경 묘사를 통해서 이렇게 ‘보여 줄’ 뿐이다. 그 관념은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은 무상(無想)의 관념을 지향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 쓰인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차단해 버리고 언어 자체를 절대화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렇게 본다면, 후반부는 풍경을 바라보는 화자의 감정이 반영된 것으로 일체의 관념과 설명을 배제하겠다는 시인의 의도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눈 덮인 초겨울 들판에서 붉은 열매를 쪼아먹는 ‘작은 새’는 인동초의 겨울나기를 가로막는 방해물의 상징이며, 인동초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보다도’ 슬픈 것은, 겨울과 작은 새로 표상된 시련의 외적 상황을 힘겹게 버티고 있는 인동초의 인고(忍苦)의 아픔이 짙게 배어 있는 까닭이다.
역마차
- 김철수
설움 많은 밤이 오면은
우리 모두들 역마차를 타자
반기어주는 이 없는 폐도(廢都) 여기 별없는 거리 자꾸 그리운 합창이 듣고파 내 오늘도 또 한 잔 소주에 잠겨 이리 비틀거리는 사내이구나
흔들려 부딪치는 어깨 위에 저 가난한 골들이 형제요 동포이라는 나의 외로움 속에서는 우리 좀더 정다운 나그네여서 따뜻한 마을을 찾아가는 것이냐
이제는 통곡조차 잊어버린 사람들……
열리는 아침을 믿어 가는 길인가
그러면 믿븐* 사람이여 어디 있는가 높은 곳에 기다리는 공화국의 문이여 어디 있는가 절름거리는 궤짝 위의 차거운 꿈에서도 역마야 너와 나와는 원수이지 말자
미친 채찍이 바람을 찢고 창살 없는 얼굴에 빗발은 감기는데 낙엽도 시월도 휘파람 하나 없이 이대도록 흔들리며 폐도의 밤을 간다
(신천지, 1948.2)
* 믿븐 : 믿음직한.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신진 시인 김철수의 대표작으로 뚜렷한 정치적 색채를 드러내지 않는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이다. 이 시는 ‘역마차’라는 이국적 제재를 택하여 1940년대 후반 분단이 고착화되는 현실에서 느끼는 비애를 시인 특유의 서정으로 노래하고 있다.
‘설움 많은 밤’ ‘반기어 주는 이 없는 폐도(廢都)’ 서울에서 시적 자아는 ‘자꾸 그리운 합창이 듣고’ 싶어서 ‘오늘도 한 잔 소주에 잠겨 이리 비틀거’린다. 비틀거리면서 부딪치는 수많은 ‘통곡조차 잊어버린 사람들’은 과연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가. 그들에게 ‘열리는 아침’은 도래할 것인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지닐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시적 자아는 ‘믿븐 사람’과 ‘높은 곳에 기다리는 공화국의 문’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 자신의 희망은 역마차의 ‘절름거리는 궤짝 위의 차거운 꿈’에 불과한 것. 그래도 시적 자아는 어디에선가 자신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 것임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역마야 너와 나는 원수이지 말자’라고 다짐한다. ‘미친 채찍이 바람을 찢고 창살 없는 얼굴에 빗발은 감기는’ ‘폐도의 밤을’ 가면서.
이처럼 이 시는 봉건 잔재와 식민 잔재의 청산이라는 민족사적 과제는 사라진 채 분단 현실이 고착화되어 버린 해방공간의 서울의 밤을 배경으로 하여, 삶의 어려움에 지친 민중들을 감싸고 위로하며 소중한 꿈으로 상승시키는 힘과 서정을 보여 준다. 바야흐로 혁명의 열기나 투쟁의 의지보다는 분단의 민족 현실에서 비롯되는 비애가 더욱 짙게 배어나기 시작하는 해방공간의 현실인 것이다.
국경의 밤
- 김동환
제 1 부
1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外套) 쓴 검은 순사가
왔다― 갔다―
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밀수출(密輸出) 마차를 띄워 놓고
밤 새 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던 손도 맥이 풀려서
‘파!’ 하고 붙는 어유(魚油) 등잔만 바라본다.
북국(北國)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 가는데.
2
어디서 불시에 땅 밑으로 울려 나오는 듯
“어―이” 하는 날카로운 소리 들린다.
저 서쪽으로 무엇이 오는 군호(軍號)라고
촌민(村民)들이 넋을 잃고 우두두 떨 적에,
처녀(妻女)만은 잡히우는 남편의 소리라고
가슴을 뜯으며 긴 한숨을 쉰다.
눈보라에 늦게 내리는
영림창(營林廠)* 산림(山林)실이 벌부(筏夫)*떼 소리언만.
3
마지막 가는 병자(病者)의 부르짖음 같은
애처로운 바람 소리에 싸이어
어디서 ‘땅’ 하는 소리 밤하늘을 짼다.
뒤대어 요란한 발자취 소리에
백성들은 또 무슨 변(變)이 났다고 실색하여 숨죽일 때
이 처녀(妻女)만은 강도 채 못 건넌 채 얻어 맞는 사내 일이라고
문비탈을 쓰러안고 흑흑 느껴 가며 운다.
겨울에도 한삼동(三冬), 별빛에 따라
고기잡이 얼음장 끄는 소리언만.
4
불이 보인다, 새빨간 불빛이
저리 강 건너
대안(對岸)벌에서는 순경들의 파수막(把守幕)*에서
옥서(玉黍)장* 태우는 빠알간 불빛이 보인다.
까아맣게 타오르는 모닥불 속에
호주(胡酒)*에 취한 순경들이
월월월, 이태백(李太白)을 부르면서.
5
아하, 밤이 점점 어두워 간다.
국경의 밤이 저 혼자 시름없이 어두워 간다.
함박눈조차 다 내뿜은 맑은 하늘엔
별 두어 개 파래져
어미 잃은 소녀의 눈동자같이 감박거리고,
눈보라 심한 강벌에는
외아지* 백양(白楊)이
혼자 서서 바람을 걷어 안고 춤을 춘다.
아지 부러지는 소리조차
이 처녀(妻女)의 마음을 핫! 핫! 놀래 놓으면서.
<이하 생략>
(시집 국경의 밤, 1925)
* 영림창 : 산림을 관리하는 관청.
* 벌부 : 뗏목을 타고서 물건을 나르는 일꾼.
* 파수막 : 경비를 서기 위해 만들어 놓은 막사.
* 옥서장 : 옥수숫대
* 호주 : 옥수수로 담가 만든 독한 술. 고량주
* 외아지 : 외줄기로 벋은 나뭇가지.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김동환의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은 전체 3부 72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제치하 두만강변을 무대로 햐여 세 인물(순이, 순이 남편, 청년) 사이에 전개되는 사건을 객관적으로 서술해 가는 과정에서, 일제의 식민지 노예로 전락한 우리 민족의 삶의 애환과 비애를 극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여기에 실린 것은 제1부 제1장에서 제5장까지로 전체 작품의 발단 부분이다.
이 시에 대하여 정한모 교수는 다음과 같이 문학사적 의의를 부여한다.
“우리 나라에서 장편 서사시라 할 만한 것으로 고전 속에서 동명왕, 용비어천가 등 몇 개를 들 수 있고, 현대시에는 대부분이 서정시여서 서사시는 극히 드문 편이지만, 김동환의 국경의 밤은 일찍이 현대시에서 유일한 서사시였다.” <정한모, ‘현대시론’>
■ 국경의 밤의 이중 구조 : 실연(失戀)과 상부(喪夫)의 이중 구조
■ 주인공이 겪는 이중의 갈등 :
① 생존의 불안으로 인한 갈등 ② 청년과의 갈등
■ 국경의 밤이 서사시로서 지니고 있는 약점
① 순이의 행동(action)이 지나치게 미약하다.
② 남편(병남)과 청년간의 갈등 양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③ 갈등을 극히 관념적, 서술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 국경의 밤의 발단
배경과 극적 상황(dramatic situation)이 성공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무슨 일인가 일어날 듯한 공포감, 불안감을 돋우는 긴장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 갈래 : 자유시, 서사시
▶ 어조 : 두만강변 주민의 삶의 애환을 서술하는 북녘 사투리의 남성적 어조
▶ 표현 : 설명과 대화에 치중함으로써 비유적 표현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 특징 : 국경 지방에서 밀수출을 하며 살아가는 주민들의 비극적 삶과 순이의 사랑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 시상 전개 : 이 시는 하룻밤과 이튿날 낮까지의 시간을 현재로 하고, 그 중간에 과거 회상 현식으로 주인공의 소녀 시절을 끼워 넣으면서 두만강변의 암울하고 참담한 생활과 고향 산곡(山谷) 마을의 추억을 엮어 놓았다.
▶ 체제
부 항목 |
제1부 |
제2부 |
제3부 |
장 |
제1장~제27장 |
제28장~제57장 |
제58장~제72장 |
시간 |
현재(저녁→밤) |
과거(회상) |
현재(밤→새벽→낮) |
공간 |
두만강변 |
산곡(山谷) 마을 |
두만강변→산곡마을 |
▶ 구성
제1부 제1-7장 : 남편의 밀수 길을 근심함
제8-10장 : 미지의 청년이 마을을 배회함
제11장 : 요약 반복
제12-16장 : 순이의 옛 사랑 회상
제17-27장 : 순이와 청년과의 재회
제2부 제28-35장 : 순이의 혈통인 재가승(在家僧)의 내력
제36-46장 : 순이와 청년의 사랑
제47-57장 : 신분의 장벽으로 인한 청년과의 이별
제3부 제58장 : 순이와 청년의 감격적인 재회와 청년의 구애 거절
제59-62장 : 남편 병남이 마적의 총에 맞아 시체로 돌아옴
제63-72장 : 이튿날 고향(산곡)에 남편의 시신을 매장함
▶ 제재 : 일제 치하 두만강변 주민의 애환
▶ 주제 : 조국을 상실한 민족의 애환과 비애
<연구 문제>
1. 제1-5장은 국경의 밤의 발단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배경과 극적 상황이 성공적으로 제시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분위기에서 연유한 것인지 30-40자 정도로 쓰라.
☞ 무슨 일인가 일어날 듯한 공포감, 불안감을 조성하는 긴장된 분위기
2. (1)주인공인 젊은 아낙네의 심리 상태를 쓰고, (2)그러한 감정이 이입된 소재를 찾아 쓰라.
☞ (1) 불안, 초조 (2) 어유 등잔
3. 이 시에 나오는 인물들을 통해 시인이 의도적으로 보여 주고자 한 것을 당대의 현실과 관련지어 50자 내외로 설명해 보라.
☞ 식민지 시대의 참담한 민족 현실과 쫓기는 자, 소외된 자의 비극적 좌절의 체험을 보여 주고자 하였다.
4. 이 시를 서사시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 화자가 이야기꾼으로 등장하여 사건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감상의 길잡이>
두만강 유역의 국경 지대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겨울, 소금실이 밀수출 길에 남편을 내어 보낸 순이의 근심 어린 대사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날 저녁 이 마을에는 한 청년이 나타난다.(제1부)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어릴 적 소꿉동무였다. 그들은 자라면서 서로 좋아하게 된 사이였으나, 여진족의 후예인 순이는 다른 혈통의 사람과 혼인할 수 없다는 인습 때문에 헤어져야 했다. 그렇게 해서 마을을 떠나야 했던 소년이 8년이 지난 뒤에야 다시 순이 앞에 나타난 것이다.(제2부)
청년은 이제 남의 아내가 된 순이에게 다시 사랑을 간청한다. 그러나 순이는 남편에 대한 도리와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들어 이를 거절한다. 그때 밀수출 나갔던 남편이 마적떼의 총을 맞고 시체가 되어 돌아온다.(제3부)
이상과 같이 요약될 수 있는 국경의 밤은 여러 모로 ‘앨프레드 테니슨’의 이노크 · 아덴이라는 시를 한국적으로 변용한 듯한 인상이 짙다. 테니슨의 시에서는 남편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 죽은 것으로 믿고 어린 시절의 친구와 결합하지만, 국경의 밤에서는 옛 친구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으로 귀결되어 한국적 정절이 강조된 점이 특이하다고 하겠다.
여기서 재가승(在家僧)의 딸 순이의 ‘운명’이 의미하는 바를 좀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옛날 함경도 북쪽에는 여진(女眞)의 무리가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고려 때 여진 정벌로 인해 이들의 평화는 깨어지고 종의 신분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 후 그들은 친민 집단으로 고립되어 자기들끼리만 결혼을 하면서 여러 세대를 살아왔다. 머리를 깎은 탓에 세상에서는 이들을 재가승(在家僧)이라 불렀다. 순이는 바로 재가승의 딸이었다.
이러한 수난의 역사를 지닌 종족의 후예라는 특이한 신분을 지닌 순이는 곧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로 전락한 우리 민족의 당대적 현실을 반영하는 인물로 이해된다.
눈이 내리느니
- 김동환
북국(北國)에는 날마다 밤마다 눈이 내리느니,
회색 하늘 속으로 흰 눈이 퍼부을 때마다
눈 속에 파묻히는 하아얀 북조선이 보이느니.
가끔가다가 당나귀 울리는 눈보라가
막북강(漠北江)* 건너로 굵은 모래를 쥐어다가
추위에 얼어 떠는 백의인(白衣人)의 귓불을 때리느니.
춥길래 멀리서 오신 손님을
부득이 만류도 못하느니,
봄이라고 개나리꽃 보러 온 손님을
눈 발귀*에 실어 곱게 남국에 돌려보내느니.
백웅(白熊)이 울고 북랑성(北狼星)*이 눈 깜박일 때마다
제비 가는 곳 그리워하는 우리네는
서로 부등켜 안고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 얼음 벌에서 춤추느니.
모닥불에 비치는 이방인의 새파란 눈알을 보면서,
북국은 추워라, 이 추운 밤에도
강녘에는 밀수입 마차의 지나는 소리 들리느니,
얼음장 트는 소리에 쇠방울 소리 잠겨지면서.
오호, 흰 눈이 내리느니, 보오얀 흰 눈이
북새(北塞)*로 가는 이사꾼 짐짝 위에
말없이 함박눈이 잘도 내리느니.
(금성 3호, 1924.5)
* 막북강 : 고비 사막 북쪽을 흐르는 강.
* 발귀 : ‘발구’의 함경도 사투리로 마소가 끄는 운반용 썰매.
* 북랑성 : 큰개자리별(시리우스, sirius).
* 북새 : 북쪽 국경 또는 변방.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흰 눈이 퍼붓는 겨울, 하얀 옷을 입고 물 설고 낯선 북국으로 이주하는 우리 민족의 황량하고 막막학 심사를 형상화하고 있는 이 시는 김동환의 대표적 장편 서사시인 국경의 밤의 정서와 흡사한 면이 많다.
▶ 성격 : 상징적, 서경적
▶ 어조 : 북국으로 이주하는 민족의 비애를 동정적으로 응시하는 서정적인 어조
▶ 심상 :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심상
▶ 특징 : ‘막북강, 북량성, 북새’와 같은 북국의 정서를 자아내는 시어를 사용하여 이국으로 이주하는 우리 민족의 애환과 민족적 이질감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 구성 : ① 눈 내리는 북국과 눈 속에 파묻힌 북조선(제1연)
② 추위와 바람에 떠는 백의인(제2연)
③ 남국으로 되돌려 보내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제3연)
④ 남쪽을 그리워 하는 민족의 설움(제4연)
⑤ 북국의 이국적 정서와 밀수입을 하며 살아가는 민족의 비애(제5연)
⑥ 북새로 가는 이사꾼 짐 위로 내리는 함박눈(제6연)
▶ 제재 : 눈 내리는 겨울에 북국으로 이주하는 민족의 비애
▶ 주제 : 국권을 상실한 민족의 비애와 애환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북방의 정서를 드러내는 시어를 모두 찾아 쓰라.
☞ 막북강, 눈, 발귀, 백웅, 북랑성, 새파란 눈알, 북새
2. 이 시에서 유민들의 간절한 소망이 함축되어 있는 시어나 시구를 찾아 쓰라.☞ 제비 가는 곳, 적성
3. 이 시 속에 나타나는 백색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시어나 시구를 찾아 쓰고, 그 말을 통해 형상화하고자 한 것을 20자 내외로 쓰라.
☞ (1) 하아얀 조선, 백의인
(2) 순박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
4. 이 시에서 반어적 기법이 드러난 구절을 찾아 쓰라.
☞ 말없이 함박눈이 잘도 내리느니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원래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는데, 시집 <국경의 밤>에 수록될 때 약간의 손질과 함께 제목이 바뀐 것이다.
김동환의 시는 우수와 침울한 분위기로 대표되는 북방적 정서를 드러내는 데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김소월, 이용악, 백석 등 북쪽을 고향으로 둔 시인들의 작품이 대개 삶의 애상적 비애와 향수를 시의 제재로 삼고 있는데, 김동환은 이러한 정서를 민족의 수난사와 결부시키고 있다.
이 시의 배경이 되는 북방은 ‘날마다 밤마다’ 눈이 내리는 동토(凍土)이며, 막북강 건너에서 불어오는 모래 바람이 귓볼을 때리는 삭막한 고장이다. 따뜻한 남쪽 고향을 뒤로 하고 북방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운명이 북방의 매서운 추위와 연계되어 더욱 절실한 비애를 자아낸다. 몸도 마음도 위축되어 버린 이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적성을 손가락질’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부질없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제3연의 ‘봄이라고 개나리꽃 보러 온 손님을 / 눈 발귀에 실어 곱게 남국에 돌려 보내느니’라는 구절은 화자의 안타까운 마음과 절실한 소망을 담고 있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소망이라는 사실은 화자나 유민 모두가 깊이 인식하고 있는 터이다. 그러기에 화자의 시선은 다시 북방으로 옮겨지면서, 우리 민족이 밀수입(수출)을 하며 살아가는 고달픈 삶이 제시된다. 제4연의 3,4행은 ‘국경의 밤’의 시상과 놀라울만치 닮아 있는데, 이것은 시인이 국경 부근에 거주하면서 경험하였던 사건이 그만큼 강렬한 인상으로 각인(刻印)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향에서는 농사의 풍요를 담보할 것으로 여겨져 기쁘게 맞을 소담한 눈조차도 북방으로 쫓겨가는 이주민들에게는 혹독하고 매정한 자연 현상일 뿐이며, 자신들의 운명이 갈수록 암담해질 것이라는 비극적 조짐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물론, 이 시의 제3연과 제4연에서 유민들의 고향 회귀 혹은 조국의 독립에 대한 강렬한 소망과 의지가 담겨져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 유민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얼음벌에서 추는 춤이 환희와 희망의 군무(群舞)가 아니라, 실의와 좌절 속에서 서로를 위무(慰撫)하는 통곡의 포옹이요 춤이라 해석하는 것이 온당하며, 따라서 그것이 갖는 의미도 분명해진다. 그것은 조국의 독립에 대한 확신과 신념이라기보다 그런 믿음이라도 가짐으로써 자신의 불행을 감내하려는 내적 의지의 간접적 표현인 것이다.
북청(北靑) 물장수
- 김동환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쏴 ―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린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동아일보, 1924.10.24)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물장수로 아들을 대학까지 보낸다는 북청 물장수의 근면함에 도시 사람들은 청신한 아침을 맞이한다. 미처 잠에서 깨어나기 전의 혼곤함 속에서 ‘솨아’ 퍼부어지는 물소리를 듣고, 하루의 일과를 준비하는 도시인의 마음은 북청 물장수가 새벽에 길어왔을 물처럼 맑고 정결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른 새벽의 신선한 감각과 물장수를 기다리는 도시인의 심정을 가볍게 그려낸 작품이다.
▶ 성격 : 향토적, 감각적
▶ 어조 : 북청 물장수의 근면함을 칭송하고 그를 기다리는 서정적 어조
▶ 심상 : 청각적, 묘사적 심상
▶ 표현 : ① 새벽의 신선한 분위기를 ‘물에 젖은 꿈’이라는 표현을 통해 감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② 각 연의 마지막 행을 명사형으로 종결지음으로써 깊은 울림을 남겨 준다.
▶ 구성 : ① 새벽마다 잠을 깨우는 부지런한 북청 물장수(제1연)
②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제2연)
③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제3연)
▶ 제재 : 북청 물장수의 근면성
▶ 주제 : 북청 물장수의 인간적 매력과 생활에의 애착
<연구 문제>
1. 이 시의 주조를 이루는 이미지의 종류를 두 어절로 쓰라.
☞ 청각적 이미지
2. 이 시의 화자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상태임을 알게 해 주는 시행을 찾아 쓰라. ☞ 물에 젖은 꿈이
3. 북청 물장수에 대한 깊은 감동과 애정이 표현된 시구를 찾아 쓰라.그 말을 통☞ 가슴을 디디면서
<감상의 길잡이>
오늘날처럼 각 가정에 수도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물장수들이 새벽마다 물을 공급해 주었다. 그들은 주부들이 일어나 부엌일을 시작하기 전에 물을 가져다 주어야 했으므로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원에서의 하루가 횃대에서 목청 좋게 울어젖히는 계명성(鷄鳴聲)에서 시작되듯이, 도시의 새벽은 부지런한 북청 물장수들의 삐걱거리는 지게 소리와 물 붓는 소리와 함께 열리는 것이다.
물장수는 아직도 곤한 잠에 빠져 있는 도시인들의 꿈길을 밟고 온다. 날마다 거의 비슷한 시각에 찾아와 말없이 물만 붓고 떠나가는 북청 물장수의 행동에 익숙해진 도시인(혹은 화자)은 물장수가 독 안에 붓는 물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어난다. 그때의 화자의 정신은 마치 머리에 찬 물을 뒤집어 쓴 듯한 것처럼 맑고 시원하다. 제 할 일을 마친 물장수는 갓 깨어난 화자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말없이 떠나간다. 단잠에서 깨어나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도시인의 아침 풍경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적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북청 물장수의 근면하고 과묵한 행동에 화자는 친밀한 감정을 갖게 된다. 현실과 꿈이 채 구분되지 않는 혼돈 속에서 물장수를 부르지만, 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다음 집에 물을 날라다 주기 위하여 삐걱삐걱 소리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서로의 인간적 만남이 없으면서 제 할 일을 묵묵히 하는 물장수의 행동과 그에게서 인간적 친밀감을 느끼는 화자의 심정을 담담하게 그려 내고 있다. 화자에게 북청 물장수는 단순히 생활에 긴요한 물을 공급해 주는 장사치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청신한 새벽의 분위기를 전해주는 존재인 것이다. 맑고 활기찬 아침을 마련해 주는 물장수를 기다려 만나 보고 싶어하는 화자의 마음이 깔끔하게 제시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산(山) 너머 남촌(南村)에는
- 김동환
1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南)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제 나는 좋데나.
2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제 나는 좋데나.
3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 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재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었다 이어오는 가는 노래는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
(조선문단 18호, 1927.1)
<감상의 길잡이>
이상향을 추구하는 시인의 욕구가 자연과 융합되어 자연의 운율적 질서와 동화됨으로써 민요적 리듬을 창출하고 있는 이 작품은, <국경의 밤>과 <북청 물장수>에서 보여 준 북방의 억센 사투리와 강한 남성적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 구사와 여성적 어조로 표현되어 있어, 시인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시인은 <국경의 밤>, <눈이 내리느니>와 같은 작품에서는 북방의 춥고 어두운 겨울을 배경으로 암울한 시대 상황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데 반해, 이 시에서는 겨울이 없는 ‘남촌’을 무대로 하여 그가 그리워하는 이상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달래 향기’․‘보리 냄새’․‘호랑나비떼’․‘종달새 노래’로 대표되는 사랑과 평화의 낙원으로서의 ‘남촌’이 지니고 있는 희망과 사랑의 이미지는 시인으로 하여금 배나무 꽃 아래 서 계실 ‘님’이 비록 구름에 가려 보이지는 않더라도, 내게 전해 주는 사랑의 노래는 봄바람을 타고서 계속 들려오는 것으로 믿게 하는 것이다.
송화강 뱃노래
- 김동환
새벽 하늘에 구름장 날린다.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구름만 날리나
내 맘도 날린다.
돌아다보면은 고국이 천 리런가.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온 길이 천 리나
갈 길은 만 리다.
산을 버렸지 정이야 버렸나.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몸은 흘러도
넋이야 가겠지.
여기는 송화강, 강물이 운다야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강물만 우더냐
장부(丈夫)도 따라 운다.
(삼천리, 1935.3)
<감상의 길잡이>
식민지 백성들에게 민족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의도로, 역사적 사실을 작품에 투영시켜 현실 상황에 맞서 싸우는 저항 의지를 보여 주던 김동환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나라 찾기의 시’를 버리고 민요시로 전향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 작품이 바로 <송화강 뱃노래>이다. 김억, 김소월로 대표되는 기존의 민요시가 다분히 여성적 취향의 애틋한 정감을 갖는 데 반해, 김동환의 민요시는 강한 남성적 어투와 활달한 가락을 바탕으로한 건강미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 시는 고국을 떠나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는 장부의 씩씩한 기상이 민요풍의 가락 속에 굴절되어 다소 애절한 느낌을 배태(胚胎)하고 있으며, 각 연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1행에서는 고국을 떠나가는 시적 화자의 애절한 심경을 표현하고 있으며, 2행에서는 애절함을 극복하기 위한 시적 장치로 노젓는 의성어를 그대로 차용하는 한편, 3․4행에서는 근심과 걱정을 해결하기 위한 시적 화자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앞날이 순탄치 못할 것을 암시하는 ‘구름장’과 앞으로도 ‘만 리’를 더 가야할지 모른다는 막막함, 그리고 화자를 따라 ‘송화강’도 섧게 운다지만, 몸은 떠나왔어도 마음만은 고국땅에 가 있다는 화자의 말은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라 짐작되나 왠지 가슴이 허전할 뿐이다.
파초(芭蕉)
- 김동명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南國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修女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렬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 「朝光」 1936년 1월호 -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김동명의 제2시집 <파초>의 표제가 된 서정시로 감정 이입과 의인화가 두드러진 작품이다. 조국을 잃은 사람으로서 맛보는 서글픔을 같은 처지에 있는 파초에 의탁하여 쓴 작품이라 할 것이다. 곧, 고향인 남국(南國)을 떠난 파초의 처지와 조국(祖國)을 잃고 비애의 삶을 영위(營爲)하는 시인의 처지는 자연스레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바탕이 될 터이다.
제1,2연에서는 같은 처지의 파초의 발견과 동병상련의 정이, 제3연부터 마지막 연까지는 파초를 자신의 분신처럼 애지중지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 성격 : 상징적, 우의적, 의지적, 전원적
▶ 심상 : 시각적 심상
▶ 표현 : 감정 이입, 의인화
▶ 구성 : ① 파초의 가련한 꿈(1연)
② 파초의 외로운 넋(2연)
③ 화자의 파초에 대한 정성(3연)
④ 서로 의지하고 함께 지내도록 함(4연)
⑤ 파초의 잎사귀로 냉혹한 현실을 가리고 싶음(5연)
▶ 제재 : 파초
▶ 주제 : 잃어버린 조국에의 향수
<연구 문제>
1. 이 시의 화자와 파초와의 관계를 4자의 한자 성어로 쓰라.
☞ 同病相憐
<해설> 동병상련 :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위해 줌.
2. ㉠의 상징 의미를 20자 이내로 쓰라.
☞ 영혼의 메마름을 채워 주는 정신적 생명수
3. ㉡과 ㉢ 각각의 원관념을 쓰라.
☞ ㉡ 뿌리 위 ㉢ 파초의 넓은 잎
4. 이 시에서 시대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시어를 있는 대로 찾아 쓰라. ☞ 밤, 겨울
<감상의 길잡이>
남국을 떠나온 파초와 식민지 현실에 발붙이기 어려운 시인과의 눈물겨운 유대가 이 시의 전체적 골격을 이룬다. 그러나 그것을 식민지 현실에서 안주(安住)할 터전을 잃어버린 민중들에 대한 연대감과 포옹으로 해석하기에는 어려운 감이 있다.
파초는 이 시에서 작자와 별개의 존재라기보다는 차라리 그의 정신적 피사체(被寫體)이다. 작자는 자기의 감정적 상태 혹은 활동을 지각의 대상인 ‘파초’에 투사(投射)하는, 이른바 감정 이입의 수법을 통하여 시적 대상을 자기와 동일화시키고 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인 셈이다.
시적 대상인 ‘파초’가 여성화된 점은 일단 수긍이 간다. 그래야 ‘수녀’, ‘정열의 여인’, ‘치맛자락’이라는 표현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밤’이나 ‘우리의 겨울’은 앞의 전개로 보아 상황 이미지로 이해함이 옳을 터이다. 그런데 그 겨울을 ‘치맛자락으로~가리우자’고 한다. 현실의 혹독함을 어떻게든 막아 보자는 뜻이겠으나, 그 엄청난 현실 앞에 치맛자락 하나로 대응하는 자세가 힘차고 강인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대상을 여성화한 필연적 결과다.
수선화
- 金東鳴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끝없는 고독 위를 날으는
애달픈 마음.
또한 그리고 그리다가 죽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또 다시 죽는
가여운 넋은 아닐까.
부칠곳 없는 정열을
가슴 깊이 감추이고
찬바람에 빙그레 웃는 적막한 얼굴이여!
그대는 신의 창작집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불멸의 소곡.
또한 나의 적은 애인이니
아 아 내사랑 수선화야!
나도 그대를 따라서 눈길을 걸으리.
<감상의 길잡이>
세상의 쓰라림과 사랑의 감동이 엇갈리는 일생을 살아온 김동명의 심사가 이 「수선화」에 사진처럼 찍혀 있다.
김동명의 일생은 사실 서러운 일생이었다. 구박둥이에 천덕꾸러기 사주팔자를 타고났다 해서 자탄도 많이 했지만 또 서러움을 상쇄할 만한 도움의 손길도 있어서 뒤뚱뒤뚱 한세상을 살았다.
어릴 때는 외출복이 없어서 어머니가 외갓집 나들이를 할 때 데려가지도 않았다. 자존심 강한 어머니가 거지꼴 같은 아들을 친정에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김동명이 7세때 처음 옷 한 벌을 얻어 입고 외가에를 갔는데, 그때는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어머니가 친정살이를 하러 간 길이었다.
남들이 14세에 들어가는 중학교를 17세에 입학하고 두 학년을 건너뛰어 3년만에 영생(永生)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해서 1년간 놀다가 간신히 근처에 있는 東進小學校 선생이 되었지만 기구한 사주팔자는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취직한 지 겨우 한 학기만에 학교를 쫓겨났다. 3·1독립운동 두 해 후인 21년이면 아직 살벌한 분위기인데 모친을 닮아서 입이 촉바른 그가 그만 3·1운동 찬양 발언을 학생들 앞에서 해 버렸다. 모가지가 열 개 있어도 모자랄 일을 해 놓고 그는 ‘추방의 비운’을 맞이한다.
두 번째 추방은 서해안 남포 근처의 소학교에서 당했다. 평양 숭실대학에 다니는 선배 한 사람이 교장에게 애걸복걸해서 취직이 된 것인데 이 학교 또한 가을 학기 겨우 끝내고 나자 ‘나가 달라’ 했다. 조선인을 일본 사람 만드는 교육 내용을 불평했기 때문이다. 속이 뭣같이 상했지만 그래도 대동 강변을 걸으며 시를 생각하는 재미 하나로 버티어 오던 학교 생활을 별 수 없이 청산하고 시고(詩稿) 보따리 하나만 달랑 들고 돌아섰다.
그후 안주에 있는 U소학교에 세번째로 취업, 여기서는 입조심을 대단히 해서 데뷔작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면」을 썼고 쫓겨나는 것도 한 학기만이 아니고 1년만에 파직 당하는 ‘행운’(?)도 있었다.
입 잘못 놀려 세번씩이나 해고를 당한 김동명은 세상 살 맛이 안 났다. 고향 생각이 비로소 났다. 가난에 쫓겨 도망하듯 떠나온 고향이지만 워낙 세파에 시달리고 서러우니 몸서리나는 고향도 생각키웠다. 그는 고향 강릉으로 가 보기로 작정하고 봄비 내리는 4월 어느 날 길을 나섰다가 잠시 원산을 다녀갈 생각을 했다. 거기엔 조카 하나가 공무원을 하는데 거기 대고 하소연도 실컷 하고 여행 편의도 부탁할 생각이었다.
일제시대의 관리란 역시 끗발이 좋아서 조카의 말 한마디에 냉큼 사람을 보내어 정중히 초빙해 가는 소학교가 있었다. 김동명은 고향 길을 포기하고 그 학교에 눌러앉아 한 학기를 대과 없이 보내고 C여학교로 ‘자의에 의해서’ 옮겨앉았다. 고약한 운명이 끝나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학교에 무슨 소송 사건이 생겼는데 김동명이 중뿔나게 거기 말려든 것이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고 물러나겠소.” 모친을 닮아서 큰 소리 잘 치고 객기도 있는 그가 ‘자의에 의해서’ 퇴임을 했다. 그것이 C여학교로 옮긴지 두 달 만이었다. 그러니 취직 최장기간은 1년이고 최단
기간은 2개월이었다.
이렇게 4 차례 실직의 비운을 겪은 다음부터는 대체로 일이 잘 풀린 셈이다. 몇 개월 조캇집에서 식객 노릇을 착실히 하다가 유림회(儒林會) 강습소의 일을 한 일년 보았다. 29세 되던 해에 그는 동경 유학을 떠나게 된다. 우연찮게 기독교 계층의 장학금을 받고 또 처가에서 생활비를 보조해 주었다. 기독교 자금이므로 일본 청산 학원(靑山學園) 신학과를 다닐 수밖에 없었지만 김동명은 아무래도 종교적 인간은 못되었다. 낮에는 청산 학원에 나가고 밤에는 일본 대학 철학과를 다녔다. 그 시절의 학제는 돈과 시간과 체력만 허락되면 둘이 아니라 세 군데 학교를 다녀도 상관없었다.
그는 두 번 아내를 잃는 쓰라림을 겪고 세 번씩 장가를 가는 처복(?)을 누렸다. ‘김동명이 처복 없는 사람인가? 있는 사람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친구들이 술자리에서 자주 토론회를 가졌다 한다.
첫 아내는 그의 첫직장인 동진(東進)소학교 시절의 하숙집 딸이었다. 총각 선생이 용모는 볼 것 없었으나 재능과 인품은 출중하다 해서 장모가 중매쟁이 역할을 했다 한다. 첫 부인 지정덕(池貞德)은 영생고녀 출신의 전형적인 동양 여성이며 1남 2녀를 낳고 금슬 좋게 살다가 40도 못되어 타계했다.
42세에 김동명은 다시 장가를 가는데 상대는 이대(梨大) 음악과 출신의 석사 이복순(李福順)였다. 그녀는 영생고녀 음악 교사로 있었는데 성악가 김자경 선생의 모친 강신앙 여사가 중매를 섰다. 이 결혼이 얼마나 어려웠던지 김동명은 “그 굴욕, 그 모멸감, 그 참담한 고전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라는 무용담을 쓰기도 했다.
그렇게 고심 참담한 난관의 시간을 극복하고 나니 그렇게 쌀쌀맞던 이복순(李福順)양이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서 천하에 다시없는 현모양처로 변하더라고 그는 수필 「천환 180도」에 써 놓았다. 그는 李부인의 몸에서 난 첫딸 월정(月汀)을 가장 사랑해서 그림자처럼 데리고 다녔다. 그는 어떤 글에서 월정(月汀)의 이름 풀이를 ‘아름답고 깨끗함, 아름답고 영원한 것의 참된 모습, 노래의 시작, 탄식의 종말’이라 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李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첫 결실이라 더 귀중, 소중했다. 그러나 귀신의 시기인지 李부인도 둘째딸 월령을 낳고 59년 심장마비로 남편 곁을 영영 떠났다. 김동명은 그 충격에서 오래 벗어나지 못하다가 잘 다니던 다방 마담과 세 번째 결혼을 함으로써 간신히 위안을 얻는다. 가난과 실의와 병고 속을 살아간 말년에도 그는 세 번째 부인의 극진한 보살핌 때문에 서럽지는 않았다. ***
내 마음은
- 金東鳴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 |
이오.
그대 저 문을 닫어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최후의 한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귀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조광, 1937.6)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의 각 연에 등장하는 ‘호수’, ‘촛불’, ‘나그네’, ‘낙엽’의 이미지가 서로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 그것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하나의 주제 아래 통일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시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이 시는 작가의 작품 중, 드물게 참신한 이미지들을 지니고 있다. ‘내 마음’을 원관념으로 내놓은 다음 그에 상응하는 몇 개의 보저관념을 제시하는 은유법을 쓰고 있다. 가곡으로도 널리 애창되고 있는 이 시는 평이한 내용이면서도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서정시라 하겠다.
▶ 성격 : 낭만적, 비유적, 상징적, 정열적
▶ 심상 : 시각적 심상
▶ 어조 : 호소하는 독백조(‘하오체’)
▶ 표현 : ① 함축적 표현 ② 은유법
▶ 구성 : ① 사랑의 정열(1,2연)
② 사랑의 애달픔(3,4연)
▶ 제재 : 내 마음
▶ 주제 : 사랑의 기쁨과 덧없음
(사랑에 대한 내 마음의 상태 및 변화)
<연구 문제>
1. 제2연의
촛불 |
과 비슷한 심상이 우리 고시조에도 나온다. 다음 시조를 완성시켜 보라.
☞ 겉으로 눈물 지고 속타는 줄 모르는고
房 안에 혓는 燭불 눌과 이별하였관대 ( ) 우리도 저 燭불 같아야 속타는 줄 모르노라. - 이 개 |
2. 이 시에서 ‘내 마음’의 보조 관념은 크게 둘로 대비된다. 그렇게 구분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60자 내외로 설명하라.
☞ 첫째, 둘째 연과 셋째, 넷째 연으로 대비된다. 그 이유는 앞의 두 연이 정열적임에 비해 뒤의 두 연은 애상적이기 때문이다.
3. ㉠, ㉡은 공통적으로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10자 내외로 쓰라.
☞ 임에 대한 사랑의 정열.(임에 대한 헌신적 사랑)
4. ‘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데 있어 고려가요 가시리와 어떤 점에서 비교가 되는지 분석하여 70자 정도로 설명하라.
☞ 가시리는 이별에 즈음한 여인의 은근한 정서가 나타나 있음에 비해, 내 마음은은 임에 대한 사랑이 남성적이고 정열적으로 표현되었다.
<감상의 길잡이>
우리 시에서 은유의 좋은 예를 이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내 마음’의 비유어로서 각 연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어휘들을 살펴보자. ‘호수’, ‘촛불’, ‘나그네’, ‘낙엽’ 사이의 관련은 모호하다. 그래서 어떤 논자는 이 시가 애정의 어느 한 국면을 집중적으로 노래한 것이 아니라, 있을 수 있는 사랑의 여러 국면을 나열적으로 노래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좀더 유의해 보면, 네 개의 연들이 대등하게 각자의 독립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면, 이 시는 전반부(제1,2연)와 후반부(제3,4연)로 나눌 수 있다. ‘옥같이 …… 부서지리다’(제1연)와 ‘남김 없이 타오리다’(제2연)는 정열적인 느낌을 주고,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제3연)와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제4연)는 애상적인 느낌을 준다. 전반부가 사랑의 정열적인 면을 노래한 것이라면, 후반부는 사랑의 애상적인 면을 노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시인은 사랑의 정열(전반부)과 사랑의 애수(후반부) 사이에 아무런 예고도 징검다리도 놓지 않는다. 그것이 의도적이라면 그 단절을 통해 작자는 충격적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 시는, 사랑은 처음에는 즐겁고 불타오르는 것 같지만 결국은 외롭고 슬프게 끝나고 만다는, 사랑의 무상함을 충격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밤
- 金東鳴
밤은
푸른 안개에 싸인 호수,
나는
잠의 쪽배를 타고 꿈을 낚는 어부다.
(시집 하늘, 1948)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밤은 호수요, 나는 어부이다.”라는 내용으로, 2개의 명제를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 단형의 작품이다. 그러나 4행 27자에 불과한 이 시가 제시하고 있는 공간은 아득한 우주까지 확장되어 있다. ‘밤은 / 푸른 안개에 싸인 호수’로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深淵)의 신비를 지닌 곳으로, ‘푸른 안개’라는 아늑한 밤의 이미지와 함께 상서러운 느낌까지도 준다. 이렇게 밤마다 ‘잠의 쪽배를 타고’ 그 곳에 가서 ‘꿈을 낚는 어부’가 되는 화자는 바로 이상을 추구하는 낭만주의자로서의 시인의 풍모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봄은 간다
- 김 억
밤이도다
봄이다.
밤만도 애닲은데
봄만도 ᄉᆡᆼ각인데
날은 ᄲᅡ르다.
봄은 간다.
깊흔 ᄉᆡᆼ각은 아득이는데
저 바람에 ᄉᆡ가 슯히운다.
검은 ᄂᆡ ᄯᅥ돈다.
죵소리 빗긴다.
말도 업는 밤의 셜음
소리 업는 봄의 가슴
㉠ᄭᅩᆺ은 ᄯᅥᆯ어진다.
님은 탄식ᄒᆞᆫ다.
- (태서문예신보 9호, 1918.11)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근대시는 교훈적, 계몽적, 민족적인 사상을 담은 신체시와는 달리 종래의 한문투의 문장을 벗어나 순수한 우리말을 찾아 쓰고자 노력했으며, 순수한 서정시를 지향하고자 했다. 특히 김억은 애조를 띤 가락에 우리 민족 고유의 민족적 정조를 담은 민요적 서정시를 쓰고자 노력했는데, 이 작품에 보이는 3․4조, 4․4조의 형식이 이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애조를 띠고 있다. 애조를 띤 가락은 식민지 치하에 있던 청년 안서와 내적 번민이 여성 편향이란 우리 옛시의 전통성과 만나 승화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개인적인 절망감과 그것을 야기한 암담한 현실적 분위기가 상징적으로 노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는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는 한 화자가 등장하여 애상적 정조를 바탕으로 당시의 어두운 시대 상황을 토로하고 있다. 특히, 신체시가 지녔던 계몽성을 탈피하여 개인적 서정을 노래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시대의 어려운 상황을 의식하고 있는 점, 순수한 우리말의 미감을 잘 살려 쓴 점, 공감각적인 이미지 속에 정서를 함축시킨 점, 2행을 1연으로 묶어 나간 연에 대한 배려와 ‘-다, -데, -ㅁ’의 각운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점, 정형적 리듬을 벗어난 자유시인 점 등에서 한국 근대 詩史상 특별한 의의를 지니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감상해야 하겠다.
▶ 성격 : 상징적, 감상적, 독백적
▶ 운율 : 각운
▶ 특징 : 각 연이 2행 대구로 됨. 감정 이입법
▶ 구성 : ① 가는 봄의 아쉬움과 상실감(1~3연)
② 시대 상황이 주는 절망감(4,5연)
③ 침묵할 수밖에 없는 답답함(6연)
④ 가버린 봄에 대한 탄식(7연)
▶ 제재 : 봄밤의 슬픈 감정
▶ 주제 : 상실한 자의 애상적 정서
<연구 문제>
1. ‘봄’이 지닌 일반적인 의미와 이 시에서의 의미를 구별하여 10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봄은 일반적으로 소생과 희망과 새로운 삶 등의 이미지를 지녀 암담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희망의 시간을 의미하나, 오히려 이 시에서는 소생의 의미를 상실한 비애의 봄을 의미한다.(봄은 화자로 하여금 절망을 느끼게 하는 소재이다)
2. 이 시가 신체시와 비교하여 자유시에 상당히 근접해 있고, 순수한 우리말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한시(漢詩) 번역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유를 쓰라.
<모범답> 대구, 각운 등 형식적 제약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3. ㉠에 상응할 만한 시구를 찾아 쓰라.
<모범답> 봄은 간다
4. 이 시는 서양시를 모방하여 지은 흔적이 분명히 나타난다. 그 외형적 현상이 무엇인지 지적하라.
<모범답> 각운법
<<해설>> ‘-다’, ‘-네’, ‘-ㅁ’과 같은 동일한 음절, 동일한 음운을 규칙적으로 반복함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암담한 시대 상황을 인식한 데서 비롯된 작품으로 독백체의 표현과 간결한 구조를 통하여 주관적 정서를 절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정서적으로는 우리의 전통시에서 보인 애상과 비애를 바탕으로 상실과 체념의 미학을 계승하고 있다. 치열한 현실 인식에서 오는 어떤 적극적인 행동의 미학이 표출되지 못하고, 수동적 자세로 탄식하는 데에 머물고 있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 시의 전통성과 시인의 내적 번민이 만나 시로 잘 승화된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적 가락과 정서를 계승하고자 한 시인의 시적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제1연 : 시 전체의 배경이 제시되어 있다. ‘밤’은 어둠을 표상하며 당시의 암담한 현실을 상징하고, ‘봄’은 덧없이 흘러가 버리는 상실의 존재이다. 따라서, ‘봄밤’은 낭만적 이미지가 아닌, 모든 것을 상실한 암담한 고뇌의 현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제2연 : 봄밤에 느끼는 화자의 애상과, 소생(蘇生)의 의미를 상실해 버린 상실감이 나타나 있다.
제3연 :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통하여 아쉬움과 상실감을 노래했다.
제4연 : 화자의 슬픔과 수심(愁心)이 새에 이입되어 있다. ‘슬피 우는’ 새는 시대 상황이 주는 절망감을 대변하고 있다.
제5연 : ‘검은 내’는 제1연의 ‘밤’과 같은 이미지로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종 소리’와는 상반된 이미지다. 이 종 소리가 비껴가는 것은 절망적임을 암시한다.
제6연 : 침묵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인식에서 오는 답답함과 비애가 나타나 있다.
제7연 : 가는 봄에 대한 탄식이 나타나 있다. 꽃의 떨어짐을 통해 봄의 상실과 더 나아가서 모든 것의 상실을 노래하고 있다.
물레
- 김 억
물레나 바퀴는
실실이 시르렁
어제도 오늘도 흥겨이 돌아도
사람의 한 생(生)은 시름에 돈다오.
물레나 바퀴는
실실이 시르렁
외마디 겹마디 실마리 풀려도
꿈 같은 세상(世上) 가두새 얽히오
물레나 바퀴는
실실이 시르렁
언제나 실마리 감자던 도련님
언제는 못 풀어 날 잡고 운다오.
물레나 바퀴는
실실이 시르렁
원수의 도련님 실마리 풀어라
못 풀 걸 왜 감고 날다려 풀라나.
- (백민, 1947)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한국적인 구슬픈 정한을 전통적 율조에 맞춰 그려 낸, 김억의 민요시에 대한 시각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시다. 시의 전통적인 제재인 물레의 구조를 살피고, 우리 여인들의 물레에 얽힌 사연을 알아보자.
4음보의 율격에 맞춰 읊조리며, 행간에 담긴, 물레의 실처럼 얽혀 있는 삶의 인연을 풀려는 한국적인 여성의 정서를 음미해 보자.
각 연의 ‘물레나 바퀴는 / 실실이 시르렁’의 반복이 주는 효과는 무엇인가? 우리 민요의 특질을 살피고 이 시에서 민요적 성격을 찾아보도록 하자.
▶ 성격 : 민요적
▶ 운율 : ① 4음보의 율격
② 두운, 각운, 반복에 의한 운율
▶ 특징 : 내용면에서 민요시적 특징이 잘 드러남.
▶ 구성 : ① 시름에 겨워 도는 인생(1연)
② 복잡하게 얽히는 세상(2연)
③ 우유부단한 임의 괴로움(3연)
④ 임에 대한 원망(4연)
▶ 제재 : 물레
▶ 주제 : 사랑의 한(恨)과 인연(因緣)
<연구 문제>
1. 인연(因緣)을 상징하는 시어를 찾아 쓰라.
<모범답> 실마리
2. 이 시가 민요시적 성격을 지녔다면, 그 특징을 형식과 내용면에서 100자 정도로 설명하라.
<모범답> 형식적인 면에서는 4음보의 기본 율격을 취하고 반복구가 있으며, 내용적인 면에서는 전통적인 정서인 한(恨)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이 시는 민요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3. 화자의 감정을 전달하는 매개체를 찾아 쓰라.
<모범답> 물레
4. 이 시의 (1)주제를 포괄하고 있는 시어를 찾아 쓰고, (2)그 원인이 어디 있는지 밝히라.
<모범답> (1) 시름 (2) 사랑의 실마리가 잘 안 풀리기 때문에.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4행씩 4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외형도 정연하다. 또, 4음보의 율격을 바탕으로 각 연의 1~2행은 되풀이 된다. 반복구와 율격의 형식면에서, 한(恨)의 정조, 여성적 화자의 정서 등 내용면에서 민요시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물레를 통하여, 잘 풀리지 않는 사랑의 시름과 한(恨)을 노래하고 있다. 물레나 물레질은 이 시의 소재일 뿐으로 이 시의 주제는 물레질로부터 연상되는 여인의 한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민요 ‘베틀 노래’에서, 베틀 일을 하는 여성의 고단함과 일상의 한스러움을 노래한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레가 돌고 실마리가 풀리고 하는 물레의 모습과 시름을 연결시킨 시적 연상 방법이 효과적이다. 그리고 제4연에서 ‘원수의 도련님~날다려 풀라나’라는 표현은 사랑을 맺고 결실을 이루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임에 대한 원망이 잘 드러나 있다.
오다 가다
- 김 억
오다 가다 길에서
만난 이라고,
그저 보고 그대로
예고 말건가
산(山)에는 청청(靑靑)
풀 잎사귀 푸르고
해수(海水)는 중중(重重)
흰 거품 밀려 든다.
산새는 죄죄
제 흥(興)을 노래하고
바다엔 흰 돛
옛 길을 찾노란다.
자다 깨다 꿈에서
만난 이라고
그만 잊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십리 포구(十里浦口) 산(山) 너머
그대 사는 곳
송이송이 살구꽃
바람에 논다.
수로 천리(水路千里) 먼 길
왜 온 줄 아나?
옛날 놀던 그대를
못 잊어 왔네
- ‘조선 시단’ 창간호(1929. 11)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3음보를 바탕으로 소박한 내용에 어울리는 민요풍의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 준다. 여기서 노래하는 그리움의 대상을 떠올려 보자.
‘오다 가다 길에서 만난 이’나 ‘자다 깨다 꿈에서 만난 이’가 때때로 떠오르고 그대가 사는 ‘십 리 포구 산 너머’가 어른거리는 영상을 떠올려 보자.
‘청청’이나 ‘중중’ 같은 표현은 음악적인 리듬감을 살리며 산과 바다의 분위기에 어떤 맛을 더해 주는가도 생각해 보자.
이 시의 작중 화자의 그리움이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연을 찾아보고 거기에 펼쳐지는 봄날의 풍경을 그려 보자.
▶ 성격 : 민요적
▶ 운율 : 3음보, 7·5조
▶ 특징 : 그리움을 노래했으면서도 오히려 밝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 구성 : ① 만남의 소중함(1연)
② 산과 바다의 풍경(2연)
③ 산새와 돛단배(3연)
④ 만남의 소중함(4연)
⑤ 선명한 그리움(5연)
⑥ 그대를 찾는 까닭(6연)
▶ 제재 : 만남의 의미
▶ 주제 : 잠시 인연을 가졌던 사람에 대한 그리움
<연구 문제>
1. 시적인 함축성과 여운을 고려할 때, 생략되어도 좋은 연은?
<모범답> 제6연
2. 이 시는 민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형식과 내용으로 나누어 그 성격을 지적하라.
<모범답> 형식면에서 3음보를 취하고 있고, 내용면에서 향토적 서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민요적 성격을 지녔다 할 수 있다.
3. 이 시의 주제를 3음절의 고유어로 쓰라. <모범답> 그리움
4. 이 시의 주제를 드러내고 있는 방법으로 옳은 것은?
<모범답> ④
① 비유 ② 반복 ③ 암시 ④ 직설 ⑤ 풍자
<연구 문제>
♣ 이 시는 3음보를 바탕으로 소박한 내용에 어울리는 민요풍의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 준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여기서 노래하는 그리움의 대상을 떠올려 보자.
2. ‘오다 가다 길에서 만난 이’나, ‘자다 깨다 꿈에서 만난 이’가 때때로 떠오르고 그대가 사는 ‘십 리 포구 산 너머’가 어른거리는 영상을 떠올려 보자.
3. ‘청청’이나 ‘중중’ 같은 표현은 음악적인 리듬감을 살리며 산과 바다의 분위기에 어떤 맛을 더해 주는가 생각해 보자.
4. 이 시의 작중 화자의 그리움이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연을 찾아보고 거기에 펼쳐지는 봄날의 풍경을 그려 보자,
<감상의 길잡이>
대개 그리움을 노래한 시들은 슬프고 침울한 분위기를 띠게 마련이다. 그 그리움이 크면 클수록 슬픔과 괴로움도 커지기 때문이다. 그리움이 사무치면 한(恨)으로 응어리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움을 노래하는 모든 시가 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 시는 보여 준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작품에서 노래하는 그리움의 대상은 ‘오다 가다 길에서 만난 이’이지만, ‘자다 깨다 꿈에서’ 보일 만큼 정이 들었고, 그래서 그는 ‘십 리 포구 산 너머’, ‘수로 천리 먼 길’을 찾아간다. 가벼운 만남이고, 인연이 그리 깊지 않기에 가슴을 아프게 할 만큼 그리움이 절박하지는 않다. 그렇게 절박하지는 않은 그리움이기에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밝은 분위기를 지니게 된다.
특히, 제2연과 제3연의 풍경은 그 산과 바다의 싱싱함으로 이 작품에 경쾌함마저 더해 준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그리움은 때때로 또렷이 마음 속에 솟아오른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살구꽃처럼 가볍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그리움이다.
봄을 맞는 폐허에서
- 김해강
어제까지 나리든 봄비는 지리하던 밤과 같이
새벽바람에 고요히 깃을 걷는다
산기슭엔 아즈랑이 떠돌고 축축하게 젖은 땅우엔 샘이 돋건만
발자취 어지러운 옛 뒤안은 어이도 이리 쓸쓸하여……
볕 엷은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어
깨어진 새검파리*로 성을 쌓고 노는
두셋의 어린 아이
무너진 성터로 새어가는
한떨기 바람에
한숨지고 섯는 늙은이의
흰 수염은 날린다
이 폐허에도 봄은 또다시 찾어 왔건만
불어가는 바람에
뜻을 실어 보낼 것인가
오- 두근거리는 나의 가슴이여!
솟는 눈물이여!
그러나 나는
새벽바람에 달음질치는
동무를 보았나니
철벽을 깨트리고
새 빛을 실어오기까지
오― 그 걸음이 튼튼하기만 비노라 이 가슴을 바쳐 ―
(조선일보, 1927.5.10)
*새검파리 : 깨어진 사기그룻 조각.
<감상의 길잡이>
김해강은 활동 초기, 프로 문학 운동이 왕성할 때에는 동반 작가로서 경향적인 시를 많이 발표하였으나, 1930년대 후반부터는 순수 서정 시인으로서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통한 한국의 전통적 서정 세계를 주로 노래하였다. 이 시는 그의 초기시 세계를 잘 보여 주는 경향적 작품이다.
1~2연은 간밤의 봄비가 그치면서 봄빛이 가득한 세상을 보여 준다. 그러나 봄비는 지리한 밤과 함께 새벽바람에 물러가고 ‘산기슭엔 아즈랑이 떠돌고’ ‘땅 우엔 샘이 돋건만’, ‘발자취 어지러운 옛 뒤안’을 돌아본 시적 자아는 그저 쓸쓸함을 느낄 뿐이다. 이 때, ‘옛 뒤안’은 단순히 집 뒤의 공터라는 의미보다는 그 동안 식민지 시기의 온갖 고난과 역경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3~4연에서 시적 자아의 시야는 집 밖의 세상으로 확대된다. 그 곳은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이 양지쪽에 쭈그리고 앉아 놀고 있는 한가로운 장소이지만, 회한에 잠겨 ‘한숨지고 섯는 늙은이’의 흰 수염이 바람에 날리는 ‘무너진 성터’로서, 봄을 맞는 폐허의 구체적 공간적 배경이 된다. 그러나 이 때의 ‘무너진 성터’는 폐허의 대유적 표현이며, 이는 곧 나라를 잃은 망국의 국토를 상징한다. 5~6연에서 시적 자아의 현실 인식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시적 자아는 그대로 폐허에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서 다시 찾아온 봄에 의탁해 막연하나마 희망을 실어보낸다. 그러나 정면으로 맞서지도 나서지도 못하는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은 고작 두근거리는 가슴 속에 눈물을 삼키는 회한으로 표현된다. 그렇지만 그는 ‘새벽바람에 달음질 치는 동무’를 봄으로써 이러한 막연한 희망에서 구체적인 현실적 방법의 모색으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 동무는 아마도 남몰래 노동 운동을 하거나 지하 정치 운동을 하는 젊은이리라. 시적 자아는 드디어 ‘철벽을 깨뜨리고 새 빛을 실어오기’를 ‘가슴을 바쳐’ 기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의 이 작품은 ‘이 폐허에도 봄은 찾아 왔건만’의 표현에서 보듯 두보(杜甫)의 시 <춘망(春望)>의 모티프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시는 전반부의 봄을 맞는 비관적 정조에서 벗어나 주체의 현실적 자각을 획득함으로써, 현실을 뚜렷이 응시할 수 있는 비판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특히 마지막 연의 ‘그러나 나는’에서 보듯, 시상의 전환과 함께 분명하게 시적 자아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있는 점은 이러한 현실 인식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경향시의 대표적 특징인 것이다.
새 날의 기원
- 김해강
1
새해라, 첫 아침
동녘 한울엔 붉은 햇살이 뻗혀오르나이다
무릎꿇고 정성을 구을려 비옵는 마음 한껏 떨리옵니다
이 땅 겨레의 가슴에도
이 땅 겨레의 가슴에도
새로운 붉은 해가 돋아오르사이다
새로운 힘이 뛰고, 새로운 기쁨이 피어날
가장 경건한 아침이 열려지이다
2
해마다 첫새벽이 오면 비옵는 마음
이해라 다름이 잇사오리까마는
팔짚고 정성을 구을려 비옵는 마음 더욱 두근거리옵니다.
주먹을 놓고 맹서하오니
주먹을 놓고 맹서하오니
적은 일이옵든 큰일이옵든
하고 많은 가운데 한 가지일지라도
이 해에만은 뜻대로 일우어짐이 있어주소서
3
새해를 맞이하옵는 마음
가슴이라도 베여 정성을 다하고 싶으옵거든 ―
어깨라도 끊어 정성을 다하고 싶으옵거든 ―
오오 새 날이여!
이 땅에 열리소서. 힘차게 열리소서.
이 땅에 빛나소서. 아름다이 빛나소서.
-계유원단(癸酉元旦)에
(동아일보, 33.1.8)
<감상의 길잡이>
김해강의 1933년도 동아일보 신춘 문예 당선 작품이다. 이 시는 그 제목에서 보듯 새해를 맞는 소망을 기도체의 문장으로 담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적 화자는 ‘이 땅 겨레의 가슴에도’ ‘새로운 붉은 해가 돋아오르’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러한 기원은 해마다 비는 연례적인 행사이긴 하지만, 특히 이 해에 더욱 간절한 마음이 되는 것은 그만큼 시적 화자가 처한 현실이 어둡고 답답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1930년대 이후 더욱 악랄해진 일제의 폭압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데, 시인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의 애타는 염원을 ‘붉은 해’로 표상하고 있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이러한 염원을 그냥 엎드려 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담아 ‘주먹을 놓고 맹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가슴이라도 베여 정성을 다하고 싶’고,
‘어깨라도 끊어 정성을 다하고 싶’을 정도로 절대 절명의 소원으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시적 자아는 현실의 어둠과 답답함을 ‘붉은 해’가 힘차게 열고 빛나게 하기를 새해를 맞아 빌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새해 첫날은 사실 1년 365일의 모든 날을 의미하는 것일 테지만, 새해 첫날을 빌어, 시인이 평소 간직하고 있는 깊은 소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이러한 소망의 표현도 더이상 마음 놓고 하지 못하게 된 현실의 역설적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리라. 일제 치하의 암담한 현실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시인의 간절한 소망이 눈물겹도록 애처로울 뿐이다.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문학 예술」(1956.11) / (시집 김현승 시초, 1957)
<핵심 정리>
▶ 시작(詩作) 배경
가을의 쓸쓸함과 겸허함 속에 생의 가치를 추구하고 열망하는 자세를 통하여 내적 충실을 이루고자 하는 경건한 시정신.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지은이의 첫 시집 <김현승 시초>에 실려 있는 작품으로 삼라만상이 종말을 고하는 가을, 그 종말로 많은 깨달음을 얻는 계절이기도 한 가을을 맞이하여 내적 충실을 갈망하는 기도조의 시다. 그의 후기시의 주된 특징인 내면 지향적 경향, 특히 고독의 추구가 이 시의 바탕에 깔리어 초기의 주된 경향인 자연 친애 사상과 훌륭한 조화를 이루었다.
지은이의 종교적 기질이 어느 정도 나타나 있는 이 시에서 고독을 형상화한 시행을 찾아 보자. 제3연에서 구사한 도치법은 어떤 효과를 얻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바다’와 ‘골짜기’는 어떤 의미에서 선택되었는지 생각해 보자.
▶ 성격 : 종교적, 명상적, 상징적, 기구적
▶ 어조 : 가을의 계절감을 사랑과 명상, 기도로써 체험하는 겸허한 목소리.(기도조의 어조)
▶ 특징 : ① 기도 형식의 어법으로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냄.
② 형태상 제1연보다 재2연이, 제2연보다는 제3연이 1행씩 길어지는 점층적 구조
▶ 구성 : ① 기(제1연) : 기도에 대한 염원
② 서(제2연) : 사랑에 대한 염원
③ 결(제3연) : 고독에 대한 염원 ― *주제연
▶ 제재 : 가을의 기도
▶ 주제 : 가을의 고독과 기도를 통한 정신적 충만감.(경건한 삶에의 가치 추구)
▶ 시어의 상징 의미
* 가을 - 내적 충실을 기할 수 있는 시간
* 겸허한 모국어 - 영혼의 소리(기도)
* 오직 한 사람 - 신, 절대자
* 가장 아름다운 열매 - 가치있는 이상, 신의 축복, 사랑의 결실 등.
* 비옥한 시간 - 보람되고 알찬 가을의 시간
* 굽이치는 바다 - 고뇌와 수난의 인생길
* 백합의 골짜기 - 깨끗하고 찬란한 인생길
* 마른 나뭇가지 - 지극히 외로운 경지
* 까마귀 - 세상과 절연된 절대 고독의 경지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시인이 추구하고 있는 ‘절대 고독’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시어를 찾아 쓰라.
<모범답> ‘까마귀’
2. 다음은 이 시에 대한 작가 자신의 언급이다. ( ) 안에 적당한 말을 찾아 쓰라.
나의 고독은 절망적인 고독은 아니다. 이를테면, 부모 있는 고아와 같은 고독이라면 궤변일지 모르겠다. 또한, 나의 고독 중에는 구원을 바라며 신(神)에게 두 팔을 벌리는―( )와(과) 같은 고독도 있다. 아직까지는 나의 시에 있어선 단지 고독을 위한 고독, 절망을 위한 절망이고자 한다. |
<모범답> 마른 나뭇가지
3. 이 시에 나타난 ‘가을’은 어떤 계절인지 각 연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한 문장으로 설명해 보라.
<모범답> 가을은 영적(靈的) 충실을 기할 수 있는 계절(제1연)이며, 사랑을 예비하는 계절(제2연)이며, 고독의 계절(제3연)이기도 하다.
4. (1)㉠은 어떤 상황을 은유로 표현한 것인지 30자 내외로 쓰고, (2)‘바다’와 ‘골짜기’라는 시어가 어떤 의미의 비유로 선택되었을까를 설명해 보라.
<모범답> (1) 번뇌와 고난으로 얼룩진 삶과 순결하고 영적(靈的)인 삶의 세계
(2) 고뇌는 바다처럼 거칠고 넓으며, 아름답고 순수한 세계는 골짜기처럼 깊고 좁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감상의 길잡이>
3연이 각각 내용을 달리 하면서도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형성하였다.
제1연에서 ‘낙엽들이 지는 때’는 생의 종말을 뜻한다. 그 종말 앞에서 우리는 모든 가식을 다 벗어던지고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제2연의 ‘오직 한 사람’은 다른 의견도 있지만, ‘신(神)’ 또는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3연에는 이 시의 시상이 집중되어 있다. ‘굽이치는 바다’는 화자의 인생 행로일 것이다. 희로애락의 삶의 현장, 험난한 세파를 거쳐 그가 새로이 들어선 곳이 ‘백합의 골짜기’다. ‘백합’은 성서에서도 순결한 신앙 또는 신앙인으로 자주 비유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靈的) 환희의 세계에 다다른 상태가 ‘백합의 골짜기’다. 그는 이곳에 그냥 안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최후에 다다라 더는 나아갈 수 없는 ‘마른 나뭇가지’ 위에 자리잡고 있다.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는 시적 화자가 마지막으로 도달한 절대 고독의 경지, 고절한 단독자의 실존 심상으로 화자의 고독한 영혼의 모습이다.
이 시에서 가을은 내면의 충실을 기하는 시기로,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신(神)과의 만남을 가지는 계기로 다루어져 있다. 시인 자신도 단순한 서정 외에 좀더 깊은 생의 가치를 추구하고 싶어 이 시를 썼다고 한다.
눈물
- 金顯承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시집 김현승 시초, 1957)
<핵심 정리>
1. 詩作 배경
시인은 아들을 잃고 그 슬픔을 기독교 신앙으로 견디어 내면서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제망매가’에서 친족의 죽음이라는 비통한 체험을 종교적 깨달음으로 극복하고자 했듯이, 김현승 또한 슬픔과 고통의 극한에서 절대자를 향한 경건함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기독교적 시정신이 이룩한 높은 경지의 하나를 본다.
<김현승 시인의 말> 나는 내 가슴의 상처를 믿음으로 달래고, 그러한 심정으로 썼다. ‘인간이신 앞에 드릴 것이 있다면 그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변하기 쉬운 웃음이 아니다. 이 지상에서 오직 썩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 앞에서 흘리는 눈물뿐일 것이다.’ 라는 것이 이 시의 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는 눈물을 좋아하는 나의 타고난 기질에도 잘 맞는다. |
2. 詩想의 전개
① 작은 생명의 기원(순결한 생명인 눈물)(1연)
② 눈물의 순수성과 소망의 절실함 강조(2연)
③ 눈물의 아름다움과 가치(3연)
④ 소망의 최고조(4연)
⑤ 눈물의 참뜻(즐거움 뒤에 오는 눈물의 의미)(5,6연)
3. 성격 : 상징적, 종교적, 서정적, 기구적
4. 심상 : 묘사, 비유, 상징
5. 어조 : 경건한 경어체와 기원조
6. 제재 : 눈물(눈물의 의미)
7. 주제 :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영혼의 기원(순결한 삶의 추구)
※ 시구 풀이
* 나의 웃음 : 삶의 환희
* 나의 눈물 : 삶의 고뇌와 시련을 통하여 도달된 절대 순수의 세계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사랑하던 어린 아들을 잃고 그 슬품을 기독교 신앙으로 승화시켜 쓴 작품이다. 비애의 감정이 지나치면 사람들은 그냥 거기에 주저앉아 절망하기 쉽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는 ‘눈물’을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라 했다. 새로운 생명을 싹틔울 씨앗을 연상시키는 이 구절은 후반부의 ‘열매’를 예비하고 있다.
화자는 「슬픔을 인간의 영혼을 정화하고 높고 맑은 세계를 창조케 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또 화자는 종교적 경지에서, ‘웃음’이 잠시 피었다 지는 ‘꽃’이라면, ‘눈물’은 생명을 거듭나게 하는 신의 은총과 같은 ‘열매’라고 여김으로써 슬픔을 극복해 내고 있다.
나무 ………… 꽃 ←――――→ 열매
│ (현상적) (근원적)
│ │ │
나 ………… 웃음 ←―――→ 눈물
(외면적) (내면적)
(변하기 쉬움) (변하지 않음)
<연구 문제>
1. ‘눈물’을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라고 표현한 데는 다음에 나올 어떤 시어를 예비하는 의미가 있다. 그것은 어떤 시어인가? ☞ 열매
2. 이 시에서 단정적 어조는 화자의 태도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50자 내외로 쓰라.
☞ 슬픔을 신의 섭리로 알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가 이 시의 어조를 단정적이게 한다.
3. 이 시에서 제재를 구체적으로 상징한 시어를 찾아 쓰고, 그 의미를 15자 정도로 쓰라.
☞ 열매 ― 순수하고 진실한 내면적 가치
4. 다음에 예시한 시(정지용의 「유리창Ⅰ」)와 이 시는 창작 동기가 비슷하고, 시의 바탕에 흐르는 정서도 일치한다. 두 작품의 화자는 자신들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60자 정도로 설명해 보아라.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새처럼 날아 갔구나 ! |
☞ 「눈물」은 화자의 슬픈 감정을 신에 대한 신앙으로 극복하고 있으며, 「유리창Ⅰ」은 슬픈 감정을 엄격히 절제하고 있다.
플라타너스
- 김현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이제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오늘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플라타너스
나는 너를 지켜 오직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문예, 1953.6)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자연을 소재로 하여 감정 이입의 기법으로 정서를 표출해 온 우리 시가의 전통을 계승했다. 플라타너스를 단순한 식물로서 바라보지 않고, 인간과 같은 생의 반려로 형상화하였다.
이 시의 화자는 플라타너스를 통해 자신의 어떤 생각과 정서를 함께 나누고자 했는가를 음미하자.
▶ 성격 : 서정적
▶ 어조 : 고독하면서도 친근하고 맑은 어조
▶ 심상 : 서술적, 감각적 심상
▶ 표현 : 의인법, 감정 이입법
▶ 구성 : ① 파아란 꿈을 가진 플라타너스(제1연)
② 플라타너스의 넉넉한 사랑(제2연)
③ 나의 반려자인 플라타너스(제3연)
④ 플라타너스에게 영혼을 불어넣어 주고 싶은 심정(제4연)
⑤ 영원한 반려자가 되기를 염원함(제5연)
▶ 제재 : 플라타너스의 자태
▶ 주제 : 고독한 영혼의 반려를 염원함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화자의 자연에 대한 태도를 50자 내외로 쓰라.
<모범답> 자연을 의인화하여 하나의 인격체처럼 대하는 데서 시인의 자연 친화적 태도를 알 수 있다.
2. 이 시의 제재인 플라타너스가 상징하는 의미를 두 어절로 쓰라. <모범답> 영혼의 반려자
3. 이 시에서 특정 대상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는 속성으로서의 플라타너스를 나타낸 두 어절의 말을 찾아 쓰라. <모범답> 그늘을 늘인다.
4. 제1-5연 중, 종교적 감수성이 가장 절실하게 표현된 연은?
<모범답> 제5연
<감상의 길잡이>
제1연 : 사람은 꿈을 가진 존재이다. 화자는 플라타너스에게 너도 꿈을 아느냐고 물어 본다. 플라타너스는 벌써 그의 머리를 파아란 하늘에 두고 있다고 말 없는 말을 하는 듯하다. 플라타너스 역시 푸른 꿈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제2연 : 사람은 사모할 줄을 안다. 플라타너스는 사람이 아닌지라 누군가를 사모할 줄 모르지만 제 스스로 그늘을 만들어 누구든 쉬게 해 준다. 이것이야말로 특정한 대상을 향한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일 터이다.
제3연 : 플라타너스는 외롭게 먼 길을 걷는 화자에게 유일한 반려자요, 벗이다. 고독을 위로하며 그 외로운 길을 동행하여 준다.
제4연 : 화자는 이 고마운 벗에게 영혼을 불어넣어 주고 싶으나, 나무와 사람은 신과 같은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니지 못했으므로 그러한 소망을 실현할 수는 없다.
제5연 : 시인과 플라타너스는 지상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 이웃하며 지켜 보는 영원한 반려자가 되고자 한다.
이 시는 플라타너스를 의인화하여 꿈과 덕성을 지닌 존재로 예찬하고 그러한 자세로 삶의 길을 함께 가고자 하는 뜻을 노래한 시다. 나무와 사람은 신처럼 완벽한 존재가 아니지만, 지상의 삶 속에서 서로의 고독한 영혼을 달래며 겸허하게 살아가자는 주제가 담겨 있다.
창(窓)
- 김현승
창을 사랑하는 것은,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부시지 않아 좋다.
창을 잃으면
창공으로 나아가는 해협을 잃고,
명랑은 우리게
오늘의 뉴우스다.
창을 닦는 시간은
또 노래도 부를 수 있는 시간
별들은 12월의 머나먼 타국이라고---.
창을 맑고 깨끗이 지킴으로
눈들을 착하게 뜨는 버릇을 기르고,
맑은 눈은 우리들
내일을 기다리는
빛나는 마음이게---.
---첫시집「김현승 시초(金顯承詩抄)」(1957)---
< 핵심 정리 >
1. 시작(詩作) 배경
이 시는 창을 통하여 일상의 정서적 감흥을 노래하고 있다. 시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창처럼 맑고 깨끗하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명랑하고 건강하며 희망에 빛나고 착하기까지 한 분위기를 지닌다. 이 시에서 ‘창’은 창공으로 나아가는 안내자며 통로로, 노래부를 수 있는 대상으로, 세상을 착하게 내다볼 수 있는 ‘마음의 눈’으로, 내일에의 희망을 지닐 수 있는 객관적 상관물로서의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즉 이 시의 ‘창’은 정신적으로 갈망하는 희망과 고절(高節)의 세계를 지향하는 의지를 시화한 것이다.
2. 시상의 전개
* 제1연 : 창을 사랑한다는 것은 눈부시지 않아 좋다.
* 제2연 : 마음의 창을 잃으면 이상 성취의 길을 잃음.
* 제3연 : 명랑은 가장 새롭고 중요한 소식
* 제4연 : 명랑한 사람은 인생의 여유가 있다.
* 제5연 : 명랑한 마음이 눈에 비치도록 창을 깨끗이 닦자.
* 제6연 : 맑은 눈은 내일의 역사를 기대하는 마음이게 하자.
3. 제재 : 창(窓) - 마음의 창
4. 주제 : 창을 통해 보는 밝은 마음의 눈
절대 고독(絶對孤獨)
- 김현승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나의 시(詩)는.
(시집 절대 고독, 1970)
<핵심 정리>
1. 시작(詩作) 배경
‘孤獨’은 인간에게만 있는 인간의 특권이다. 이 시에서의 고독은 절망적인 고독이 아니다. 이를테면 ‘부모 있는 고아와 같은 고독’이며 ‘고독을 표현하는 것은 나에게는 가장 즐거운 시예술의 활동이며, 윤리적 차원에서 참되고 굳세고자 함이다.’라고 지은이는 말했다. 지은이가 부모를 든 것은 기독교를 의식한 것 같다. 아는 바와 같이 지은이는 서구적이며 기독교적인 시인이다. 그런데 고독을 추구한다는 것은 矛盾이다. 지은이는 신앙과는 별개로 노경(老境)의 경지에서 인생을 재발견하려는 집요한 추구가 ‘고독’으로 집약된 것으로 보인다.
2. 시상의 전개
* 제1연 : 본질 발견과 새로운 탄생의 ‘절대 고독’의 상태
* 제2연 : 원숙한 경지에서의 자아의 재발견
* 제3연 : 절대 고독에 다다른 담담한 심경
* 제4연 : 언어의 허망함 피력
* 제5연 : 시와 인생이 완성되는 극치의 세계
3. 주제 : 영원한 세계에서의 새로운 자아 발견
가을
- 김현승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깍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寶石)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첫시집 「김현승 시초」(1957)---
<핵심 정리>
▶ 시작(詩作) 배경
이 작품은 봄과 가을이 주는 서로 다른 정서, 즉 봄의 화사하고, 화려하고, 뜨겁고, 순간적인 이미지와 가을의 차갑고, 과묵하고, 사려 깊은 이미지를 대비시켜 삶의 자세를 드러내고 있다. 또 시인 자신의 내면 세계를 생명의 깊은 곳에 닿고자 하는 자세가 드러나 있다.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봄과 가을의 대비를 통해서 시상이 전개되고 있으며, 그것은 대조적 진술의 대비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양하고 아름다운 이미지의 대비를 통해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아름답고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서 추상적인 시간 의식을 구체화함으로써 대비 방식이 지니는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시적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고 있다.
▶ 성격 : 대조적, 대비적, 주지적
▶ 어조 : 진정하고 영원한 세계를 갈구하는 자세
▶ 특징 : 관념적, 추상적 시간 의식을 구체화시킴.
▶ 시상 전개
* 형식상의 시상 전개
① 대지에서 솟아오르는 봄의 기운(제1연)
② 푸른 하늘과 함께 오는 가을(제2연)
③ 봄의 화려함과 생각을 일깨워 주는 가을(제3연)
④ 봄의 화사함과 가을의 침묵(제4연)
⑤ 봄의 가벼움과 가을의 사색(제5연)
* 내용상의 시상 전개
① 기(제1연) : 봄의 정서(←땅)
② 서(제2연) : 가을의 정서(←하늘)
③ 결(제3,4,5연) : 봄과 가을의 정서 대비
(봄-화려․맹목․화사, 가을-사색․묵묵함․명징)
▶ 제재 : 가을
▶ 주제 : 가을이 주는 깊이 있고 그윽한 느낌.(정신이 갈구하는 영원한 세계에의 소망)
▶ 시어의 상징 의미
* 제3연 - 생명을 만드는 화려하고 격정적인 봄과 달리 가을은 사색을 통하여 삶의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보석-충실의 이미지)
* 노래를 고르더니 -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게 하더니
* 언어의 뼈마디 - 삶의 본질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봄’과 ‘가을’은 어떻게 대조되고 있는지 한 문장으로 설명하라.
<모범답> 봄이 화려함, 화사함, 뜨거움, 순간적임에 비하여 가을은 과묵함, 차가움, 사색적이다.
2. 이 시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 즉 가장 본질이 되는 것을 나타낸 시구를 찾아 쓰라.
<모범답> ‘언어의 뼈마디’
3. 이 시는 대조적 의미를 반복함으로써 다소 도식적, 기계적 느낌을 주기는 하나 관념적 추상성에 떨어지지 않도록 수사적인 장치를 마련했다. 그 수사적인 장치에 대해 40자 내외로 설명해 보라.
<모범답>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시간 의식을 구체화하였다.
4. ㉠과 의미가 서로 통하는 세 어절의 말을 찾아 쓰라.
<모범답> ‘입술을 다문 가을’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봄과 가을의 다양한 이미지의 대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제1연에서 봄을 비유하고 있는 것은 ‘숨결’이다. 숨결은 얼어 붙은 채 잠들어 있는 공간에 따뜻함을 불어넣어 주는 기운을 뜻한다.
제2연의 ‘차가운 물결’은 봄의 ‘숨결’과 대조를 이루는 이미지로서 대지를 다시 엄동 설한의 시간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을 뜻하며, 화자의 지향성이 지상에서 천상으로, 육체에서 정신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제3연은 별의 이미지다. 봄이 꽃으로써 빛날 때라면, 가을은 하늘의 별을 깎고 다듬어 마음에 ‘보석’을 만드는 때이다. 즉, 봄이 육체를 성장시키는 때라면, 가을은 사색 속에 영혼을 성숙시키는 때를 의미하는 것이다.
제4연의 ‘눈동자 먼 봄’이란 봄이 사람들을 지상적이고 육체적인 것에 쉽사리 눈 멀게 한다는 뜻이고, ‘입술을 다문 가을’은 자아 성숙을 위해 스스로 침묵 속에 깃드는 것을 의미한다.
제5연에서 봄이 언어로 불려진 노래라면, 각성의 계절인 가을은 노래에서 골라 낸 ‘언어의 뼈마디’에 해당된다. ‘언어의 뼈마디’는 보석처럼 단단한 사색의 핵심을 의미한다.
전체적으로 ‘숨결’, ‘꽃잎’, ‘살’, ‘노래’ 등으로 이미지화된 봄은 공간적으로 ‘땅’에 해당하는 것으로 소멸을 속성으로 하며, ‘차가운 물결’, ‘별’, ‘보석’ 등으로 이미지화된 가을은 공간적으로 ‘하늘’에 해당하는 것으로 영원성을 그 속성으로 한다.
견고(堅固)한 고독
- 김현승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모든 신(神)들의 거대(巨大)한 정의(正義)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 주며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堅固)한 ㉣칼날 ―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懷柔)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 악기(木管樂器)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쌉쓸한 ㉤자양(滋養)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현대문학 130호, 1965.10)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제목부터가 비유로 되어 있고, 전편이 의인화되어 있다. 이 시에서 고독의 관념을 매개하고 있는 어휘들의 각 연에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를 살펴본다. ‘견고한 고독’은 최종적으로 ‘굳은 열매’에 비유되어 있고, 흰 얼굴, 손발, 창끝, 칼날 등의 이미지들은 그 고독의 열매를 지탱하고 있는 나뭇가지 곧 화자 자신임을 알 수 있다.
▶ 성격 : 상징적, 주지적, 비유적
▶ 표현 : 전체적으로 비유화 또는 의인화 되어 있다.
▶ 구성 : ① 고독의 형상과 화자의 자세(제1,2연)
② 화자의 행동 양식과 시련의 암시(제3-5연)
③ 고독 견지와 삶을 윤택하게 함(제6,7연)
▶ 제재 : 고독
▶ 주제 : 절대 고독의 추구
<연구 문제>
1. (1)이 시의 수사적 특징을 한 단어로 쓰고, (2)최종적으로 고독을 무엇에 비유하였는지 찾아 쓰라.
<모범답> (1) 의인화(2) 열매
2. 제1연이 고독을 형상화한 것이라면, 제2연은 무엇을 형상화한 것인가?
<모범답> 화자의 굳건한 정신 자세
3. 화자는 결국 자신을 무엇에 비유하고 있는가?
<모범답> 고독이라는 열매를 지탱하는 나뭇가지
4. Ⓐ의 표현과 동일한 의미로 쓰인, 연속된 두 시행을 찾아 쓰라.
<모범답>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에도 / 더 휘지 않는
5. ㉠~㉤ 중, 상징하는 의미가 다른 것은?
<모범답> ⑤
① ㉠ ② ㉡ ③ ㉢ ④ ㉣ ⑤ ㉤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7연이 각각 매개어가 들어 있는 의인화된 시로서 ‘얼굴’, ‘손발’, ‘창끝’, ‘떡’, ‘칼날’,과 ‘피와 살’, ‘열매’, ‘생명의 맛’ 등이 원관념인 고독의 매개어 구실을 하고 있다. 화자의 고독이 하나의 열매에 비유될 수 있다면, 그 자신은 그 열매에 자양(滋養)을 바치느라고 마를 대로 마른 나뭇가지일 것이다.
제1연의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 단단하게 마른 / 흰 얼굴’이 고독의 형상이라면,
제2연의 ‘그늘에 빚지지 않고 /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 단 하나의 손발’은 그 고독의 열매를 지탱하려는 나뭇가지, 즉 화자의 정신 자세로 이해된다. 고독의 열매에 자양분을 주고 그것을 가꾸기 위해서는 ‘그늘’과 ‘햇볕’의 어느 한 편으로 기울지 않고 자기의 정신 영역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 화자의 생각이다. 그것은 제6연에서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에도 / 더 휘지 않는’ 굳굳한 정신 자세로 나타난다.
제3,4연은 신과 인간 사이에 있는 화자의 행동 양식을 보여 준다. 신의 거대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굶주리고 있다. 그래서 그는 신의 정의 앞에 ‘창끝’(단 하나의 손발=나뭇가지=곧은 정신 자세)으로 거슬리는 한편 굶주린 사람들에겐 ‘마른 떡’(聖體)을 제 살과 같이 떼어 준다. 이것은 신의 전면적 부정이 아니라, 있어야 할 정의의 신에 대한 강력한 긍정이다.
제5,6,7연은 신과 인간의 합일의 경지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시련을 암시하며 눈물과 견고한 칼날과 피와 살― 이러한 육체적, 정신적 수련이 ‘쌉쓸한 자양’이 되어 스며 있는 고독의 ‘열매’는 그가 혼신의 노력 끝에 이룩한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일 것이다.
파도
- 김현승
아, 여기 누가
술 위에 술을 부었나.
이빨로 깨무는
흰 거품 부글부글 넘치는
춤추는 땅 ― 바다의 글라스여.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언어는 선박처럼 출렁이면서
생각에 꿈틀거리는 배암의 잔등으로부터
영원히 잠들 수 없는,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아, 여기 누가
성(性)보다 깨끗한 짐승들을 몰고 오나.
저무는 도시와,
병든 땅엔
머언 수평선을 그어 두고
오오오오 기쁨에 사나운 짐승들을
누가 이리로 몰고 오나.
아, 여기 누가
죽음 위에 우리의 꽃들을 피게 하나.
얼음과 불꽃 사이
영원과 깜짝할 사이
죽음의 깊은 이랑과 이랑을 따라
물에 젖은 라이락의 향기
저 파도의 꽃떨기를 7월의 한 때
누가 피게 하나.
(현대문학 154호, 1967.10)
<감상의 길잡이>
김현승의 시가 갖는 특징은 무엇보다도 관념적인 시적 대상까지도 뚜렷한 이미지로 포착하여 명징하게 드러내는 뛰어난 형상력이다. 이는 사물에 감추어져 있는 인간적 관념을 날카롭게 추출해 내는 감성적 능력과 상통하는 것으로, 그의 뛰어난 직관적 투시력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모더니스트적 면모를 가지고 있는 시인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시는 병약한 문명과 결별하고 원초적이고 신화적인 새로운 충동에 대한 추구를 보여 주는 작품으로, 표현면에서부터 그와 같은 특징을 손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 시가 전해 주는 감각은 매우 신선한 것으로 몇 개의 형상을 떠올려 준다. 1연에서는 파도를 술 위에 부은 술에, 파도의 흰 거품을 술의 거품에, 출렁이는 바다를 춤추는 땅 또는 술을 담은 잔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2연에서는 바다를 가슴에 비유하고 있으며, 가슴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뱀의 잔등처럼 꿈틀거리는 해면(海面)에, 언어를 출렁이는 선박에 비유하고 있다. 3연에서는 병약한 도시 문명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철책인 듯 수평선을 그어 놓은 파도를 원시적 성욕만큼 순수하고 생명력 넘치는 짐승에 비유하고 있다. 4연에서는 죽음을 표상하는 깊은 물이랑들과 이웃하며 솟아오르는 파도의 물거품을 라이락 꽃에 비유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각 연들의 중심 이미지인 ‘술’․‘가슴’․‘짐승’․‘꽃’ 등은 하나의 논리 속에 통합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맨처음 제시되어 있는 ‘술’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그 실마리가 풀릴 수 있다. 술은 머리, 즉 이성적인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 즉 감성적인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술’과 ‘가슴’은 술에 의해서 유발되는 감정의 흥분으로 그 연관성이 맺어지게 된다. ‘짐승’은 ‘기쁨에 사나운 짐승’, 즉 광분적인 상태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술에 의해 유발된 감정의 흥분이 빚어 낸 충동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꽃’은 그러한 충동이 유발하는 새로운 세계, 즉 순수한 원시적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술’․‘가슴’․‘짐승’의 상호 연쇄적인 작용에 의해 ‘꽃’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시집 절대 고독, 1970)
<감상의 길잡이>
아버지의 사랑과 외로움을 담담한 어조로 노래하고 있는 이 시는 가족 간의 사랑과 희생이라는 평범한 삶의 진실을 평이한 시어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친근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어버이의 사랑과 희생을 노래하고 있는 우리 시가들이 대부분 어머니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는 데 비해 이 시는 아버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집과 같이 거룩한 존재이다. 집이 있기에 사람들은 그 곳에 주소를 두고, 이름을 적을 뿐 아니라,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를 이루어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집은 언제나 한 곳에 우뚝 서서 자리를 지킨 채 말이 없다. 집이 비바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처럼 아버지도 항상 말없이 사랑과 근심으로 자식들을 돌보고 앞날에 대해 걱정한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고독한 존재이다. 식구들을 위한 매일의 수고와 삶이라는 무거운 숙제를 풀어야 하는 외로움으로 인해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린다. 아버지는 가족들 앞에서 겉으로는 태연해 하거나 자신만만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허무감과 자식들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는 존재이다. 단순히 아버지로서의 권위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 가장으로서 모든 가족들의 버팀목이 되어야 하는 아버지는 잠시도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힘겨운 삶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에 속으로만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아버지의 깊은 외로움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 곧 자식들의 올곧은 성장과 순수뿐이다. 비록 세파에 시달리며 힘든 삶을 사는 아버지이지만, 자신의 소망대로 자식들이 순수하고 올바르게 자라나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 모든 고독과 노고를 깨끗이 보상받게 되는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작품 활동을 한 시인의 인생관을 내포하고 있는 이 시는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 그리고 고독을 노래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모든 인간들이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서 인간 본연의 순수함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는 함축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겠다. 김현승은 남달리 고독의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이를 끈질기게 추구한 시인으로, 이 작품 역시 ‘아버지의 고독’이라는 제목을 붙여도 좋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김지하論
― `1974년 1월’을 中心으로 ―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다시 쳐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김지하, `1974년 1월' 앞부분>
1974년 1월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얘기는 72년 10월1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선포된 유신은 박정희 개인에게는 영구집권을 위한 법적 보장이 되었겠지만, 국민들에게 그것은 정치적 질곡의 심화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유신체제에 대한 반발은 73년 가을부터 본격화했으며 그해 12월24일 발족된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는 그 집약적 표현이었다. 74년 1월8일 오후 5시를 기해 발효된 긴급조치 제1호는 이같은 유신반대 움직임에 쐐기를 박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대한민국 헌법' 그러니까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그 개정을 제안하는 행위, 나아가 그같은 비판과 제안을 보도하는 등의 행위까지를 중범죄로 취급해 법관의 영장 없이 구속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한 긴급조치는 공포통치 시대의 막을 열었다.
김지하(55)씨의 시 `1974년 1월'은 긴급조치의 발동과 더불어 잠적한 시인이 강릉에 도망가 있으면서 구상한 것이다.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 조각 속에서/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의/겁먹은 얼굴/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설악산 백담사 근처 암자를 거쳐 강릉으로 내려온 시인은 옥천동 오거리의 `경북집'이라는 옥호를 단 집에서 오징어회에 소주를 마셨다. 방광이 부풀어 변소에 다녀오던 시인은 문득 벽에 걸린 깨진 거울을 들여다본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눈에는 핏발이 선 초췌한 몰골의 사내가 마주 보았다. 섬뜩했다.
거울에 비친 시인의 모습은 양면적이다. 그는 시대와 대결하는 투사인 동시에 지치고 나약한 여느 필부(匹夫)의 면모도 내비친다. `불퇴진의 민주투사 김지하'의 신화는 시인 자신에 의해 벗겨진다. 겁이 없어서 목숨을 내놓고 싸운 것은 아니었다. 겁내는 자신을 채찍질하고 추스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 것이라는 시인의 말은 그의 싸움을 오히려 더욱 숭고하고 값진 것으로 만든다.
시대와 불화한 데 따른 시인의 수난과 그에 대한 문학적 대응은 대체로 박정희의 통치기와 겹친다. 그는 64년 6월3일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에 가담해 처음으로 4개월간의 감옥 체험을 한 이래 60, 70년대를 거치면서 박정희 정권을 상대로 한 싸움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70년대란 박정희와 김지하의 대결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물론, 70년대가유독 문인들의 참여와 행동이 두드러진 시대이긴 했지만, 지하는 단연 그 뜨거운 상징이었다.
황톳길에 선연한/핏자욱 핏자욱 따라/나는 간다 애비야/네가 죽었고/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두 손엔 철삿줄/뜨거운 해가/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나는 간다 애비야/네가 죽은 곳/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황톳길' 첫연).
신새벽 뒷골목에/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오직 한 가닥 있어/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타는 목마름으로' 첫연).
`황톳길' 등의 초기시에서 유혈과 죽음의 역사가 현재에 대해 지니는 의미를 전통 율격에 얹어 노래했던 시인은 싸움의 절정기에 쓴 `타는 목마름으로'와 같은 시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구를 각혈하듯 내뱉는다. 두 시 모두에서 핵심적인 어휘로 등장하는 동사 `타다'는 그의 시세계의 강렬함을 말해줌이다.
현실이 어둡고 싸움이 버겁기로서니 마냥 도망만 다닐 수는 없는 법. 역시 강릉에서 쓴 시 `바다에서'는 수난과 고통의 현장으로 회귀하겠다는 시인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한치뿐인 땅/한치도 못될 이 가난한 여미에 묶여/돌아가겠다 벗들/굵은 손목 저 아픈 노동으로 패인 주름살/사슬이 아닌 사슬이 아닌/너희들의 얼굴로 아픔 속으로/돌아가겠다 벗들….
그래서 돌아왔다. 장남의 출생도 지켜보지 못하고 도피행각을 벌이던 시인은 대흑산도에서 체포되고, 민청학련사건 관련 혐의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현 정권은 무너지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그 재판정에서의 진술이었다.
나중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그를 구출하기 위한 운동이 일본과 미국, 유럽 등 해외에서까지 불거져나온 탓인지, 그는 구속된 지 10개월 만인 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난다.종신형을 받았는데 벌써 나오다니 세월이 미쳤든지 내가 미쳤든지, 아니면 둘 다 미쳤든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 그의 출옥 일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풀려난 것이 아니었다. 광고탄압이 한창이던 <동아일보>에 연재한 `고행―1974'에서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밝힌 혐의로 3월13일 다시 체포되고 형집행정지처분이 취소된다. 그 사이에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집행이 있었다.
김지하씨는 여전히 옥 안에 있으면서 박정희의 암살 소식을 듣는다. 그날은 옥 안에서 시작한 참선이 꼭 1백일째를 맞은 날이었다.
참선 덕분에 퍽 가라앉은 상태에서 방송을 들었다. 처음 떠오른 생각은 무상하다는 것이었다. 저절로 혼잣말이 나왔다. `잘 가시오. 나도 뒤따라 가리다.'
`투사 김지하'가 `생명사상가'로 변신한 것이 박정희의 죽음을 전후한 무렵이었다. 옥방 창틀에 싹을 틔운 민들레를 보고서 생명의 신비와 소중함에 눈을 떴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시인 자신은 단절적이지 않고 연속적인 흐름이라고 설명하지만, 투사 김지하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이들에게 그같은 변모는 당혹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저항에서 생명으로'라고 요약할 수 있을 그 변모가 표나게 드러난 계기는 지난 91년의 이른바 `분신정국'이었다. 젊은이들의 잇따른 분신을 거칠게 질타한 시인의 글이 어떤 신문에 실렸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지하의 변절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생명운동가 김지하와, 투사 김지하를 사랑했던 이들 사이의 오해와 갈등은 양쪽 모두를 상처입혔다. 그 어느쪽이 의도한 바도 아니었다. 그때로부터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지금 한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시인의 의도가 생때 같은 목숨들의 스러짐에 대한 안타까움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 무렵 시인이 발표한 시 `척분(滌焚)'을 다시 읽어보자.
스물이면/혹/나 또한 잘못 갔으리/가 뉘우쳤으리/품안에 와 있으라/옛 휘파람 불어주리니/모란 위 사경(四更)/첫이슬 받으라/수이/삼도천(三途川) 건너라.
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 1982)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서 상징적인 존재인 김지하(본명:김영일) 시인은 1970년대를 온통 감옥에서 보내며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품고 절규하듯 살아왔다. 군사 정권 아래서 압살당해 온 민주주의를 ‘너’라고 지칭하며 애타게 부르고 있다. 프랑스 시인 엘뤼아르의 자유라는 시의 어조가 느껴진다.
▶ 성격 : 비판적, 저항적
▶ 표현 : 반복, 점층, 상징
▶ 특징 : 민주주의를 ‘너’로 의인화시킴
▶ 구성 : ①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으로 민주주의를 써봄.(제1연)
② 떨리는 손,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민주주의를 써봄.(제2연)
③ 민주주의를 갈망하며 기다림.(제3연)
▶ 제재 : 민주주의에 대한 목마름
▶ 주제 :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과 애타는 기다림
<연구 문제>
1. ㉠의 시간적 의미를 40자 내외로 쓰라.
<모범답> 화자가 기다리는 민주주의의 새 아침이 멀지 않았다는 신념의 표현이다.
2. 시인의 현실적 고뇌 가운데서도 끝내 포기할 수 없는 꿈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화 하고 있는가? 한 문장으로 쓰되 제2연을 참고하여 쓰라.
<모범답>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나무 판자에 백묵으로 쓴다.
3. ㉡의 표현을 사용한 까닭을 시대 상황과 관련하여 100자 정도로 설명하라.
<모범답> 민주주의라는 말은 지배자들의 눈길을 피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지만, 그럴수록 민주주의는 눈부신 보석처럼 어둠 속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감상의 길잡이>
김지하 시인은 ‘6·3 사태’(1964) 당시 대일(對日) 굴욕 외교 반대 투쟁에 참가한 이후 1970년대를 온통 도피와 체포와 투옥을 거듭하며 살아왔다. 오로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만세’를 부를 날을 애타게 염원하며 절규하듯 살아왔다.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엔 많은 말이나 수사보다도 그의 양심 선언의 한 구절을 읽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 같다. 1975년 2월 <동아일보>에 발표된 「고행 1974」와 인혁당 사건에 관한 내외 신문 기자 회견 내용이 문제가 되어 재수감되었을 때, 정부에서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세웠는데, 그 때 김지하는 방대한 분량의 양심 선언을 하게 된다. 다음은 그 중 일부이다.
“내가 요구하고 내가 쟁취하려고 싸우는 것은 철저한 민주주의, 철저한 말의 자유―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이다. 내가 카톨릭 신자이며, 억압받는 한국 민중의 하나이며, 특권, 부패, 독재 권력을 철저히 증오하는 한 젊은이라는 사실 이외에 나 자신을 굳이 무슨 주의자로 규정하려고 한다면, 나는 이 대답밖에 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백성을 사랑하는 위정자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피와 시민의 칼을 두려워하는 권력을 바란다.”
서울 길
- 김지하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 길
몸 팔러 간다
언제야 돌아오리란
언제야 웃음으로 화안히
꽃피어 돌아오리란
댕기 풀 안쓰러운 약속도 없이
간다
울지 마라 간다
모질고 모진 세상에 살아도
분꽃이 잊힐까 밀 냄새가 잊힐까
사뭇사뭇 못 잊을 것을
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올 것을
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것을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하늘도 시름겨운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 길
몸 팔러 간다
(시집 황토, 1970)
<감상의 길잡이>
1960년대 이후 우리 농촌은 왜곡된 경제화 정책과 농촌이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으로 말미암아 서서히 쇠퇴 일로를 걷기 시작하였다. 그로 인한 농민들의 대규모 이농(離農) 현상과 농촌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하게 되었다.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도시로 몰려간 농민들은 단순히 노동력만을 파는 것을 지나 여인들은 몸을 팔게 되었음은 물론, 결국에는 농촌의 삶 또는 그들의 정신마저 도시에 팔게 되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이농 현상은 단순히 농촌만의 문제가 아닌, 전 국민적 관심사로 대두된 동시에 한국인 모두가 고향을 잃어버리게 됨으로써 심각한 고향 상실 의식을 갖게 되었다. 삶의 원형적이고 화해로운 질서로서의 고향 공간은 사라져 버린 대신, 시멘트로 대표되는 획일적이고 비인간적인 도시 문화만이 이 땅에 남게 되었다.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이농 현상과 그로 인한 농촌 문화의 붕괴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서글픔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시의 표현은 ‘간다 / 울지 마라 간다’는 구절의 세 번에 걸친 반복에 초점이 놓여 있다. 이 구절이 작품의 서두, 중간, 결말 부분에 놓여 시상을 개폐시킴은 물론 시상을 응축시키는 기능도 갖고 있다. 몸을 팔기 위해 서울로 가야만 한다는 표현은 그 결연한 의지만큼이나 상대적으로 서글프고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냄으로써 비장한 느낌을 전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의 묘미는 이러한 단호함과 비장함이 한데 맞물려서 서로 밀고 당기는 것에서 시적 긴장이 생겨나는 것이며, 그 긴장의 구도가 세 번씩이나 반복되며 주제를 강조시키고 있다.
한편, 화자는 서울에서 일용 노동자로서 힘겨운 삶을 살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몸 팔러 가’는 상황으로 표현함으로써 더욱 비감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한편, 수출 주도형의 경제 구조 지탱을 위한 저임금과, 농민들에 대한 정부의 저곡가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언제 돌아온다는 약속도 할 수 없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결혼을 맹세할 수도 없이 막막한 심정으로 고향을 떠나 ‘모질고 모진’ 서울로 향해 가는 무거운 발걸음이지만, 결코 고향의 ‘분꽃’과 ‘밀냄새’는 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고백 속에는 화자의 회한과 분노가 짙게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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