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Hellenism)-그리스-인성(人性), 헤브라이즘 (Hebraism)-히브리-신성(神性)
ⓛ 헬레니즘(Hellenism)
㈀ 발생지 : 그리스
㈁ 특징 : 인성(人性)을 중시하고, 감성, 지성, 현세, 자아적이다.
㈂ 영향 : 고전주의, 자연주의 등으로 전개된다.
② 헤브라이즘(Hebraism)
㈀ 발생지 : 히브리
㈁ 특징 : 신성(神性)을 중시하고, 덕성, 내세, 신성적이다.
㈂ 영향 : 낭만주의, 상징주의 등으로 전개된다.
* 문예 사조의 계보(系譜)
1. 헬레니즘→고전주의(17C)→신고전주의(주지주의)→사실주의, 자연주의(19C)→(심리주의)
2. 헤브라이즘→낭만주의(18C)→상징주의→유미주의, 실존주의, 표현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비교
헬레니즘(Hellenism) | 헤브라이즘 Hebraism |
인간중심적 - 우주 생명의 궁극적 패러다임을 하늘과 땅으로 봄 - 사람이 사람의 환경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 |
신중심적 - 인격적, 도덕적으로 완전한 존재인 신에게 복종 |
객관적 - 우주의 원리를 형식화 - 우주의 의문점에 관한 명백한 답 요구 |
주관적, 직관적 - 신과의 영적 교감 중시 |
외향적 | 내면적, 신비적 - 명상과 묵상을 중시함 |
현세 지향적 | 내세적 |
이성적, 지성적 - 지식의 추구 - 우주의 본질과 인간 행위에 대한 지적 탐구 |
감성적 - 최종적인 답은 하느님의 수중에 있으므로 설명이 불필요함 - 가슴으로 신의 음성에 귀 기울임 |
실용적 - 사회적으로 유익한 행동 함양 - 민주주의 |
신을 즐겁게 하는 제례의식의 다양화 - 강한 지도자에 의한 선민사상 - 권위적 인도자가 요구됨 |
형식화, 세련된 예술 - 조형미술 추구(조각, 드라마) - 논리적 사변, 정연한 상상력 - 정제된 언어가 요구됨 |
무형식, 낭만적 예술 - 언어 예술의 발전 - 신비로운 황홀감, 조자연적 장엄함 - 감동적 |
낙관주의 | 비관주의 |
개성존중 지혜와 기술 존중 |
집단주의 창조주의 경배와 순종 |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비교
서양 윤리 사상의 문화적 배경은 아테네와 예루살렘에 의해 상징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리스 아테네와 이를 계승한 알렉산드로스 대제국을 통해 발전한 문화를 헬레니즘(Hellenism)이라고 한다. 한편, 예루살렘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문화는 그리스도교 사상과 관련된 문화로 헤브라이즘(Hebrism)이라 한다.
즉, 헬레니즘을 인간 중심적인 문화라고 한다면 헤브라이즘은 신 중심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헬레니즘
헬레니즘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기원전 323년부터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한 기원전 31년경까지의 그리스·로마 문명을 가리킨다. 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유럽과 아시아, 북아프리카 간의 문화적 교류가 활발해졌다. 당시 일어난 고대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의 융합은 헬레니즘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이다. 헬레니즘은 모든 것이 사람에서 시작되며, 모든 것의 바탕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사람은 '나'라는 개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을 중시하며, '나'를 모든 것의 근본으로 삼으려고 한다.
→ 헬레니즘 문화는 인본주의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간 중심적인 사유를 지향하며, 개인을 중시하는 특징을 지녔다. 따라서 보편적 인간성에 기초한 세계 시민주의와 개인주의적 경향이 강했으며, 이는 이성을 통한 개인의 금욕을 강조한 스토아학파와 정신적인 쾌락을 추구한 에피쿠로스학파의 사상으로 구현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예술 작품으로 관능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을 중시하는 경향이 잘 나타난다.
헤브라이즘
헤브라이즘은 고대 이스라엘 인의 종교와 구약 성서에 근원을 두었으며, 인간이 아닌 신(神), 즉 여호와에게 절대복종하는 것을 삶의 근본이념으로 삼았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모든 삶의 영광을 그에게 돌리는데, 그 속에는 내세에 대한 소망과 영적이고 금욕적인 사고방식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초기 헤브라이즘은 철학적 기반을 바탕으로 중세의 교부 철학과 스콜라 철학 사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 헤브라이즘은 내세적이고, 신본주의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신과 양심의 준엄성에 대해 복종하며, 이를 통해 평안에 도달하고자 한다. 초기 헤브라이즘은 더 많은 사람에게 설득력을 갖기 위해 철학적 기반이 필요했다. 이것을 만족시키면서 중세를 지배한 그리스도교 사상의 원천은 아우구스티누스를 필두로 자리를 잡은 교부 철학이다. 이어서 중세 후기에는 아퀴나스가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철학적으로 체계화하면서 신학과 철학, 신앙과 이성 간의 조화를 추구한 스콜라 철학을 발전시켰다.
토마스 아퀴나스(Aquinas,T., 1225~1274)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철학적으로 논증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했던 스콜라 철학의 대표적 학자이다.
헬레니즘과 크리스트교 문화(헤브라이즘)의 비교 설명
1. 헬레니즘
헬레니즘이란 말은 고대 그리스의 뒤를 잇는, 세계 역사상 한 시대를 규정짓는 개념으로서. 그리스인을 의미하는 헬렌(Heien)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헬레니즘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63년 독일의 드로이젠이 그의 저서 『헬레니즘사(史)』에서 쓰면서부터였다. 이 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는데, 대체로 그리스 문화, 그리스 정신을 가리키는 경우가 지배적이다. 또 이 시대의 특징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리스 문화의 확대·발전으로 보는 견해와, 반대로 오리엔트 문화를 통한 그리스 문화의 퇴폐로 보는 등의 견해도 있으나,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질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새로 태어난 문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1. 시대 범위
헬레니즘 시대의 범위에 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먼저 그 시작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시아 원정 출발(BC 334)에 두는 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해(BC 330)에 두는 설, 대왕의 죽음(BC 323)에 두는 설 등이 있다. 그 종말도 극단적인 경우는 마호메트의 출현까지로 보는 설이 있다. 그 밖에 로마 제정기(帝政期)를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시대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BC 330년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제국 정복에서 BC 30년의 로마가 이집트를 병합하기까지의 300년 간이 그 시대 범위로 간주된다. 지역적 범위는 마케도니아·그리스에서부터 대왕의 정복지 전역(인더스 유역·박트리아·메소포타미아·소아시아·이집트)까지이며, 서방의 로마도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든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로마는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1-2. 문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정복한 각지에 만든 새로운 폴리스와, 그 뒤 셀레우코스왕들이 영내(領內)에 많이 만든 새로운 폴리스가 중심이 되어, 그리스 문화는 오리엔트의 전역에까지 침투하였다. 그리고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간소화한 그리스어가 공통어로서 사용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풍의 의례를 채용하고, 페르시아 왕녀와의 결혼, 페르시아 귀족을 친위대로 채용하는 등 이민족 통치의 수단으로써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앞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하였다. 이로써 그리스인이 이민족을 야만시한 관념이 희박해지고 세계시민주의가 역설되었다.
그러나 한편 폴리스의 강력한 지배가 사라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꾀하는 개인주의적 철학 사상들이 출현하였다. 제논이 시작한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의 에피쿠로스 학파, 디오게네스의 키니코스학파, 아리스티포스의 키레네학파 등이 모두 이 시대의 철학파이다. 이 시대의 조각은 매우 훌륭하나, 전시대의 특징인 이상화는 약화되고 보다 사실적·육감적으로 되었으며, 육체의 운동과 정신의 격동 등을 나타내기를 좋아하였다. 《라오콘》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니케》 등은 모두 이 시대를 대표하는 조각들이다. 이 시대의 학예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아테네·페르가몬 등이었는데, 특히 문헌학·자연과학 등이 발달하고, 창조적인 문학 등은 오히려 쇠퇴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시대에는 그리스 문화의 창조성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 시대의 경향을 정당하게 평가하려는 시도가 드로이센에서 시작되었으며 특히 마이어의 말은 그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즉 헬레니즘 문화는 될 수 있는 한 민족의 특성이나 특수한 생활 태도를 무시하고, 그 대신 아름다운 교양을 지닌 민족적 차별이 없는 인류를 이상으로 하였다. 교양은 그리스 민족의 교양을 기초로 하여 나타났으나, 그 민족적 특징을 내던져 버리고, 전 인류의 문화가 되려고 했던 것이다.
1-3. 그리스 철학사상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의 출현은 그리스 철학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알렉산드로스가 건립한 대제국 밑에서 종래의 도시국가(폴리스) 중심의 정치철학이나 도덕철학이 그 의미를 잃고, 세계 국가(코스모폴리스)의 성격을 띠게 되어 국가의 문제보다는 개인의 삶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또한, 로마의 J. 카이사르의 세계 통일(BC 46)이 이루어진 후, 그리스 철학은 아테네에서 서쪽은 로마로, 동쪽은 알렉산드리아로 옮아갔다. 국운이 쇠잔해진 그리스인들로서는 이론적 추구의 여유가 없어지고 옛 철학 이론을 현실에 적응시키는 실천철학으로 바꾸어 놓았다. BC 3세기에 아테네에서는 키프로스 출신인 제논이 창설한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가 대립되었다. 스토아학파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과 ‘무욕의 생활’을 이상으로 했던 키니코스학파(소크라테스 추종 학파)의 흐름을 받았고, 에피쿠로스 학파는 데모크리토스의 철학과 ‘쾌락이 선이다’라는 키레네학파(역시 소크라테스 추종 학파)의 흐름을 받았다.
이 두 학파는 모두 인간의 목적이 행복에 있고, 인생은 자연에 따르는 생활에서 그 행복이 획득된다고 믿었으나, 스토아학파는 그 행복이 금욕에 있다고 보는 데 반하여,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에 있다고 보고 대립하였다. 그러나 스토아학파의 ‘아파테이아’이나 에피쿠로스 학파의 ‘아타락시아’는 다 같이 인간의 정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비슷한 입장이라 하겠다. 한편, 엘리스 출신인 피로가 체계화한 회의론은, 원래 인간이란 사물의 참된 본질을 알 수 없으므로 헛된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 중지’를 내세워, 그것으로 혼의 평안을 얻는 것이 참된 행복이라는 입장이다. 스토아학파는 로마에 가서 네로 황제의 교사였던 세네카,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학자들로 이어졌고, 에피쿠로스 학파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어머니 플로티나 같은 신봉자를 로마에서 얻었다. 동쪽 알렉산드리아로 뻗어나간 그리스 철학은 동방의 헤브라이 종교와 접촉하여 이른바 ‘구제(救濟)의 철학’으로 나타났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필로은 플라톤 철학과 헤브라이 종교의 결합을 꾀하여 인간은 하나님 속에 머무는 행복을 위하여 자기의식에서의 탈출을 지향하였고, 세계와 하나님과의 중간자로서 ‘로고스 신학’을 제창하였다. 신플라톤주의자라고 일컫는 플로티노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받은 이집트인으로 후에 로마에 가서 철학을 가르친 사람인데, 그는 플라톤에 따라 최고의 것은 존재를 초월하는 일자(一者)라고 보았다. 태양에서 광선이 비추어 나오듯, 이 일자에서 예지(nous)가 유출되고, 이 예지의 하부에서 영혼이 흘러나오고, 영혼 다음에 감각계가 뒤따라 유출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완전한 것에서 불완전한 것으로 내려오는 길을 보여주었는데, 인간은 기도와 주술의 작용에 의해 반대 방향으로 향할 수 있어 하느님과의 합일을 이상으로 생각하였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에 그리스도교 보호를 선포하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플라톤의 학원을 폐쇄하자 고대의 그리스 철학은 크리스도교 사상으로 이어졌다.
2. 크리스트교 사상(헤브라이즘 : Hebraism)
헤브라이즘은 헬레니즘과 더불어 서양사상을 형성해 온 중요한 사조(思潮)를 말하며, 고대 이스라엘인의 종교(구약성서)에 근원을 둔다. 그것은 BC 13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과의 계약이라는 전승(傳承)에서 비롯되며, 이어 야위스트(Yahwist:야훼를 신의 이름으로 사용한 사람)나 엘로히스트(Elohist:엘로힘을 신의 이름으로 사용한 사람) 등의 역사가와 《신명기(申命記)》 율법의 기자(記者),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등의 활약으로 점차 뚜렷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며, 특히 BC 6세기 초기에 남왕국(南王國) 유다가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되고 다수의 선량(選良)이 포로가 되면서, 그 종교 사상은 한층 심화되고, 제2 이사야의 ‘고난의 종복’에서의 구제사상(救濟思想)에서 그 정점에 달했다. 이 구제관(救濟觀)은 나자렛 예수에 의해 실현되었다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 전파되어, 마침내 그리스도교가 탄생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는 헤브라이즘의 전통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 형성기에 헬레니즘과 접촉, 이에 영향을 받아 이론적·철학적 성격을 얻게 되고, 이른바 그리스도교 신학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헤브라이즘은 그리스도교에 의해 서양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헤브라이즘은 유일인격신(唯一人格神)의 역사적 계시와 이에 대한 신앙을 토대로 하고, 여기서 생기는 신에 의한 우주의 창조와 세계사의 주재(主宰), 이 신과의 계약에 의한 인간의 책임을 주장하는 세계관 및 인간을 영육일체(靈肉一體)로서 파악하는 인간관에서 헬레니즘과 대립된다. 즉 헬레니즘이 우주를 신들로부터의 타락 또는 유출(流出)에서 생긴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헤브라이즘은 우주를 신이 만든 피조계(被造界)로서 파악한다. 따라서 헬레니즘에서처럼 인간의 육체나 물질계는 그 자체가 악(惡)으로 취급되지 않고 피조물의 하나로서 의의가 부여된다. 또한 인간은 운명이나 필연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인격적 결단과 책임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역사는 인간의 책임과 신의 인도에 의해 명확한 목표를 향하여 전개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3. 헬레니즘과 크리스트교 문화의 비교
고대 그리이스인들의 생활의 중심이며 지주였던, 폴리스가 무너지고 오리엔트적 전제 군주제가 등장하자 그리이스인들은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처지가 되었고, 개개인으로 흩어져 폴리스를 초월한 세계시민이 된 것이다. 폴리스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관심은 애국심이나 공공정신보다 개인의 행복, 개인의 구원에 있었고, 이러한 개인의 행복 추구나 개인적 구원의 소망에 있어서, 민족적 구별은 있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헬레니즘 사상의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즉 개인주의와 세계시민주의이다.
아울러 인간을 이성의 존재로 파악한 그들의 사고는 자연과학의 발달을 가져왔다. 고대 그리이스 시대의 자연 과학이 주로 철학적 사색의 결과였던 데 비하여 이 시대에는 보다 실제적인 과학 지식이 발달하였다. 특히 천문학 분야에서는 지동설. 지구의 둘레 계산 등의 여러 가지 성과도 나타났다.
이에 반해 신의 창조물로써 인간을 이해한 크리스트 문화에서는 신중심의 사고가 지배적이었고, 신의 은총을 받는 것이 행복의 기준이 되었으며, 신에 대한 숭배와 관련하여 음악, 미술, 건축술의 발달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