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민주당)
앤드루 잭슨
앤드루 잭슨은 AD 1767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이민자인 부친 동명의 앤드루 잭슨과 모친 엘리자베스 허친슨 잭슨 사이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 캐롤라이나 사이의 미개척 삼림 지역인 왁스하우스에 정착했는데 그가 나중에 전쟁 영웅이 되고 미국 대통령까지 취임하게 되면서 출생지를 두고 나중에 노스 캐롤라이나 주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사이의 논쟁을 초래하게 되지만 정작 앤드루 잭슨 자신은 스스로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앤드루 잭슨은 그가 태어나기 불과 3주 전에 부친이 사고로 사망하면서 유복자가 되었다.
이후 미국 독립 전쟁(American War of Independence, AD 1775년 ~ AD 1783년)이 벌어지자 앤드루 잭슨은 12살의 나이에 민병대에 입대하였으나 큰 형인 휴 잭슨은 AD 1779년 6월 고열로 사망했고 앤드루 잭슨은 둘째 형인 로버트 잭슨과 함께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 생활 중 앤드루 잭슨이 영국군 장교의 군화 닦기를 거부하면서 기병도에 베일 뻔하여 얼굴에 평생동안 남을 상처를 입기도 했다. 또한 이후 로버트 잭슨이 포로 생활 중 사망했고 앤드루 잭슨이 포로 석방된 이후에 모친 엘리자베스 허친슨 잭슨까지 AD 1781년 11월 콜레라로 병사하면서 앤드루 잭슨은 불과 14살의 나이에 모든 가족을 잃었다.
비록 앤드루 잭슨은 제대로 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노스캐롤라이나의 솔즈베리에 있는 법률사무소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AD 1787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변호사 자격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애팔래치아 산맥의 서부 지역인 노스캐롤라이나 웨스턴 지구에 정착했는데 이 지역은 AD 1790년 '사우스웨스트 준주(Southwest Territory)'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앤드루 잭슨은 내슈빌에서 지방검사로 활동했고 AD 1794년 레이첼 도넬슨과 결혼을 하였다. 비록 레이첼 도넬슨이 1번 결혼한 적이 있었고 앤드루 잭슨과 재혼할 때도 법적인 이혼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아 훗날 앤드루 잭슨의 정적에게 불륜이라는 공격 빌미를 제공하게 되지만 앤드루 잭슨은 그녀를 매우 사랑하여 평생동안 그녀와의 결혼을 비난하는 사람과 여러 번 결투까지 벌이게 된다.
전쟁 영웅의 명성
AD 1796년 사우스웨스트 준주가 '테네시 주(state of Tennessee)'로 승격되었고 이 때 앤드루 잭슨도 주를 대표하는 하원의원에 선출되어 정계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AD 1797년에는 민주공화당 소속의 상원의원도 되었지만 1년도 안 되어 사임하였다. 그 후 앤드루 잭슨은 AD 1798년부터 AD 1804년까지 테네시 주 판사를 역임하게 된다. 한편 앤드루 잭슨은 AD 1802년 테네시 주의 민병대 소장으로도 선출되었고 크리크 전쟁(Creek War, AD 1813년 ~ AD 1814년)과 미영 전쟁(War of 1812, AD 1812년 ~ AD 1815년)에서 큰 활약을 보이며 일약 전쟁 영웅으로 발돋움하였다.
크리크 전쟁에서는 AD 1814년 3월 전통 문화로의 복귀를 외치던 크리크 족의 전사 집단인 '레드 스틱스(Red Stick)'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8월 9일 '잭슨 요새 조약(Treaty of Fort Jackson)'을 체결하며 지금의 앨라배마 주의 절반과 조지아 주 남부에 해당하는 거대한 영토를 할양받았다. 다만 앤드루 잭슨 자신은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에 대해서는 극심한 인종차별주의자로서 아메리카 원주민 아기가 태어나지 못하도록 어린 여자 아이부터 죽여야 한다고 할 정도로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대규모 살육을 자행하는 오점을 남겼다.
또한 미영 전쟁에서도 AD 1814년 12월 '헨트 조약(Treaty of Ghent)'이 체결되었으나 열악한 통신 설비 때문에 그 사실이 미처 알려지지 않은 채 벌어진 AD 1815년 1월 8일 뉴올리언스 전투(Battle of New Orleans)에서 영국군에게 대승을 거뒀다. 이 당시 영국군은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 AD 1803년 ~ AD 1815년)에서 한 때 유럽을 석권했던 나폴레옹 1세를 물리쳤을 정도로 세계 최강을 자랑하였으나 미영 전쟁에서 미군은 민병대 수준을 면치 못하여 전쟁 기간 내내 고전을 면치 못한 것과 대비되었기 때문에 뉴올리언스 전투의 대승은 앤드루 잭슨이 미국인 전체에서 전쟁 영웅으로 회자되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앤드루 잭슨은 스페인의 식민지인 동플로리다로 도망친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인 세미놀 족이 미국의 남부를 위협하면서 제1차 세미놀 전쟁(First Seminole War, AD 1816년 ~ AD 1819년)이 벌어지자 이를 핑계로 AD 1818년 동플로리다를 침공하여 스페인령 플로리다의 주도인 펜서콜라를 점령했다. 비록 스페인이 이에 대해 항의했지만 무력으로 플로리다를 지켜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통감하고는 AD 1819년 2월 '애덤스-오니스 조약(Adams–Onís Treaty)'을 체결하며 총 500만 달러로 플로리다를 미국에게 매각하였다. 그리고 앤드루 잭슨이 군정 지사로서 10개월간 플로리다를 임시로 통치한 후 테네시 주로 돌아갔다.
첫 번째 대통령 도전과 실패
이제 앤드루 잭슨은 미국 전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특히 앤드루 잭슨은 굳힐 줄 모르는 완고한 성품으로 인하여 '올드 히코리(Old Hickory; 늙은 히코리 나무)'라는 별명을 얻었고 전쟁 영웅으로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얻으면서 기존 상류층 위주의 정치 세력을 대체할 새로운 정치적 대안으로 급부상하였다. 그리고 AD 1824년 대통령인 제임스 먼로의 두 번째 임기도 만료가 다가오자 관례에 따라 3선 도전을 포기하면서 민주공화당의 새로운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전당 대회가 시작되자 앤드루 잭슨이 대중적 인기를 발판으로 삼아 대통령 후보에 도전하였다.
이미 미국에서는 민주공화당의 정적이었던 연방당(Federalist Party)이 미영 전쟁(War of 1812) 기간 동안 반전과 분리 독립을 획책한 일 때문에 여론의 못매를 맞으며 사실상 와해되면서 민주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사실상 대통령이 될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앤드루 잭슨은 대중적 인기는 높았지만 미국 정계의 주요 인사들에게는 시골뜨기에 불과했기 때문에 민주공화당의 간부들이 주도하는 전당 대회에서 그가 아닌 재무장관 윌리엄 H.(해리스) 크로퍼드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에 대해 앤드루 잭슨은 전당 대회가 일반 국민과 평당원의 뜻을 무시한 채 비민주적이고 폐쇄적으로 진행되었다며 강력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그런데 윌리엄 H. 크로퍼드가 건강 상의 문제로 갑자기 대통령 후보직을 사임하였다. 그리고 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던 프랑스 공사 앨버트 갤러틴도 사임하면서 민주공화당 전당 대회의 결과가 무색해졌다. 이에 앤드루 잭슨은 테네시 주를 비롯한 자신의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를 공식화하였고 그 이외에도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국무장관 존 퀸시 애덤스와 하원 의장 헨리 클레이도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며 심지어는 건강이 회복된 윌리엄 H. 크로퍼드마저 사임 의사를 철회하고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이리하여 저마다 민주공화당의 대표를 자임하는 후보자 4명이 난립한 채 AD 1824년말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었다.
비록 앤드루 잭슨이 총 선거인단 261표 중에서 99표로 1위를 기록했으나 과반수 획득에는 실패했다. 전통적인 미국 정치의 중심이었던 뉴잉글랜드 지역과 뉴욕 주의 주된 지지를 받은 존 퀸시 애덤스가 총 84표를 득표하며 2위가 되었고 그 밖에 윌리엄 H. 크로퍼드(41표)와 헨리 클레이(41표)가 각각 3위와 4위를 기록했다. 미국의 '수정 헌법 제12조(Amendment XII)'는 과반수 득표자가 없는 경우 하원이 상위 3명의 후보 중에서 1명을 선출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 미국 대통령의 선출 권한이 하원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4위를 기록했던 헨리 클레이가 2위인 존 퀸시 애덤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1위인 앤드루 잭슨을 제치고 2위인 존 퀸시 애덤스가 최종 승자가 됐다. 더구나 헨리 클레이가 존 퀸시 애덤스의 정부에서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앤드루 잭슨은 존 퀸시 애덤스와 헨리 클레이가 서로 야합하면서 정당한 승리를 도둑맞았다며 맹비난하였다.
두 번째 대통령 도전과 당선
비록 AD 1824년 선거에서 앤드루 잭슨이 대통령 당선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대중적 인기가 증명됐기 때문에 민주공화당이 이제 잭슨파와 애덤스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연방당의 몰락 이후 민주공화당의 1당 체제가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잭슨파가 사실상 야당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고 AD 1828년 다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자 앤드루 잭슨이 재선을 노리던 존 퀸시 애덤스와 다시 격돌하였다. 그리고 존 퀸시 애덤스는 민주공화당의 후보로 선출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자신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민주공화당을 이탈한 채 별도의 '국민공화당(National Republican Party)'을 결성하였다. 그러면서 민주공화당 내 남겨진 잭슨파는 이제 '민주당(Democratic Party)'으로 탈바꿈하였다.
앤드루 잭슨도 이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존 퀸시 애덤스의 정부에서 부통령을 역임한 존 C.(콜드웰) 칼훈을 이번에는 자신과 함께 할 부통령 후보로 끌어들였고 이전 선거에서 윌리엄 H. 크로퍼드를 지지했던 뉴욕 주의 상원의원 출신의 마틴 밴 뷰런과도 손을 잡았다. 그리고 AD 1828년 대통령 선거는 미국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인신 공격과 흑색 선전이 난무하며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존 퀸시 애덤스는 앤드루 잭슨의 부인인 레이첼 잭슨이 결혼 전에 전 남편과의 법적인 관계를 미처 마무리하지 않았던 점을 들어 앤드루 잭슨과의 관계를 불륜이라고 매도하였고 앤드루 잭슨의 최대 장점인 전쟁 영웅의 명성을 흠집내기 위하여 그가 저지른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사실을 공격하였다. 또한 앤드루 잭슨이 제대로 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점을 비아냥거리며 '잭애스(Jackass; 수컷 당나귀, 멍청이)'라고 불렀으나 정작 앤드루 잭슨은 이를 마음에 들어하며 당나귀를 민주당의 상징으로 삼기도 했다.
이렇게 대통령 선거가 매우 혼탁하게 진행되었으나 정작 개표가 진행되자 앤드루 잭슨은 24개 주의 선거인단이 총 261명 중에서 15개주의 선거인단 178표명의 지지를 받아 약 68.2%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여유있게 미국의 제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앤드루 잭슨과 함께 했던 존 C. 칼훈도 국민공화당의 후보인 리처드 러시를 제치고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다만 앤드루 잭슨은 대통령 취임하기 직전인 AD 1828년 12월 22일 그가 사랑하는 아내 레이첼 잭슨이 세상을 떠나면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녀를 매장해야 하는 개인적인 아픔을 겪었다.
앤드루 잭슨 정부의 특징
잭슨 민주주의
앤드루 잭슨의 대통령 당선은 미국 역사에서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동안 미국은 독립 과정을 주도했던 '미국 건국의 아버지(the Founding Fathers of the United States)'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정치를 주도하였고 특히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민주공화당을 창당했으며 제3대 대통령이 되었던 토머스 제퍼슨에 의해 미국 초기의 민주주의가 확립됐다는 측면에서 '제퍼슨 민주주의(Jeffersonian democracy)'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앤드루 잭슨 이전의 6명의 대통령 중 4명(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제임스 먼로)이 모두 버지니아 주 출신이었고 나머지 2명인 존 애덤스 및 존 퀸시 애덤스 부자는 매사추세츠 주 출신을 정도로 독립 이후 미국은 영국 식민지 시절의 북부 지역 출신으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상류층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하지만 앤드루 잭슨은 독립 이후 새롭게 미국의 영토로 편입된 지역인 애팔래치아 산맥의 서부의 개척민 출신으로 정규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자수성가에 성공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이전 세력과 큰 차이를 보였다.
한편 미국에서는 AD 1820년대 말까지 각 주의 선거법이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 소유주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하던 것을 폐지하고 재산 소유하지 못한 백인 남성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는 보통 선거가 확대되고 있었다. 독립 당시에는 버몬트 주가 유일하게 백인 남성의 보통선거를 인정하고 있었지만 테네시 주는 세금을 납부하는 백인 남성의 투표권을 인정했다. 그리고 AD 1807년과 AD 1810년 사이에 뉴저지 주, 메릴랜드 주,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에서 일정 재산 보유와 납세라는 투표권 제한 조항을 폐지했고 AD 1815년부터 AD 1821년까지 코네티컷 주, 매사추세츠 주, 뉴욕 주에서도 재산 보유 조건이 사라졌다. 또한 그동안 주 의회에서 선출되던 선거인단도 AD 182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델러웨어 주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주민 투표로 선출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앤드루 잭슨은 선거 운동 과정에서 기존의 상류층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의 표심을 직접 공략하는 방법으로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성공하였다. 앤드루 잭슨의 대통령 당선을 통해 일반 대중의 지지가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점이 분명해지면서 대중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도래하게 되었다. 참고로 미국은 AD 1856년이 되면 재산 소유 여부나 과세 여부가 투표권 부여 조건에서 모두 삭제되면서 백인 남성의 보통 선거가 완전히 확립되어 진다. 그리고 미국 초기의 제퍼슨 민주주의와 달리 선택받은 소수가 아닌 일반인 다수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앤드루 잭슨의 재임 기간 동안 구현된 정치 사상은 '잭슨 민주주의(Jacksonian democracy)'라고 불리게 된다. 또한 앤드루 잭슨은 애팔래치아 산맥의 서부 지역 출신의 최초 대통령이자 미국 독립 전쟁에 직접 참전하였던 마지막 대통령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엽관제
앤드루 잭슨은 대통령 취임 이후 유래가 없을 정도로 많은 관료들을 교체하였다. 비록 미국 역사상 최초의 정권 교체인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도 일부 관료들을 교체했지만 소수에 그쳤고 대부분의 주요 보직은 여전히 연방주의자들을 기용한 바 있었다. 그리고 이후로도 새로 취임한 대통령이 자신의 지지자를 관료로 임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의 관료는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관료의 대부분이 상류층이 독점했고 대통령의 교체와 무관하게 자신의 자리에 대한 보전이 가능했기 때문에 새로운 대통령과 내각의 지시에도 잘 따르지 않는 폐단이 있었다. 이에 앤드루 잭슨은 족벌주의를 타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관직 순환제(Rotation in office)'를 도입하여 한 자리에 오래 근무한 관료를 내보내고 새롭게 기용한 관료로 대체하였다.
앤드루 잭슨의 관료 순환제는 기존 상류층이 아니라 새로운 평민 출신들에게도 관료의 길이 개방되는 효과를 낳았으나 그 과정에서 실력이나 경험보다는 앤드루 잭슨에 대한 지지도가 중요한 선발 기준이 되는 폐단도 발생했다. 이를 두고 앤드루 잭슨의 반대파들은 관직을 '전리품(spoil)'처럼 취급한다고 해서 '스포일 시스템(spoils system)'이라고 불렀고 이를 번역하여 한국에서는 '엽관제(獵官制)'라고 부르고 있다. 실제로 앤드루 잭슨이 재임 기간 동안 교체한 관직의 숫자는 전체의 20% 밖에 안 되었으나 그 파급 효과는 상당했다. 하지만 앤드루 잭슨이 기용한 관료들의 상당수가 자격 미달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엽관제가 사실상 매관매직과 다를 바 없다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초기 내각의 페티코트 사건과 키친 캐비넷의 등장
앤드루 잭슨은 내각 구성시 독립 초기부터 미국 정치를 주도했던 버지니아 주와 뉴잉글랜드 지방 출신들을 배제시킨 채 지역별로 안배하는 인선을 했다. 먼저 가장 중요한 두 직책인 국무장관과 재무장관에는 북부 출신이 선택되면서 대통령 선거에서 앤드루 잭슨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준 뉴욕 주의 마틴 밴 뷰런이 국무장관이 되었고 마찬가지로 북부 출신인 펜실베이니아 주의 새무얼 잉험이 재무장관으로 임명받았다. 그러나 나머지 장관을 임명할 때는 남부 출신을 중용하면서 해군장관은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존 브랜치가, 법무장관에는 조지아 주의 존 베리엔이, 전쟁장관에는 앤드루 잭슨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료인 테네시 주의 존 이튼이 각각 임명되었다. 또한 서부 개척으로 인하여 점차 우편 업무가 중요해지자 단순히 '우정청(Post Office)'의 수장이었던 우정장관을 내각의 일원으로 격상시키고 서부 켄터키 주의 윌리엄 테일러 베리를 기용했다.
그런데 부통령인 존 C. 칼훈과 전쟁장관인 존 이튼 사이의 불화가 발생했다. 발단은 존 C. 칼훈의 부인인 플로리드 보노 칼훈과 존 이튼의 부인인 마가렛 오넬 이튼(일명 페기 이튼) 간의 불화였다. 페기 이튼은 존 이튼과 재혼한 사이였는데 그녀가 사실은 아버지 술집에서 일하던 매춘부였다는 근거없는 낭설이 파다했고 심지어는 전 남편이 살아 있으며 둘 사이가 불륜이라는 악의적인 소문까지 돌았다. 이에 플로리드 보노 칼훈이 장관 부인들을 초청한 사교 모임에서 페기 이튼을 소외시켰고 급기야 부인 간의 불화가 남편 간의 불화로 발전하였다. 앤드루 잭스도 사별한 레이첼 잭슨과 불륜이라는 악소문에 시달린 바 있었기 때문에 페기 이튼을 적극적으로 비호했고 공식 만찬에 페기 이튼을 자신의 옆 자리에 앉히기도 했다. 그러나 페기 이튼이 한 쪽 어깨가 드러나는 파격적인 옷을 입고 오자 나머지 장관 부인들이 불쾌해하며 모두 만찬장을 떠나 버렸는데 이를 '페티코트 사건(Petticoat affair)' 혹은 '이튼 사건(Eaton affair)'이라고 부른다.
이후 부인과 사별한 상태였기 때문에 부인의 입김에서 자유로웠던 마틴 밴 뷰런이 존 이튼 부부를 초대하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하기를 요청하면서 이제는 불화가 부통령인 존 C. 칼훈과 국무장관인 마틴 밴 뷰런 사이로 확대되었다. 더욱이 죽은 레이첼 잭슨을 대신하여 영부인 역할을 하고 있던 그녀의 조카 에밀리 도넬슨까지 페기 이튼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을 거절하자 앤드루 잭슨이 대노하여 그녀를 고향인 테네시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페기 이튼을 둘러싼 불화 때문에 내각이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자 앤드루 잭슨은 군인 윌리엄 버클리 루이스와 언론인 에이머스 켄달을 비공식 자문관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윌리엄 버클리 루이스는 앤드루 잭슨이 군인 시절에 부하가 된 적이 있었고 에이머스 켄달은 앤드루 잭슨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이들이 공식적인 '내각(Cabinet)'을 대신하면서 '키친 캐비닛(Kitchen Cabinet)'이라고 불리게 된다.
개각 단행, 앤드루 잭슨과 존 C. 칼훈 간의 불화
이제 앤드루 잭슨은 내각의 불화를 해결하기 위해서 AD 1831년 존 이튼을 전쟁장관직에서 사임시키는 한편 존 C. 칼훈 측 장관들도 모두 사임시켰다. 이에 따라 AD 1831년 중반이 되면 임기가 보장된 부통령 존 C. 칼훈과 우정장관인 윌리엄 테일러 베리를 제외한 모든 장관들이 사임을 하게 된다. 그 뒤에 개각이 단행되면서 미시간 준주지사인 루이스 캐스가 전쟁장관이 되었고 외교관 출신으로 전(前) 델러웨어 상원의원인 루이스 매클레인이 재무장관이 되었다. 또한 루이지애나 주의 에드워드 리빙스턴이 국무장관이 되었고 뉴햄프셔 주의 상원의원인 레비 우드버리는 해군장관이 되었으며 매릴랜드 주의 검찰총장이었던 로저 브룩 토니가 법무장관이 되었다. 그리고 언론인인 프랜시스 프레스턴 블레어가 키친 캐비넷의 새로운 자문관으로 합류했다.
페티코트 사건과 개각 단행은 앤드루 잭슨과 존 C. 칼훈 사이에 돌의킬 수 없는 균열을 발생시켰고 이에 반해서 부인과 이미 사별한 덕분에 장관 부인들 간의 알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마틴 밴 뷰런이 앤드루 잭슨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마틴 밴 뷰런은 AD 1831년 5월 국무장관직은 사임했지만 같은 해 8월 영국 주재 대사로 파견될 수 있었다. 그리고 앤드루 잭슨이 AD 1832년 재선에 도전할 때 자신과 선거를 함께 할 부통령 후보로 존 C. 칼훈이 아니라 마틴 밴 뷰런을 선택하면서 마틴 밴 뷰런이 사실상 앤드루 잭슨의 후계자가 된다.
연방 은행 제도 폐지와 관세법 강행
미국 제2은행의 인가 기간 연장 거부
앤드루 잭슨이 소속된 민주당의 전신인 민주공화당을 창당한 토머스 제퍼슨은 연방 정부보다 주정부의 자치권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미국의 제3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연방 정부의 권한을 더 중요시 한 연방당의 알렉산더 해밀턴이 추진했던 연방 은행 제도와 수입 관세 제도는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민주공화당 출신이었던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도 미영 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조속히 회복시키기 위해 연방 은행 제도와 수입 관세 제도를 재추진하면서 알렉산더 해밀턴에 의해 설립된 미국 제1은행(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이 20년의 기한 만료로 AD 1811년에 해산되었기 때문에 AD 1817년에 미국 제2은행(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이 20년 기한으로 다시 설립되었다.
이제 앤드루 잭슨의 재임 기간 중인 AD 1836년 1월에 미국 제2은행의 기한 만료가 다가오게 되었다. 그런데 앤드루 잭슨은 소수 상류층에 의한 지배를 거부하고 일반 대중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표방하고 있던 만큼 연방 은행 역시 소수의 자본가와 외국인 투자자에게 특혜를 제공한다고 여겨서 미국 제2은행의 재인가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가졌다. 이에 따라 AD 1832년 헨리 클레이가 주도하여 의회에서는 미국 제2은행의 인가 기간에 대한 연장 법안이 통과되었으나 앤드루 잭슨이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인 거부권을 행사하며 이를 무산시켰다. 비록 미국 헌법 상에 대통령의 거부권이 규정되어 있기는 했지만 통상 위헌적인 법률이 아니면 행사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앤드루 잭슨의 거부권 행사는 큰 논란을 불러왔다.
관세법을 둘러싼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와의 갈등
앤드루 잭슨이 연방 은행 제도를 폐지한 것과 달리 수입 관세 정책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에 섰다. 수입 관세는 단순히 북부의 제조업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연방 정부의 주 수입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관세법은 미영 전쟁 중에 'AD 1816년 관세법(Tariff of 1816)'이 제정된 이후 'AD 1824년 관세법(Tariff of 1824)'으로 관세율이 당초 25%에서 35%로 강화되었다. 비록 높은 수입 관세로 인하여 남부 지역은 질나쁜 미국 국내산 상품을 사용하면서 불만이 많았지만 아직까지는 관세가 부담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존 퀸시 애덤스의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AD 1828년에 관세법을 더욱 강화시키는 법률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당초 남부의 지지를 받고 있던 앤드루 잭슨이 관세법에 반대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앤드루 잭슨의 선거 운동을 책임지고 있던 마틴 밴 뷰런은 어차피 앤드루 잭슨이 남부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으므로 남부의 표가 다소 이탈되더라도 북부의 표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관세법 개정을 지지하도록 했다. 그 결과 수입품의 92%에 대하여 관세율 38%를 적용하는 법안이 통과되었고 남부 측의 큰 반발을 사면서 '증오의 관세법(Tariff of Abominations)'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그리고 앤드루 잭슨은 AD 1828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자 AD 1820년대부터 경제 불황에 시달리던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가 AD 1828년에 통과된 관세법을 AD 1832년까지 적용하지 않은 채 버티기 시작했다. 더구나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출신이었던 부통령 존 C. 칼훈이 페티코트 사건 이후 앤드루 잭슨과 불화를 겪으면서 AD 1832년 7월 14일 부통력직을 사임했고 새로운 선거에서도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로 나서지 못하게 되자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에서는 앤드루 잭슨이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해 주지 않는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비록 앤드루 잭슨이 관세율을 35%로 일부 낮추도록 '관세법(Tariff of 1832)'을 개정했으나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불만을 잠재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AD 1832년 재선과 미국 제2은행의 폐지
제3당의 등장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무효당
이후 앤드루 잭슨의 관세법에 맞서고 있던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에서는 관세법을 원천 무효시키기 위하여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에서 가장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존 C. 칼훈이 주축이 된 채 기존의 민주당과 국민공화당을 대신할 자신들만의 제3당인 '무효당(Nullifier Party)'까지 등장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AD 1832년 앤드루 잭슨의 첫 번째 대통령 임기 만료가 다가오면서 시작된 대통령 선거에서 버지니아 주지사 존 플로이드와 상인 출신인 헨리 리를 각각 독자적인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로 내세우며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였다.
반(反) 프리메이슨 운동
한편 AD 18세기 초 영국에서 결성된 중세의 석공들의 비밀 결사였던 '프리메이슨(Freemason)'이 미국에도 진출한 상태였는데 많은 미국인들이 프리메이슨이 공화정의 원칙을 무시한 채 미국을 지배하려 한다고 의심했다. 그러던 중 프리메이슨에 대하여 폭로하려고 했던 윌리엄 모건이 AD 1826년 뉴욕 주의 버테이비아에서 실종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프리메이슨에는 재판관, 기업가, 은행가, 정치인들이 많이 소속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윌리엄 모건과 관련한 음모가 제대로 파해쳐지지 않는다는 불신이 팽배해졌다. 이에 사람들은 프리메이슨이 미국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무시한 채 자신들만의 규정에 따라 행동하며 미국을 은밀하게 지배하려 한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윌리엄 모건 실종사건을 기점으로 '반(反) 프리메이슨 운동(Anti-Masonic Movement)'이 광범위하게 벌어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움직임에 편승하여 앤드루 잭슨의 정책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새로운 정당인 '반프리메이슨 당(Anti-Masonic Party)'을 만들었다. 반프리메이슨 당은 주로 펜실베이니아 주와 버몬트 주에서 만만치 않은 세력을 형성했고 AD 183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볼티모어에서 전당 대회를 개최하여 제임스 먼로 및 존 퀸시 애덤스 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역임한 윌리엄 워트를 대통령 후보로, 펜실베니아 주의 전(前) 검찰총장인 에이머스 엘마커를 부통령 후보로 각각 선출했다.
AD 1832년 선거와 앤드루 잭슨의 압승
AD 1832년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인 앤드루 잭슨과 그가 지지한 마틴 밴 뷰런이 각각 민주당의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이에 맞서서 국민공화당은 오랜 앤드루 잭슨의 정적인 헨리 클레이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고 전(前) 펜실베이니아 주 하원의원인 존 서전트를 부통령 후보로 뽑았다. 여기에 제3당인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기반의 무효당에서 존 플로이드와 헨리 리를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고 반프리메이슨 당에서도 윌리엄 워트와 에이머스 엘마커를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로 내세우면서 AD 1832 선거는 4파전이 되었다. 그리고 선거의 주요 쟁점은 앤드루 잭슨의 미국 제2은행 인가 기간에 대한 연장 거부와 관세법 강화가 되었고 헨리 클레이는 앤드루 잭슨의 거부권 행사를 제왕적이라며 맹비난하고 나섰다.
그렇지만 정작 AD 1832년 11월 2일부터 12월 5일까지 선거가 진행되자 여전히 대중적으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던 앤드루 잭슨이 선거인단 총 286표 중에서 219표를 획득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또한 마틴 밴 뷰런 역시 189표를 획득하며 손쉽게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국민공화당의 헨리 클레이와 존 서전트는 고작 49표 밖에 득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는 국민공화당의 존망 자체가 위태롭게 되었다. 그 밖에 제3당으로 호기롭게 도전했던 무효당의 존 플로이드와 헨리 리는 지지 기반인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11표 밖에 획득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고 반프리메이슨 당의 윌리엄 워트와 에이머스 엘마커도 유일하게 버몬트 주에서만 승리하며 7표를 얻는 데 그쳤다.
미국 제2은행의 폐지
대통령 재선 선거의 압도적인 승리 덕분에 앤드루 잭슨은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하면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자신의 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미국 제2은행의 기한 만료가 그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미국 제2은행은 필라델피아의 보통 은행으로 바뀌었고 5년 뒤 파산하게 된다. 다만 AD 1834년 앤드루 잭슨이 미국 제2은행에 예치되었던 연방 정부의 자금을 의회의 동의없이 임의로 인출하여 소위 '펫 뱅크(Pet bank)'로 불리는 지방 은행에 분산하여 예치하자 헨리 클레이가 앤드루 잭슨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을 상원에서 통과시키기도 했으나 앤드루 잭슨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고 결국 앤드루 잭슨에 대한 상원의 불신임 결의는 AD 1837년 취소된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연방법 거부 사태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연방법 거부 선언과 앤드루 잭슨의 강경 대응
한편 앤드루 잭슨이 재선에 성공하는 것이 확실해지던 AD 1832년말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에서는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기 시작했다. 이미 미국은 독립한 시점부터 연방 정부와 주 정부 간의 지위의 우월성을 두고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연방 정부의 우월성을 주장한 연방당과 주정부 자치권의 중요성을 피력한 민주공화당으로 나뉜 바 있었다. 하지만 연방당이 소멸하고 민주공화당의 둘로 나뉘면서 탄생한 민주당의 앤드루 잭슨이 이제는 연방 정부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는 앤드루 잭슨의 관세법에 맞서면서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인 존 C. 칼훈의 이론을 바탕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이해와 주장(South Carolina Exposition and Protest)"을 출간하여 각 주는 연방법 시행을 거부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한 바 있었다. 다만 정식 출간물에서 존 C. 칼훈의 이름은 삭제되었다.
이제 AD 1832년 11월 사우스 캐롤라이 주의회가 AD 1828년의 관세법과 AD 1832년의 관세법이 위헌이기 때문에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에서 이를 집행하지 않을 것이고 연방 정부가 억지로 강요하는 경우 연방 탈퇴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하는 '연방법 거부 사태(Nullification Crisis)'가 일어났다. 그리고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회는 AD 1833년 2월는 주 경계에서 관세법 적용을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 이에 맞서서 앤드루 잭슨도 같은 해 12월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민들에 대한 포고문(Proclamation to the People of South Carolina)'을 발표하며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연방법 거부가 터무니없는 부조리한 일이며 연방 탈퇴는 반역 행위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연방 해군을 찰스턴에 진주시키고 의회에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대한 군대 파견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는 강경책으로 단호하게 맞섰다.
타협안의 도출
비록 앤드루 잭슨과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사이가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으나 미국 의회에서 헨리 클레이의 중재에 따라 AD 1833년 3월 1일 두 가지 법안이 통과되면서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연방법 거부가 내전으로 번지는 위기에서는 벗어났다. 첫 번째 법안은 향후 10년 동안 관세를 점진적으로 인하하여 AD 1816년 수준인 20%로 되돌리겠다는 내용의 새로운 '관세법(Tariff of 1833)'이었고 두 번째 법안은 연방법 시행을 위해서 대통령이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에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도록 규정한 '강제법안(Force Bill)'이었다. 관세법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고 강제법안은 앤드루 잭슨을 만족시키기 위함이었다. 결국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회도 같은 해 3월 15일 연방법 무효화를 취소했지만 다시 3일 뒤 강제법안도 무효화라고 선언하며 자신들의 원칙도 여전히 고수했다.
비록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는 연방법 거부 사태를 두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승리라고 선언했지만 앤드루 잭슨 역시 연방 정부의 권한이 주 정부의 권한보다 우위에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앤드루 잭슨은 내전까지 불사하는 과격한 인물이라는 평판을 들었고 그동안 앤드루 잭슨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줬던 남부도 이제는 그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연방법 거부 사태가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이 연방 정부와 주정부의 권한 간의 우위를 둔 대립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연방 정부의 우위를 주장하는 북부와 주 정부의 우위를 주장하는 남부의 대립과 분열의 가능성은 남아 있었고 앤드루 잭슨 스스로도 관세법 다음은 노예제 문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하였다.
휘그당의 등장
한편 국민공화당은 앤드루 잭슨에게 두 번이나 참패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앤드루 잭슨이 미국 제2은행의 인가 기간 연장을 거부한 것 때문에 자본가들의 지지를 잃었고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연방법 거부 사태에 대한 강경책으로 인해 남부의 지지도 예전까지 않게 되자 앤드루 잭슨의 반대파를 다시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AD 1834년 미국의 제24대 하원의원 선거를 앞두고 반프리메이슨 당이 합류했고 연방당의 잔존 세력과 앤드루 잭슨의 정책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함께 했다. 이들은 앤드루 잭슨이 제왕적인 통치 모습을 보인다며 '앤드루 1세'라고 비난하였고 당명으로 내세운 '휘그당(Whig Party)'도 영국의 휘그당이 전제군주제를 반대했던 것에서 유래했다. 다만 미국의 휘그당은 단순히 앤드루 잭슨의 반대파가 결집한 것으로써 독자적인 정책이나 공약을 개발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게 된다.
아메리카 원주민 강제 이주
인디언 이주법
그동안 미국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의 추장이 대표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그들과 조약을 체결하며 겉으로는 매매의 방식을 취한 채 실제로는 무력으로 내쫓는 방식으로 꾸준히 영토를 확장해 왔다. 이에 따라 미국의 지배를 받아들인 소위 '문명화된 다섯 부족(Five Civilized Tribes)'인 체로키 족, 치카소 족, 촉토 족, 크리크 족, 세미놀 족이 미시시피 강의 동쪽인 미국 영토 안에서 대략 10만명이 살게 되었고 주로 인디애나 주, 일리노이 주, 미시간 주, 위스콘신 준주, 미시시피 주, 앨라배마 주, 조지아 주, 플로리다 준주 등에 분포되었다. 다만 앤드루 잭슨 이전까지의 미국 대통령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아예 제거하거나 문명화시키는 것 중 하나를 선택했지만 기본적으로 아메리카 원주민 관련 정책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AD 19세기 초부터 미국인 사이에서는 서부로 계속해서 영토를 팽창하는 것이 신이 부여한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사상이 만연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한편 AD 1802년 연방 정부는 조지아 주에게 서부 영토의 영유권 주장을 포기시키는 대신에 조지아 주 내부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AD 1820년 말 조지아 주의 달로네 근처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금을 채굴하기 위해서 서부로 향하는 '골드 러시(Gold rush)'이 일어나자 서부 개척이 가속화 되었고 이에 조지아 주는 연방 정부에게 AD 1802년의 약속을 이행하도록 재촉하였다. 이미 앤드루 잭슨은 정계에 진출하기 이전에 미국 남서부의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전쟁에서 많은 명성을 얻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학살을 하면서 인종차별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준 바도 있었다.
이제 대통령이 된 앤드루 잭슨에게 아메리카 원주민은 여전히 유럽에서 건너 온 자신들보다 열등한 존재일 뿐이었다. 이에 앤드루 잭슨은 AD 1830년 '인디언 이주법(Indian Removal Act)'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겉으로는 미시시피 강 동쪽에 살고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의 자발적 이주를 유도하지만 이주를 거부한 아메리카 원주민을 미국이 보호하지 않는다고 선언해 사실상 이주를 강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다만 인디언 이주법의 실질적인 추진은 AD 1832년 대통령 선거로 인해 잠시 주춤했지만 앤드루 잭슨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재선에 성공하면서 다시 탄력을 받게 되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의 지위에 대한 연방 대법원의 판결
한편 AD 1830년 조지아 주가 체로키 족의 땅에 대하여 자신의 주법을 적용하려 하면서 큰 마찰을 빚었고 체로키 족과 조지아 주의 분쟁은 소송전으로 번지면서 미국 내 아메리카 원주민의 지위에 대한 중요한 판단이 존 마셜이 끄는 연방 대법원에 의해 내려졌다. 먼저 AD 1831년 '체로키 족 대 조지아 주 사건(Cherokee Nation v. Georgia)'에서 체로키 족이 독립된 국가가 아니라며 체로키 족이 조지아 주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기각했다. 하지만 AD 1832년 체로키 족에게 포교하던 선교사인 새무엘 우스터가 제기한 '우스터 대 조지아 주(Worcester v. Georgia) 사건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관할 권리는 주 정부가 아니라 연방 정부에 있다면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땅에 주법을 적용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두 차례의 미국 연방 대법원의 판결에 의해 아메리카 원주민은 미국의 일원으로 인정받았고 그들의 영토는 정식 주(State)는 아니었지만 그에 준하는 연방 정부 관할의 자치령 지위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연방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앤드루 잭슨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권리를 보호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인디언 이주법에 의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사실상 강제 이주를 독려하였다.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을 미시시피 강 서쪽의 '인디언 준주(Indian Territory, 지금의 오클라호마 주)'로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무수한 사망자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를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라고 부른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눈물의 길'
촉토 족
문명화된 다섯 부족 중 촉토 족은 앨라배마 주, 미시시피 주, 루이지애나 주에 살았지만 그동안 미국 정부와 여러 번 조약을 체결하고 영토를 양도해 왔다. 그리고 AD 1830년 9월 마지막 '댄싱 래빗 크리크 조약(Treaty of Dancing Rabbit Creek)'을 체결하였지만 댄싱 래빗 크릭 조약은 촉토 족 중 일부가 그대로 잔류하는 것을 허용받았다. 이후 촉토 족은 AD 1831년부터 세 차례에 거쳐 이주를 시작하여 AD 1833년까지 이주를 마무리하였다. 총 1만 7천여 명의 촉토 족이 아칸소로 이주했고 나중에는 인디언 준주로 이동하게 되지만 그 과정에서 최소 2,000명에서 최대 4,000명이 질병과 기아로 사망하였다.
크리크 족
크리크 족은 미국과 크리크 전쟁까지 벌였으나 패배하면서 아직 장군 시절의 앤드루 잭슨과 체결한 AD 1812년의 '잭슨 요새 조약(Treaty of Fort Jackson)'에 의해 상당수의 영토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 후로도 조지아 주와 계속해서 협상을 벌이면서 AD 1821년의 '제1차 인디언 스프링스 조약(First Treaty of Indian Springs)'으로 플리트 강 동쪽을 조지아 주에게 할양했고 AD 1825년의 '제2차 인디언스 스프링스 조약(Second Treaty of Indian Springs)'으로 채터후치 강의 모든 영토마저 조지아 주에게 넘겼다. 그리고 AD 1826년 '워싱턴 조약(Treaty of Washington)'을 체결하며 조지아 주에 남아 있던 모든 크리크 족의 영토 마저 넘겨야 했다.
더욱이 이제 앤드루 잭슨이 대통령이 된 후 인디언 이주법이 통괴되면서 AD 1832년 '쿠세타 조약(Treaty of Cusseta)'을 체결하고 미시시피 강 동쪽의 앨버배마 주에 남아있던 크리크 족이 모두 미시시피 강 서쪽의 인디언 준주 남동쪽으로 이주를 해야만 했다. 일부 크리크 족이 반발하여 봉기를 일으키면서 소위 '제2차 크리크 전쟁(Second Creek War)'이 벌어졌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진압되었고 AD 1837년까지 약 19,600명의 크리크 족이 모두 이주를 하게 된다. 다만 이주 후에 질병으로 인해 약 3,500명이 사망하고 만다.
치카소 족
미시시피 강 동쪽의 미시시피 주에 살고 있던 치카소 족도 강제 이주를 피할 수 없었다. 치카소 족은 AD 1832년 폰토톡 '크리크 조약(Treaty of Pontotoc Creek)'을 체결하고 미시시피 강 동쪽의 고향을 포기한 채 미시시피 강 너머로 떠나야 했다. 다만 치카소 족은 다른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과 달리 자신의 고향을 매각하는 대가로 새로운 땅이 아니라 전부 돈으로 받으면서 총 3백만 달러를 수령했다. 그리고 인디언 준주로 향하여 먼저 도착해 있던 촉토 족에게 53만 달러를 지불하고 땅을 매입했다. 그 후 AD 1837년에 치카소 족의 첫 번째 집단이 이주를 하게 되지만 치카소 족도 이주 과정이 '눈물의 길'을 피하지 못한 채 약 500명이 사망하고 만다. 더욱이 미국 정부는 30년 간이나 약속했던 3백만 달러를 지불하지는 않았다.
체로키 족
조지아 주와 재판까지 벌였던 체로키 족은 계속해서 이주 제의를 거절해 왔으나 앤드루 잭슨이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자 일부가 생각을 바꿔서 최대한 유리한 조건으로 이주에 찬성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체로키 족이 둘로 나뉘었고 이주에 찬성하는 메이저 릿지와 그의 아들 존 릿지, 조카 일라이어스 부디놋이 스탠드 와티와 함께 이주에 찬성하는 '조약당(Treaty Party)'을 결성했다. 비록 앤드루 잭슨 정부가 체로키 족에게 이주하는 대가로 총 450만 달러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존 로스를 수장으로 하는 체로키 족 위원회(Cherokee National Council)는 고향을 떠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렇지만 앤드루 잭슨 정부의 대표로 임명받은 받은 존 프리맨 셔머혼 목사는 AD 1835년 12월 30일 조지아 주의 뉴에코타는 체로키 족의 이주 찬성파 500명만 소집하여 메이저 릿지와 일라이어스 부디놋를 비롯한 21명과 서명 혹은 'X'자 표시를 받는 방식으로 '뉴에코타 조약(Treaty of New Echota)'을 체결하였다. 비록 체로키 족 위원회가 조약 체결의 권한을 부여한 적이 없다고 항변하며 존 로스를 비롯한 대다수의 체로키 족이 조약의 부당함을 주장했지만 AD 1836년 5월 23일 미국 의회는 그대로 뉴에코타 조약을 비준했다.
이에 따라 AD 1836년까지 이주한 체로키 족은 6천여 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1만 6천여명은 이주를 거부한 채 그대로 남았다. 그리고 뉴에코타 조약의 이행 기간 만료인 AD 1838년이 도래하자 앤드루 잭슨의 뒤를 이은 마틴 밴 뷰런 정부는 육군을 동원하여 체로키 족으로 미시시피 강 서쪽인 현재의 오클라호마 주로 강제 이주를 시키게 된다. 하지만 미육군은 말을 탔지만 체로키 족은 걸어서 이동해야 했고 미국 측의 부실한 호송 대책과 관리 소홀로 인하여 이주 과정에서 과로와 질병, 영양실조 등에 시달린 체로키 족의 약 4천명이 사망하게 된다.
세미놀 족의 저항, 제2차 세미놀 전쟁의 발발
미국 연방 정부가 제1차 세미놀 전쟁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를 매입한 후 AD 1823년 '모울트리 크리크 협약(Treaty of Moultrie Creek)'을 통해 플로리다에 살던 세미놀 족을 플로리다의 중앙 지역에 보호 구역에서만 살도록 정했다. 이에 따라 20년 간 보호 구역 안에서 보상금과 보급품 등을 제공받는 대신에 플로리다의 다른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인디언 이주법이 통과되면서 세미놀 족도 미시시피 강 서부로 이주를 강요당하는 처지가 되었고 이것이 AD 1832년의 '패인즈 랜딩 조약(Treaty of Payne's Landing)'을 통하여 현실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세미놀 족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조약을 체결한 추장들은 이들을 설득할 힘이 없었다. 결국 조약 이행의 유예기간인 AD 1835년이 되도록 세미놀 족이 이주를 계속해서 거부하자 앤드루 잭슨은 다른 아메리카 원주민과 마찬가지로 강제 이주를 시행했지만 세미놀 족이 저항하면서 AD 1835년 12월 '제2차 세미놀 전쟁(Second Seminole War)'이 발발하게 된다. 그리고 제2차 세미놀 전쟁은 AD 1842년까지 무려 7년 간이나 이어졌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Vietnam War, AD 1960년 ~ AD 1975년)' 이전까지 미국이 참전한 전쟁 중 가장 오래 지속된 전쟁으로 기록될 정도로 미국을 괴롭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