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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성의 윤리학, 엠마누엘 레비나스

Jobs 9 2024. 4. 4.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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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성의 윤리학, 엠마누엘 레비나스



레비나스의 사상

서구의 전통적인 철학은 '시선'을 중심으로 한다. 나 이외의 다른 것들은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얼굴visage'개념은 '시선'에 반대해서 등장한 개념이다. 시선은 내가 주체가 되어 다른 이를 보는 것이지만, 레비나스는 타자가 보여주는 얼굴의 호소를 그 사람이 나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개념으로서 제시한다. 그는 데카르트를 중심으로 한 서구철학의 전통적인 존재론이 '타자의 타자성'을 무시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러한 철학이 전체성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사상적인 기반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인은 우리에게 얼굴로 나타난다. 타인이 얼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얼굴은 사물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사물은 전체의 한 부분으로, 또는 전체 속의 한 기능으로 의미가 있지만 얼굴은 이렇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얼굴은 코와 입, 눈으로 이루어지지만, 이는 판자와 서랍, 책상다리가 모여 책상이 이루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책상은 바라보지도 않고 호소하지도 않고 스스로 표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얼굴은 바라보고 호소하며 스스로 표현한다. 얼굴과의 만남은 사물과는 전혀 다른 차원을 우리에게 열어준다.(참고: 레비나스의 철학해설_강영안)  

레비나스는 특히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을 제시한다. 그는 그 얼굴에 '도덕적 호소력'이 있다고 한다. 그 얼굴이 나에게 거부할 수 없는 '명령'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나의 주체성을 본연의 주체성으로 회복시켜준다.

'타자'는 내가 만든 틀 안에 들어올 수 없다. 그래서 '무한'이라는 개념을 말한다. 율법이 신의 계시처럼 주어져,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자의 입장이 주어진 것이다. 다가오면 그저 해석할 뿐이지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후예들은 개인이 타자를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굴면서 마음대로 해석하고 이해한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타자의 위상은 신으로부터 오는 계시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신의 계시를 받고 해석하려고 하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 없듯이 타자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고통받는 타자가 호소할 때 신의 계시처럼 받아들여야만 한다. (무저항성)

특히 타자의 얼굴에서 오는 힘은 상처받을 가능성과 무저항성에 근거한다. 상처받을 수 있고 외부적인 힘을 막아낼 수 없기 때문에, 그 얼굴에서 도덕적인 힘이 있다는 것이다. 즉, 나보다 강한 타자가 명령함으로 내가 고통 받는 누군가를 돕는다면 인간의 자유는 없어진다. 하지만 내 자유가 유지되면서, 내가 나만을 위해 살겠다는 내 자유를 억누르고 사람을 돕는 쪽으로 나를 사용할 때 우리의 진짜 주체성이 형성된다. (돕지 않거나 도울 자유가 우리에게 있다) (현실에서는 고통 받는 타자를 오히려 더 괴롭혀서 더 가져가는 경우가 많다)    


레비나스의 사상은 유대기독교 사상과 닮아있다. 

마태복음 25장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너희가 내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가 나를 받아들였고, 헐벗었을 때에 너희가 내게 옷을 입혔으며, 내가 병들었을 때에 너희가 나를 찾아 왔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너희가 내게 왔느니라. " 
이 때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은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얼굴은 직설법이 아니라 명령법으로, 한 존재가 우리와 접촉하는 방식이다. 그것을 통해 얼굴은 모든 범주를 벗어나 있다."

-> 레비나스는 무저항을 단순히 동정이라는 개념과는 구분한다. 만약 타인이 연약하기 때문에 나에게 동정을 일으킨다면 타인은 나의 선의에 종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은 동정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정의로움을 요구한다.      

<전체성과 무한>   

'절대적으로 다른 타인은 얼굴 속의 자신의 현현을 통해 소유를 거부하고 마비시킨다. 내 소유를 반대하는 것은 그가 위로부터 나에게 걸어왔기 때문이다'_ 전체성과 무한

-> 현현은 계시와 비슷한 개념이다. 타인이 나에게 절대자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 위로부터 나에게 걸어온다는 것이다. 내가 타자를 소유할 수 없다.   


'타인으로서의 타인은 단지 하나의 다른 자아가 아니다. 타인은 내가 아닌 사람이다. 내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그인 것은 성격이나 외모, 심리 상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이타성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는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과부와 고아이다. 하지만 나는 부자이고 강자이다. 상호주관적인 공간은 대칭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_시간과 타자

-> 보통 윤리적 요구란 동등한 관계를 전제로 가능하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진정한 윤리적 평등과 형제애는 인간 사이의 대칭적 관계를 통해 구축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타자는 나와 동등한 자가 아니다. 그는 그가 당하는 가난과 고통 속에서 나의 주인이라고 말한다. 나는 내 자신을 벗어나 그를 모실 때 비로소 그때 그와 동등할 수 있다. 타자를 처음부터 나와 동등한 자로 생각할 때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나와 마찬가지로 자기 실현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보게 된다. 이 경우, 나는 나의 풍요 가운데 남아도는 것을 그에게 나누어주거나 동정이나 반대 급부 때문에 그를 돕게 된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비대칭성, 불균등성이 인간들 사이에 진정한 평등을 이룰 수 있는 기초이고, 이런 의미의 평등만이 약자를 착취하는 강자의 법을 폐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참고 : 레비나스의 철학해설_강영안)   


"타자는 타자로서 높음과 비천함의 차원에 스스로 처해 있다. 영광스런 비천함. 타자는 가난한 자와 나그네, 과부와 고아의 얼굴을 하고 있고, 동시에 나의 자유를 정당화하라고 요구하는 주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 타자의 얼굴은 가난한 자와 같이 비천하지만 동시에 절대적인 신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타인의 얼굴은 우리에게 자유를 정의롭게 사용하기를 요구한다. 강자는 나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박탈할 수 있지만 '자유' 자체에 대해서 명령할 수 없다. 하지만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을 내가 직면할 때, 나는 나의 자유를 마음대로 추구할 수 없게 된다. 그 얼굴의 현현은 나의 자발성에 제동을 건다.   

모든 것을 떠받치는 것은 나입니다. 아시겠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모든 것에 대해 죄인들이다.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죄인들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내 탓이 더욱 크다> 내가 범한 실제적인 이러 저러한 죄 때문도 아니고, 내가 범할지 모르는 잘못들 때문도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것, 그들의 책임까지도 떠 맡는 총체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 고통 받는 타자가 나에게 호소한다. 나는 그것에 응답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정확히 말해서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와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비참함과 직면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이다. 그것은 또 동료들이 가져온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이다. 그것은 세계를 건설하는 데 자기의 돌을 놓음으로써 이바지 하고 있다고 느끼는 일이다. _<인간의 대지> 생텍쥐페리 

->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책에서 저자는 말한다. '책임을 지는 것' 그리고 그 '연대성' 나와 관계 없는 것을 보고 내가 비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실제로 관계가 있는 것이다 

 



러시아제국이 통치하던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레비나스는 1923년 프랑스로 유학해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업 시절인 1928년에는 1년여 동안 독일에서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여러 언어에 능통했던 레비나스는 프랑스 국적을 얻고 프랑스어로 저술 활동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프랑스군에 들어갔다가 독일군 포로가 돼 5년 동안 수용소에서 지냈다. 레비나스가 포로수용소에서 독서와 집필을 하는 사이, 리투아니아의 레비나스 가족은 모두 홀로코스트 희생자가 됐다. 레비나스는 전쟁이 끝나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이후 레비나스는 전체주의 폭력의 근원을 살핌으로써 그 폭력을 넘어설 길을 찾는 데 철학적 사유를 바쳤는데, 그 사유가 응집된 저작이 주저 <전체성과 무한>(1961)이다. 이 책에서 레비나스는 서구 철학의 존재론을 전체주의의 근원으로 지목한다.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의 전통 존재론은 그 ‘사유하는 나’ 바깥의 모든 것을 나의 인식으로 포섭하고 흡수한다. 서구 존재론은 내가 만든 전체 체계 안으로 모든 타자를 포획하는 전체성의 철학이다. 전체성의 철학은 타자의 타자성을 인멸하는 동일성의 철학이다. 이 동일성의 존재론이 전체주의 폭력을 산출했다. 레비나스는 이 존재론에 맞서 ‘형이상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때의 형이상학은 ‘절대적인 것’을 향해 열린 사유를 뜻한다. 존재론이 끊임없이 나로 돌아오는 자기회귀적 사유라면 형이상학은 나의 한계를 넘어 내가 잡을 수 없는 것으로 나아가는 자기초월적 사유다. 형이상학이 사유하는 타자는 무한을 간직한 존재다. 이 무한을 사유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동일성에서 풀려나 타자와 윤리적으로 만날 수 있다. 

이 책에서 우치다가 주목하는 것은 레비나스 철학 언어의 ‘난해함’이다. 왜 레비나스는 그토록 난해하게 쓰는가? 우치다는 이 문제를 레비나스 사유의 근본적 곤경과 결부해 이해한다. 우리의 모든 언어는 존재자를 포섭하는 언어여서 그 언어를 그대로 쓰면 존재론의 한계에 갇히고 만다. 이를테면 ‘신이란 무엇인가’ 하고 묻고 그 답을 찾는 작업은 ‘신’을 존재론의 언어로 잡아들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곤경을 피하는 방법으로 레비나스가 고안한 것이 ‘전언 철회’라는 서술 방식이다. 어떤 규정을 제시한 뒤 곧바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전언 철회’다. ‘리얼리티 없는 리얼리티’, ‘관계 없는 관계’, ‘포착 가능하면서도 모든 포착을 벗어나는 것’ 같은 레비나스의 말이 전언 철회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렇게 무언가를 제시했다가 바로 거두어들임으로써 진술은 흔적을 남기고 흔적은 수수께끼가 된다. 수수께끼는 독자에게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그 욕망을 가리켜 레비나스는 형이상학적 욕망이라고 부른다.  

레비나스 철학에서 ‘형이상학적 욕망’은 ‘존재론적 욕구’와 대비된다. 레비나스가 쓰는 ‘욕망’(désir)과 ‘욕구’(besoin)는 라캉 이론에서 유래한 말이다. 욕구는 배고픔 같은 인간의 원초적인 갈구를 뜻한다. 반면에 욕망은 욕구를 충족시켜도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 결핍을 가리킨다. 아무리 먹어도 가시지 않는 허기가 욕망이다. 욕망은 충족되지 않은 결핍이기에 무한한 운동이 된다. 레비나스는 욕구를 존재론과 연결하고 욕망을 형이상학과 연결한다. 존재론적 욕구는 모든 타자를 포식함으로써 즉각적 충족을 바란다. 반면에 형이상학적 욕망은 충족될 수 없는 결핍 속에 끝없이 나를 넘어 나아간다. 

이 형이상학적 욕망이 지향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외부적인 것’ 곧 무한성이며, 그 무한성을 내장한 자가 바로 ‘타자’다. 절대자-신이 타자의 가장 극명한 경우다. 신은 인간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차원에 있다. 우치다는 레비나스가 말하는 신을 <구약성서> 속 아브라함과 욥을 비교함으로써 명확히 드러낸다. 창세기 22장에서 신이 아브라함을 부르자 아브라함은 “예, 제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신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데려가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묵묵히 명령을 따른다. 반면에 욥은 자신에게 닥친 끔찍한 고난 앞에서 “내가 그분의 거처에 갈 수만 있다면 내 사정을 내놓고 할 말을 다 했을 텐데” 하고 탄식한다. 욥은 신과 인간 사이에 공통의 법이 있고 그 법에 따라 정의를 따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절대자와 인간 사이에는 공통의 법이 없다. 신은 인간이 헤아릴 수 있는 것 너머의 무한성이다. 그 무한성의 부름에 응답하는 가운데 ‘주체’가 탄생한다. 레비나스의 주체는 존재자 전체를 장악하는 근대적 주체가 아니라 무한을 향해 나를 여는 윤리적 주체다. 

신의 무한성을 지상에서 떠올리게 하는 것이 ‘타자’다. 우치다는 그 타자를 ‘죽은 자’로 해석할 때 가장 실감 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은 자야말로 결코 닿을 수 없는 ‘절대적 외부자’다. 우치다는 레비나스가 타자의 사례로 드는 ‘과부·고아·이방인’이 절멸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석할 때 “나는 내가 받은 박해에 관해서조차 유책입니다”라는 레비나스의 말이 이해된다. 자신이 포로수용소에서 박해받은 것은 맞지만 가족과 동족이 학살당할 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것, 그러므로 그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죽지 못하는 그 죽은 자들’을 애도하고 죽은 자들이 죽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레비나스가 애도 의무를 수행하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홀로코스트를 낳은 전체성의 존재론을 넘어 타자의 무한성을 사유하는 철학하기가 그 길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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