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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데카르트, 근대 철학 아버지, 방법서설, 방법적 회의, 위트레흐트 논쟁, 프랑스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 갈릴레오 단죄에 충격, 과학 버리고 철학 선택

Jobs 9 2023. 8. 26.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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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단죄에 충격, 과학 버리고 철학 선택

 

르네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다. 19세기 초반부터 그런 인정을 받았다. ‘근대의 아버지’ 중 한 명이라고도 해도 무방하다. 물리학·화학·심리학 등의 학문 분야에서도 데카르트를 거론해야 한다. 데카르트는 좌표기하학이라고 불리는 해석기하학(解析幾何學, analytic geometry)의 창시자다. 해석기하학이 없었으면 아이작 뉴턴과 고트프리트 빌헬름 폰 라이프니츠가 발전시킨 미적분학(微積分學, calculus)도 없었다. 1637년에는 무지개가 생기는 원리를 설명했다. 

데카르트는 16세 때부터 수학에 몰두했다. 수학의 확실성에 매료됐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그에겐 수학이 철학보다 우선이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철학에 대해 지나친 관심을 갖지 말라고 1648년 경고하기도 했다. 1619년 11월 10, 11일 밤에 데카르트는 생생한 꿈을 세 번 꾸고 일생을 과학에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해석기하학 창시무지개 원리도 설명
1633년 갈릴레오가 교회로부터 단죄 받아 지동설에 대한 갈릴레오의 모든 저작이 불태워졌다는 소식이 데카르트의 귀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그는 과학 연구를 거의 중단하고 철학으로 돌아섰다. 데카르트는 라플레슈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신학·철학·논리학·수학을 배웠다. 자신이 받은 예수회 교육에 평생 만족했지만 불만도 있었다. 특히 수학과 달리 철학에는 논란·불확실성이 많은 게 아쉬웠다. 갈릴레오 사건의 여파로 철학으로 방향 전환을 한 것은, 그에게 철학에 수학적 확실성을 도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철학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과학에서 이룩한 성과를 방어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의 과학이 가톨릭 신앙과 철학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했던 것이다.  

데카르트가 활동한 시기는 과학과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시기였다. 17세기는 과학혁명의 시대였다. 데카르트는 과학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굳건히 할 수 있는 새로운 철학 체계를 수립하기를 바랐다. 이를 위해 그는 교회의 철학인 스콜라학파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반대했다. 교회의 철학에 반기를 든 최초의 인물이 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철학은 신앙과 이성 사이에 쐐기를 박았다. 

성경에 나오는 계시가 곧 진리인 시대였다. 보조적으로는 교회 전통이나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가 저술한 문헌에 진리가 나와 있었다. 이를 무시하고 데카르트는 불확실성에서 출발했다. 그는 물었다. “확실한 게 무엇인가?” 그의 방법은 모든 것에 대해 극단적으로 회의하는 것이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고, 악령(惡靈)이 나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너무나 자주 맥락을 떠나 인용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의 결론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프랑스어 Je pense, donc je suis, 라틴어 Cogito ergo sum, 영어 I think, therefore I am.)”로 상징된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인생에서 적어도 한번쯤은 모든 것에 대해 최대한 의심할 필요가 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도 이미 같은 생각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행동할 때마다 (생각하기를 포함해)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의식하며, 이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가 진리 인식의 기준으로 내세운 조건은 명석(明晳·clear)과 판명(判明·distinct)이다. 어떤 개념의 내용이 명료한 사태(事態)가 명석(clear)이다. 명석하면서 동시에 다른 개념과 충분히 구별되는 것이 판명(判明·distinct)이다. 데카르트는 명석판명한 지식은 신(神)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은 우리를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신앙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를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보는 견해가 주류다. 일찍 고아가 된 그가 예수회 성직자들을 부모처럼 따랐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자신의 철학 체계를 가톨릭 교회의 공식 철학으로 채택하게 만들겠다는 데카르트의 포부는 사실은 ‘위장술’이라는 의견도 있다. 데카르트가 몰래 이신론(理神論)이나 무신론을 믿었다는 주장이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제기됐다. 블레즈 파스칼(1623~1662)도 신랄한 의혹을 제기했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데카르트를 용서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최선을 다해 신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었다.” 학문적으로는 데카르트에게 큰 빚을 진 아이작 뉴턴도 데카르트 철학의 귀결점은 무신론이라고 비난했다. 데카르트의 저서 중 상당수는 1663년 금서 목록에 올랐지만 1720년에는 파리대학 커리큘럼에 포함됐다.  
 
하루 10시간 자며 맑은 머리로 철학 매진
데카르트는 개신교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가톨릭 측의 비난을 받았다. 그의 활동기는 30년 종교전쟁(1618~48) 기간과 겹친다. 데카르트에게는 가톨릭이냐 개신교 신자냐가 아니라 이성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냐 아니냐가 중요했다. 데카르트는 은총을 강조하는 가톨릭·개신교와 달리, 진리를 발견하고 덕을 쌓는 게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했다. 이 점에서 데카르트는 가톨릭·개신교 모두에게 이단이었다.

당시 지성계를 지배하는 인물들은 라틴어를 사용하는, 예수회 교육 기관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데카르트도 이들이 형성하는 국제적인 공동체의 멤버였다. 데카르트가 예수회의 스파이였다는 설을 A. C. 그레일링이라는 학자가 제기했다. 데카르트는 군 생활을 개신교 진영에서 하기도 했다. 정보수집이 목표였는지도 모른다. 네덜란드에서 거주한 것도 사상의 자유를 찾아서가 아니라 스파이 활동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학자들은 스파이로 채용되는 일이 흔했다. 사회 명사들과 교류하는 학자들은 1급 첩보원감이었다. 

데카르트는 변호사·판사·의사들이 우글거리는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가장 낮은 등급이긴 하지만 1668년 귀족이 됐다. 키가 1m55㎝였던 데카르트는 한때 눈동자가 안쪽으로 몰리는 눈(內斜視)을 가진 여자들을 좋아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헬레나 얀스라는 이름의 하녀와 관계를 가져 1635년 딸 프란시엔을 낳았다. 관계한 날짜를 일기에 기록했다. 친딸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프란시엔이 자신의 조카라고 둘러댔다. 딸은 5세에 성홍열로 사망했다. 

그는 비밀주의자였다. 20여 년간 네덜란드에서 생활할 때는 거처를 수십 번 옮겨 다녔다. 친구들에게는 자신이 사는 곳을 사람들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의 생년월일도 비밀로 했다. 누군가 서양 점성술로 그의 ‘사주팔자’를 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남긴 서간문을 보면 데카르트는 달콤하면서도 논리정연했다. 비판을 당하면 참지 못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데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했다. 차가움, 오만함, 강자에 대한 비굴함과 같은 인간적인 약점들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당시 지성계의 모든 문제에 대해 한마디 했으나 평생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학문에 몰두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게으른’ 철학자였다.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 느긋하게 살았다. 사치만 하지 않으면 되는 어머니가 남긴 넉넉한 유산 덕분에 돈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예수회 학교에 다닐 때부터 몸이 약해 늦게 일어났다. 학교 측의 특별 배려로 10시 미사 시간에 맞춰 일어나면 됐다. 하루에 10시간씩 잤다. 하루는 친구가 정오가 다 돼 그를 방문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고 놀라 “아프냐”고 묻자 데카르트는 “일하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충분한 수면으로 머리를 맑게 하는 게 데카르트가 철학을 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여자들도 그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놀랐다. 여자들 중에는 거물급도 많았다. 1649년 그는 철학 튜터가 돼 달라는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데카르트는 “날씨가 추우면 생각을 할 수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양지바른 프랑스의 투렌 지방에서 태어난 그가 스웨덴으로 가는 것은 철학을 그만두는 것뿐만 아니라 명을 재촉하는 일이었다. 마침 스웨덴에 60년 만에 최고의 추위가 들이닥쳤다. 그는 여왕을 만나러 새벽 4시 반에 마차를 타야 했다. 일주일에 3번, 한번에 5시간씩 가르치는 강행군이었다. 결국 스웨덴에 온 지 다섯 달 만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추운 날씨에 일찍 일어나야 했기에 그의 면역 체계가 약해졌을 것이다. 53세였다. 아마도 데카르트의 영향으로 크리스티나 여왕은 루터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개종을 위해 왕위를 포기했다.

 

네덜란드 화가 프란스 할스(1581/85~1666)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데카르트의 초상화(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 1637) 방법서설(1657년판) 34쪽 철학의 원리(1656년판) 2쪽

 

철학사에서 데카르트의 위치는 모래시계의 잘록한 허리 부분과 유사하다. 모래시계에서 위쪽의 모래가 오직 위와 아래를 연결하는 좁은 관을 통해서만 아래쪽으로 떨어지듯이 중세에 뿌리를 둔 여러 사상들은 오직 좁은 여과 장치를 거쳐서만 근대 세계에 도달했다. 그리고 이 여과 장치는 바로 데카르트라는, 다방면의 재능이 압축된 천재였다. 
엔서니 케니, 근대철학(2006)

근대 철학의 포문을 연 프랑스의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 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 확신하고는, 이를 모든 학문의 제1 원리로 정립하였다. 

이어서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는 학문의 제1 원리를 기반으로하여 다시 신 존재를 증명해내고, 이를 다시 물질 세계의 진리성을 확보하기 위한 발판으로 마련하여, 마침내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물질 세계의 확실한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논리적 근거의 순서를 제시한다. 그리고 물질 세계에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 물질이 특정한 공간을 차지한다'는 사실, 즉 '연장'에 있다고 보고, 이로써 물질 세계는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한 공간이며 계산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철학적 방법론은 이후 근대의 수많은 학자들을 자극시켜 자연과학과 수학에 있어서 급격한 발전을 이끌어낸다. 이렇게 서양이 중세를 벗어나게 된 그 결정적인 동력을 데카르트가 제공하였기에 그를 두고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프랑스 투렌 지방(Touraine)의 투르 인근에 있는 소도시 라에(la Haye)에서 브르타뉴주의 고등법원 평정관이었던 아버지인 조아킴 데카르트(Joachim Descartes)와 잔 브로샤르(Jeanne Brochard)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인 잔 브로샤르는 데카르트를 낳고 1년 1개월 후에 죽게 되고, 태어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데카르트 또한 생명이 위태로웠지만 다행히도 살아남는다. 물론 어머니와 같은 결핵 징후를 보이고 있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계속 창백하고 마른 아이였다. 어린 시절에는 친구들이 거의 없었고, 자신을 돌봐주던 간호사와 사팔뜨기 소녀 친구 프랑수아즈가 있었다. 후에 시간이 지난 뒤에도, 데카르트는 이 둘에게 놀랄 만한 정도의 충실함과 헌신을 보였다고 하는데, 심지어 유산을 얻었을 때에도 간호사에게 많은 돈을 주었고, 자신의 일생 동안 프랑수아즈와도 우정을 돈독히 하며 지냈다고 한다. 

학문적으로는 능력자였으나, 몸이 많이 약한 편으로 그의 어머니에게서 유전된 듯하다. 이 때문에 데카르트의 아버지는 아들도 아내처럼 일찍 죽을 것을 걱정하여, 그가 학교를 가고 싶다는 것을 말리고 강제로 쉬게 했다. 그래서 8살(또는 10살)이 되던 해에 예수회 계열 학교인 라플레슈(La Flèche)에 입학해 8년을 공부하는데, 몸이 약해 학교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수업을 그렇게 듣지를 못했는데도 철학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공부는 무지 잘했다. 그런 그의 재능을 꿰뚫어 본 어느 관대한 교장이 수업을 듣는 대신에 그 시간에 데카르트에게 늦게까지 잠을 자는 것을 허락했다. 데카르트의 늦잠 자는 버릇은 이때부터 시작된 듯하다. 그러나 이런 늦게까지 침대에 있는 습관에서 그는 사색과 생각을 많이 했고 이 생각들이 훗날 그의 사상에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대표적인 업적이 후술할 좌표의 발견인데 날벌레가 천장에 붙어있는 것을 보고 저 날벌레의 위치를 계산하려다가 만들어 진 것이 바로 좌표의 발견이다. 

라플레슈를 졸업하곤, 바로 푸아티에 대학에 입학해 법학과 의학을 배웠고 2년 뒤 20세의 나이에 푸아티에 대학에서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 속으로 여행의 길을 떠났다.

 


데카르트는 당대의 프랑스를 주름잡던 검술 마스터 샤를 베나르에게 검술을 배웠다. 20대에는 여행을 통해 세상을 배우기 위해서 군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간혹 데카르트가 귀족이었기 때문에 군인이 되었다고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한데, 데카르트 집안은 돈이 많았지만 정작 데카르트 때까지는 귀족은 아니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3대가 높은 위치나 명성을 얻어야 귀족이 될 수 있었는데, 이에 따라 데카르트 이후에 그 후손들이 귀족이 되었던 것이 이러한 오해를 불러 일으킨듯 하다. 그럼에도 물론 돈이 많아서 군대에 병사 훈련을 받을 때도 그를 모시는 수행원이 있었을만큼, 귀족과 다름없는 부자였긴 했다. 또한 군인 신분임에도 비교적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군대를 따라다니면서 세상 경험을 할 목적으로 군인이 된 것도 있었다. 데카르트는 아무튼 그럴 요량으로 네덜란드의 마우리츠 공 휘하에서 군복무를 거친다. 이 무렵 데카르트는 학창시절 때처럼 아주 골골대진 않았고 사병 복무에 검술 수련도 열심히 했으며, 자신의 애인에게 무례하게 군 연적에게 기사도의 방식으로 결투를 하여 잔뜩 혼을 내주는 등 칼싸움에 능한 무사였다. 그리고 여행 도중 뱃사람들이 데카르트를 죽이고 재물을 빼앗으려고 하는 위기도 있었는데, 데카르트는 자신을 죽이려드는 해적들의 칼을 빼앗아 그들을 제압하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타고난 체질이 약해서 병에 쉽게 걸리는 편이었다고. 


1617년 장교가 되어 네덜란드로 갔을 때 거리에 걸려 있는 네덜란드어로 쓰인 글을 보고 지나가던 행인에게 그 내용을 프랑스어나 라틴어로 번역해 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그 행인은 홀란트 대학의 학장이자 수학자였던 이사크 베이크만(Isaac Beeckman)이었다. 베크만은 데카르트에게 ‘자신이 제시하는 기하학 문제를 하나 풀면 청을 들어 주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사실 베크만이 제시한 문제는 그때까지 아무도 풀지 못한 문제였으나, 데카르트는 몇 시간 만에 풀어와 베크만을 놀라게 했다. 이 사건과 베크만과의 친교는 데카르트에게 학문으로의 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된다.

 


30년 전쟁이 일어 났다는 소식을 접한 데카르트는 전쟁을 눈으로 목격하고 싶다는 생각에, 구교 진영에 속하는 바이에른 휘하 군대에 들어간다. 그곳에 있으면서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페르디난트 2세의 대관식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중, 독일 남부 울름(Ulm) 근교의 작은 마을에 머문다. 그리고 1619년 11월 10일에서 11일로 넘어가는 밤, 커다란 벽난로가 지펴진 '난로 방'에서, 데카르트는 역사상 가장 유명하며 자주 분석되는 꿈을 꾸게 된다. 그는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잠시 졸았는데, 이때 그 유명한 세 번의 생생한 꿈을 꾼 것이다. 

첫 번째 꿈은, 거리를 걷다가 거센 폭풍이 불어서 필사적으로 아무 건물로 들어갔는데, 마침 그 건물이 그가 다녔던 라플라슈 학교였고, 캠퍼스에는 그가 잘 아는 성당이 있었다. 데카르트는 그 성당으로 들어가려다가 아는 사람을 그냥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 말을 걸기위해 발길을 되돌렸다. 그런데 괴팍한 바람이 "성당 쪽으로" 그를 강하게 밀쳤다. 그 순간 다른 지인을 보았고, 그는 데카르트에게 'N이라는 사람이 외국에서 사온 멜론을 주기로 했는데 그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물어봤다. 이 순간 갑자기 바람이 잦아들었고 그때 데카르트는 꿈에서 깼다. 잠에서 깬 그는 "깊은 슬픔을 느꼈으며, 이것은 나를 현혹시키려는 악마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죄악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늘이 폭풍으로써 경고를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이 세상의 선과 악을 생각하며" 두 시간이나 잠을 설쳤다. 

두 번째 꿈은, 데카르트가 방안에 있었다. 그런데 방이 희미해지더니 갑자기 귀청이 찢어질 듯 한 날카로운 굉음이 들렸다. 데카르트는 이를 천둥이라고 생각했다. 첫 번째 꿈의 폭풍이 다시 찾아왔지만, 이번에는 마치 환각처럼 느껴졌다. 그가 안전한 방안에 있었기 때문에 사나운 비바람이 그에게 닿을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세 번째 꿈에서, 데카르트는 백과사전이 놓인 책상에 앉아 있었다. 백과사전을 집으려고 손을 뻗었을 때, 그는 『시선집 (Corpus poetarum)』이라는 라틴어 제목이 붙은 또 다른 책을 발견했다. 그는 이 책을 아무렇게나 펼쳤는데, 거기에 시 한 편이 있었다. 로마 시인 아우소니우스가 쓴 〈이딜 XV〉이라는 시였다. 그는 첫 행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인생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 (Quodvitae sectabor iter?)" 그 때 낯선 사람이 나타나 데카르트에게 제목이 '예, 그리고 아니오'인 아우소니우스의 다른 시를 내밀었다. 데카르트가 시선집을 잡으려하자, 그 책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백과사전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에 보았던 것만큼 완전한 형태가 아니었다. 그때 낯선 사람도 책도 사라졌다.

데카르트는 백과사전이 "모든 학문을 한데 모은 것"을 나타내고, 자신이 집으려 했던 시선집은 "철학과 지혜가 혼합된 것"을 가르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 그리고 아니오'라는 시가 "피타고라스의 '예, 그리고 아니오'를" 나타낸다고 해석하며, 이것은 "인간의 지식의 진리와 오류를 뜻한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온 종일 데카르트는 세 가지 꿈에 대해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이 꿈이 자신을 학문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라 믿었다.

데카르트는 결국 1621년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이후 5년간 여행을 하면서 순수 수학에 몰두하였다. 이때 함수의 원리를 처음 계발하였다. 1626년 파리에 정착한 그는 소일거리로 광학기구를 만들던 중에, 1628년 당시 파리의 추기경이었던 피에르 드베륄(Pierre de Bérulle)과 만난다. 추기경은 데카르트와의 대화에서 그의 명석함에 감명을 받아 오로지 진리탐구에만 전념할 것을 권했다. 데카르트는 추기경의 충고를 받아들여 모든 간섭과 의무를 피해 다시 네덜란드로 건너가 수학, 과학연구에 힘썼다.

하지만 1633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교회로부터 단죄받아 지동설에 대한 갈릴레오의 모든 저작이 불태워졌다는 소식을 듣자, 비밀리에 지동설을 지지하는 글 『세계 (Le Monde)』를 저술하고 있었던 데카르트는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과학을 버리고 철학을 선택한다.

 

 

연애와 딸 프랑신
1634년 5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 있을 때 헬레나 얀스 판데르스트롬(Helena Jans van der Strom, ? ~ 1683)라는 이름의 전직 가정부를 만난 후 1635년 7월 19일 데벤테르(Deventer)에서, 외동딸 프랑신(Francine, 1635년 7월 19일 ~ 1640년 9월 7일)를 얻는다. 데카르트가 프랑신이 수태된 날짜(1634년 10월 15일)를 일기에 기록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에 그녀가 친딸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고 얻은 사생아여서 주변 사람들에게는 프랑신이 자신의 조카라고 둘러댔다고 한다. 

프랑신의 이름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자신이 어린 시절 좋아하던 소녀의 이름인 프랑수아즈에서 이름을 따서 비슷한 이름인 프랑신이라고 붙여주었다는 설이 있다. 단, 동물기계설 등의 기계와 관련이 있는 걸로 봐서는 데카르트가 자주 거닐던, 생제르맹앙레 성(Château de Saint-Germain-en-Laye) 정원의 분수기계 제작자 프란치니(Francini) 형제의 성씨의 프랑스식 변형인 프랑신(Francine)에서 따온 게 아니냐는 설도 있다.  

1638년 8월 23일에 마랭 메르센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한 남자가 세 살 난 소녀를 무릎에 앉혀놓고 박수를 치면, 소녀가 박수 소리를 듣고 정원을 달리는 것에 대한 동화가 써져있는데, 정황상 데카르트 자신이 프랑신과 놀아준 것을 묘사한 걸로 추정된다.

1640년, 데카르트는 프랑신을 프랑스로 데리고 간 후 자신의 외할머니의 조카이자 국회의원의 아내인 프랑수아즈 뒤 트롱셰(Françoise du Tronchay)에게 맡겨 교육을 받게 할 것이라고 기록한다. 하지만 프랑신은 동년 9월 7일 아메르스포르트(Amersfoort)에서,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성홍열에 걸려 세상을 일찍 뜬다. 데카르트는 친구가 자신의 가족을 여의었을 때, 슬퍼하는 것은 괜찮으나 감정에 너무 휘둘리지 마라며 꿋꿋이 슬픔을 참고 이길 것을 친구에게 간곡한 편지로 써 보냈지만, 그의 전기작가였던 아드리앵 바이예(Adrien Baillet)에 의하면 정작 데카르트는 프랑신의 사후 몇 날 며칠을 서럽게 울었다 한다.

1641년 1월 최근 아주 친밀한 "두 사람"을 잃었다고 알퐁스 폴롯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한 명은 1640년 10월에 죽은 그의 아버지인게 확실하나, 두 번째 인물은 프랑신인지, 데카르트의 누나인 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2018년에 누나 잔의 사망일이 1641년 6월이라고 밝혀지면서, 다른 한 명이 프랑신이라는 게 드러났다. 

몇 년 후인 1643년, 신학자 기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Gisbertus Voetius)는 데카르트에게 혼외관계에서 아이가 있지 않냐고 공격을 한다. 이후 데카르트는 헬레나와 헤어진다. 1644년 5월 헬레나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는데 이때 지참금을 주었다. 그 후 데카르트는 평생 독신으로 산다.

 

 

장미십자회와 위트레흐트 논쟁
데카르트는 젊은 시절, 친구들과 유흥을 즐기던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그가 학문에 푹빠지게 되자, 친구들은 데카르트가 장미십자회 회원일 것이라 어림짐작을 했다. 당시 수학,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 비밀결사 단체의 회원이라는 소문이 프랑스에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카르트는 실제로도 그 단체에 가입하고 싶어했다. 데카르트는 장미십자회 회원을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그들을 만날 수 없었다. 

데카르트는 훗날 장미십자회와의 어떠한 연관성도 부인한다. 1637년까지도 장미십자회 회원이라는 소문에 시달리던 데카르트는 거듭하여 이 혐의를 반박했다. 『방법서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 머릿수만큼의 개혁자가 있었다." 개혁자를 반대한다는 것을 돌려서 말하는 대목인데, 이것은 장미십자회와 더욱 거리를 두기 위한 의도였다. 또한 장미십자회와의 관계를 의식한 듯 '어리석은 짓거리'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방법서설』의 1부 마지막에서 그는 자신의 뜻을 꽤 분명히 표현한다.
그리고 끝으로, 나는 그릇된 여러 학설에 대해 이미 그 정체를 잘 알고 있어서 연금술사의 약속에도, 점성술사의 에언에도, 마술사의 속임수에도, 또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안다고 떠들어 대는 어느 누구의 잔꾀나 허풍에도 더 이상 속지 않게 되었다.
당시 연금술사, 점성술사, 마술사는 장미십자회를 가리키는 말로 통했었다.

1647년에는 이와 관련해서 지독한 사상논쟁(위트레흐트 논쟁)에 휘말린다. 이는 그가 엄청나게 유명해졌고, 그의 철학이 유럽의 각 대학에서 정식과목으로 채택되어 낡은 신념을 고수하는 세력들의 반감을 사게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위트레흐트 대학 학장인 보에티우스는, 데카르트를 당시 잘 알려진 장미십자회 회원들과 엮으면서 데카르트가 무신론자라고 끈질기게 주장했다. 또한 데카르트에 관한 강의를 금지하고, 제자의 이름으로 데카르트의 철학을 반박하는 팸플릿을 돌렸다. 논란이 커지자, 장미십자회 회원임을 자처하고 다니는 사람들까지 유명인이었던 데카르트의 이름을 팔고선 자기네 조직의 적법성을 인정받으려 했다. 당시 무신론자는 화형에 처했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무신론자라는 공격에 한편으로는 겁을 먹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항변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데카르트는 보에티우스에게 공식 사과편지를 보내 이 논란을 무마시켰지만, 그는 이미 이 부질없는 싸움에 녹초가 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데카르트가 네델란드를 떠나 스웨덴으로 가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현대의 데카르트 전공학자들은 데카르트와 장미십자회의 관련성을 의심하고 있다. 2001년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의 에두아르 멜은 데카르트가 장미십자회의 사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도 데카르트가 쓰는 많은 용어가 장미십자회가 쓰는 용어와 겹친다. 장미십자회는 자신들만의 암호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심적 흥분(enthusiasm)', '놀라운 학문(admirable science)', '위대한 발견(marvelous discovery)' 같은 표현들은 정확히 당시에 장미십자회 회원들이 암호로 사용하던 것이었다. 그리고 데카르트가 난로 방에서 꾼 꿈들과 장미십장회 철학 사이에도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데카르트는 꿈에서 '예, 그리고 아니오'라는 시를 보는데, 이는 장미십자회 철학의 핵심을 가리키고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스웨덴에서의 말년


말년인 1649년에는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의 간곡한 초청으로 스톡홀름에 이주하는데, 이 과정이 또 기가 막힌다. 네덜란드에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던 데카르트는 딱히 그걸 무너뜨리며 스웨덴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본래 여왕의 초청을 계속 거절했었다. 하지만 몸이 단 여왕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초청장을 보내다가 나중에는 스웨덴 군함을 보내 데카르트를 태워오게 했고, 눈앞에 나타난 스웨덴 군함을 본 데카르트는 그만 항복하고 여왕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여왕이 자기는 그 때밖에 시간이 안 난다며 새벽 5시에 왕궁으로 와서 철학 강의를 하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스케줄은 보통 사람이라 해도 체력상 쉽지 않은데 설상가상으로 데카르트는 원래 몸이 약해서 항상 오전 늦게까지 잠을 자던 사람이었다. 수도원 시절에도 (수도원에는 새벽 미사가 있다) 정말로 못 일어나서 담당 신부로부터 특례로 새벽 기상을 면제받을 정도였다. 

게다가 크리스티나 여왕은 데카르트의 철학에 푹빠져서 데카르트와의 정해진 수업 외에도 하루에 몇 시간씩 혼자서 공부를 했다. 심지어 업무를 보는 사이사이에도 데카르트의 책을 읽고 말을 타고 사냥을 나갈 때도 손에는 데카르트의 책을 놓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데카르트에게 철학 외에도 문학, 종교, 정치에 관한 문제들을 질문을 했고, 데카르트는 여왕이 가장 총애하는 고문이 되었다. 기존의 신하들은 여왕이 데카르트를 통해 프랑스와 가톨릭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분노하여 그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몄다. 데카르트는 사람들의 적대감을 느꼈고,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이 되지 않을 만큼 스웨덴 행을 후회했다.

결국 과로에다 스웨덴의 혹독한 겨울 날씨와 독감에 따른 폐렴까지 겹쳐서 다음 해인 1650년 2월 3일 앓아눕게 되는데, 당시 데카르트의 친구이자 여왕의 시의였던 '뒤 리에'가 없어서 대신 뵐레스를 보낸다. 문제는 이 뵐레스라는 의사가 평소에 '데카르트가 죽는 걸 보고 말겠다'고 말할 정도로 데카르트가 스웨덴에 온 것을 싫어했던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데카르트는 이를 알고 있었고, 그의 치료를 거부했다. 며칠간 고열과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지만 저절로 나았고 병세는 한풀 꺾였다. 데카르트는 담배향을 탄 술을 부탁했는데, 뵐레스는 알코올과 담배 냄새가 풍기는 검은 액체가 담긴 잔을 데카르트에게 건냈다. 다음날 아침, 데카르트의 병은 다시 나빠져 있었다. 그는 피와 거무튀튀한 액체를 게워냈고 입에서는 가래가 끊임없이 나왔다. 결국 혼수 상태에 빠졌고, 1650년 2월 11일 새벽 4시에 데카르트는 숨을 거뒀다. 사망 원인은 폐렴으로 인한 단순한 병사로 기록됐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독살 의혹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와 르네 데카르트

오른쪽 탁자의 여인이 크리스티나 여왕이고, 바로 오른쪽 옆에 데카르트가 있다.


데카르트가 죽은 후 몇 년이 흘러 1666년 10월 2일, 그의 시신이 발굴되어 유해가 프랑스 본국으로 운구되었다. 유해는 성 바오로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생트 즈느비에브 뒤 몽 성당 지하실로 옮겨졌다. 그런데 프랑스혁명 때 이 성당이 파괴되자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의 위인들이 묻혀 있는 파리의 팡테옹으로 이 위대한 철학자의 유해를 옮기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국민공회는 투표를 통해 이장을 승인하였으니 프랑스 5집정관 정부가 결정을 번복하고 유해를 프랑스 기념물 박물관으로 옮겼다. 그리고 1819년에 마침내, 데카르트는 오래된 건축물인 생제르맹 데 프레 성당에서 최종 안식처를 얻었다.  

이렇게 여러 과정을 거쳐 그의 유해를 다시 안치하는 도중 그의 유골에 두개골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누가 빼돌렸는지는 모르지만 데카르트의 두개골은 스웨덴의 경매장에 있다는 게 밝혀졌다. 이후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현재는 프랑스 인류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두개골은 이빨과 턱이 없어져 훼손이 많이 된 상태로, 이마에 "이 두개골은 르네 데카르트의 두개골이 맞다. 스웨덴 근위대장 한스트림이 보증한다"라고 적혀있다. 한때는 10만년 전 유골인 크로마뇽인과 함께 인류 대표로 전시되었으나, 지금은 전시하지 않고 나무 상자에 보관하고 있다. 

 

데카르트 사상

방법적 회의
그렇다고 내가 의심하기 위해서만 의심하고, 늘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는 회의주의자들을 모방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와 반대로 내 모든 의도가 향한 것은 나를 확신시키는 것에만, 바위나 찰흙을 찾아내기 위해 무른 흙이나 모래를 내던지는 것에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1562년과 1569년에 라틴어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저작들이 번역되고 출판되면서 이에 영향을 받은 미셸 드 몽테뉴와 샤롱 등에 의해 고대의 회의주의가 다시 한번 대세가 되었으며, 또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종교전쟁이 벌어지면서 신 중심의 진리관에 대한 회의가 온 세상을 휩쓸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회의주의가 만연한 이 시기에, 회의주의를 다시 회의함으로써 더 이상 회의할 수 없는 확실하고 객관적인 진리를 합리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그리고 모든 학문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것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의심해서, 그 중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논리를 찾는 것이었다. '회의(의심)'를 통해 '확실한 진리'를 찾는 이러한 방식을 '방법적 회의'라고 한다.

즉, 회의(懷疑) 그 자체가 진리인 것(회의주의)이 아니라 회의는 단지 그 진리를 찾는 방법(방법적 회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데카르트는 기존에 진리라고 믿었던 모든 선입견과 관습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가 첫번째로 의심하는 것은 인간의 감각이다. 감각에 의해 획득된 지식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들이 거짓으로 드러났는가. 이것은 일상적 경험을 통해서도 쉽게 드러난다. 아는 사람인 줄 알고 말을 걸었다가 막상 얼굴을 확인하니 그 사람이 아니었던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자신의 감각으로 내린 판단이 정말 맞는지 헷갈리곤 한다. 다만, 감각이 종종 틀리긴 하더라도 여기에 감각하고 있는 나의 몸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두번째는 나의 몸 자체가 실재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심이다. '내가 여기에 있고, 활동하고 있다'는 앎은, 꿈속에서도 똑같은 장면이 연출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 그 실재성이 의심된다. 꿈과 현실 사이에 어떠한 차이점도 보여줄 수 없다면, 내 몸이 실재로 존재한다는 지식 역시, 확실하게 참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꿈의 가설'에서는 감각하고 있는 나의 몸이 있다는 사실마저 부정된다. 그러나 형태, 수, 장소, 연장과 같은 물질의 보편적인 특성과 이것들의 연관을 문제 삼는 학문인 대수나 기하학은, 꿈에서도 감히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데카르트는 세번째로 마침내 물질의 보편적 특성과 단순한 수학적 명제들의 진리성을 의심하기 위해 '악마(악신)의 가설'을 끌어들인다. '물체가 어떤 공간을 점유하는 연장이라는 것', '2 더하기 3은 5라는 단순하고 산술적인 것'들이 제 아무리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어떤 '기만적인 신'(deus mendax)의 조종과 농간에 우리가 속고 있는지도 모를 노릇이라는 것이다. 그 가정이 비록 극단적이라 해도, 만약 그런 나쁜 의도를 가진 신이 우리를 기만하고자 한다면, 결국 우리가 가장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보편적인 수학적 진리마저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기만적인 신을 가정하고 이 모든 것을 의심하여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확실치 않다고 해도, 단 한 가지만은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는 게 있다. 그것은 ‘생각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생각하는 한, 속고 있는 나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선언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Je pense, donc je suis : cogito ergo sum) 즉, '사유하는 동안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확실한 지식이 되며, 따라서 이것이 모든 학문의 제1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이 '사유하는 자아'를 기초로, 다시금 신 존재를 처음부터 증명하고자 한다.

 

 

신 존재 증명


데카르트는 신 존재를 2가지 방식으로 증명한다. 의심이라는 불완전성은 완전성을 대면하고 있을 때에 비로소 드러날 수 있고, 이 완전성의 극단에 바로 신이 있다. 즉, 모든 의심은 완전한 관념에 대한 의심이고, 우리가 의심하는 존재인 이상, '생각하는' 우리의 사유 속에는 완전성에 대한 관념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완전성에 대한 관념'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관념(본유관념)'이라는 것이 데카르트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완전하고 무한한 신의 관념이 유한한 나로부터 생겨났을 리가 없기 때문에 이런 관념을 야기한 무한한 실체가 있어야만 한다.(인과론적 신 존재 증명) 또한 데카르트에 따르면, 신 이외의 피조물은 신에 의해 창조되는 한에서만 그 현존의 가능성이 있을 뿐이지만, '신'은 자기 존재를 산출할 수 있는 전능한 존재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현존을 보존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그래서 '신'과 '필연적 현존'은 분리될 수 없다. 현존하지 않는 신은 전능하다는 신의 관념과 모순되기 때문에 신은 존재해야만 한다.(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 

하지만 동시대의 인물인 피에르 가상디는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에서 일종의 순환을 발견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순환 논증이 시작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데카르트] 당신은 신에 관한 명석 판명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신이 틀림없이 존재하며 기만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런가하면 당신은 기만자일 리 없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명석 판명한 관념은 틀림없이 참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즉, "신에 대한 관념이 유한한 우리의 머리속에 있는 까닭은 신이 있기 때문이며, 신은 완벽하기 때문에 신은 현실세계에 실재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은 일종의 순환논증이라는 것이다. 후대의 학자들은 이를 '데카르트의 순환논증(Cartesian circle)'이라 부르며, 가상디의 지적이 타당함을 인정하고 있다.

 

 

물질의 원리
이러한 신 존재의 증명은 다시 물질 세계의 진리성을 확보하기 위한 발판으로 쓰인다. 데카르트가 처음에 '기만하는 신'을 가정한 이유는 모든 것을 의심하려는 그 의도에 있었으나, 위에서 증명된 '(철학적) 신'은 '완벽하고 전능하고 선한 신'이기 때문에 이제 그러한 선한 신은 사람을 속이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신은 감각 관념이 물질적 사물로부터 유래한다고 믿는 커다란 경향성을 우리에게 주었기 때문에, 감각 관념은 물체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감각'이 종종 틀리긴 하더라도, '물체'를 느끼는 '인간의 감각 그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닌 것이며,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물체에 대한 감각을 명백하게 판단하여 분명하게 밝히는 한에서, 우리는 물체의 현존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확신으로부터 데카르트는 물질적 혹은 자연학적 사물의 원리를 찾기 시작한다. 우리가 물체의 현존을 인정할 때, 그 물질의 세계에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의심할 수 없는 것)은 '그 물질이 특정한 공간을 차지한다'는 사실, 즉 '연장'에 있다. 즉, 길이, 넓이, 깊이의 연장(Extension)을 가진 물체가 현존하고, 그것은 다양한 형태를 갖고 온갖 방식으로 운동을 한다는 점이 확실하다. 그리고 물체는 오직 연장적 사물이라는 점에서, 모든 물질적 세계는 원칙적으로 모두 수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순수자연학과 응용수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물론 데카르트가 원리로 제시한 진리는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들에 의해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이나, 데카르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는 한 지금까지 그것들을 철학의 원리로, 즉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의 연역 근거로 간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신이원론
우리는 분할 가능한 것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물체도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로 분할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정신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확증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리 작은 임의의 물체라도 그 절반을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떠한 정신도 그 절반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것들의 본성들은 단지 상이할 뿐만 아니라, 어떤 식으로 상반된다는 것이 인지된다.
르네 데카르트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데카르트는 정신은 분할 불가능하지만 물질은 분할 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정신과 육체를 각각의 두 실체로 규정한 심신이원론을 주장한다. 쉬운 예를 들면, 물질인 손발이 잘려나가더라도 정신은 그만큼 없어지지 않는다. 즉, 정신과 육체(물질)는 결코 1대1로 합쳐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육체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정신은 어떤 특정 지점에서 육체와 만난다고 밖에 볼 수 없으며, 데카르트는 그곳을 송과선이라 추측하였다.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데카르트의 전략은 근대 자연학과 수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물론 이런 형이상학적 관점 자체는 전적으로 그 철학자가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고 논리를 구성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대의 관점으로 볼 때 과학적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그와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엘리자베스 공주는 다음과 같은 비판을 한다. 분명 운동은 접촉을 필요로 하고, 접촉은 연장을 필요로 하며, 영혼은 연장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영혼이 육체를 움직일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여기에 대해 데카르트는 중력은 필요로 하는 표면접촉이 없는데도 물체를 아래로 밀어내린다며 반론한다. 이에 엘리자베스는 "나는 비물질적인 존재가 육체를 움직이고 육체에 의해 영향을 받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보다는, 영혼이 질료와 연장을 가졌다는 것을 더 쉽게 용인할 수 있다."고 대꾸한다. 거기에 대한 데카르트의 답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영혼을 육체와 결합되어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므로, 그는 '더이상 그 문제로 어여쁜 머리를 괴롭히지 말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비판
데카르트는 극도로 혼란한 시기에 태어나, 절망과 분노, 슬픔의 정념에 휘둘리는 수많은 삶들을 마주했으며, 그 혼돈의 삶을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써 '이성의 확신'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성의 확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아가자는 데카르트의 방식이, 과연 전적으로 옳다고 볼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다. 이성의 정답에 따라 사는 삶은 예측된 삶의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므로, 거기에는 어떠한 모험도 없으며 삶은 정해져 있고 지루하며 단조롭다. 그렇기에 인간은 이성의 확신에 의해서만 그 삶을 영위하진 않으며, 때로는 감성에 이끌리고 때로는 본능에 이끌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감성과 본능에 이끌리는 것을 원칙적으로 통제하려는 데카르트적 확신의 삶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지에 대한 물음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테다. 

또한 데카르트는 학문을 나무에 비교했다. 뿌리는 형이상학이고 줄기는 자연철학이며 가지는 의학, 기계학 등의 응용학문이고 말단은 윤리학이라고 보았다. 이 전체가 하나의 보편적 학문인 철학으로써 유기적 통일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단일성, 보편성, 전체성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다원성, 특수성, 상대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에게 비판을 받는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물질에 영혼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물질은 얼마든지 조작 가능하며,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이 결국 자연의 심각한 파괴를 불러온 것이라고 생태주의 지지자들은 비판을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데카르트는 동물을 일종의 기계라고 생각했는데, 동물애호가들은 동물에게도 생명이라는 존엄성이 있으며 그것을 인간의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것은 지나친 인간중심적 사고라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철학
데카르트는 철학적 논쟁을 "무엇이 참된가"에서 "내가 무엇을 확신할 수 있는가"로 전환시켰고, 이를 통해 진리의 권위를 보장하는 역할을 신에서 인간으로 바꾸었다. "무엇이 참된가"에서는 진리의 근거로 신을 말할 수 있지만, "내가 무엇을 확신할 수 있는가"는 전적으로 개인의 판단에 달려있어 '진리의 근거로서의 신'은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즉, 데카르트 이후로 '신 중심'의 철학은 점차 '인간 이성 중심'의 철학으로 바뀌어 갔다. 진리의 보증인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인간이며, 각자는 자신의 현실에 대한 '자의식의 형성자'로서 '생각하는 주체'를 가진다. 주체를 가진 각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아이가 아니라 스스로의 이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어른이 된다. 이제 인류는 기독교 계시 진리와 교회 교리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 법을 만들고 자기 입장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문에 데카르트의 철학적 작업은 기독교 중세에서 근대 주체로의 전환을 극적으로 성취한 혁명적인 결과라고 평가받으며, 지금도 그 영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 이성을 자율적으로 확립한 그의 관점은 이후 계몽주의가 신과 교회로부터 해방되는 기초를 제공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데카르트가, 이전 시대의 철학사조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어느날 갑자기 비연속적으로 출현한 것은 아니다. 가령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은 그 자체로는 딱히 발칙한 시도라거나 반골적인 시도가 아니였으며, 오히려 스콜라학자 안셀무스가 보인 신 존재 증명의 전통에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신 존재 증명에 한에서는 명백히 스콜라적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으며,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 둔스 스코투스, 토마스 아퀴나스의 노선에서, 이성으로 신 존재를 증명하려고 한 후기 스콜라학자 중 한 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 존재 증명은 앞선 학자들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말했다는 점에서, 이는 결코 업적이라 볼 수 없으며 데카르트의 한계라고 말해진다. 데카르트가 철학계에서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높이 평가받는 부분은 그가 '코기토'를 발견했다는 것에 있지, 신존재를 증명한 것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기존 스콜라학자들과 구분되는 지점은, 그가 철학에서 우선 순위를 '신' 보다 '인간의 이성'에 먼저 두었다는 점에 있다. 즉, 데카르트는 "철학의 제1원리"를 '코기토(생각하는 주체)'에 두었다는 점에서, 기존 스콜라학자들과 전적으로 다른 길을 걸어갔다. 기존 스콜라학자들도 '이성'으로 신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던 것은 맞으나, 그들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신'이 철학의 제1원리였고, 인간의 이성은 단지 '신 존재 또는 신이 만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능력일 뿐이었다. 반면 데카르트는 그 순서를 뒤집어 "생각하는 주체"인 인간의 이성이 철학의 첫번째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를 통해 "근대철학"의 포문을 열었던 것이다.
데카르트는 새로운 것의 대변자인 동시에 낡은 것의 대표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일소하고 철학을 새롭고 확실한 토대 위에 정초하고자 하였으나 동시에 그의 사상은 무엇보다 그의 신 존재 증명에서 볼 수 있듯이 스콜라적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그렇기에 데카르트는 보통 근대 철학자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신 존재 증명에 한해서) 후기 스콜라학자로 분류하는 것도 가능하다. 따라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은 스콜라적 전통에 깊이 뿌리박혀 있고 그것은 낡은 것을 대표하는 것이지만, 철학과 신을 분리시켰다는 점에서 데카르트는 새로운 것의 대변자이자 그 낡은 모든 것을 일소하여 철학을 새롭고 확실한 토대 위에 정초하고자 한 인물이었다.

 

수학
데카르트가 '좌표계'를 만들었다. 정확히는 직교 좌표계를 도입했으며, 이것으로 인해 수학은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수천 년 동안 서로 다른 관점과 목적을 가지고 별도로 발달했던 기하학과 대수학이 데카르트가 만든 직교좌표 위에서 융합되었고, 그 결과 새로운 '해석기하학 (Analytical Geometry'이 탄생하게 되었으니, 좌표의 도입만으로도 데카르트는 위대한 수학자의 반열에 들기 충분하다. 이 때문에 직교 좌표계를 두고 'Cartesian coordinate (데카르트 좌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후 뉴턴이나 라이프니츠가 미적분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좌표계에 기초한 대수적 함수의 개념이 데카르트에 의해 이미 도입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은 데카르트는 처음으로 방정식에 미지수 X를 사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1637년에 출간한 《방법서설》에서는 미지수를 현재와 같이 ( x, y, z )로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그 많은 글자 중 왜 하필 X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한가지 확실한 점은, 이전까지는 수학에서 '어떤 수'를 가리키는 방법이 나라별로 달랐으나 보다 간결한 X의 등장으로 언어를 불문하고 세계의 수학 언어를 통합시켰다는 것. EBS 다큐 오늘 - 데카르트 x의 비밀

1987년 피에르 코스타벨은 '데카르트의 비밀 노트'에, 위상수학에 해당하는 오일러 공식이 이미 증명되어 있음을 밝혔다. 이는 데카르트 전기 『데카르트의 비밀노트』라는 책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과학
그 당시에는 유명한 물리학자였다.
모든 현상은 3차원 공간에 존재하는 단순정량자와 몇 가지의 법칙에 지배되는 운동에 의한다.

이런 말을 남겼다. 여기서 3차원 컴퓨터 그래픽스가 발전한다.

음펨바 효과로 보이는 현상을 기록한 바 있지만, 적절한 설명은 내놓지 못했다. 다만 그렇다고 데카르트가 물리학에서 부족한 면이 많다고 볼 수는 없다. 이 효과는 아직도 그 원인이 불명이기 때문이다. 현재 가장 유력한 가설인 싱가포르의 난양 공과대학교 연구진이 제기한 이론에 의하면 물의 특이한 상전이 방식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추정되는데, 이게 현대의 열역학 이론과 분자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그럴싸한 설명이라도 할 수 있는데, 분자의 존재는 커녕 원자가 있는지도 몰랐던 시대의 과학자가 이를 규명해낼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의학
네덜란드에 있을 때 해부학에 관심을 두었다. 인간의 영혼을 찾기 위해 인체를 해부하는 데에 시간을 많이 들였고, 윌리엄 하비와 심장의 움직임에 대해 다투기도 했다. 그러다가 송과선이 육체와 정신이 만나는 점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마저도 동시대인인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비판받은 흑역사가 있는데, 그가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도입한 육체-정신 이분법을 인체에도 적용하느라 생긴 해프닝이다.

대학에서 수업을 하지 않을 때에는 의사가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건강을 상담하고 처방했다. 이 당시에는 의학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휴식을 취하는 등의 기본적인 처방이 잘 먹혀들었다. 

그러다가 프랑신이 죽은 뒤 의학자로서의 삶을 그만두고 철학자로 살게 된다. 

 

어록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방법서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일생에 한 번은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철학의 원리』 


하지만 제 생각에 자연의 모든 것은 수학적으로 일어납니다.
메르센에 대한 답변 


지금까지 철학이라 일컬어 온 모든 것들을 가장 적게 배운 사람들이 참된 철학을 배울 능력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
『철학의 원리』 서문 中


아주 느리게 걷더라도 늘 곧은 길을 따라간다면, 뛰어가면서 곧은 길에서 벗어나는 사람들 보다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방법서설』


동물은 기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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