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중, 아프리카 주도권 경쟁
브렉시트 보완할 잠재력 주목한 영국
위축되는 글로벌 경제입지 활로
빠른 성장 옛 식민지 대륙서 모색
“향후 2년간 20억 파운드 투자”
인프라 깔아주며 ‘안마당’ 만든 중국
30년간 외교장관 매년 첫 방문
민족해방 고난 동병상련 강조
아프리카 최대무역상대국 올라
영국이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이후 과거 식민지 경영을 하던 아프리카에서 활로를 찾으려는 노력을 본격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뿌리를 내린 중국의 세력이 만만찮다. 최근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뜨거운 대륙’ 아프리카의 주도권을 놓고 옛 종주국 영국과 ‘굴러온 돌’ 중국의 대결이 눈길을 끌고 있다.
왕의 귀환, 영국-아프리카 정상회의
영국은 지난 20일 런던에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가나의 나나 아쿠포아도 대통령, 이집트의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 등 아프리카 16개국 정상이 참석한 가운데 영국-아프리카 투자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정상회의에 참석한 존슨 영국 총리는 영국이 아프리카의 투자 파트너가 되기를 원한다면서 “아프리카는 미래이며 영국은 그 미래를 위해 거대하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알로크 샤르마 영국 국제개발부 장관은 정상회의 종결연설에서 “영국 정부 소유의 개발금융기관(CDC)이 아프리카에 대한 3억파운드(약 4600억원) 규모의 신규 투자에 동의했다”며 “향후 2년 동안 20억파운드를 더 투자할 것”이라고 밝혔다. 영국 <더 타임스>는 18일 이와 관련해 “영국 정부가 대아프리카 전략을 강화하기 시작했다”며 “이를 위해 런던 금융시장의 강점을 활용하려 한다”고 분석했다.
영국이 아프리카에 다시 눈을 돌리는 것은 검은 대륙의 잠재력을 재평가했다는 뜻이다. 현재 12억 인구의 아프리카는 60%의 인구가 25살 미만일 정도로 젊은 인구층이 많고 최근 빠른 성장을 보인다. 특히 동아프리카는 2010~2018년 연평균 6%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샤르마 장관도 이날 연설에서 “여러 아프리카 국가가 최근 수십년 동안 세계 평균 경제성장률을 능가하는 등 아프리카의 투자 잠재력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2050년까지 전세계 4대 소비자 중 1명이 아프리카인이 될 것”이라며 “아프리카는 영국의 글로벌 경제 입지를 유지할 큰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6년 브렉시트 탈퇴를 위한 국민투표 가결이 영국의 ‘아프리카 회귀’를 재촉했다.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우간다, 케냐 등 옛 식민국가들과의 경제협력 확대와 외교 관계 개선을 통해 아프리카에서 수출 시장을 확보하고 중국, 프랑스 등 다른 강대국들이 아프리카 국가들과 밀착하는 것을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레어 전 총리는 “2014~2018년 사이 아프리카에 대한 영국의 직접투자는 약 170억달러로 중국의 720억달러, 미국의 310억달러 등보다 훨씬 낮았는데 이는 달라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브렉시트로 인한 유럽대륙과의 분리를 아프리카와의 글로벌 네트워크로 보완하려는 영국의 이런 정책을 두고 일부 전문가들은 ‘신 식민주의’라고 꼬집기도 한다.
30년 동안 매년 중국 외교부장 첫 방문지는 아프리카
영국의 아프리카 ‘귀환 노력’이 성공을 거둘지는 미지수다. 이미 아프리카는 중국의 ‘안마당’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번 영국-아프리카 투자 정상회의에는 아프리카에서 불과 16개국 정상만이 참석했지만 2018년 베이징에서 개최된 중국-아프리카 협력포럼에는 전 아프리카 54개국 중 53개국의 정상이 참여했다. 아프리카 유일의 대만 수교국인 에스와티니만 제외됐다.
중국이 아프리카와 첫 중국-아프리카 협력포럼을 열었던 2000년 중국은 아프리카에서 불과 50억달러어치의 상품을 수입했다. 당시 영국은 130억달러어치를 수입했다. 하지만 19년이 흐른 지난해 중국의 대아프리카 무역액은 2천억달러를 넘어 11년째 아프리카의 최대 무역상대국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동안 중국은 2억달러를 투자해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아프리카 연합 건물을 지어줬다. 지금은 1억4천만달러를 들여 짐바브웨의 새 국회의사당을 짓고 있다.
접근 방식도 다르다. 영국은 아프리카에 투자한 금액의 51%를 자원 채굴 등에, 34%를 금융서비스에 투입했다. 여전히 아프리카에서 자원을 개발해 가져오고 공산품을 내다 파는 식민시대 방식의 무역을 했던 셈이다.
이에 비해 중국 외교부 장관들은 지난 30년간 매년 해외 첫 방문지로 아프리카를 찾으면서 논리적으로는 ‘동등한 주권국’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왕이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올해도 첫 방문지로 아프리카를 택해 지난 7~13일 이집트, 부룬디, 짐바브웨 등을 방문했다. 왕 외교부장은 지난 12일 짐바브웨 하라레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중국과 아프리카는 독립과 민족 해방에서 고난을 함께한 남북협력의 모델”이라며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일방주의가 만연한 국제관계 속에 중국과 아프리카는 국제연대 및 공동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공동의 요구가 있다”며, 미국과 유럽을 견제하기 위한 아프리카와의 ‘전략적 연대 필요성’도 숨기지 않았다.
실제 왕 외교부장은 중국의 확장 정책인 ‘일대일로'의 성과와 필요성도 강조했다. 2018년 개통한 동아프리카를 관통하는 몸바사~나이로비 철도(489㎞)를 비롯해 중국이 아프리카에서 건설한 철도와 도로가 각각 6천㎞를 넘어섰고 130여개 의료시설과 45개 체육관, 170여개 학교를 지어줬다고 홍보했다. 토목 분야를 넘어 동아프리카 각국을 연결하는 해저 광케이블을 건설하고, 23개국의 통신망을 설치하는 등 디지털 실크로드 작업도 추진하고 있다. 중국 인민은행이 발행할 디지털 화폐의 시범 도입 가능성도 제기된다. 최근 아프리카를 방문한 마윈 알리바바 그룹 전 회장은 “오늘의 아프리카는 20년 전의 중국”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에 대해 유럽과 미국은 아프리카가 중국이 놓은 ‘채무의 덫’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부패한 정부를 활용해 일대일로 사업 등으로 큰 부채를 짊어지도록 한 다음 아프리카 국가들의 내정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이를 서방의 ‘의도적 비난’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온라인 매체 <쿼츠 아프리카>는 “아프리카의 비전은 50억달러 가치의 코코아 시장을 1천억달러 규모의 초콜릿 시장으로 바꾸는, 중국을 계승해 세계의 차세대 제조업 중심지가 되는 것”이라며 “영국이 아프리카의 개발 파트너가 되기를 원한다면 중국처럼 아프리카의 새로운 미래에 적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국-아프리카 관계
전근대
과거 중국산 도자기같은 물품들은 인도양 교역망을 통해서 아랍인, 페르시아인, 포르투갈인 상인들을 통해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까지 퍼졌다. 짐바브웨 유적지에서 중국산 도자기가 발견되면서 고고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직접교류는 물론 부재했고 중세 중국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대한 정보 역시 아랍인/페르시아인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 정보였다.
불름국(동로마 제국)에서 서남쪽으로 사막을 건너 2천 리 가면 마린(磨鄰)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노발살(老勃薩)이라고도 한다. 그 사람들은 검은 색이고 성질이 사납다. 그 지방에는 전염병이 많고 초목과 오곡이 없으며, 말린 물고기로 말을 사육하고 사람들은 대추야자 등을 먹는다. 위 아래로 문란한 행위를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음이 오랑캐들 가운데 가장 심하다. 그 군신은 7일에 하루 쉬며, (그런 날은) 명령의 집행이나 교역의 사무도 하지 않고 마시면서 밤을 지샌다
바다 가운데에 발발력(撥拔力) 종족이 있는데 어디에도 복속하지 않는다. 오곡이 나지 않아 고기를 먹으며 소를 찔러 그 피를 젖과 함께 마신다. 풍속은 의복을 입지 않고 양가죽으로 자기를 가린다. 부인은 하얗게 밝고 아름답다. 상아와 아말향(阿末香)이 많아서 페르시아의 상인들이 가서 교역을 하려고 하는데, 반드시 수천명이 고운 포[㲲]를 바치고 피로 서약서를 써야지 교역을 할 수 있다. 무기로는 예리한 것들이 많고 또한 활·화살·갑옷·창이 있다. 병사는 20만에 이르는데 여러 차례 대식국의 침략을 받았다.
신당서
북송 태종이 그 나라에 대해 물으니 사절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대진국(大秦國)과 인접해 있는데 그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관할하고 있는 인구는 겨우 수천에 지나지 않으며 도성은 산과 바다 사이에 있습니다." 또한 그 지역의 산물에 대해 물으니 "다만 물소뿔과 상아, 향약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물소와 코끼리를 어떻게 잡느냐고 물으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코끼리는 미끼를 이용하여 유인한 다음 동아줄로 만든 올가미로 옭아맵니다. 코뿔소는 사람이 큰 나무 위로 올라가서 활과 화살을 들고 있다가 다가오면 쏘아 죽입니다. 작은 코뿔소는 활과 화살을 쏘지 않고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중국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의 직접적인 교류의 역사는 명나라 왕조의 정화(鄭和)의 함대가 지금의 소말리아, 케냐의 해안까지 도달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이러한 교류는 정기적인 수준으로 정착되지 않았고. 정화의 함대에 대한 기록이 개략적으로 남아 있어 어딜 갔는 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이후로도 아프리카와 중국간의 교류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근대기가 되어 중국계 쿨리들이 모리셔스와 남아공 등지로 이주하기 이전까지는 주로 도자기, 비단같은 물품들이 아랍인, 페르시아인, 포르투갈인 상인들을 통해 유통되었고, 중국과 아프리카간의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다.
냉전기
국공내전 승리로 집권한 중국공산당 정권이 1950~60년대에 아프리카의 독립 국가들과 제3세계 비동맹 연합 등으로 교류했다. 특히 잠비아, 짐바브웨, 탄자니아, 우간다, 소말리아, 콩고민주공화국,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같은 아프리카의 제3세계 국가들이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국가 경제가 파탄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수교만 하면 무이자, 무담보, 무조건으로 해당국가를 지원했다고. 다만 이 과정에서 소련이 지원하는 세력과 싸우는 일이 벌어진다든지 하는 웃지 못할 일들도 벌어지고는 했다.
현대
경제
현재 지배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나라가 중국이다. 200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식민지배의 영향으로 인해 유럽 선진국들의 영향력이 심지어 미국보다도 강했다. 하지만 금융 침체 이후로 아프리카에 대한 유럽의 관심이 사라지는 와중에 중국이 성장했고 유럽과 미국의 영향력을 뺏었다. 사실상, 아프리카 대륙 전체가 중국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며 특히 대무역 관련 부분은 모조리 중국이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자본은 지금 이 순간도 엄청난 속도로 아프리카 전역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나라의 광물 자원을 독점 계약하여 아프리카의 경제에 화교의 목소리가 상당히 높아졌다.
중국과 아프리카 국가들 간의 경제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국 내의 프랑스어 전공자들이 아프리카에 진출한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중국 위안화를 준비자산통화로 사용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또한 카보베르데같은 국가에는 적극적인 원조로 포장도로 건설을 도와 왔다.
2018년 7월 24일에 중국 부주석인 왕치산이 제5회 중국-아프리카 민간포럼 개막식에 참가하면서 중국과 아프리카의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인민일보가 보도했다.
2018년 8월 28일에 첸커밍 상무부 부부장은 중국과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교역에서 무역이 급상승 중이고 아프리카에서 수입한 제품의 97%가 무관세혜택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2018년에 중국이 미국과 무역전쟁을 겪자 아프리카의 다른 국가들을 초대했고 대규모의 경제협력을 보인다. 그리고 2018년 9월 7일에 중국이 아프리카 54개국 중 53개국 정상을 베이징으로 대거 초대해 중국-아프리카 협력포럼 정상회의를 개최하고 37개국과 일대일로로 연관된 협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중국은 중국-아프리카 포럼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보였다.
중국은 부룬디에 대통령궁을 세워준 것에 이어 가봉, 콩고, 짐바브웨에도 의사당을 건립할 계획을 세우면서 아프리카 국가들에 건물들을 세우고 있다.
대부분 극도로 부패한데다 독재 정권이 많은 아프리카 각국의 정부에 인권 문제로 태클을 거는 서양과는 달리 유연하게 접근하는 태도도 한 몫 한다.
미-중 간의 갈등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아프리카 국가들은 중국에 농산물을 수출한다. 그리고 중국의 지원으로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과 앙골라 로비투를 잇는 철도가 개통되었다. 하지만 이 로비투 철도의 추가적인 개발은 이제 1세계 국가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로비투 회랑 참조.
중국 외교장관이 30년간 매년 해외 첫 방문지로 아프리카를 택해 눈길을 끌고 동시에 일대일로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코로나19 영향으로 2020년 상반기 중국과 아프리카 국가들 간의 무역이 작년 동기 대비 20% 가량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중국의 아프리카 투자가 석유에서 광물로 옮겨지고 있다.
중국 업체들이 아프리카의 휴대폰 시장에 진출해 사실상 점유율이 높아지고 있다.
화웨이를 비롯한 중국의 기술기업들이 아프리카 국가들의 디지털 금융 혁명을 막후에서 주도하고 있다.
중국이 스스로 아프리카에 과도한 대출을 하고 이를 회수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중국 기업들이 리튬 배터리 산업 체인을 위해 아프리카로 진출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문화
현재 35~40만 명(그 중 남아공에만 30만 명)이 넘는 화교가 아프리카 전역에서 산다. 어느 학자는 중국의 인구 문제를 해결하려면 최종적으로는 3억 명의 중국인을 아프리카로 이주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케냐의 한 부족 가운데는 부족을 만든 조상이 정화의 대원정과 관련된 중국인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며, DNA 조사 결과 실제로 중국인의 DNA가 있었다. 또한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오래 전부터 살아 온 중국계 혼혈이 꽤 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인종차별을 비롯한 문제로 말이 많거니와, 이들과 중국계 이민자 사이의 갈등 역시도 고민거리로 떠오른다.
수단 등지에서 "중국어" 수업은 인기를 끌고 있다. 중국어 학원인 공자학원 역시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아프리카 내의 여러 나라에 개원해 있으며 중국어 학습의 열기가 뜨겁다. 중국계 기업에서 아무래도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직원들을 선호하다 보니 그런 것. 하지만 이런 열풍과는 반대로 중국 기업과의 갈등으로 반중의 기미도 사회적으로 스멀스멀 자리잡는다.
그렇다해도 스타타임즈를 비롯한 미디어 기업들이 아프리카 상당수 국가의 빈민촌이나 시골에서도 위성TV를 싸게 설치하는 사업을 벌여서 아프리카 시골마을에서도 다채널 방송을 즐길수있게 한다든지, 샤오미, 화웨이 등 중국 기업들이 아프리카에도 진출해서 아프리카인들에게 싸게 휴대폰을 공급해준다는 식으로 어느 정도 문화적인 혜택을 본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근본적으로는 틈새시장을 노린 것이지만, 이런 기업들의 활동들을 측면에서 지원해서 먹히게끔 하는 것도 뭐 전략은 전략이니까. 현지인력 고용 안하는 막장 건설업체들보다는 훨씬 낫기는 하다 여하튼 이러한 중국기업들의 진출로 중국 드라마와 중국 영화, 중국 애니메이션등이 아프리카에도 절찬리에 방영되고 있으며, 주로 인기를 끄는것이 무협드라마라고 한다. 다만 스타타임즈에서 뉴스채널을 선정할때 BBC 뉴스채널이나 CNN, 프랑스 24를 비롯한 서방뉴스 채널들을 배제하고 대신 CGTN을 대신 넣는다거나 하는식으로 서방뉴스채널을 은근슬쩍 배제하는 등 견제하고 있어서 이러다가 중국기업이 아프리카의 여론도 통제하는거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기는 한다.
또한 중국인들이 아프리카에서 현지인과 통혼하면서 흑중혼혈의 2세대도 태어나고 있다.
아프리카 연합의 제2대 의장 장 핑(Jean 平)부터가 가봉/중국인 혼혈이다. 지금의 동남아처럼 아프리카를 중국 밖의 정치적/경제적 영토로 넘볼 중국인 후손들이 많을 것이다. 중국보다 먼저 아프리카에 진출했던 인도인이나 유럽인들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의 반이민정책으로 미국이 아프리카 출신 엘리트들의 미국 유학을 막자 중국 측은 아프리카 출신 학생들에게 비자발급을 완화해주고 아프리카에도 공자학원을 설립하는 등 중국어 학습을 확산하고 있다. 거기에다 중국어의 영향력도 커지면서 중국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중국인 이름을 쓰거나 중국어를 배우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 등 먼 미래에는 중국어가 아프리카에서 널리 사용될 것이라는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극단적으로 상하이에 있는 이공계 특화 대학교인 퉁지 대학에는 유독 아프리카 출신 유학생들이 많다.
알제리의 압델라지즈 제라드 총리는 알제리에서 교육방송TV 개국행사에서 아랍어, 프랑스어 외에도 영어, 중국어도 가르치는 것이 좋다고 적극 권장했다.
아프리카 유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유학 대상지가 중국으로 바뀌고 있다.
12월 5일, 중국 정부가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의 청사 건설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군기지
아프리카 서부에서 나이지리아의 라고스와 앙골라의 루안다 항을, 동부에선 케냐의 몸바사와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 항, 지부티와 모잠비크의 마푸투, 마다가스카르, 세이셸 군도(인도양)에는 이미 중국의 해상 보급 시설이 들어서 있다. 아프리카 전체를 감싸는 십여 곳의 해군 기지를 건설 중이다. 이미 지부티에는 중국군 기지가 설치되었다.
군사교류도 진행 중이라서 중국은 2018년 6월 26일부터 7월 10일까지 제1회 중국-아프리카 방위 안보포럼을 개최하기로 발표했다. 그리고 2019년 7월 16일에 아프리카의 50개국을 초청해 안보대화를 가졌다.
중국이 지부티에 항모정박이 가능한 첫번째 군사시설을 만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아프리카의 친중
아프리카의 친중 감정은 주로 중국이 과거 이 지역을 침략하던 유럽인이나 아랍인들에 비해 낫다는 역사적인 이유에서 비롯된다. 대표적인 친중, 친북 성향의 정치인이던 로버트 무가베의 경우도 과거사와 민족 감정을 이유로 서구 대신에 중국을 롤모델로 삼았다. 경제는 물론, 정치와 문화에까지 광범위하게 침투한 서구 열강들과 달리 중국은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아프리카 국가들의 내정에까지 간섭하거나 문화를 강요하지 않았다. 이것이 아프리카의 지식인들에 있어 중국과 서구가 더욱 구별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또한 중국은 인권이나 독재, 부패 등을 막론하고 일단 돈이 필요한 국가들에 자금을 빌려주기에 서방측 인권 & 부패 기준에 못미치는 독재 국가가 여럿인 아프리카에서 중국 자본은 어떤 국가들에게는 유일하게 받을 수 있는 거대 대출 통로이기도 하다. 즉, 여러 정권들의 생명줄인 것.
산업기반이 부족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중국의 투자를 기회로 삼는 나라들이 많은데 그 중 하나로 기니를 뽑을 수 있다. 기니는 매년 맥주 캔 300억 개를 만들고 자동차 차체 3500만 대를 만들기 위해 충분한 보크사이트를 생산하는 중인데 중국은 이에 대해 맥주 캔이나 자동차 차체를 직접 만들 수 있는 기반시설을 지원하겠다고 나선 상황. 반면 기존 선진국 정부나 기업들은 기니에서 직접 생산하려면 발전시설 및 운송시설을 다 구축해줘야 할 뿐더러 자국 일자리와도 연계되는 문제이므로 자원의 수입만을 염두에 두는 상황이다. 이렇기에 기니 우스만 실라 장관은 중국 덕분에 자국 정부에 자금 부담이 전혀 없고 오히려 세금을 거둬들이고 일자리와 인프라, 에너지를 창출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존 선진국들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남아공의 학자 마틴 데이비스는 이러한 논지의 연장선상에서 기존 선진국들이 재투자에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면서, 서구 국가들의 중국 비판이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서아프리카에서 그나마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나라인 가나의 경우도 토질이 비옥하여 양질의 농산물들이 생산되지만 가공기술의 부족으로 가나 본국에서는 토마토가 썩어나는데 요리용 토마토 통조림을 이탈리아에서 비싼 돈 주고 수입하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자본과 기술이 도입되어 물자의 자급 혹은 수출이 가능해진다면 현지인들 입장에서는 매우 반가워할만한 일이기도 하다. 상당수의 아프리카인들은 중국의 아프리카 투자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서아프리카해안에 중국이 국제 고속도로를 짓겠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아프리카인들 중에서 중국어를 배우는 등 친중으로 돌아서는 사람들이 적잖이 보인다. 심지어 중국 도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있다. 아프리카 내 활동하는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한 아프리카 토속신앙과 전통 문화 상실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아프리카 내 중국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을 환영하는 분위기이다.
중국에는 몇십만 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이중 광저우에서만 6만 명 가량이 거주한다는 비공식 집계도 있다. 그리고 중국은 5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 유학생들을 유치하고 있다.
다만 중국으로 이민가려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들은 미국, 유럽으로 이민을 희망하는 사람이나, 한국이나 일본으로 이민을 희망하는 사람에 비하면 아직 소수이다.
2020년대 들어 중국은 남반구에 주로 위치한 신흥국과 개발도상국 공략을 뜻하는 '글로벌 사우스' 전략을 통해 남미·아프리카·남태평양·동남아시아에서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극복하고 미국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미국 개편을 위해 등의 국가들과 협력을 확대하며 경제·외교·군사 동맹을 강화하고 있다. 우선 중국·아프리카 평화안보포럼을 개최하며 대아프리카 외교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2023년 기준 아프리카의 일대일로 협약 체결국은 37개국에 이르렀다. 또한 브릭스(BRICS)에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집트, 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나라들이 합세했다. 2024년 9월에는 2024년 중국-아프리카 협력포럼(FOCAC) 정상회의를 개최한다. 올해 FOCAC에서 중국은 ‘현대화 추진과 높은 수준의 중·아프리카 운명 공동체 건설’을 주제로 아프리카 국가와의 협력을 강화할 방침이다.
2022년 아프리카 15개국 4500여명에게 여론조사한 결과, 영향력과 긍정평가 면에서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였다. 2020년 미-독-중-러 순이던 호감도는 2023년 기준 중-미-독-러 순으로 바뀌었다. 이에 대해 베이징외대 국제관계 및 외교학 교수 쑹웨이는 “중국은 이들 국가의 발전에 기여하는 평등하고 상호 이익이 되는 파트너십을 제공하지만 미국은 종종 ‘당근과 채찍’ 전략을 사용하며 자국의 이익을 위해 지원을 강요하고 이들 국가를 지정학적 경쟁의 도구로 취급한다”며 양국을 비교했다.
아프리카인들의 반중감정
상술했듯 아프리카에서의 중국 이권 독점이 심각한 만큼 반감과 증오도 그에 못지않게 심하다. 엄밀히 말하면 로열 더치 쉘같은 서구의 다국적 기업이 하는 경제침탈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투자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이 때문인지 오죽하면 아프리카 국가 현지에서도 아프리카 나라들을 식민지배했던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포르투갈 같은 서유럽 열강들 못지않게 중국도 악독한 국가라고 평하는 현지인들도 있다.
케냐에 간 어느 한국인 여행자가 현지인들과 친해지면서 그 사람들의 한탄을 들었는데 이전에는 도기라도 구워서 어찌 팔아 겨우 밥먹고 살 수 있었지만 중국제 플라스틱 그릇이 팔리면서 도기가 팔리지 않는다며 플라스틱 그릇 만드는 그 중국인들을 쏴 죽여버리고 싶다는 반중 발언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나이지리아에서는 중국산 오염된 쌀이 유통된 사건이 발생되면서 파장이 커지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도 여러 자국 자본가들에 의해서 그릇이나 비누같은 여러가지 공산품들이 생산 중이었는데, 21세기 들어서 여기에 여러 가지 다양한 중국산 제품과, 그 외에도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등지에서 생산된 공산품들이 유입되었는데 이들은 질이 아프리카 제품들에 비해 품질이 좋으면서 가격경쟁력 또한 높았기에 문제가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외국산 공산품은 아프리카에서 유통되었지만 이 제품들은 주로 선진국인 유럽이나 북미 국가들에서 수입된 제품이었고 그에 맞게 값도 매우 높았기 때문에, 극소수 부자들이나 해외 제품을 썼지 일반 국민들은 값싼 아프리카제 공산품들을 사용했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유입된 (주로 아시아의) 신흥공업국들의 공산품은 아프리카 토종 공산품들에 비하면 질도 월등히 좋았을 뿐만 아니라, 가격까지 충분히 저렴해서 아프리카인 자본가들의 입지가 날로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그리고 기존의 아프리카 제품들보다 좀 더 품질이 좋고 값은 싼 아시아제 공산품들은 압도적으로 중국산이 많았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공장주나 자본가들 사이에서 '중국이 우리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게 아닌가'하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그리고 부패하고 무능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부들이 내부 불안감이 커지자 그 원인을 중국으로 무작정 돌린 것도 한 몫 했다. 앙골라에서 반중 시위가 일어나자, 중국인 보호를 위해 앙골라 정부에서 반중 시위대를 실탄 사격 등을 동원해 무차별 진압하여 사망자가 생기는 사건이 있었다. 그 이후 격분한 민심을 다독이려는 정부가 그 원인을 엉뚱하게도 중국의 탓으로 돌려 애꿎은 혐중이 생겨났다.
수단에서도 북부 수단에 대한 중국의 노골적 지지 및 군사적 지원으로, 상대편 남수단(2011년에 독립)에선 중국인들에 대한 증오가 만연해져 2007년 남수단에서 일부 중국인 가게가 습격을 받고 3명의 중국인이 살해되기도 했다. 남수단은 2011년에 독립하여 정식 국가로 인정받았으나, 그 이전부터 종교나 인종 갈등이 숱하게 발생했기 때문에 2011년 이전 남수단에서 일어난 사건도 당시 한 나라였던 수단의 문제가 아닌 남수단의 문제로 보는 게 옳다.
2017년 새해 방송 비정상회담에서 가나 비정상이 중국한테 일자리에 관해서 돌직구를 날리기도 했다.
2018년 1월 29일에 르몽드는 중국이 아프리카 연합의 본부를 세웠을 때 건물에 도청장치를 같이 설치해서 5년 동안 도청한 것을 보도하면서 중국이 반발했다.
또 2018년 중국중앙전시대의 연례 춘절 특집 프로그램(춘지에완후이)에서 일대일로를 홍보하면서 아프리카인으로 분장한 배우와 중국을 찬양하기만 하는 아프리카인 배우를 등장시키고 그 외 여러가지 스테레오타입적인 장치로 인해 빈축을 산 적이 있다. 춘제완후이는 방송국이나 방송의 특성상 중국 공산당 정부의 입장이 많이 들어간 방송이기 때문에 사실상 나라 망신 수준이다. 사실 중국의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한 인종차별 역사는 좀 오래 되었는데, 최소 문화대혁명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들이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을 일으켰던 시기에 케냐 대사관도 공격을 받았는데, 이 때 홍위병들은 케냐 대사관 근처에서 얼굴을 까맣게 칠한 밀짚인형의 목을 나무에 매달아 놓는 인종차별 쌩쇼를 벌인 적이 있었다. 홍위병들한테 가르침 준 인간을 국부로 추앙하고 있는 게 누구들인지, 그리고 그 누구들이 지금도 중국 지배층을 해먹고 있다는 사실도 생각해 보면 왜 중국이 여전히 1960년대 시절 인종차별을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국제 개발, NGO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의 반중감정 때문에 같이 싸잡아 욕을 먹고 있다. 아프리카의 반중감정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는 게 일대일로로 대표되는 중국 ODA는 무상 원조가 아닌 유상 채권이고 유상 채권 대부분 건설(고속도로, 빌딩)쪽으로 치우치는데 중국 건설업체에서 인부를 현지 채용하지 않고 전부 중국 인부를 데려와 건설하고 있다. 당연히 일자리 창출이나 산업 개발을 통한 국가 경제이익이 전혀 없는 상황이다. 고속도로, 지상철을 설치하고 고층 빌딩을 만들며 인프라를 정비하는 것 자체는 좋은데 설치 비용을 중국에서 일방적으로 계산한 후 해당 국가에 청구하는 게 문제이다.
쉽게 말하자면 "네가 돈이 없어도 집을 지어줄게. 대신 가격은 내가 맘대로 정할 거고 너는 나중에 무조건 갚아아야 돼. 네가 갚을 능력이 없어도 난 너네 나라 정치인들이 찬성했으니 일단 만들 거야"라는 식. 아프리카 국가들은 위에 상술한 대로 자원이나 토지로 대신 상환하고 있으며 소위 '합법적인 수탈'이 계속되고 있다. 당연히 가난한 일반 국민들은 반중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다. 반중 감정이 일반 국민들에게 생기든 말든 부패한 정부는 계속해서 중국을 지지하기 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중국이 계속 할 수 있는 것이다. 덕분에 국제개발, NGO를 통해 아프리카에 봉사활동 온 한국인들이 중국인으로 오해받아 길을 가다 돌을 맞기도 하고 칭챙총이라고 놀림을 받는 일도 빈번하다. 설상가상 2020년 코로나19로 아프리카에서 대중감정이 두배 더 악화됐다.
사례들
비교적 동양인 여행자들이 많은 동아프리카나 남아프리카 국가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아직까지 동양인들에 대해 배타적인 일들이 비일비재한데 부룬디나 우간다만 해도 동양인이 멋대로 돌아다니다간 강도에게 위협당하는 일들이 많다.
위의 서술한 예로 부룬디를 여행하던 한국인 여행객들이 전통시장을 구경하고 있는 와중에 현지인들에게 칭총이란 욕설과 함께 여자들은 성추행까지 당해서 신변의 위협을 느껴 곧바로 자리를 뜬 적이있다.
전 지식경제부 차관 박영준이 니제르나 말라위에서 현지 외교부 고위부 인사들과 나눈 대화에서 중국인에 대한 증오심이 가득하여 놀랐다고 한다. 니제르에서 중국인이 하는 가게에 오물을 뿌리고 가게 주인을 구타하는 일이 계속 벌어졌고, 경찰에게 하소연해도 경찰들은 수사비 명목으로 되려 중국인에게 돈만 뜯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자기나라 경찰의 편을 들며 고소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말라위에선 엄마들이 아이를 꾸짖을 때 "말 안 듣으면 칭총들이 널 잡아가 먹을 거야."라는 말이 퍼져있을 정도라고. 당장 잠비아 문서만 봐도 중국인 혐오를 느낄 수 있다. 그러다보니 중국인 가게들은 사설 무장 경비를 고용해서라도 안전을 지켜야 할 정도이다.
2012년 말라위를 고교생 아들과 같이 여행하던 한국인 어머니는 지나가던 버스에서 걸어가던 자신들 모자를 보더니 "칭총!"이라더니만 침과 같이 돌을 내던지는 일을 겪었고 이후로도 어린 아이들이 보면 침을 퉤 뱉으며 '칭총!'이란 욕설을 하도 들어서 말라위를 금세 나와버렸다고 한다. 아들은 "위 아 코리언~!"이라고 했지만 그저 칭총이란 욕설과 비웃음밖에 반응이 없어서 얼마나 혐중이 깊어졌으면 소름이 끼쳤다고 회고할 정도. 애초에 아줌마랑 미성년자 둘이 치안도 별로 안좋은 아프리카를 여행하겠다는거 자체가 엄청난 객기다.
국내에서도 여행책자가 정발된 자전거 타고 아프리카 여행 중이던 어느 일본인 여행자도 자신을 칭총이라 싸잡아 욕하면서 돌 던지는 아이들을 만났으며, 트럭을 타고 아프리카 여행하던 한국인 여행자도 수단에서 차를 고치려다 중국인으로 오해한 가게 주인한테 빠루로 구타당할 뻔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에티오피아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와 자매결연 맺고 교류차 가던 춘천시 관계자들 역시 몰려든 민중들에게 '중국 놈은 꺼져라. 죽여버린다'라는 살벌한 욕설과 삿대질을 당하다 거듭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임을 알려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토고로 신혼여행을 떠나 어떤 마을에서 천막을 치고 자던 한국인 신혼부부도 사람들이 와서 '칭칭칭?'이라며 삿대질하며 비웃기에 불쾌해져서 그 마을을 떠났던 일도 있다.
2012년 에티오피아에서 의료봉사를 하며 거주 중인 한국인 의사가 목격한 것이다. 거리에서 교통사고가 났는데 가해자인 중국 운전자가 렌치를 가지고 피해자를 되려 위협하자 보고 있던 현지인들이 '칭총을 죽여라!'라고 외치며 돌을 내던졌으며 경찰이 오더니만 곤봉으로 그 중국인을 피범벅으로 두들겨 팼다고 한다. 아디스아바바 언론에서도 가해자 중국인이 현지인 구타협박이라고 대문짝처럼 크게 보도했으며 중국 대사관이 사과하며 물러섰을 정도로 혐중을 우려했다고 한다. 현지인들에게 전해들은 말론 아디스아바바 교도소에선 중국인이 3천 명이 넘게 수감 중이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그 바람에 감옥에 갔다온 에티오피아인들은 중국어 원어민이 되어 나온다는 얘기도 있다.
또한 관광업이 잘 발달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탄자니아, 나미비아, 케냐 같은 나라에서도 어김없이 위협을 당한 비화들이 수없이 존재한다. 방송가에서 보여주는 안전해 보이는 시가지는 사실상 모두 계획된 루트로만 다닌 것.
중국 정부가 아프리카 연합 건물을 지어주며 도청 기기들을 설치했다고 한다.
중국의 당나귀 수요가 급중하면서 아프리카에선 당나귀 밀수, 절도 등이 심각한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다.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는 중국인 근로자 2명이 피격사망했다.
남아공에서는 중국의 밀매로 인해 전복들이 사라지고 있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중국인 3명이 폭도에 구타 당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되었다.
시에라리온에서는 중국이 새로운 공항을 건설하면서 부채가 우려되자 공항 건설 계획이 백지화되었다.
중국이 아프리카에 진출하면서 중국인 직원들 중에 현지인을 인종차별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탄자니아에서는 중국인 여성이 상아를 밀수한 사건이 발생되자 중국인 여성 사업가에게 징역 15년형을 선고했다.
가나에서는 일부 중국인들이 불법적으로 금을 캐다가 가나 당국에 체포되는 일이 발생되고 있다.
케냐 북부에서 중국의 화력발전소가 들어오려고 하자 현지 주민들이 반발했다.
화웨이가 아프리카에서 정부의 정적 염탐을 도왔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일대일로의 영향으로 각종 빚더미가 생겨나면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고, 중국이 세운 학교에선 어린이들이 중국어로 말하지 않았다고 체벌을 가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되고 있다.
2020년부터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퍼지는 가운데, 중국 내에서 아프리카인들이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의혹이 퍼지고 아프리카 내에서 반중감정이 높아지자 중국은 중국주재 아프리카 대사들을 모아서 해명했고, 중국이 아프리카 국적자들을 차별한다는 보도를 부인했다. 4월 12일에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베이징 주재 아프리카 대사들은 광둥성 광저우에서 아프리카인들이 집에서 강제퇴거 당하는 등 차별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광저우에서는 아프리카인들이 살던 집에서 쫓겨나는 일이 터졌다.
2020년 4월 3일에 콩고 민주 공화국의 광산지구에서 무장괴한들이 습격해 중국인 3명이 사망했다.
코로나19 통제 과정에서 중국 내 아프리카인 차별 논란을 빚은 광둥성이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근절하기 위한 새 조치 시행을 선언했다.
나이지리아에서 중국인 건설업자 2명이 1억 나이라를 뇌물로 현지 반부패 조사 관리에게 건네려다가 현장서 검거됐다.
5월 26일에 잠비아에서 중국인 3명이 현지인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짐바브웨에서 중국인 사업가가 밀린 임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하는 광부에게 총을 쏜 사건이 발생되었다.
잠비아는 코로나19로 인해 국가부도위기를 겪고 있고, 국가부채 120억 달러 중 3분의 1이 중국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잠비아는 코로나19로 인해 코로나19 첫 부도 국가가 되었다. 11월 16일에 잠비아 재무부는 중국 수출입은행과 채무 1억 1000만달러(약 1218억 원)에 대한 이자와 원금 지급을 유예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대만과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는 에스와티니, 소말릴란드의 경우 중국이 대만과 관계를 끊는다면 경제원조와 사회기반시설을 지어주겠다는 제안을 하고 있지만 두 나라 모두 이러한 중국의 제안을 거절하고 있다.
2021년 1월 6일에 중국 정부는 왕이 외교부장의 콩고민주공화국 방문 전에 채무 일부를 면제했다.
아프리카 채무 중국 책임론에 대해 중국 외교부는 반발했다.
니제르에서 중국인 광산 근로자 2명이 무장괴한들에게 납치됐다.
2021년 8월, 르완다에선 광물회사 간부인 선슈쥔이 광물을 훔쳤다는 의심으로 직원 2명을 잡아다가 묶어두고 채찍으로 패는 일이 벌어졌다. 이걸 다른 직원들이 찍어 공개하고, 해당 광물업체는 수천여명이 몰려와 중국놈을 죽여라 엄청난 시위가 벌어져 부랴부랴 반정부시위가 될까 우려한 르완다 정부가 경찰을 보내 선슈쥔을 구속하고 2022년 4월 21일에 20년형을 선고했다. 선슈쥔은 너무 가혹하다고 항소하고 중국에서도 반발하지만, 주중 대사관은 입다물고 선슈쥔이 지나쳤다고 물러났다. 반중시위가 엄청날 것을 견제하기 때문인 듯 하다.
중국-아프리카 관계의 미래
가봉 석유부는 2013년 6월 6일(현지 시각) 중국석유화공(SINOPEC)의 자회사인 아닥스석유가 보유하고 있는 한 육상 유전 개발권을 회수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고 로이터가 보도했다. 이 유전의 개발권 계약은 오는 2015년 만료된다. 가봉 석유부 관계자는 "중국 측이 가봉 법률을 공공연히 무시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하던 장 핑 전 아프리카 연합회장까지 가봉 여론이 '중국의 매수를 당했다'고 까고 나아가 '장 핑은 스스로 중국인 피가 흐른다고 중국인이라고 자부하면서 흑인을 혐오한다'는 온갖 부정적인 반응으로 매도하기 시작했다. 결국 장 핑은 '나는 가봉인으로서 당연히 가봉 내 조국 국익을 침해한다면 중국에 이런 조치를 취하는 게 당연하다'면서 물러나야 했다.
잠비아도 2013년 7월부로 현지 자원개발에 나선 중국 기업에 대한 세금을 더 받기로 했으며 현지인 고용 의무화 및 인권 침해 사항 조치같은 조건으로 중국 기업에 강압책으로 나서고 있다. 현 정부가 선거과정에서 이전 정부의 친중정책을 일정부분 철회하는 공약으로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가나는 2013년 6월 1일부터 6일까지 중국인 금 채굴업자 138명을 불법으로 금을 채굴한 혐의로 구속하고 이 와중에 현지인에 대한 폭행 및 비하, 현지 여성 성희롱 같은 일도 드러내면서 가나 정부는 앞으로 중국인에 대하여 자국 내 금 채굴권을 제한한다고 발표하고 중국인 조사를 강화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 밖에도 케냐 및 여러 아프리카 나라들도 중국 저가품 수입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토고나 마다가스카르에선 중국인 이민을 제한하자는 언론 및 정치인들 반응까지 속속히 드러내고 있는데 이렇듯 종전과 달리 각 아프리카 나라들이 중국에 대하여 견제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하여 로이터 통신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중국을 비롯한 외국 기업들의 자원 약탈에 대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불안과 우려를 반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라미도 사누시 나이지리아 중앙은행 총재는 2013년 3월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문에서 중국의 자원 외교를 '신제국주의'라고 비판한 바 있으며 아프리카 연합에서도 서서히 부정적인 시각이 늘어가면서 장 핑 전 회장을 위시한 이전 연합 주축이 중국의 이득을 너무 위한다는 반대여론으로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까지 늘어나고 있다. 결국 위에 열거하던 긍정적인 모습도 결국 중국도 서구권 제국주의랑 차이가 없다는 똑같은 비난으로 가고 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동안 중국의 진출을 오냐오냐하던 각 아프리카 정부요인들도 저렇게 반중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자기 권력 지키기에 나서고 있다. 실제로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을 시작으로 촉발된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열기는 중국 입장에서는 전혀 달가울 리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중국의 아프리카에 대한 정책과 경제적 방침이 변할 리는 거의 없다. 애초에 중국이 아프리카에 과학기술을 이전을 해주고 사회간접자본을 만들어 주는 것은 경제적 교류 목적도 있지만 중국의 정책인 지역 패권화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나라들이 중국인들에게 적대적인 민의를 반영한 정권으로 교체된다고 가정해도 양국 관계는 별다른 변화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에티오피아 같은 경우도 해외 자금 원조 1위(2012년 통계)가 중국인데 반중 정권이 들어선다고 해도 그걸 받지 않을 리가 없다.
해군 기지를 지어주고 시간이 지나면 아프리카 국가들에 그걸 그대로 넘겨줄 생각인 것도 해로를 고려하여 해양세인 유럽 입장에서 보면 해외에 국력을 투사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에 지역 패권국을 노리는 중국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이다. 아프리카 국가들 힘이 강해질수록 제 목소리를 내게 될 것이 뻔하고 그러면 아프리카와 좋지 않은 과거사와 갈등을 가진 유럽 입장에서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도 아프리카와의 관계가 마냥 어둡다고 할 수 없다. 우선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쩐을 대주는 게 필수인 데다가 중국의 여러 대기업들이 아프리카에서 사업을 하면서 짭잘하게 수입을 거두고 있다. 또 아무리 중국이 인구가 많다지만 저출산 현상이 1990년대 중반 이후로 장기화되며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어가고 있고 이러한 상황으로 외국인 인력을 수입하는 것은 필수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중국의 빈부격차가 심하고 최저임금도 못 버는 빈민층이 억 단위에 달한다고 하지만 산업체에서 저임금 노동력이 부족해서 아우성이거나 농어촌 인구가 감소하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이러한 인력부족 문제으로 나중에 중국이 수천만명 가량의 노동력이 부족해지는 결과까지 예상될 정도이다. 또한 중국은 인구가 위낙에 많은 데다가 주변국인 한국, 일본, 대만, 러시아, 태국도 중국과 같은 이유로 이민자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지라 이민유치를 하려고 해도 주변국과 경쟁해야되기 때문에 가까운 국가에서만 이민을 받는다면 인구감소의 충격을 감당할 수가 없다. 결국은 안정적인 인력수급이나 연금관리 등 여러 측면에 있어서 아프리카와 중동권 국가로부터 대규모의 이민인구를 받아들일수밖에 없게될 것이고, 아프리카 국가들도 빈곤문제와 빈부격차, 과잉인구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중국으로의 인구유출이 꼭 나쁜 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평가
양이 있으면 음이 있듯이 모두에게 개발의 이익이 평등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니 앞으로도 양쪽의 입장 차는 존재할 것이다. 중국에서 아프리카 투자를 국위 선양이나 인도적인 이유만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후일 아프리카의 정세가 어느 기류로 돌아갈지 예측은 힘들지만 중국은 아프리카에 투자를 계속하고 있다. 아프리카인의 평가 또한 '중국이 그래도 백인들보단 낫지 않느냐'는 평가도 있고 과거 영국 식민지배 시절 노동자로 들어왔던 인도인보다 훨씬 악질이라는 평가가 갈린다.
다만 이에 대해서도 중국만 아프리카에 사회간접시설을 만드는 게 아니다. 일본도 중국 못지않게 오래 전부터 아프리카에 투자하고 도로나 철도 등등 사회간접시설을 만든다.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해 아프리카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남기고자 아프리카에서 일본 인지도를 위하여 투자해오던 게 지금 중국보다 밀릴 지언정 일본도 절대로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니다. 일본의 경우, 오랫동안 아프리카개발은행(AFDB), 에프사(EPSA) 등을 통해 아프리카의 민간 기업 발전 지원 및 인프라 투자에 노력했다. 일례로 아프리카개발은행에서 일본의 투표권은 3위에 해당한다. 인프라 관련으론 도로를 지어주고 병원이나 여러 시설을 지어주고 일장기를 크게 붙이며 '일본 국민들의 지원으로 만들었습니다'라고 영어나 스와힐리어로 적어둔다. 또 1993년부터 아프리카개발회의(TICAD)라 하여 일본 정부 주도하에 유엔 및 아프리카연합위원회(AUC) 등과 공동으로 열고 있는 회의체도 존재하며 다수의 회의가 일본에서 진행되었다.
1999년 나이지리아에서 개최된 FIFA U-20 월드컵 대회 당시 국내 기자들에게 현지인들이 '자패니즈? 자폰?'이란 말을 질리게 들었다든지 2020년대 지금 아프리카에서도 자폰이 칭총보다 낫다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례도 아직 많다는 경험담도 있기에 반드시 중국만 그렇지 아니다. 그리고 일본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도쿄에서 아프리카 50개국의 외무장관들을 불러서 국제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일본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고 친일엘리트를 육성한다고 밝혔다. 게다가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프리카에도 지원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동아프리카 3개국을 방문해서 케냐와는 2조 5,000억 규모의 계약을 체결하는 등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 또한, 아프리카 개발회의를 두고 중국과 일본은 신경전을 벌였다.
미중 패권 경쟁과도 관련되어 있는 아프리카에서 과연 어느 세력이 패권을 잡을지, 혹은 다극으로 갈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프리카라는 대륙 전체는 자력으로는 쉽게 일어서기 힘들기에 꾸준히 외세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만약에 일어선다면, 비아프리카권은 전부 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 뻔한데, 이는 아프리카권의 성장이 타 지역권의 심리적 박탈감을 크게 안겨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2020년 6월 16일에 시진핑 주석은 17일에 아프리카 국가들과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화상회의를 가진다고 밝혔다. 17일에 화상회의에서 시진핑 주석은 아프리카 국가들에 채무 상환을 면제 또는 연장해주겠다고 밝혔다.
코로나19로 인해 중국과 아프리카 국가들간의 무역액이 20% 감소했다.
중국어의 영향력은 약하다. 이건 당연한데, 그저 돈만 쓴다고 언어적 영향력이 커질 리가 없다.
중국이 8000만달러(873억원) 규모 아프리카 질병통제예방센터 건설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미국과 중국 간의 갈등이 커지면서 미국 측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할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외교관계를 확대하기로 했다.
2021년 11월 30일에 열린 중국-아프리카 포럼에서 중국 측은 아프리카 국가에 경제적으로 지원하겠지만 자국의 뜻을 강요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2020~2021년부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 중국에게 일대일로 채무를 갚는 것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2023년 1월 12일, 친강 중국 외교부장이 아프리카 국가들을 방문했다.
5월 30일, 중국이 아프리카 40여개국과 치안, 법집행 협정을 체결했다.
아프리카 종단 정책
영국 아프리카 식민지
아프리카 종단 정책, 영어로는 케이프 투 카이로 정책(Cape to Cairo Policy)은 19세기 영국의 대 아프리카 정책의 하나이다. 남아공의 케이프타운부터 시작하여 이집트의 카이로로 아프리카를 횡단하는 것이 계획
3C 정책
세계 정책의 일환으로 19세기 말 대영제국이 추구한 정책. 카이로(Cairo) - 케이프타운(Cape Town) - 콜카타(Calcutta)를 잇는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이 정책에서 핵심 내용이었기 때문에 이 도시들의 앞 글자를 따와서 3C 정책이라고 부른다.
영국의 국력이 최절정에 달했던 빅토리아 여왕 재위 시절에 벤자민 디즈레일리, 세실 로즈, 조지프 체임벌린 등이 주창한 제국주의 팽창 노선이다. 영국은 프랑스 등과 함께 선발 제국주의 국가로 세계 곳곳에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영국은 이 식민지들을 하나로 연결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하는 구상을 했다.
그리하여 아프리카에서는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을 연결하는 종단 정책을 취하고 또 카이로에서 인도의 콜카타를 연결하기 위해 중동 지역으로 진출을 꾀했다. 이렇게 카이로와 케이프타운, 콜카타 3개 지역을 잇는 거대한 식민지를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영국의 팽창주의 노선은 곳곳에서 다른 나라들과 충돌하였다. 먼저 아프리카에선 숙명의 라이벌인 프랑스가 프랑스령 모로코에서 마다가스카르를 잇는 이른바 횡단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영국은 남쪽으로 프랑스는 동쪽으로 진출하다보니 결국엔 오늘날 남수단 일대에서 충돌하고 말았는데 이것이 바로 파쇼다 사건이다.
또 카이로와 콜카타를 연결하는 정책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 중 하나인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충돌하였다. 크림 전쟁,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거문도 사건 등 영국과 러시아의 잇달은 충돌은 모두 3C 정책과 남하정책의 충돌에서 나온 산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영국은 영일동맹으로 일본 제국과 동맹을 맺고 일본의 손으로 러시아를 죽이는 차도살인을 단행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좌절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후엔 또 다른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독일 제국과 충돌하게 된다. 식민지 확장에 비판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실각한 후 빌헬름 2세는 적극적인 해외 식민지 개척을 주문했다. 그 결과 나온 정책 중 하나가 베를린 - 비잔티움 - 바그다드를 잇는 철도를 부설하는 이른바 3B 정책이었다. 이로 인해 영국과 독일이 충돌하게 되었다.
영국은 독일의 이러한 팽창이 자국의 보물단지 수에즈 운하와 인도를 건드리게 될 것을 심히 우려했다. 게다가 영국은 이 시기 이미 페르시아 만 일대를 자국의 세력권으로 확보하고 3C 정책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과의 마찰은 필연적이었다. 이같은 두 나라 간 충돌은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으로까지 비화하게 된다.
아프리카 횡단 정책
프랑스 식민제국이 추진한 세계 정책의 일환이다. 아프리카 대륙 횡단을 통해 홍해로 진출하기 위한 프랑스의 정책이다.
프랑스는 1830년 오스만 제국령이었던 알제리를 점령하고 1881년에는 튀니지를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프랑스는 알제리와 튀니지를 중심으로 팽창주의 정책을 실시하여 아프리카 분할을 가속화한다.
프랑스는 사하라 사막으로 진출하여 서아프리카 지역을 점점 식민지로 만들고 1894년 수단과 지부티를 점령하게 되자, 서아프리카 식민지와 인도차이나와 남태평양 일대에 있는 프랑스의 식민지를 연결하고 영국과 이탈리아를 견제하기 위해 홍해로 진출하려고 하였다. 프랑스 식민제국이 추진한 아프리카 횡단 정책은 여기에서 말미암았다.
그런데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 정책은 영국이 추진하고 있었던 종단 정책과 충돌하게 되었는데, 프랑스의 횡단 정책과 영국의 종단 정책이 교차하는 곳이 바로 북아프리카 수단 남부 파쇼다 지역(오늘날 남수단 지역)이었다. 1898년, 프랑스가 파쇼다 지역에 국기를 게양하자 영국이 여기에 항의하며 프랑스와 충돌하였고 이렇게 발생한 사건이 바로 파쇼다 사건이었다. 당시 군사적으로 영국에게 불리했던 프랑스는 결국 한발 물러서서 철수했다.
이로써 프랑스의 횡단 정책은 물거품이 되었고 영국에 대한 프랑스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이후 독일 빌헬름 2세의 팽창 정책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두 국가는 1904년 영프협상을 통해 화해했으며 국제문제에 있어 서로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했다.
파쇼다 사건
1898년 7월 10일 프랑스 육군 원정대가 북아프리카 수단 남부 파쇼다(Fashoda. 오늘날 남수단의 코도크)에 자국 깃발을 게양하여 영국 육군과 충돌한 사건.
제국주의 시절 서구 열강의 대표적 충돌 사례 중 하나로 사건 이름만 언급되는데, 결과적으론 충돌보단 양국간 동맹 관계가 강화된 사건이다.
흔히 '영국의 종단 정책(케이프타운-카이로 정책)과 프랑스의 횡단 정책의 충돌'로 알려져 있지만 영국의 육상 종단이 가능해진 것은 독일의 식민지였던 지금의 탄자니아를 획득한 1919년 이후이며 남아프리카 이북은 그닥 쓸모도 없었던 만큼 파쇼다 사건을 그러한 관점에서만 바라보기는 어렵다. 정확히 말하면 프랑스의 "횡단 정책"의 압력이 떨어지던 와중에 "수단 남하 정책"의 필요성이 높아지던 영국이 서로 공조하지 못했던 해프닝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영국
당시 영국에게 가장 중요했던 지역은 이집트와 식민지 인도 제국을 잇는 항로였다. 두 국가는 식민지화되기 이전까지 다른 지역에 비해 정치,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국가였고 무엇보다 영국이 당시 식민지와 약소 국가들에게 수출하던 면화 산업의 경쟁 국가였다. 따라서 두 국가를 효율적으로 점령하는 것이 영국에게는 급선무였고 이를 위해 장악해야 하는 것이 홍해 지역의 항로였다. 이 때문에 영국은 홍해 주변의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갉아먹기 시작하고 수단에도 힘을 써야 했다. 그러나 영국에게 수단은 어디까지나 주된 목적이 아니었던 만큼 점진적으로 지배하며 대충 허수아비 체제로 놔 두려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1881년 마흐디 운동으로 독립운동이 빈번해지자 영국의 이런 처지는 곤경에 놓였다. 이슬람의 마흐디(구세주)를 자처한 누비아인 무함마드 아흐마드 빈압드알라(محمد أحمد ابن عبد الله, Muhammad Ahmad bin Abd Allah, 1844–1885)가 이끄는 마흐디군이 급속도로 팽창해서 이슬람 신정국가를 세운 것이다. 거기에 1883년에는 창과 칼로 무장한 마흐디군 4만명이 윌리엄 힉스 영국 육군대령(William Hicks, 1830–1883)의 지휘를 받는 현대식 총과 대포로 무장한 영국-이집트 혼성군 1만명을 샤이칸 전투(Battle of Shaykan, 1883년 11월 3일 ~ 11월 5일)에서 박살냈다. 특히 이 전투에서 패한 힉스 대령도 전사하고 시체는 효수되면서 영국 여론은 굴욕감에 떨어야 했다.
찰스 조지 고든
이런 가운데 1884년 민간인 보호라는 명분으로 식민지 이집트를 지키고자 파견된 영국인 총독 찰스 조지 고든은 이집트 방위군과 수단의 수도 하르툼(카르툼) 방위전에 나섰으나 구원군이 도착하기 직전에 무하마드 아흐마드군의 반격으로 1885년 1월 26일 하르툼이 함락당하면서 고든 총독이 참수당했다.
그런데 고든 총독은 수단이나 북아프리카에선 의외로 평이 나쁘지 않았는데 그는 청교도 성향이 강하고 성공회인으로 신앙심이 투철했지만 정작 외국인들의 종교에 대해 관대했기 때문이다. 성격도 침착했으며 청나라에서도 현지인들에게 종교 강요는 하지 않았던 인물이었고 수단에서도 똑같았다. 게다가 현지에 남아 있던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노예들의 교육이나 자립에까지 관심을 보였으며 현지인이 믿는 이슬람에 꽤 관대하게 대했고 현지인 부하들도 잘 대해 줬기 때문에 대부분이 무슬림인 7천여명 이집트 및 수단인 부하들은 마지막까지 그와 같이 하다가 모두 죽었다. 마흐디도 그에 대한 평을 듣고 '유럽 기독교놈치곤 그나마 나은 놈'이라며 죽이지 말라고 했지만 부하들이 죽여서 목을 베어 가지고 오자 불같이 화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상황을 보면 마흐디는 사전에 협상을 시도하면서 고든에게 타협의 여지를 주었는데 아예 무슬림으로 개종하라고 몇 번이나 고든을 설득하게끔 대리인을 보낼 정도였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무엄하게 요구해서 기분이 상했나?" 하여 다음에는 부드럽게 설득하고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마흐디 신민들은 그대를 아주 찢어죽일 정도로 미워하니 나로서도 지켜드릴 수 없소, 칼 같이 무슬림이 되라는 게 아니오. 아니, 하다못해 적당히 무슬림으로 개종했다고 하고 나중에 영국으로 돌려보내드리겠소. 거기서 다시 기독교인이 되던지 그건 자유요." 같은 내용의 편지까지 보냈다! 이게 참 놀라운 게 마흐디는 수단에서 잡힌 기독교인에게 '너 개종할래, 안 할래?' 한 마디 하고 안하면 '즉각 참수!' 이렇게 하던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이렇게까지 편지로 여럿 보내면서 설득했다는 건 그만큼 고든이 마음에 들었다는 의미다. 이에 고든은 "마흐디 당신의 성의는 감사하지만 잠깐이라도 내 신앙을 버릴 수 없소. 반대로 마흐디 당신이 거꾸로 되어 내가 잠깐이라도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척 하라고 하면 하실 수 있으시오?" 라며 거절한다고 답변했다.
게다가 고든은 이미 1884년 말에 조국 영국에게 그대 잘못은 없으니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내가 할 일을 마지막까지 하겠다고 끝까지 남았던 터라 영국에서 책임감도 있던 위인이라고 칭송한다. 수단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가 수단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고향으로 옮겨져 지금은 영국에 있다. 고든의 머리는 말 그대로 효수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 당시 죽은 고든의 시체는 끝내 찾지 못하고 영국에 가묘로 안장되었다.
당시 국내 정치적으로도 위기에 빠졌던 영국 자유당의 글래드스턴 영국 총리는 고든이 참수당한 후 목이 내걸렸다는 정보를 듣곤 "하필이면 이 때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니!"라고 화내면서 큰소리를 냈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조차도 전보를 보내 사임을 권했을 정도로 인기가 떨어진 글래드스턴은 결국 곤경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반 년만에 사임했다. 뒤를 이은 것은 보수당의 솔즈베리 경 소수당 내각이었다.
수단의 마흐디 신국은 이후에도 일시적으로 방치되었으나 대영제국의 떨어진 위신을 상징하는 생선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영국군은 결국 굴욕으로부터 13년 만에 고든의 복수를 위하여 대규모로 수단 침공에 나섰다.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 정책의 수행을 위해 허버트 키치너(Herbert Kitchener) 장군은 수단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면서 철도를 부설하였고 1898년 9월 옴두르만 전투에서 맥심 기관총을 앞세워 고작 47명의 전사자만을 내고 마흐디군 5만 2천 중 1만 명 이상을 그 자리에서 말 그대로 지워 버렸다. 이후 하르툼을 다시 함락시키고 마흐디 신국을 멸망시키면서 빠르게 남하하고 있었다.
프랑스
인도차이나 반도와 남태평양 일대에 존재하던 그들의 식민지로 진출하는 빠른 항로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프랑스는 홍해 인근을 노리던 영국과 이탈리아를 견제하기 위해 다카르 & 브라자빌 - 서아프리카 & 중앙아프리카 - 수단 - 에티오피아 - 프랑스령 소말릴란드(현재의 지부티)를 잇는 지역을 장악하려고 했다.
1893~1895년 서아프리카 식민지를 공고히 한 프랑스는 동진을 계속했다. 프랑스의 외무장관 가브리엘 아노토(Gabriel Hanotau)는 1896년 프랑스 육군 대령 장 바티스트 마르샹이 이끌던 1개 중대급 원정대를 동쪽으로 파견하였다. 마르샹 원정대가 파쇼다에 도착하면 지부티에서 원정대를 파견하고 파쇼다에서 조우함으로써 횡단 정책을 완성하겠다는 의도였다. 마르샹 원정대는 브라자빌을 출발하여 콩고 강과 우방기 강을 거슬러 올라간 뒤 중앙아프리카의 정글과 수단의 사막을 헤쳐나가는 14개월의 원정 끝에 1898년 7월 10일 남수단 파쇼다에 도착해 프랑스 국기를 내걸었다.
하지만 지부티에서 출발한 원정대는 현지 주민의 적대적 태도에 당초 원정을 위한 통로 이용을 허가한 에티오피아 황제 메넬리크 2세가 원정을 중단할 것을 통보하면서 1897년 실패로 돌아갔고 파쇼다에 도착한 것은 먀르샹의 원정대뿐이었다. 마르샹의 원정대 홀로 파쇼다에서 버티는 상황 속에 키치너가 이끄는 영국 원정군이 9월 18일 파쇼다에 들이닥치면서 파쇼다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게 되었다.
열 배가 넘는 1,500명의 병력에 영국 해군의 포함까지 거느린 영국 원정군의 우세가 명백한 상황이었지만, 양측 지휘관은 본국의 명령을 기다리기로 합의하고 충돌 없이 동시 주둔에 들어갔다. 파쇼다에는 영국 국기와 프랑스 국기, 그리고 명목상 수단의 지배국인 이집트 국기가 일단 함께 내걸렸다. 이런 갈등 소식이 본국에 날아들자 가뜩이나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에 불붙었던 양국 국민의 여론은 급격히 나빠졌고 양국은 함대까지 준비하는 상황에 몰렸다.
해결
그러나 이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결국 프랑스는 영국의 우세를 인정해 11월 3일 마르샹의 원정대에게 철수를 지시하면서 파쇼다 문제는 쉽게 해결되었으며 다음해인 1899년 3월에는 나일 강과 콩고 강의 수원 중간 지점을 경계로 하자는 내용에 양국이 동의했다.
프랑스의 횡단 정책이 상실된 데는 단기적인 원인과 장기적인 원인이 있었다. 단기적인 원인으로는 1898년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다는 점이 있다. 파나마 운하 비리 사건과 드레퓌스 사건으로 대다수의 내각이 몇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단명했으며 이 때문에 4년간 재임했던 아노토 장관은 7월 말에 사임해야 했다. 뒤를 이은 앙리 브뤼송(Henri Brisson) 내각의 테오필 델카세(Théophile Delcassé) 장관은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탈리아 왕국의 삼국동맹을 극히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과 불필요한 갈등을 빚는 것은 지극히 무익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애당초 당시 파쇼다에서 프랑스가 영국에 열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프랑스군은 영국군을 만나 대립하게 되자 개전 여부를 상대편인 영국군에게 부탁해서(...) 영국군이 카이로로 전령을 보내 카이로에서 런던으로 가설되어 있던 해저전신을 통해 런던에 소식을 전한 뒤 런던에서 파리에 해당 소식을 전한 뒤(...) 파리로부터 다시 그 과정을 역으로 거쳐서 현지의 프랑스군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명령 전달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당연히 모든 정보를 알고 있던 영국은 이미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프랑스 본국으로써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장기적인 원인으로는 친영국 입장의 델카세가 이례적으로 7년 동안 장기 재임했으며 프랑스가 횡단정책을 재개할 수 없는 환경이 더욱 공고해졌기 때문이었다. 프랑스가 노리던 에티오피아는 메넬리크 2세가 내륙으로 진출하려던 이탈리아를 격퇴했던 상황이었다. 자신만만하던 메넬리크 2세는 1902년 철도 건설을 구실로 에티오피아에 손을 써 보려던 프랑스의 계획을 파악해 철도 건설을 중단해 버렸는데 이것이 결정타가 되었으며 1899년 초에 마흐디 신국은 영국에 의해 완전한 진압 단계에 있었다. 결국 프랑스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기존에 장악하려던 횡단선을 계속 추구할 이유가 점점 사라졌던 것이다. 또한 군사적인 측면에서 원정군을 파견할 수 있는 해군 함대가 프랑츠 측이 영국에 열세한 사실도 한 몫했다.
결국 1904년 영국-프랑스 협상(영불협상)에서 프랑스는 수단을 영국에게 확실하게 양보했고 대신 모로코를 보장받게 되었다. 이로서 영국과 프랑스는 각자 고립을 완벽하게 해소했다.
이로서 수단은 '영국-이집트령 수단'으로서 영국의 식민지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단 민중이 대거 학살되었고 수단 측의 극렬한 저항과 같이 기독교에 대한 증오가 철저하게 뿌리내리면서 뒤에 종교적 갈등 요소를 남겼고 기독교를 믿는 남수단과의 갈등에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 또 수단과 에티오피아의 역사가 극명하게 갈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3B 정책
세계 정책의 일환으로 20세기 초 독일 제국이 추구한 정책. 베를린(Berlin) - 비잔티움(당시 코스탄티니예, 현 이스탄불)(Byzantium) - 바그다드(Baghdad)를 잇는 철도를 부설하는 것이 정책에서 핵심 내용이었기 때문에 이 도시들의 앞 글자를 따와서 3B 정책이라고 부른다.
세계 정책을 내세워 독일의 패권을 전세계로 확장하고자 했던 빌헬름 2세 치하의 독일 제국은 서아시아 일대에도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한다. 그 중에서도 오스만 제국이 추진 중이었던 바그다드 철도는 독일이 특별히 관심을 가진 사업이었다. 만약 이 철도를 독일이 부설할 권리를 손에 넣게 된다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거쳐 오스만 제국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을 독일의 경제권에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해 관계 하에 정부의 지원을 받은 도이체방크는 1893년 바그다드 철도(BagdadBahn) 부설권을 수주하는데 성공한다. 독일이 철도를 부설하는 대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114년간 운영권을 임차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다른 유럽 열강들은 독일이 서아시아 일대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우선 영국의 경우 독일의 이러한 팽창이 자국의 핵심 이익지대인 수에즈 운하와 인도를 침범할 것을 심히 우려했다. 이 시기 영국은 앞서 페르시아 만 일대를 자국의 세력권으로 확보하고 케이프타운 - 카이로 - 캘커타를 잇는 소위 3C 정책을 구상하고 있었기에 독일과의 마찰은 필연적이었다. 또한 남하 정책으로 오스만 제국을 압박하고, 페르시아 일대에서 영국과 경쟁하고 있던 러시아 역시 경쟁자가 하나 더 늘어났기 때문에 독일의 3B 정책을 반기지 않았다. 프랑스 역시 중동 지역에서 영향력을 넓히려 했기 때문에 독일의 철도 부설을 방해했다.
오랜 외교적 줄다리기 끝에 독일은 마침내 1911년에 러시아, 1914년에 영국을 설득하는데 성공하면서 숙원사업이었던 3B 정책에도 순풍이 불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전쟁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했고, 두 국가도 독일의 적성국으로 돌아서면서 사업은 취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