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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An+archy, 지배자 없다, 무정부주의, 아나키스트

Jobs9 2024. 11. 7.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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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Anarchism)

 

Anarchy+ism으로 구성된 조어로, 고전 그리스어 ἄναρχος(ánarchos)에서 유래하였다. 어원상으로는 ἀν(án, "없는")과 άρχος(árchos, "지배자")가 합쳐진 단어이다. 즉, 지배자가 없다는 뜻이다.

아나키즘은 그 색이 아주 다양하고 변종도 많아, 견해의 일치를 보이는 둘 이상의 개인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을 정도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아나키스트가 앞서 언급된 가치들의 추구를 하나의 뿌리로서 공유한다는 데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나키즘에서 가장 최고로 치는 요소들 중 대표는 단연 자유와 평등, 사회의 안녕으로, 계몽주의적, 이상주의적 성향이 두드러진다. 반면에, 아나키즘이 가장 격렬하게 부정하는 요소들 중 대표로는 국가주의, 권위주의, 민족주의등이 있다. 특히 이 세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파시즘과는 완전히 극상성이며, 아나키스트 개인이나 단체가 무력을 통해 파시스트 세력과 싸운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나키즘은 문자 그대로 모든 형태의 정부를 부정하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정부 중 하나인 민주정 역시 독재정에 비해 나을 뿐 결국 넘어서야 할 벽인 것은 매한가지라고 생각한다. 요컨데 노예(민중)가 주인을 스스로 뽑을 수 있음이 그들이 자유로움을 뜻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나키즘은 과장없이 모두까기 성격을 띠는데, 이는 아나키즘이 보편적으로 부적절하며 불량한 사상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이유 중 하나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해의 부재로 인해 아나키즘이 무질서를 추구하는 사상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은데, 전술하였듯 그것과는 정 반대이다.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것은 정부와 지배와 통치가 "필요 없어서"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이지, 덮어놓고 다 때려부순 후 약육강식으로 살자는 무질서가 아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국가, 정부를 질서와 동일시하는 보편적 인식이 이러한 오해를 국내에 확산하는 데 한몫했고, 외국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다.

'무정부상태'를 뜻하는 아나키(Anarchy)에서 연상해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된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정부의 권력 역시도 부정하는 것이지, 정부의 권력만 부정하는 게 아니다. '무정부'는 아나키즘의 목표 중 하나일 뿐이지 전부가 아니다. 아나키즘이 부정하는 권위는 정부뿐만 아니라 종교, 사회, 자본, 군대, 기타 단체 등 강압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어떠한 종류의 권위에도 해당될 수 있다. '무정부주의'라는 번역에 굳이 의미를 부여하면 '통치 주체를 부정하는 자유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것 정도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민중을 구성하는 개인들은 서로 다른 견해와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결코 어떤 질문이나 문제에 대해서도 모두 일치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민중의 정부”라고 해 봐야, 기껏 다수파의 정부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회주의안정자이든 그렇지 않든 민주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소수파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점을 추가할 것이다. 그러나 권리가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은 다수파이기 때문에 소수파는 다수파가 원하고 허락하는 권리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다수의 의지에 대한 유일한 제한은 소수파가 내세우는 저항일 것이다. 이것은 비록 다수파가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권리가 있지만, 모든 사람의 노력을 그 자신의 목적에 맞추려는 투쟁이 항상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는 무력을 통하여 법을 만들고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할 권리를 의미한다. 경찰력이 없다면 정부 또한 없을 것이다.
정의상 다수파는 후진적이고 보수적이며 새로운 것의 적이자 사고와 행동에 있어서 게으르며, 동시에 충동적이고 절제가 없으며 선동당하기 쉽고 자신의 광신과 비합리적인 공포에 쉽게 사로잡힌다. 한 명 혹은 소수의 개인들에게서 비롯된 아이디어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욕구에 의해 대체되어 이미 구식이 되고 진보의 장애물이 된 이후에야 다수파에게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수파의 정부를 원해야 하는가?

결코 아니다. 다수파가 소수를 억압하고 진보를 방해하는 것이 부당하고 해롭듯이 그들이 선한 존재일지라도 소수파가 무력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강요하는 것은 강요라는 그 사실 자체로 인하여 혐오감과 반대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더욱 부당하고 해롭다.

여러 종류의 소수파가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이기적인 소수파가 있고, 절대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는 광신자가 있으며, 단순한 어리석음 일지라도 구원의 길로 향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선한 의도로 타인에게 강요하길 바라는 이들도 있다. 역사를 되돌리고자 하는 반동적 소수파도 있으며 혁명적 소수파 역시 존재한다.

어떤 소수파가 권력을 장악해야 하는가?

합법적이든 불법적으로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선, 사람은 그의 이데올로기적 짐을 상당 부분 버려야 할 것이며 도덕적 양심을 내던져 버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권력을 잡은 이후의 문제는 그것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새로운 국가의 공통된 관심사를 만들어낼 것이며, 정부의 구성원들에게 특권을 부여할 것이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반대를 압살할 것이다. 아마 이것은 국가의 이익을 말할테지만, 언제나 자유의 파괴가 동반될 것이다.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자신의 원칙과 동지들을 배반한 것을 떠올려보라.

이것이 우리가 다수파도 소수파의 정부도 원하지 않는 이유다. 민주주의도 아니고 독재도 아닌 것이다.

우린 공권력을 제거하길 원한다. 우린 모든 사람의 자유와 자유로운 협약을 바라며, 이것은 아무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고 모두가 바람직한 사회의 운영에 동참할 때 나타날 것이다. 우린 아나키를 바란다.
에리코 말라테스타 - 민주주의자도, 독재자도 아닌: 아나키스트들



탄생 배경과 영향
그 탄생 배경상 사회주의, 공산주의, 여성주의, 생태주의, 반민족주의 심지어 자본주의(머리 로스바드, 라이산더 스푸너 등을 필두로 한 북미 오스트리아 학파) 등의 사상 집단과 활동을 함께 하는 모습이 많이 나타나며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허무주의와 다른 점
허무주의자(니힐리스트)는 어떤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고, 아무리 존경받는 원칙이라도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다.
ㅡ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정치 운동에서 니힐리즘이란 용어는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아버지와 아들》의 주인공인 바자로프가 자신을 니힐리스트라고 규정한 이후, 러시아 급진파들이 그 용어를 택하면서 비롯되었다. 그들 입장에서 당시 러시아의 후진적인 문명은 모든 것이 무가치한 쓰레기로 여겨졌기 때문에 니힐리즘이라는 용어를 택한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역사에서 아나키즘과 니힐리즘을 구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크로포트킨 또한 니힐리즘 성향의 단체인 차이코프스키단의 일원이었다. 러시아의 니힐리즘은 그지역의 자생적인 결과물이기 때문에 발생 계보상으로는 니체 등의 고전 니힐리즘 사상가와는 거의 관련이 없다. 바쿠닌의 독일에서의 반동이라는 글에서는 "파괴의 열정은 또한 창조의 열정"이라는 이후 니힐리스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것으로 간주되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글은 니체가 태어나기 2년 전(1842)에 작성되었다.

이후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니힐리스트라는 용어는 희망과 무관하게 반란과 투쟁을 강조하는 아나키스트들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되는데, 오늘날에는 2008년의 국제적인 경제위기 이후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아나키스트들이 늘어나고 있다. 물론 이들은 근본적으로 반사회적인 마인드가 매우 강하기 때문에 사회적 아나키스트들과 사이가 좋지는 않다. 여기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면 Serafinski라는 아나키스트의 Blessed is the flame이라는 글을 참고하라.

굳이 서로 구분하여 정리하려고 시도해보면 러시아 니힐리즘은 하나의 구체적인 정치, 사회적 이데올로기라기 보단 '창조를 위한 파괴'란 관념 자체를 철학적 뿐만 아니라 도덕적, 미학적 관점에서도 긍정하고 이를 적극 추구하는 문화적 태도, 사조에 가깝다.

 

 

 

 


아나키즘은 국가는 해롭고 바람직하지 않으며 불필요하다는 신조아래 국가의 해체를 주장하는 정치 철학이다. 반국가주의가 중심적인 사안이지만 이것은 권위와 인간 관계에서의 계층적 조직 역시 반대한다.


영향력있는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인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그들이 어떤 경향에 속해있든지 간에 일종의 개인주의자들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는 결코 사실일 수 없다. 그러므로 개인주의자들은 두개의 개별적 범주로 구별된다. 하나는 그 자신과 타인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완전히 인간 자신의 개성을 개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또 다른 부류는 자신의 개성만을 생각하며 타인의 개성을 희생시키길 주저하지 않는 이들이다. 차르는 후자의 개인주의자의 유형에 속하지만, 우린 전자에 속한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집단, 사회, 전통 그리고 이데올로기 체계와 같은 외부적 결정에 맞서 개인과 그의 의지를 강조하는 여러 아나키즘의 경향을 의미한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단일한 철학이 아니며 때로는 충돌하기도 하는 개인주의 철학의 집합이다.  

1793년 종종 최초의 아나키스트라 언급되는 윌리엄 고드윈은 그의 저서 “정치적 정의”에서 아나키즘의 최초의 표현이라고 간주되는 주장을 했다. 고드윈은 철학적 아나키스트로서 합리주의와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혁명을 배격하고 최소 국가를 “필요 악”으로 언급했으며 지식의 확산에 의해 점진적으로 무력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장 영향력있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유형은 “에고이즘” 혹은 에고이스트적 아나키즘이라고 불리는데 초기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가장 잘 알려진 주창자인 막스 슈티르너에 의해 제시 되었다.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 소유(1844)는 이 철학의 기초를 제시했다. 슈티르너에 따르면 개인의 권리에 대한 유일한 제약은 신, 국가, 또는 도덕과 관계 없이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취하고자 하는 힘의 크기다. 슈티르너에게 권리의 개념은 인간의 마음속을 돌아다니는 유령(Spook)에 불과하며, 사회란 존재하지 않고 “개인이 현실”이라고 주장했다. 슈티르너는 자기주장과 에고이스트 연합이라는 것을 옹호했다. 이는 슈티르너가 국가를 대신할 조직으로서 제안한 것이며, 구성원들의 지지에 의해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비체계적 협회로 간주된다. 에고이스트 아나키스트들은 에고이즘이 개개인 간의 진정하고 자발적인 결합을 유발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슈티르너의 철학은 19세기 후반 독일의 아나키스트이자 LGBT 활동가인 존 헨리 맥케이에 의해 재발굴 되어서 아나키스트들 사이에 대대적으로 보급되었다. 

조시아 워렌(Josiah Warren)은 미국 최초의 아나키스트로 간주되며 1833년 아나키스트 간행물인 The Peaceful Revolutionist를 발행했었다. 미국의 아나키스트 역사가 유니스 메넷 슈스터( Eunice Minette Schuster)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프루동주의적 아나키즘이 적어도 1848년의 미국에서 나타났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조시아 워렌과 스티븐 펄 앤드류스(Stephen Pearl Andrews)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에 대한 친화력을 인식하지 않았다… 윌리엄 B. 그린(William B. Greene)은 프루동의 상호주의를 그것의 가장 순수하고 체계적인 형태로서 제시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영향력있는 초기 미국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다. 그의 저작 월든에서 자연환경에서의 단순한 생활의 성찰에 대한 언급을 했으며, 그의 에세이 시민 불복종에서는 부당한 국가에 대한 개인적 저항에 대한 주장을 했다. 벤자민 터커는 이후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을 워렌과 프루동의 경제관과 혼합해서 그의 간행물 Liberty에서 제시했다.    

이런 초기 개인주의적 아나키즘들은 여러 나라에서 작지만 다양한 보헤미안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매혹시켰다. 자유연애와 가족 계획에 대한 옹호, 개인주적 환경주의자와 누드주의자들, 자유사상가와 반교권 운동가들 그리고 일리걸리즘과 개인의 수복이라는 활동에 종사한 청년 아나키스트 무법자들과 같은 많은 움직임이 있었다. 이런 운동과 관련된 작가와 활동가들에는 오스카 와일드, 에밀 아망드(Emile Armand), 한 라이너(Han Ryner), 앙리 지즐리(Henri Zisly), 렌조 노바토레, 미구엘 기메네즈 이구아라다(Miguel Gimenez Igualada), 아돌프 브랜드(Adolf Brand) 그리고 레프 체르니 같은 이들이 있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그의 “사회주의 아래서 인간의 영혼”이라는 에세이에서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를 개인주의를 보장하는 방법으로서 옹호했다. “사유재산을 폐지함으로써 우린 진정하고 아름다우며 건강한 개인주의를 향유하게 될것이다. 누구도 상징적인 것들을 축적하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지 않게 될것이다.” 아나키스트 역사가 조지 우드콕(George Woodcock)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와일드의 사회주의 아래서 인간의 영혼은 예술가에게 가장 우호적인 사회를 찾고자 하는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 와일드에게 있어서 예술은 다른 모든 목적에 앞서는 것이며 그안에 계몽과 재생을 포함하는 최종적 목적이다… 와일드는 아나키스트를 유미주의자로서 표현했다."

 

 


철학적 개인주의
윤리적 에고이즘
윤리적 에고이즘은 도덕적 행위자가 자신의 이익에 봉사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규범 윤리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동만을 한다고 주장하는 심리적 에고이즘과는 구별된다. 윤리적 에고이즘은 또한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이다고 주장하는 합리적 에고이즘과도 다르다. 그러나 그런 교리들은 종종 윤리적 에고이즘과 혼합되기도 한다.

윤리적 에고이즘은 도덕적 행위자가 타자에게 도움과 봉사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윤리적 이타주의와는 대조된다. 에고이즘과 이타주의는 모두 공리주의와 대조를 이루는데, 공리주의는 그자신(주체)을 타자보다 우선해서(에고이즘이 그러하듯)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타자를 돕는 것이 그 자신의 이익(그의 욕망과 안녕)과 동등하지 않는 이상 자신을 희생(이타주의가 그러하듯)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에고이즘, 공리주의, 이타주의는 모두 결과주의이지만 차이점에 존재 하는데, 에고이즘과 이타주의는 행위자에 중심을 둔 결과주의인 반면, 공리주의에선 행위 중립적인 존재라고 부르며 주체에게 특별성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윤리적 에고이즘이 그런걸 의미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도덕적 행위자가 도덕적 숙고를 진행함에 있어서 타자의 이익이나 안녕에 해를 끼칠 수도 있다. 즉 행위자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 부수적으로 타인에게 해롭거나, 이익을 줄 수도 있으며 중립적을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개인주의는 행위자가 선택한 것이 그의 이익을 만족시키는 한, 타인의 이익과 안녕이 경시되거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행위를 허용할 수 있게 한다. 윤리적 에고이즘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에 있어서 언제나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장기적으로 봤을 때 단기적인 욕구의 충족은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즐거움은 에우다이모니아를 뒤로 밀려나게 한다. 제임스 레이첼스(James Rachels)가 말하길 “윤리적 에고이즘은 이기심을 지지하지만, 어리석음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윤리적 에고이즘은 종종 자유지상주의와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을 지지하는 철학적 기반이 되기도 한다.

 

 


에고이스트적 아나키즘
에고이스트적 아나키즘은 19세기 헤겔주의 철학자이자 가장 잘알려진 초기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주창자인 막스 슈티르너의 철학에서 파생된 아나키스트 사상중의 하나다. 슈티르너에 따르면 개인의 권리에 대한 유일한 제약은 신, 국가, 또는 도덕과 관계 없이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취하고자 하는 힘의 크기다. 슈티르너는 자기주장과 에고이스트 연합이라는 것을 옹호했다. 이는 슈티르너가 국가를 대신할 조직으로서 제안한 것이며, 구성원들의 지지에 의해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비체계적 협회로 간주된다. 에고이스트 아나키스트들은 에고이즘이 개개인 간의 진정하고 자발적인 결합을 유발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슈티르너의 철학은 19세기 후반 독일의 아나키스트이자 LGBT 활동가인 존 헨리 맥케이에 의해 재발굴 되어서 아나키스트들 사이에 대대적으로 보급되었다. 존 베벌리 로빈슨(John Beverley Robinson)은 “에고이즘”이라는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슈티르너와 니체에 의해 제시되고 입센과 쇼를 비롯한 여러 이들에 의해 설명된 현대 에고이즘은 그 이상의 것이다. 이것은 개인을 개인으로서 깨닫는 것이다. 그들이 격정하는 한, 그들은 유일한 개인이다." 니체와 슈티르너는 프랑스의 문학계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자주 비교 되었으며 니체에 대한 아나키스트적 해석은 미국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 에고이즘에 집착하는 아나키스트들로는 벤자민 터커, 에밀 아망드, 존 베벌리 로빈슨, 아돌프 브랜드, 스티븐 T. 바잉턴(Steven T. Byington), 렌조 노바토레, 제임스 L. 워커(James L. Walker), 엔리코 아리고니( Enrico Arrigoni), 비오필로 판클라스타(Biofilo Panclasta), 준 츠지(Jun Tsuji), 장 르네 솔리에르(Jean-René Saulière) 같은 이들이 있었고, 현대인들로는 하킴 베이( Hakim Bey), 밥 블랙, 울피 랜드스트라이커(Wolfi Landstreicher) 같은 이들이 있다.  

 

 

 

 

 

 

 





Anarchist

아나키즘을 추종하는 이들.

흔히 무정부주의자로 번역되지만 이는 아나키즘의 특성을 제대로 번역하지는 못한다. 아나키즘은 비단 정부뿐만이 아닌 국가, 민족주의를 넘어서 자본주의와 같은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체제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다분히 계몽주의, 이상주의적 성향을 가지기 때문에 현재 인류 세력 간의 정치적 균형, 사회문화적 체계와 과학기술 수준으로는 아나키스트가 말하는 이상향을 실현하기도 어렵고 따라서 목소리만 낼 뿐 실효가 없을 수도 있다는 한계가 내외부적으로 비판받아 왔다. 그래서 최근 아나키즘에서는 속칭 '개량'주의자들이 꽤 많이 나오고 있다. '개량'주의 자체는 이미 초기 아나키즘 시절, 프루동 시절, CNT-FAI 시절에도 나온 바 있다. 이들은 결국 의회제를 이용해 인민들의 신뢰와 정당성을 얻고 국가를 해체시키겠다, 혹은 파쇼놈들보단 쟤네가 낫지라는 식으로 뛰어들었지만 그들 또한 국가체제의 하수인이 되거나 뒤통수를 거하게 맞고 죽는 등 많은 흑역사들을 남겼고 현대에 와서는 이런 개량, 타협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들 사이에서 사민주의자와 같은 수준으로 말해지거나 아예 아나키스트라고 부를 수 없다는 식의 고강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정치를 필요악이나 절대악으로 취급하는 아나키스트가 정치에 몸담는 것은 모순이므로 진성 아나키스트들은 정치권력 확보를 거부한다. 이런 반조직적 특성 탓에 아나키스트 사이에는 강력한 구심점이 있기 힘들다.

 

현실의 아나키스트

 

전근대
과거에도 인간 중심의 질서를 역설했던 정치가들은 많이 있었다. "나라를 작게 쪼개서 힘의 균형이 없어진다면 나라라는 개념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노예들 착취하곤 있지만 노예, 서자, 외국인들 중에도 능력자가 많고, 국가의 부양능력이 문제라면 다른 섬에다 마을을 세워서 세금이나 나라법이랑은 별도로 인재를 키워볼 수도 있을텐데..."와 같은 생각에서 점차적으로 사상이 발전했다고 생각하면 쉽다. 흥미롭게도, 동양 사상 중에서 도가(특히 장자), 묵가의 사상은 아나키즘과 접점이 많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공통적으로 큰 세력을 가지지 못했다. 이유는 이들의 사상 자체가 폭력과 강압, 즉 권력 그 자체를 적대하고 혐오하는 것을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나쁘게 말하자면 말만 앞선 이상주의자고, 좋게 말하면 자신들의 사상 탓에 발생할 소요조차 꺼릴 정도로 고고했던 사람들이다. 허나 이런 권력 지양 현상은 결국 성취 수단 결여로 나타나 아나키스트들은 관용의 대상은 될지언정 집권 세력에 환영받는 존재는 되지 못했다. 특히, 국가간, 민족간 갈등이 심하고 국가의 광범위한 폭력이 용인되던 시대에는 더더욱 그랬다. 

 

현대적 아나키스트
현대에 아나키즘은 많은 쇠퇴와 분열을 겪었다. 특히 CNT의 경우 스페인 내전 이후 프랑코 정권의 탄압하에 세력이 줄고 이후 스페인이 민주화 되고 난 이후에도 조직 내부에서 많은 분열을 겪었으며 그 외에도 IWW, 러시아 아나키스트들 등 20세기를 풍미했던 세계 아나키즘 운동은 많은 쇠퇴를 겪었다. 

동아시아라고 많이 다르지 않으며 2차대전 시기 일본에서의 아나키즘은 관동대지진 이후 재일 아나키스트는 물론 일본인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들까지 모두 숙청당하고 치안유지법 이후 좌파자체가 숙청당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에도 다르지 않았으며 재중 아나키스트들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숙청으로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을 애초에 포기하고 국가권력에 복종하거나 그들을 옹호하다가 국가에게 일망타진 당하기도 하였다.

 


세계의 아나키스트


고토쿠 슈스이: 일본의 사회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 러일전쟁, 제국주의, 조선 식민지화를 반대했으며, 노동조합운동과 민중연대를 주도했다.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공산당선언'을 번역하여 소개했으며,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万国の労働者よ、団結せよ!)'라는 번역도 그의 작품이다. 천황 암살을 모의했다는 죄목(대역 사건)으로 처형당했다.
네스토르 마흐노: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레닌주의자)에 협조하기를 거부한 우크라이나의 아나키스트 혁명가였다. 볼셰비키를 피해 파리로 망명하여 아나키스트 조직화에 힘썼지만 결국 결핵으로 사망했다.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
놈 촘스키: 아나코 생디칼리슴 성향이다.
레온 촐고츠: 윌리엄 매킨리를 암살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레프 아흐마니노프: 우크라이나 자유구역의 지도자 중 하나로, 소련과 형식적인 합병 조약을 체결한 뒤 강제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다.
레프 톨스토이: 기독교 아나키스트의 선구자로 <안나 카레니나>를 저술하던 도중 인생에 대한 고통스러운 질문을 시작으로 <신의 왕국은 너의 안에 있다>라는 에세이를 저술하며 개인을 억압하는 국가, 종교 공동체를 부정하고 자유로운 삶을 지향하길 권했다. 너무 막 나가서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한 건 안 비밀
리스쩡: 중화민국의 아나키스트. 중국 국민당과의 소위 안국합작을 추진함으로 중국에서의 아나키즘 혁명을 이룩하려 했으나 국민당의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막스 슈티르너: 윌리엄 고드윈과 함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주축을 이루는 인물. 자아를 철저히 밀고 나간 독특한 사상을 전개 했다. 여담이지만 동시대 미하일 바쿠닌이나 카를 마르크스와 같은 유물론자들에게 엄청나게 까였는데 이는 막스 슈티르너 특유의 관념론적인 세계관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공상적이라고 관념론 전체를 깠으며 바쿠닌은 신과 국가에서 관념론은 이 세상에 설 자리조차 없다고 깐 적이 있다.
미하일 바쿠닌: 마르크스와 함께 국제노동자협회(인터내셔널)를 결성했으나, 마르크스와의 이념적 갈등 때문에 결별하고 아나키즘만의 사상을 굳혀갔다. 아나키즘에서 '혁명'이나 '테러'를 전략적 방법으로 중시한 것도 바쿠닌 같은 혁명가 계열들의 주장이다.
스튜어트 크리스티
프란체스크 피 이 마르갈: 카탈루냐 출신의 스페인 공화주의, 사회주의 사상가로 19세기 후반-20세기 초 스페인 제1 공화국의 흥망성쇠와 수차례의 쿠데타, 해외 식민지 상실, 기존 자유주의 엘리트들의 좌절과 사회주의 운동의 부상 등을 목격하며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아닌 풀뿌리 민중이 주도하는 공화주의, 사회주의적 질서를 주장하며 CNT를 비롯한 후대 스페인, 포르투갈, 중남미의 아나키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에리코 말라테스타: 20세기 초반 이탈리아의 혁명가로 무력 테러를 통해 자극한 민중 혁명을 주장하며 소작농 봉기, 노동 쟁의를 주도하며 한때만 하더라도 이탈리아와 전 세계의 자본가와 정부들이 대표적으로 지목하던 무씨무씨한 극악 테러분자로 악명 높았던 인물이었다. 현실 정치 세력으로서 아나키즘의 주류 형태가 산발적 테러리즘에서 조직된 풀뿌리 노동운동으로 변하며, 이탈리아와 지중해권 유럽 또한 기존의 반봉건적 왕실 정치에서 파시즘으로 넘어 가던 걸 동시에 목격한 과도기적 인물.
뱅크시
부사령관 마르코스
미셸 옹프레: 현대 철학자 중에서 프루동을 계승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루이지 루케니: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인이었으나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에게 버려져, 비참한 삶을 살다가 스위스로 이민을 갔고 그곳에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인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를 암살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암살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자 스스로 사형을 원했지만 스위스에선 루케니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이에 추가 재판을 요구했지만 재판 결과는 똑같았다. 결국 1910년 10월 19일 벨트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루이지 루케니의 머리를 1985년까지 제네바 대학 법의학 연구소의 포름 알데히드가 든 항아리에 보존하다가 2000년에 머리만 비엔나 중앙묘지에 묻었다.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알베르 카뮈: 이방인,페스트 등을 쓴 프랑스의 실존주의 문학가이자 대문호
앨런 무어
윌리엄 고드윈: 현대적인 개인주의 아나키즘의 효시격 되는 인물. 저서로는 '정치적 정의에 관한 고찰'등이 있다. 아나키즘을 윤리학, 정치학,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정리하였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의 아버지이자 여성참정권을 처음으로 주장한 페미니즘의 선구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남편. 한명은 아나키즘의 아버지, 한명은 페미니즘의 어머니. 비범한 부부다.
옘마 골드만: 리투아니아 출신 아나키스트이자 페미니스트.
오스기 사카에: 일본의 아나키스트이자 노동운동가. 아시아에서의 아나키즘 연합을 이루고자 노력했으며, 중국과 한국의 아나키스트들과 연대하기도 했다. 관동대지진 때 살해당했다.
오스카 와일드: 크로포트킨의 저서를 읽고 아나키스트가 됐다.
자크 엘륄: 반나치 투쟁에 참여하기도 했던 프랑스 출신의 기독교 아나키스트로서 당대 좌파 운동의 주류였던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이 아닌 이데올로기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고발하는 한편 현대 사회의 변화 동력은 자본이 아닌 기술이란 사실을 강조해 효율만을 추구하는 무한한 기술 발전 풍토로 인한 개인 말살 현상을 비판했다. 이와 동시에 교조주의화 되어가는 주류 기독교의 집단주의적 신앙을 비판하며 성서를 통해 인간에게 계시되었던 책임과 자유를 삶을 통해 풍요로이 발현시키기를 주장했다. 그의 저서 '기술 사회(The technological society)'는 시어도어 카진스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존 레논: 그의 대표곡인 'Imagine'은 아나키즘 사상을 함축하고 있다고 평 받는다.
표트르 크로포트킨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메를리노
폴 애브리치
엘리제 르클뤼
가에타노 브레시: 이탈리아 국왕 움베르토 1세를 암살한 이탈리아인 아나키스트, 1898년 밀라노에서 밀값 상승에 따른 항의 시위를 무력 진압하여 사상자가 발생한 바바 베카리스 학살 당시 움베르토 1세가 무력진압을 명령한 피오렌초 바바 베카리스 장군을 치하하고 훈장까지 수여한 것에 앙심을 품고 1900년 몬차에서 움베르토 1세를 암살하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일반 범죄에 대한 사형을 폐지한 상태였기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결과적으로 유럽에서 처음으로 왕을 죽이고도 사형당하지 않은 인물로 남게 되었다.
마리 르 콩트
루이즈 미셸
에밀 고티에
알렉산더 버크먼
세르게이 네차예프
루이지 갈레아니
프란체스크 사바테 요파르: CNT 소속의 아나키스트로, 스페인 내전 이후 반프랑코 레지스탕스를 이끌다 1960년 스페인군에게 사살되어 공식적으로 마지막 반프랑코 게릴라로 죽었다.
프란체스크 페레르: 카탈루냐 출신의 아나키스트 교사, 교육학자로, 당시 교육계에서 처음으로 양성 평등에 기반하여, 교사는 최소한의 기본적 지식과 바탕만을 깔아주고, 학생 스스로 원하는 학습을 추구하며, 특정 가치관, 즉 아나키스트적 관점에서는 국가주의적 가치관을 전제로 두고 추구하는 공교육이 아닌, 큰 인문학적, 자연과학적 체계만 깔아 준 뒤 이후 학생들이 유기적으로 학습하며 본인 고유의 지적 발달을 추구하는 근대 학교 운동(escuelas modernas)의 창시자이다. 1909년 비극의 주라고 불리는 바르셀로나 소요 사태에서 당국에게 처형 당한 후 아나키스트 자유교육 운동은 동지이자 후학이었던 리카르도 메야가 이어 받게 되었고, 페레르의 죽음으로 스페인의 아나키스트들은 단발성 테러리즘을 걷어 치우고 조직적인 노동조합, 계몽운동, 마을 자치 운동에 기반한 장기적인 사회적 시스템의 변화 자체를 추구하는 전국 노동 연맹을 조직하게 되었다.
프란츠 카프카: 아나키스트 문인 집단에 참여한 바 있다.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프랑스의 아나키스트. 그는 체계적인 이론을 거부했으며, 어떠한 분파를 만드는 것도 거부했다. 그래서인지 '역설의 사상가(a man of paradox)'라고 칭해질 정도로 모순적인 설명이 많다. 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아나키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그의 사상은 근대 아나키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기에 '아나키즘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도로시 데이: 미국의 기독교 아나키스트다. 기독교 아나키스트 중 제일 모범을 보인 위인. 인권운동, 노동해방운동, 여성운동 등 여러 활동을 한 아나키스트로써, 아나코 코뮤니즘에 가까운 아나키스트이다. 가톨릭 신자 중에서 가장 성모 마리아와 가까운 마음을 지녔다는 얘기도 있으며, 교황청에선 '하느님의 종'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현재는 가경자이며, 시복시성의 준비단계에 있으며 전 세계 가톨릭 노동사목의 전설이라 불린다. 만약 시복시성까지 통과되고 성녀가 된다면 아나키스트 중 최초로 성인(聖人)이 되는 셈이다.
이반 일리치
머레이 북친
피니어스 피셔(Phineas Fisher): 아나키즘 성향의 핵티비스트인데 해킹팀을 해킹했던 장본인이다. 아나키스트들은 해킹 기술을 국가통제와 맞서고 자금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대
20세기 초반은 러시아, 프랑스등에서 새로운 사상들이 마구마구 들어오던 시기였는데 그중 아나키즘도 있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는 물론 인민주의 등의 사상과 같이 섞여온 탓에 사실상 온전한 아나키즘은 없고 또한 이미 자주국가였던 일본과 다르게 아직 제대로된 근대민족국가를 만든 적 없는 한국과 중국에서는 먼저 민족국가를 건설한 다음 아나키즘을 실현하자라는 생각도 많이 퍼저있었다. 그 대표가 중국의 안-국합작이나 한국의 유림과 같은 지방분권적 성향의 사민주의자들이다.
가네코 후미코: 독립운동가 신분인 남편 박열에 따라 국적에 상관없이 일제 수뇌부에 대항 했었다. 
후세 다쓰지
김좌진
박열: 납북으로 인해 행적이 남은 것이 없고 그 기록과 재해석이 오롯이 한국에서만 이뤄지는 탓에 아나키스트가 아니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백정기
방준경: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 법조인이자 대한민국의 3대 광주고등법원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김화산(金華山)'이라는 필명으로 문학활동을 한 아나키스트이기도 하다. 시인 권구현(權九玄, 1898 ~ 1938)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활동기에 아나키즘 논쟁의 불을 지폈으며, 무산계급 문예이론을 정립했다.
신채호: 민족주의자라는 허울에 가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신채호도 아나키스트였다.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은 아나키즘의 절정이다. 특히 그가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고함을 읽고서 감명하여 아예 그를 예수급 성인으로 놓기도 하였으며 텐진 아나키스트 대회에서는 정부는 기득권이 무산계급을 착취하는 인육분쇄소라는 강도높은 비판또한 하였다.
유림: 엄밀히는 아나키스트는 아니다. 그가 남겼던 말들이나 심지어는 독립노농당의 강령을 보면 그는 아나키스트보다는 사회민주주의에 더 가깝다고 평할 수 있다.
육홍균: 박열과 함께 한 아나키스트이자 제헌 국회의원
유자명
이을규
이정규
이회영
정화암
신재모
천중밍
하기락(1912~1997): 안의고등학교의 설립자이며, 1963년에는 대한철학회를 설립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 아나키스트 운동을 하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50년 초중반에 일어난 스웨덴의 SAC(스웨덴 노동조합)의 개량주의노선에 적극 가담하였고 이후에도 아나키즘운동에 가담하지 않은 채 평범한 지식인으로 지냈다. 실제로도 독립이후 아나키스트들 대부분 반공, 반북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홍형의(1910~1968): 일제강점기에 아나키즘 및 에스페란토 운동가로 활동하고 박열이 조직한 흑우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청구대학 설립에 관여했다.

 

 

현대
1910~30년대의 활발했던 아나키스트 운동에 비하면 현대에는 아나키즘 자체가 그리 메이저한 사상으로 인정받고 있지는 않다. 한국의 경우, 상술했듯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이 해방 이후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 측으로 오기는 했으나 정치적으로 하나의 세력을 이루지 못하여 기세가 꺾였다. 그래서 현대의 아나키스트들은 역사적인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아 근대 아나키스트들의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권정생
신동엽(시인)
앨런 무어
오드리 탕 - 국내에선 잘 안 알려져있지만 대만 아나키즘의 주된 인물 중 하나이다.#
함석헌

 

아나키스트 단체
근대 아나키스트 저항단체들: 가장 격정적인 형태의 아나키스트 무리. 근대의 막바지에 저물어가던 식민지 경제와 함께 막 나가던 초기 자본주의, 이에 대항하며 세력을 불린 공산주의, 나치즘과 파시즘 등 온갖 막장스런 전체주의에 염증을 느낀 지식인과 청년들이 만들어낸 아나키스트 저항군들이다. 본래 아나키즘은 골동품에 가깝게 묻혀버린 사상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미하일 바쿠닌, 표트르 크로포트킨과 같은 러시아 사상가들이 혁명적 아나키즘을 재발굴했고, 이는 유럽을 중심으로 지식인과 청년들에게 퍼져 나갔다. 이들은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 당시 아나키스트 자치령 운동을 끝으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에게 밀리며 사라졌다. 사실상 러시아에서 시작된 이들은 맥이 끊겼다.
봉사단체 - 주로 봉사단체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비율적으로 특정한 종교 관계자가 90%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아나키스트와 비슷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착한 일 하고 죽어서 천국 가겠다는 신앙심이 없는데도, 의미있는 만큼의 개인 시간을 봉사에 할애하는 것은 범인류적인 신념이 없으면 힘든 일이기 때문. 현대 아나키스트들은 주로 봉사단체, 자선단체, 소규모 집단을 보존하는 활동에 전념한다. 최근 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 전선에 참전한 안티파들이 쿠르드 민병대 편에 서서 ISIL에 맞서 봉사단체에서 활동하거나 직접 전투에 참전하는 사례가 보도되었다.
어나니머스
의열단
안티파
사파티스타
자유지구
CNT
FAI(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합): CNT의 산하기관으로써 CNT가 노동조합으로써의 성격이 강하다면 FAI는 아나키즘의 성격이 강하다. 초기CNT의 경우는 완전한 아나키즘단체가 아니었기에 이리저리 새거나 심지어 파시스트와도 손잡기도 하였는데 FAI는 그런 속에서 CNT가 올바른 아나키즘길로 갈 수 있게 인도해준 역할에 가깝다.
인민수비대를 비롯한 시리아 쿠르디스탄의 정파들: 수감 중에 미국의 아나키스트 생태학자 머레이 북친의 영향으로 마르크스주의에서 아나키즘으로 전향한 압둘라 오잘란의 영향력으로 민주 연방주의 (democratic confederalism)이라 하는 초종파, 인종, 성별적 지방 자치에 근간한 새로운 혁명적 질서를 대안으로 주장하고 있다. 다만 이 사상은 북친이 90년대의 아나키스트들과의 갈등 이후 아나키즘 운동에서 떨어져 나온 이후 만든 사상이라 이걸 순수한 아나키즘으로 보면 곤란하다. 하지만 아나키즘에서 영향을 받은 사상이 현실(특히 매우 폭력적인 환경에서)에서 어느정도 구현되고 있는지라 국제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이 응원하고 있는 편이다.
IWA: International Worker's Association, 국제 노동자 협의회. 스페인어로는 Asociacion Internacional del Trabajo, 즉 AIT로 쓴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아나키스트 버전이라 보면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항목 누르면 나오는 레슬링 협회하곤 전혀 상관 없다.
아나키스트 도서관: 아나키즘 및 이와 연관된 서적은 물론 서평, 기사까지 기록되어 있는 도서관형 사이트이다. 전통적인 아나키즘은 물론이며 현대의 다양한 분파까지 포괄한다. 다만 아나코 캐피탈리즘, 민족주의적 아나키즘 등 실질적으로 아나키즘에 해당되지 않다고 판단되는 분파에 대한 문서는 없는 듯 하다.
아나키스트 도서관 한국어판: 위 도서관의 한국어판, 위에 비하면 기록물은 많이 적지만 그나마 국내에 정발되지 않은 문서들을 한국어로 볼 수 있다는 메리트가 있다.
아라곤 지역방위위원회:스페인 내전당시 CNT가 설립
혁명적 카탈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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