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출신의 수리남 범죄자.
1990년대 말~2000년대 초까지 수리남에서 거주하면서 대규모 마약 밀매 조직을 운영하다, 국가정보원과 미국 마약단속국(DEA), 브라질 경찰과의 공조 작전으로 2009년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2011년에 징역 10년과 벌금 1억을 선고받았고, 해남교도소 복역 중 건강이 악화되어 형집행정지 출소해 조선대학교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2016년 사망했다.
조봉행은 원래 1980년대에 선박냉동기사로 일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8년 정도 남아메리카의 수리남에 거주하면서 현지 사정에 밝았다. 1994년 5월에 빌라 신축과 관련된 10억원 규모의 사기 혐의로 수배되자 대한민국 경찰이 수사하기 어렵고 자신이 잘 아는 수리남으로 도피하였다.
그 후 1995년 수리남 국적을 취득하고 생선 가공공장을 차렸다. 그러나 실상은 어업회사에게 제공되는 면세유를 밀매하는 것이 주 수입원이었다. 또한 조봉행은 중국인 등을 공장에 취업시켜 미국, 유럽으로 밀입국시키는 사업도 하였다. 하지만 유가 상승, 단속 강화로 인해 수입이 줄어들고 사업에 차질이 생기자 다른 수입원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마약이었다.
그는 남미 최대 마약 카르텔인 '칼리 카르텔'과 손을 잡고 마약 사업을 펼쳤다. 오랜 수리남 거주 생활 덕분이었는지 사업은 빠르게 번창하였고 수리남 고위 정치인, 관료, 군 관계자와도 두터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심지어 수리남 대통령이었던 '데시 바우테르서'(Dési Bouterse)와도 오랜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조봉행의 수리남에서 인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조봉행은 이러한 막강한 권력을 토대로 수리남에 입국하는 아시아계 승객 명단을 미리 받아볼 수 있었다. 그는 현지 한국 교포들을 포섭해 한국으로 보낸 뒤 조봉행을 광물 사업가로 소개하고 조봉행이 건네는 보석(마약)을 남미에서 유럽으로 운반해주면 400만원 정도의 보상금을 주겠다는 제안으로 한국 국민들을 마약 운반책으로 사용하였다. 이 운반책들은 대부분 형편이 어려운 주부, 대학생 등이었고 사정도 모른 채 조봉행의 마약을 운반한 이들은 현지에서 마약 운반 혐의로 체포되거나 구금되기도 하였다. 이 피해자 중 한 명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바로 전도연, 고수 주연의 집으로 가는 길이다.
조봉행의 마약 사업은 전 세계로 퍼져갔고 2005년에는 인터폴 수배명단에 오를 정도였다. 이어 조봉행은 일본과의 마약거래를 하고 있었고 심지어 한국으로의 마약 공급도 계획하고 있었다. 국정원과 검찰은 이 소식을 접하고 2007년 10월, 조봉행 체포를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수리남과 대한민국은 수교를 맺은 관계이지만 현지 대사관이 없고 관련 업무는 베네수엘라 한국 대사관이 겸임하기 때문이다. 또한 수리남 경찰과 군 조직은 조봉행이 매수했기 때문에 쉽사리 협조를 기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K씨의 등장
그런데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니 바로 K씨였다. K씨는 수리남에서 홍어 사업을 하다가 조봉행 때문에 홍어 사업에 실패하고 낭패를 본 사람이었다. 이 내용을 접수한 국정원은 K씨에게 협조를 요청했고 목숨이 걸린 위험한 일이었지만 오랜 고민 끝에 K씨는 국정원의 협조 요청을 수락한다.
국정원과 DEA가 설계한 작전은 이렇다. K씨를 가상의 재미교포 마약상과 조봉행 사이의 마약거래 브로커로 위장시켜 조봉행에게 접근시키는 것이었다. K씨는 조봉행, 그리고 조씨의 부하 몇 명과 함께 한 집에서 생활하였다. K씨는 비밀유지를 위해 특정 시간에만 국정원과 연락하였고 잘 때는 권총을 베개 밑에 두고 잘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조봉행의 한국인 부하 A씨가 K씨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K씨는 '너도 한국에 가족이 있는데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느냐, 나하고 손을 잡아 좋은 일 하자.'고 하며 A씨를 설득하였다. 그리고 K씨는 A씨를 국정원과도 연결해주었다. A씨는 눈물을 흘리며 협조를 약속하였고 이렇게 위기는 넘기는 듯 하였다.
하지만 3일 뒤 K씨에게 조봉행의 부하가 나타났다. A씨가 배신한 것이었다. K씨는 살해되기 직전이었지만 조봉행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조봉행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이때 K씨는 'A씨가 하도 말이 많아서 그러지 못하게 장난 좀 친 거다. 나를 못 믿겠거든 맘대로 해라.'고 하는 기지를 발휘하였다. K씨를 믿지 못해 만약 제거한다면 조봉행 입장에서는 어렵게 구한 한국인 브로커를 잃는 셈이었다. 결국 조봉행은 K씨를 향한 의심을 거두었고 오히려 A씨가 조직 뒷선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체포 작전
2008년 초 K씨와 국정원, DEA는 조씨를 현지에서 검거하기 위해 공동작전에 착수하였다. 2008년 9월, K씨는 조봉행에게 직접 거래할 마약을 봐야되겠다고 요청하였다. 조봉행은 K씨를 차에 태워 행선지가 드러나지 않게 K씨의 얼굴에 복면을 씌운 뒤 한 창고로 데리고 갔다. 그 창고에는 한국에 보낼 1.2t 무게, 거래가로 1조원이 넘는 코카인 더미가 쌓여 있었다.
현지 체류 경험이 2년여 정도 되고 카지노, 클럽의 불빛, 차의 움직이는 방향 등으로 창고의 경로와 정체를 파악한 K씨는 국정원에게 이 사실과 함께 창고 급습과 조씨 검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DEA 측이 AK소총으로 무장한 마약 조직원들과의 대규모 총격전과 인명 피해를 우려해 작전 시행에 난색을 표했다. 결국 현지 체포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조봉행 검거 작전
K씨는 이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되었고 2008년 9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국정원과 DEA, K씨는 조봉행을 수리남 밖으로 유인해 체포하자는 작전을 세웠다. 처음 계획된 곳은 괌이었다.
K씨는 통화로 조봉행과 거래를 하였다. 미국 마약상이 코카인 1.2t의 구매를 원하고 액수와 송금 방법은 만나서 정하자는 것이었다. 조봉행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딜이었고 그 제안을 수락했다. 빅딜 성사를 눈앞에 둔 조봉행은 서둘러 코카인을 수출용 목재에 숨겨 넣는 작업을 시작하였고 그 와중에 K씨는 일부러 조봉행의 연락을 받지 않는 등 조봉행을 애타게 만들었다.
조봉행은 구매자와 함께 수리남으로 들어오라고 K씨에게 요구하였지만 K씨는 구매자가 수리남의 치안을 우려해 입국을 꺼린다는 핑계로 거절하였다. 이어 조봉행에게 괌으로 나와 얘기하자고 했지만 미국 땅을 마약 밀매범이 갈 리가 없었다.
결국 접선지를 범죄인 인도도 가능하고 사법당국 협조도 가능한 브라질로 변경하였다. 처음에는 수리남과 가까운 도시 벨렘에서 접선하기로 하였으나 벨렘은 현지 마약 조직의 영향력으로 체포 작전이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컸다. 다시 접선지를 상파울루로 변경했다. 계속되는 K씨의 수리남 입국 거부, 접선지 변경 등으로 의심한 조봉행은 거래를 끝내 거절했다.
마약왕 검거
이대로 조봉행을 체포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던 K씨는 조봉행을 계속해서 설득하였다. 오랜 시간이 흘렀고 결국 조봉행은 이 거래를 수락했다.
2009년 7월 23일 상파울루 구아룰류스 국제공항에서 완전무장한 브라질 현지 경찰이 입국장 주변에서 잠복하고 있었다. 국정원 요원들과 K씨도 현장에 합류했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인 오후 5시에 조봉행은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예정된 탑승자 명단에도 조봉행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K씨는 휴대전화를 꺼내 조봉행과 연락하는 척 하며 브라질 현지 경찰의 철수를 늦추었고 2시간 뒤 조봉행의 모습이 나타났다. 브라질 경찰은 환영 선물로 조봉행에게 수갑을 채워줬고, 오랫동안 수리남에서 나오기를 거절한 대한민국 마약왕은 결국 이렇게 허무하게 체포되었다.
이후 조봉행은 범죄인 인도결정으로 한국으로 압송되었고 서울중앙지법 형사29부(배준현 부장판사)는 1심 재판에서 징역 10년, 벌금 1억원을 선고했다.
사망
2011년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조봉행은 이후의 근황이 알려지지 않아, 만기출소 후 수리남으로 돌아간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채널A의 취재 결과, 해남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조봉행은 지병인 고혈압 등이 악화되어 2016년에 형집행정지 결정을 받아 출소한 후 광주광역시의 조선대학교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던 중 심부전과 고혈압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관련 기사 또 SBS도 당시 담당 수사관이던 도춘성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과장과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조봉행이 2016년 4월 19일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