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 수호 통상 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은 조선과 미국 간에 체결된 통상 조약이다. 미국은 1844년(헌종 10년) 청국과, 1854년(철종 5년)에는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며 양국의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후 미국은 1866년(고종 3년) 제너럴 셔먼 호 사건으로 조선의 개항에 적극적 관심을 가졌고, 1871년(고종 8년) 포함 외교에 의해 강제로 조선의 개항을 성취하려고 하였으나 무력 충돌로 좌절되었다.
1876년(고종 13년) 「조일 수호 조규」가 체결된 이후 미국은 1878년(고종 15년) 3월 상하원 합동으로 조선 개항 결의안을 가결하였다. 무역상의 이익과 표류하는 자국 선박을 구조하려는 의도였다. 이를 위해 미국 정부는 동아시아 함대 제독 슈펠트(Robert W. Shufeldt, 1850~1934)에게 조선과의 조약을 체결하라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는 1880년(고종 17년) 3월 일본에 중재를 요청하여, 일본 외상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소개장을 가지고 부산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미국과 통교할 뜻이 없으며, 무엇보다 일본의 중재에 의한 교섭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교섭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이때 일본의 중재로 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우려하던 청국의 이홍장(李鴻章)이 슈펠트를 톈진(天津)으로 초청하여 조선과의 수호 통상을 알선해 주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와 함께 일본 주재 청국 공사 허루장(何如璋)과 참찬관 황준헌(黃遵憲, 1848~1905)을 통해 수신사(修信使)로 도쿄에 파견되어 있던 김홍집(金弘集, 1842~1896)과 접촉하게 했다. 이때 김홍집에게 조선이 미국(美國)과 연합해야 함을 주장한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전달되었다.
이홍장과 슈펠트는 톈진에서 조선과 미국의 조약 체결을 의제로 회담을 개시했고, 청국이 중재하기로 하였다. 조미 조약 체결을 위한 예비 교섭은 1881년(고종 18년) 10월부터 시작되었다. 영선사(領選使)로 청국에 파견된 김윤식은 이홍장에게 조선 정부가 조약을 체결할 의사가 있음을 밝히면서, 단 여기에는 청국 관원도 참여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서양과의 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세력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른바 위정척사 운동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때 이홍장은 청국의 의도대로 조약을 체결하고자, 톈진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전권 위임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김윤식을 협상 테이블에서 배제하고 청국과 미국이 마련한 조약 초안만 검토하게 했다.
당시 이홍장의 최대 관심은 미국으로부터 ‘조선은 청국의 속방(屬邦)이다’는 내용을 조약에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슈펠트는 이를 강하게 반대하여 결국 1조를 공란으로 비워 두고 대신 조선 국왕이 미국 대통령에게 ‘속방 조회문’을 보내면 미국이 이를 수령하는 것에 합의하였다. 이홍장은 다음으로 거중조정(居中調整) 조문을 명문화했다. 미국을 통해서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또 청이 서구 열강으로부터 강제 받은 통상에서의 불평등성을 완화시키는 조문을 명문화했다. 일상용품 10% 이하, 사치품 등에 대한 30% 이하로 규정된 수입 관세율, 관세 자주권, 미국 상인의 내지 통행금지, 미국 상선의 개항장 간 무역 금지 등을 담았다. 이홍장과 슈펠트는 1882년(고종 19년) 음력 3월 1일, 1조를 공란으로 두고 조약 초안에 서명했다. 이홍장은 조약 초안을 김윤식에게 통보하면서, 세 가지 방침을 전달하였다. ① 조선 정부는 조약 초안을 전면적으로 수정할 수 없으며, ② 조약 체결 직후 조선 정부는 속방 조회문을 미국 정부에 통보하고, ③ 「조미 조약」 교섭에 청국 관원이 참여한다는 내용이었다.
슈펠트는 청나라 사신 마젠충[馬建忠, 1845~1899]과 함께 인천 제물포에 들어왔다. 조선 측 전권대관 신헌(申櫶), 부관 김홍집은 이홍장과 슈펠트가 가조인한 조약안을 검토하여 홍삼과 미곡 수출을 금지하는 조항을 추가하는 것으로 협상을 마무리했다. 이 해 4월 6일 제물포 화도진(花島鎭)에서 14개조로 이루어진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 양국 정부는 1883년(고종 20년) 4월 「조미 조약」에 대해 비준을 완료하였다. 이에 따라 푸트(Foote, L. H.)가 초대 주조선 미국 공사로 부임하였고, 조선 정부도 같은 해 6월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을 정사로, 홍영식(洪英植, 1855~1884)을 부사로, 서광범(徐光範, 1859~1897?)을 종사관으로 하는 보빙사를 미국에 파견하였다.
「조미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관에서 조선이 제3국으로부터 부당한 침략을 받을 경우 조약국인 미국은 즉각 이에 개입, 거중조정(居中調整)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이 조항은 이후 체결된 영국, 독일과의 조약에도 동일하게 반영되었다. 조선은 이 조항을 상당히 신뢰하여 조선의 국권이 특정 국가에 훼손될 때 각국에 거중조정을 요청하였다. 1885년(고종 22년) 영국의 거문도 점령 시기, 1894년(고종 31년) 청일 전쟁 발발 직전, 1904년(고종 41년) 러일 전쟁 발발 직후 조선 정부는 미국에 거중조정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거중조정의 실상은 단순한 의견 전달에 그쳤고, 적극적인 중재가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제2관은 상호 외교관을 파견하여 상주한다는 것으로, 이에 따라 양국 조약 비준 후 외교관을 교환하였다. 제3관은 미국의 주요 관심사인 조선 근해에서 조난된 선박의 피난과 원조 규정을 명시하고 있다. 제4관에서는 대표적 불평등 조항인 영사 재판권 제도를 규정하고 있다. 영사 재판권 제도 조항은 앞서 「조일 수호 조규」의 규정을 잇는 것으로 후일의 영국, 독일, 프랑스 등과의 수호 조약의 모델이 되었다. 조선 영토 내에서 미국 관리의 주관 아래 미국 법을 적용하는 치외법권을 인정한 것이다.
제5관은 수출입 관세에 대한 규정을 명문화하면서 조선에게 관세 자주권이 있다고 밝혔다. 제6관은 조선 내에서 미국인의 상업 활동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다. 조계지 설정, 조계지 내에서의 토지 구입, 임차(賃借)의 자유를 보장하였고, 다만 내지 통상은 부정되었다. 제7관은 아편 무역 금지 조항으로 이후 조선이 체결하는 모든 조약에도 실리게 된다. 제8관은 「조미 조약」에서 조선이 수정 제안하여 삽입한 것으로 홍삼과 미곡 수출을 금지하였다. 홍삼은 조선의 주요 재원으로 사실상 정부의 전매품이었기 때문이고, 「조일 수호 조규」에서 미곡 수출에 따른 폐단을 시정하기 위함이었다. 제14관에서 조선에서 미국에 부여하는 최혜국 대우 조항을 두었다. 「조미 조약」에서 허용되지 않은 권리⋅이권⋅특혜를 조선이 제3국에 허용할 경우 동일 조건으로 미국도 향유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최혜국 대우 조항은 후일 각국과의 조약에도 등장하였는데, 특히 서양 열강은 이를 근거로 조선이 청국에게 허용한 조약상의 제반 특권을 자신들도 향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조미 조약」은 앞서의 「강화도 조약」이나 후일 구미 열강과의 조약 전범이 된 「조영 조약」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등한 항목이 많았다. 그것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국이 조약 초안 작성에 직접 개입했고, 미국이 동아시아에 개입이나 관심 정도가 아직까지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미국은 최혜국 대우 조항으로 인해 후일 구미 국가와 같은 조건으로 조선에서의 제반 권리를 향유하게 된다.
「조미 조약」을 통해 조선은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구미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또한 이후 영국⋅독일 등 유럽 국가와 체결하는 수호 조약은 거의 이 「조미 조약」을 준용하는 등, 국제 외교의 다변화를 가져 왔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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