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고종 21) 이후 곡물반출 금지령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적 분쟁사건.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으로의 미곡 수출이 증대되면서 곡물가격이 뛰고 품귀현상 마저 나타났다. 거기에 흉작까지 겹치게 되자, 지방관들은 자기 지방에서 생산된 미곡이 타지방 또는 외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이른바 방곡령을 실시하였다.
더욱이 1883년 6월에는 개항 이후 일본에 의한 곡물 유출을 저지할 조약상의 명분이 없던 조선은, 한발·수해·병란 등으로 국내식량의 부족이 염려될 때 1개월 전에 사전통보로 방곡을 실시할 수 있다는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을 체결하여 제한적이나마 법제적인 장치를 가지게 되었다.
1) 1차 방곡령 사건(황해도)
1876년부터 1904년 사이에 일어난 100여 건에 달하는 방곡령사건은 대부분이 정부의 지시로 해결되었다. 그러나 1889년과 1890년 황해도와 함경도에서 실시된 방곡령은 지방관들이 일본의 압력을 받은 정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그대로 강행하여 외교적인 마찰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같은 외교적 마찰은 1889년 5월 황해도관찰사 조병철(趙秉轍)이 방곡령을 실시함으로써 처음으로 발생하였다. 이는 일본상인 이소베(磯部六造)·이시가와(石川芳太郎) 등이 황해도에서 구입한 곡물 2,130석을 인천으로 반출하려다가 저지되면서 야기된 사건이었다.
그들은 방곡령이 사전에 아무런 통고 없이 시행되었다는 점을 들어 인천감리서에 항의하였다. 인천감리서는 곡물의 운반을 허용하라는 통첩장을 조병철에게 발송하였다. 그러나 관찰사 조병철은 황해도에는 개항장이 없으므로 한일 간의 통상장정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하면서 통첩장을 무시해버렸다.
이렇게 되자 일본상인들의 협조 요청을 받은 일본대리공사 곤도(近藤眞鋤)가 방곡령의 해제를 외아문독판(外衙門督辦) 조병직(趙秉稷)에게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독판은 일본의 압력에 굴복해 조병철에게 해제를 명령하였다. 이로써 해결은 되었으나, 후에 일본은 방곡령의 시행으로 생긴 손해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하여 조선경제를 침식해 나갔다.
2) 2차 방곡령 사건(함경도)
방곡령을 둘러싼 한일 간의 두 번째 외교적 마찰은 같은 해 10월 함경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이 원산항을 통해 해외로 수출되는 콩의 유출을 1년간 금지하여 발생하였다.
조병식은 1883년의 통상장정에 따라 9월 1일 외아문에 방곡령 실시를 통고하고 10월 1일부터 실행에 옮겼다. 일본은 외아문이 그들에게 통고한 날짜가 9월 17일이었다는 점, 콩이 50년 내 대풍이라는 점을 내세워 방곡령의 즉각적인 해제를 요구하였다.
외아문독판 민종묵(閔種默)은 곤도의 압력에 못 이겨 10월 17일 함경도관찰사에게 해제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조병식은 오히려 곡물을 일본상인들로부터 압수하는 등 더욱 강력하게 방곡령을 고수하였다. 곤도는 방곡령의 폐지는 물론 조병식의 처벌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조선정부는 1890년 1월 조병식에 대하여 3개월 감봉처분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일본이 그를 경질시키기 위해 본국 외무대신에게 군함 파견을 요청하자, 부득이 조병식을 강원도관찰사로 전임시켰다.
이로써 함경도 방곡령사건은 일단 해결되었다. 그러나 원산에 거주하는 일본상인들이 손해배상을 요구함으로써 다시 양국 간의 외교적 마찰 요인이 되었다.
3) 3차 방곡령 사건(황해도)
세 번째 외교적 마찰은 1890년 2월 황해도관찰사 오준영(吳俊泳)이 일본상인 쓰지이(土井龜太郎)·사다케(佐竹甚三)가 구입한 곡물을 황해도 밖으로 유출할 수 없게 함으로써 야기되었다. 전년도에 일본이 흉년을 맞았기 때문에 쌀값이 폭등할 것을 예상한 대판상인들은 국립제일은행으로부터 거액을 융자받아 다량의 곡물을 매입하였다.
1889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5개월간 그들이 매입한 곡물량은 쌀·콩·팥 등 6만4773석에 달하였다. 이같 은 대규모의 곡물 매입으로 황해도가 심각한 식량난에 봉착했기 때문에 오준영은 방곡령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곤도 대리공사가 외아문을 방문해 아무런 사전통보 없었기 때문에 명백한 불법이라고 항의하고 해제를 요구하였다. 민종묵은 오준영에게 해제명령을 내림으로써 해결되었다.
이 사건이 있은 지 2년 후인 1892년 9월 한일 간의 외교적 분규가 재현되었다. 이는 일본이 3건의 방곡령으로 인한 손해배상을 조선에 요구함으로써 야기되었다.
즉, 일본은 2년 동안 함경도에서 실시한 방곡령으로 원산거류 일본상인이 입은 손해배상 14만 7000원을 일본의 판리공사(辦理公使) 가지야마(梶山鼎介)를 통해 요구했던 것이다.
그 같은 요구를 받은 민종묵은 4만 8,000원과 6만 774원으로 두 차례에 걸쳐 배상하겠다는 수정안을 내놓았지만, 일본상인의 반대와 일본외무성의 비협조로 무산되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한일 간에 회담만도 10여 회가 열렸고 양국의 협상대표도 몇 차례 교체되는 등 난항을 거듭하였다. 더욱이 1893년 초에 내한한 공사 오이시(大石正已)는 3건의 방곡령으로 인한 손해배상금에 이자까지 합쳐 21만 7000원을 강력하게 독촉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독촉도 아무런 소용이 없자, 일본은 이홍장(李鴻章)에게 중재를 의뢰하여 결국 위안스카이(袁世凱)로 하여금 타협점을 찾게 하였다.
결국 1893년 4월 3일 새로 교체된 독판 남정철(南廷哲)은 오이시와 협상하여 함경도 거류 일본상인에게는 9만원, 황해도 거류 일본상인에게는 2만원 등 총 11만원을 배상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튿날 6만원은 3개월 안에, 3만원은 5년 안에, 나머지 2만원은 6년 안에 배상을 완료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방곡령을 둘러싸고 4년간이나 지속되었던 한일 간의 외교적 분규는 종식되었다. 그러나 이후 일본인들에 의한 침탈은 날로 심해져 유통은 물론 생산과정에까지 침투, 조선의 경제를 교란시켜 놓았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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