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고종 19년) 8월 23일 조선의 주정사(奏正使) 조영하(趙寧夏, 1845~1884)와 청국의 직예총독(直隷總督) 이홍장(李鴻章, 1823~1901) 사이에 조선과 중국 양국 상인들의 무역 통상을 규정한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의 일부이다.
청국은 ‘조일 수호 조규’ 체결 이후 일본이 조선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자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또한 아편 전쟁 및 청불 전쟁의 여파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것을 만회하기 위해 기존의 조공국(朝貢國)이던 조선에 대한 정치⋅외교적 지배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1882년 5월,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주도적으로 체결토록 하여 조선에 대한 일본의 외교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조선에 대한 외교적 조언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해 6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이홍장은 조선 내정에 개입할 호기로 판단하고 즉각 휘하의 정예병을 조선에 파견하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을 체포, 천진(天津)에 구금하는 한편, 조선에 청군을 주둔시켜 정국을 장악한 후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체결시켰다.
본 장정은 첫 머리에 조선은 청국의 제후국이며, 본 장정은 조선이 다른 외국들과 맺은 조약과는 명백히 다름을 밝히고 있다. 명칭이 ‘조약’이 아닌 ‘장정’인 것 자체가 조선의 청국에 대한 종속성을 전제로 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조항은 ① 북양대신과 조선 국왕의 위치를 대등하게 규정한 것(1조), ② 조선에서의 중국 상무위원의 치외법권 인정(2조), ③ 조난 구호 및 평안도⋅황해도와 산둥⋅봉천 연안 지방에서의 어업 허용(3조), ④ 베이징과 한성 양화진에서의 양국 상인 영업을 허락하되 양국 상민의 내륙 영업은 금지함을 원칙으로 하고, 불가피할 경우 해당 지방관의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4조), ⑤ 홍삼 무역 세칙(6조. 청국은 홍삼 무역에 대해 50%의 세금을 징수하고자 했으나 조선의 요구로 15%로 확정) 등이다.
이 장정을 통해 청국 상인들은 조선의 한성 및 양화진에서 상업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결과 한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조선의 전통 상인들은 큰 위기에 직면하였다. 한편 청국은 본 조약을 통해 다른 국가들과는 구별된, 독점적인 영향력을 조선에 행사할 계획이었으나 영국, 미국, 일본 등의 완강한 반대에 부닥쳐 결국 최혜국대우 규정을 통해 한성 및 내지에서의 통상권을 각국 상인들에게 똑같이 적용하였다.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은 서구와의 근대적 외교 관계 수립에 압박을 받던 청국이 기존의 조공국과의 관계에 제국주의적 요소를 덧붙임으로써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던 시도이다. 조선으로서는 청국 외의 다른 국가들과 근대적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가운데 전통적인 중화 조공 질서를 상대화, 즉 근대적 자주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임오군란 등 여러 악조건 속에서 장정은 청국에 크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 조선 측은 대청(對淸) 주요 수출품이던 홍삼에 대한 규정을 조선에 유리하게 만든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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