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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 테쿰세 전쟁, 크리크 전쟁, 미영 전쟁

Jobs9 2021. 5. 1.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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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민주공화당)

 

AD 1809년 제임스 매디슨이 미국의 제4대 대통령 취임을 한 후 내각을 구성하면서 그가 국무장관으로 몸을 담았던 전임 토머스 제퍼슨 정부의 내각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다만 제임스 매디슨이 맡았던 국무장관은 공석이 되었기 때문에 토머스 제퍼슨 정부에서 재무장관으로써 많은 재능을 보여줬던 앨버트 갤러틴을 국무장관을 임명하고자 했으나 상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에 앨버트 갤러틴을 재무장관으로 유임시키고 토머스 제퍼슨 정부에서 해군장관을 역임한 로버트 스미스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이리하여 이전 정부들과 달리 제임스 매디슨 정부에서는 국무장관이 아니라 재무장관이 2인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다만 제임스 매디슨은 로버트 스미스와 종종 충돌하면서 AD 1811년 4월 국무장관을 제임스 먼로로 교체하게 된다. 그 밖에 해군장관은 폴 해밀턴이, 전쟁장관은 윌리엄 유수티스가, 법무장관에 시저 아우구스투스 로드니가 각각 임명되었다.

 

 

 

영토 확장과 대(對) 인디언 전쟁

 

테쿰세 전쟁

한편 북서 인디언 전쟁(Northwest Indian War, AD 1785년 ~ AD 1795년)이 끝나고 '그린빌 조약(Treaty of Greenville)'이 체결되면서 미국은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 부족들로부터 오늘날의 오하이오 주의 전체와 인디애나 주의 일부를 양도받았다. 비록 수많은 인디언 부족들이 그린빌 조약의 결정 사항을 받아들였으나 쇼니 족의 젊은 전사인 테쿰세는 그린빌 조약의 승인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10년 뒤 테쿰세는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에 지도자 격으로 부상했고 동생인 텐스콰타와는 전통 종교의 부활과 전통 문화로의 회귀를 외치고 다녔다.

 

특히 테쿰세 및 텐스콰타와 형제는 백인 문명에 동화되는 것에 반감을 표시하며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동조를 얻어냈다. AD 1808년부터 3년 간 쇼니(Shawnee) 족, 캐나다의 이로쿼이(Iroquois) 족, 치카모가(Chickamauga) 족, 메스카와키(Meskwaki) 족, 마이애미(Miami) 족, 밍고(Mingo) 족, 오지브와(Ojibwe) 족, 오타와(Ottawa) 족, 키카푸(Kickapoo) 족, 델라웨어(Delaware) 족(또는 레나페(Lenape) 족), 마스쿠텐(Mascouten) 족, 포타와토미(Potawatomi) 족, 소크 족(Sauk), 투텔로(Tutelo) 족, 와이언도트(Wyandot) 족 등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설파하였다.

 

한편 AD 1800년 인디애나 준주지사로 임명된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과 협상을 벌여 AD 1809년 '웨인 요새 조약(Treaty of Fort Wayne)'을 체결하고 약 12,000 평방 킬로미터에 달하는 땅을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 조약에는 델라웨어 족, 일리버(Eel River) 족, 마이애미 족, 포타와토미 족, 키카푸 족, 웨아(Wea) 족이 참여하였지만 쇼니 족은 불참했다. 하지만 미국은 예전부터 토지를 매입할 때마다 각 부족의 추장들에게 'X' 자 표시를 받으며 날인을 대신했지만 사실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토지는 모든 부족들의 공유물로써 추장에게 그들을 대신할 권한이 부여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항상 다른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반발을 불러 왔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미국이 번번히 무력으로 이들을 몰아내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테쿰세가 쇼니 족을 이끌고 반발하고 나서면서 양 측이 일촉즉발의 상태가 되었다.

 

AD 1810년 8월 20일 테쿰세가 무장한 병력 400명을 이끌고 와바시 강 하류의 빈센즈에서 윌리엄 헨리 해리슨을 만나면서 '그라우스랜드 대면(Confrontation at Grouseland)'이 이루어졌다. 비록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테쿰세를 설득했지만 테쿰세는 웨인 요새 조약의 부당함만 주장하고 윌리엄 헨리 해리슨을 위협했기 때문에 협상이 결렬되었다. AD 1811년 여름의 재협상마저 결렬되자 테쿰세는 남부의 이른바 '문명화된 다섯 부족(Five Civilized Tribes)'을 돌아다니며 봉기를 호소했다. 문명화된 다섯 부족은 미시시피 강 동부에 살면서 백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체로키(Cherokee) 족, 치카소(Chickasaw) 족, 촉토(Choctaw) 족, 크리크(Creek) 족(머스코지(Muscogee) 족이라고도 함), 세미놀(Seminole) 족의 다섯 원주민 부족을 일컬었다. 그러나 테쿰세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크리크 족 중에서 백인 문화를 거부한 채 전통 문화로의 복귀를 주장하며 내분을 벌이던 전사 집단인 '레드 스틱스(Red Stick)' 만이 유일하게 호응을 해줬을 뿐이었다.

 

그 사이 윌리엄 헨리 해리슨이 웨인 요새 조약에 따라 인수한 토지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미군 1,000명을 이끌고 빈센즈에서 나와 자신의 이름을 딴 '해리슨 요새(Fort Harrison)'를 건설하며 테쿰세의 동생인 텐스카타와를 위협했다. 이에 테쿰세 측에서 반격에 나서면서 AD 1811년 11월 7일 테쿰세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이를 공격하는 티피카누 전투(Battle of Tippecanoe)가 벌어졌으나 미군이 승리하였다. 다만 윌리엄 헨리 해리슨도 테쿰세 측의 지원군을 우려하여 진지를 불태우고 빈센즈로 철수했고 AD 1812년 미영 전쟁(미국명 War of 1812)이 발발하자 테쿰세가 캐나다의 영국군과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AD 1813년 10월 테임즈 전투(Battle of the Thames)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한 테쿰세가 전사하면서 그의 아메리카 원주민 동맹이 붕괴되었고 웨인 요새 조약에 따라 미국령으로 선포된 모든 토지를 흡수한 인디애나 준주는 AD 1816년 12월 11일 미국의 19번째 주인 '인디애나 주(state of Indiana)'로 승격되는 데 성공하게 된다.

 

 

테쿰세의 저주

테쿰세 전쟁에서 패배한 테쿰세가 전사할 때 "10의 자리가 짝수이고 1의 자리가 영(0)인 해에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은 임기 중에 죽을 것"이라고 저주를 하였는데 이를 '테쿰세의 저주(Curse of Tippecanoe)'라고 부른다. 실제로 테쿰세를 전사시켰던 윌리엄 헨리 해리슨이 AD 1840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후 이듬해 폐렴으로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매 20년 마다 당선된 총 7명의 대통령(윌리엄 헨리 해리슨, 에이브러햄 링컨, 제임스 에이브램 가필드, 윌리엄 매킨리, 워런 하딩, 프랭클린 루스펠트, 존 F.(피츠제럴드) 케네디)이 모두 임기 중에 사망하게 된다. 그러나 테쿰세의 저주는 AD 1980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이 그에 대한 암살을 시도한 존 힝클리의 저격에도 불구하고 겨우 목숨을 건지면서 비로소 깨지게 된다.

 

 

크리크 전쟁

AD 1811년 12월 16일 지금의 미주리 주 뉴마드리드 근처에서 규모 8.0의 '뉴마드리드 지진(New Madrid Earthquakes)'이 강타하자 크리크 족의 전사 집단인 레드 스틱스는 이것이 백인 문화를 받아들인 자신들에 대한 신의 계시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백인들이 나타나기 이전의 전통 문화로 돌아가자고 선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AD 1813년 2월 레드 스틱스가 오하이오 강변의 백인 정착민 두 가족을 살해한 것에 대해 미국이 항의하자 크리크 족 추장이 자체 징계를 결정했다. 이 때문에 크리크 족의 내전이 시작되었고 본래부터 백인 문화를 혐오하던 레드 스틱스는 백인 사회로부터 유입된 모든 물건을 압수하고 파괴하였다. 그러나 AD 1813년 7월 레드 스틱스가 미군과 충돌한 것을 기점으로 미군이 크리크 족의 내전에 개입하면서 미국과 크리크 족의 레드 스틱스 간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를 '크리크 전쟁(Creek War)'이라고 부른다. 또한 레드 스틱스가 테쿰세를 돕고 영국의 지원을 받은 것 때문에 크리크 전쟁을 미영 전쟁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크리크 전쟁에 미국은 테네시, 조지아, 미시시피 민병대가 동원됐는데 그 중에서 테네시 민병대를 지휘하던 앤드루 잭슨의 활약이 대단하였다. 앤드루 잭슨은 민병대 뿐만 아니라 동맹을 맺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인 체로키 족, 촉토 족, 남부 크리크 족의 지원을 받으며 AD 1814년 3월 24일 호스슈벤드 전투(Battle of Horseshoe Bend)에서 레드 스틱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800명을 전사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8월 9일 '잭슨 요새 조약(Treaty of Fort Jackson)'을 체결하면서 그를 지원했던 크리크 족의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앨라배마 주의 절반과 조지아 주 남부에 해당하는 크리크 족의 땅 93,000 ㎢을 할양받는 데 성공했다. 다만 앤드루 잭슨은 전쟁 과정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을 집단 학살하였고 특히 여자가 살아남으면 아이가 태어난다는 이유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육하는 잔인함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드루 잭슨은 크리크 전쟁을 통해서 미국의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고 그의 명성은 미영 전쟁과 세미놀 전쟁(Seminole Wars)을 통해서 더욱 높아지게 된다.

 

 

 

 

미영 전쟁

 

전쟁의 배경

 

제임스 매디슨이 처음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직전에 의회가 통상금지법을 폐지했지만 미국은 여전히 유럽에서 서로 전쟁을 벌이던 영국 및 프랑스의 문제 때문에 어려워하고 있었다. 특히 영국과는 대 프랑스 무역과는 별도로 미국 선박의 선원에 대한 영국의 강제 징집이 가장 큰 분쟁 사항이 되었다. 영국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탈영병이 증가하자 탈영병 수색을 명목으로 미국 선박을 임의로 나포하여 조사하곤 했다. 이는 이미 '체사피크 레오퍼드 사건(Chesapeake–Leopard Affair)'을 통해서 경험한 일이었다.

 

그런데 영국이 자국 시민 만으로 군사력의 핵심인 해군을 유지하는 것이 점점 버거워졌기 때문에 단순히 탈영병을 체포하는 것을 넘어서 미국 선박에 타고 있던 영국 태생 선원을 강제 징집하는 일을 비일비재하게 벌이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자국민이 타국으로 이주하여 정착할 권리를 인정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영국 태생인 경우에만 강제 징집했지만 나중에는 이를 회피하기 위한 위조한 신분증과 시민권이 만연하자 미국 시민권자이어도, 심지어는 영국 태생이 아니어도 영어만 할 줄 알면 무차별적으로 끌고 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미국이 영국 해군에게 숙련된 선원을 손쉽게 제공하는 공급처로 전락했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결국 미국 의회는 독립 전쟁 이후의 젊은 세대가 주축이 된 하원들이 영국과의 결전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종국에는 79 대 46의 찬성으로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가결시켰다. 그리고 상원 역시 상원이 19 대 13으로 선전포고 안을 찬성했고 현직 대통령인 제임스 매디슨이 재선 선거를 앞둔 시점인 AD 1812년 6월 18일에 서명하면서 미국 역사상 최초로 외국에게 선전포고를 하며 미영 전쟁을 시작하였다.

 

 

제임스 매디슨의 대통령 재선

 

AD 1812년 제임스 매디슨의 첫 번째 대통령 임기 만료가 다가오자 같은 해 5월 민주공화당은 제임스 매디슨이 재선에 도전하도록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고 차순위였던 뉴햄프셔 주지사 존 랭던이 부통령 후보직을 사퇴하자 매사추세츠 주지사 엘비릿지 제리가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이에 맞서서 공화당은 뉴욕 시장인 드윗 클린턴을 대통령 후보로, 검사 출신의 자렛 잉거솔을 부통령 후보로 각각 내세웠으나 같은 해 10월 30일부터 12월 2일까지 진행된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북부의 7개 주에서만 승리했을 뿐 나머지 11개 주에서 패배하였다. 이에 따라 제임스 매디슨은 총 선거인단 217명 중 128명의 득표를 기록하며 미국 대통령으로 재선되는 데 성공했고 엘비릿지 제리가 부통령이 되었다. 이에 따라 제임스 매디슨은 미영 전쟁을 지속할 동력을 얻었다.

 

 

전쟁의 전개

 

미영 전쟁이 발발할 당시 영국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와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 AD 1803년 ~ AD 1815년)을 벌이던 중이었기 때문에 사실 미국까지 병력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영국 육군의 대부분이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에 투입되어 있었고 영국 해군은 유럽 대륙을 봉쇄 중이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북아메리카 대륙에 주둔 중이던 영국군은 캐나다 민병대의 지원을 받던 6,034명 뿐이었다. 그러나 미국 역시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사실 미국의 선전포고의 배경에는 자신들의 팽창 정책으로 인해 분쟁이 발생한 아메리카 원주민을 은밀히 지원하던 영국을 응징하고 캐나다까지 차지하는 것이었지만 미국은 보유한 정규군의 숫자는 매우 적었고 모병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각 주의 민병대는 자신의 고향을 떠나는 것을 꺼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네 방향으로 동시에 캐나다를 공격하여 재빠르게 점령한 후 영국과 휴전 협상을 시작한다는 안이한 작전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첫 번째 공격은 윌리엄 헐이 디트로이트에서 애머스트버그로 향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공격은 스티븐 밴 렌셀러가 나이아가라 강을 건너 기습하는 것이었다. 또한 세 번째는 세인트로렌스 강을 건너 킹스턴을 점령하는 것이었고 마지막으로 헨리 디어본의 본대가 섐플레인 호수를 통해서 몬트리올을 공략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미국의 작전은 시작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하였다.

 

먼저 AD 1812년 6월 12일 윌리엄 헐이 제대로 훈련도 받지 않고 장비도 형편없던 민병대가 대거 포함된 미군을 이끌고 지금의 온타리오 윈저 부근인 캐나다의 샌드위치 타운을 점령했으나 윌리엄 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디트로이트 요새로 후퇴해야 했다. 그리고 캐나다에 주둔 중이던 영국의 아이작 브록이 미국과 테쿰세 전쟁 중이던 테쿰세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병력을 지원을 받아 요새를 포위하자 윌리엄 헐은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전멸당할 것을 두려워 하여 8월 16일 항복을 선택하며 디트로이트 요새를 내어주고 말았다.

 

또한 스티븐 밴 렌셀러도 뉴욕 주 민병대가 주축이 된 민병대 2,650명과 정규군 900명으로 구성된 총 3,550명의 병력을 이끌고 캐나다로 향했다. 그리고 영국군이 분산된 틈을 타고 수적인 우세를 앞세워 AD 1812년 10월 13일 퀸스턴 하이츠 전투(Battle of Queenston Heights)에서 영국의 아이작 브룩을 전사시키는 성과도 거뒀으나 시의적절하게 도착한 영국군의 공격 때문에 최종적으로 패배하였다. 이 때 헨리 디어본의 경우에는 영국 정부가 강화 협상을 시도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이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AD 1812년의 나머지 기간 동안 후방에 머문 채 서둘러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비록 AD 1813년이 되자 공세에 나서서 AD 1813년 4월 27일 요크(지금의 토론토)를 점령하고 이어서 5월 27일 조지 요새를 탈취했지만 전황을 크게 바꿀 수는 없었다.

 

 

AD 1813년 9월 10일 올리버 해저드 페리의 미 함대가 이리 호수 전투(Battle of Lake Erie)에서 승리하면서 이리 호수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디트로이트 요새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윌리엄 헨리 해리슨도 10월 5일 테임즈 전투에서 테쿰세를 전사시키고 그의 원주민 연맹을 붕괴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이제 미국은 온타리오 호수의 서부를 장악하여 영국과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간의 연결을 차단시키면서 영국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에 대한 무기 지원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AD 1814년 7월 25일 온타리오 호수의 나이아가라 폭포 부근에서 벌어진 런디스 레인 전투(Battle of Lundy's Lane)에서 제이콥 브라운의 미군이 치열한 전투 끝에 패배하면서 당초의 목표였던 캐나다 점령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영국의 반격과 워싱턴 D.C.의 일시함락

 

AD 1814년 4월 16일 '퐁텐블로 조약(Treaty of Fontainebleau)'이 체결되면서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하고 나폴레옹 전쟁이 일단 종식되자 이제 영국도 북아메리카 대륙에 병력을 집중할 여유를 갖게 되었다. 영국 해군이 미국 동부의 대서양 해안 전체에 대한 해상 봉쇄를 단행했고 7월에는 영국군이 매사추세츠 주의 메인 지구(District of Maine)를 점령했다. 급기야는 AD 1814년 8월 영국군이 메릴랜드에 상륙하여 8월 24일 영국군이 블래던스버그 전투(Battle of Bladensburg)에서 미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무저항으로 놓인 워싱턴 D.C까지 진격하면서 미국은 대통령 관저, 국회의사당, 해군기지를 포함한 여러 공공시설이 파괴되는 큰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미국 역사상 수도가 외국군에게 점령된 것은 이 때가 유일하다. 이후 미국이 대통령 관저를 재건하면서 외벽을 흰 색으로 칠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백악관(White House)'이 탄생하게 된다.

 

 

연방당의 하트퍼드 회의

 

이제 미영 전쟁에서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AD 1814년 9월에는 영국군이 메인 지구에서 더 전진하여 뉴욕의 섐플레인 호수 지역을 위협했다. 또한 보스턴도 영국 함대의 포격 위협에 노출되면서 미국의 대외 무역이 완전히 차단당했기 때문에 무역 관세를 주수입으로 하고 있던 연방 정부가 파산 위기에 내몰렸다. 이에 따라 연방당의 주요 지지기반인 뉴욕 주와 뉴잉글랜드 지역(지금의 메인 주, 뉴햄프셔 주, 버몬트 주, 매사추세츠 주, 코네티컷 주, 로드아일랜드 주)가 영국 해군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자 연방당이 반전 여론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본래부터 연방당은 토머스 제퍼슨 시절에 이루어진 AD 1803년의 루이지애나 매입과 AD 1807년의 통상금지법에 반대하였으나 의회 의석수가 부족하여 이를 막지 못했다. 여기에 연방당은 전통적으로 영국과의 우호 관계를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영 전쟁 역시 반대하였지만 이 역시 강행되었다. 그러나 이제 연방당 소속인 뉴잉글랜드의 각 주지사들은 영국 함대의 공격으로부터 해안 지역을 보호해야 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주 민병대를 연방 정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주 바깥으로 보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제임스 매디슨은 민병대 파견을 거부한 매사추세츠 주와 코네티컷 주의 민병대에 대한 유지 비용의 제공을 중단했고 AD 1814년 9월 하순에는 미 의회에 징병제 법안의 통과를 촉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제임스 매디슨의 정책을 군사독재의 음모로 규정한 일부 연방당원들은 연방 정부에서 탈퇴하고 영국과 독자적으로 강화 협상을 진행하자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펼치기도 했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않았다. 대신에 AD 1814년 12월 15일부터 AD 1815년 1월 5일까지 코네티컷 주의 하트퍼드에 뉴잉글랜드의 연방당이 모여서 향후 대책을 논의하는 '하트퍼드 회의(Hartford Convention)'를 진행했다. 그리고 하트퍼드 회의의 주된 논의 주제는 연방당이 연방 정부와 의회에서 민주공화당에게 계속해서 밀리는 원인 중 하나인 미국 헌법에 규정된 '5분의 3 타협(Three-Fifths Compromise)'을 폐지하자는 것이 되었다.

 

미국 헌법 제정 당시 북부는 노예가 적고 남부는 노예가 많은 상황 속에서 과세와 하원 의원 숫자를 결정하는 인구수를 산정할 때 노예를 포함시킬 지의 여부가 쟁점이 되었다. 북부는 과세 기준인 인구수에는 부를 창출할 수 있는 노예를 포함시키지만 하원 의원 산정 기준인 인구수에는 의결권이 없는 노예를 제외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노예가 총 인구의 40%에 달하고 있던 남부에서는 과세 기준에서는 노예를 자산으로 취급하여 인구수 산정에서 제외하고 하원 의원 산정 기준에서는 인구수에는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많은 논쟁 끝에 AD 1787년 '필라델피아 제헌회의(Philadelphia Convention)'에서 제임스 윌슨의 '5분의 3 타협'이 합의된 바 잇었다. 즉 노예 중 5분의 3만 과세 기준과 하원 의원 산정 기준의 인구수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토머스 제퍼슨이 루이지애나를 매입한 후 계속해서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아내며 미국의 영토가 확장되면서 연방 정부에 가입하는 주의 숫자가 늘어나자 세력 균형이 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하트퍼드 회의에서 기존의 5분의 3 타협을 삭제하는 방안이 논의되어 진 것이었다. 또한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의회에서 신규 주 가입, 선전포고, 무역 제한법 등을 결의할 때의 의결 정족수 기준을 3분의 2로 상향시킬 것을 요구하기로 했다. 그 밖에 60일 초과의 통지 금지 제한, 대통령 임기를 1년으로 제한하고 신임 대통령은 전임자와 다른 주 출신으로 해야한다는 요구 사항들도 도출했다.

 

 

헨트 조약의 체결과 뉴올리언스 전투 승리의 대미

 

한편 영국이 겉으로는 전황을 우세하게 이끄는 것으로 보였지만 이미 오랜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하여 매우 피폐해졌기 때문에 미영 전쟁을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양 국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면서 강화 협상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AD 1814년 12월 24일 벨기에의 헨트에서 '헨트 조약(Treaty of Ghent)'이 조인되었다. 이를 통해 미국과 영국은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기로 합의하면서 양국 모두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전쟁을 마무리 했다. 이로서 미국이 캐나다 정복하려던 야심이 최종적으로 좌절되면서 오늘날 미국과 캐나다 간의 동부 국경이 확정되었다. 다만 당시의 열악한 통신과 교통 사정 때문에 강화 조약의 체결 소식을 미처 듣지 못한 지역에서 당분간 전투가 더 이어졌다.

 

한편 AD 1814년 영국군이 스페인령 식민지인 서(西) 플로리다의 펜서콜라(Pensacola) 일대에 상륙하여 5월에 애팔라치콜라 강(Apalachicola River)의 하구로 들어갔고 미국에게 대항하던 세미놀 족과 크리크 족 그리고 탈주 흑인 노예들을 규합한 후 그들에게 무기를 나눠졌다. 그리고 상류로 이동하여 '프로스펙트 블러프 요새(Fort Prospect Bluff)'를 구축했다. 크리크 전쟁에서 활약했던 앤드루 잭슨이 이를 상대하는 임무를 맡았고 AD 1815년 1월 8일 뉴올리언스 전투(Battle of New Orleans)에서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패켄엄의 영국군 공격을 막아내며 오히려 큰 피해를 입히는 대승을 거뒀다.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앤드루 잭슨은 불과 71명(전사 13명, 부상 39명, 실종 및 포로 19명)의 피해로 영국군에게 총 2,037명(전사 291명, 부상 1,262명, 실종 및 포로 484)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총사령관인 에드워드 패컨엄도 전사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승리로 인해 앤드루 잭슨은 2월 27일 미국 의회의 감사 성명과 함께 금메달을 수여받으며 전 국가적인 영웅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그리고 뉴올리언스 전투의 압도적인 승리 덕분에 미국인들은 마치 자신들이 미영 전쟁의 승전국이 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동안 하트퍼드 회의를 통해 반전 여론을 주도하던 연방당이 돌의킬 수 없는 큰 타격을 받으며 정치적으로 몰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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