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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 런던 협약, 세미놀 전쟁, 플로리다 매입, 애덤스-오니스 조약, 헨리 클레이 아메리카 시스템, 자유주-노예주, 미주리 타협, 먼로 독트린

Jobs9 2021. 5. 1.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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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민주공화당)

 

AD 1816년 제임스 매디슨의 재선 임기의 만료도 다가오면서 미국은 새로운 대통령 선거에 돌입했다. 관례에 따라 제임스 매디슨이 3선 도전을 고사하면서 그의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역임하고 있던 제임스 먼로가 민주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고 뉴욕 주지사인 대니얼 톰킨이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이에 맞서서 연방당에서도 뉴욕의 상원의원인 루퍼스 킹을 대통령 후보로, 메릴랜드의 전(前) 상원의원인 존 이거 하워드를 부통령 후보로 각각 내세웠으나 이미 연방당은 하트퍼드 회의의 역풍으로 인해 인기가 폭락한 상태였기 때문에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결국 AD 1816년 11월 1일부터 12월 4일까지 진행된 대통령 선거에서 연방당은 19개 주 중에서 고작 3개 주(매사추세츠 주, 코네티컷 주, 델러웨어 주)에서 승리하고 나머지 16개 주를 모두 내어주는 참패를 당했다. 이에 따라 민주공화당의 제임스 먼로가 선거인단 총 217명 중 183명의 지지를 받아 미국의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성공했고 대니얼 톰킨이 부통령이 되었다. 참고로 제임스 먼로는 미국 독립 전쟁을 겪은 세대 중 미국의 마지막 대통령으로 일컬어지게 된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에서 참패한 연방당은 점차 소멸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화합의 시대

 

제임스 먼로가 대통령이 된 후 수입 관세 정책과 연방 은행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우선 미영 전쟁 동안 군수물자를 제공하기 위해서 늘어난 북부의 제조업자를 보호하기 위한 수입 관세 정책을 펼쳤다. 사실 관세 정책은 단순히 제조업자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수입 관세가 연방 정부의 주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군비 마련을 위해서 무분별하게 발행된 지폐로 인한 경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연방 은행의 설립을 추진했다. 이미 알렉산더 해밀턴에 의해 설립되었던 '미국 제1은행(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은 AD 1811년에 20년의 기한 만료로 해산되었기 때문에 AD 1817년 미국 제1은행과 동일하게 20년 기한의 '미국 제2은행(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을 설립하였다.

 

한편 제임스 먼로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연방당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면서 미국은 사실상 민주공화당이라는 단일 정당이 연방 정부와 의회를 장악하는 시기를 맞이했다. 연방당은 그동안 대통령 선거에서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에 이어서 제임스 먼로에게도 패배하면서 입지가 축소되었고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의 민주공화당 정부가 건국 초 연방당의 창당에 기여했던 알렉산더 해밀턴의 수입 관세 정책과 연방 은행 제도를 계승하면서 연방당과의 정책적 차별성도 사라졌다. 더욱이 연방당은 본래 연방 정부의 강력한 권한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미영 전쟁 당시에는 하트퍼드 회의를 통해서 분리 독립을 획책했다는 비난에 직면하면서 정계에서 더 이상 발붙이기가 힘들어졌다. 이렇게 제임스 먼로의 재임 기간 동안 민주공화당의 독주로 큰 정쟁이 없는 시기가 이어졌기 때문에 이를 '화합의 시대(Era of Good Feelings)'라고 부르게 된다.

 

 

초기 내각 구성

 

제임스 먼로는 초대 내각을 구성하면서 제임스 매디슨 재임 말기에 재무장관에 임명되었던 윌리엄 H.(해리스) 크로퍼드를 그대로 유임시켰고 메사추세츠 주의 벤자민 윌리엄스 크라우닌쉴드를 해군장관으로, 펜실베이니아 주의 리처드 러쉬를 법무장관으로 각각 임명했다. 그리고 매사추세츠 주의 존 퀸시 애덤스를 자신의 후임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아들이었지만 연방당이었던 아버지와 달리 AD 1807년부터 토머스 제퍼슨의 외교정책을 지원하면서 민주공화당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임스 먼로는 전쟁장관을 파격적으로 남부 출신으로 임명하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처음에 미영 전쟁의 전쟁 영웅인 테네시 주의 앤드루 잭슨을 기용하고자 했으나 거절을 당하자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존 C.(콜드웰) 칼훈을 임명했다. 또한 AD 1817년 리처드 러쉬가 영국 대사로 떠나게 되자 법무장관을 윌리엄 워트로 교체했다. 다만 AD 1818년 벤자민 윌리엄스 크라우닌쉴드가 사임하게 되는 해군장관직은 제임스 먼로의 첫 번째 대통령 임기 내내 공석으로 유지된다. 또한 제임스 먼로의 지역 안배 의도와 달리 서부 출신의 주요 인사는 참여하지 않게 된다.

 

 

캐나다와의 국경선 정리, 런던 협약의 체결

 

미국은 미영 전쟁 이후 불분병하게 남아 있던 북쪽의 영국령 식민지인 캐나다와의 국경을 확정짓기 위하여 AD 1818년 10월 20일 '런던 협약(London Convention)'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서 미국은 캐나다와의 국경을 우즈 호수(Lake of the Woods)의 북서쪽으로부터 스토니 산맥(Stony Mountains, 지금의 로키 산맥)에 이르는 북위 49도로 정하면서 프랑스로부터 매입했던 루이지애나의 북쪽 경계선을 확정했다. 또한 스토니 산맥 서쪽인 '오리건 컨트리(Oregon Country)'는 미국과 영국의 공동 관할로 정하였다. 오리건 컨트리는 지금의 오리건 주(State of Oregon)와 워싱턴 주(State of Washington), 아이다호 주(State of Idaho)를 모두 포함하는 지역으로 영국 및 캐나다에서는 '컬럼비아 지구(Columbia District)'로 불렀다. 다만 오리건 주의 소유권이 불분명하게 남았기 때문에 훗날 미국과 영국 사이의 '오리건 분쟁(Oregon Question)'을 야기하게 된다.

 

 

 

제1차 세미놀 전쟁과 플로리다 매입

 

제1차 세미놀 전쟁

 

플로리다는 영국 식민지이던 AD 1763년에 동(東) 플로리다와 서(西) 플로리다로 분할되었고 AD 1783년 스페인이 플로리다를 되찾은 후에도 구분이 이어졌다. 그런데 AD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이 이루어진 후 경계가 불분명하여 스페인 식민지로 남아있던 플로리다와 잦은 국경 분쟁이 일어났다. 특히 플로리다에는 이미 미국인들이 대거 이주한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스페인에게 플로리다를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지속적으로 전달하였으나 스페인은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AD 1810년 서(西) 플로리다의 미국인들이 스페인의 지배에 반란을 일으키자 미국의 재임스 매디슨은 서(西) 플로리다를 미국 영토로 병합해 버렸고 이어서 동(東) 플로리다까지 무력 점령을 노렸지만 미영 전쟁이 임박하면서 무산되었다. 

 

한편 흑인 노예들이 종종 자유를 찾아 스페인 식민지인 동(東) 플로리다로 도망치곤 했다. 또한 미영 전쟁이 종식되었을 때 스페인령 서(西) 플로리다에 주둔 중이던 영국 해군의 에드워드 니콜스가 떠나면서 탈주 노예들에게 요새를 넘겼다. 그리고 탈주 노예들이 계속해서 이 곳으로 유입되면서 일명 '니그로 요새(Negro Fort)'로 불릴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크리크 전쟁과 미영 전쟁의 영웅이 되었던 앤드루 잭슨은 니그로 요새를 견제하기 위해서 부하 장군인 에드먼드 게인즈에게 '스코트 요새(Fort Scott)'를 건설하도록 했다. 그리고 에드먼드 게인즈는 스페인령에 위치한 니그로 요새를 공격할 명분을 얻기 위해서 보급선을 의도적으로 애팔래치콜라 강을 통해 니그로 요새 근처를 지나가도록 하여 그들의 공격을 유도했다. 이것이 적중하면서 AD 1816년 7월 보급선이 니그로 요새의 공격을 받자 그대로 응전하여 니그로 요새를 파괴했다.

 

AD 1817년 조지아 남부의 정착인들과 스페인령 플로리다의 세미놀 족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서로 마을을 습격하여 학살을 자행하고 가축을 빼앗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AD 1817년 11월 스코트 요새의 에드먼드 게인즈는 포트 잭슨 조약의 이행을 거절하는 크리크 족의 일파인 미카즈키(Mikasuki) 부족의 추장인 네아마스라를 체포하기 위해서 미카즈키 부족이 살고 있던 조지아 주 남서부의 파울타운(Fowltown)을 공격했다. 이렇게 플로리다 국경 부근에서 미국과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던 중 스코트 요새의 보급선이 애팔래치콜라 강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습격을 받아 대대적으로 살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를 응징하기 위해서 AD 1818년 3월 앤드루 잭슨이 스코트 요새에 병력을 집결시킨 후 스페인령 플로리다(동(東) 플로리다)로 진격하여 세미놀 족들과 도망 흑인 노예들의 마을을 대대적으로 파괴했다.

 

크리크 전쟁과 마찬가지로 앤드루 잭슨은 이번에도 여자 아이를 먼저 죽이고 마을과 농작물을 모두 불태우는 잔인함을 보여주었다. 앤드루 잭슨의 공격을 피해 도망친 흑인 중에는 마찬가지의 처지인 세미놀 족과 융화되어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습득하고 결혼까지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은 '블랙 세미놀(Black Seminoles)'로 불리며 세미놀 족의 주요 지도자로 부상했다. 이러한 스페인령 플로리다 공격은 국제법 위반이었지만 앤드루 잭슨은 영국과 스페인이 은밀하게 세미놀 족을 지원하고 있다는 편지를 증거로 발견했다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그리고 세인트 막스(St. Marks)의 스페인 요새를 점령한 후 군사 재판을 열어 세미놀 족을 지원한 혐의로 자칭 영국 대리인을 주장하던 로버트 암브리스터와 스코틀랜드 무역업자인 알렉산더 조지 아버스노트를 처형시켰다. 또한 AD 1818년 5월 스페인령 플로리다의 주도인 펜서콜라까지 점령하였다.

 

 

 

플로리다 매입

 

비록 앤드루 잭슨의 스페인령 플로리다 공격과 2명의 영국인 처형은 문제의 소지가 많았지만 스페인 측의 저항이 너무도 허약했기 때문에 미국은 이번 기회에 플로리다를 완전히 차지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국무장관인 존 퀸시 애덤스가 스페인과 협상을 벌여 이전의 서(西) 플로리다 점령에 대해 사과하고 이번의 앤드루 잭슨의 스페인령 플로리다 공격이 미국 연방 정부의 공식적인 승인 사항이 아니었다고 변명하였다. 존 퀸시 애덤스는 일단 앤드루 잭슨이 점령했던 세인트 막스와 펜서콜라를 반환한 후 플로리다에 대한 공식적인 매매를 제안했다.

 

결국 스페인 정부는 더 이상 무력으로는 동(東) 플로리다를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명예스럽게 빼앗기느니 차라리 적당한 가격에 매각하는 것에 합의했다. AD 1821년 미국의 존 퀸시 애덤스와 스페인 외무장관 루이스 데 오니스 사이에 '애덤스-오니스 조약(Adams–Onís Treaty)'을 통하여 플로리다 매매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미국은 총 500만 달러의 보상금을 지불하고 플로리다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앤드루 잭슨이 잠시 군정 지사로 임명되었으나 AD 1822년이 되자 '플로리다 '준주(Florida Territory)'로 정식 인정받았기 때문에 앤드루 잭슨은 테네시 주로 돌아갔다.

 

 

헨리 클레이의 아메리카 시스템 추진

 

제임스 먼로의 재임기에는 AD 1815년부터 주창되었던 중상주의 경제 계획인 이른바 '아메리카 시스템(American System)'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기본적으로 아메리카 시스템은 건국 초기의 경제 정책을 수립했던 알렉산더 해밀턴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었다. 즉 미국 북부의 제조업 보호 및 연방 정부의 안정적인 수입원 유지를 위해 고율의 수입 관세를 유지하는 것과 통화 안정 및 상업 장려를 위한 연방 은행의 유지, 그리고 새로운 시장 개척을 위해 서부로 향하는 도로 및 운하의 건설이 골자였다. 비록 제임스 먼로는 미국 헌법에서 부여된 연방 정부의 권한을 넘어서는 것은 아닌 지를 우려하여 아메리카 시스템에 회의적이었지만 서부의 켄터키 주의 출신이자 하원대표를 3번(AD 1811년 ~ AD 1814년, AD 1815년 ~ AD 1820년, AD 1823년 ~ AD 1825년)이나 역임하게 되는 헨리 클레이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헨리 클레이는 아메리카 시스템에 회의적인 제임스 먼로를 설득하고 의회의 주도로 적극적으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자유주-노예주의 대립과 미주리 타협

 

미국은 독립 당시에 각 주의 자체 판단으로 노예제 존속 여부를 결정하도록 맡겼지만 루이지애나 매입 이후 미국의 영토가 폭발적으로 확대되면서 신규로 승격되는 주가 노예제를 유지할 지의 여부가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그 사이에도 연방의 주로 가입하는 지역이 계속해서 늘어나면서 AD 1817년 '미시시피 준주(Mississippi Territory)'가 미국의 20번째 주 '미시시피 주(state of Mississippi)'와 '앨라배마 준주(Alabama Territory)'로 나뉘었고 AD 1818년 '일리노이 준주(Illinois Territory)'가 21번째 '일리노이 주(state of Illinois)'로 승격됐으며 AD 1819년 앨라배마 준주도 미국의 22번째인 '앨라배마 주(state of Alabama)'가 되었다. 이를 통해서 22개 중 정확히 절반인 11개 주가 노예제를 인정하는 '노예주(Slave State)'가 되었고 나머지 절반인 11개 주가 노예제를 부정하는 '자유주(Free State)'가 되었다. 

 

미국의 연방 의회 중 인구수로 의석수가 배정된 하원은 자유주가 장악하고 있었지만 각 주별로 동일한 의석수로 구성된 상원은 동률을 이루게 되면서 노예주도 자유주를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런데 AD 1817년 미주리 준주가 처음으로 주 승격을 요청했을 때 노예제를 그대로 존속하려 했기 때문에 노예주와 자유주 간의 세력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하여 자유주에서 미주리의 노예제 폐지를 요구하고 나섰고 뉴욕 주의 하원의원 제임스 탤미즈가 미주리를 주로 승격시키는 법률에 점진적인 노예제 폐지 정책을 추가시켰다. 즉 미주리의 추가적인 노예 유입을 금지시키고 기존 노예들도 25세가 되면 해방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이 수정안이 자유주가 장악한 하원은 통과했으나 의석수가 동률인 상원에서는 부결되었다.

 

이렇게 미주리의 주 승격과 노예제 허용 여부를 둘러싸고 자유주와 노예주 간의 대립이 이어지던 중 AD 1819년 12월 매사추세츠 주 북부의 메인 지구도 주 승격을 요청했다. 이에 하원대표인 헨리 클레이의 중재에 따라 메인은 자유주로, 미주리는 노예주로 승격시켜 자유주와 노예주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시키자는 타협안이 도출되었다. 그리고 미주리를 제외한 나머지 준주의 경우 북위 36도 30분을 기준으로 북쪽에서는 노예제를 금지시키고 남쪽에서만 허용하는 수정안도 첨가됐다. 이에 따라 AD 1820년 '메인 주(State of Maine)'가 미국의 23번째 주가 되고 AD 1821년 '미주리 주(State of Missouri)'가 24번째 주로 연방 정부에 가입하였는데 이를 '미주리 타협(Missouri Compromise)'이라고 부른다. 비록 미주리 타협으로 자유주와 노예주 간의 극한 대립은 해소되는 듯 했지만 사실 미봉책에 불과했고 노예제를 둘러싼 분열의 불씨는 여전히 미국 내에 잠재적인 문제로 남게 된다.

 

 

제임스 먼로의 대통령 재선과 먼로 독트린

 

대통령 재선

 

미주리 타협이 이루어진 AD 1820년에는 제임스 먼로의 첫 번째 대통령 임기도 만료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대통령 선거가 치뤄졌다. 그러나 이제 와해 수준이 된 연방당에서 대통령 후보를 내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민주공화당은 현직 대통령과 부통령인 제임스 먼로와 대니얼 톰킨을 각각 그대로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그리고 제임스 먼로는 제대로 된 반대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으로 재선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총 231명의 선거인단 중 단 1명이 존 퀸시 애덤스에게 투표하면서 조지 워싱턴의 만장일치 득표 기록을 재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또한 대니얼 톰킨도 총 215명의 선거인단 득표를 통해 무난하게 다시 한번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먼로 독트린

 

한편 이 당시 스페인 식민지였던 라틴 아메리카 대륙은 스페인 본국이 나폴레옹 전쟁의 혼란에 빠진 틈을 타고 저마다 독립한 상태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이 종식되고 승전국 사이에서 유럽 질서를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이전으로 되돌린다는 '빈 체제(Vienna system)'가 성립하면서 스페인이 라틴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되찾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스페인은 쿠바를 프랑스에게 넘기는 대신에 나머지 라틴 아메리카 대륙의 재식민지화에 도움을 얻으려 하고 있었다. 이에 라틴 아메리카 대륙이 새로운 시장으로 남기를 원하는 영국의 외무장관인 조지 캐닝이 미국에게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식민지화에 반대하는 공동 성명을 제안했다. 비록 제임스 먼로가 이 제안에 호의적이었고 그가 자문을 구한 국가 원로인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도 찬성했지만 국무장관인 존 퀸시 애덤스는 영국의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독점까지 견제할 수 있도록 미국이 독자적인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고 제임스 먼로를 설득했다. 

 

이에 따라 제임스 먼로는 AD 1823년 12월 2일 의회 연두교서에서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유럽 대륙의 불간섭을 선언한 이른바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발표하였다. 그동안 미국은 유럽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 고립주의 외교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는데 먼로 독트린에서는 이를 아메리카 대륙 전체로 확대하여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대륙이 서로 별개의 지역으로 남아야 하며 유럽의 국가가 이를 무시한다면 미국의 적대국이 될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사실 먼로 독트린은 상징적인 선언일 뿐 발표 당시에는 미국의 군사력이 매우 허약하여 이를 지킬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을 보유하지 못했고 실질적으로는 라틴 아메리카 대륙이 영국 해군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의 어떤 국가도 먼로 독트린을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미국의 국력이 향상되면서 라틴 아메리카 대륙으로 영향력을 확대할 때 먼로 독트린은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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