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민주공화당)의 재임기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의 제3대 대통령으로써 임기를 시작했을 때 공식적으로는 무소속이지만 친(親) 연방당 선향을 보이던 조지 워싱턴이 이미 AD 1799년 12월 14일 사망한 상태였다. 그리고 연방당 내에서 영향력이 큰 존 애덤스는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후 고향인 브레인트리로 은거하였고 연방당의 또 다른 정신적 지주인 존 제이도 은퇴했기 때문에 연방당의 구심점이 사라진 상태였다. 더욱이 AD 1800년 4월 29일부터 AD 1801년 8월 1일까지 진행된 제7대 하원 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이 승리하면서 총 106석 중 68석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토머스 제퍼슨은 자신의 의지대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다만 토머스 제퍼슨이 대통령 당선 과정에서 연방당의 다른 중추 인물인 알렉산더 해밀턴에게 정치적인 빚을 졌기 때문에 그의 정책을 일부 받아들였으나 부통령인 애런 버와는 같은 민주공화당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거리를 두었다.
AD 1801년 3월 주요 장관직에 민주공화당원을 임명하면서 국무장관에 자신의 정치적 동지이자 같은 버지니아 주 출신인 제임스 매디슨을 임명하였고 법무장관에 메사추세츠 주의 하원 의원 출신의 변호사인 레비 링컨을 임명했으나 제임스 매디슨이 워싱턴에 없었기 때문에 그가 도착한 5월 2일까지 레비 링컨이 국무장관 대행을 겸직했다. 그리고 재무장관도 존 애덤스 시절의 새무엘 덱스터를 잠시 유임시킨 뒤 5월 14일 스위스 출신으로 펜실베이니아 주의 하원 의원을 역임하며 민주공화당의 재정 정책을 담당했던 앨버트 갤러틴으로 교체했다. 그 밖에 전쟁장관에는 조지 워싱턴 휘하에서 미국 독립 전쟁을 치른 바 있었던 헨리 디어본을 임명했고 해군장관은 벤자민 스토더트가 AD 1801년 3월 사임하자 잠시 공석이 된 끝에 7월 27일 매릴랜드 주의 하원 의원 출신의 로버트 스미스를 임명했다.
제퍼슨 민주주의 추진
토머스 제퍼슨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존 애덤스 정부에서 추진한 많은 정책을 뒤엎고 평소에 생각하던 정책들을 차례차례 추진하기 시작했다. 특히 토머스 제퍼슨이 추구한 민주주의 정책은 역사학자들에 의해 '제퍼슨 민주주의(Jeffersonian democracy)'라고 불리게 된다. 제퍼슨 민주주의는 공화제의 원칙 준수, 시민의 의무로서의 투표 독려, 특권 계급 및 귀족들의 정치적 부패 반대, 개인의 자유 보장, 언론 및 표현의 자유 보장, 정교 분리, 농업주의, 주 정부에 대한 연방 정부의 권한 제한 등으로 대표되며 미국 초기 민주주의의 중요한 이념적 배경이 된다. 이후 토머스 제퍼슨은 우선 헌법 위반과 인권 침혜의 소지가 다분하여 그동안 악법이라고 비난했던 외국인 규제법과 보안법이 2년 간의 효력 기간이 끝나자 곧바로 폐지했다. 그리고 외국인 규제법과 보안법에 의해 기소를 당한 11명 중 공판 대기 중에 사망한 1명을 제외한 나머지 10명의 피고인들이 연방주의 성향의 판사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토머스 제퍼슨은 이들을 모두 사면했다.
사법부와의 대결
한편 존 애덤스가 연방주의 성향의 판사들을 대거 임명하기 위하여 '심야 판사법(Midnight Judges Act)'을 통과시키고 자신의 대통령 임기 종료일 전날 밤에 16명의 지방 판사를 임명한 것을 무력화 시키고자 했다. 비록 이것이 판사의 경우 탄핵을 받지 않는 한 임기를 보장한다는 헌법 규정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야기했지만 토머스 제퍼슨은 존 애덤스에 의해 탄생한 이른바 '심야 판사(Midnight Judges)'들을 임명은 하되 그들이 부임할 지방 법원은 폐지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다만 토머스 제퍼슨조차도 존 애덤스가 연방주의 성향의 존 마셜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한 것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또한 AD 1804년 지역 판사인 존 핑커링이 미친 행동을 보이고 공공 장소에서 음주를 하였다는 의미로 탄핵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연방 대법관인 새뮤얼 체이스에 대해서는 다음에서 상원에서 탄핵이 기각되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연방 대법관 탄핵 사건이 된 새뮤얼 체이스에 대한 탄핵은 토머스 제퍼슨의 패배로 끝났고 미국에서 행정부의 권력에 맞서서 사법부의 독립이 유지되는 중요한 계기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재정 및 군사 정책
토머스 제퍼슨은 알렉산더 해밀턴과의 공조를 위해서 그가 추진했던 미국 제1은행은 존속시켰고 관세 정책도 이어갔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토머스 제퍼슨은 평소에 연방 정부의 권한 최소화를 주장하는 반(反) 연방주의자였고 위스키 반란을 야기했던 이전 정권의 지나친 과세 정책을 반대했기 때문에 재무장관인 앨버트 갤러틴과 함께 직접 과세 대신에 관세 수입으로만 연방 정부의 재정을 채우기로 했다. 처음에는 이것이 성공적으로 보였지만 나중에 유럽 내에서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 AD 1803년 ~ AD 1815년)이 발발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재개하자 미국이 무역에 타격을 입게 되면서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또한 토머스 제퍼슨은 상비군을 군주제의 잔재로 여겼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존 애덤스 정부 당시에 증원시켰던 해군의 규모를 다시 줄였다. 비록 연방주의자들이 국가의 안보를 취약하게 만드는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공격했지만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독립 전쟁과 같이 민병대들이 스스로 일어나 국가를 지켜낼 것이라며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켰다. 다만 자칫 잘못하면 오합지졸이 될 수 있는 민병대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장교의 육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AD 1802년 7월 4일 뉴욕 주의 웨스트포인트에 5명의 교관과 10명의 생도로 '육군 사관학교(Military Academy)'를 설립했는데 이는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라는 별칭으로 유명해진다.
제1차 바르바리 전쟁
미국 초기 북아프리카 바르바리 해적에 대한 유화책
북아프리카 일대는 공식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지만 사실상 반(半) 독립 상태에 있었는데 북아프리카의 알제, 튀니스, 트리폴리를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던 이른바 '바르바리(Barbary)'라고 불리는 이슬람 해적들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상선을 공격하곤 했다. 비록 미국 상선들은 식민지 시절에는 영국 해군의 보호를 받았지만 AD 1776년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이후에는 그러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만 AD 1778년 동맹 조약에 따라 독립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AD 1783년의 '파리 조약(Treaty of Paris)'이 체결될 때까지는 프랑스 해군이 영국 해군의 공격으로부터 미국 상선을 보호하면서 바르바리 해적의 공격도 함께 막아주었을 뿐이었다.
이후 미국 상선이 다시 바르바리 해적의 위협에 노출되자 아직 정식 미국 정부가 출범하기 이전인 상태에서 AD 1786년 3월 토머스 제퍼슨이 존 애덤스와 함께 미국의 대표로 영국의 런던으로 향하여 트리폴리의 특사인 시디 하지 압둘 라만 아드자와 협상을 벌였다. 그리고 미국 상선의 안전한 통행과 인질의 무사 귀환을 약속받는 대신에 매년 공물을 지불하라는 요구 조건을 가지고 귀국했다. 비록 토머스 제퍼슨은 공물 제공에 반대했지만 존 애덤스는 이제 막 독립한 미국으로서는 적절한 해군력을 확보할 때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미국은 15년 동안 바르바리 해적 국가들에게 매년 1백만 달러의 공물을 보내야 했는데 이는 당시 미국 정부 연간 수입의 약 1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제1차 바르바리 전쟁의 승리
이후 AD 1794년에 미국 해군이 창설되었고 AD 1801년 토머스 제퍼슨은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바르바리 해적에 대한 단호한 대처를 선언하며 트리폴리의 총독인 유수프 카라만리가 225,000달러의 공물을 요구하자 거절했다. 그러자 유수프 카라만리는 공식적인 선전포고가 아니라 미국 공관 앞에서 미국 국기를 자르는 자신들의 전통적인 행위를 통해서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자 토머스 제퍼슨도 의회의 승인을 받아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 해군을 대서양을 건너도록 하였고 트리폴리에 대한 해상봉쇄를 통하여 미국 상선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이른바 '제1차 바르바리 전쟁(First Barbary War)'을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 해군이 AD 1800년부터 미국과 별도로 바르바리 해적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스웨덴 해군과도 합류하였다.
비록 미국 해군은 USS 필라델피아 호(USS Philadelphia)가 AD 1803년 10월 31일 튀니지 해안에서 좌초되어 트리폴리의 바르바리 해적에게 나포되는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AD 1804년 2월 스티븐 디케이터가 트리폴리를 야습하여 USS 필라델피아 호가 바르바리 해적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나폴리 왕국의 페르디난트 3세로부터 군함과 선원을 빌렸고 미국 해군은 트리폴리에 대해 총 5차례를 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또한 외교적으로 알제와 튀니스가 트리폴리를 지원하지 못하도로 차단했고 전(前) 튀니스 영사인 윌리엄 이턴에 의해 유수프 카라만리의 형인 하메트 카라만리를 앞세워 트리폴리의 유수프 카라만리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시도했다.
마침내 윌리엄 이턴이 미국 해병대 8명과 용병 4~5백명을 이끌고 하메트 카라만리와 함께 리비아 동부로 향하여 AD 1805년 5월 데르나 전투(Battle of Derna)에서 승리를 거두고 데르나 항구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데르나 전투는 미군이 해외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로 기록되었다. 이렇게 자신의 턱 밑까지 미국의 위협이 다가오자 트리폴리의 유수프 카라만리가 더이상 버티지 못하면서 AD 1805년 6월 10일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를 통해 미국은 나포된 포로의 석방금으로 6만 달러를 지불하는 대신에 별도의 공물 지급없이도 지중해의 안전한 항해를 보장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