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5년(고종 12) 고려에 왔던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피살당한 사건.
강동성(江東城)의 전역(戰役)이 끝난 뒤 몽고는 고려에 대해 큰 은혜라도 베푼 듯이 해마다 동진국(東眞國)을 경유해서 사절을 파견하여 과중한 공물을 요구해 왔다. 특히, 저고여는 1221년과 1224년 두 차례에 걸쳐 고려에 파견되어 무례한 행동으로 공물을 요구하였다.
한편, 몽고에 굴복했던 동진의 만노(萬奴)는 이때 서역지방으로 원정을 나선 칭기즈 칸[成吉思汗]의 소식이 막연함을 호기로 삼아 몽고와의 국교를 단절하였다. 그리고 1224년 정월 고려에 사신을 보내와 이 사실을 통고하는 동시에 각기 각장(榷場)주 01)을 설치하여 무역을 하자고 요청해 왔다.
이에 고려는 몽고를 배반한 만노를 가까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멀리하기도 어려운 난처한 입장에 처하여, 일단 몽고와 동진 두 나라와 통교를 계속하면서 정세를 관망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마침 1224년 11월에 공물을 요구하러 온 저고여가 1225년 정월 함신진(咸新鎭)주 02)을 거쳐 본국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압록강가에서 피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고려는 지극히 중대한 외교적 위기에 부닥쳤다. 범행은 횡포한 몽고사신에 분노한 고려사람의 소행일 수도 있고, 고려와 몽고의 외교적 분쟁을 희망하는 금나라나 동진의 모략적 음모일 수도 있었다.
이들은 고려와 몽고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그들이 고려 영토를 침범할 때에도 몽고 사람의 복장을 하여 몽고의 소행인 것처럼 가장하였다. 또, 몽고 사신이 고려에 들어올 때에는 통로를 가로막으며 고려사람의 복장을 하고 종종 습격을 가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에서는 저고여피살사건을 금나라 도둑의 소행이라 주장하고 이 사실을 몽고에 통보하였다. 그러나 몽고는 고려와 국교를 단절하였으며, 후일 이 사건을 고려에 대한 침입의 구실로 삼았다.
이 사건은 몽고 침입의 직접적 동기가 되었으나, 고려에 대한 몽고의 출병은 몽고가 아시아 제압의 일환으로 미리 계획해 둔 군사행동을 단행한 데 실천에 불과하였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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