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 항거 자살한 사건.
전태일은 1965년부터 서울 평화시장에서 시다, 재단사 등으로 일하면서, 시다를 비롯한 여공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 침해를 체험하였다. 1969년 평화시장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고 열악한 노동조건과 근로기준법 위반에 관한 설문조사를 하여 노동청에 진정을 하였지만, 노동자들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69년 9월부터 1970년 4월까지 건축 노동자로 일하다가, 19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삼동친목회’를 조직하였다. 그와 동료들은 평화시장의 노동조건 실태 설문 조사를 하여 정부, 언론 등에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노동조건은 개선되지 않았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을 비롯한 삼동회 회원들이 피켓시위를 벌이려다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 당하게 되자 전태일은 휘발유로 자신의 몸을 적시고 불을 붙여 분신 항거하였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쓰러졌다. 한 회원이 불길 속에 근로기준법 책을 집어 던져 예정했던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완수하였다. 그의 분신 항거는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가족과 동료 노동자들 모르게 준비한 것이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언론은 노동문제를 특집 기사로 다루고, 종교계, 대학생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추모집회, 철야농성이 이어졌다.
의의와 평가
전태일의 분신 항거 자살을 계기로 평화시장에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가 결성될 수 있었으며,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전태일의 유언에 따라 2011년 현재까지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또한 전태일의 분신 항거는 정부의 산업화과정에서 희생당하던 노동자의 삶이 사회문제로 크게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84년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85년 전태일기념관이 개관하였다. 전태일재단에서는 ‘전태일문학상’, ‘전태일노동상’을 시상하고 있다. 1988년 11월 전태일 정신을 기리기 위한 ‘전태일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 대회’가 개최되면서 매년 11월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리고 있다.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는 전태일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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