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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 실크로드, 흉노, 한, 서역

Jobs 9 2021. 3. 12.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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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張騫, ? ~ 기원전 114년)



자는 자문(子文)이며 지금의 산시 성 성고현 사람으로 기원 전 2세기 중국 한나라 때 여행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탁월한 탐험으로 실크로드의 개척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한나라 때 서역으로 가는 남북의 도로를 개척하였으며, 서역의 한혈마, 포도, 석류, 복숭아 등의 물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장건이 서역으로 떠난 이유

 

기원전 139년 한나라 건원 4년, 당시 한나라는 변방을 어지럽히는 흉노에 대항하기 위해 대월지에 대한 동맹을 맺으려 사자를 모집하였다. 장건이 지원을 해서 지원자 100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서역으로 가서 대월지국으로 향하였다.

 

이전에 대월지는 월지라고 불리었는데, 흉노의 묵돌 선우와 그 아들 노상 선우에게 패한 후, 서쪽으로 옮겨 이름을 대월지로 바꾸었다.

 

특히 노상 선우는 월지 왕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으므로, 월지는 흉노를 원망하고 있었고, 한나라는 흉노 서방의 대월지와의 협공을 위해 장건을 대월지로 파견한다.

 

10년간의 포로 생활

 

둔황 막고굴 제323굴 북벽의 장건출사서역도, 당나라 초기(618~714년

당시 서역 지방은 흉노의 세력권이었으므로, 장건이 한의 세력권인 감숙성으로 나가자마자 흉노에게 잡히고 만다. 흉노의 군신 선우는 장건이 대월지로 가는 사자임을 알아채고, “월씨는 우리들의 북쪽에 있다. 어떻게 한이 그곳에 사자를 보낼 수 있는가? 만약 내가 한의 남쪽 월나라에 사자를 보낸다면 한은 그것을 허용할까?”라고 말하며, 장건을 십여 년동안 구류하였다. 흉노에서 장건은 처도 얻고 그 사이에 아이도 낳았지만, 한나라의 사자로서의 임무를 잊지 않았다.

 

그 후 흉노의 땅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흉노 서쪽에 있는 대완에 이르렀다. 대완은 익히 한나라의 강성함을 알고 있었기에 장건을 환대하고 대월지까지 길을 안내해 주었다.

 

대월지는 흉노에게 패배한 연후에, 오손에 쫓겨서 더욱 서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장건은 강거로 들린 후에 드디어 대월지에 도착하였다.

 

장건은 흉노와의 원수 지간인 월지의 왕에게 한과의 동맹을 설명하였지만, 월지 왕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월지는 새로운 땅에 정착하여 풍부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동쪽으로 돌아가 흉노와 싸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흉노에 대한 복수심은 이미 과거의 일이었다.

 

귀향과 흉노 원정

 

실의에 빠진 장건은 귀향 노선을 곤륜산맥을 타서, 강 일족의 지배지를 통과하는 것을 선택했지만, 또 다시 흉노에게 붙잡힌다. 일 년 남짓 지나 군신 선우가 사망한 틈을 타서 탈출, 기원전 126년에 마침 한나라로 귀환했다. 출발할 때에 100명 남짓 있던 수행원은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동맹은 성립되지 않았지만, 장건이 가지고 돌아온 서역에 대한 지식은 지극히 귀중한 것이었고, 그때까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서역의 사정을 듣고, 한은 새로운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이 공로에 의해 장건은 태중대부가 된다.

 

기원 전 123년, 무제는 대장군 위청으로 하여금 흉노 정벌 원정군을 출발시킨다. 여기서 장건은 경험과 지리 지식을 활용하여 크게 공헌하였고, 위위박망후로 제수 받게 된다. 그러나 기원전 121년의 원정에서 기일을 맞추지 못한 것을 문책 받아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천산남로

 

장건이 서역을 여행하는 도중에 촉(사천) 명산의 대나무와 옷감을 현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묻자, 인도의 상인으로부터 샀다고 했다. 이것에 의해 촉으로부터 윈난 → 미얀마를 통하는 인도로 연결된 루트가 있는 것을 알고서, 장건은 무제에게 윈난을 한에 복속시키라는 건의를 몇 번이나 한다. 이 루트를 통하여 서역으로 연결된 루트를 개척한다.

 

한나라는 흉노에 대항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오손과의 동맹을 생각하고 기원 전 119년에 장건을 오손의 사자로 보낸다.

 

사망

 

기원 전 114년, 사망. 사후에 장건이 제시했던 계략이 서서히 열매를 맺고 시작하고, 서역 여러 나라는 한과 교역을 하게 되었고, 한은 흉노에 대해 유리한 입장을 가지게 된다.

 

선우(중국어 정체: 單于, 병음: Chányú, Shanyu)

 

흉노제국의 황제를 나타내는 말이다. 선우 밑에 여러 명의 왕을 두었는데, 이 왕은 평화 시에는 번왕이나 제후로서 다스리고 전쟁 시에는 장군으로서 싸웠다.

 

선우는 왕중왕 즉 중국의 천자 또는 황제에 해당하는 흉노제국의 대 군주이다. 한서 흉노전에 의하면 선우라는 호칭은 탱리고도선우의 약칭으로, 탱리는 하늘, 고도는 아들, 선우는 광대함을 뜻한다. 즉, '위대한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는 흉노가 강성하던 진나라, 한나라 시대 이래로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군주를 천자, 즉 하늘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것과 비슷하다.

 

역대 선우 중 가장 큰 업적을 세운 선우는 묵돌 선우(冒顿, 모돈 선우라고도 한다)이다. 흉노는 묵돌 선우 시기에 남쪽으로는 중국 한나라 고조(유방)의 군대를 격파하고 항복을 받아내어 매년 왕비와 공물을 받았으며, 동쪽으로는 동호를 격파하였고, 서쪽으로는 월지국을 토벌하여, 동서에 이르는 광대한 흉노제국을 건설하였다.

 

선우는 흉노의 지배 가문인 연제씨에서 나왔다. 초기에는 장자 계승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이치사 선우가 조카를 대신해 계승한 이후로는 장자 계승의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장건의 실크로드



세상 일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장건은 강성한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서 서역에 월지국과 교류하려는 외교책으로 시작했지만 교류가 시작되면서 실크로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고 더 크게 교류가 시작되면서 실크로드가 활성화 됩니다.

 

진시황제로 시작한 북쪽의 이방인들을 막기 위한 만리장성은 1700년이 지속됩니다. 중국의 왕조는 대대로 북쪽 이방인들의 침략에 대비하게 됩니다. 한나라에서는 흉노족에게 당나라에서는 토번국 (티벳)에게 조공을 바칩니다.

 

당나라에 이르러서 실크로드는 당나라 수도 시안을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어 줍니다. 교역도 활발했고 서역과 멀리는 인도와 로마까지 문화를 주고 받았다고 합니다.

 

비단길(緋緞路) 또는 실크로드(Silk Road)

 

육상, 또는 해상을 통한 근대 이전의 동서 교역로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동,서라 함은 중국과 유럽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비단길이라는 언어의 기원 자체가 중국의 비단이 로마 제국으로 흘러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단길은 역사를 통해서 더 다양한 교역품들을 전달하는 통로로 확대되었고, 더 나아가 문화가 유통되는 통로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 중국 역사학, 교류사, 그리고 중앙아시아사에서 비단길 연구가 가지는 입지는 크다.

 

비단길은 단순히 동서를 잇는 횡단축으로 생각되어 왔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남북의 여러 통로를 포함해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한 하나의 거대한 교통망으로 보아야 하며, 이에 따라서 비단길의 개념 또한 확대되게 된다. 비단길은 3대 간선과 5대 지선을 비롯해 수만 갈래의 길로 구성되어 있는 범세계적인 그물 모양의 교통로이다.

 

비단길의 역사적 전개

 

1세기경의 비단길

중국 비단의 로마로의 무역

소그드인 상인-중앙아시아인 상인

당 제국과 비단길 무역

호선무(胡旋舞)

불교의 전래, 간다라 미술

몽골 세계제국과 비단길의 확대

동남아시아와 해상 비단길

2015년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에 의해 철도, 항로 등 신(新) 비단길이 건설중이다. 철로는 중국서부에서 스페인까지 연결된다.

 

3대 간선: 초원길, 오아시스길, 바닷길

 

초원길

 

중국 한나라 이전의 문명 교류의 주통로로 사용되었던 길이며, 유라시아 북방 초원 지대를 동서로 횡단하는 길이다. 서쪽의 끝인 카스피해 연안 혹은 발트해 남단으로부터 흑해의 동북편과 남러시아의 카스피해와 아랄해 연안을 지나 카자흐스탄과 알타이 산맥 이남의 준가리아 분지를 지나 몽골 고비 사막의 북단 오르혼 강 연안으로 이어진다. 이후 동남향으로 바꾸어 중국의 화북지방에 이르러 그 동쪽 끝에 이른다. 그러나 이길을 연장하여 한반도까지 연결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일찍이 문명 교류의 처음을 연 비너스상이 1만 년 전에 이 초원로를 따라 북방 유라시아 초원지대에 동서로 널리 전파된 것으로 짐작된다. 기원전 4천~3천년경에는 채도 문화가 이길을 거쳐 서아시아에서 중국 및 동아시아에 전파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이 길을 '채도의 길'이라고도 부른다. 서아시아에 기원을 둔 청동기나 로마의 유리도 이길을 따라 전파되었다.

 

일본 사학계의 기마민족설에서 말하는 고분문화기(3세기~5세기)의 기마문화도 초원로를 통하여 전달되었다고 여겨진다.

 

오아시스길

 

오아시스길이란 중앙아시아의 건조지대(사막)과 반사막에 점재하는 오아시스를 연결하여 동서로 뻗은 길을 일컫는다. 사막을 비롯한 건조 지대의 군데군데에 항상 물이 고여 있어 수목이 자라고 인간이 생활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오아시스다. 오아시스는 사막인들의 생활의 보금자리일 뿐만 아니라, 교역의 중심지로서 거기에서 문물이 집산되고 교통이 발달되어 왔다.

 

비단길 중에서 가장 심장부에 위치한 오아시스길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역사시대 전에는 초원로가 많이 이용되었으나 이후에는 오아시스길이 동서교류의 주요 통로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6세기부터 서아시아 지대에는 이미 상당히 발단된 교통로가 만들어졌으나, 파미르 고원이 장애가 되어 완성되고 있지 못하다가 기원전 138~126년 전한의 장건(張騫,~BC 114)이 파미르 고원을 지나 대월지에 이르는 길을 개척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길이 만들어졌다.

 

한서 서역전에는 남, 북 두 길의 노정을 밝히고 그 길위에 있는 주요 국가들의 중심지와 장안이나 서역도호부, 그리고 인근 국가들 간의 방위와 거리를 기록하고 있다.

 

바닷길

 

기원후 후한은 서아시아와의 교류에 관심을 나타냈고, 전성기에 접어든 로마제국이 남해로를 통한 도서 교역에 적극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로마의 시장에는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 각지의 명산물이 큰 인기를 끌었다. 1세기 중엽에 로마의 항해사였던 히파루스(Hipalus)가 아라비아인들로부터 인도양 계절풍의 비밀을 알아낸 후, 아테네로부터 홍해를 지나 인도양으로 향하는 직항로를 개척함으로써 로마의 동방 원거리 무역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비로소 중국에서 인도로 반출된 비단이 인도 서해안으로부터 해로로 로마에 운송되기 시작하였다. 3세기 중엽에는 로마의 배가 인도차이나나 광동성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카티가라(Kattigara)까지 항해하는 상선도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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